國共內戰
간체자: 国共内战,
번체자: 國共内戰
영어: Chinese Civil War

개요

국공 내전은 1927년 이후 중국 국민당[1]중국 공산당[2] 사이에 중국 재건을 두고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해방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구분

  • 제1차 국공 내전(1927년 ~ 1936년)
  • 제2차 국공 내전(1946년 ~ 1949년)

만주

  • 만주서 ‘사면초가’에 빠진 중공…기댈 곳은 북한뿐이었다[3]
주요문단 발췌
 8월11일, 팔로군 사령관 주더(朱德)가 6호 명령을 선포했다. “소련 홍군과 함께 중국과 조선 경내에 진입해라. 현재 중국 화북 지역에서 일본군과 작전중인 조선의용대무정(武亭)과 부사령관 박효삼(朴孝三), 박일우(朴一禹)는 부대를 이끌고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이동해라. 일본의 괴뢰인 만주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 인민을 조직해 조선 해방을 달성해라.”
 소련에 가 있던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88여단)은 이들보다 동작이 빨랐다. 영수로 추대한 젊고 패기왕성한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을 따라 평양에 입성해 38선 이북의 안방을 차지했다. 일부는 동북으로 이동해 ‘민주대동맹’을 결성했다. 국내에서 일본에 저항하던 민족 세력들은 무장투쟁으로 일관해온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에게 기가 죽었다.
 11월이 되자 국민당 대군이 동북으로 몰려들었다. 소련 홍군은 동북민주연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도시에서 나가라. 상부의 지시다. 철수하지 않으면 탱크로 밀어버리겠다.” 거의 명령조였다. “공산당 군대가 다른 나라의 공산당 군대를 탱크로 밀어버리겠다니, 말이 될 소리냐”고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북만주에서 승기를 굳힌 국민당 군은 창춘지린(길림)을 점령해 동남과 남북을 차단했다. 중공은 압록강변의 단둥(丹東)과 퉁화(通化)마저 국민당 쪽에 내줬다. 동북민주연군은 혼란에 빠졌다. 도망자가 속출했다. 동북민주연군은 동북에 와서 급조된 부대였다. 팔로군 출신은 앞에 말한 것처럼 10만여명에 불과했다. 비적, 아편 중독자, 만주국 경찰, 탈옥수 등이 섞여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5만여명이 투항하거나 중공이 파견한 간부를 살해하고 탈영했다.

남만 지역도 다르지 않았다. 자고 나면 8천여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둔화(敦化)의 경우는 8개 연대 중 조선족으로 구성된 1개 연대 외에 7개 연대가 국민당 쪽으로 넘어갔다. 동북민주연군은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그 넓은 만주 벌판에서 공급을 차단당한 중공은 남만의 부상병과 가족들, 전쟁물자 수송이 난관에 처했다. 기댈 곳은 단둥에서 투먼(圖們)까지 800㎞의 국경을 맞댄 북한밖에 없었다. 천윈은 베이징 칭화대학 경제학과 출신인 주리즈(朱理治)와 훗날 중국 해군사령관이 되는 샤오징광(蕭勁光)과 함께 마오쩌둥의 부탁 편지를 들고 평양으로 향했다. 김일성은 마오의 특사 두 사람을 김책의 집에 머물게 했다. 북한 쪽이 만주에 대한 물자수송로를 터주고 부상병과 간부 가족들을 돌봐달라는 천윈의 부탁을 그는 모두 들어줬다. 마오의 서신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전쟁에는 무기가 제일 중요하다. 아무리 사기가 높아도 사상 무장이 잘 돼 있어도 총과 실탄이 없으면 오합지졸이다.”

김일성은 알았다며 토를 달지 않았다.



결과

중국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하였다. 이후에도 1958년 진먼 포격전까지 하이난 섬 등 중국 대륙 부속 도서에서 양측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양안(兩岸) 사이에 정전(停戰)에 관한 공식 합의는 없었으나, 1979년 1월 1일 미·중 국교 정상화로 중국인민해방군이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을 멈춘 이후 사실상 정전 중이다.

  1.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630669.html 만주서 ‘사면초가’에 빠진 중공…기댈 곳은 북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