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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정보
| 그림 =
| 그림설명 = 1946년 당시의 [[우사 김규식|김규식]]
| 이름 = 김규식
| 국가4 = 미군정청
| 직책4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겸 상임위원장
| 수상4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장관4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후임4 = [[신익희]]
| 대통령4 = [[해리 S. 트루먼|해리 트루먼]] 미국 [[미국의 대통령 목록|대통령]]
| 사령관4 = [[존 하지|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 임기4 = 1946년 12월 12일 ~ 1947년 6월 3일
| 원래 이름 = 金奎植
| 임기 = 1920년 4월 10일 ~ 1920년 8월 27일
| 임기2 = 1920년 8월 27일 ~ 1920년 9월 8일
| 임기3 = 1920년 9월 8일 ~ 1921년 4월 29일
| 직책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료|임시정부 학무총장]]
| 대통령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전임 = [[이춘숙]] 대한 임정 학무총장 임시서리
| 대통령2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대통령3 =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 총리 =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 총리2 =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 총리3 =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br> [[이동녕]] 대한 임정 총리 권한대행 <br> [[이동녕]] 대한 임정 총리 임시서리
| 직책2 = 임시정부 학무장
| 직책3 = 임시정부 학무부장
| 후임3 = [[김인전]] 대한 임정 학무부장 직무대리
| 국가 = 대한민국
| 국가2 = 대한민국
| 국가3 = 대한민국
| 출생일 = {{출생일|1881|1|29}}
| 출생지 = [[조선]] [[경상남도|경상도]] [[동래군|동래도호부]]<ref group="주해">[[동래군|동래도호부]]는 아버지 [[김지성 (조선)|김지성]]의 집이 아니라 부임지였으므로 [[김지성 (조선)|김지성]]의 본집인 [[강원도]] [[홍천군|홍천]]을 고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ref>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만포시|만포진]]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50|12|10|1881|1|29}}<ref group="주해">1952년 사망설도 있다.</ref>
| 국적 = 대한민국
| 경력 = [[민족자유연맹]] 총재
| 별명 = 호(號)는 우사(尤史), 죽적(竹笛)<br /> '''변갑''', '''번개비'''라는 별명을 사용 <br /> 김성(金成), 중문(仲文), 일민(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이라는 가명을 사용
| 형제 = 형 김규찬
| 친인척 = 백부 [[김우성]], 사촌 김은식, 처제 [[김필례]], 당숙 [[김익남]], 친족 [[김관식 (목회자)|김관식]], 동서 [[최영욱]], 인척 [[서병호]], [[김필순]], [[김염]], [[김마리아]]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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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규식의 묘소.jpg|250픽셀|섬네일|오른쪽|평양의 애국열사릉(愛國烈士陵)<ref>[https://ko.wikipedia.org/wiki/%EC%95%A0%EA%B5%AD%EB%A0%AC%EC%82%AC%EB%A6%89 애국렬사릉] 위키백과</ref><ref>[https://www.google.com/maps/place/%EC%95%A0%EA%B5%AD%EB%A0%AC%EC%82%AC%EB%A6%89/@39.1385539,125.7275595,15z/data=!4m5!3m4!1s0x0:0x54a3fbe192743aa4!8m2!3d39.1385539!4d125.7275595 애국열사릉 위치] 구글 지도</ref>에 있는 김규식의 묘소. 그는 1881년 2월 28일생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1880년 12월 28일생은 오기로 보인다.]]'''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차 평양을 다녀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6.25]] 때 납북 당하여 1950년 12월 10일 북한의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작고했다.
[[파일:김규식의 묘소.jpg|250픽셀|섬네일|오른쪽|평양의 애국열사릉(愛國烈士陵)<ref>[https://ko.wikipedia.org/wiki/%EC%95%A0%EA%B5%AD%EB%A0%AC%EC%82%AC%EB%A6%89 애국렬사릉] 위키백과</ref><ref>[https://www.google.com/maps/place/%EC%95%A0%EA%B5%AD%EB%A0%AC%EC%82%AC%EB%A6%89/@39.1385539,125.7275595,15z/data=!4m5!3m4!1s0x0:0x54a3fbe192743aa4!8m2!3d39.1385539!4d125.7275595 애국열사릉 위치] 구글 지도</ref>에 있는 김규식의 묘소. 그는 1881년 2월 28일생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1880년 12월 28일생은 오기로 보인다.]]'''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차 평양을 다녀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6.25]] 때 납북 당하여 1950년 12월 10일 북한의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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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규식이 극동민족대회에서 행한 연설 내용은 아래 기사에 있다.
당시 김규식이 극동민족대회에서 행한 연설 내용은 아래 기사에 있다.
* [https://en.wikipedia.org/wiki/Ernestine_Evans Ernestine Evans(1889~1967)], “Looking East from Moscow,” Asia: The American Magazine on the Orient, Vol. 22, No. 12(December, 1922)
* [https://en.wikipedia.org/wiki/Ernestine_Evans Ernestine Evans(1889~1967)], 《Looking East from Moscow》, 『Asia: The American Magazine on the Orient』, Vol. 22, No. 12(December, 1922)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을 추진==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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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참조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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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완은 북한 노동당 간부를 지낸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B%B3%91%EC%97%BD_(1922%EB%85%84)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 한국에 와서 사용한 필명이다.
:신경완은 북한 노동당 간부를 지낸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B%B3%91%EC%97%BD_(1922%EB%85%84)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 한국에 와서 사용한 필명이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00700209210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1-10-07&officeId=00020&pageNo=10&printNo=21613&publishType=00020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책나와] 1991.10.07 동아일보 10면 : 망명 申敬完(신경완)씨 「압록강변의 겨울」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00700209210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1-10-07&officeId=00020&pageNo=10&printNo=21613&publishType=00020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책나와] 1991.10.07 동아일보 10면 : 망명 申敬完(신경완)씨 「압록강변의 겨울」


==함께 보기==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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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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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제목=주해|그룹=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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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독립운동가]]
[[분류:독립운동가]]

2023년 2월 1일 (수) 21:24 기준 최신판

김규식
金奎植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학무총장
1920년 4월 10일 ~ 1920년 8월 27일

이춘숙 대한 임정 학무총장 임시서리

대통령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총리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학무장
1920년 8월 27일 ~ 1920년 9월 8일


대통령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총리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학무부장
1920년 9월 8일 ~ 1921년 4월 29일


김인전 대한 임정 학무부장 직무대리
대통령
이승만 대한 임정 대통령
총리
이동휘 대한 임정 국무총리
이동녕 대한 임정 총리 권한대행
이동녕 대한 임정 총리 임시서리
미군정청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겸 상임위원장
1946년 12월 12일 ~ 1947년 6월 3일


신익희
대통령
수상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장관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사령관
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개인 정보
출생
1881년 1월 29일
출생지
사망
1950년 12월 10일[주해 1]
사망지
본관
청풍(淸風)
국적
대한민국
정당
경력
부모
부친: 김지성(김용원), 모친: 경주 이씨 부인
친인척
백부 김우성, 사촌 김은식, 처제 김필례, 당숙 김익남, 친족 김관식, 동서 최영욱, 인척 서병호, 김필순, 김염, 김마리아가 있었음.
형제
형 김규찬
배우자
조은수(사별), 김순애(재혼)
자녀
김진필(男), 김진동(男), 김진세(男), 김한애(女), 김민애(女), 김우애(女)
종교
별명
호(號)는 우사(尤史), 죽적(竹笛)
변갑, 번개비라는 별명을 사용
김성(金成), 중문(仲文), 일민(一民), 여일민(余一民), 왕개석(王介石)이라는 가명을 사용
평양의 애국열사릉(愛國烈士陵)[1][2]에 있는 김규식의 묘소. 그는 1881년 2월 28일생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1880년 12월 28일생은 오기로 보인다.

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차 평양을 다녀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6.25 때 납북 당하여 1950년 12월 10일 북한의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작고했다.

생애

자유시 참변 당시 김규식의 역할

그는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발발과는 무관하나, 11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참변 당시 러시아군에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에 여운형 등과 함께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재판에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으로 비판 받는다.[3][4]

이 일에 대한 원전은 확인하지 못했으나, 위키백과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5]

1921년 11월부터 여운형,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장가구에서 자동차편으로 출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한파가 닥치지 않아 8일만에 차량으로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 양털가죽과 낙타 가죽 장화, 모피 등을 구비, 6일만에 마차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가 다시 3일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들 독립군은 그해 6월에 자유시 참변 당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 등으로, 이들에게는 유형과 징역 등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김규식(金奎植)은 반공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저 무렵에는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등 반공적인 우파들은 배제하고, 온건한 우파 김규식과 좌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 합작 정부를 추진했는데, 두 사람 모두 자유시 참변 당시 행적이 논란된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의 극동민족대회 참가

김규식은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여운형·조봉암·홍범도·김단야 등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참가했던 것이 확인된다.[6][7][8]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지난해 7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사진·영상물보관소에서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을 입수해 그해 8월 공개했습니다.
반 교수는 그때 최진동 장군을 비롯해 김규식·여운형·조봉암·홍범도·김단야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참가 접수증을 발견하고 사진도 여러 장 확보했으나...
딱 100년 전, 한민족 해방에 더해 ‘세계 대동’을 목적한 세계인 김규식
미국 워싱턴회의 대신 러시아 극동대회로 향해
반병률 교수, 1922년 1월 개회식 촬영 자료 공개
동영상에는 나오지 않지만 장궈타오(張國燾, 1897~1979)에 이어 연설한 김규식은 "모스크바는 원동의 피압박 인민을 팔을 벌려서 자기들의 혁명운동 속으로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며 "여기에서 워싱턴은 세계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지로 존재한다"고 말해 호응을 받았다.

이러한 연설이 사실이라면 당시에 김규식도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여운형, 홍범도, 최진동 등이 나오는 당시 동영상에 김규식도 들어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극동민족대회의 소집은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분란을 야기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상해 한인사회에서 3·1 운동 이전부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여 온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분열과 해체였다. 신한청년당에는 경무국장 김구(金九)를 포함하여 교통총장 손정도(孫貞道), 학무총장 대리 김인전(金仁全), 재무차장 이유필(李裕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 조상섭(趙尙燮), 상해민단장을 지냈고 이승만(李承晩)의 상해 통신원인 임시의정원 의원 장붕(張鵬)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가입되어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태평양회의 후원회 활동에 열성적이었고, 워싱턴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21년 11월7일에는 美 국무장관 휴즈(Charles E. Hughes)에게 편지를 보내어 회의 참가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5월호, 「李承晩,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대표단장으로 가다」 참조[9]).
 이러한 상황에서 당의 핵심인물인 김규식과 여운형이 신한청년당과 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규식이 코민테른이 소집한 공산주의자들의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은 상해 정국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활동에서 느낀 실망이 그로 하여금 러시아행을 결심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되나,13) 그의 이러한 결심은 미국과 서유럽제국을 상대로 한 외교독립론에 실망한 독립운동자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모스크바행에 반대하여 이유필·조상섭·김병조·손정도는 신한청년당을 탈당했다.14) 김구(金九)도 극동민족대회에 대해서 반대 입장이었다. 일찍이 이동휘(李東輝)의 공산당 입당 권유를 거부하며 그를 질책했던 김구(金九)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자 김인전(金仁全)·장붕(張鵬)·도인권(都寅權)·안정근(安定根)·최명식(崔明植) 등과 함께 탈당했고, 뒤이어 이규서(李奎瑞)·김위택(金偉宅)·신창희(申昌熙) 등도 탈당했다.15)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은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13) 강만길ㆍ심지연, 「우사 김규식 ―― 생애와 사상(1)」, 2000, 한울, 73쪽.
14) 「公判調書」, 「夢陽呂雲亨全集 (1)」, 1991, 한울, 567쪽.
15) 「獨立新聞」 1922년 3월31일, 「靑年黨員의 移動」;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290쪽.
[김상웅 /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11회] 각국 지도자들과 만나 극동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해 여러 방략을 논의해

당시 김규식이 극동민족대회에서 행한 연설 내용은 아래 기사에 있다.

  • Ernestine Evans(1889~1967), 《Looking East from Moscow》, 『Asia: The American Magazine on the Orient』, Vol. 22, No. 12(December, 1922)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을 추진

해방 후 미군정은 처음에는 남한에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하여 강성 반공 우파인 이승만김구는 배제하고, 여운형을 소련 및 김일성과 분리시켜 김규식과의 좌우 합작을 추진했다.[10][11][12]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에는 버취(Leonard M. Bertsch) 중위가 깊이 관여하였다.[13] 그는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어 계급에 비해 중요한 일을 맡았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중위였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다.[14][15] 하지 중장의 정치ㆍ경제 고문 번스(Arthur C. Bunce)[16][17]가 1946년 평양을 방문하여 10월 6일 김일성과 회담했는데,[18]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 한다.[19]

번스와 김일성의 회담에는 발라사노프와 그의 부관 샵쉰도 동석했다. 번스는 남조선에서 우익은 좌익을 반대해 투쟁하고 좌익도 좌우합작을 원치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번스는 이승만김구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며 박헌영도 정당들의 통일을 방해한다고 비난한 반면 김규식은 인민에게 영향력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친일파와 투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번스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기대를 표명했다. 그는 박헌영여운형의 합작은 미군정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번스는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 일부 세력을 용납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번스는 미소공위 재개조건으로 반탁세력을 용인하되 이승만 김구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좌우 양극단이 아니라 김규식과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 좌우파에 기초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를 보아도 미군정은 박헌영 뿐만 아니라 이승만, 김구도 멀리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 정부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남북협상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면서 좌우합작은 포기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추진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소련의 거부로 북한 지역을 포기한 채 남한만의 단독 총선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택하게 된다. 김규식은 이를 반대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평양을 다녀오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남한의 여론만 분열시켜 결과적으로 김일성과 소련에 이용당했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宋南憲, 1914~2001)[20][21][22]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잘 모르고 속아서 추천했던 김규식의 또 다른 비서 권태양(權泰陽, ?~1965)은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의 직계였으므로,[23] 권태양도 김규식의 방북 결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김규식의 방북을 수행했다가 서울로 돌아왔지만, 6.25 당시 김규식의 납북에 직접 간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24] 김규식이 방북을 결심하는데는 문화인 108인이 지지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25][26][27] 성명서를 발표한 문화인 108인 중에는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의 장남으로 역시 월북한 홍기문(洪起文, 1903 ~ 1992) 같은 인물도 끼어 있었다. 비밀리에 몇 차례 북한을 다녀오고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던 홍명희 본인도 김구와 김규식을 자주 만나며 이들의 북행을 설득했다.[28][29]

  • 김규식은 일행과 함께 4월 21일 새벽 평양으로 출발.
김박사 일행(金博士 一行)도 23명(廿三名) 어제 출발(出發) 1948.04.22 경향신문 1면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다음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조선(南朝鮮) 선거반대(選擧反對)에 합법적 투쟁 전개(合法的鬪爭展開) : 양김씨 기자단 회견(兩金氏 記者團 會見) 1948.05.08 조선일보 1면
남조선(南朝鮮) 부패상태(腐敗狀態)

김박사(金博士) 미기자(美記者)에 언명(言明)


【서울 UP특파원(特派員) 『제임스·로퍼』발(發) 조통(朝通)】평양(平壤)에서 개최(開催)된 남북조선정치가회의(南北朝鮮政治家會議)에 출석(出席)한 후(後) 서울에 귀환(歸還)한 김규식박사(金奎植博士)는 6일(六日) 외국기자단(外國記者團)과 회견(會見)하고 소련점령하(蘇聯占領下)의 북조선 사태(北朝鮮 事態)를 칭양(稱揚)하는 한편(便) 남조선 미군정부(南朝鮮 美軍政府)의 부패상(腐敗相)을 비난(非難)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선(南朝鮮)에는 도처(到處)에 부패 이외(腐敗 以外)에 아무것도 없다. 평양회의(平壤會議)는 미소양군(美蘇兩軍)의 동시조선철퇴요구(同時朝鮮撤退要求)를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지지(支持)하였다. 북조선(北朝鮮)의 공장(工塲)은 남조선(南朝鮮)의 공장(工塲)보다 충실(充實)한 생산(生產)을 행(行)하고 있다. 소련인(蘇聯人)은 그다지 표면(表面)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南朝鮮)의 미국인(美國人)은 너무나 간섭(干涉)이 심(甚)하다. 현유 군정부(現有 軍政府)에는 부패(腐敗)가 심(甚)하다. 사십년간(四十年間)의 일본 점령중(日本 占領中) 조선인(朝鮮人)은 부정 일본인(不正 日本人)과 협력(協力)하기를 배왔으며 현재(現在) 그들은 이 경험(經驗)을 이용(利用)하여 미국인(美國人)이 그들의 부패(腐敗)를 조장(助長)하도록 애쓰고 있다. 오는 국련 주최하(國聯 主催下)의 미국지대내 선거(美國地帶內 選擧)는 분할(分割)을 항구화(恒久化)하는 경향(傾向)을 보일 것임으로 조선(朝鮮)을 소련권내(蘇聯圈內)에 몰아넣는 것을 조장(助長)하게될 염려(念慮)가 있다. 자기(自己)는 전국선거(全國選擧)만에 찬성(賛成)이며 소련(蘇聯)이 소련지대내(蘇聯地帶內)에 선거(選擧)를 실시(實施)하려고 한다면 이에도 반대(反對)이다. 북조선 정부(北朝鮮 政府)는 남방(南方)에 전력(電力)과 관개용수(灌漑用水)를 계속공급(繼續供給)할 것을 구두(口頭)로 승인(承認)하였으며 내란(內亂)은 없으리라고 약속(約束)하였다. 그들의 말한 바는 진정(眞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딘』 군정장관(軍政長官)은 군정부패 비난(軍政腐敗 非難)에 관(關)하여 『하—지』중장(中將)은 즉시 언급(即時 言及)치 않으리라고 말하였다.

【주(駐)서울 AP 특파원(特派員) 『로버—쯔』씨(氏) 제공(提供) 합동(合同)】평양회담(平壤會談)에의 출발 당시(出發 當時)에는 북조선 정책(北朝鮮 政策)에 반대의사(反對意思)를 가지고 갓든 김규식박사(金奎植博士)는 동회담(同會談)으로부터 귀환(歸還)한 지금(至今) 그 정책(政策)을 찬양(讃揚)하는 한편 남조선 부패(南朝鮮 腐敗)에 관(關)하여 미군당국(美軍當局)을 비난(菲難)하였다.

즉(即) 김박사(金博士)는 미당국(美當局)이 나쁜사람들을 신임(信任)하고 있다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선 부패상태(南朝鮮 腐敗狀態)에 관(關)하여 서는 일제하(日帝下)에서 부패(腐敗)한 조선인사(朝鮮人士)들에게 책임(責任)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사실(事實)로 증명(證明)할만한 많은 예(例)를 알고있다. 미군(美軍) 당국자간(當局者間)에도 부패(腐敗)한 인사(人士)가 있었다. 인명(人名)은 지적(指摘)치 않으나 경제고문(經濟顧問)으로 있다가 지금(至今)은 귀국(歸國)한 부호(富豪)의 모씨(某氏) 또는 미군정 봉직중 부패(美軍政 奉職中 腐敗)의 책임(責任)을 받고 귀국당(歸國當)한 모씨 등(某氏 等)이 있다. 남조선(南朝鮮)은 악상태(惡狀態)에 놓여 있다. 화폐(貨幣)는 『인푸레』화(化)하고 조선인민(朝鮮人民)을 위(爲)한 아무 조치(措置)도 취(取)하여지지 않고 있다. 나는 조선(朝鮮)의 가능지역 총선거(可能地域 總選擧)를 가결(可决)한 UN 삼십륙개국(三十六個國)이 이를 실현(實現)시킬 수 있고 또 정부(政府)를 형성(形成)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想像)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이네들에 반대(反對)할 방책(方策)을 갖이고 있지 않다. 나는 『탱크』도 총(銃)도 또 원자탄(原子彈)도 없다. 그들 UN 삼십륙개국(三十六個國)은 조선(朝鮮)의 운명(運命)을 결정(决定)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운명(運命)을 조선인민(朝鮮人民)의 의사(意思)로 맨들 수는 없을 것이다. 북조선 체류기간내(北朝鮮 滯留期間內)에 북조선 당국(北朝鮮 當局)은 우리에게 움지기고 있는 공장(工塲)을 보혀주었다. 소련인(蘇聯人)들은 교만(嬌慢)하지 않은 태도(態度)로서 조선인(朝鮮人)과 보행(步行)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소(些少)한 일에도 미인(美人)이 간섭(干涉)을 하고있는 남조선(南朝鮮)과는 호대조(好對照)이였다.

평양(平壤)에는 소련병사(蘇聯兵士)들은 적었었다 그리고 소수(小數)의 중공팔로군(中共八路軍)이 평양(平壤)에서의 『메—데—·데모』[31]에 참가(參加)하였었다. 나는 『슈티코푸』장군(將軍)과 맛난 후(後) 비가 오기에 『메—데—·데모』 식장(式塲)에서 일직이 퇴석(退席)하였다.

현재(現在) 만주 중공군(滿洲 中共軍)과 협조(協助)하고있는 조선군(朝鮮軍)이 약25만명(約廿五萬名)이고 북조선인민군(北朝鮮人民軍)이 약20만(約廿萬)이다. 나는 미군(美軍)이 철퇴(撤退)하면 북조선군(北朝鮮軍)이 남조선(南朝鮮)을 석권(席捲)할 것을 우려(憂慮)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나는 북조선 지도자측(北朝鮮 指導者側)의 내전(內戰)에 돌입(突入)치 않겠다는 성명(聲明)을 신빙(信憑)하는 것이다.

방북 후 귀환한 김규식이 미국 기자들에게 한 말을 보면 그는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채, 그들이 보여주는 것만 보고, 선전이나 듣고와서 미군정과 남한만 비방하고 소련과 북한을 칭송하고 있다. 김일성 집단을 북조선 정부(北朝鮮 政府)라고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 스스로 북한에는 이미 단독의 정부가 들어서 있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협상해서 남북한 단일 정부를 세우겠다는 망상을 하면서 남한 단독의 총선거 실시만 줄곧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북한이 보여준 잘 돌아가는 공장이라는 건 일제가 북한 지역에 건설해준 것일 뿐이고, 소련군 점령 후 산업 시설 상당수를 해체해 소련으로 가져가고 남은 것들이다. 일제가 중국진출을 위해 대부분의 공장이나 발전소를 북한지역에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당시엔 북한이 나을 수 밖에 없었다는 상황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위 기사에도 나오듯이 그는 평양에서 5월 1일(메이데이, 5.1절, 노동절)에 열린 인민군 열병식(『메—데—·데모)을 참관했다.[32] 인민군이 남한 대표들 앞에서 무력시위를 한 것으로 당시로는 인민군이 국군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보고 왔을 것임에도 남침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도 딱하다. 지도자라는 사람이 무책임한 언사를 남발했지만 불과 2년 후 북한은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고, 자신도 납북되었다. 자신이 남한보다 훨씬 더 잘 되어가고 있다고 칭송한 북한으로 가게되었으니 크게 나쁜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북한을 가서 보고도 실상은 전혀 파악하지도 못하고, 보여주는 것만 보고와서 헛소리나 늘어놓는 이런 사람이 지도자로 선택되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모종(某種)의 숙의차(熟議次) 양김씨(兩金氏) 모사찰행(某寺刹行)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 1948년 06월 25일 1면 9단
남북협상 수방기(南北協商 遂放棄) / 북조선헌법(北朝鮮憲法)을 배격(排擊)

북의 프락치가 된 비서 권태양에 농락 당해

권태양(權泰陽, 1913~1966)[33][34]송남헌(宋南憲, 1914~2001)[35]의 소개로 김규식의 비서가 된 사람인데, 이후 김일성이 직접 남파한 북한 간첩 성시백의 프락치가 되어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규식의 방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성시백이 체포될 때도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으며, 6.25 때 북한이 김규식과 다른 요인들을 납북하는 데도 앞장섰다.

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36].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 김구 293표 (30.0%), 여운형 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37]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38]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참고 자료

임시정부서 외교업무 맡아 독립운동
북한은 6.25 때 남북해간 요인들을 모두 자진 월북한 것으로 조작하여 기록하고 있다.

아래 책에 납북 후의 김규식이 만포진에서 별세할 때까지의 사정이 나와 있다.

신경완은 북한 노동당 간부를 지낸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 한국에 와서 사용한 필명이다.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책나와 1991.10.07 동아일보 10면 : 망명 申敬完(신경완)씨 「압록강변의 겨울」


함께 보기



주해

  1. 1952년 사망설도 있다.
  2. 동래도호부는 아버지 김지성의 집이 아니라 부임지였으므로 김지성의 본집인 강원도 홍천을 고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각주

  1. 애국렬사릉 위키백과
  2. 애국열사릉 위치 구글 지도
  3. 독립운동가열전 : 김규식의 생애와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연보] 1921. 11. 동방피압박민족대회 참가차 상해출발, 장가구-몽고 고비사막을 횡단하여 이르쿠츠크에 도착, 자유시 참변사건 재판 목격
  4. 뱅모, [세뇌탈출] 393탄 - 정신차려! 황교안! - 1부 (2019.04.02) : 18분경부터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여운형의 행적에 대해 나옴.
  5.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 위키백과
  6.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연합뉴스 2019-12-30
  7.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SBS 뉴스 2019.12.30
  8. 봉오동 전투의 주역…최진동 장군 사진 '최초 공개' SBS 뉴스 2019.12.30
  9. 孫世一의 비교 評傳 (38)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李承晩,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 대표단장으로 가다 월간조선 2005년 5월호
  10. 좌우합작은 共委를 촉진, 탁치론보다 임정 수립이 선결, 지금은 왈가왈부를 논쟁할 때 아니다, 아놀드소장 담화 자유신문 1946년 07월 03일 1면 1단
  11. Summary of Political Events in Korea p.26의 Hodge가 김규식에게 보낸 1946년 9월 18일자 편지부터 나오는 문건들
  12. 金·呂 양씨에 서한, 하지중장 좌우합작에 기대 <자유신문> 8월 28일자
    合作努力(합작노력)에큰關心(관심) 하將軍(장군)·金呂両氏(김려양씨)에親書(친서)[肖]" <동아일보> 1946년 08월 28일 석간 01면
  13. American Members of the Political Advisory Group of the US-USSR Joint Commission Attending the Commission Meeting at the Duk Soo Palace[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정치고문단의 미국측 인사들 : 1947.06.15] 사진의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Bertsch 중위
  14. 신복룡,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여운형의 공명심 비극적 죽음 자초 허약한 김규식은 스스로 무너져 [주간조선 2359호] 2015.06.01
  15. Bertsch Papers,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 하버드 대학교 하버드-옌칭 도서관 버치 콜렉션에 대하여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16. 황윤희, 번스(Arthur C. Bunce)의 내한활동과 한국문제인식 숭실사학 2009, vol., no.23, 통권 23호 pp. 151-208
  17. 안종철, 해방 전후 아더 번스(Arthur C. Bunce)의 활동과 미국의 대한정책 미국사연구 제31집 2010.05 pp.139 - 167
  18. 번스(Arthur C. Bunce)와 김일성 대화록 : Беседы Банса с Ким Ир-Сеном 국사편찬위원회 :1946년 10월 6일 진행된 김일성과 번스의 회담 내용
  19.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Ⅰ부 > 1946년 10월 7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 송남헌(宋南憲, 1914~2001) 위키백과
  21. [삶과 추억] 독립운동가 고 송남헌옹 [중앙일보] 입력 2001.02.24 종합 25면
  22. [인터뷰] 독립운동가 <송남헌 옹>..내가 만나본 김일성 인상 한국경제 1994.07.11
  23.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선인, 2001) pp.34~36
  24. 김효선, '건국이념의 상실'이 한국미래 어둡게 해 한국논단 2009년 8월호
  25.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2>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2) 密使(밀사)의 往來(왕래) 1971.10.05 동아일보 4면
  26.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7>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7) 金奎植(김규식)의 心境(심경) 1971.10.16 동아일보 4면
  27. 南北協商만이 救國에의 길, 薛義植氏等 108 文化人이 支持聲明 獨立新報 1948.04.29
    文化人 百八名 連署, 南北會談 支持 聲明, 兩軍 同時 撤兵은 大經大法이다.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48.04.29 : 조선중앙일보는 간첩 성시백이 서울에서 간행하던 신문이다.
  28. 합당(合黨)? 행동통일(行動統一)? 김구·김규식·홍명희 삼씨 비밀회합 빈번(金九·金奎植·洪命熹 三氏 秘密會合 頻繁) 1948.03.04 경향신문 1면 / 경교장(京橋莊)에 내왕번빈(來往繁頻) 1948.03.18 경향신문 1면
  29. 會談提案 作成(회담제안 작성) 明日 發表(명일 발표)할 豫定(예정) 1948.04.18 조선일보 1면
  30. 남조선(南朝鮮) 부패상태(腐敗狀態) 김박사(金博士) 미기자(美記者)에 언명(言明) 조선일보 1948-05-08 1면
  31. 메이 데이 데모 : 5.1절 행사에서 인민군이 벌인 군사 퍼레이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32. "11. 레베제프 일기 번역문" p.93  : 1948년 5월 1일자
  33. 권태양(權泰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4. 권태양(權泰陽, ? - 1966년) 위키백과
  35. 독립운동가 송남헌옹 별세 중앙일보 2001. 2. 21
  36.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37.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 예상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38.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