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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이다.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이다.


생년월일의 불확실성
생년월일의 불확실성

2018년 11월 29일 (목) 08:57 판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생년월일의 불확실성

김대중의 생년월일은 기록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3가지 다른 날자가 존재하는데 김대중은 필요에 따라 이 세가지 생연월일을 선택하여 사용해 왔다.

호적상, 김대중의 생년월일은 1925년 12월 3일로 되어있으나 이는 1943년 7월 10일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에 즈음하여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1924년 1월 16일이었던 출생일을 정정한 날자로서 그 정정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1923년 1월 6일 설이 있는데 이는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 선거당시 유세연설 과정에서 “박정희씨는 뱀띠(1917년생, 丁巳生) 이고 나는 돼지띠(1923년 癸亥生) 이므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박정희씨를 잡아 씹어먹어버리겠다” 고 말함으로서 자신을 돼지띠로 주장한데서 유래한다. 한편 김대중의 어린시절 동네 사람들도” 김대중은 돼지띠”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김대중은 1997년 11월 18일, “5.18광주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에서 “호적 이전에,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1924년 1월 6일 생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2. 유년기

복잡한 가정환경

김대중의 복잡한 가정환경을 살피기 전에 공식기록인 호적을 살펴보자.

먼저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의 호적은 다음과 같다. 1893년 6월6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현신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에서 부 장지숙(張之淑), 모 주귀심(朱貴心)의 장녀로 태어 났으며 1911년 3월 10일 제갈성조와 혼인신고하여 부 장지숙의 호적에서 제적되었다가 1925년 12월 8일 호주 장지숙의 신고로 장지숙의 호적에 재입적된다. 1934년 10월 10일 장지숙의 사망으로 호주상속을 하고 1960년 6월 5일 김운식과의 혼인신고로 본 호적에서 제적된다. 세 호적에서 장노도는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1번지, 김운식의 처로 입적되었다.

공식적인 호적에서와 같이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는 1911년 3월 제갈영범의 차남 제갈성조와 혼인하였다. 혼인후 거의10년간 장노도는 제갈 성조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낳았다고 한다. 혹자는 이 사실이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의 호적초본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한다. 병사했다는 설도 있고 바다에 나갔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김대중의 호적에는 본적이 “무안군 하의면 대리 232번지”로 되어있고 무안군 하의면 오림리 132번지 호주 장문숙(張文淑)의 장녀 장노도 (를 어머니로 하여)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97번지에서 서자출생 김대중((金大仲)이란 이름으로 부 신고, 1924년 7월 7일 접수, 입적 한것으로 되어 있다. 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에 따른 기록이다.


여기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부기(附記)가 있다 “출생년월일의 기재에 착오 있어도 호적정정의 신청을 하지 않이(아니)함으로 단기 4276년 *월 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의 허가에 인(因)하여 단기 4276년(1943년) 7월 10일 기(基)의 출생년월일 단기 4257년(1924년) 1월 16일을 단기4258(1925년)년 12월 3일로 정정함”

그렇지만 1925년이라는 김대중의 생년은 불가능하다. 그 결정적이유는 김대중이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된 날자가 1924년 7월7일로 기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태어나기 1년전에 출생신고를 했다는 꼴이니 아무리 국제사기꾼이라도 이것만은 속일 수가 없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이 호적의 기록과는 달리 김대중의 실제 생년(生年)은 1923년으로 그는 돼지띠임이 분명하고 생부 제갈성복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여 임신 수개월이 된 제수 장노도에게 자신이 살고 있던 오림리(五林里)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後廣里), 즉 장노도의 친정 근처에 주막집을 차려주면서 장노도를 친구인 윤창언에게 넘긴것은 역시 1923년 이전 그 어느 때 였을 것이다. 장노도의 나이 30세 혹은 31세 때였을 것이다.

그 후 석달만에 김대중이 태어나고 윤창언이는 그 아이에게 윤성만(혹은 윤대만)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윤창언의 조카로 경찰관을 하던 윤일만의 증언과 박정희 정권 당시 공화당 조사 팀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윤성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뻘이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윤창언은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보다 20년 연상이었다고 하는데 만일 김대중의 실제 생년월일이 1923년 1월 6일이 맞는다면 당시 50대인 윤창언과 장노도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 것은 이보다 서너달 전인 1922년 9월 말이거나 10월 초였을 것이다. 윤창언 은 1927년에 사망했으니 장노도가 윤창언의 사망전까지 동거했다면 윤창언과 장노도의 동거기간은 적어도 사,오년은 되겠다는 계산이 된다.

윤창언이 장노도와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 1922년 말 전후에 장노도와 그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지 않은 이유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무식하고 게으른 탓도 있을 것이고 이미 세명의 부인들과 사별한 윤창언이 자신의 전처 세명으로부터 얻은 장성한 딸들의 만만치 않은 반대로 장노도와의 혼인신고를 미루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장노도의 부친인 장지숙은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시키는데 이것이 1925년이다. 김대중이 두살 때 였을 것이다.

한편 윤창언과 장노도 사이에서 다시 김대중의 씨다른 동생인 윤대의가 태어난다. 윤대의는 1927년 생이라니, 실제로는 1923년 생인 김대중보다 4살이 아래인 셈이다. 그리고 윤대의는 윤창언의 유복자일 수도 있다 . 이는 윤창언이 사망한 해가 1927년으로 윤대의의 생년과 같은즉 윤대의가 윤창언 사망 후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윤창언의 사망일자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분명하게 알수는 없다. 그리고 윤대의의 어릴적 이름은 윤대의가 아닐 것이나 윤창언이가 붙여주었을 윤대의의 어릴적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대의”란 이름은 김운식가(家)의 돌림자인 큰대(大)자를 따온 이름이니 윤대의의 생부인 윤창언이 지어준 이름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만일 윤대의가 유복자였다면 윤대의는 처음부터 김대의로 이름지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별도의 윤아무개란 어릴적 이름은 처음부터 없었을 수 있겠다.

어쨋거나 김대중은 주막집이라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생활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생부가 아닌 계부의 비호아래서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다.

당시 하의도의 부자이며 난봉꾼인 김운식이 정확히 언제부터 장노도와 잠자리를 같이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윤대의가 태어나고 윤창언 이 사망한 1927년 이후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지만 위의 호적기록은 이와는 상당히 다른 그림을 그린다.

김대중의 호적기록을 보면 1924년 7월 7일 김운식의 신고로 김대중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김운식의 호적에 입적되었다고 하니 이 기록대로 한다면 장노도는 윤대의가 태어나기 2,3년전부터이미 김운식과 동거해서 그의 첩이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이 기록은 장지숙이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시킨 것이 1925년이라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한편 장노도의 친부의 이름도 장지숙에서 장문숙으로 변조되어 있다.

김운식이 자신과 별 관계도 없는 장노도와 그녀의 아들들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하도록 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니 장노도는 윤창언과 동거하면서도 김운식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말이 되거나 아니면 김운식의 첩이 된 후에도 2,3년간은 윤창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말이된다.

윤창언보다 거의 20년 연하로 젊은 김운식이 그의 젊음과 부(富)로서 장노도로부터 윤창언을 밀어낸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장노도에게 가장 마음쓰이는 일이 자신의 아들들을 호적에 입적시키는 것인 바 김운식은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장본인이 아닌가?

따라서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장노도는 윤창언과 동거 1,2년 이후에, 즉 1924년 중반이후부터 이미 김운식의 첩이 되었고 사실혼 관계에 있던 윤창언은 젊은 부자 김운식에게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정부(情婦)를 빼앗긴 꼴이 되었다는 말이고 그래도 이미 남의 첩이된 과거의 정부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아들을 얻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는 당시 관습에 비추어 너무 무리한 생각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김운식과 장노도가 동거를 시작한 것은 장노도가 윤창언의 아들을 잉태한 이후의 일 것이다. 장노도는 1927년 윤창언이 병사하기전 무능력한 윤창언이를 내 쫓아버렸을 가능성은 많다. 그러나 그 시점은 1926년 7월 이후일 것이다. 장노도가 김운식과 동거를 시작한 것은 1926년 7월 이후일 것이고 장노도가 김운식과 동거를 시작했을 때는 장노도에게 이미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니 더 확실한 것은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한 것이 김(윤)대의가 태어난 1927년 5월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러면 호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김대중이 호적을 엉망으로 고쳐놓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또 이 가정은 장지숙이 1925년에 자신의 딸인 장노도를 자신의 호적에 재 입적 시켰다는 사실도 설명이 된다. 혹자는 김운식이 김대중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준 것은 김대중이 7살 때쯤으로 이때 자신의 자신의 庶子로 호적에 올려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하는 바 아마 이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결국 김대중은 자신의 출생비밀을 가리기 위하여 호적에 적지 않은 손질을 해 놓았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생모를 갈보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날조와 변조로 누더기가 된 김대중의 호적

앞서 지적한 대로 김운식이 김대중을 자신의 서자로 입적시킨 날자가 1924년 7월 7일이라하니 김대중의 생년은 그 이전일 수밖에 없다. 한편 김대중의 어린시절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돼지띠였다고 하니 그의 생년은 1923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김운식이 김대중을 서자로 입적시킨 날자는 1924년 7월 7일이 될 수 없다. 이는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할 당시 이미 장노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니 장노도와 김운식이 동거를 시작한 것은 1927년 4월 (28일)이후일 것이다. 이는 장노도의 두째아들 김(윤)대의가 태어난 것이 1927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대중의 서자 입적 날자 1924년 7월 7일은 소급해서 기록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의 호적등본이 완전날조라는 객관적 물증은 기재란의 내용들이 1924년 7월7일 서자 입적신고 부터 1960년 6월 6일 김운식의 2남으로 분가신고를 했을 때까지 무려 36년간의 기록이 한사람의 필적으로 되어 있으며 동일한 날인을 11회에 걸쳐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누가보아도 1960년 6월경에 김대중의 호적등본이 광범위하게 개작, 개편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하의면 면장은 장모씨였고 이 호적을 기록, 날인한 호적계 이모씨는 후에 면장으로 승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대중의 호적중 가장 황당한 것은 김대중이 자신의 생부 제갈성복의 동생이며 자신의 생모인 장노도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의 호적을 완전히 말살시켜버렸다는 점이다.

장노도는 1911년 3월 10일 제갈성조와 결혼으로 친정아버지인 장지숙의 호적에서 제적되었다가 1925년 12월 8일 장지숙의 호적에 재입적된다. 약 15년간 제갈가의 며느리로 살다가 남편의 사망으로 친정 호적에 복귀한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장노도가 결혼해 간 무안군하의면 대리 204의 제갈영범의 차남 제갈성조의 호적이 멸실되었다는 점이다. 장노도는 제갈성조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 딸들의 행방도 찾기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외에도 김대중의 호적에서는 많은 이름들이 변조되어 있다. 김대중의 와할아버지는 張之淑, 張文淑 두개의 이름이 혼합되어 있고 김대중의 첫 부인이름도 車容秀, 車容愛 들이 있다. 김대중의 씨다른 여동생 이름도 김찬진, 김진찬 김대중의 양부(養父)이름도 한자가 두가지가 존재한다. 金云式, 金云植으로. 김대중 자신의 이름도 끝의 한자가 두가지가 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은 자신의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용례를 1960년 6월에 위장이혼시고 자신의 생모를 김운식과 위장결혼시키므로서 자신의 서자딱지를 떼어버린 바 있다.

김운식의 서자로 살다.

하여튼 하의도 실력자 김운식이 장노도의 주막에서 살다싶이 한 연유로 주막집은 손님이 들지 않아 장사가 되지않으니 문을 닫게된 모양인데 김운식은 장노도와 그 녀의 아이들을 위해 삼칸집을 지어준 모양이다.

이 후에 장노도와 그녀의 아이들은 김운식이 지어준 후광리의 삼칸집에서 살았다는데 김운식은 그의 본처와 함께 하의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대리(大里)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김운식 영감은 본처와 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이 당시 장노도는 자신의 아이들을(딸 둘, 아들 둘) 엄격히 통제하여 대리에 있는 큰집 (김운식의 본처가 사는집) 출입을 못하게 하였다니까 김대중의 계부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하의도에 학교가 들어서지 않아, 김대중은 서당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해진다. 1934년, 김대중은 하의 공립 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고 1936년 김대중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장노도가는 하의도를 떠나 목포로 이사를 가게된다. 김대중의 나이 13살 때였을 것이다. 그 한해 전 장노도는 김운식의 아이를 낳는다. 이가 김대중의 씨다른 동생 김대현으로 1935년생이다. 이렇게 보면 김대현은 하의도 출생인 셈이다. 장노도 일가는 1936년 목포로 이주하였고 장노도는 여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장노도는 여기서 김운식의 딸 김진찬을 낳는다. 김진찬이는 1938년 생이라고 하는데 1963년 1월 25일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호적상 김대의로 되어 있는 윤대의는 동네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자랄 수록 윤창언이를 닮아갔다니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윤창언의 자식임이 분명한 것 같고 김대중은 제갈성복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장노도가 낳은 세 아들들은 모두 씨가 다르다. 첫째는 제갈씨요 둘째는 윤씨요 셋째는 김씨다. 이 중1927년 5월 3일에 출생한 윤대의 (호적상 이름 김대의)는 1997년 12월 17일에 사망하였다.

1939년 3월 24일 김대중은 목포소재 북교(北橋)국민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같은해 목포 상업중학교(이하 목포 상고)로 진학했다. 졸업식에서 김대중은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한다.

목포 상고에 입학해서 김대중은1학년때 성적은 111명중 1등을 하였으나 2학년때는 119명중 4등, 3학년때는 155명중 2등, 4학년 때는 149명중 8등 5학년때는 150명중 39등으로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다. 김대중은 1,2학년에서 급장, 2,4학년때는 품행단정상 수상, 5학년때에는 수양위원 겸 문화반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학창시절부터 김대중은 웅변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고 하며 고교 학적부에는 “언변이 늘 정확하고 명료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한다.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연도에 대하여는 1943년이란 말도 있고 김대중 연보에는 1944년이라는 주장도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이 5학년에 진급할 당시 전쟁의 막바지에 있던 일제는 이들 졸업반을 서둘러 졸업시켰다 한다. 따라서 김대중은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된 모양인데 정상적으로는 1944년 3월에 졸업예정이었으나 당해에 한하여 졸업반으로 올라가자마자 졸업을 한 모양이다.

이런 연유로 김대중은 1943년에 목포상고를 졸업한다. 그의 실제나이 20세 때이다. 그는 유년기에 매우 영리하여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중학교 5년(지금의 고등학교 졸업반)시의 졸업성적은 중상정도 였다. 심리학자라면 김대중의 가정환경으로부터 그의 성격이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유추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후일 모 외국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학력콤풀렉스가 있다는 고백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의 극심한 명예욕, 그의 극심한 집요함,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모함, 그의 동물적 생존본능, 그의 끝을 모르는 돈 욕심 등등의 성향은 아마도 어릴적 복잡한 가족 및 생활 환경에서 빚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던 그의 졸업성적도 그의 명예에의 욕구를 좌절시킨 한 작은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3. 청년기

의문의 공백기

1943년 목포상고를 졸업할 당시의 김대중은 도요다(豊田大仲)란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해방 2년전인 1943년 7월 8일, 김대중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의 허가를 받아 자신의 생년월일을 1924년 1월 16일에서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한다.

일제 시대에 호적을 정정하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무슨 동기로 이 귀찮고 어려운 일을 감내했는지는 의문스러운 일 이었던 바, 이 문제에 대한 모 기자의 질문에 김대중 왈 당시 일제의 모병을 피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년월일을 앞당겨 변경함으로서 모집연령을 초과시키는 방법을 쓰고자 했으나 호적당국이 이를 허락치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자신의 부친이 자신의 징집을 늦추기 위해 생년을 늦추어 변경하였다고 하였다. 김대중 왈, 자신의 부친(김운식)은 일제가 머지않아 망할 것을 예상하고 1,2년만 모병당하지 않고 버티면 군대를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설명하였다. 이로서 김대중의 호적상의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2년이 차이가 나게 되었다. 김대중은 수차례에 걸쳐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의 실제생년은 음력으로 1922년 12월 이며 양력으로 1923년 1월이라는 주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1943년 상고 졸업후부터 1945년 4월의 해방 직전까지의 1, 2년여의 기간동안 김대중의 행방이 묘연하다.

혹자는 김대중이 만주에 있는 만주건국대학에 합격하였으나, 어쩐일인지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를 하였고 입사 후 해방이 이루어졌는데, 김대중이 속한 회사의 경영진들은 회사를 그냥둔채로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그 후 이 회사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계속해서 그해 11월, 김대중이 목포상선회사의 정식 대표가 되었고. 사업이 승승장구면서 김대중이 엄청난 부를 손에 쥐게 되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다.

김대중이 1989년 5월 중앙정보부에 남긴 자술서에 의하면 김대중는 1944년 6~7월 경부터 목포소재 일본인 회사인 전남기선주식회사의 사원으로 근무했다하며 해방후 일본인이 철수하자 유일한 사무직원으로 남게 되어 일시 총무대표로 추대되었다고 주장한다. 1946년 2월경 상경하여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海司局)에 들려서 알아보니 서울 거주 손모씨에게 회사 관리권이 넘어갔다는 것을 인지하고 손씨로 부터 현 종업원을 게속해서 고용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했는데 종업원들의 반대에 접하여 1946년 말까지 이름만 걸어둔채 관여하지 않다가 회사와 결별하였다고 자술하고 있다. 그러니 사업에 성공하여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혹자의 주장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김대중 자신의 진술대로 김대중이 1944년 6~7월경부터 목포소재 일본인이 경영하는 전남기선 주식회사의 사원으로 있었다고 주장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하더라도 1943년 상고 졸업이후 44년 6,7월 까지의 기간이 공백으로 남아있고 또한 이 기간중 그가 도요타로서 만주의 여순군항에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으니만큼 1년여의 공백기간에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김대중의 소학교 동창으로 재일교포인 김종충(金鐘忠)은 김대중이 이 당시 만주 여순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일본인 하라다 시게오(原田重雄)도 김대중이 해방직전까지 만주 여순에 있었다는 내용의 증언을 하고 있다. 하라다씨는 김대중을 여순출신 일본인들의 모임에서 만났다고 증언한다. 하라다씨는 1932년 생으로 김대중씨 보다는 나이가 어리며 그는 동경 신주쿠에 있는 하라다 맨션의 소유주로 대단한 재산가다.

김대중은 자신의 학력에 대해 6대 국회때부터 건국대학 졸업이라고 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니 한국의 건국대학이 아니고 만주의 건국대학이라고 말을 바꾼 적이 있었고. 그 이후 김대중은 국회 수첩등에 기록된 자신의 이력에서 건국대학 부분은 빼버렸다.

만주 “건국대”는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하나의 기구로서 일본군 주둔군영 내에 분교가 있었다고 하며 주로 일본인을 학생으로 선발했지만 일부 한국인 학생들도 선발했으며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으로 채워졌다고 하니 상고 출신인데다가 졸업 성적이 중간 정도인 김대중은 아마도 자격미달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건국대 진학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만주 건국대 출신자들은 입학생 중 상고 출신은 전무하였다고 중언하고 있다.

당시 여순은 만주 침략을 위한 일본의 군사기지였고, 그때문에 군 정보기관이나 경찰의 특고(特高, 특별고등경찰관) 관계인을 제외한 민간인은 출입통제지역이었다. 하라다 씨는 김대중이 당시여순에서 “학교를 나왔다”고 하더라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여순의 실태를 아는 사람들은 여순에 있었던 조선인은 100% 일본의 밀정이었다고 증언한다.

김대중이 목상 졸업에 즈음하여 다른 김씨성을 가진 사람들처럼 가네다(金田”)또는 가네야마(金田)로 창씨개명하는 대신 자신의 성씨를 순 일본식 이름인 도요타 다이쮸(豊田大仲)로 (그런데 이 이름도 분명치는 않다. '도요다 이찌로'일 가능성도 있다) 개명한 것만 보아도 이때에 그는 완전한 일본사람이 되고파 했고, 그의 신분상승을 위한 몸부림을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일본을 방문했을때에 목상 재학시절의 일본인 은사를 만나

“도요타 ”로 자신을 밝혀 

김대중의 일본인 은사 자신도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대중이 이 당시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여순에 진출해 일제의 밀정으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여러 정황으로보아 무리한 추정이 아니며 당시 전황에 대한 상세한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다면 일제 항복 직 전에 귀국을 감행했으리라는 가정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겠다.

김대중의 호적에 따르면 김대중은 1945년 4월 9일, 호적상 나이 20세, 실제나이 22세때에 목포의 재산가인 차보륜(車寶輪)의 딸 차용수와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김대중의 연보에 따르면 김대중은 1945년이 아닌 1946년 4월 9일에 결혼한 것으로 나온다. 어느것이 맞을까? 흔히 호적기록은 공적기록인 만큼 호적기록이 맞아야 마땅하겠으나 김대중의 호적은 개작의 흔적이 너무도 뚜렸해서 신빙성이 없다. 김대중의 혼인도 1946년이 맞을 것이다.

차용수는 혼인전에 정태묵(鄭泰默)이란 사람과 모종의 염문이 있었다는데 이 정태묵은 김대중의 목포상고 1년 선배로서 목포상고 재학시 차보륜가(家)에서 약 2년간 하숙을 한 일이 있어 차보륜가와는 상당히 친숙한 관계였다고 한다. 이런 연고로 차보륜의 딸인 차용수와 정태묵이 염문이 있었더라도 이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정태묵은 자신의 순애보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김대중이에게 정인(情人)을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모양인 바, 정태묵은 후일 임자도(荏子島) 간첩사건의 주범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신민당과 남로당

김대중의 좌익 활동을 설명하기전 당시 김대중이 가입했다는 신민당의 배경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신민당은 백남운(白南雲)이라는 사람이 창립했는데 백남운은 1894년 생으로 전북 고창사람이며 일본 동경상과대학 출신이다. 대학졸업 후 백남운은 연희전문의 교수로 일했고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의 관점에서 조선역사를 강의하였으며 “조선사회 경제사”와 “조선 봉건사회경제사”를 썼다. 1938년 연희전문을 그만두고 해방후 정계에 진출, 좌익운동에 참여했다. 한때 그는 좌익의 통일전선조직인 민주주의 민족전선(民戰)의 공동의장이 되기도 했다. 1946년 모스코바의정서에 의해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된 직후 백남운은 북한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김두봉(金枓奉)위원장을 만난다. 중국공산당과 가까운 김두봉이 조선독립동맹을 신민당으로 개편하자 백남운은 남조선신민당을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김일성의 북조선 공산당과 김두봉의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 노동당이 되었는데 남한에서는 소련과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1946년 11월, 좌익3당, 즉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 약칭 남노당(南勞黨)을 만든다.

그런데 이 합당과정에서 여운형과 백남운이 왕따를 당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노동당을 창당했다가 해체하고 다시 근로인민당을 창당, 여운형이 위원장, 백남운은 부위원장이 된다. 그 후 여운형은 암살되고 백남훈은 1948년 5월 총선직전 자진 월북하여 북한에 눌러앉아버리고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한다. 백남운은 1979년에 85세로 죽었다.

좌익 활동기

결혼 5개월 후인 1945년 9월경부터 김대중은 건국(建國)준비위원회(이하 축약하여 建準)의 선전책이며 그 후 남로당 선전책으로 암약하던 임영춘(林永春)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이 당시 결성된 목포 (공산)청년동맹에도 가입 활동 한다.

이해 하반기에 김대중은 동생 김(윤)대의와 건준 명의의 벽보를 붙이다기 미 군정 경찰에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일도 있다한다.

김대중은 그의 자술서에서, 한달 후인 1945년 10월경에 건준과 목포 (공산)청년 동맹이 해체되면서 다시 한달 후인1945년 11월 경 건준(建準)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된 후 여기에 참여하여 약 두달간 활동하다가 지진 사퇴하였다고 하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한편 1945년 말경에 좌우합작을 기치로 新民黨(당수 白南雲)이 출범하였는데 김대중은 당시 신민당 목포시당 위원장이며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실종된 이채현(李彩鉉)의 추천으로 신민당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 행동 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민청) 목포시 위원회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맹원(盟員) 장금성(9.28수복 후 사망) 등과 당원 서득균(徐得均, 6.25당시 월북)등에게 공산주의 이론 및 정치학습 등을 교양했다 한다.

안기부의 기록에 따르면 1946년 10월 31일 일단의 좌익들이 목포 경찰서 남교동(南橋洞) 파출소 등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파출소를 방화 소실케한 소위 “목포시민 항쟁의 날”이라는 폭동사건이 발발하였는데 김대중은 민청 부위원장 지위에서 이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목포경찰서에 체포되어 10여일간 구속 수사를 받는다. 이에 대해 당시 한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이었던 장인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훈계방면되었다 한다. 이때 김대중의 나이는 23세 전후 였다. 반면 이 사건에 대하여 김대중 본인은 밀고자에 의한 근거없는 고발로 20일간 경찰에 구금되었었지만 무혐의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은 1949년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는바 전남 신안군 임자면(荏子面) 출신으로 남로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 지하에서 암약중이던 유재식(兪在植)에게 당 연락 활동과 관련한 여비등 활동자금을 제공하여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된다.

10여일간 구속수사를 받던 중 당시 해군 목포 경비부대 정보대장 오세동 중위와 목포헌병대장이던 박성철(朴성哲)소위의 신원보증으로 방면되고서도 목포시내 세포조직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는데 오세동은 6.25 전쟁중에 전사하고 박성철은 해병 소장으로 예편한 후 김대중의 대통령 후보 비서실 차장 및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된다.

1947년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여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한편으로는 화물선 한척을 구입하여 연안을 운행하는 해운업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 경험은 후일 6.25 사변당시 김대중이 해상방위대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김대중은 해상방위대 참여로 군 복무를 대체한 듯 주장하지만 김대중이 국민의 의무인 군복무를 필했다는 기록은 없다. 1948년10월 부터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 10월까지 사장으로 재직하였다고 하지만 사업상 성공한 것은 아닌모양이다.

6.25 사변중 김대중의 행적

6.25 사변을 전후한 김대중의 행적은 이에 대한 정보기관의 기록과 김대중 자신의 주장 사이에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대중 자신은 1949년 봄 부산에서 창설된 건국대학교(동아대학과 합병) 정치과에 편입했으나 그 이듬해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50년초에 조직된 대한청년단 목포 해상방위대 부단장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한다.

김대중은 또한 이 당시 자신이 경영하던 해운회사가 서울 소재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구 수송을 전담하는 하청을 받아서 사업이 번창일로에 있었다는 주장을 편다. 1950년 6월 15일 6.25가 발발하기 열흘전에 김대중은 자신의 회사 목포출장소장 한도원과 양곡운임을 받기위해 상경중에 6.25사변을 당하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6.25당시 김대중은 경기여고 뒤쪽에 있던 모 여관에 투숙하면서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인민재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으며 그 후 목포까지는 도보로 남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기부 기록은 김대중의 술회와는 상당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1950년 6.25직후 김대중은 보도연맹원으로 피검(被檢)되어 미국 CIC에 의해 사살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김진하(金眞夏)의 호명착오로 구사일생으로 구명되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목포인민위원회를 창설하여 활동하다가 부채 및 체불, 노임횡령 사건으로 목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9.28 수복 때 목포 교도소를 탈출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김진하는 김대중의 목포상고 선배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또한 “호명착오로 구사일생을 했다”는 정황은 확실히 알려진바 없으나 일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 후 좌익에서 전향한 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했던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있었다. 젊은 시절 좌익운동을 활발하게 했던 김대중도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한다. 그런데 당시 전향한 전 좌익활동가들의 집단인 보도연맹들 중 실제 전향을 하지 않고 전향을 가장한 사람들이 많아 6.25사변이 터지자 이들을 구속, 일제 처형하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김대중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어 왔다.

보도연맹원들의 일제 처형시 어느 창고에 갇혀있던 김대중에게 당시 영어교사이던 김진하가 찾아가 “김대중을 호명할 때 나서지 말고 이 명찰(김진하)을 보이면서 사람을 잘못 끌고 왔다고 이야기 하라”고 하여 김대중을 구명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이야기도 확인할 길은 없는 이야기다.

한편 6.25직후 김대중이 목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것은 김대중 본인의 주장이기도 한 바 김대중이 국군에 의해서 구속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인민군에 의해 구속되었던 것인지가 명확치 않다. 김대중의 목포 인민위원회 창설이 구속 이유였다면 김대중은 국군에 의한 구속일 것이지만 김대중의 주장대로 인민군에 의한 구속이라면 김대중이 우익활동을 했다는 말이 될 수 있겠는데 김대중은 일생동안 우익활동을 한 적이 없다. 안기부의 기록에 따르면 김대중의 구속 이유가 부채 및 체불(滯拂), 노임횡령으로 되어 있는데 하여튼 이 모든 가능성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가릴 수 있는 길은 현재로서는 없어 보인다.

또 김대중이 남로당원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이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대중이 남로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당의 목포지구당에서 간부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다. 남로당은 1946년 가을에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합당하여 출범했는데 김대중이 이 새로운 정당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확실한 것은 당시 젊은 김대중이 매우 활발하게 좌익 운동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1년 목포해운회사(현 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동시에 전남해운조합 조합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했다한다. 김대중은 6.25사변이 끝나는 즈음 1954년 제 3대 민의원(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

간첩 정태묵(鄭泰默)과의 인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정태묵은 김대중의 목상 1년 선배로 목상 재학시에 김대중의 장인인 차보륜 가에서 2년간 하숙생활을 했다하며 이 당시 차보륜의 딸 차용수와 연인관계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김대중은 8.15해방 후 1945년 9월경에 결성된 목포 공산청년동맹에 정태묵과 같은 동맹요원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정태묵은 194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서울지법에서 재판에 계류중이었고 6.25 사변중 북괴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러나 1953년 3월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이 확정되어 1960년 5월 30일 만기출소하였다.

정태묵은 1965년 4월 25일 월북하여 평양시 교외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한 후 같은 해 4월 30일 귀환하였다. 그의 포섭대상자 명단에는 김대중이 포함되어 있었다.

1954년, 김대중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다. 정권 연장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 게릴라를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대혼란이 빚어진 이 사건을 계기로 김대중은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1954년 어느땐가 김대중은 李承晩정권의 여당인 자유당에 입당하려 했으나 당시 자유당에서 공산당의 전력이 있는 김대중을 받아들이지 않자 자유당 입당을 포기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3대 국회의원 선거 전인지 아니면 그 후인지는 알수 없다.

첫 국회의원 출마

하여튼 김대중은 1954년 5월20일 목포에서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300표 정도를 얻어 9명중 5위로 낙방한다.

“서자새끼”란 소문도 김대중의 낙선에 일조를 했다고 전해진다.

가망없는 선거를 치렀지만 선거자금은 필요했고 이 선거자금 충당을 위해 김대중은 상당한 금액의 처갓집 재산을 탕진했다는 소문도 있다.

낙선이후 김대중은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1955년경 상경하여 서대문구 대현동(大峴洞)으로 이사하였고 당장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 그 방편으로 지금의 명동 어디엔가에 “대한 웅변협회”란 간판을 걸고 자신이 회장이 되고 후에 국회의원이 된 김상현(金相賢)을 사무총장으로 앉혔다. 이 웅변학원의 운영과정에서는 주로 김상현이 뛰어다니며. 학생들을 모집하였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 “태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1955년 10월에는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당시 김대중은 김철(金哲) 등 정치인들과 접촉에 성공, 장택상(張澤相) 전 총리를 소개받고 일시적으로 장택상의 참모로서 활동한 적도 있다한다.

민주당 입당

그 이듬해인 1955년 소설가 박화성(朴花城)의 소개로 박순천(朴順天), 조재천(曺在千)등 야당의원들을 만난 김대중은 이들과 교유한다.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박사에 대한 저격사건이 있엇다. 일설에 의하면 김대중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최서면(崔書勉)의 소개로 장면(張勉) 박사를 만났다고 하는데 김대중이 당시 부통령 겸 민주당 최고위원인 장면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56년 서울 소공동에 있던 경향신문사 고문실에서 였다. 김대중의 “신언서판”에 반한 장면 박사는 이후 김대중의 든든한 후견인이 된다. 참고로 최서면이란 사람은 극우(?)의 우익활동가로 알려져 있으며 김대중을 장면박사에게 소개시켜 준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1956년 어느땐가 김대중은 급히 강원도로 도망을 간다. 이는 해운회사의 부사장인 나상수가 김대중을 횡령으로 고발했기 때문으로 김대중은 급거 강원도로 몸을 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강원도 인제 지구는 군 통제지역에서 행정지구로 막 편입된 지역으로 김대중이 잠적할 장소로서 가장 적당했다는 것이다. 김대중이 1959년 선거직전이 아니라 1956년에 강원도로 옮긴 사실과, 1956년까지의 사이에 횡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꼭 맞아 떨어진다. 김대중이 민주당에 입당한 것과 강원도로 옮겨간 것은 모두 1956년에 일어난 일이다.

장면박사의 적극적인 지지로 김대중은 같은해 민주당 상무위원에 기용되었고 그 이듬해인 1957년에 김대중은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의 방에서 김철규(金哲珪)신부로부터 영세를 받는다. 이 때 김대중의 대부는 장면박사가 맡았다.

1957년 8월 김대중은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및 노농부 차장이 되었다. 당시 민주당 당사는 인사동에 있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김대중을 손가락질하며 “빨갱이”라고 불러서 당원이며 상임위원인 김대중은 당사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서울에 사무실 공간이 충분치 않아 집권당이었던 자유당 조차도 반도호텔의 빈 방을 몇 개 빌려쓰는 형편이었고 장면이 총리가 되었을 때도 사무실을 반도호텔 방을 빌려쓴 적이 있는데 많은 정치인들이 다방을 회합장소로 활용했다고 한다.

원로 기자 이동복(李東馥) 전 의원의 회고에 의하면 많은 정치인들이 종로와 무교동 일대의 다방을 근거지로 해서 모였다고 하는데 그 중 무교동의 “상록수”란 다방에 기자들과 함께 김대중도 자주 들락거렸다 한다.

이 당시 김대중은 빈털털이였던 모양으로 신문기자들과 어울려 다닐때도 차 한잔 , 점심한끼 내는 법이 없고 주로 기자들에게 얻어먹으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김대중의 일상을 보면 아마 “건달’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게 그를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국회의원이 돼보겠다는 허망한 꿈에 사로잡혀 일정한 직업도 없고 일정한 수입도 없이 건들대면서 마누라가 경영하는 미장원의 수입에 의존하여 생활을 했다니 영락없는 건달이었다하겠고 . 부인인 차용애 (차용수와 동일인)로서도 한심한 생각이 들었었을 것이다.

3,4대 국회의원 선거때만 해도 김대중의 고향인 목포는 야당세가 강한 곳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당 구파에 속한 정중섭(鄭重燮) 의원의 아성이 되어있어, 정중섭이 물러나지 않는 한 이미 “서자새끼”란 낙인이 찍힌 김대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보여진다.

1956년 당시 33세(혹은 34세)인 김대중은 목포해운 회사의 부사장인 나상수로부터 돈 문제로 고발을 당하자 강원도 인제로 피신을 하면서 민주당에 입당한다. 당시 인제는 행정력이 가장 취약한 최일선 수복지구로서 군 통제지역에서 행정지구로 막 편입된 상태로 김대중의 잠적 장소로 가장 적당한 장소라 한다.

김대중은 1959년5월 2일, 제 4대 국회의원 선거때 인제에서 출마하였지만 수많은 신문기자들의 호의에 찬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매청 총회꾼 출신으로 반 사기꾼 같은 자유당 후보 나상근에게 밀려 떨어지게 된다. 이때 자유당 정권의 방해로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당시 강원도 인제는 21사단 주둔지였고 이 21사단은 대다수가 호남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한다. 이들 호남 출신 군인들 이외에도 상당수의 호남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자유당 정권의 치하에서는 김대중이 아무리 날고긴다 해도 선거에 당선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는데, 그 이유인 즉슨 21사단장으로 있던 오덕준 소장이 사병들을 매우 엄격히 통제하여 야당출신 입후보자들의 근접을 철저히 막았을 뿐 아니라 당시 투표기구로 사용되던 붓뚜껑에 끈을 매달아 두고 사병들이 이 붓뚜겅을 인주에 뭍혀 엉뚱한 곳에 동그라미를 찍으려 하면 이를 감시하고 있던 방첩대 상사가 끈을 위로 잡아당겨 자유당 후보 쪽에 동그라미를 찍도록 유도했다하는데 이런 정도의 부정선거가 횡행하던 시절이니 김대중이 당선될 기회는 처음부터 배제되었던 셈이다. 한편 사단장 오덕준 소장은 나상근의 사위였다는 설도 있으니 이래저래 김대중에게는 가망없는 선거였다.

조의금 착복 사건

1959년도 선거기간 중 특이한 사건은 김대중의 조의금 착복 사건이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하자, 민주당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당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을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한다. 그런데 김대중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했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궁지에 몰린 김대중은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한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을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지만 그 후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한다.

1959년 7월 김대중은 민주당 강원도 지구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1월에는 민주당 강원도 인제군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에는 민주당 임시 대변인이 되었다.

바로 이 당시 김대중은 환갑이 훨씬(67세) 지난 자신의 양부 김운식 부부를 위장이혼시키고 김운식을 자신의 생모 장노도와 위장 결혼 시킴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서자”에서 “적자”로 둔갑시킨다. 동시에 자신의 호적을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가하며 전적한다.

이 당시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필두로 하는 구파와 신파로 그 세력이 양분되어 있었는데 이철승 지지세력이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 실력자로 데뷰하자 김대중도 장면을 따라 민주당 신파로 정치적 인연을 깊게하였다. 1960년 4월 6일에 김대중은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하였다.

민주당 공천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이 몰락하고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하고 장면을 총리로 하는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이해 제5대 국회의원선거인 7.29 총선에서 김대중은 당시 집권이 예상되던 장면박사의 민주당 공천으로 7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다시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였으나 인제 경찰서장 출신인 자유당 공천 전형산(全亨山)에 밀려 또다시 낙방하는 쓴 경험을 하게된다.

그런데 이 때에야 말로 민주당 장면의 집권이 확실시 되던 시기인 만큼 관권이 선거에 개입되었다는 흔적은 사실상 없었다고 하는데 김대중의 주장은 자신을 지지하던 대부분의 군인들의 투표를 부재자 투표로 바꿔서 출신지 지역의 투표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지만 어쨋건 선거는 공정하게 이루어졌고 당시 이지역은 아직도 자유당 강세의 지역이었다 한다. 그러니 김대중의 낙선은 순리의 결과 였다고보여진다.

인제선거때 김대중의 선거운동 일화

흔히 빨갱이들이 선전, 선동에 능한 경우가 많고 기상천외한 음모와 술수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인제 국회의원 선거때 김대중이 구사한 선거운동 술책도 이에 못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몇몇 일화들이 전해진다.

김대중은 상대방 후보를 모략하기 위해 자신의 선거운동 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한 후 이를 상대당원이 테러를 한 것으로 역선전을 펴기도 하고 상대당원을 가장,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했다가 헛탕을 치게해서 상대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조장하기도 했다 전해진다. 김대중은 또한 자신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들에게 일정액의 금품을 제공함으로서 자신의 인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그 중 에서도 압권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선거운동원들로 하여금 상대당원의 완장을 두르게 한 후 시골 구석구석마다 고무신짝을 돌렸다고 한다. 김대중이 이로써 이적행위를 하고 있는것 아니냐는 의문이 일듯 하지만 이런 의문은 다음 순간 쉽게 해소되는데 김대중은 이 삼일 후 같은 운동원들을 동원하여 이미 분배된 고무신짝들을 회수하게 한다는 것이다. 고무신짝을 얻어가졌다가 다시 빼앗긴 순진한 시골사람들은 김대중의 경쟁후보에 대하여 매우 괘씸한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렇듯 김대중의 선거전략은 “저비용 고효율”의 매우 효과적인 선거전략이라 전해진다.

김대중의 난동사건

그러나 이렇게 야비한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낙선한다. 분을 풀길이 없었던 김대중은 경쟁자인 전형산을 “반 혁명분자”라고 선동하면서 자신의 선거운동원들을 포함한 400여명으로 데모대를 조직하고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함 22개중 15개를 강탈하여 그 속에 있던 유효투표지 27,000여 매를 소각하는 난동을 부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전형산은 김대중에게 사퇴를 약속했지만 법적인 효력이 없어 전형산의 당선은 보장되었다.

조강지처의 의문사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빚을지며 생활고에 허덕였던 모양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김대중의 처 차용애의 계까지 깨졌다고 한다.

이런 경황에서 김대중은 본처인 차용애의 자살을 맞게 된다. 차용애로 개명한 차용수는 1927년 10월 26일 생으로 김대중과의 사이에서 김홍일, 김홍업 형제를 두었으나 1960년 5월 27일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는데 목포 갑부 차보륜의 딸이고 차 모 목사의 동생이며 명문 목포여고 출신 (일본 고교에 유학했었다는 설도 있다)인 재원이었다.

김대중의 본처 차용애의 죽음과 관련하여 김대중 자신은 “생활고로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한 병사”라고 주장하고 있고 혹자는 차용애가 남편의 낙선과 함께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지는 바람에 세상을 비관한 음독자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차용애는 사망전이미 김대중의 국회의원 출마 노름에 상당한 친정집의 재산을 탕진 했음은 물론 미장원등을 경영하는 등 힘겹게 살면서도 이미 두번에 걸친 김대중의 낙선을 경험하며 살아온 여자다.

차용애의 자살 을 택한 진정한 동기로는 당시 이미 수년 전부터 통정해 왔던 신여성 이희호(李姬鎬)의 귀국과 더불어 자신의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이희호와의 결혼을 노린 김대중의 지속적 구박을 이기지 못한 차용애가 양잿물을 들이킴으로서 시도된 자살이라는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이때 차보륜가는 한 때 좌익운동을 하던 사위의 구명운동에 상당한 재산을 탕진한 결과로 몰락중이었고 이희호는 잘 나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이희호는 한때 야당 정치인 계훈제의 정인(情人)으로 알려져 있었다. 폐렴으로 건강을 상한 계훈제가 마산의 결핵요양원에서 지병을 치료받고 있었는데 정인을 따라 마산까지 내려 온 이희호의 간호를 받게된다. 당시 김대중은 사업관계의 불미스러운 일로 부산에 피신중이었다 한다. 이 와중에서 김대중이 야당 정치인 계훈제를 방문하면서 이호희와 김대중의 첫 대면이 이루어 졌다는 말이 있다. 그 후 김대중과 이희호는 통정(通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격분한 계훈제가 이희호를 떠나 보낸 모양이다. 과년한 딸이 사실혼 관계에 있던 사실상의 사위로 부터 내처짐을 받게되자 이호희 가(家)에서는 이희호를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전해진다.

이희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57년 8월에 귀국한다. 귀국 후 이희호는 이화여대 강사, YWCA 총무로 활동하면서 당시 신여성으로서 뭇 남성의 우상이 되었다.

이희호는 집안이 좋은데다 부자였고, 차용애는 예전엔 부자였으나 당시엔 빈털터리였다. 좌익 활동을 한 남편을 구하려다 탕진한 결과였다. 김대중에게 유학에서 돌아온 이희호는 자신의 출세에 조강지처인 차용애보다 훨씬 유용한 존재로 부각 되었고 이미 이용가치가 떨어진 조강지처 차용애는 출세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처가 양잿물 복용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기별을 받은 김대중은 자신의 처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다고 하는데 가까운 병원은 놔두고 영등포쪽 먼 병원으로 향했다는데 시간적으로 급박한 이런 경황에서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서 차용수는 차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여러 정황으로보아 차용애가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병사했다는 김대중의 설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다.>?????????????

아내 사망 2년후인 1962년 10원 16일, 김대중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신여성 이희호와 재혼하고 1963년 아들 홍걸이를 낳았다. 겉은로는 이 결혼이 정일형/이태영 박사부부의 중매라고는 하지만 이는 허울뿐이요 아무리 노처녀라 하더러도 명색이 처녀요 잘 나가는 부잣집 딸이 자식이 둘이나 딸린 3년 연하의 빈털털이 홀애비와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안이었으니 모종의 감추어진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조금만 찬찬히 생각하면 의심을 해 볼만한 이야기임을 인지할 것이다.

김대중의 첫부인 차용애는 병사한 것이아니라 의문의 사망을 했을 것이라는 정황적인 증거는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의 어릴적 행동으로부터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차용애의사망당시 김홍일은 열두살이었고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나이였다. 여기에 더하여 아버지가 재혼 후 1년 후 배다른 동생 김홍걸이 태어나면서 김홍일은 반항아가 되었다.

김홍일은 부모와 같이 살지 않고 서울 영등포의 외삼촌 집에서 살았다. 김홍일은 가끔 동교동 본가에 찾아와 계모 이희호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렸지만. 그럴 때마다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한다. 자신의 어머니가 병으로 자연사 했다면 이런 패륜아적인 행패를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1980년대 김대중의 자금을 관리했던 한 측근은 출생 신분이 천해 국회의원이 되기 힘들었던 김대중이 신분상승의 기회를 이희호로 부터 찾았다고 증언한다.

이희호는 김대중보다 1년 연상(호적 나이로는 3년)이다. 애까지 딸린 남자가 연상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대중은 이희호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 차용애를 심하게 구박했고 남편의 구박을 견디다 못한 차용애는 결국 양잿물을 들이키고 말았는데, 근처 병원에 바로 데려갔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서 김대중은 택시안에서 아내를 죽였다는 것이 이 측근의 증언이다.

이런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시 김대중씨 집에서 일했던 민모라는 여자라고 한다. 차용애가 죽은 후 이 여자는 대현동 집을 떠났다. 하지만 그후 1년에 한번씩 동교동을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김대중은 측근을 시켜 그녀에게 1년치 생활비로 몇 천 만원씩 주었다. 입막음용 돈이었다. 이 여자는 서울 모 대학 앞에서 미장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철저한 조사를 통하여 밝혀져야 할 사안이지만 자신의 출세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김대중의 집요함을 보여주는 한 비극적 사례가 될 것이라고 본다.

계훈제와 이희호 여기서 잠간 계훈제와 이희호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계훈제(桂薰梯)는 평안북도 선천출신으로 1921년12월 31일 에 출생하여 1999년 3월 14일에 사망한 정치인이다.

1943년에는경성제국대학 재학도중 학병으로의 징병을 거부한다. 1945년8·15 광복후 경성제대가 서울대학교로 이름이 바뀐 후 복학하여 문리대학생회장을 지내면서 반탁운동에 앞장섰고, 미군정에 의한 서울대학교의 국립화에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서울대학교는 국립대학이 되었다. 이후, 교육자로 일하기도 하고 언론인으로서 사상계 편집장과 씨알의소리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이후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등과 함께 박정희의 군사정권과 유신에 반대하였고, 전두환집권 이후에도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고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이로 인해 1970년대와 1980년대 수차례 투옥당하기도 한다.

1987년 9월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의 경선에서 김영삼에게 패하고, 10월후보 단일화 협상을 거부하면서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김대중의 지지자이자 미국의 경제학자로 있던 최기일 박사가 계훈제를 찾아와 김대중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김대중을 지지해 달라는 최기일에게 계훈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자네는 머리가 돌았나?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기나 하나? ” 계훈제는 계속해서 김대중의 부정적인 면모를 설명하며 김대중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서 성명 까지 바꿨다는 말을 한다. 최기일은 계훈제가 김대중은 나쁜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자신이 폐렴으로 투병하고 있는 틈에 자신의 연인을 가로채간 김대중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계훈제는 이미 김대중의 진면목을 직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노태우 정부시절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정부로부터 감시당하였다고 한다 1999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사망직전, 계훈제는 평소 알고지내던 손창식을 불러 과거 젊은 시절 이희호와의 순애보를 토로하며 3시간여의 육성녹음을 남겼다하는데 여기서 자신을 배신한 이희호와 김대중에 대한 회한을 토로했다 한다.

한편 이희호(李姬鎬)는 1922년9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2012년 6월 20일에 사망한 김대중의 부인이다. 이호희가 서울 출생이라고는 하지만 이호희가의 원적은 충청남도 청양/홍성 지방으로 전해진다. 이호희는 이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문과를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 1950년에 졸업한다.

이희호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이희호는 김대중을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면서 대한여자청년단 회식 자리에서 김정례씨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당시 김대중은 20대 중반의 잘생긴 멋쟁이로 사업 근거지를 고향인 목포에서 임시수도 부산으로 옮겨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해운업을 하는 그의 배로 피란민을 소개시키고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희호는 이후 그를 연우회 모임에서 또 만났다고 술회한다.

이희호는 1953년경에 도미하여 미국의 렘버스대학교 사회학과와 스카릿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였고 4년 후인 1957년에 귀국한다. 여기서 램버스 대학이란 아마도 Tennessee 주, Jackson시에 있는 Lambuth University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이 대학은 미 감리교 계통의 학교이니 아마도 이희호가 다닌 대학이 맞을 것이다. 스카릿 대학교란 학교도 Tennessee 주 Nashville시에 있는 Sacrritt College for Christian Workers 란 학교인데 미 감리교 계통의 학교로서 아마도 이희호가 다녔던 학교가 맞을 것이다. 이 학교는 학생들이 오지 않아 학교문을 닫고 현재는 없어진 학교이다. 그런데 이희호가 왜 학교를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4년동안 별 유명 대학도 아닌 두 대학을 전전하면서 겨우 석사학위만을 받고 귀국한 것을 고려하면 이희호는 상당히 공부를 게을리 했던 모양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희호의 유학은 다분히 도피성 유학처럼 보인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 시점에서 몇가지 짚고 넘어가자. 김대중이 1951년 당시 부산에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한 원로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대중은 사업관계의 불미스러운 금전문제로 부산으로 도피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금전문제로 문제를 일으킨 사례가 한두껀이 아닌 것을 상기한다면 아마도 이 증언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한편 이희호가 김대중을 부산에서 처음만났건 혹은 마산에서 처음 만났건 관계없이 이미 이 당시부터 김대중과는 육체적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희호가 별 준비도 없이 급히 유학길에 오른 것은 이희호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계훈제가 김대중과의 육체적 관계를 인지한 후 격노하여 이희호를 내쳐버리자 딸자식의 장래를 걱정한 이희호의 부모들이 서둘러 유학을 보냈다는 것이 이 원로기자의 증언이다. 이 이야기는 계훈제가 사망직전 토로한 육성녹음에서도 비쳐진다. 사실관계를 따져볼 때 좀 더 설득력있는 설명이라 할 것이다.

이런 추론을 뒷바침할 만한 사례는 김대중 자신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엿볼 수 있다:

[ 1962년 5월 10일에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지금껏 내 반려가 되어주고 또한 정치적 동지이며 친구이기도 한 이희호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내가 사업상 부산에 이주해 살고 있을 때, 독서서클에서 만나 알게 된 여성이기도 했다.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녀는 부산에서 대한여자청년단의 국제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업가였지만(실상은 건달) 뜻있는 젊은이들의 모임에 나가 독서한 내용을 주제로 토론하기도 하고 전쟁상황이나 국가장래 등에 대해 활발히 의견교환을 하곤 했다.

그녀와는 의견일치가 되는 때가 많아서 더 가까이 지냈던 게 사실이다. 더러는 얘기에 취해서 부산 교외의 감천의 오솔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휴전 직후 그녀는 미국에서 4년간 유학하고 귀국해서 YWCA 전국연합회의 총무이사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는 우연히 다시 만나 무척 자연스럽게 지내다가 그해 5월에 결혼했다.]

“부산 교외의 감천의 오솔길을 함께 걸었다”는 술회를 보면 연인을 담은 한폭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하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사람이 이미 이 당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통상적으로 생각해도 동거까지 하고 있는 애인을 둔 여자가 친밀하지도 않은 다른 남자와 “오솔길을 함께 걷곤하는”행위를 한다면 무언가 일이 잘 못되고 있다는 증상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이호희는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1962년에 40세의 나이로 정일형/이태영 부부를 들러리로 세워 사실상의 나이로1년 년하인 김대중과 결혼한다. 결혼 당시에 김대중에게는 전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김홍일과 김홍업이 있었고, 결혼 후인 1963년에 김대중과의 사이에서 김홍걸을 낳는다. 당시 사회적 통념에서 볼때, 아무리 노쳐녀라 하지만 부잣집 딸에 사회적으로도 잘 나가며 미국물까지 먹은 신여성이 아이가 둘이나 딸린 연하의 빈털털이 홀애비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여지기 힘든 일이라 할 것인바, 뒤에 숨겨진 사연을 알고 나면 별 이상한 일도 아니라 할 것이다.


국회의원이 못 된 당선자

그런데 민주당이 절대 다수인 5대 국회에서 제정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이 통과됨에따라 자유당 출신 인제 국회의원 전형산은 국회의원 신분을 잃게되고 1961년 5월 14일 인제에서는 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결연한 마음으로 이 보궐선거에 재 출마한 김대중은 북한 김일성 대학출신으로(?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인제에 내려와 그곳 약사와 결혼하여 약국을 운영하고 있던 엄창록이라는 자를 자신의 선거참모로서 들여 앉혔다는데 이 엄창록은 조직의 귀신으로 알려진 자로서 한국 선거사상 최초로 소위 점조직 선거운동 개념을 도입했다고 전해진다. 이 엄창록은 한동안 김대중의 비서로서 “엄비서”로 불려지고 있었으나 정통 동교동계 비서들과는 잘 융화되지 못하였다고 하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이 엄창록이란 자는 빠짝 마른체구에 얼굴부터 빨갱이 냄새가 풍기는 전형적 빨갱이 처럼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였다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김대중과 엄창록을 엮어준 제3의 세력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제3세력이 어던 존재인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여튼 이 보궐선거에서 김대중은 생애 처음으로 선거에 당선한다. 자신의 당선에 너무도 감격한 김대중은 자신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하여 인제군의 6개면에서 하루에 한 면씩 면민들을 대상으로 축하연을 열게된다. 그러나 3번째 면에서의 축하연을 베풀 바로 그날 아침에 김대중은 5.16군사혁명의 발발과 더불어 국회가 해산되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듣는다. 황급히 그 험했던 강원도 지방도로를 7시간 30분동안 운전한 끝에 김대중은 가까스로 국회정문에 도착하였으나 그를 맞은 것은 국회의사당앞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두 대의 탱크였다.

국회의원 당선증을 꺼내 흔들고 의원등록을 호소하며 탱크의 그 두꺼운 철판을 주먹으로 두들겨 대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그의 국회에의 진출은 국회의사당의 문앞에도 가 보지도 못한 채 물거품이 되었다. 당시에는 후보자가 당선되어 당선증을 교부 받았더라도 국회 사무처에 등록을 한 연후에라야 국회의원 신분이 되는 그런 때였다한다. 따라서 김대중은 당선이 되었으면서도 국회의원 신분이 되지 못한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