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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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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파일:Kim-children.jpg]]
|그림설명 = 김슈라의 여동생 [[김경희|김경희(1946.05.30~ )]]의 백일 기념 사진으로 슈라가 나오는 유일한 사진이자, 김일성과 [[김정숙 (1917년)|김정숙(金正淑, 1917~1949)]] 및 3자녀가 모두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김정숙, 김정일, [[김경희]], 김일성, 김정일의 남동생 슈라. 맨 오른쪽 여자는 유모인 것 같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있었던 일본인 여성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일 가능성이 있다.<ref name="koba">小林和子(旧姓:萩尾) 著, [http://dir.yourpedia.org/wiki/%E9%87%91%E6%97%A5%E6%88%90#.E6.97.A5.E6.9C.AC.E4.BA.BA.E5.A5.B3.E6.80.A7.E3.81.8C.E8.A6.8B.E3.81.9F.E9.87.91.E6.97.A5.E6.88.90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http://archive.history.go.kr/id/AJP002_14_00B1655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ref>
|본명  =
|국적  =
|성별  = 남성
|출생  = 1944년
|출생지 = 소련 하바롭스크 인근
|사망  = 1947년 (향년 3세)
|사망지 = 김일성 수상관저의 연못에서 익사
|주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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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김일성, 김정숙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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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배지|형}}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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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슈라'''(1944~1947년 7월<ref name="shind"/>)는 [[김일성]]과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 사이의 둘째 아들이며, [[김정일]]의 동생이고, [[김경희]]의 오빠이다. 김일성의 [[88여단]] 시절 소련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후 평양에 왔으나 어릴 때 연못(분수대)에 빠져 익사했다. 너무 어릴 때 죽어 개인사는 별 의미가 없으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가족사를 이해하는 데는 나름대로 중요하다.
'''김슈라'''(1944~1947년 7월<ref name="shind"/>)는 [[김일성]]과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 사이의 둘째 아들이며, [[김정일]]의 동생이고, [[김경희]]의 오빠이다. 김일성의 [[88여단]] 시절 소련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후 평양에 왔으나 어릴 때 연못(분수대)에 빠져 익사했다. 너무 어릴 때 죽어 개인사는 별 의미가 없으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가족사를 이해하는 데는 나름대로 중요하다.


슈라를 한자로 受羅(수라)로 적은 사례도 있다<ref name="sura">[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5130020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05-13&officeId=00020&pageNo=5&printNo=21116&publishType=00020 비화 김일성과 북한 :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 <4> 김성애는 시종비서 여군 출신] 1990.05.13 동아일보 5면</ref>. 그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 또는 김평일이라는 주장이 많이 있으나 어떠한 근거도 찾기 어렵다.  
슈라를 한자로 受羅(수라)로 적은 사례도 있다<ref name="sura">[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51300209205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05-13&officeId=00020&pageNo=5&printNo=21116&publishType=00020 비화 김일성과 북한 :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 <4> 김성애는 시종비서 여군 출신] 1990.05.13 동아일보 5면</ref>. 그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 또는 김평일이라는 주장이 많이 있으나 어떠한 근거도 찾기 어렵다. 형인 [[김정일]]이 해방 후 북한에 와서도 소련식 이름 유라를 계속 쓰다 [[김정일의 개명 이력|1960년에야 개명]]한 것을 볼 때 일찍 죽은 그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파일:Kim-children.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슈라의 여동생 [[김경희|김경희(1946.05.30~ )]]의 백일 기념 사진으로 슈라가 나오는 유일한 사진이자, 김일성과 [[김정숙 (1917년)|김정숙(金正淑, 1917~1949)]] 및 3자녀가 모두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김정숙, 김정일, [[김경희]], 김일성, 김정일의 남동생 슈라. 맨 오른쪽 여자는 유모인 것 같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있었던 일본인 여성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일 가능성이 있다.<ref name="koba">小林和子(旧姓:萩尾) 著, [http://dir.yourpedia.org/wiki/%E9%87%91%E6%97%A5%E6%88%90#.E6.97.A5.E6.9C.AC.E4.BA.BA.E5.A5.B3.E6.80.A7.E3.81.8C.E8.A6.8B.E3.81.9F.E9.87.91.E6.97.A5.E6.88.90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http://archive.history.go.kr/id/AJP002_14_00B1655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ref>]]
 
[[소련]]식 이름인 "슈라(Шура, Shura)"는 알렉산드르(Александр)의 애칭이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13723989 <nowiki>[Russia 포커스]</nowiki> 러시아인 이름에 담긴 사회학] [중앙일보] 입력 2014.01.24</ref>  
==유라([[김정일]])와 슈라의 정식 소련명==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 유라(Юра, Yura)는 유리(Юрий, Yuri)의 애칭이고, 동생의 이름 "슈라(Шура, Shura)"는 알렉산드르(Александр)의 애칭이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13723989 <nowiki>[Russia 포커스]</nowiki> 러시아인 이름에 담긴 사회학] [중앙일보] 입력 2014.01.24</ref>  
{{인용문|[러시아] 이름 중에 지소사<ref>지소사(指小辭, diminutive, DIM) : 어떤 말에 덧붙어 원래의 뜻보다 더 작은 개념이나 친애의 정 등을 나타내는 접사. 또는, 그렇게 하여 파생된 말.</ref>(어미) 자체가 계속 변하는 경우도 있다. 알렉산드르는 사샤(Саша, Sasha) - 사슈라(Сашура, Sashura) - 슈라(Шура, Shura)로 변한다. 얼핏 첫 이름과 아무 관계 없어 보이지만 러시아인이라면 ‘슈라’가 ‘알렉산드르’의 약칭이라는 걸 안다.}}
{{인용문|[러시아] 이름 중에 지소사<ref>지소사(指小辭, diminutive, DIM) : 어떤 말에 덧붙어 원래의 뜻보다 더 작은 개념이나 친애의 정 등을 나타내는 접사. 또는, 그렇게 하여 파생된 말.</ref>(어미) 자체가 계속 변하는 경우도 있다. 알렉산드르는 사샤(Саша, Sasha) - 사슈라(Сашура, Sashura) - 슈라(Шура, Shura)로 변한다. 얼핏 첫 이름과 아무 관계 없어 보이지만 러시아인이라면 ‘슈라’가 ‘알렉산드르’의 약칭이라는 걸 안다.}}
이 이름은 개인에게 붙여진 고유한 이름이고, 소련식 작명법에 따르면 전체 이름의 나머지 부분은 부친의 이름과 성에 따라 결정이 된다.
김일성의 이름은 해방전 소련군 [[88여단]]에 있을 때는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고, 해방 후 평양에 와서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170020920200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2-06-17&officeId=00020&pageNo=2&printNo=21856&publishType=00020 蘇(소),「6.25南侵(남침)」비밀文件(문건) 공개] 1992.06.17 동아일보 2면</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647913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ref> 그러므로 소련에 있을 때 아들들의 정식 이름은 개인 고유 이름에다 "진지첸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지체노비치 진(Жичэнович Цзин, Zhichenovich Jing)을, 평양에 왔을 때는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일세노비치 킴(Ирсенович Ким, Irsenovich Kim)"을 더한 것이 된다.
따라서 두 아들의 정식 소련 이름은 소련에 있을 때는 유라는 "유리 지체노비치 진(Юрий Жичэнович Цзин, Yuri Zhichenovich Jing)", 슈라는 "알렉산드르 지체노비치 진(Александр Жичэнович Цзин, Aleksandr Zhichenovich Jing)"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평양에 와서는 유라는 "유리 일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Yuri Irsenovich Kim)", 슈라는 "알렉산드르 일세노비치 킴(Александр Ирсенович Ким, Aleksandr Irsenovich Kim)"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소련에서는 실제로 그런 이름을 썼겠지만, 평양에 와서는 주로 한국식으로 김유라, 김슈라와 같이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슈라가 나오는 기록==
==슈라가 나오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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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의 수기에 나오는 슈라===
===1970년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의 수기에 나오는 슈라===
해방 직후 김일성 관저에는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 여자가 가정부로 있으면서 가사 일과 자녀를 돌보는 일을 도왔다. 그녀는 일본으로 귀환한 후 1970년에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제목의 수기를 썼는데, 여기에 김일성의 아들로 장남 유라(ユーラ)와 차남 슈라(スーラ)의 이름이 나온다.<ref name="koba"/>
해방 직후 김일성 관저에는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 여자가 가정부로 있으면서 가사 일과 자녀를 돌보는 일을 도왔다. 그녀는 일본으로 귀환한 후 1970년에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제목의 수기를 썼는데, 여기에 김일성의 아들로 장남 유라(ユーラ)와 차남 슈라(スーラ)의 이름이 나온다.<ref name="koba"/>
 
===88여단 출신 고려인 김창국 인민군 대좌의 수기===
소련 고려인 출신 김창국은 슈라가 태어난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에 마을의 [[88여단]]에서 근무했으며, 당시 슈라를 직접 보기도 했다. 김창국은 해방 후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정찰부국장을 지냈고, 소련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다.
* [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30/2005551562v30.pdf 정찰국 부국장 김창국(1916-1981) 대좌] (미의회도서관) : p.6에 슈라가 나옴.
: [https://www.loc.gov/item/2005551562/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nowiki>[i.e. 쓰여진]</nowiki>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의회도서관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슈라의 익사에 대한 증언==
==슈라의 익사에 대한 증언==
슈라는 1947년 7월경 김일성 관저 옆의 연못(분수대) 가에서 놀다 익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으나 서로 엇갈리는 점이 많다. 형 김정일이 현장에 같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가 일부러 동생을 물속으로 밀어넣어 죽게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믿기 어렵다. 동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겁에 질려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믿을만한 것 같다. 일설에는 [[최현]]의 아들 최룡택(최룡해의 형)도 현장에 있었는데 역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나중에 어른들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익사한 다음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최룡택이 김일성의 미움을 산 것이 그가 동생 최룡해와는 달리 별로 중용되지 못한 이유라고 한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906100025&page=1 北 2인자 최룡해 : 빨치산 혈통 최룡해는 어떻게 2인자가 됐나] 월간조선 2019년 2월호</ref> 슈라가 사망한 후 김일성은 서울에서 조계종 스님을 모셔다 천도재를 올리게 했다고 북한 문서에 나온다.<ref name="tcho"/>
신동아 2000년 8월호는 슈라의 익사와 관련한 여러 증언과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다.<ref name="shind">[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1/13/100670/1 완전해부 인간 김정일 미스터리 :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pp.122~131</ref>
신동아 2000년 8월호는 슈라의 익사와 관련한 여러 증언과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다.<ref name="shind">[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1/13/100670/1 완전해부 인간 김정일 미스터리 :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pp.122~131</ref>
{{인용문|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인용문|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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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샤는 1947년 여름(7월), 정원 연못에 빠져 죽었다. 옆집이었기 때문에 와랴(김정숙)가 나를 부르러 왔다. 와랴는 사샤가 자고 있는 것이라며 흐느껴 울었다. 사샤가 빠진 것은 4m깊이의 연못(저수지)이었다. 나는 사고 직후 김일성의 집을 경비 서는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전혀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사샤의 장례식이 언제 행해졌는지는 모르며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사샤는 1947년 여름(7월), 정원 연못에 빠져 죽었다. 옆집이었기 때문에 와랴(김정숙)가 나를 부르러 왔다. 와랴는 사샤가 자고 있는 것이라며 흐느껴 울었다. 사샤가 빠진 것은 4m깊이의 연못(저수지)이었다. 나는 사고 직후 김일성의 집을 경비 서는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전혀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사샤의 장례식이 언제 행해졌는지는 모르며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47년 7월 김정일이 다섯 살 가량이었을 때 세 살 난 동생이 자택 연못에서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레베데프|레벤셰프 소장]]의 부인도 증언해주었다. [[레베데프|레벤셰프]] 부부는 평양 체재 중 김일성과 이웃해 살며 친하게 지냈다. [[레베데프|레벤셰프 소장]]은 김일성이 술을 좋아했다고 증언했고, 부인은 김정숙이 러시아어를 말했다고 전했다. 부인들끼리 여행도 했고, 유년의 김정일이 찍힌 귀중한 사진도 보여주었다.
47년 7월 김정일이 다섯 살 가량이었을 때 세 살 난 동생이 자택 연못에서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레베데프|레벤셰프(레베데프) 소장]]의 부인도 증언해주었다. [[레베데프|레벤셰프(레베데프)]] 부부는 평양 체재 중 김일성과 이웃해 살며 친하게 지냈다. [[레베데프|레벤셰프(레베데프) 소장]]은 김일성이 술을 좋아했다고 증언했고, 부인은 김정숙이 러시아어를 말했다고 전했다. 부인들끼리 여행도 했고, 유년의 김정일이 찍힌 귀중한 사진도 보여주었다.


한편 이기봉이 지은 책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ref>이기봉,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47956035 김정일, 그는 어떤 인물인가] 서울: 남북문제연구소, 1993</ref>에서는 50년대 말 노동당부위원장 보좌관을 지냈고 60년대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인물의 증언을 인용해 슈라의 익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한편 이기봉이 지은 책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ref>이기봉,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47956035 김정일, 그는 어떤 인물인가] 서울: 남북문제연구소, 1993</ref>에서는 50년대 말 노동당부위원장 보좌관을 지냈고 60년대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인물의 증언을 인용해 슈라의 익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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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누군가가 사고를 목격했다면 동생을 몇 번이나 연못에 밀어 넣는 김정일의 행동을 제지했을 것이기 때문에 악의를 가지고 지어낸 이야기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시 5살이었던 김정일이 동생을 고의로 익사시켰다는 이야기를 현재 김정일의 성격과 연결해서 해설하는 것에 나는 놀랐다.}}
가령 누군가가 사고를 목격했다면 동생을 몇 번이나 연못에 밀어 넣는 김정일의 행동을 제지했을 것이기 때문에 악의를 가지고 지어낸 이야기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시 5살이었던 김정일이 동생을 고의로 익사시켰다는 이야기를 현재 김정일의 성격과 연결해서 해설하는 것에 나는 놀랐다.}}
[[소련 군정]]의 제25군 군사위원이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의 부인 에프드키야 레베데프도 슈라가 익사할 당시의 일에 대해 일본의 북한 연구가 [https://ja.wikipedia.org/wiki/%E6%81%B5%E8%B0%B7%E6%B2%BB 에야 오사무 (惠谷治, 1949~2018)]에게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ref>[https://dlps.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1992016048&sysid=nhn 김일성 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 (1992.5)  (極東問題硏究所) pp.55-56</ref>
{{인용문|
:김일성의 아내는 '와랴' 라고 불리워졌고 러시아말을 했다. 장남은 ‘유라’ 차남은 '사샤'라고 불리워졌다. '사샤'는 어느 여름날 정원 연못에 빠져 죽었다. 집이 이웃이기 때문에 와랴가 날 부르러 왔다. 가 보았더니 사샤의 시체가 놓여 있고 와랴는 애가 잠자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울부짖었다.<br>
이렇게 증언해 준 것은 앞에 등장한 제25군 정치위원 [[레베데프|레베제프]] 소장의 아내 에프드키야 레베제프 부인이다.<br>
……<br>
김정일의 동생은 보통 슈라(修羅)라고 알려져 있는데 러시아 이름의 알렉산드르는 ‘슈라' 또는 '사샤' 라고 애칭된다.
소련에서 생활하고 있던 김일성 일가가 평양에 온 지 1년 후인 1946년 여름 차남 알렉산드르가 익사했다. 그러나 연못에 빠졌다든가 탱크에 끼었다든가 여러 풍문이 있어서 나는 레베제프 부인에게 확인했다.<br>
- 연못의 크기는 어느정도 였나<br>
ㆍ 4m정도였다. 나는 김일성의 집을 경비하는 젊은이와 사고 직후 말해 보았는데 연못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했었다. 장례가 언제 치러졌는지는 모르고 참석도 하지 않았다.}}


한편 김정일의 처조카로 한국으로 1982년 한국으로 귀순했다가 암살당한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5%9C%EC%98%81 이한영(李韓永, 1960~1997)]은 저서 《김정일 로열 패밀리》에서 슈라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ref> 이한영, [http://www.yes24.com/Product/Goods/437162 《김정일 로열 패밀리 :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의 수기》] (시대정신, 2004년 02월 25일)</ref><ref>[http://www.uni-media.net/program_read.php?n=303 리일남 수기 제18부 김정일 왕족을 위한 시설들] 국민통일방송</ref><ref>[http://www.uvision.or.kr/board/rg4_board/view.php?&bbs_code=board23&bd_num=16060 <김정일의 로열패밀리-2> 독서토론회] 통일역사연구실  2013.05.11</ref>
한편 김정일의 처조카로 한국으로 1982년 한국으로 귀순했다가 암살당한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5%9C%EC%98%81 이한영(李韓永, 1960~1997)]은 저서 《김정일 로열 패밀리》에서 슈라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ref> 이한영, [http://www.yes24.com/Product/Goods/437162 《김정일 로열 패밀리 :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의 수기》] (시대정신, 2004년 02월 25일)</ref><ref>[http://www.uni-media.net/program_read.php?n=303 리일남 수기 제18부 김정일 왕족을 위한 시설들] 국민통일방송</ref><ref>[http://www.uvision.or.kr/board/rg4_board/view.php?&bbs_code=board23&bd_num=16060 <김정일의 로열패밀리-2> 독서토론회] 통일역사연구실  2013.05.1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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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라는 어릴 때 평양의 노동당사 건물 앞 분수대에 빠져 익사했으며, 김정일이 밀어넣어 죽였다는 주장도 있으나<ref name="jang">[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ac70c9d3acfc-c9c4c2e4/co-jj-11082011150622.html (김씨 일가의 실체) 김경희의 불우한 삶] 자유아시아방송 2011-11-08 : 당창건 기념관은 박정식의 개인저택이 아니라 일제시대 상품진열소 건물임.</ref>, 확실하지 않다. 당시의 노동당사 건물은 일제시대 상품진열소 건물로, 지금은 [https://ko.wikipedia.org/wiki/%EB%8B%B9%EC%B0%BD%EA%B1%B4%EC%82%AC%EC%A0%81%EA%B4%80 당창건사적관]으로 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그 앞에 분수대를 만들었으나<ref>[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94325574 平壤商品陳列所에 噴水臺設置 夜間에 開放] 매일신보(每日申報) 1927년 07월 30일 04면 03단</ref>, 슈라가 익사한 후 철거했다고 하며, 지금은 없다. 당시 김일성이 살던 자택도 노동당사 건물에서 서쪽으로 100 m 정도 떨어진 지근 거리에 있었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672 당창건사적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 name="rfa">[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co-su-10172017112603.html ‘당창건사적관’의 숨겨진 계보] 자유아시아방송 2017-10-17</ref>
슈라는 어릴 때 평양의 노동당사 건물 앞 분수대에 빠져 익사했으며, 김정일이 밀어넣어 죽였다는 주장도 있으나<ref name="jang">[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ac70c9d3acfc-c9c4c2e4/co-jj-11082011150622.html (김씨 일가의 실체) 김경희의 불우한 삶] 자유아시아방송 2011-11-08 : 당창건 기념관은 박정식의 개인저택이 아니라 일제시대 상품진열소 건물임.</ref>, 확실하지 않다. 당시의 노동당사 건물은 일제시대 상품진열소 건물로, 지금은 [https://ko.wikipedia.org/wiki/%EB%8B%B9%EC%B0%BD%EA%B1%B4%EC%82%AC%EC%A0%81%EA%B4%80 당창건사적관]으로 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그 앞에 분수대를 만들었으나<ref>[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94325574 平壤商品陳列所에 噴水臺設置 夜間에 開放] 매일신보(每日申報) 1927년 07월 30일 04면 03단</ref>, 슈라가 익사한 후 철거했다고 하며, 지금은 없다. 당시 김일성이 살던 자택도 노동당사 건물에서 서쪽으로 100 m 정도 떨어진 지근 거리에 있었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672 당창건사적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 name="rfa">[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co-su-10172017112603.html ‘당창건사적관’의 숨겨진 계보] 자유아시아방송 2017-10-17</ref> 슈라가 익사한 곳이 김일성 관저 앞 연못이라는 주장, 노동당사 건물 앞 분수대라는 주장으로 엇갈린다. 당시 김일성 관저는 여러 곳이 있었던 것 같고, 노동 당사 인근에도 하나가 있었으므로 같은 곳일 수도 있다.


우종창 기자는 6.25 때 노획된 북한 문서에 김정일이 부친 김일성이 보는 앞에서 동생 슈라를 연못에 익사시켰다고 나와 있다고 했다.<ref name="tcho">[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6/2013060690247.html <nowiki>[장성민의 시사탱크]</nowiki>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TV조선 2013.06.06</ref> 김일성은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들이 익사한 당시 서울서 조계종 스님을 모셔다 죽은 아들을 위한 재를 올리게 했다고 한다.<ref name="tcho"/>
우종창 기자는 6.25 때 노획된 북한 문서<ref>국회도서관에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라는 제목의 [마이크로자료] 총 101권이 소장되어 있다 : [http://dl.nanet.go.kr/SearchDetailView.do?cn=NONB1200218755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 v.1 <nowiki>[마이크로자료]</nowiki>] ~ [http://dl.nanet.go.kr/SearchDetailView.do?cn=NONB1200218857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 v.101 <nowiki>[마이크로자료]</nowiki>] (서울 : 국회도서관, 2002)</ref>에 김일성이 익사한 둘째 아들을 위해 서울서 조계종 스님을 초청해다 천도재를 지냈다고 나와 있다고 했다.<ref name="tcho">[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6/2013060690247.html <nowiki>[장성민의 시사탱크]</nowiki>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TV조선 2013.06.06</ref> 김일성은 기독교 배경의 집안에서 자랐지만 해방 당시는 기독교 신자들을 탄압했고,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죽은 아들을 위해 불교식의 재를 올렸다.  
{{인용문|'''[장성민의 시사탱크]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 TV조선 2013.06.06
{{인용문|'''[장성민의 시사탱크]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 TV조선 2013.06.06<ref name="tcho"/>
[주요발언] 우종창 / 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주요발언] 우종창 / 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노획문서 마이크로필름에 김일성이 익사한 둘째아들 위해 천도재 올린 사실 기록돼 있어"
:"노획문서 마이크로필름에 김일성이 익사한 둘째아들 위해 천도재 올린 사실 기록돼 있어"
:"김일성, 죽은 둘째 아들 위해 조계종 스님 평양으로 불러"
:"김일성, 죽은 둘째 아들 위해 조계종 스님 평양으로 불러"
:"김정일, 아버지 보는 앞에서 동생 슈라 연못에 익사시켜"
:"김정일 출생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소련군 야영지"}}
:"김일성 권력 잡자 김정숙 멀리하고 김성애 총애"
방송에서 우종창 기자는 6.25 노획문서에 나온 내용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본 내용까지 섞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슈라와 관련해서는 노획문서에 "<u>익사한 둘째 아들 슈라를 위해 서울에서 조계종 스님을 모셔다 천도재를 올렸다 (15분 45초)</u>"는 내용만 있다고 한다. 또 "<u>김정일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오케안스카야 야영지(군대 주둔지)에서 1941년 2월 16일 출생했다(16분 25초)</u>"고 나온다 한다.
:"김정일 母 김정숙, 김일성 바람기에 권총으로 자살"
 
:"김정숙, 빨치산 유격대 출신에 권총 사격 솜씨 탁월"}}
방송에서 슈라가 죽은 것이 1949년이라고 했지만 이때는 남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된 후라 38선을 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이므로 서울의 스님이 북으로 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6.25]] 전쟁 중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도 슈라가 1949년 봄에 익사했다는 증언을 하였다. 당시 조옥희를 조사했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700 김창룡(金昌龍, 1916~1956)] 대령의 口述 회고록에 그런 말이 나온다.
* 김창룡 지음, [http://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34235 남정옥(南廷屋, 1958~ )] 엮음,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87861553 『숙명의 하이라루(海拉爾) :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장군 비망록』] (청미디어, 2022년 03월 17일) pp.395~396.
 
===[[김정일]] 회고록의 슈라의 죽음에 대한 언급===
[[김정일]] 회고록에는 슈라가 1947년 아닌 1948년 여름에 죽었다고 했으나, 이는 오류인 듯하다.
* [https://nklogin.com/post/Postmng?ptype=v&contentkey=BFC1615530610 김정일회고록 최초 입수. 동생의 죽음에 대한 고백.] 주성하 NK Login 2021.03.17
{{인용문|1948년 여름, 우리 집에는 예상치 않은 가정적 비극까지 겹쳐들었다. 어린 내 동생이 정원에서 놀다가 못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때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부관과 경위대원들이 어머님과 함께 사색이 되여 돌아갔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남조선혁명가 [[성시백|성시백(成始伯, 1905~1950)]]과 함께 나라의 통일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담화를 나누고 계시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는 언제 나오시나 하고 수령님께서 계시는 방 쪽만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엄청난 비극이 생기였다는 생각에 속이 조마조마해 지기만 했다. 사고의 전말을 알려드리려고 어머님께서 들어갔다 나오신 다음에도 수령님께서는 웬일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였다.
 
이상한 일이였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어머님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어머님의 눈은 눈물에 젖어 벌겋게 짓물려 있었다. 어머님은 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저리 가 있거라” 했을 뿐 다른 말씀을 더 안 하시였다.
 
수령님께서 밖으로 나오신 것은 그때로부터 퍼그나 시간이 흘러간 다음이였다. [[성시백]]은 그제야 우리 가정에 어떤 불상사가 생겼는가를 깨닫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령님의 손을 부여잡았다.
:“장군님,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 같은 게 뭐라고. 아, 세상에! …”
:“성 선생, 이러지 마십시오. 내 한가정의 불행이 아무리 큰들 민족이 처한 분렬의 위기에 비기겠습니까. 놀라게 해드려 안됐습니다.”
 
[[성시백]]은 불상사를 당하신 장군님께 위로 한마디 못해 드린 이 못난이를 도리여 위로하십니까, 예? 하며 목 메여 부르짖었다.
:“제 기어이 민족분렬을 막고 장군님을 서울에 모시는 것으로 오늘 못한 위로를 다 해드리겠습니다. 제 오늘에야 남북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 중대사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바친다는게 무엇인가를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비장한 각오를 안고 남조선으로 떠나갔다.}}


==슈라의 한국식 이름에 대해==
==슈라의 한국식 이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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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peoplepill.com/people/kim-man-il About Kim Man-il(金萬一): Son of Kim Il-sung - Biography and Life] people pill
* [https://peoplepill.com/people/kim-man-il About Kim Man-il(金萬一): Son of Kim Il-sung - Biography and Life] people pill


===김평일(金平日)===
===김평일(金平日, 金平一)===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 아닌 김평일(金平日)이라는 주장도 있다.<ref name="kimcj">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항일(抗日) 빨치산》, (서울 : 東亞日報社, 1992) p.26</ref><ref>정창현, [https://unibook.unikorea.go.kr/material/view?materialScope=ORIG&uid=CAT-00000000000268705 김정일의 성장과정과 후계체제 확립]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6</ref><ref name="shind"/><ref>[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9 연해주에서 북·러 정상회담 가진 김정일의 출생비밀] 미래한국 2002.08.30 : 슈라는 김평일</ref>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고,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 부여단장이었던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의 아내 김정순(金貞順, 조선족)의 증언이다.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 아닌 김평일(金平日, 金平一)이라는 주장도 있다.<ref name="kimcj">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항일(抗日) 빨치산》, (서울 : 東亞日報社, 1992) p.26</ref><ref>정창현, [https://unibook.unikorea.go.kr/material/view?materialScope=ORIG&uid=CAT-00000000000268705 김정일의 성장과정과 후계체제 확립]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6</ref><ref name="shind"/><ref>[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9 연해주에서 북·러 정상회담 가진 김정일의 출생비밀] 미래한국 2002.08.30 : 슈라는 김평일</ref>  
 
소련군 [[88여단]]에서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으로 있다 해방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의 증언이다.<ref>[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011040086721557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4] 한국일보 1990.11.04</ref>
{{인용문|김일성과 같은 빨치산 출신인 김정숙은 88여단에서는 김일성의 뒷바라지만 했는데 음식솜씨가 좋았고 인심도 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김정일|정일(소련명ㆍ유라)]]은 한돌 반으로 한창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고, <u>44년 차남 평일(소련명ㆍ슈라)이 또 태어났다.</u>
 
그런데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해보니 백두산에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초가집이 세워져 있고 정일봉이란 바위도 있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고,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 부여단장이었던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의 아내 김정순(金貞順, 金伯文, 조선족)도 같은 증언을 했다.
{{인용문|신동아 2000년 8월호<ref name="shind"/><br>
{{인용문|신동아 2000년 8월호<ref name="shind"/><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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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이 슈라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이 슈라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슈라가 이복 동생 [[김평일]]과 같은 한국식 이름을 가졌다는 김정순의 증언은 좀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나중에 태어난 동생에게 일찍 죽은 형과 같은 이름을 붙이는 사례는 없다. 불길한 이름으로 여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B%8C%80%EC%88%99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도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 김평일(金平一)이라고 했으나, 아무 근거도 밝히지 않았다.
{{인용문|소련에 있을 때에 그녀는 또 한 아들을 낳았다. 슈라(Shura, 平一)라고 하는 둘째 아들은 1944년에 태어났으나 1947년 7월 평양에서 물놀이를 하다 익사했다.<ref>서대숙(徐大肅)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8</ref><br><br>
 
김정숙은 역시 브아츠크에서 차남을 낳았고, 그 아이는 “슈라" 라고 했다. 차남의 조선명은 김평일이었는데, 그는 평양에 돌아와서 당시 [[소련 군정]]의 민정 담당 [[레베데프]] 소장의 아들과 분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했다.<ref>서대숙 지음,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 (서울: 을유문화사, 2000) p.174</ref>}}
 
슈라가 이복 동생 [[김평일]]과 같은 한국식 이름을 가졌다는 증언은 좀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나중에 태어난 동생에게 일찍 죽은 형과 같은 이름을 붙이는 사례는 없다. 불길한 이름으로 여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 평일이라는 주장은 후에 태어난 그의 이복동생 [[김평일]]의 이름과 혼동해서 나온 주장으로 보인다.




아래 사이트에는 슈라의 이름이 김평일로 나온다. (이복동생인 김성애의 아들도 [[김평일]]로 나옴.)
아래 사이트에는 슈라의 이름이 김평일로 나온다. (이복동생인 김성애의 아들도 [[김평일]]로 나옴.)
* [https://en.wikipedia.org/wiki/Vyatskoye,_Khabarovsk_Krai Vyatskoye, Khabarovsk Krai] Wikipedia : Shura Kim (sometimes known as the first Kim Pyong-il)
* [https://nkleadershipwatch.wordpress.com/kim-family/ Kim Family] : North Korea Leadership Watch
* [https://nkleadershipwatch.wordpress.com/kim-family/ Kim Family] : North Korea Leadership Watch


===슈라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다.===
===슈라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다.===
형 [[김정일]]이 해방 후에도 한국식 이름은 없이 유라(Юра, Yura)라는 소련식 이름을 계속 쓰다가 1960년 7월에야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사실을 볼 때 슈라(Шура, Shura)에게는 한국식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형이 계속 소련식 이름 유라로 불리고 있었는데, 동생만 한국식 이름을 지어 붙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아이의 이름을 나중에 개명했을 리도 만무하다.
형 [[김정일]]이 해방 후에도 한국식 이름은 없이 유라(Юра, Yura)라는 소련식 이름을 계속 쓰다가 1960년 7월에야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사실을 볼 때 슈라(Шура, Shura)에게는 한국식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형이 계속 소련식 이름 유라로 불리고 있었는데, 동생만 한국식 이름을 지어 붙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아이의 이름을 나중에 개명했을 리도 만무하다.
한재덕이나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는 해방 후 평양 김일성의 집에서 슈라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인데 모두 그의 이름을 슈라라고만 말했을 뿐 만일이나 평일이라는 한국식 이름은 거론하지 않은 것도 그에게 한국명이 없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더구나 한재덕은 김일성이 자식들 이름을 소련식으로 지은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라나 슈라에게 한국식 이름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김정일의 개명 이력]]
* [[김정일의 개명 이력]]


==뱌츠코예에서 익사한 김정일 동생이 또 있나?==
==뱌츠코예에서 익사한 김정일 형제가 또 있나?==
김정일의 동생 슈라는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으므로 평양에 온 다음 익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88여단]] 관련자 또는 여단이 있던 뱌츠코예 마을 주민들 중에 김정일의 동생이 뱌츠코예에서 익사했고, 그곳에 묘까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김정일의 동생 슈라는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으므로 평양에 온 다음 익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88여단]] 관련자 또는 여단이 있던 뱌츠코예 마을 주민들 중에 김정일의 동생이 뱌츠코예에서 익사했고, 그곳에 묘까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88여단]] 1대대 부대대장 [[박성훈]]은 김일성의 두 아들 중 하나가 뱌츠코예에서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다<ref>[[가브릴 코로트코프|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75; pp.167~168.</ref>. 이런 증언을 하는 사람이 [[박성훈]] 외에도 더러 있는데<ref>[http://www.donga.com/news/List/article/all/20120709/47646856/2 <nowiki>[뉴스A]</nowiki>단독/‘은둔형 지도자’ 김정일 소꿉친구 “여느 아이들처럼 놀았다”] 채널A 2012-07-09</ref><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2082270351 <nowiki>[러 할머니]</nowiki> “김정일 위원장 어릴적 모습이 선해…”] 조선일보 2002/08/22</ref><ref>[http://srchdb1.chosun.com/pdf/i_archive/read_body.jsp?ID=9306302301 최보식의 뱌츠코예 방문기 : 김정일생가 터엔 대학시설물] 조선일보 1993.06.30 / 23 면</ref>,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김일성에게는 당시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 또 있었다는 말도 있으므로 그 경우에 해당할 가능성도 있다<ref>[http://blog.daum.net/mybjj123/4516845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연해주 고려인 아나톨리 리의 글)</ref>.
[[88여단]] 1대대 부대대장 [[박성훈]]은 김일성의 두 아들 중 하나가 뱌츠코예에서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다<ref>[[가브릴 코로트코프|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75; pp.167~168.</ref>. 유사한 증언을 하는 사람이 [[박성훈]] 외에도 더러 있는데<ref name="sergey">[http://www.donga.com/news/List/article/all/20120709/47646856/2 <nowiki>[뉴스A]</nowiki>단독/‘은둔형 지도자’ 김정일 소꿉친구 “여느 아이들처럼 놀았다”] 채널A 2012-07-09</ref><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2082270351 <nowiki>[러 할머니]</nowiki> “김정일 위원장 어릴적 모습이 선해…”] 조선일보 2002/08/22</ref>,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김일성에게는 당시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 또 있었다는 말도 있으므로 그 경우에 해당할 가능성도 있다<ref>[http://blog.daum.net/mybjj123/4516845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연해주 고려인 아나톨리 리의 글)</ref>.


[[가브릴 코로트코프]]는 김일성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소련에서 우연히 알게된 여인에게서 낳은 딸 한 명이 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으나 잊고 지낸다고 하였다<ref name="gk">[[가브릴 코로트코프|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75</ref>. 이러한 딸의 존재는 국내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성이 거쳐간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많으므로 그 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녀를 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들 중 한 명이 뱌츠코예에서 또 익사했는지도 모른다.  
[[가브릴 코로트코프]]는 김일성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소련에서 우연히 알게된 여인에게서 낳은 딸 한 명이 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으나 잊고 지낸다고 하였다<ref name="gk">[[가브릴 코로트코프|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75</ref>. 이러한 딸의 존재는 국내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성이 거쳐간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많으므로 그 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녀를 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들 중 한 명이 뱌츠코예에서 또 익사했는지도 모른다.  


뱌츠코예에는 [[88여단]] 대원들 가족들 중 사망한 사람의 묘가 몇 기 남아 있다. 그러나 묘비에 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아 그 중에 뱌츠코예에서 죽었다는 김일성의 아들 묘가 있는지 명확한 확인이 어렵다.
뱌츠코예에는 [[88여단]] 대원들 가족들 중 사망한 사람의 묘가 몇 기 남아 있다. 그러나 묘비에 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아 그 중에 뱌츠코예에서 죽었다는 김일성의 아들 묘가 있는지 명확한 확인이 어렵다.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63000239123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3-06-30&officeId=00023&pageNo=23&printNo=22389&publishType=00010 김정일(金正日) 생가 터엔 대학(大學) 시설물] 1993.06.30 조선일보 23면
: [http://srchdb1.chosun.com/pdf/i_archive/read_body.jsp?ID=9306302301 최보식의 뱌츠코예 방문기 : 김정일생가 터엔 대학시설물] 조선일보 1993.06.30 / 23 면
{{인용문|'''가족-대원 함께 머물러'''<br>
하바로프스크 사범대측은 "내년쯤이면 이 건물도 헐릴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의 부친인 김일성이 대일 빨치산활동을 벌이다 40년쯤 이곳으로 가족과 부대원을 이끌고 들어와 45년 광복직전까지 머무른 것으로 되어있다. 김정일은 이 마을에서 41년 2월 김일성과 어머니 김정숙사이에서 출생, 러시아식 이름인 유라 로 불렸다고 한다. <u>그의 형은 이곳 아무르강에서 물놀이를 하다 익사했다는 설도 있다.</u><br><br>
'''형은 물놀이하다 익사'''<br>
마을 주민들중 노인들은 김일성부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주민 쉬미코프 바벨씨(88)는 "당시 줄 하나와 별 4개가 있는 견장(대위계급)을 단 까비딴 김일성이 가족및 조선-중국인-러시아인등으로 편성된 군인 2백여명과 함께 마을에 들어와 관사를 지은뒤 돼지를 키우고 채소농사를 지었다"고 말했다. <u>또 다른 주민 페니기아 바르바르씨(81 여)는 "김일성의 관사에 우유를 얻으러 갔다가 그의 두 아들을 본적이 있다"면서 "그중 맏이가 42~43년쯤 아무르강에서 놀다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진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u>}}
* [http://www.palhae.org/gnubrd4/bbs/board.php?bo_table=pds2&wr_id=61&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제1차 연해주 발해 발굴답사 보고서 -서길수-] 고구려 발해 학회 2008-09-10
:안내를 맡은 송선생은 송 알렉산드르씨로 연해주 고려인인 것같다.
{{인용문|'''김일성의 초기 시베리아 활동지'''
나나이족 마을에서 1시간 10분쯤 답사를 한 뒤 11시 15분 마을 떠났다. 20분 정도 8㎞를 되돌아나와 하바에서 콤소모리스크로 가는 큰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콤소모리스크 쪽으로 5분쯤 달려 68㎞ 지점에 이르니 왼쪽으로 뱌츠코예(Vyatskoye)로 가는 비포장 도로가 나타난다. 우리는 그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그 곳에 김일성이 시베리아로 가서 초기에 활동했던 곳이 있다고 해서 어려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조금 가니 마을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오른쪽으로 가니 사거리가 나온다. 이쯤 되자 송선생도 좀 헤깔린 모양이다. 차를 세우고 찾아보기로 했다. 한 여름 낮이지만 숲 속의 모기떼들은 오랜만에 만난 특식을 즐기기 위해 대단히 극성을 떨었다.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얼마를 가니 왼쪽에 아무 글자도 없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저 묘가 김일성 부인의 동생 묘이다"
:"김일성의 처제 묘가 왜 여기에 있는가?"
:"여기서 김일성이 살았소. 김일성이 아들이 김정일이 있잖아요, 여기서 태어났소, 여기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소"
:"이 비석은 누가 언제 만들었습니까?"
:"북조선 사람들이 만들었소. 북조선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목재(벌목)를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만들었소."
바로 옆에 또 4개의 무덤이 있는데 잘 다듬은 판석으로 무덤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이건 친척들의 무덤입니다. 전에는 여기에 집터랑 다 있었오. 군사들이랑 함께 살았던 거요"
강한 함경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송선생은 확신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송선생이 아니면 이곳은 정말 찾아보기도 힘든 곳이다. 송선생은
:"1965년 김일성이 이곳에 왔을 때 길을 닦았다"
:<u>"11살인가 12살인가 아들이 하나가 아무르강 물에 빠져 죽었다"</u>
는 등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곳에서 얼마 안가 뱌츠코예 마을은 바로 아무르강 가 마을이기 때문에 상당히 믿을만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동국대 허만일 교수가 전문적으로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 [https://www.yna.co.kr/view/AKR20111207225900001 박선영 "김정일 형의 묘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연합뉴스 2011.12.07 23:06
* [https://www.yna.co.kr/view/AKR20111207225900001 박선영 "김정일 형의 묘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연합뉴스 2011.12.07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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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박 의원은 "김슈라의 묘는 하바롭스크에서 동북쪽으로 80㎞ 떨어진 뻬아츠코예에 위치하고 있고, <u>묘에는 '러시아 88여단 붉은별 부대에서 사망한 사람과 그 가족의 묘'라고 쓰인 동판이 붙어있다"고 덧붙였다.</u>
{{인용문|박 의원은 "김슈라의 묘는 하바롭스크에서 동북쪽으로 80㎞ 떨어진 뻬아츠코예에 위치하고 있고, <u>묘에는 '러시아 88여단 붉은별 부대에서 사망한 사람과 그 가족의 묘'라고 쓰인 동판이 붙어있다"고 덧붙였다.</u>


그는 이어 "김일성 주석이 1937년부터 하바롭스크에 살다가 1945년 북한으로 돌아갔고 1947년 하바롭스크로 돌아와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며 "김슈라는 김 주석이 북한으로 들어간 1945년∼1947년 하바롭스크 인근 아모르강에 빠져 죽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김일성 주석이 1937년부터 하바롭스크에 살다가 1945년 북한으로 돌아갔고 1947년 하바롭스크로 돌아와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며 <u>"김슈라는 김 주석이 북한으로 들어간 1945년∼1947년 하바롭스크 인근 아모르강에 빠져 죽었다"</u>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이 지역 고려인들은 모두 이 묘가 김 위원장의 형의 묘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이 마을에서 김일성 주석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는 고려인과 그의 가족들도 만났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 지역 고려인들은 모두 이 묘가 김 위원장의 형의 묘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이 마을에서 김일성 주석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는 고려인과 그의 가족들도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은 김슈라의 묘를 자주 왕래하고 있고, 2009년 가을에는 보수공사를 하고 잔치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 사람들은 김슈라의 묘를 자주 왕래하고 있고, 2009년 가을에는 보수공사를 하고 잔치도 했다"고 밝혔다.}}
*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11208/42447202/1 “김정일 남동생 묘, 러시아에 있다”] 동아일보 2011-12-08
: [https://shindonga.donga.com/STUDIO/3/all/20111208/1242824/1 “김정일 남동생 묘, 러시아에 있다”] 2011.12.08 : 관련 사진 (신동아 스튜디오)
{{인용문|6일 현지를 방문하고 귀국한 박 의원에 따르면 무덤의 묘비에는 “1941∼1945년 8월 이곳에 주둔했던 88여단 부대의 군인과 가족들이 묻혀 있다”고 적혀 있다. 마을 주민들은 박 의원에게 “어릴 때 죽은 김 위원장의 남동생 김슈라(러시아식 이름)의 무덤이다. ‘카레이스키’(한국인·북한 사람들을 지칭한 듯함)들이 자주 찾고 있어 올봄 관청에서 묘비 앞의 봉분을 새로 단장했다”고 말했다고 한다.<br>
근처에는 무덤 3개가 더 있으나 ‘김슈라의 무덤’ 뒤에만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고 꽃이 걸려 있으며 무덤 앞에는 중국술 3병이 놓여 있었다는 게 박 의원의 설명. 박 의원은 “중국술로 미뤄 볼 때 북측 관계자들이 참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 만은 없을 것 같으나 사실여부를 밝히는 것도 쉽지 않을 것같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 만은 없을 것 같으나 사실여부를 밝히는 것도 쉽지 않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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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뱌츠코예의 묘비.jpg|뱌츠코예의 묘비.
파일:뱌츠코예의 묘비.jpg|뱌츠코예에 있는 김정일의 동생의 무덤이라는 묘와 비석.<ref name="daum">[http://blog.daum.net/o7482/75 김정일 생가 / 하바롭스크 뱌트스코에 마을 현장 확인] 다음 블로그</ref>
파일:뱌츠코예 묘비의 비문.jpg|뱌츠코예 묘비의 비문.
파일:뱌츠코예 묘비의 비문.jpg|뱌츠코예 묘비의 비문.<ref name="daum"/>
파일:뱌츠코예의 무덤들.jpg|뱌츠코예의 김정일 동생 묘 옆에 있는 3기의 묘.<ref name="daum"/>
파일:88여단 묘비.jpg|이 비는 김슈라의 무덤 뒤에 세워져 있다고 하며, 무덤 앞에 중국술 3병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ref name="stu">[https://shindonga.donga.com/STUDIO/3/all/20111208/1242824/1 “김정일 남동생 묘, 러시아에 있다”] 2011.12.08 : 관련 사진 (신동아 스튜디오)</ref>.
파일:뱌츠코예 묘비의 비문 (1).jpg|뱌츠코예 묘비의 비문<ref name="stu"/>.
파일:88여단 묘비 (1).jpg| 뱌츠코예의 88여단 가족들 묘비 앞에 선 박선영 전 국회의원과 일행.<ref>[https://www.yna.co.kr/view/AKR20111207225900001 박선영 "김정일 형의 묘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연합뉴스 2011.12.07 23:0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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뱌츠코예 묘비의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뱌츠코예 묘비의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인용문|"이곳 뱌츠코예 마을에 1941년부터 1945년8월까지 주둔했던
{{인용문|"이곳 뱌츠코예 마을에 1941년부터 1945년8월까지 주둔했던 쏘비에트 연방 극동군 88여단 <붉은 깃발 부대>의 부대원, 근무자 및 그 가족들이 이 곳에 묻혀 있다."}}
쏘비에트 연방 극동군 88여단 <붉은 깃발 부대>의
부대원, 근무자 및 그 가족들이 이 곳에 묻혀 있다."}}


==참고 자료==
==참고 자료==
*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71418 KBS취재팀, 김정일 실제 출생지 확인 위해 러시아 비야스크 마을 촬영] KBS 뉴스 1997.03.03 (21:00)
::김정일의 출생지가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여 km 떨어진 아무르강가의 비야스크(뱌츠코예) 마을이라 하고 있으나, 잘못 안 것이다.
::뱌츠코예 마을의 김일성이 살았다는 집과 묘지도 잠간 나온다.
::뱌츠코예에는 [[김일성]]이 [[88여단]] 시절 깊이 사귀었다는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고 [[황장엽]]이 증언했다는 말도 나온다.
* [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1/13/100670/1 완전해부 인간 김정일 미스터리 :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 [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1/13/100670/1 완전해부 인간 김정일 미스터리 :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6/2013060690247.html <nowiki>[장성민의 시사탱크]</nowiki>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TV조선 2013.06.06
*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6/2013060690247.html <nowiki>[장성민의 시사탱크]</nowiki>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TV조선 2013.06.06


* [https://nkleadershipwatch.wordpress.com/kim-family/ Kim Family] : North Korea Leadership Watch
* [https://nkleadershipwatch.wordpress.com/kim-family/ Kim Family] : North Korea Leadership Watch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906100025&page=1 北 2인자 최룡해 : 빨치산 혈통 최룡해는 어떻게 2인자가 됐나] 월간조선 2019년 2월호
:⊙ 북한 ‘청년동맹 황색사건’ 관련자 전부 처형
:⊙ 김정은 정권 인사권 최룡해가 가지고 있다
:⊙ 김정일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최룡해 형 최룡택
{{인용문| '''김정일 동생 ‘슈라’ 죽음에 연루된 최룡택'''
  최룡해는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바로 위의 누나는 프룬제 아카데미 사건에 개입한 매형의 잘못으로 죽었다. 큰형인 최룡택도 중앙당 간부과 과장으로 일하다 일찍 사망(1940년)했다. 최룡택은 동생 최룡해와 달리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여러 얘기가 있지만 다수의 고위 탈북민은 “최룡택이 김일성의 눈 밖에 나면서 출세 길이 막혔다”고 증언했다.
  최룡택이 김일성의 미움을 사게 된 사건이 있었다. 김정일에겐 쌍둥이 ‘슈라(소련 이름)’라는 동생이 있었다. 슈라의 한국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슈라는 해방 이후 자신의 집 연못에 빠져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김일성은 해방 이후 소련의 도움으로 북한 정권을 잡으면서 1인자가 됐다. 당시 김일성은 집 앞에 연못이 있는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김정일과 최룡택, 그리고 슈라가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슈라가 연못에 빠지게 됐다.
  연못에 빠진 슈라가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김정일과 최룡택은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집 뒤뜰에 숨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정원을 관리하던 사람이 그 상황을 목격하고 슈라를 건졌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이 상황을 들은 김일성은 대로하여 김정일과 최룡택을 불러 따졌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빨치산 동지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는 시기였다. 여기서 최현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한 이유로 최룡택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도 아버지 김일성의 미움을 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라고 한다.
  한 고위 탈북민은 이 사건에 대해 “김일성이 이 사건으로 인해 김정일과 최룡택을 끝까지 미워했다. 당시 최현이라는 혁명동지의 자식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후 최룡택은 동생인 최룡해가 승승장구할 때도 앞에 나서지 못하고 낮은 직책에서 조용히 살아갔다”고 말했다.}}
:최룡택은 [[최현]]의 장남으로 최룡해의 형이다.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09/2012070902486.html <nowiki>[8시뉴스 '날']</nowiki> "김정일은 과묵, 남동생은 똑똑했다"] 조선일보 2012.07.09
: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09/2012070902322.html 김정일 단짝친구 "김정일은 과묵, 남동생은 똑똑했다"] TV조선 2012.07.09
{{인용문|[녹취]  세르게이 리 /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내가 (김)정일보단 좀 크고 좀 힘도 세고, 싸움할 땐 나한테 맞았죠. (그러면 김정숙이 우리 어머니에) 내 아들 네 아들과 싸움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김정일은 소련(바스코예)에서 태어났어요. 조선말도 모르고 소련말만 했어요."
김일성의 주치의였던 리 교수 아버지는 1945년 북한에 들어가 보건성 부상까지 지냈고, 두 집안은 휴가를 같이 갈 정도였습니다.
리 교수는 김정일은 말수가 적었고, 김정일의 남동생은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다섯살 무렵, 집안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녹취] 세르게이 리/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슈라(김정일 남동생)가 (연못에) 빠진뒤 (김)정일이가 무서워서 다른데 나갔어요. 말도 안 하고. (경비가) 보니까 꺼냈죠. 1시간 뒤에. (슈라는) 우리 노는 데 따라다녔어요. 누나(김경희) 닮았어요."
1949년 어머니 김정숙이 죽자, 김정일은 여동생 김경희에 애착을 갖고 이후 이복동생 김평일을 배척했습니다.
[녹취] 세르게이 리/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둘째부인 아이(김평일)는 정일이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다찌아나(김경희) 일할 때 자꾸만 돌봐 줬어요. (김경희는) 노동당 둘째사람(넘버2)이 됐어요. 똑똑해요."}}
: [[리동화#아들 세르게이 리|세르게이 리]]는 채널A 인터뷰에서는 슈라가 평양 아닌 뱌츠코예에서 익사한 것처럼 말했다.<ref name="sergey"/> [[김경희]]가 슈라의 누나라는 그의 말은 착오이다.
:세르게이 리는 [[88여단]] 시절 [[김일성]]보다 높은 소좌 계급으로 군의관을 했던 [[리동화]]의 아들이다. 그는 1996년에도 방한했다.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5398_19466.html 이세르게이 교수, "김정일 출생지 소련 극동군 정보 부대안"] MBC : 앵커 엄기영, 1996-07-25


==함께 보기==
==함께 보기==
* [[김일성]]
{| style="width: 100%;"
*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
|- style="vertical-align:top;"
* [[김정일]]
| style="width: 33%"| * [[김일성]]<br>* [[김평일]]<br>* [[김영주]]<br>* [[백두혈통]]
* [[김경희]]
| style="width: 33%"| *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br>* [[김경희]]<br>* [[김정은]]
| style="width: 33%"| * [[김정일]]<br>* [[장성택]]<br>* [[김여정]]
|}


==각주==
==각주==
162번째 줄: 350번째 줄:
[[분류:김정일]]
[[분류:김정일]]
[[분류:88여단]]
[[분류:88여단]]
[[분류:김일성 일족]]
{{분류|1944년 출생 |1947년 사망}}

2024년 2월 18일 (일) 10:50 기준 최신판

김슈라
Kim-children.jpg
김슈라의 여동생 김경희(1946.05.30~ )의 백일 기념 사진으로 슈라가 나오는 유일한 사진이자, 김일성과 김정숙(金正淑, 1917~1949) 및 3자녀가 모두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김정숙, 김정일, 김경희, 김일성, 김정일의 남동생 슈라. 맨 오른쪽 여자는 유모인 것 같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있었던 일본인 여성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일 가능성이 있다.[1]
기본 정보
성별
남성
출생
1944년
출생지
소련 하바롭스크 인근
사망
1947년 (향년 3세)
사망지
김일성 수상관저의 연못에서 익사
가족
김일성, 김정숙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
형제

김슈라(1944~1947년 7월[2])는 김일성김정숙 사이의 둘째 아들이며, 김정일의 동생이고, 김경희의 오빠이다. 김일성의 88여단 시절 소련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후 평양에 왔으나 어릴 때 연못(분수대)에 빠져 익사했다. 너무 어릴 때 죽어 개인사는 별 의미가 없으나, 김일성김정일의 가족사를 이해하는 데는 나름대로 중요하다.

슈라를 한자로 受羅(수라)로 적은 사례도 있다[3]. 그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 또는 김평일이라는 주장이 많이 있으나 어떠한 근거도 찾기 어렵다. 형인 김정일이 해방 후 북한에 와서도 소련식 이름 유라를 계속 쓰다 1960년에야 개명한 것을 볼 때 일찍 죽은 그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라(김정일)와 슈라의 정식 소련명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 유라(Юра, Yura)는 유리(Юрий, Yuri)의 애칭이고, 동생의 이름 "슈라(Шура, Shura)"는 알렉산드르(Александр)의 애칭이다.[4]

[러시아] 이름 중에 지소사[5](어미) 자체가 계속 변하는 경우도 있다. 알렉산드르는 사샤(Саша, Sasha) - 사슈라(Сашура, Sashura) - 슈라(Шура, Shura)로 변한다. 얼핏 첫 이름과 아무 관계 없어 보이지만 러시아인이라면 ‘슈라’가 ‘알렉산드르’의 약칭이라는 걸 안다.

이 이름은 개인에게 붙여진 고유한 이름이고, 소련식 작명법에 따르면 전체 이름의 나머지 부분은 부친의 이름과 성에 따라 결정이 된다.

김일성의 이름은 해방전 소련군 88여단에 있을 때는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고, 해방 후 평양에 와서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었다.[6][7] 그러므로 소련에 있을 때 아들들의 정식 이름은 개인 고유 이름에다 "진지첸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지체노비치 진(Жичэнович Цзин, Zhichenovich Jing)을, 평양에 왔을 때는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일세노비치 킴(Ирсенович Ким, Irsenovich Kim)"을 더한 것이 된다.

따라서 두 아들의 정식 소련 이름은 소련에 있을 때는 유라는 "유리 지체노비치 진(Юрий Жичэнович Цзин, Yuri Zhichenovich Jing)", 슈라는 "알렉산드르 지체노비치 진(Александр Жичэнович Цзин, Aleksandr Zhichenovich Jing)"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평양에 와서는 유라는 "유리 일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Yuri Irsenovich Kim)", 슈라는 "알렉산드르 일세노비치 킴(Александр Ирсенович Ким, Aleksandr Irsenovich Kim)"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소련에서는 실제로 그런 이름을 썼겠지만, 평양에 와서는 주로 한국식으로 김유라, 김슈라와 같이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슈라가 나오는 기록

슈라의 이름이 나오는 해방 직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슈라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쓴 초기 기록들로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1962년 한재덕(韓載德)의 『김일성을 고발한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8]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9], 5월 30일 자에 김일성의 두 아들 이름이 형은 「슈우라」, 동생은 「애애라」로 나온다.

한편 나는 이때에 그들의 유치원도 가기전인 두 어린애가 모두 「소련」에서 났으며 그 이름마저 형은 「슈우라」 동생은 「애애라」라는 「로서아」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무리 「소련」에서 난 아이들이라도 다른 二世(이세)들은 그래도 한국식 이름을 가지는게 대부분인데 어째서 金日成(김일성)의 아이들은 이름까지 「로서아」 식으로 짓고 이때까지도 「슈우라」 「애애라」하고 부르는 것일까? 기이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하간 우리는 여기에서 金日成(김일성)이 八·一五(팔·일오) 해방 때까지 「소련」에서 적어도 四(사), 五 (오)년 이상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가정생활까지 해온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재덕은 두 번 김일성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인 두 아들을 본 적이 있다. 「애애라」는 「유라」를 잘못 듣고 기억한 것으로 보이고, 형제간의 이름도 혼동해서 바꾸어 말했지만, 당시 김일성 자녀들의 이름이 소련식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는 슈라가 살아 있을 때 김일성의 집에 가서 직접 보았다.

1970년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의 수기에 나오는 슈라

해방 직후 김일성 관저에는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 여자가 가정부로 있으면서 가사 일과 자녀를 돌보는 일을 도왔다. 그녀는 일본으로 귀환한 후 1970년에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제목의 수기를 썼는데, 여기에 김일성의 아들로 장남 유라(ユーラ)와 차남 슈라(スーラ)의 이름이 나온다.[1]

88여단 출신 고려인 김창국 인민군 대좌의 수기

소련 고려인 출신 김창국은 슈라가 태어난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에 마을의 88여단에서 근무했으며, 당시 슈라를 직접 보기도 했다. 김창국은 해방 후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정찰부국장을 지냈고, 소련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다.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i.e. 쓰여진]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의회도서관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슈라의 익사에 대한 증언

슈라는 1947년 7월경 김일성 관저 옆의 연못(분수대) 가에서 놀다 익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으나 서로 엇갈리는 점이 많다. 형 김정일이 현장에 같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가 일부러 동생을 물속으로 밀어넣어 죽게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믿기 어렵다. 동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겁에 질려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믿을만한 것 같다. 일설에는 최현의 아들 최룡택(최룡해의 형)도 현장에 있었는데 역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나중에 어른들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익사한 다음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최룡택이 김일성의 미움을 산 것이 그가 동생 최룡해와는 달리 별로 중용되지 못한 이유라고 한다.[10] 슈라가 사망한 후 김일성은 서울에서 조계종 스님을 모셔다 천도재를 올리게 했다고 북한 문서에 나온다.[11]

신동아 2000년 8월호는 슈라의 익사와 관련한 여러 증언과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다.[2]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김정숙과 김일성 사이에는 그 때(해방 직후) 자식이 셋 있었다. 둘은 아들이었고 하나는 딸이었다. (생략) 위의 아들은 유라라고 부르고, 다음 아들은 슈라였으며, 딸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김정일 남동생의 아명이 ‘슈라’였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서 밝혀졌지만, 한국 이름이 ‘평일(平日)’이라는 것은 김정순의 증언뿐이다. 어째든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이 슈라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사샤는 1947년 여름(7월), 정원 연못에 빠져 죽었다. 옆집이었기 때문에 와랴(김정숙)가 나를 부르러 왔다. 와랴는 사샤가 자고 있는 것이라며 흐느껴 울었다. 사샤가 빠진 것은 4m깊이의 연못(저수지)이었다. 나는 사고 직후 김일성의 집을 경비 서는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전혀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사샤의 장례식이 언제 행해졌는지는 모르며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47년 7월 김정일이 다섯 살 가량이었을 때 세 살 난 동생이 자택 연못에서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레벤셰프(레베데프) 소장의 부인도 증언해주었다. 레벤셰프(레베데프) 부부는 평양 체재 중 김일성과 이웃해 살며 친하게 지냈다. 레벤셰프(레베데프) 소장은 김일성이 술을 좋아했다고 증언했고, 부인은 김정숙이 러시아어를 말했다고 전했다. 부인들끼리 여행도 했고, 유년의 김정일이 찍힌 귀중한 사진도 보여주었다.

한편 이기봉이 지은 책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12]에서는 50년대 말 노동당부위원장 보좌관을 지냈고 60년대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인물의 증언을 인용해 슈라의 익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부터 악동이었고 벌레를 발견하면 밟아죽였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의 집은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 있었다. 1948년 초여름, 그 연못에서 동생 슈라(당시 4세)가 익사했으며 6살이었던 김정일은 현장에 함께 있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형제는 연못 가장자리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먼저 연못에서 나온 김정일이 뒤따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몇 번이나 물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고 한다.”

고영환도 자신의 책 『망명 외교관이 본 김정일』[13]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1946년 초여름 김일성의 아들인 유라와 슈라가 연못에서 함께 놀았다. 장난꾸러기였던 유라는 슈라에게 물을 억지로 먹이거나 다리를 끌어당겨 물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못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유라는 깊은 곳으로 점점 빠지는 것이 두려워서 연못에서 나오려는 동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동생이 얕은 곳으로 가려고 하면 거꾸로 깊은 곳으로 밀어넣었다. ‘어푸, 어푸’ 하면서 동생은 물을 마시고 있었으나 유라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곳에 함정이 있다’는 말처럼 동생은 익사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일성은 ‘연못의 물을 전부 빼버리고 흙을 채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디만 자라고 있다.”

이기봉과 고영환 두 사람의 기술은 시기는 다르지만, 흡사 사고를 목격한 것처럼 상세하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탄생에 관해서도 동일한 정보원을 인용하고 있으나, 그 정보원은 신용할 수가 없다.

가령 누군가가 사고를 목격했다면 동생을 몇 번이나 연못에 밀어 넣는 김정일의 행동을 제지했을 것이기 때문에 악의를 가지고 지어낸 이야기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시 5살이었던 김정일이 동생을 고의로 익사시켰다는 이야기를 현재 김정일의 성격과 연결해서 해설하는 것에 나는 놀랐다.

소련 군정의 제25군 군사위원이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의 부인 에프드키야 레베데프도 슈라가 익사할 당시의 일에 대해 일본의 북한 연구가 에야 오사무 (惠谷治, 1949~2018)에게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14]

김일성의 아내는 '와랴' 라고 불리워졌고 러시아말을 했다. 장남은 ‘유라’ 차남은 '사샤'라고 불리워졌다. '사샤'는 어느 여름날 정원 연못에 빠져 죽었다. 집이 이웃이기 때문에 와랴가 날 부르러 왔다. 가 보았더니 사샤의 시체가 놓여 있고 와랴는 애가 잠자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울부짖었다.

이렇게 증언해 준 것은 앞에 등장한 제25군 정치위원 레베제프 소장의 아내 에프드키야 레베제프 부인이다.
……
김정일의 동생은 보통 슈라(修羅)라고 알려져 있는데 러시아 이름의 알렉산드르는 ‘슈라' 또는 '사샤' 라고 애칭된다. 소련에서 생활하고 있던 김일성 일가가 평양에 온 지 1년 후인 1946년 여름 차남 알렉산드르가 익사했다. 그러나 연못에 빠졌다든가 탱크에 끼었다든가 여러 풍문이 있어서 나는 레베제프 부인에게 확인했다.

- 연못의 크기는 어느정도 였나

ㆍ 4m정도였다. 나는 김일성의 집을 경비하는 젊은이와 사고 직후 말해 보았는데 연못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했었다. 장례가 언제 치러졌는지는 모르고 참석도 하지 않았다.


한편 김정일의 처조카로 한국으로 1982년 한국으로 귀순했다가 암살당한 이한영(李韓永, 1960~1997)은 저서 《김정일 로열 패밀리》에서 슈라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15][16][17]

□ 로열패밀리를 위한 시설들

­해방되고 김일성이 평양에 입성한 뒤 처음 살았던 곳이 ‘5호댁’ 이다. 96년 초 북한 사회안전부 소속 군인이 총기 난동사건을 일으킨 러시아대사관 길 건너에 있는 언덕위의 집이다. 김정일과 김경희도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운명한 곳이기도 하다. 관저의 역사는 이처럼 평양시 중심가에 있는 5호댁부터 시작된다. 김정일의 어릴 적 소련식 이름이 유라였기 때문에 5호댁에서는 유라 동지라고 했다고 한다. 김경희와 김정일 사이에 있었던 김일성의 둘째 아들 슈라가 5호댁 연못가에서 놀다가 빠져 죽었다. 김일성 가족들은 6.25가 끝나고 그 집을 증축해서 계속 살았다고 한다. 5호댁은 31호로 부르게 됐다. 31호 관저는 역사적 건물이라 명칭만 바꿔 보존하고 있다. 나중에 33호 관저 앞에 본관을 지었다. 남한에서는 본관을 ‘주석궁’ 이라고 부르는데, 공식명칭은 ‘금수산 의사당’ 이다. 입법을 관장하는 기관의 청사 이름이지만 최고인민회의와는 관계없는 김일성의 집무실이다.

슈라의 죽음에 대한 강상호(姜尙昊, 1909~2000)[18][19] 전 북한 내무성 부상의 증언이 있다.

강의를 듣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김일성 집 마당에 있었던 무리를 보았습니다. 바로 같은 곳에서 김책(金策, 1903~1951)을 만났고, 김책은 김일성의 집안에 재난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김일성의 아들이 우물에 익사했다고 했습니다. 잠깐 집에 돌아간 후에 우리는 같이 김일성을 찾았습니다. 그때에 이미 술을 많이 마신 김일성은 자기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동생이 2명이 있었고, 큰 남동생이 공산주의 청년 조직의 열성자였고, 일본인에게 체포당한 후에 실종됐다고 했습니다. 김일성은 바로 전날에 이 남동생이 꿈에 나왔다고 했고, 나쁜 징조였다고 했습니다.

이때 김일성은 문일(文日)[20]에게 보드카를 더 달라고 했지만 문일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보드카는 제가 관리합니다. 김일성 동지께선 모든 것을 관리하셔도 되고, 나라까지 관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보드카는 저의 것입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김일성은 "손님들이 와서 보드카를 주어야지"라고 한 후에 문일이 한 병을 더 가져 왔습니다. 김일성을 달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며 보냈죠.

김일성이 전날 꿈에 보았다는 남동생은 김철주(金哲柱, 1916~1935)이다.


슈라는 어릴 때 평양의 노동당사 건물 앞 분수대에 빠져 익사했으며, 김정일이 밀어넣어 죽였다는 주장도 있으나[21], 확실하지 않다. 당시의 노동당사 건물은 일제시대 상품진열소 건물로, 지금은 당창건사적관으로 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그 앞에 분수대를 만들었으나[22], 슈라가 익사한 후 철거했다고 하며, 지금은 없다. 당시 김일성이 살던 자택도 노동당사 건물에서 서쪽으로 100 m 정도 떨어진 지근 거리에 있었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23][24] 슈라가 익사한 곳이 김일성 관저 앞 연못이라는 주장, 노동당사 건물 앞 분수대라는 주장으로 엇갈린다. 당시 김일성 관저는 여러 곳이 있었던 것 같고, 노동 당사 인근에도 하나가 있었으므로 같은 곳일 수도 있다.

우종창 기자는 6.25 때 노획된 북한 문서[25]에 김일성이 익사한 둘째 아들을 위해 서울서 조계종 스님을 초청해다 천도재를 지냈다고 나와 있다고 했다.[11] 김일성은 기독교 배경의 집안에서 자랐지만 해방 당시는 기독교 신자들을 탄압했고,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죽은 아들을 위해 불교식의 재를 올렸다.

[장성민의 시사탱크]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 TV조선 2013.06.06[11]

[주요발언] 우종창 / 前 월간조선 편집위원

"노획문서 마이크로필름에 김일성이 익사한 둘째아들 위해 천도재 올린 사실 기록돼 있어"
"김일성, 죽은 둘째 아들 위해 조계종 스님 평양으로 불러"
"김정일 출생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소련군 야영지"

방송에서 우종창 기자는 6.25 노획문서에 나온 내용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본 내용까지 섞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슈라와 관련해서는 노획문서에 "익사한 둘째 아들 슈라를 위해 서울에서 조계종 스님을 모셔다 천도재를 올렸다 (15분 45초)"는 내용만 있다고 한다. 또 "김정일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오케안스카야 야영지(군대 주둔지)에서 1941년 2월 16일 출생했다(16분 25초)"고 나온다 한다.

방송에서 슈라가 죽은 것이 1949년이라고 했지만 이때는 남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된 후라 38선을 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이므로 서울의 스님이 북으로 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6.25 전쟁 중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체포된 김일성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도 슈라가 1949년 봄에 익사했다는 증언을 하였다. 당시 조옥희를 조사했던 김창룡(金昌龍, 1916~1956) 대령의 口述 회고록에 그런 말이 나온다.

김정일 회고록의 슈라의 죽음에 대한 언급

김정일 회고록에는 슈라가 1947년 아닌 1948년 여름에 죽었다고 했으나, 이는 오류인 듯하다.

1948년 여름, 우리 집에는 예상치 않은 가정적 비극까지 겹쳐들었다. 어린 내 동생이 정원에서 놀다가 못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때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부관과 경위대원들이 어머님과 함께 사색이 되여 돌아갔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남조선혁명가 성시백(成始伯, 1905~1950)과 함께 나라의 통일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담화를 나누고 계시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는 언제 나오시나 하고 수령님께서 계시는 방 쪽만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엄청난 비극이 생기였다는 생각에 속이 조마조마해 지기만 했다. 사고의 전말을 알려드리려고 어머님께서 들어갔다 나오신 다음에도 수령님께서는 웬일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였다.

이상한 일이였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어머님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어머님의 눈은 눈물에 젖어 벌겋게 짓물려 있었다. 어머님은 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며 “저리 가 있거라” 했을 뿐 다른 말씀을 더 안 하시였다.

수령님께서 밖으로 나오신 것은 그때로부터 퍼그나 시간이 흘러간 다음이였다. 성시백은 그제야 우리 가정에 어떤 불상사가 생겼는가를 깨닫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령님의 손을 부여잡았다.

“장군님,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 같은 게 뭐라고. 아, 세상에! …”
“성 선생, 이러지 마십시오. 내 한가정의 불행이 아무리 큰들 민족이 처한 분렬의 위기에 비기겠습니까. 놀라게 해드려 안됐습니다.”

성시백은 불상사를 당하신 장군님께 위로 한마디 못해 드린 이 못난이를 도리여 위로하십니까, 예? 하며 목 메여 부르짖었다.

“제 기어이 민족분렬을 막고 장군님을 서울에 모시는 것으로 오늘 못한 위로를 다 해드리겠습니다. 제 오늘에야 남북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절박한 중대사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바친다는게 무엇인가를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비장한 각오를 안고 남조선으로 떠나갔다.

슈라의 한국식 이름에 대해

그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金萬日)[26] 또는 김평일(金平日)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로 보기 어려우며, 그는 익사할 때까지 슈라로 불렸을 뿐이고 한국식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만일(金萬日, 金萬一)

각종 Wikipedia 등 인터넷 사전류에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라면서 김만일(金萬日, 金萬一, 金万一), Kim Man-il 등의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러나 그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이라는 어떤 근거 문헌도 찾기 어렵고, 잘못 알려진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평일(金平日, 金平一)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 아닌 김평일(金平日, 金平一)이라는 주장도 있다.[27][28][2][29]

소련군 88여단에서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으로 있다 해방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의 증언이다.[30]

김일성과 같은 빨치산 출신인 김정숙은 88여단에서는 김일성의 뒷바라지만 했는데 음식솜씨가 좋았고 인심도 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두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정일(소련명ㆍ유라)은 한돌 반으로 한창 걸음마를 배우고 있었고, 44년 차남 평일(소련명ㆍ슈라)이 또 태어났다.

그런데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해보니 백두산에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초가집이 세워져 있고 정일봉이란 바위도 있어 실소를 금치 못했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고,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 부여단장이었던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의 아내 김정순(金貞順, 金伯文, 조선족)도 같은 증언을 했다.

신동아 2000년 8월호[2]

이조린(李兆麟)의 아내인 김정순(金貞順)은 김찬정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다.[27] “교도여단(제88여단)에서 5년 동안 살며 결혼한 여성대원들은 어린애들을 출산했습니다.

(생략) 김정숙도 김정일과 김평일(金平日) 형제를 출산했습니다. (생략) 평일은 김정숙 귀국 후 사고로 죽었습니다. 현재의 김일성 부인 김성애의 자식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왜 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김정숙과 김일성 사이에는 그 때(해방 직후) 자식이 셋 있었다. 둘은 아들이었고 하나는 딸이었다.

(생략) 위의 아들은 유라라고 부르고, 다음 아들은 슈라였으며, 딸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김정일 남동생의 아명이 ‘슈라’였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서 밝혀졌지만, 한국 이름이 ‘평일(平日)’이라는 것은 김정순의 증언뿐이다.

어쨌든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이 슈라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도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 김평일(金平一)이라고 했으나, 아무 근거도 밝히지 않았다.

소련에 있을 때에 그녀는 또 한 아들을 낳았다. 슈라(Shura, 平一)라고 하는 둘째 아들은 1944년에 태어났으나 1947년 7월 평양에서 물놀이를 하다 익사했다.[31]

김정숙은 역시 브아츠크에서 차남을 낳았고, 그 아이는 “슈라" 라고 했다. 차남의 조선명은 김평일이었는데, 그는 평양에 돌아와서 당시 소련 군정의 민정 담당 레베데프 소장의 아들과 분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했다.[32]

슈라가 이복 동생 김평일과 같은 한국식 이름을 가졌다는 증언은 좀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나중에 태어난 동생에게 일찍 죽은 형과 같은 이름을 붙이는 사례는 없다. 불길한 이름으로 여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 평일이라는 주장은 후에 태어난 그의 이복동생 김평일의 이름과 혼동해서 나온 주장으로 보인다.


아래 사이트에는 슈라의 이름이 김평일로 나온다. (이복동생인 김성애의 아들도 김평일로 나옴.)

슈라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다.

김정일이 해방 후에도 한국식 이름은 없이 유라(Юра, Yura)라는 소련식 이름을 계속 쓰다가 1960년 7월에야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사실을 볼 때 슈라(Шура, Shura)에게는 한국식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형이 계속 소련식 이름 유라로 불리고 있었는데, 동생만 한국식 이름을 지어 붙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아이의 이름을 나중에 개명했을 리도 만무하다.

한재덕이나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는 해방 후 평양 김일성의 집에서 슈라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인데 모두 그의 이름을 슈라라고만 말했을 뿐 만일이나 평일이라는 한국식 이름은 거론하지 않은 것도 그에게 한국명이 없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더구나 한재덕은 김일성이 자식들 이름을 소련식으로 지은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라나 슈라에게 한국식 이름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뱌츠코예에서 익사한 김정일 형제가 또 있나?

김정일의 동생 슈라는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으므로 평양에 온 다음 익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88여단 관련자 또는 여단이 있던 뱌츠코예 마을 주민들 중에 김정일의 동생이 뱌츠코예에서 익사했고, 그곳에 묘까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88여단 1대대 부대대장 박성훈은 김일성의 두 아들 중 하나가 뱌츠코예에서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다[33]. 유사한 증언을 하는 사람이 박성훈 외에도 더러 있는데[34][35],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김일성에게는 당시 김정숙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 또 있었다는 말도 있으므로 그 경우에 해당할 가능성도 있다[36].

가브릴 코로트코프는 김일성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소련에서 우연히 알게된 여인에게서 낳은 딸 한 명이 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으나 잊고 지낸다고 하였다[37]. 이러한 딸의 존재는 국내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성이 거쳐간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많으므로 그 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녀를 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들 중 한 명이 뱌츠코예에서 또 익사했는지도 모른다.

뱌츠코예에는 88여단 대원들 가족들 중 사망한 사람의 묘가 몇 기 남아 있다. 그러나 묘비에 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아 그 중에 뱌츠코예에서 죽었다는 김일성의 아들 묘가 있는지 명확한 확인이 어렵다.

최보식의 뱌츠코예 방문기 : 김정일생가 터엔 대학시설물 조선일보 1993.06.30 / 23 면
가족-대원 함께 머물러

하바로프스크 사범대측은 "내년쯤이면 이 건물도 헐릴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측의 자료에 따르면 김의 부친인 김일성이 대일 빨치산활동을 벌이다 40년쯤 이곳으로 가족과 부대원을 이끌고 들어와 45년 광복직전까지 머무른 것으로 되어있다. 김정일은 이 마을에서 41년 2월 김일성과 어머니 김정숙사이에서 출생, 러시아식 이름인 유라 로 불렸다고 한다. 그의 형은 이곳 아무르강에서 물놀이를 하다 익사했다는 설도 있다.

형은 물놀이하다 익사

마을 주민들중 노인들은 김일성부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주민 쉬미코프 바벨씨(88)는 "당시 줄 하나와 별 4개가 있는 견장(대위계급)을 단 까비딴 김일성이 가족및 조선-중국인-러시아인등으로 편성된 군인 2백여명과 함께 마을에 들어와 관사를 지은뒤 돼지를 키우고 채소농사를 지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페니기아 바르바르씨(81 여)는 "김일성의 관사에 우유를 얻으러 갔다가 그의 두 아들을 본적이 있다"면서 "그중 맏이가 42~43년쯤 아무르강에서 놀다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진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안내를 맡은 송선생은 송 알렉산드르씨로 연해주 고려인인 것같다.
김일성의 초기 시베리아 활동지

나나이족 마을에서 1시간 10분쯤 답사를 한 뒤 11시 15분 마을 떠났다. 20분 정도 8㎞를 되돌아나와 하바에서 콤소모리스크로 가는 큰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콤소모리스크 쪽으로 5분쯤 달려 68㎞ 지점에 이르니 왼쪽으로 뱌츠코예(Vyatskoye)로 가는 비포장 도로가 나타난다. 우리는 그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그 곳에 김일성이 시베리아로 가서 초기에 활동했던 곳이 있다고 해서 어려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조금 가니 마을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오른쪽으로 가니 사거리가 나온다. 이쯤 되자 송선생도 좀 헤깔린 모양이다. 차를 세우고 찾아보기로 했다. 한 여름 낮이지만 숲 속의 모기떼들은 오랜만에 만난 특식을 즐기기 위해 대단히 극성을 떨었다.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얼마를 가니 왼쪽에 아무 글자도 없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저 묘가 김일성 부인의 동생 묘이다"
"김일성의 처제 묘가 왜 여기에 있는가?"
"여기서 김일성이 살았소. 김일성이 아들이 김정일이 있잖아요, 여기서 태어났소, 여기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소"
"이 비석은 누가 언제 만들었습니까?"
"북조선 사람들이 만들었소. 북조선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목재(벌목)를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만들었소."

바로 옆에 또 4개의 무덤이 있는데 잘 다듬은 판석으로 무덤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이건 친척들의 무덤입니다. 전에는 여기에 집터랑 다 있었오. 군사들이랑 함께 살았던 거요"

강한 함경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송선생은 확신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송선생이 아니면 이곳은 정말 찾아보기도 힘든 곳이다. 송선생은

"1965년 김일성이 이곳에 왔을 때 길을 닦았다"
"11살인가 12살인가 아들이 하나가 아무르강 물에 빠져 죽었다"
는 등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곳에서 얼마 안가 뱌츠코예 마을은 바로 아무르강 가 마을이기 때문에 상당히 믿을만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동국대 허만일 교수가 전문적으로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선영 "김정일 형의 묘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한국경제 2011.12.07
박 의원은 "김슈라의 묘는 하바롭스크에서 동북쪽으로 80㎞ 떨어진 뻬아츠코예에 위치하고 있고, 묘에는 '러시아 88여단 붉은별 부대에서 사망한 사람과 그 가족의 묘'라고 쓰인 동판이 붙어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김일성 주석이 1937년부터 하바롭스크에 살다가 1945년 북한으로 돌아갔고 1947년 하바롭스크로 돌아와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며 "김슈라는 김 주석이 북한으로 들어간 1945년∼1947년 하바롭스크 인근 아모르강에 빠져 죽었다"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이 지역 고려인들은 모두 이 묘가 김 위원장의 형의 묘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이 마을에서 김일성 주석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는 고려인과 그의 가족들도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은 김슈라의 묘를 자주 왕래하고 있고, 2009년 가을에는 보수공사를 하고 잔치도 했다"고 밝혔다.
“김정일 남동생 묘, 러시아에 있다” 2011.12.08 : 관련 사진 (신동아 스튜디오)
6일 현지를 방문하고 귀국한 박 의원에 따르면 무덤의 묘비에는 “1941∼1945년 8월 이곳에 주둔했던 88여단 부대의 군인과 가족들이 묻혀 있다”고 적혀 있다. 마을 주민들은 박 의원에게 “어릴 때 죽은 김 위원장의 남동생 김슈라(러시아식 이름)의 무덤이다. ‘카레이스키’(한국인·북한 사람들을 지칭한 듯함)들이 자주 찾고 있어 올봄 관청에서 묘비 앞의 봉분을 새로 단장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근처에는 무덤 3개가 더 있으나 ‘김슈라의 무덤’ 뒤에만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고 꽃이 걸려 있으며 무덤 앞에는 중국술 3병이 놓여 있었다는 게 박 의원의 설명. 박 의원은 “중국술로 미뤄 볼 때 북측 관계자들이 참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 만은 없을 것 같으나 사실여부를 밝히는 것도 쉽지 않을 것같다.

뱌츠코예 묘비의 비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곳 뱌츠코예 마을에 1941년부터 1945년8월까지 주둔했던 쏘비에트 연방 극동군 88여단 <붉은 깃발 부대>의 부대원, 근무자 및 그 가족들이 이 곳에 묻혀 있다."

참고 자료

김정일의 출생지가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여 km 떨어진 아무르강가의 비야스크(뱌츠코예) 마을이라 하고 있으나, 잘못 안 것이다.
뱌츠코예 마을의 김일성이 살았다는 집과 묘지도 잠간 나온다.
뱌츠코예에는 김일성88여단 시절 깊이 사귀었다는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고 황장엽이 증언했다는 말도 나온다.
⊙ 북한 ‘청년동맹 황색사건’ 관련자 전부 처형
⊙ 김정은 정권 인사권 최룡해가 가지고 있다
⊙ 김정일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최룡해 형 최룡택
김정일 동생 ‘슈라’ 죽음에 연루된 최룡택
 최룡해는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바로 위의 누나는 프룬제 아카데미 사건에 개입한 매형의 잘못으로 죽었다. 큰형인 최룡택도 중앙당 간부과 과장으로 일하다 일찍 사망(1940년)했다. 최룡택은 동생 최룡해와 달리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여러 얘기가 있지만 다수의 고위 탈북민은 “최룡택이 김일성의 눈 밖에 나면서 출세 길이 막혔다”고 증언했다.

 최룡택이 김일성의 미움을 사게 된 사건이 있었다. 김정일에겐 쌍둥이 ‘슈라(소련 이름)’라는 동생이 있었다. 슈라의 한국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슈라는 해방 이후 자신의 집 연못에 빠져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김일성은 해방 이후 소련의 도움으로 북한 정권을 잡으면서 1인자가 됐다. 당시 김일성은 집 앞에 연못이 있는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김정일과 최룡택, 그리고 슈라가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슈라가 연못에 빠지게 됐다.

 연못에 빠진 슈라가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김정일과 최룡택은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집 뒤뜰에 숨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정원을 관리하던 사람이 그 상황을 목격하고 슈라를 건졌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이 상황을 들은 김일성은 대로하여 김정일과 최룡택을 불러 따졌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빨치산 동지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는 시기였다. 여기서 최현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한 이유로 최룡택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도 아버지 김일성의 미움을 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라고 한다.

한 고위 탈북민은 이 사건에 대해 “김일성이 이 사건으로 인해 김정일과 최룡택을 끝까지 미워했다. 당시 최현이라는 혁명동지의 자식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후 최룡택은 동생인 최룡해가 승승장구할 때도 앞에 나서지 못하고 낮은 직책에서 조용히 살아갔다”고 말했다.
최룡택은 최현의 장남으로 최룡해의 형이다.
김정일 단짝친구 "김정일은 과묵, 남동생은 똑똑했다" TV조선 2012.07.09
[녹취] 세르게이 리 /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내가 (김)정일보단 좀 크고 좀 힘도 세고, 싸움할 땐 나한테 맞았죠. (그러면 김정숙이 우리 어머니에) 내 아들 네 아들과 싸움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김정일은 소련(바스코예)에서 태어났어요. 조선말도 모르고 소련말만 했어요."

김일성의 주치의였던 리 교수 아버지는 1945년 북한에 들어가 보건성 부상까지 지냈고, 두 집안은 휴가를 같이 갈 정도였습니다.

리 교수는 김정일은 말수가 적었고, 김정일의 남동생은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다섯살 무렵, 집안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녹취] 세르게이 리/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슈라(김정일 남동생)가 (연못에) 빠진뒤 (김)정일이가 무서워서 다른데 나갔어요. 말도 안 하고. (경비가) 보니까 꺼냈죠. 1시간 뒤에. (슈라는) 우리 노는 데 따라다녔어요. 누나(김경희) 닮았어요."

1949년 어머니 김정숙이 죽자, 김정일은 여동생 김경희에 애착을 갖고 이후 이복동생 김평일을 배척했습니다.

[녹취] 세르게이 리/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둘째부인 아이(김평일)는 정일이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다찌아나(김경희) 일할 때 자꾸만 돌봐 줬어요. (김경희는) 노동당 둘째사람(넘버2)이 됐어요. 똑똑해요."
세르게이 리는 채널A 인터뷰에서는 슈라가 평양 아닌 뱌츠코예에서 익사한 것처럼 말했다.[34] 김경희가 슈라의 누나라는 그의 말은 착오이다.
세르게이 리는 88여단 시절 김일성보다 높은 소좌 계급으로 군의관을 했던 리동화의 아들이다. 그는 1996년에도 방한했다.

함께 보기

* 김일성
* 김평일
* 김영주
* 백두혈통
* 김정숙
* 김경희
* 김정은
* 김정일
* 장성택
* 김여정

각주

  1. 1.0 1.1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
  2. 2.0 2.1 2.2 2.3 완전해부 인간 김정일 미스터리 :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pp.122~131
  3. 비화 김일성과 북한 :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 <4> 김성애는 시종비서 여군 출신 1990.05.13 동아일보 5면
  4. [Russia 포커스] 러시아인 이름에 담긴 사회학 [중앙일보] 입력 2014.01.24
  5.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 DIM) : 어떤 말에 덧붙어 원래의 뜻보다 더 작은 개념이나 친애의 정 등을 나타내는 접사. 또는, 그렇게 하여 파생된 말.
  6. 蘇(소),「6.25南侵(남침)」비밀文件(문건) 공개 1992.06.17 동아일보 2면
  7.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8. 한재덕(韓載德, 1911~1970) 위키백과
  9. 단행본 :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10. 北 2인자 최룡해 : 빨치산 혈통 최룡해는 어떻게 2인자가 됐나 월간조선 2019년 2월호
  11. 11.0 11.1 11.2 [장성민의 시사탱크]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TV조선 2013.06.06
  12. 이기봉, 김정일, 그는 어떤 인물인가 서울: 남북문제연구소, 1993
  13. 呂永茂 ; 高英煥, 眞相! 北韓의 實勢 金正日·金正日그룹 ; 亡命 北韓外交官 高英煥 증언 <對談> 新東亞. 386(1991.11), pp.374-405
  14. 김일성 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 (1992.5) (極東問題硏究所) pp.55-56
  15. 이한영, 《김정일 로열 패밀리 :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의 수기》 (시대정신, 2004년 02월 25일)
  16. 리일남 수기 제18부 김정일 왕족을 위한 시설들 국민통일방송
  17. <김정일의 로열패밀리-2> 독서토론회 통일역사연구실 2013.05.11
  18. [삶과 추억] 고 강상호 전 북한 내무성 부상 중앙일보 2000.12.19
  19. 강상호(姜尙昊)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 비서. 나중에 숙청된 후 소련 망명.
  21. (김씨 일가의 실체) 김경희의 불우한 삶 자유아시아방송 2011-11-08 : 당창건 기념관은 박정식의 개인저택이 아니라 일제시대 상품진열소 건물임.
  22. 平壤商品陳列所에 噴水臺設置 夜間에 開放 매일신보(每日申報) 1927년 07월 30일 04면 03단
  23. 당창건사적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 ‘당창건사적관’의 숨겨진 계보 자유아시아방송 2017-10-17
  25. 국회도서관에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라는 제목의 [마이크로자료] 총 101권이 소장되어 있다 :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 v.1 [마이크로자료] ~ 한국전쟁시 미군 노획 문서. v.101 [마이크로자료] (서울 : 국회도서관, 2002)
  26. 김만일 위키백과
  27. 27.0 27.1 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항일(抗日) 빨치산》, (서울 : 東亞日報社, 1992) p.26
  28. 정창현, 김정일의 성장과정과 후계체제 확립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6
  29. 연해주에서 북·러 정상회담 가진 김정일의 출생비밀 미래한국 2002.08.30 : 슈라는 김평일
  30.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4 한국일보 1990.11.04
  31. 서대숙(徐大肅)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8
  32. 서대숙 지음,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 (서울: 을유문화사, 2000) p.174
  33.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75; pp.167~168.
  34. 34.0 34.1 [뉴스A]단독/‘은둔형 지도자’ 김정일 소꿉친구 “여느 아이들처럼 놀았다” 채널A 2012-07-09
  35. [러 할머니] “김정일 위원장 어릴적 모습이 선해…” 조선일보 2002/08/22
  36.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연해주 고려인 아나톨리 리의 글)
  37.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75
  38. 38.0 38.1 38.2 김정일 생가 / 하바롭스크 뱌트스코에 마을 현장 확인 다음 블로그
  39. 39.0 39.1 “김정일 남동생 묘, 러시아에 있다” 2011.12.08 : 관련 사진 (신동아 스튜디오)
  40. 박선영 "김정일 형의 묘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연합뉴스 2011.12.07 2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