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삼은 1948년 8월 제주도를 떠나 북으로 향했으며 인민유격대 제3병단 장교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달삼은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3월 정선군 여량면 고양산 승지골에 잠입했다가 국군과 교전 중 사살됐다. 당시 국군은 김달삼의 시신을 확인 후 목을 베어 강릉으로 가져갔다. 당시 김달삼의 목을 벤 4명의 군인은 6·25 당시 납북됐다고 알려졌다.[1]

김달삼의 제주도 대정 출신의 사회주의자다. 그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는 군과 평화 교섭을 주도하기도 했었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으로 김달삼이라는 가명은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가이자 장인인 강문석이 쓰던 이름을 이어받아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로 복무했었다. 김달삼은 해방 후 1946년 10·1 대구항쟁에 관여했고, 1946년 10월 20일부터는 고향 제주도로 귀향한 후 대정공립초급중학교 교사로 재직했었다. 1947년 8월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부장이 됐고 1948년 4·3 항쟁 후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일명 해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났고 9월 2일부터 10일까지 개최된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49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후 북한에 남았기 때문이다. 김달삼은 북한으로 넘어간 뒤 강원도와 경북 일원에서 인민유격대 제3병단을 지휘했다. 그는 한국전쟁 전인 1950년 3월 22일 비정규군 빨치산으로 국군 8사단과 교전 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사망한 곳인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에는 남한에서 두번째로 긴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2]

동해남부전구빨치산의 이동경로.jpg

[3][4]


위치

김달삼모가지잘린골.jpg

12일 정선군에 따르면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를 과거에 `뙡`으로, 북평면 숙암리와 여량면 봉정리를 각각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와 `김달삼모가지잘린골`으로 불리웠다.[5][6][7]


함께보기

슬픈 역사, 4·3사건의 진실

  • 슬픈 역사, 4·3사건의 진실

제주 4.3 폭동을 생각한다

  • 신구범(진실도민연대가 말하는 제주 4.3사건, 5월1일)
  • 김영중 前 제주경찰서장 - 제주 4.3사건의 진짜 진실
  • 제주4.3 진실전쟁 - 서울대 트루스포럼 제39회 강연 1부[8]


제주4.3에 대한 참고 보기

-뉴데일리 기사에 실린 제주4.3

  • 제주4.3역사바로세우기 제주4.3 정립연구 유족회 [20]

각주

  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7&aid=0000704952 `제주 4·3 항쟁' 비극 서린 정선 김달삼모가지잘린골
  2.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251348 홍준표가 말한 제주 4·3사건 주동자, 김달삼…그는 누구인가?
  3. http://m.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79513789984870 빨치산 남도부 신불산으로 오다
  4. p179513789984870_606.jpeg
  5. NISI20110912_0005123680_web.jpg
  6.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177681&ctg=1200&tm=i_lf 국내 최단·최장 지명 강원 정선에 있었다
  7.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10912_0009202523 국내 최단·최장 지명 강원 정선에 있었다
  8. img_917_0.jpg
  9.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25_1_0030271&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김달삼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10. 친북성향이다
  11.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6003 그의 미남은 바람 치는 혁명의 도구였다
  12. ‘그의 미남은 바람 치는 혁명의 도구였다’ <김관후의 4·3칼럼> (1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 총책 김달삼 -김달삼의 한 많은 생애 ▲ 김달삼. ‘과연 그 장인에 그 사위/ 김달삼/ 본명 이승진/ 일본 예비 육군사관학교에서/ 하필 김익렬이 동기생이었다/ 김익렬은 제주도 9연대장/ 두 사람은 단 한 번 4·3사건 휴전담판을 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고/ 고개 저으며/ 산에서 돌아온 김익렬은 생각했다’-시인 고은의「장인 강문석」 전문 ‘그의 미남은 여성의 도구가 아니라/ 바람 치는 혁명의 도구였다/ 4·3사태 뒤/ 황해도 해주로 갔다/(중략)/ 6·25 사변 직전 태백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4·3사태와 함께/그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다’ -시인 고은의 「김달삼」 전문 ‘제주도가 지난 4월 3일 미명에 한라산의 봉화로 개시된 소요로 인하여 이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듭하면서 전도가 묘지화할 우려까지도 있는 듯이 보였으나 김봉호(金鳳昊) 신 청장의 완화정책으로 말미암아 도내 각 부락에는 점차 명랑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우리 기자단 일행이 수집한 정보로 한라산 깊이 숨어 있는 소요측 동정을 살펴보면 아직도 약 1,000에 가까운 주력부대가 건재하고 있다 하며 그들은 김달삼(金達三․28)이라는 총사령장의 지휘를 받고 있으며 (1) 도민 생활의 안전을 복구시키는 당국의 적절한 시책 (2)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찰의 무장해제 (3) 경찰관의 권력남용의 엄금 및 모모 사설단체의 숙청 등의 요구조건을 걸고 이 현실 문제의 해결이 실현되지 않는 한 최후까지 도내 전 인민의 생명 재산의 안전을 위하여 재궐기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는데 이에 대한 책임당국의 대응책 여하가 자못 주목되며 제주도의 운명을 좌우시킬 관건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어 제주도를 싸돌고 있는 무거운 구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 1948년 7월 20일 기사 ‘1. 경찰, 제주도행 다이너마이트 적재 선박 나포. 5월 31일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후 6시 사이에 추자도 경찰은 부산에서 제주도로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가던 배 1척을 나포했다. (미군정 보고, B-2) 2. 제주도 인민해방군 조직. 제주도에서 심문받던 한 포로가 폭도 집단은 인민해방군 제5연대로 재조직되었으며 김달삼이 지휘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미군정 보고, B-2)’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6월 2일~1948년 6월 3일 (No. 850, 1948. 6. 3. 보고) 김달삼(金達三, 1923 ~1950)은 제주4·3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대정읍 영락리 987번지에서 이평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달삼이란 이름은 그의 장인 강문석(姜文錫)이 일제강점기에 중국 상해에서 항일운동 당시 쓰던 가명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다.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 대구심상소학교를 거쳐 도일(渡日), 교토(京都) 성봉중학교를 거쳐 중앙대학(中央大學)에서 수학하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복지산(福知山)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5년 1월 강문석의 큰딸 강영애(姜英愛)와 결혼하였다. 강영애는 대정읍 인성리 1661번지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와 오사카시 이쿠노쿠(生野區) 저사야란 곳에 살고 있을 때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강영애를 일본에 두고 귀국하였다. 1946년 장인 강문석의 소개로 공산당 경북대표 장적우(張赤友), 경북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상훈(李相薰), 동 위원회 보안부장 이재복(李在福), 농민연맹 경북위원장 장하명 등을 알게 되고 특히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재복은 1948년 제주4·3당시 군사부원 이중업을 대동하고 강문석과 같이 제주에 잠입, 김달삼을 집중 지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대구10·1폭동에 가담하여 이재복의 신임을 받았다. 1946년 말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로당 당수 박헌영(朴憲泳)과 비밀리에 연계되고 있었다. 이때 남로당에 입당하여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신된 상태였다.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47년 1월 남로당 거물급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체포된 상태에서 경찰서로 호송도중 도망치기도 하였다. 1947년 3·1사건을 배후에서 조종, 남로당 제주도당책이 되어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후 1948년 4월 3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남로당이 장악한다는 계획 하에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4월 28일 구억초등학교에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평화회담을 벌였으나 결렬되었고 후일 월북하였다. 8월 21일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다. 제주에서 참가한 강규찬(姜圭贊)과 고진희(高眞姬)부부, 이정숙(李貞淑), 안세훈(安世勳) 등과 함께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제주4·3투쟁보고’를 하고,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가훈장 2급을 수여 받았다. 대의원들은 9월 2일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를 개최, 김달삼은 이때 김일성(金日成), 허헌(許憲) 등과 함께 49명으로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9월 9일 선포되었다. 그 후 김달삼의 행적은 여러 갈래의 설이 전해진다. 강동정치학권에서 빨치산 간부교육을 받은 뒤 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 총수(總帥)가 되어 남하,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로서아에서 한국에 온 강동정치학원 원장이었던 박병율도 “강동정치학권에서 지리산 빨치산 지도자 이현상, 제주도 빨치산 지도자 김달삼 등을 포함해서 빨치산 간부들을 교우시켰다.”고 말했다. 김달삼이 남하한 것은 1949년 8월초로 알려졌다. 직책은 인민유격대 제3병단 태백산지구 사령관, 그는 3백명의 유격대와 함께 경북 영덕과 안동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춘천발 고려】지난 8일경 홍천군 화촌면 방면에 무장 폭도 약 50명이 출현하여 우리 군경은 이를 포위 추격 중에 있거니와 19일 강원도 경찰국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금번 출현한 공비는 지난번 제주도 사건 총지휘자였던 소위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이 지휘하는 유격대라 하며, 그중 13명은 이미 사살하였다 한다.’-서울신문 1949년 9월 23일 - 진보적 학생운동과 교원세력 해방 이후 제주도의 교육열기는 그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진보성향이 강했다. 1946년 후반부터 학교별로 맹휴사건이 일어났으며, 1947년 2월에는 양과자 반대시위가 벌어지더니, 그 해 3월 1일에는 급기야 3·1시위사건으로 치닫게 된다. 1947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은 파쇼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였다. 농업학교 학생 맹휴문제가 잠잠해지더니 이번에는 오현중학생들이 맹휴에 돌입, 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오현중 맹휴사건은 학내 연극문제에 국한시키지 않고 일제교육의 잔재임을 들먹거리며 강력한 항의운동을 벌였다. 중등학생들의 연합활동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의 색채를 띠고 전개되면서 양과자 반대시위를 내세운 3·1절 시위였다. 제주4·3의 주도인물로 알려진 김달삼·이덕구도 그 당시 교원이었다. 김달삼은 대정공립중학교에서 역사와 공민과목을 가르쳤다. 이덕구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담당 교사였. 또 나중에 남로당 제주도위원장을 맡게 되는 김용관(金龍寬)은 하귀국교 교장으로, 사태 발발 후 조직부장을 맡았던 고칠종(高七踵)은 농업학교 교원으로 재직했으며, 일본으로 피신해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저술한 김봉현은 오현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 밖에도 비록 4·3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47년 초에 안세훈·이일선 스님과 더불어 제주민전의 공동의장을 맡은 현경호(玄景昊)는 제주중 교장으로 재직했다. -대정지역의 3·1 기념대회 1947년 3·1절 기념집회는 전국적으로 각 지역에서 있었다. 제주도 내에서도 각 면 단위로 면 소재지에서 기념식이 거행됐다. 김달삼은 그 당시 대정중 사회담당 교사이면서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다. 머리가 좋았지만 항상 품에 단도를 품고 다니며 보스 노릇을 했다. 대정국민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6천여의 군중들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가파도에서도 1백여 명의 주민들이 어선을 타고 나와서 행사에 참여하였다. 기념식은 이운방의 사회로 대정중 교장 이도일과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벌여온 이신호 등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기념식이 끝난 다음에는 대정중학생들의 연극공연이 마련되어 있었다. 폐회선언 직후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일부 군중들이 연극 공연장으로 들어가거나 귀가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운동장 한복판에서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행렬 대열로 돌입한 것이었다.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서 열기를 돋우더니 교문 밖으로 박차고 나갔다. 그 시위는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위행렬 선두에 김달삼이 학생들과 어깨를 끼고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히 시위 여부는 그날 역원회의에서 의논하기로 된 것인데 그런 절차도 없이 감행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시위행동을 제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주 남로당의 세대교체 ‘1. 민간인 소요(제주도 게릴라부대) 꽤 믿을만한 정보원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제주도의 게릴라부대(인민군)는 섬을 4개 지구로 나누었다. 각 지구는 2~4개의 면을 관할한다. 각 면에는 면 부대가 위치하고 있거나 전체 지구의 면 부대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1~2개의 지정된 작전기지가 있다. 4개 군사지구는 선거반대 폭동 기간 게릴라부대 최고 사령관인 김달삼이 지휘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무장 게릴라는 184명으로 추정되며, 이보다 4배 많은 비무장 민간인들이 보급, 기록, 연락, 정보 업무를 담당하거나 정치요원으로 폭도들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다. 논평 : 지난 2주 동안 본토에서 파견된 응원경찰대가 다수 제주도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폭동과 소요를 일으키기 위해 ‘공격개시’ 신호가 떨어지면 게릴라 대원들은 이러한 경찰력의 감소를 최대한 이용하려 할 것이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주간정보요약(G-2 Weekly Summary)1948년 9월 17일~1948년 9월 24일(No. 158, 1948. 9. 24. 보고) 제주도 남로당의 뿌리는 조선공산당에 두고 있다. 조공은 1945년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한 민가에 모여 정당결성을 결의하면서 태동되었다. 1946년 11월 중앙에서 조선공산당(박헌영)·조선인민당(여운형)·남조선신민당(백남운) 등 3개 좌파정당이 통합, 남로당으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1946년 12월 조천 김유환의 집에서 긴급회의를 갖고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제주도위원회는 첫 사업으로 3·1절 기념집회를 배후에서 주도하였다. 남로당은 민관총파업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보였지만, 이런 과시는 결국 미군정에 의해 응원경찰·서청 등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1948년 1월 22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이 노출되면서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미 CIC와 군정경찰은 조천면에서 있었던 남로당 집회를 덮쳐 모두 106명을 검거하였다. 1월 26일까지 다시 전도에 걸쳐 115명이 추가로 붙잡혔다. 등사기와 많은 양의 문서가 압수됐다. 검거된 사람들 가운데 남로당 제주도당 안세훈 위원장을 비롯해 김유환·김은환·김용관·이좌구·이덕구·김양근·김대진 등 거물급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이 사건을 이른바 '1·22 검거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검거선풍으로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서가 있었던 조천·신촌뿐만 아니라 제주읍을 비롯해 도내 곳곳에서 핵심당원들이 체포되었다. 김달삼도 붙잡혀 경찰서로 연행되어 오다 관덕정 앞에서 2명의 호송경관을 뿌리치고 도주했다. 칠성통 금강약방에 기거하고 있던 조몽구는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피신, 측후소에 숨어 살았다는 일화가 있다. 총 221명의 연행자 중 63명은 경찰의 심문을 받고 바로 풀려났다. 그 방면자들은 공산주의자인 남로당원이었다.(Those released were members of the communist OUTH KOREA LABOR PAR-TY.) 무장투쟁 과정에서 지도부 내에서는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명분론과 위기설을 앞세운 강경파가 당조직을 장악하게 되었다.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정중 교사 출신 김달삼과 조천중학원 교사 출신 이덕구를 비롯해 김대진·김용관·강규찬·김두봉·이종우·강성렬 등을 꼽을 수 있다. 제주도 좌익세력은 지역별로 이른바 '자위대'를 편성, 한라산의 각 오름에서 무장투쟁을 대비한 준비에 들어갔다. 애월지서로부터 중산간지대인 어도지경 '샛별오름' 부근에서 '청년들이 무장훈련을 한다는 제보도 있었다. 그들 청년들은 낡은 99식 총과 목총 등으로 훈련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도 이 '샛별오름'에서의 조우를 자위대와 경찰간의 첫 전투로 기술하고 있다. 경관 30명과 서청·대청대원 등 200여 명이 양쪽으로 포위 공격해 오는 바람에 자위대에서는 원시적인 각종 무기와 몇 자루밖에 없었던 99식총 등을 활용,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1명이 잡히고 1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즉각 다른 곳의 자위대원들의 지원을 받아 노도와 같이 돌진 생포된 대원을 구출해 냈다는 줄거리이다. 청년들이 산중에 은거하면서 죽창 · 철창 등을 만들며 무장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림면 저지마을에서도 확인되었다. 4 · 3사태가 나기 전에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5km 가량 똘어진 '한수기' 밀림지대에서 청년들이 무장훈련을 하였다. 그곳에서 죽창 담금질을 하는 참기름 허벅을 비롯해 철창 · 죽창 등을 만들었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의 평화협상 ▲ 김달삼과 김익렬. ‘제주도가 지난 4월 3일 미명에 한라산의 봉화로 개시된 소요로 인하여 이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듭하면서 전도가 묘지화할 우려까지도 있는 듯이 보였으나 김봉호(金鳳昊) 신 청장의 완화정책으로 말미암아 도내 각 부락에는 점차 명랑한 빛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우리 기자단 일행이 수집한 정보로 한라산 깊이 숨어 있는 소요측 동정을 살펴보면 아직도 약 1,000에 가까운 주력부대가 건재하고 있다 하며 그들은 김달삼(金達三․28)이라는 총사령장의 지휘를 받고 있으며 (1) 도민 생활의 안전을 복구시키는 당국의 적절한 시책 (2)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찰의 무장해제 (3) 경찰관의 권력남용의 엄금 및 모모 사설단체의 숙청 등의 요구조건을 걸고 이 현실 문제의 해결이 실현되지 않는 한 최후까지 도내 전 인민의 생명 재산의 안전을 위하여 재궐기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는데 이에 대한 책임당국의 대응책 여하가 자못 주목되며 제주도의 운명을 좌우시킬 관건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주어 제주도를 싸돌고 있는 무거운 구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제주 발 합동】’ (같은 기사 자유신문 48. 7. 20 / 조선중앙일보 48. 7. 21)-조선일보 1948년 7월 20일 1948년 4월 28일 대정면 구억국민학교에서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 두 사령관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4시간동안의 협상 끝에 합의 내용을 이끌어내었다. 1. 72시간 내 전투를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간주한다. 2.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3.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저녁에 협상을 마무리한 김익렬은 제주읍으로 건너와 맨스필드에게 협상 결과를 보고했다. 맨스필드는 크게 만족하며 전 경찰에 대해 외부 활동을 일체 금하도록 명령했다. 양측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협상 사흘 만인 5월1일에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를 방화하는 '오라리방화사건'이 벌어지면서, 유혈충돌을 막기 위한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익렬 연대장은 오라리방화사건 직후, 유혈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 경무대장과 육탄전을 벌이며 싸운 끝에, 5월 6일 해임되었다. 제주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결정한 미군정이 자신들의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해줄 새로운 사령관으로 박진경을 발탁했다. -북한으로 간 김달삼 ▲ 1947년 9월, 월북 하기 이전에 사진. 이 사진은 박헌영의 딸 박비비안나가 오늘날 소장하고 있다. ‘보고에 따르면 최근 북한에서 돌아온 인민해방군 지도자 김달삼이 다시 북으로 갈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C-2) 이번 북한행의 목적은 그가 이전 북한 방문시 제공받기로 했던 무기와 보급품을 수령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219호, C-6)’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9월 18일~1948년 9월 20일 (No. 941, 1948. 9. 20. 보고) ‘【공동통신】(전략) 제주도 대표 김달삼씨가 등단하자 제주도 인민투쟁의 총지휘자 김달삼을 환영하는 우뢰같은 박수소리로 장내가 떠나 갈 듯하며 회장의 인사들은 오래 계속되는 박수에 ××에××의 경의를 표하였다. 김달삼씨는 제주도인민 항쟁과 이번 선거투쟁 무장봉기대와 인민들의 투쟁에 대한 피를 뿜는 듯 자세한 보고 마디마디에 찬양과 **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로써 오후 7시 제 2일의 대회는 전부 종료하고 각 대표는 최승희(崔承喜)무용단의 무용을 관람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25일 기사 “첫째로는 30만 제주도 전체 인민들이 불타는 조국애로써 강철같이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 매국노 리승만, 김성수, 리범석 도배들의 남조선 분할 식민지 침략정책을 단호히 반대하고 조국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제주도 무장구국항쟁은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조선 전체 인민들의 위대한 구국투쟁의 일환인 까닭입니다. 전국에서 투쟁이 있었기에 적들이 제주도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김달삼의 해주대회 연설문 중에서. 김달삼은 1948년 8월 2일 제주도를 출발 목포를 경유하여 해주로 갔다. 그가 제주도를 떠남에 따라 이덕구(李德九)가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의 지휘 총책으로 나서게 되었다. 해주대회에 참가한 제주도 인민대표는 안세훈·김달삼·강규찬·이정숙·고진희·문등용이다. 해주대회 첫날인 8월 21일 주석단 선거에서 김달삼이 허헌·박헌영·홍명희 등 좌파 거물들과 나란히 주석단 일원으로 뽑혔다. 8월 25일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북한 측 대의원 212명을 뽑는 총선거와 남한 측 대의원 360명을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선출하는 일이었다. 제주도 대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뽑혔다. 김달삼은 ‘입후보자에 대한 토론’ 시간에 토론자로 나서 제주4·3사건에 관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우선 박헌영에 대한 지지를 밝힌 후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과 관련,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실시에 따른 분노가 폭발해 벌어진 자연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했다. 이어 5·10선거를 보이코트 한 무장대의 ‘전과’ 등을 길게 설명한 후,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 김달삼의 연설문은 UN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노획한 문서로, 미국의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RG242, 북한노획문서19, 제주도]로 분류돼 있었던 것인데 후에 대한민국이 복사해온 것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2년에 펴낸 ‘4.3사건토벌작전사’에 수록돼 있다. 그후 김달삼은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교육을 받았다. 그는 1949년 8월 초 인밈유격대 제3병단(태백산지구)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3백명의 유격대와 함께 경북 안동 영덕 주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 제주에서 체포된 무장대원의 모습(1948.5)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사진. ‘【군 보도과 25일 발표】제주도 폭동사건을 야기하고 최근에는 소위 태백산지구 공비 부사령으로서 갖은 만행을 거듭하여온 김달삼(金達三)은 완전무장폭도 70명을 대동하고 3월 1일 울진군 평해면 백암산에서 패잔부대를 개편 후 최후로 월북할 기도 하에 북상하였는데 3월 21일 15시경 강원도 정선군 북면 고창곡 북방 1㎞지점 반론산 부근을 거쳐 북상중 정예 제185부대 예하 제336부대에 포착되어 약 20시간 교전 후 다음과 같이 섬멸 당하였다. △사살 38, 포로 5, M1 6, 99식 9, 38식 7, 카빈 2, 자동식 소총 1, 권총 1, 다발총 1, 기관단총 1, 실탄 630. 한편 동 전투에서 김달삼은 사살된 것으로 추측되어 그 정체를 확인하고자 각종 증거물을 대조 중이다.’ -조선일보 1950년 3월 26일(같은 기사 자유신문 50. 3. 26) ‘육군본부 총참모장 신(申泰英) 소장은 29일 영남지구에서 조량하며 갖은 만행을 다하고 있던 폭도의 괴수 김(金達三)의 사살을 확인한 다음과 같은 확인서 전문을 발표하고 아직 일부 남아있는 폭도 100명 가량은 이(李昊濟)의 지휘 하 일부는 북한으로 도주를 기도하고 일부는 양춘기를 고대하고 있으나 점차로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삼척 부근에 집결하고 있는 것을 포착하고 있어 이에 대한 토벌도 시간문제에 임하고 있으며 군이 지닌 사명도 거의 끝나 착착 경찰에 넘기고 있는 형세로 닥쳐오는 5월 선거도 무난히 진행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김(金達三) 사살 확인서 내용에 의하면 김(金)이 제7유격대 사령으로 월남시 포로는 선발대로 양양을 출발할 때와 태백산 지구 제3병단이 제1군단으로 개편당시와 지난 3월 1일 제1군단이 재차 백암산에서 개편될 무렵 이(李昊濟)의 개편의 목적설명과 김(金)이 3대 사령으로 임명되었던 것을 포로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확인하였고 그 후 반론산 전투에 도저히 탈출할 장소가 못되고 부대장과 국군에 대항을 결의하였으나 이미 완전히 포위되었고 또한 김(金)의 피살확인은 정보참모 인솔 하에 직접 시체를 목격한 바 죽은 지가 오래되어 용모의 분별을 잘 할 수 없었으나 안경 쓴 형체와 복장, 기타 소지품이 틀림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반론산에서 거두어진 종합전과에 있어도 43대 60명 중 54명 사살, 포로 6명, 기타 전리품도 시인하였고 사진과 실물의 대상도 물론 내무부 치안국의 골상 감정에 대한 전문가들도 포로가 말하는 것과 같이 김(金)이 사살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하며 요즈음 입수된 김(金)이 직접 집필한 일지내용은 다음과 같다.(후략)’ - 동아일보 1950년 3월 30일(같은 기사 국도신문․경향신문․자유신문․조선일보 50. 3. 30) ‘ 제12호. 3월 10일께 접수받은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의 최고 게릴라 지도자 김달삼이 이끄는 80여명의 게릴라들이 북한이나 오대산에 있다.( 제11호 참조) 같은 시기에 제3사단 군인이 약 80명(북으로 향하는)과 단기교전을 벌였다. 포로 2명은 자신들을 김달삼 부대 소속이라고 밝혔다. 3월 21일까지의 경찰과 군의 보고서는 3월 20일을 전후해 호향산(좌표 1074-1602) 근처의 제8사단 관할 지역 남쪽으로 부대를 추적했다고 밝혔다. 제21연대 군인들은 발월산(좌표 1170.5-1610.5) 근처에서 게릴라들과 조우했다. 대규모 전투는 22일 오전 8시 40분에 있었다. 교전기간에 김달삼이 숨진 것으로 보고됐다. 아군쪽 손실 : 사망 5명, 게릴라쪽 손실 : 사망 38명, 포로 5명, M-1 소총 6정, 탄약 340발, 99식 소총 9정, 탄약 90발, 38식 소총 7정, 탄약 80발, 박격포 1기, 카빈총 2정, 권총 2정, 경기관총 1정, 수류탄 12발. 논평 : 특히 김달삼이 사살됐다면 이번 교전은 게릴라 작전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합동주간정보분석( Joint Weekly Analysis WEEKA) 1950년 3월 24일 ‘태백산 지역의 게릴라 규모/현재 약 100명의 태백산 세력은 조직을 해체하여 이호재(Lee Ho Chai)와 그의 부하 김달삼(Kim Tal Sam)이 이끄는 두 개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4월에 벌어진 첫 번째 전투에서 이씨는 확실히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4일에 보고된 김(달삼)의 죽음은 한국군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리산 지역의 게릴라 규모/이(호재)는 과거 남로당 중앙위원회의 멤버이자 1949년 9월에 북한에서 태백산지역으로 게릴라 300명을 이끌고 침투하였다. 김(달삼)은 1948년 이후 제주도 봉기의 게릴라 지도자였다. 그는 군부대 불만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던 1948년 10월 여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지리산 지역에서 활동하다 1949년 태백산 지역으로 움직였다. 이(호재)가 죽은 후 김(달삼)은 남한에서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게릴라활동이 없는 지역/ 경기도, 충청남북도, 제주도 지역에서 현재 게릴라 활동이 보고되지 않고 있다. 남원 지역이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 여타의 호남지역(섬진강 서쪽의 전라남북도 지역)의 게릴라들은 지리산 지역으로 쫓겨났다.(중략) 9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게릴라 활동이 보고된 바 없으며 게릴라들이 대부분 제거된 것으로 보인다. 임시대리대사 에버레트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 -주한미사절단 및 주한미대사관(American Mission in Korea & American Embassy in Korea) 1950년 5월 15일 (1950. 5. 15. 보고) - 긴 지명 ‘김달삼모가지잘린골’ ▲ 반론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반론산에는 천년기념물인 철쭉이 있고, 산호동굴도 있다. 가을엔 억새가 군락을 이룬다. ‘작전요약(Digest of Operations) 고 김달삼의 시신이 오늘 중으로 신원확인을 위하여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다. 확인 내용을 가능한 한 신속히 보고할 예정이다. 작전참모부 한센(Hansen)’-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50년 3월 24일 긴 지명으로 알려진 ‘김달삼모가지잘린골’.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김달삼이 이 근처에서 잡혀 목이 잘렸다하여 한자 인명을 그대로 살린 지명이다. 우측에 있는 산자락은 반론산(1068m)이다. 반론산은 빨치산 퇴로 중 하나였다. 제주를 탈출한 김달삼은 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 김달삼부대(제3군단)를 이끌었으며 영양과 영덕 일대에서 활동했다. 결국 토벌군에 밀려 퇴각하던 중 정선군 북면 반론산에서 험난한 일생을 마감했다. 1950년 3월 20일 김달삼이 정선군 삼운리에서 국군 제185부대 수색대에 발견되었다. 공비는 반론산 동쪽을 수비하고 있던 제185부대 예하 제336부대 2중대와 접전이 되어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3월 22일 전장을 정리하였는데 반론산 골짜기에 즐비한 공비시체와 그 사망자수에 따르는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반론산으로부터 동북쪽 정선군내 지경리에서 김달삼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가 소지하였던 권총 모젤1호, 용병작전에 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수첩 등을 압수하였다. 수첩에는 러시아어로 용병작전 정보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 반론산. / 김관후(시인·소설가)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
  13.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3865 독립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강문석
  14. [김관후의 4·3칼럼] (7) 제주4·3 당시 유격대총사련관 김달삼의 장인, 강문석
    1. 항일운동의 거두 강문석
    ▲ 조봉암. 강문석(姜文錫, 1906년 ~1955년)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대정읍 안성리 출신이다. 강문도(姜文道)·황정(荒井)·산하(山下)·김달삼(金達三)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제주심상소학교를 거쳐 경성고보를 졸업하였다. 그의 증조부 강도순(姜道淳)은 추사적거지의 주인이었다. 아버지는 강기용(姜基龍)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5년 4월 모슬포에 한남의숙(漢南義塾)을 설립한 뒤, 모슬포청년회 회원으로 민중계몽운동과 청소년운동을 벌였다. 특히 동지들과 함께 개설한 모슬포의 광선의숙(光鮮義塾)과 가파도의 신유의숙(辛酉義塾)은 항일인사를 배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강문석은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던 ‘요시찰 임물’이었다. 1928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가 토쿄와 오사카에서 전국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약칭 : 全協)에 가입하여 화학노조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전협은 일본공산당의 외곽단체였다. 그해 10월 오사카[大阪] 히가시나리구[東成區]의 조선인 노동자 300여명과 함께 공장 습격에 가담, 11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31년 9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조봉암(曺奉岩)과 인연을 맺었다. 중국공산당 강소성(江蘇省)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 지도요원 및 한국인 반제동맹(反帝同盟)위원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일본 경찰은 조봉암과 강문석을 체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 일본강점기 독립운동가의 발목에 재우던 족쇄. 1932년 박헌영(朴憲永)·조봉암·김형선(金炯善)·김단야(金丹冶) 등과 함께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을 결성하여 선전부장이 되었다. 일본 경찰은 계속 ‘요시찰 인물’들을 노리고 있었다. 조봉암이 때때로 프랑스 공원에서 밀회한다는 정보를 접한 일본 경찰은 그해 9월 28일 아침 프랑스 경찰의 협력을 얻고 조봉암과 서병송(徐丙松)을 체포하였다. 강문석도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어 조봉암· 홍남표(洪南杓) 등과 함께 12월 3일 인천항으로 호송된 후 신의주에 있는 평북 경찰부로 압송되었다. 1934년 5월 30일 오사카 공소원[大阪控訴院]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에 박헌영이 결성한 조선공산당 재건 비밀조직 ‘경성콤그룹’(Com-grop)의 멤버가 되기도 하였다. 경성콤그룹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조직이다. 태평양 전쟁을 수행키 위해 1941년 일제는 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한면서 많은 항일투사를 예비검속하였다. 이때 전향을 거부하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이 되고 1945년 8월 16일 석방되었다.
    1. 조봉암과 함께 상해한인반제동맹 활동
    ▲ 신탁통치안 지지 군중대회 모습. 당시 공산당은 평양 정권의 지시에 따라 반탁에서 찬탁으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였다 ‘중국공산당 상해 한국인지부에서는 누차 일본 군인에 대한 일본어 적화 선전의 선동적 문서를 발행 살포하고 있었는데, 이들 전단은 주로 박철환(朴鐵丸, 조봉암의 별명, 당지 조선인 공산당 수령)과 김달삼(金達三, 강문석의 별명, 중국공산당 상해 한국인지부 책임자)이 집필한 것으로, 저들은 중국공산당 법남구위(法南區委) 지도하에 동경에서 이봉창(李奉昌) 폭탄 투척사건과 윤봉길(尹奉吉)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 사건의 결과 당시 민족파 조선인 갑부의 활동력은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그 세력확대를 기도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 일본 상해주재 사무관 보고사료’ 중에서 발췌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 1899~1959)은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 공산대학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였고, 여기에서 함께 활동한 사람이 바로 제주출신 강문석이다. 1931년 2월 조봉암은 혁명동조자들의 대동단결, 혁명 대중의 직접 원조와 혁명운동자와 그 가족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는 ‘중국혁명호제회(中國革命互濟會)’ 상해한인분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革命의 벗』을 발행하였다. 조봉암은 한인분회를 결성한 후 자신의 동생인 조용암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장태준ㆍ정몽주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 박헌영(1946.4. 이 사진은 박헌영의 딸 박비비안나가 소장.) 그 해 12월 3일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40여 명을 소집하여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 창립대회를 열고 그 책임을 맡았다. 여기에 강문석이 참여한다. 강문석은 중국 공산당 한국인지부 간사(幹事)로 상해 한국인 반제동맹 책임자인 조봉암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상해한인반제동맹은 상해한인청년동맹 등을 병합하여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상해반제연합회에 가맹하여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일제타도의 투쟁에 앞장섰다. 기관지 『赤旗』 를 발행하여 일본ㆍ프랑스 경찰이 안창호 등을 체포한 것을 비난하기도 했고, 상해 노동자들의 파업 지지와 일본의 침략 방어를 위한 비행기 구입자금 모금운동 등을 폈으며, 중국 국민당에 대해 ‘반동적 자본주의 배(輩)’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상해특신) 당지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의 거두 조봉암(曺奉岩)이 체포된 이래 불조계(佛租界) 당국은 각 방면으로 대대적 수색을 하여오던 결과 하비로(霞飛路)와 천문태로(天文台路) 일대에서 공산당원 중요인물 5명을 또 체포하여 일본영사관 경찰당국으로 인도하였다. 5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김승락(金承洛)·염룡섭(廉龍燮)·이무성(李武成)· 강문석(姜文錫)·장동선(張東宣) 이상 5명을 체포하는 동시에 숙소에서 수다한 비밀문서도 발견되었는데 공산군에 관한 것, 중국공산당 내 조선인부를 설치한 내용, 공산주의 서적 등이 그 중요한 것이라 한다. 또 불조계 당국은 불조계 내에 조선공산당의 본부가 설치하였다하여 일본영사관 측과 일체 협동하여 수색 중이다’-東亞日報 1932년 10월 16일자 기사 ‘(신의주) 평북경찰서에서 약 1년간의 활동으로 평북도내는 물론 경성, 인천, 마산 등지와 멀리 중국 상해(上海)에서 체포 압래하여 취조를 끝마치고 그간 신의주 검사국에 송치하였던 조선공산당 재건 재승인(再承認)운동사건의 조선공산당 상해파(上海派) 일파 중의 거두 조봉암(曺奉岩)·홍남표(洪南杓)·염룡주(廉龍周)·서병송(徐丙松)·김승락(金承洛) 등 5명은 그 동안 곡전(谷田) 검사의 취조가 끝나 지난 2일 다시 동법원 예심정에 넘기어 소전창(小田倉) 예심판사의 손에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강문석(姜文錫)은 일찍이 동경과 대판에서 전협계(全協界) 노동조합 운동에 투신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보석 출옥 중에 상해로 건너가 조봉암 일파와 행동을 같이 하여 상해 한인반제동맹(韓人反帝同盟) 들을 조직하여 동당에서 발행한 「팜플렛」과 「삐라」의 대부분을 작성하는 등 동당의 중요한 멤바의 하나로 전기 5명과 함께 송국되었다. 본적:제주도 대정면 안성리 주거:上海 法曺界 巨碩達路 637 강문석(姜文錫 가명 姜文道 金達三 荒井 山下) 28세 1명만은 사건이 일본공산당과 관령이 되는 관계상 대판지방재판소 예심정에 압송했다’ -東亞日報 1933년 3월 5일자 기사 ▲ 조봉암. 처음 조봉암이 체포되자 강문석과 당원들은 「조선공산주의자에 대한 일부 관헌의 탄압에 일대 항의를 일으키자」라는 제목으로 전단을 만들어 1932년 10월 2일 홍구(虹口)지대에 살포하려다 적발되었다. 그 전단은 강문석이 집필하고, 박준환(朴俊煥, 조봉암의 동생, 조용암의 개명. 중국혁명 瓦濟會 상해 한국인분회 책임자)이 등사원지에 글을 썼다. 조봉암은 일본경찰로 넘겨지고, 20여 일 동안 수사를 받았다. 조봉암을 검거한 일본 경찰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에 나서 강문석·이종설·염용섭·김승락·장동선·이무성 등을 검거했으며, 한국으로 압송할 때 이들도 함께 하였다. 일제는 트렁크·버들고리 등 10개에 달하는 한인지부가 발행한 ‘불온인쇄물’과 반제동맹강령·규약·선언·정치결의안·기타 각종 선전문·지령·강령 등 277점을 압수했다. 조봉암과 강문석을 포함한 공산주의운동자들은 상해에서 경안환이라는 일본 기선에 태워져 12월 3일 인천항으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7년 만에 돌아온 고국이었지만 치안유치법위반 피의자 신분으로 꽁꽁 묶인 상태여서 먼발치로 고향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끼니때마다, 콩알은 비둘기에 던져 주고 보리밥 알은 창가에 놓아 참새들이 와서 먹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끼도 빼지 않았으며 콩과 밥알을 주어먹는 날짐승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독방의 고독한 그에겐, 죽음의 그림자를 눈앞에 보는 그에겐 이 순성(順性)의 귀여운 날짐승들이 유일한 손님이요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나 정성드리 비둘기와 새를 기르던 이 방의 주인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홀연히 떠나가 버렸고 새들은 그들을 반겨주고 사랑해 주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조봉암 처형과 관련하여 서대문형무소와 수인들과 간수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민담 중 ‘봉암새’(혹은 ‘죽산조’) 이승만은 1945년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일이 많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일까? 초대 내각 인선 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만일 강문석이 북한으로 탈출을 하지 않고, 공산주의와 결별하였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1. 박헌영과 함께 경성콤그룹(Com-group) 활동
    ▲ 신탁통치안 지지 군중대회 모습. 당시 공산당은 평양 정권의 지시에 따라 반탁에서 찬탁으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였다 경성콤그룹(Com-group)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위하여 1939년 조직된 공산주의 비밀조직이다. 강문석은 박헌영과는 상하이에서 함께 활동하였고, 비밀조직 경성콤그룹에도 가담하였다. 경성콤그룹은 노동자·농민·학생의 조직화를 기반으로 결성된 지하비밀조직이다. 일제의 탄압에도 전향하지 않았으며, 광복 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주류를 이루었다. 처음 이재유(李載裕) 계열의 이관술(李觀述)·김삼룡(金三龍)·정태식(鄭泰植) 등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구성한 후, 1940년 2월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을 지도자로 하여 정식으로 결성하였으며, 이현상(李鉉相)도 조직에 가입하였다. 경성콤그룹은 반전투쟁, 반일민족통일전선전술, 결정적 시기의 무장봉기 전술을 실천해 나갔다. 조직부·인민전선부·노조부·학생부·일본유학생부 등을 두었고, 섬유노조책·금속노조책·전기노조책·출판노조책을 별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940년 11월 말경 태창직물주식회사 공장반 조직에서 시작된 일제의 검거로 지도부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조직의 중견지도자인 이주상(李胄相)·김재병(金在丙)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도하였지만, 1941년 일제의 검거로 다시 와해되었다. 이렇게 1941년 겨울까지 3차례에 걸친 대규모 검거사건으로 세가 위축되었지만, 여러 개의 소그룹을 유지하면서 급변하는 혁명정세를 주시하였다. 또한 앞으로 재건될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결정적 시기에 도시폭동전술에 입각하여 일제를 전복한다는 방침으로 다양한 형태의 반전투쟁을 전개하며, 계급·계층·정파·성별·종교 등을 구별하지 않고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여 인민정부를 세우려고 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한층 강화되어 모든 사상운동이 중단되었던 상황에서 조직적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였으며, 1945년 9월 11일에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1. 제주4·3 당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의 장인
    ▲ 강문석 사위 김달삼. ‘과연 그 장인에 그 사위/ 김달삼/ 본명 이승진/ 일본 예비 육군사관학교에서/ 하필 김익렬이 동기생이었다/ 김익렬은 제주도 9연대장/ 두 사람은 단 한 번 4.3사건 휴전 담판을 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고/ 고개 저으며/ 산에서 돌아온 김익렬은 생각했다’ -고은의 시 ‘장인 강문석’(시집 만인보‘에서 발췌)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난 1948년 2월 이후 미군정과 좌파간에 치열한 대립국면이 표출됐다. 좌파진영에서는 시위, 삐라 살포, 전주 절단, 철도 파괴, 지서 습격 등의 격렬한 선거 반대 캠페인을 전개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157쪽 ‘남로당 선전부장 강문석(Kang Mun Suk)은 일본공산당과 아시아 코민포름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한 연락소의 책임자이다. 일본공산당의 중앙집행위원인 김천해(Kim Chun Hae)와 일본공산당의 노사카 사부로(Nosaka Saburo)는 남로당의 강문석과 송성철, 북로당의 최용달과 이강국을 통해 코민포름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 암호로 된 국제우편물에 따르면, 밀수선들이 부산과 제주도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고 있으며 밀사가 연락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다른 정보원은 일본해에 접한 니가타, 타우루가, 아키타 등의 무선국을 통해서도 연락이 이루어진다고 추정했다. 또 코민포름과의 연락은 무선 연락 이외에도 함경북도 청진항과 나남항, 그리고 일본해에 접한 일본의 알려지지 않은 항구들 사이를 운항하는 밀수선을 통해서도 이뤄진다-1948년 12월 31일’ -주한미육군 971방첩대(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 1947년~1948년 활동보고서 강문석은 제주4·3 당시 유격대 총사령관을 지낸 김달삼(金達三, 본명 李承晋)의 장인으로 더욱 유명하다. 자기가 사용하던 가명 김달삼을 사위가 사용하도록 했고, 그의 처 김성화(金成花)와 사이에 태어난 큰딸 강영화(姜英愛)와 결혼하도록 허락하였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유배 올 때 살았던 집 주인 강도순(姜道淳)의 증손자가 바로 강문석이다. 조국이 해방되자 박헌영의 재건공산당에 합류하여 선전부장을 맡는 등 박현영의 오른 팔이자 남조선로동당 간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지만 해방 직후 잠시 고향에 들러 인민위원회를 지도했고, 보성초등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조선공산당 서기국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된 이후, 1946년 2월에 결성된 좌익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노동문제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의 3당이 합당되어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한반도의 현안 문제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일본공산당 서기장 도쿠다 규이치[德田球一]와 회담하였다. 1948년 4·3이 발발하고 남한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으로 건너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북한 정권을 수립을 위한 남한의 지하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다. 그 후 강문석은 1950년 10월 노동당 사회부장을, 1953년 노동당 상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956년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여기에서 제주4·3의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을 따질 필요가 있다. 박갑동(朴甲東)은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된 「남기고 싶은 글」에서 “폭동의 두목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을 정책 및 조직 지도 책임자로 선정하여 현지로 보냈었다.”고 쓰고 있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남로당 제주도당 강 · 온건파 간의 노선갈등으로 ‘4·3’발발 직전에는 제주도당 지도부 핵심세력이 종래의 일제하 사회주의 노선의 장년층에서 젊고 급진적인 신진세력으로 교체됐다. 신진세력의 리더로서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23세의 청년 김달삼이었다.” 고 밝히고 있다. 나이 어린 김달삼이 어째서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크게 보상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남로당 중앙위원이자 선전부장이었던 그의 장인 감문석의 후광 때문이었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 북으로 간 강문석과 고경흠
    ▲ 고경흠. ‘이처럼 제주도민들은 이 선거의 의미를 몰랐다. 투표용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백지에 손도장을 찍는 형태였고 그 목적에 대해서는 ’무장대를 지지한다‘는 정도의 뜻으로만 알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1948년 여름에 제주도 전역에서 벌어졌던 이 일은 ’백지날인 사건‘이라고 부른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38쪽 1948년 7월 중순경부터 남한에서는 ‘지하선거’가 있었다. 이는 북한 정권 수립에 따른 것이다. 공개적인 선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2중 선거’를 실시하였다. 인민대표를 뽑는 선거였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올라간 인민대표들은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남조선대표자대회를 열었다. 남한 사회를 술렁이게 했던 ‘지하선거’에서 뽑힌 360명도 함께였다. 제주도민들은 이 선거의 의미를 몰랐다. 투표용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백지날인 사건’이었다. 해주대회에 제주도 인민대표는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이라고 좌파측 자료는 밝히고 있다. 제주도 대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가 최고인민회회의 대의원에 뿝혔다. 김달삼은 제주인민해방군 사령관이었다. 강문석· 고경흠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북한 지역에서도 240여 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들 240명과 해주에서 선출한 360 여명의 대의원들 600여 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 겸 외상에 박헌영을 선출하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했다. ‘당면의 조선혁명의 역사적 내용은 농업혁명이다. 농업문제의 철저한 민주주의적 해결과 모든 봉건적 遺制를 소탕하기 위한 투쟁은 제국주의 지배와 타도와 민족해방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기초를 이룬다. 혁명의 추진력의 결정적 부대는 실로 전인구의 80%를 훨씬 돌파하는 방대한 농민대중이다. 농업혁명을 위한 분명한 지표를 주고 광범한 농민대중을 투쟁에 동원하여 자기의 계급적 지도하에 획득하는 것은 현재 민족혁명의 지도권의 결정적인 기조조건이 아닐 수 없다’ -고경흠의 논문 「조선에서의 농민문제」 중에서 ‘작년 9월 철도파업에 뒤이어 10월 봉기로 수많은 동족은 살상 희생되었고 수천 명은 검거되었던 대구사건만 하더라도 20여 명의 사형까지 내게 하였다. 우리 민족이 거족적으로 경축해야 할 3·1절에 우리 민족의 피는 이 땅에 다시 물들이게 되었다. 이 마당에 만일 일제 때라면 수백 명 수천 명 우리의 피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하여 피를 흘릴 수도 있지만 해방된 이 땅에 경향각지에서 불상가사 일어난 것은 확실히 조선민족의 불행이다’ -해방 직후 고경흠이 「독립신보」 창간 주필을 맡아 쓴 글 중에서 강문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간 고경흠(高景欽)은 어떤 인물가? 그는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적 이론가이다. 1946년 「獨立新報」를 창간하여 주필로 있으며 자주독립을 바탕으로 겨레의 통일을 위하여 애썼던 언론인이다.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면서 「勞動者新聞」과 「現階段」을 찍어내었고, 「戰旗」, 「인터내셔날」, 「無産者」 같은 잡지를 펴낸 문필가이다. 1910년 제주시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7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홍효민(洪曉民)·이북만 등과 함께 제3전선사(第三戰線社)를 설립하고 잡지 《第3戰線》을 발간하였고, 그해 5월에 재동경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에 국내로 돌아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일명 카프)의 조직 개편에 동참하고 사회주의 문예운동을 벌여나갔다. 1928년부터 필명으로 많은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現階段』에 「조선운동 발간선언의 비판」, 「무엇으로 시작할 것인가-공장의 속으로」, 「개량주의와 항쟁하라-원산쟁의에 대하여 전조선 노동자 대중에게」 등 비중있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외 「조선에서의 농민문제」 외에 「전위볼세비키화를 위하여」, 「조선의 당면문제」, 「조선문제를 위하여」 등의 글도 있다. ▲ 1946년 밀담을 나누고 있는 박헌영과 여운형. 국내에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그 해 도쿄지회에 가입하였으며,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9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국내에서 결성된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재건에 힘썼다. 같은 해 7월에 제주도에서 체포되어 고베[神戶]로 압송도중 탈출하여 11월에 톈진[天津]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2월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조공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그해 4월에 여러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같은 해 8월 조선공산당 재건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에서 박헌영과 함께 상해반제한인동맹을 결성하고, 그 후 박헌영과 표리일제가 되어 당 재건을 위한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것이 바로 강문석이다. 1933년 5월 법정에서 사상전향을 선언하였으며, 1938년 7월 옥중에서 사상전향자들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결성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1940년 3월 여운형(呂運亨)의 일본 방문시 비서로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조선공산당, 9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동참하였으며, 1946년 좌익 신문 「獨立新報」 주필이 되었다. 1946년 8월 〈합당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들에게 고함〉이라는 전단을 만든 뒤,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은 당 대회를 소집하여 토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박헌영(朴憲永)의 당 운영을 비난하였다. 10월 박헌영 중심의 남조선노동당에 반발하여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에 동참하였으나 정세가 사회노동당에 불리해지자 11월에 탈퇴하였다. 여운형의 특사로 평양에 가서 김일성(金日成)과 회담하였다. 1947년 여운형이 위원장인 근로인민당에 참여하였고, 이후 월북하였다. 언제 올라갔는지 알 수 없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6년 7월 19일 박헌영이 총살당한 다음 숙청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정권의 중앙후보위원으로 후보 서열 45위에 올랐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한지근(韓智根)에 암살될 때 같은 차에 동승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고경흠이다.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
  15.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List.html?page=4&total=74&box_idxno=&sc_sub_section_code=S2N113 제주의소리
  16.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B%AC%B8%EC%84%9D_(1906%EB%85%84) 위키에서 강문석 항목
  1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68702 김달삼이 사망한 정선 고양리 반론산을 찾아
  18. p179513789984870_728.jpeg 남도부 하준수, 동아일보.1954.10.16
  19. https://nongak.net/board/index.html?id=nongak431 논객넷의 4.3자료
  20. http://jeju43.net/main/index.html
  21. 2019040351068928.jpg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 제주4·3경찰유족회 등 10여개 단체로 구성된 ‘4·3바로세우기 애국안보연합’이 2016년 10월 6일 “제주4·3공산폭동을 항쟁으로 미화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22. 2019040336302164.jpg 4·3사건 당시 제주도 일원에 뿌려진 남로당의 삐라 내용. 1949년 1월13일 북제주군 구좌면 투쟁위원회가 제작한 이 삐라는 “조국해방의 결정적 계기인 (1949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민족은 총궐기 하였다”면서 “김일성 수상은 1월1일 신년사에서 장래에 남반부 동포들에게도 노동자에 노동법령을, 농민에게 토지개혁을, 여성에게 남녀평등권을 실시케 하며 미제를 철수시키고 매국단정을 타도하겠다”고 밝혔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분! 김일성 수상의 성명서가 구체화 될 날도 시간문제이며 인민군의 원쑤(대한민국)를 섬멸시킬 날도 가까워졌습니다”고 밝혀 제주 4?3사건이 1949년 1월 이후 김일성의 지시를 따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3. 2019040348495442.jpg 1948년 5월 8일자 동아일보의 <제주도폭동현지답사> 기사. 소제목에서 <동족살상이 인민항쟁인가>라고 꼬집고 좌익세력에 의한 폭동임을 분명히 보도하고 있다. 특히 <최고 100만원의 살인현상 지령, 극악무자비한 폭상>이라는 또 다른 소제목의 기사를 보면 “인민 해방군은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경위이상 3만원, 경찰 유력자는 100만원의 살인 현상금을 걸고 살해를 촉구하고, 각 읍면 촌락에는 후원대를 조직하여 물자를 공급케 하면서, ‘목포까지 김일성 군이 내도하였으니 안심하라’는 적 전술을 연출하고 있다”고 돼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300원이었으니 순경 1명 사살에 쌀 33가마니가 걸렸던 것이다. 이런 막대한 자금은 북한 공산당이 모든 국민이 함께 사용하는 화폐를 극비에 개혁, 구 화폐를 수거하여 남쪽으로 보내 사회를 교란하고 공작비, 파업지원비, 조직비 등으로 사용한 바 있다.
  24. 2019040352476489.jpg 제주 평화공원 앞에서 좌익폭도들을 제주4·3사건 희생자로 추모하지 말 것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제주4·3사건 바로잡기 대책회의> 관계자들(사진=뉴시스 캡쳐)
  25. 2019040356083841.jpg 제주 4·3사건 현장에 군경 출동 반대한다며 남로당이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란 이름으로 뿌린 삐라
  26. 죽창에 찔릴 각오로 쓴 사실보고서 제주 ‘4.3사건’과 대한민국 정통성 -- ‘4.3사건´ 57주년을 맞으며-- 필자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4.3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 시 ´제주 4.3평화공원´의 명칭과 관련하여 국무총리 주재하의 4.3위원회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4월 3일은 동족 간에 증오의 살육이 시작된 날이니 희생자 위령의 뜻으로 ‘평화´대신 ´위령´을 사용, ´제주 4.3위령공원´으로 하든가, 굳이 ´평화´를 선호한다면 ´4.3´을 빼고 ´제주 평화공원´으로 하자는 취지였다. 총리는 다른 위원들의 의견을 묻고 있었는데 강만길 위원(현, 광복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이 강력히 반대를 했다. 먼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4.3사건은 최초의 통일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니 ´제주 4.3평화공원´ 그대로 하자는 주장이었다. 국방부 위촉위원으로 활동했던 필자는 무한한 고통을 감수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 남과 북에 두 개의 국가가 수립되는 공간에서 영문도 모르는 희생을 당한 유가족들의 억울함에는 어떤 위로의 말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무고한 희생자의 명예는 최대로 회복되어야 하나 ´폭동´을 진압한 군과 경찰의 명예도 지킬 것은 지켜야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쟁을 했던 남북간에도 화해 협력을 시도하는데 억울한 죽음에 눈물도 없느냐´고 동료 4.3위원(전 4.3 희생자 유가족 대표)이 공박을 하면 필자에겐 물러설 공간이 없었다. 내 부모가 4.3당시 제주도에 있었다면 나도 같은 입장일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답변 밖에는! 육지왕래가 거의 없었고 통신수단도 발달하지 않았던 고도의 섬에서 생업에만 충실했던 대부분의 순박한 제주도 주민들은 제주도 밖의 사건 사고들을 알 수 없었고 그 원인과 배경파악은 더욱 불가능했다. 4.3사건 발발 57주기를 맞아 그 당시를 돌아다봄은 오늘의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할 우리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과거의 사건사고는 과거시점에서 파악하고 이해할 때 역사적 교훈도출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4.3사건 전후의 주요 사건 사고 연대기
      • <남북 공통 >
    • 45.8.15.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 *45.12.16-20: 미영중소 4대국 신탁통치 결정 *47.5.21-10.18: 2차 미소공동위원회(결열) *47.9.17: 미국, 한국통일문제의 UN의제 상정 *47.11.14: UN의 통한결의안채택
      • <38선 이북 >
    • 45.8.24 :쏘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장군), 평양도착 *45.9.2: 이북 5도에 인민위원회 조직 *45.9.20 : 북한에 ‘부르조아 인민정권’ 수립지령(스탈린) *45.9.14: 소련 군정당국 포고문발표(비공산체제 제거 및 공산체제수립) *45.10.13: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 *45.10.28 : ‘도 인민위원회’를 도행정국으로 통합 *46.2.8:북조선 인민위원회 발족 *46.8: 북조선 노동당(북로당) 결성 *46.10.10: 박헌영의 남한 탈출/북한 도착, *46.11.3: 지방인민위원회 대의원 선거 *47.2.17: 최고인민회의 구성(사실상의 공산정권 수립), *47.6.14: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방침공포 *47.11월: 헌법기초착수 (48.4월 초안채택) *48. 9. 9: 인민공화국 수립
      • <38선 이남>
    • 45.9.6: 여운형, 조선인민공화국(인공)창건 선언 *45.9.11: 박헌영, 조선 공산당 창당 *45.9.9: 미 24군단(군단장 하지장군),서울도착 *46.2.8: 반탁진영, 대한 독립 촉성회 결성( 공동의장: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46.2.16: 찬탁진영 민전 결성 (공동의장: 여운형, 박헌영, 허헌) *46.5월:정판사 위폐사건 (주범 박헌영 체포령,46.9.7) *46.9-10월: 9월 총파업 및 10월 폭동 *46.11.23: 찬탁진영 남로당결성 , *47. 2. 23:‘민전´제주도 위원회 결성 *47.3.1: 제주 3․1 사건 발생 *47.11.14: UN, 통일 한국 결의안채택 *48.1.8: UN 한국임시위원단 내한 *48.1.12-23: UN 한국임시위원단, 북한지역 총선감시 협조요청 및 소련 측 협조거부 *48.2.7: 남로당 2․7 폭동 *48.2.26: UN,남한지역 선거 실시 결정 *48.4.3: 제주 무장 폭동발발 *48.5.10: 제헌국회의원선거 *48.7.17: 대한민국 헌법 제정공포, *48.8.15: 대한민국 정부수립 *48.10.19:여수 순천반란 *48.11.17 제주도에 계엄령선포(12.31 해제) *48.12.1:국가보안법 공포 *48.12.12: UN, 대한민국 유일합법정부 승인 *49.6.29: 주한미군철수완료 *50.6.25-53.7.27: 6.25전쟁
    연대기 고찰에 필요한 착안사항 1. 8.15 해방직후에 한반도에 잠시 흘렀던 시대정신은 국제 공산주의였다. 민족은 없고 타도할 계급만 존재하는 공산당 선언ꡑ으로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으나, ´피억압민족의 독립은 억압에 반대하는 내용이 있어 일정한 단계에서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지원 한다´는 소련 공산당 강령에 따라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이 국제공산주의를 위한 대리전쟁이란 측면에서 소련의 조건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은 미군보다 2주 이상 빨랐으며 과거 일본에 빼앗겼던 한반도 종주권을 회복한다는 의지로 도착과 동시, 비공산체제의 제거와 공산체제수립에 관한 내용을 포고문에 명시한 반면, 미군은 일본군항복 접수라는 단순한 군사작전만을 염두에 두고 ´종족, 국적, 신조 또는 정치사상을 이유로 차별을 낳게 하는 것은 모두 폐지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로 인해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도 신원조회 없는 모병이 이루어져, 차후 4.3무장 폭동 및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3.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라”는 스탈린 비밀지령은 소련군 진주와 동시 단독정부수립을 구상했다는 증거로, ‘47년 2월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 통일정부 수립위한 UN한국위원단의 북한 입국이 거부되어 결국 조국이 분단되었다. ’45.10월의 북한5도 행정국 개편은 단독정부의 출발이며 ‘47.2월의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구성은 사실상의 공산정권 수립으로 대한민국 국회구성보다 1년 6개월이 빨랐다. 따라서 ’48.5.10일의 단독선거반대위한 4.3폭동은 사실상 북한의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폭동이었다. 4. 소련이 신속한 북한의 완전장악 후 38선을 넘어 남한 정세에까지 깊숙이 직접 개입했던 명확한 사실이 ´스티코프 비망록ꡑ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 비망록은 당시 소련군 정치담당 부사령관이었던 스티코프가 자신의 일일 업무구상과 지시사항 등을 적은 일기로서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한바, 몇 가지 예만 보면:
    • 46.9.9.일: "박헌영이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했다.
    • 46.9.10: "김두봉 북로당위원장을 호출했다. 남조선의 정세, 남로당으로의 3당합당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 46.9.25: "로마넨코, 김일성과 여운형의 보고가 있었다. 여운형은 소군 지도부와의 회담을 강력히 요구했다. 여운형에게 어떤 답변을 줄 것인가에 대해 지시했다."
    • 46.10.21: "46년 9월의 총파업 때 2백만엔을, 10월 폭동에 3백만엔을 지원했다"
    • 47.2.23일 개최된 남로당 산하의 ´민전´ 제주도위원회의 결성대회시 스탈린, 박헌영, 김일성, 허헌 등이 명예의장에 추대(47.2.26일자 제주신보)되고,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 때 사용된 선동구호가 스티코프의 지시에 따랐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4.3폭동 관련 사실 및 기타 자료 몇 가지 1. 폭동 주동자 김달삼은 남로당 선전부장 강문석의 사위이며, 폭동발발 4개월 후 북한의 해주 ‘인민대표자대회’(‘48.8.25)에 참석, ’4.3폭동’의 전과보고를 했다. 보고 말미에 "북조선 민주개혁을 남조선에서도 하루속히 실시하도록 용감히 싸웁시다"와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쏘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스딸린 대원수 만세!"를 불렀다(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연설문). ’49.1.8일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은 김달삼은 남파되어 빨치산 활동 중 정선지구에서 국군에 의해 사살됐으며, 사후 그의 가묘가 평양근교의 ‘애국 열사능’에서 ´남조선 혁명가´의 비명을 받고 있음이 감귤보내기로 평양을 방문했던 제주도 지사에 의해 직접 목격되었다(제주일보, 00.6.8). 김달삼은 소련대사가 모스크바로 보내는 전문에서도 ´남한 내 빨치산지도자´로 호칭된 것이 확인된다. (김일성-스타린-모택동 기밀문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AV 트르쿠노프 지음, 구종서역) 2. 미24군단 G-2일일보고서(48.2.6/7) : "48년 ´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키라,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남로당의 폭동지령 유인물 발견, 1월 26일까지 2차례에 걸쳐 남로당원 221명 검거했으나, 자유선거 분위기조성 위한 미군정 방침에 따라 곧 석방하다“ 3. 제주4.3연구소, ‘이제사 말햄수다’ (제1권): “(위´2´항의) 검거로 조직붕괴 위기에 직면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48년 2월, 면당 책임자급 이상을 소집(일명 ‘신촌회의’)하여 보름동안 대책회의를 개최하고 김달삼 주동으로 경찰에 맞서는 무장폭동을 결정" 4.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 “(’47. 3월 중순) 남로당 중앙 및 전남도당에서 파견된 지도원이 무장봉기 계획을 작성-조직의 수호, 5.10단선 및 단정 반대투쟁의 일환으로 무장 반격, 저항하는 장교 및 하사관은 현장 사살, 경비대 9연대를 동원, 제주경찰감찰청과 제1구경찰서를 습격, 인민유격대(400명)로 14개 지서와 경찰 및 우익인사 습격, 특무원(20명)은 제주읍에 잠입하여 연락병으로 운용 등 기록” (9연대의 동원은 내부의 이견으로 실패했음). 5. 제주도 폭동 현지답사 기사(48.5.8. 동아일보) : "해방당시 제주인구는 16~17만, 해방 후 13~14만이 늘어 요즘 30만. 늘어난 인원은 일본의 대판 등에 공장의 노동품팔이를 갔던 사람들로 이미 적색지하운동을 해와, 민족관념이 박약한 자가 태반. 이들이 순박한 도민을 선동, 유격전을 전개, 경찰관과 가족을 살해, 우익측 요원을 암살하여 미군정의 신뢰감을 박탈, 공포주의로 적화사상의 제패를 기도. 인민공화국의 전진기지화를 꾀하며, 총선거에 의한 남조선 정부수립을 방해하고 있다. ’48.4.30일 현재, 25개 경찰관서 습격, 경찰과 그의 가족, 경찰에 협력하는 양민의 납치살상만 115명. 이들은 각 읍면에 중대편성의 인민해방군 편성,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경위 3만원 등의 현상금을 걸고 살해를 촉구. 각 읍면 촌락에는 후원대를 조직하여 물자를 공급하고 목포에까지 김일성군이 내도했으니 안심하라는 선전술을 폄.” 6. 제주도 경비대 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48.6.18) : 남로당 군사부총책 김달삼과 경비대 프락치 오일균 소령 비밀회합(‘48.5.10)하여 연대장 제거를 모의. 좌익세포 문상길 중위가 주동이 되어 작전에서 철수하여 취침중인 연대장을 숙소에서 암살. 7.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조국전선) 결성식 연설문(’49.6.25):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과 리승만 매국정권의 학살․폭압을 반대하다 일어선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이다.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정부를 적극 지지하여야 한다" 8. 조국전선 선언 (’49.6.25): “제주도 인민항쟁과 남조선 유격운동탄압에 참가한 경찰대를 해산시킨다. 제주도와 기타 지대들에서 인민항쟁과 빨치산운동 탄압에 참가하였던 남조선 국방군 부대들을 해산시킨다. 인민항쟁과 빨치산운동 진압에 참가하였던 자들에게는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 탄압을 주동한 자들과 조직한 자들은 처벌을 당한다." 9. 박헌영의 조국전선 제4차 중앙위원회 연설: “빨치산의 대렬 속에서 조국을 위하여 원쑤놈들의 흉탄에 장렬하게 쓰러진 우리의 인민영웅들 최현, 리덕구, 홍순석, 김지회 등 여려 동지들은 우리 인민들과 우리 력사가 그 어느 때던지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순박한 제주도 주민은 위의 사실들을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1. ’48.4.3일 발발하여 휴전이후(´54.9.21.)까지 지속된 4.3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저지하고 북한에 이미 수립(’47.2.17)되었던 ´인민공화국´을 지지하기위해 ’48.5.10일의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방해한 무장폭동으로서 그 진압과정에서 군경과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었다. (군전사자:186명, 경찰전사자:140명, 민간사망자:17,000~18,000명)
      • ´제주 4.3특별법´은 ´제주 4.3사건´을 ´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 4․3 사건 기간을 1년이나 소급 적용했으며, 국군과 반군간의 전투를 단순히 동급세력간의 무력충돌로 격하 **
    2. 소련군의 지시지원을 받은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발생한 무장폭동이 진압되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건국 후에도 인민유격대가 제주도를 장악했다면 6.25 전쟁수행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쟁 중 모슬포의 제 1훈련소에서 7,8만의 신병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동의 진압과정에 순박한 주민의 희생이 초래된 것은 참으로 유감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와 도발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킨 군과 경찰의 희생도 높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살상무기가 사용되는 폭동의 진압상황은 곧 전쟁이며, 민간인 피해가 불가피한 국면도 배제할 수 없음으로, 인명피해 발생의 최초원인을 제공한 남로당과 소군정의 개입도 밝히고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건국역사교육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3. 지진과 홍수는 원인을 찾아야만 차후의 예고나 경고가 가능하듯 전쟁이나 무장폭동도 그 원인과 배경이 규명되어야만 유사한 사건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기에, 기 작성된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확인된 외국자료와 국군과 경찰의 역사자료가 충분히 반영되도록 추가로 보완되어야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4. 일제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은 항일독립 투쟁까지는 인정하나, 해방 후에도 국제공산주의에 맹종한 것은 민족의 배반이었다. 국제공산주의는 70년의 실험을 통해 용도 폐기되고, 공산화된 나라는 모두 소연방으로 편입, 민족의 자주성을 상실했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할 때에, 민족의 정통성은 대한민국에 있다. ´김일성´민족은 이민족인 슬라브족(소련)과 한족(중공)의 지원을 받아 동족을 향해 6․25 남침전쟁을 도발하지 않았던가? 북한 독재 권력이 전쟁도발에 대한 사과도 없이 ꡐ민족공조ꡑ를 찾는 것은 허구이며 친일파를 완전 청산했다고 북쪽에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도 허구이다. 공산주의자의 친일파청산은 국제공산주의에 대한 맹종이었으며 민족배반을 초래했음으로 민족의 절대적 ´참´ 정통성은 민족구성원의 자유와 창의를 기초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 오늘의 번영과 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에 있음을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친일파뿐 아니라 김일성-김정일 세습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정파와 종파를 숙청했고 지금도 정치범 수용소에 수십만명을 강제수용하고 인권을 탄압함으로서 민족역량을 말살하고 있지 않은가? 제주 4.3사건을 최초의 통일시도로 보는 4.3위원회의 위원이 현재 ´광복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의 책임을 겸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참´정통성이 어떻게 지켜지고 기려질 것인지? 뜻있는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지는 4.3´사건´ 57주년의 아침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2005. 4.1.12:30 한광덕 예비역 육군소장 전 4.3위원회 위원(’03.10.30 사퇴)
  27. https://news.joins.com/article/1378212 49년경북서날뛰던 북괴중장「남도당사건」
  28. https://awiki.theseed.io/w/%EB%82%A8%EB%8F%84%EB%B6%80
  29. IE002106488_STD.jpg
  30. http://www.hynews.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38342 남도부 하준수 생가복원 가능할까
  31.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507
  32. http://www.laborsbook.org/book.php?uid=86&no=2341 남도부 上/下
  33.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308 한국민족대백과 하준수
  3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9137.html ‘조국은 없다, 산하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