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번째 줄: 64번째 줄:
==김규식을 농락한 북의 프락치 권태양==
==김규식을 농락한 북의 프락치 권태양==


권태양(權泰陽)은 김규식의 비서로서 김일성이 파견한 북한 간첩 성시백의 프락치가 되어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규식]]의 방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태양(權泰陽)은 김규식의 비서로서 김일성이 파견한 북한 간첩 [[성시백]]의 프락치가 되어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규식]]의 방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 [https://ko.wikipedia.org/wiki/%EA%B6%8C%ED%83%9C%EC%96%91 권태양(權泰陽, ? - 1966년)]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A%B6%8C%ED%83%9C%EC%96%91 권태양(權泰陽, ? - 1966년)] 위키백과

2021년 10월 18일 (월) 15:50 판

평양의 애국열사릉(愛國烈士陵)[1][2]에 있는 김규식의 묘소. 그는 1881년 2월 28일생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1880년 12월 28일생은 오기로 보인다.

김규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차 평양을 다녀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6.25 때 납북 당하여 1950년 12월 10일 북한의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작고했다.

생애

자유시 참변 당시 김규식의 역할

그는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발발과는 무관하나, 11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참변 당시 러시아군에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에 여운형 등과 함께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재판에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으로 비판 받는다.[3]

이 일에 대한 원전은 확인하지 못했으나, 위키백과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4]

1921년 11월부터 여운형, 나용균, 박헌영, 원세훈 등과 함께 장가구에서 자동차편으로 출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한파가 닥치지 않아 8일만에 차량으로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에 도착, 양털가죽과 낙타 가죽 장화, 모피 등을 구비, 6일만에 마차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의 수도 우딘스크에 도착했다가 다시 3일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12월 이르쿠츠크에 체류 중,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했다. 이들 독립군은 그해 6월에 자유시 참변 당시 생포된 독립군들과 백러시아군에 가담해서 활동하던 조선인 등으로, 이들에게는 유형과 징역 등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을 목격했다.

김규식(金奎植)은 반공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저 무렵에는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등 반공적인 우파들은 배제하고, 온건한 우파 김규식과 좌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 합작 정부를 추진했는데, 두 사람 모두 자유시 참변 당시 행적이 논란된다.

김규식은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여운형·조봉암·홍범도·김단야 등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참가했던 것이 확인된다.[5][6][7]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지난해 7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사진·영상물보관소에서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을 입수해 그해 8월 공개했습니다.
반 교수는 그때 최진동 장군을 비롯해 김규식·여운형·조봉암·홍범도·김단야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참가 접수증을 발견하고 사진도 여러 장 확보했으나...

남북협상

해방 후 미군정은 처음에는 남한에 좌우 합작 정부를 세우는 것을 선호하여 강성 반공 우파인 이승만김구는 배제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의 합작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면서 좌우합작은 포기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추진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소련의 거부로 북한 지역을 포기한 채 남한만의 단독 총선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택하게 된다. 김규식은 이를 반대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평양을 다녀오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남한의 여론만 분열시켜 결과적으로 김일성과 소련에 이용당했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宋南憲, 1914~2001)[8][9][10]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잘 모르고 속아서 추천했던 김규식의 또 다른 비서 권태양(權泰陽, ?~1965)은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의 직계였으므로,[11] 권태양도 김규식의 방북 결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김규식의 방북을 수행했다가 서울로 돌아왔지만, 6.25 당시 김규식의 납북에 직접 간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12] 김규식이 방북을 결심하는데는 문화인 108인이 지지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13][14][15] 성명서를 발표한 문화인 108인 중에는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의 장남으로 역시 월북한 홍기문(洪起文, 1903 ~ 1992) 같은 인물도 끼어 있었다.

  • 김규식은 일행과 함께 4월 21일 새벽 평양으로 출발.
김박사 일행(金博士 一行)도 23명(廿三名) 어제 출발(出發) 1948.04.22 경향신문 1면


방북했던 김구, 김규식은 5월 5일 저녁 서울에 귀환하여 다음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조선(南朝鮮) 선거반대(選擧反對)에 합법적 투쟁 전개(合法的鬪爭展開) : 양김씨 기자단 회견(兩金氏 記者團 會見) 1948.05.08 조선일보 1면
남조선(南朝鮮) 부패상태(腐敗狀態)

김박사(金博士) 미기자(美記者)에 언명(言明)


【서울 UP특파원(特派員) 『제임스·로퍼』발(發) 조통(朝通)】평양(平壤)에서 개최(開催)된 남북조선정치가회의(南北朝鮮政治家會議)에 출석(出席)한 후(後) 서울에 귀환(歸還)한 김규식박사(金奎植博士)는 6일(六日) 외국기자단(外國記者團)과 회견(會見)하고 소련점령하(蘇聯占領下)의 북조선 사태(北朝鮮 事態)를 칭양(稱揚)하는 한편(便) 남조선 미군정부(南朝鮮 美軍政府)의 부패상(腐敗相)을 비난(非難)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선(南朝鮮)에는 도처(到處)에 부패 이외(腐敗 以外)에 아무것도 없다. 평양회의(平壤會議)는 미소양군(美蘇兩軍)의 동시조선철퇴요구(同時朝鮮撤退要求)를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지지(支持)하였다. 북조선(北朝鮮)의 공장(工塲)은 남조선(南朝鮮)의 공장(工塲)보다 충실(充實)한 생산(生產)을 행(行)하고 있다. 소련인(蘇聯人)은 그다지 표면(表面)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南朝鮮)의 미국인(美國人)은 너무나 간섭(干涉)이 심(甚)하다. 현유 군정부(現有 軍政府)에는 부패(腐敗)가 심(甚)하다. 사십년간(四十年間)의 일본 점령중(日本 占領中) 조선인(朝鮮人)은 부정 일본인(不正 日本人)과 협력(協力)하기를 배왔으며 현재(現在) 그들은 이 경험(經驗)을 이용(利用)하여 미국인(美國人)이 그들의 부패(腐敗)를 조장(助長)하도록 애쓰고 있다. 오는 국련 주최하(國聯 主催下)의 미국지대내 선거(美國地帶內 選擧)는 분할(分割)을 항구화(恒久化)하는 경향(傾向)을 보일 것임으로 조선(朝鮮)을 소련권내(蘇聯圈內)에 몰아넣는 것을 조장(助長)하게될 염려(念慮)가 있다. 자기(自己)는 전국선거(全國選擧)만에 찬성(賛成)이며 소련(蘇聯)이 소련지대내(蘇聯地帶內)에 선거(選擧)를 실시(實施)하려고 한다면 이에도 반대(反對)이다. 북조선 정부(北朝鮮 政府)는 남방(南方)에 전력(電力)과 관개용수(灌漑用水)를 계속공급(繼續供給)할 것을 구두(口頭)로 승인(承認)하였으며 내란(內亂)은 없으리라고 약속(約束)하였다. 그들의 말한 바는 진정(眞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딘』 군정장관(軍政長官)은 군정부패 비난(軍政腐敗 非難)에 관(關)하여 『하—지』중장(中將)은 즉시 언급(即時 言及)치 않으리라고 말하였다.

【주(駐)서울 AP 특파원(特派員) 『로버—쯔』씨(氏) 제공(提供) 합동(合同)】평양회담(平壤會談)에의 출발 당시(出發 當時)에는 북조선 정책(北朝鮮 政策)에 반대의사(反對意思)를 가지고 갓든 김규식박사(金奎植博士)는 동회담(同會談)으로부터 귀환(歸還)한 지금(至今) 그 정책(政策)을 찬양(讃揚)하는 한편 남조선 부패(南朝鮮 腐敗)에 관(關)하여 미군당국(美軍當局)을 비난(菲難)하였다.

즉(即) 김박사(金博士)는 미당국(美當局)이 나쁜사람들을 신임(信任)하고 있다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선 부패상태(南朝鮮 腐敗狀態)에 관(關)하여 서는 일제하(日帝下)에서 부패(腐敗)한 조선인사(朝鮮人士)들에게 책임(責任)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사실(事實)로 증명(證明)할만한 많은 예(例)를 알고있다. 미군(美軍) 당국자간(當局者間)에도 부패(腐敗)한 인사(人士)가 있었다. 인명(人名)은 지적(指摘)치 않으나 경제고문(經濟顧問)으로 있다가 지금(至今)은 귀국(歸國)한 부호(富豪)의 모씨(某氏) 또는 미군정 봉직중 부패(美軍政 奉職中 腐敗)의 책임(責任)을 받고 귀국당(歸國當)한 모씨 등(某氏 等)이 있다. 남조선(南朝鮮)은 악상태(惡狀態)에 놓여 있다. 화폐(貨幣)는 『인푸레』화(化)하고 조선인민(朝鮮人民)을 위(爲)한 아무 조치(措置)도 취(取)하여지지 않고 있다. 나는 조선(朝鮮)의 가능지역 총선거(可能地域 總選擧)를 가결(可决)한 UN 삼십륙개국(三十六個國)이 이를 실현(實現)시킬 수 있고 또 정부(政府)를 형성(形成)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想像)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이네들에 반대(反對)할 방책(方策)을 갖이고 있지 않다. 나는 『탱크』도 총(銃)도 또 원자탄(原子彈)도 없다. 그들 UN 삼십륙개국(三十六個國)은 조선(朝鮮)의 운명(運命)을 결정(决定)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운명(運命)을 조선인민(朝鮮人民)의 의사(意思)로 맨들 수는 없을 것이다. 북조선 체류기간내(北朝鮮 滯留期間內)에 북조선 당국(北朝鮮 當局)은 우리에게 움지기고 있는 공장(工塲)을 보혀주었다. 소련인(蘇聯人)들은 교만(嬌慢)하지 않은 태도(態度)로서 조선인(朝鮮人)과 보행(步行)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소(些少)한 일에도 미인(美人)이 간섭(干涉)을 하고있는 남조선(南朝鮮)과는 호대조(好對照)이였다.

평양(平壤)에는 소련병사(蘇聯兵士)들은 적었었다 그리고 소수(小數)의 중공팔로군(中共八路軍)이 평양(平壤)에서의 『메—데—·데모』[17]에 참가(參加)하였었다. 나는 『슈티코푸』장군(將軍)과 맛난 후(後) 비가 오기에 『메—데—·데모』 식장(式塲)에서 일직이 퇴석(退席)하였다.

현재(現在) 만주 중공군(滿洲 中共軍)과 협조(協助)하고있는 조선군(朝鮮軍)이 약25만명(約廿五萬名)이고 북조선인민군(北朝鮮人民軍)이 약20만(約廿萬)이다. 나는 미군(美軍)이 철퇴(撤退)하면 북조선군(北朝鮮軍)이 남조선(南朝鮮)을 석권(席捲)할 것을 우려(憂慮)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나는 북조선 지도자측(北朝鮮 指導者側)의 내전(內戰)에 돌입(突入)치 않겠다는 성명(聲明)을 신빙(信憑)하는 것이다.

방북 후 귀환한 김규식이 미국 기자들에게 한 말을 보면 그는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채, 그들이 보여주는 것만 보고와서 미군정과 남한만 비방하고 소련과 북한을 칭송하고 있다. 김일성 집단을 북조선 정부(北朝鮮 政府)라고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인 스스로 북한에는 이미 단독의 정부가 들어서 있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협상해서 남북한 단일 정부를 세우겠다는 망상을 하면서 남한 단독의 총선거 실시만 줄곧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남침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도 딱하다. 지도자라는 사람이 무책임한 언사를 남발했지만 불과 1년 후 북한은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고, 자신도 납북되었다. 자신이 남한보다 훨씬 더 잘 되어가고 있다고 칭송한 북한으로 가게되었으니 크게 나쁜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모종(某種)의 숙의차(熟議次) 양김씨(兩金氏) 모사찰행(某寺刹行)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 1948년 06월 25일 1면 9단
남북협상 수방기(南北協商 遂放棄) / 북조선헌법(北朝鮮憲法)을 배격(排擊)

김규식을 농락한 북의 프락치 권태양

권태양(權泰陽)은 김규식의 비서로서 김일성이 파견한 북한 간첩 성시백의 프락치가 되어 1948년 남북협상 당시 김규식의 방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18].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 김구 293표 (30.0%), 여운형 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19]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 김구 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 여운형 689인 (10.3%), 박헌영 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20]
    이승만 43.9%, 김규식 18.5%, 여운형 17.5%, 김구 15.2%, 허헌 1.3%, 조소앙 1.3%, 김원봉 0.9%, 김성수 0.7%, 박헌영 0.4%

참고 자료

임시정부서 외교업무 맡아 독립운동
북한은 6.25 때 남북해간 요인들을 모두 자진 월북한 것으로 조작하여 기록하고 있다.

아래 책에 납북 후의 김규식이 만포진에서 별세할 때까지의 사정이 나와 있다.

신경완은 북한 노동당 간부를 지낸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 한국에 와서 사용한 필명이다.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책나와 1991.10.07 동아일보 10면 : 망명 申敬完(신경완)씨 「압록강변의 겨울」

함께 보기

각주

  1. 애국렬사릉 위키백과
  2. 애국열사릉 위치 구글 지도
  3. 뱅모, [세뇌탈출] 393탄 - 정신차려! 황교안! - 1부 (2019.04.02) : 18분경부터 자유시 참변과 관련한 여운형의 행적에 대해 나옴.
  4. 김규식(金奎植, 1881 ~ 1950) : 위키백과
  5.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연합뉴스 2019-12-30
  6. '봉오동 대첩의 영웅' 최진동 장군 사진 찾았다 SBS 뉴스 2019.12.30
  7. 봉오동 전투의 주역…최진동 장군 사진 '최초 공개' SBS 뉴스 2019.12.30
  8. 송남헌(宋南憲, 1914~2001) 위키백과
  9. [삶과 추억] 독립운동가 고 송남헌옹 [중앙일보] 입력 2001.02.24 종합 25면
  10. [인터뷰] 독립운동가 <송남헌 옹>..내가 만나본 김일성 인상 한국경제 1994.07.11
  11.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선인, 2001) pp.34~36
  12. 김효선, '건국이념의 상실'이 한국미래 어둡게 해 한국논단 2009년 8월호
  13.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2>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2) 密使(밀사)의 往來(왕래) 1971.10.05 동아일보 4면
  14.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7>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7) 金奎植(김규식)의 心境(심경) 1971.10.16 동아일보 4면
  15. 南北協商만이 救國에의 길, 薛義植氏等 108 文化人이 支持聲明 獨立新報 1948.04.29
    文化人 百八名 連署, 南北會談 支持 聲明, 兩軍 同時 撤兵은 大經大法이다.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1948.04.29 : 조선중앙일보는 간첩 성시백이 서울에서 간행하던 신문이다.
  16. 남조선(南朝鮮) 부패상태(腐敗狀態) 김박사(金博士) 미기자(美記者)에 언명(言明) 조선일보 1948-05-08 1면
  17. 메이 데이 데모 : 5.1절 행사에서 퍼레이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8.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19. 한국여론협회 조사 발표 (韓國輿論協會調査發表) 초대 대통령(初代大統領) 예상 후보 지지율 동아일보 1946년 7월 23일자 3면
  20.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 스티코프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수슬로프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쯔코프에게 올린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