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슈라(1944~1947년 7월[1])는 김일성김정숙 사이의 둘째 아들이며, 김정일의 동생이고, 김경희의 오빠이다. 김일성의 88여단 시절 소련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후 평양에 왔으나 어릴 때 분수대에 빠져 익사했다. 너무 어릴 때 죽어 개인사는 별 의미가 없으나, 김일성김정일의 가족사를 이해하는 데는 나름대로 중요하다.

슈라를 한자로 受羅(수라)로 적은 사례도 있다[2]. 그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 또는 김평일이라는 주장이 많이 있으나 어떠한 근거도 찾기 어렵다.

슈라의 여동생 김경희(1946.05.30~ )의 백일 기념 사진으로 슈라가 나오는 유일한 사진이자, 김일성과 김정숙(金正淑, 1917~1949) 및 3자녀가 모두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김정숙, 김정일, 김경희, 김일성, 김정일의 남동생 슈라. 맨 오른쪽 여자는 유모인 것 같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있었던 일본인 여성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일 가능성이 있다.[3]

소련식 이름인 "슈라(Шура, Shura)"는 알렉산드르(Александр)의 애칭이다.[4]

[러시아] 이름 중에 지소사[5](어미) 자체가 계속 변하는 경우도 있다. 알렉산드르는 사샤(Саша, Sasha) - 사슈라(Сашура, Sashura) - 슈라(Шура, Shura)로 변한다. 얼핏 첫 이름과 아무 관계 없어 보이지만 러시아인이라면 ‘슈라’가 ‘알렉산드르’의 약칭이라는 걸 안다.

슈라가 나오는 기록

슈라의 이름이 나오는 해방 직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슈라를 직접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쓴 초기 기록들로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1962년 한재덕(韓載德)의 『김일성을 고발한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6]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7], 5월 30일 자에 김일성의 두 아들 이름이 형은 「슈우라」, 동생은 「애애라」로 나온다.

한편 나는 이때에 그들의 유치원도 가기전인 두 어린애가 모두 「소련」에서 났으며 그 이름마저 형은 「슈우라」 동생은 「애애라」라는 「로서아」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무리 「소련」에서 난 아이들이라도 다른 二世(이세)들은 그래도 한국식 이름을 가지는게 대부분인데 어째서 金日成(김일성)의 아이들은 이름까지 「로서아」 식으로 짓고 이때까지도 「슈우라」 「애애라」하고 부르는 것일까? 기이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하간 우리는 여기에서 金日成(김일성)이 八·一五(팔·일오) 해방 때까지 「소련」에서 적어도 四(사), 五 (오)년 이상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가정생활까지 해온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재덕은 두 번 김일성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인 두 아들을 본 적이 있다. 「애애라」는 「유라」를 잘못 듣고 기억한 것으로 보이고, 형제간의 이름도 혼동해서 바꾸어 말했지만, 당시 김일성 자녀들의 이름이 소련식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는 슈라가 살아 있을 때 김일성의 집에 가서 직접 보았다.

1970년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의 수기에 나오는 유라

해방 직후 김일성 관저에는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 여자가 가정부로 있으면서 가사 일과 자녀를 돌보는 일을 도왔다. 그녀는 일본으로 귀환한 후 1970년에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제목의 수기를 썼는데, 여기에 김일성의 아들로 장남 유라(ユーラ)와 차남 슈라(スーラ)의 이름이 나온다.[3]

슈라의 익사에 대한 증언

신동아 2000년 8월호는 슈라의 익사와 관련한 여러 증언과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다.[1]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김정숙과 김일성 사이에는 그 때(해방 직후) 자식이 셋 있었다. 둘은 아들이었고 하나는 딸이었다. (생략) 위의 아들은 유라라고 부르고, 다음 아들은 슈라였으며, 딸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김정일 남동생의 아명이 ‘슈라’였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서 밝혀졌지만, 한국 이름이 ‘평일(平日)’이라는 것은 김정순의 증언뿐이다. 어째든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이 슈라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사샤는 1947년 여름(7월), 정원 연못에 빠져 죽었다. 옆집이었기 때문에 와랴(김정숙)가 나를 부르러 왔다. 와랴는 사샤가 자고 있는 것이라며 흐느껴 울었다. 사샤가 빠진 것은 4m깊이의 연못(저수지)이었다. 나는 사고 직후 김일성의 집을 경비 서는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전혀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사샤의 장례식이 언제 행해졌는지는 모르며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47년 7월 김정일이 다섯 살 가량이었을 때 세 살 난 동생이 자택 연못에서 익사하는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레벤셰프 소장의 부인도 증언해주었다. 레벤셰프 부부는 평양 체재 중 김일성과 이웃해 살며 친하게 지냈다. 레벤셰프 소장은 김일성이 술을 좋아했다고 증언했고, 부인은 김정숙이 러시아어를 말했다고 전했다. 부인들끼리 여행도 했고, 유년의 김정일이 찍힌 귀중한 사진도 보여주었다.

한편 이기봉이 지은 책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8]에서는 50년대 말 노동당부위원장 보좌관을 지냈고 60년대 초에 한국으로 망명한 인물의 증언을 인용해 슈라의 익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부터 악동이었고 벌레를 발견하면 밟아죽였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의 집은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 있었다. 1948년 초여름, 그 연못에서 동생 슈라(당시 4세)가 익사했으며 6살이었던 김정일은 현장에 함께 있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형제는 연못 가장자리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먼저 연못에서 나온 김정일이 뒤따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몇 번이나 물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고 한다.”

고영환도 자신의 책 『망명 외교관이 본 김정일』[9]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1946년 초여름 김일성의 아들인 유라와 슈라가 연못에서 함께 놀았다. 장난꾸러기였던 유라는 슈라에게 물을 억지로 먹이거나 다리를 끌어당겨 물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못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유라는 깊은 곳으로 점점 빠지는 것이 두려워서 연못에서 나오려는 동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동생이 얕은 곳으로 가려고 하면 거꾸로 깊은 곳으로 밀어넣었다. ‘어푸, 어푸’ 하면서 동생은 물을 마시고 있었으나 유라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곳에 함정이 있다’는 말처럼 동생은 익사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일성은 ‘연못의 물을 전부 빼버리고 흙을 채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디만 자라고 있다.”

이기봉과 고영환 두 사람의 기술은 시기는 다르지만, 흡사 사고를 목격한 것처럼 상세하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탄생에 관해서도 동일한 정보원을 인용하고 있으나, 그 정보원은 신용할 수가 없다.

가령 누군가가 사고를 목격했다면 동생을 몇 번이나 연못에 밀어 넣는 김정일의 행동을 제지했을 것이기 때문에 악의를 가지고 지어낸 이야기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시 5살이었던 김정일이 동생을 고의로 익사시켰다는 이야기를 현재 김정일의 성격과 연결해서 해설하는 것에 나는 놀랐다.

한편 김정일의 처조카로 한국으로 1982년 한국으로 귀순했다가 암살당한 이한영(李韓永, 1960~1997)은 저서 《김정일 로열 패밀리》에서 슈라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10][11][12]

□ 로열패밀리를 위한 시설들

­해방되고 김일성이 평양에 입성한 뒤 처음 살았던 곳이 ‘5호댁’ 이다. 96년 초 북한 사회안전부 소속 군인이 총기 난동사건을 일으킨 러시아대사관 길 건너에 있는 언덕위의 집이다. 김정일과 김경희도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이 운명한 곳이기도 하다. 관저의 역사는 이처럼 평양시 중심가에 있는 5호댁부터 시작된다. 김정일의 어릴 적 소련식 이름이 유라였기 때문에 5호댁에서는 유라 동지라고 했다고 한다. 김경희와 김정일 사이에 있었던 김일성의 둘째 아들 슈라가 5호댁 연못가에서 놀다가 빠져 죽었다. 김일성 가족들은 6.25가 끝나고 그 집을 증축해서 계속 살았다고 한다. 5호댁은 31호로 부르게 됐다. 31호 관저는 역사적 건물이라 명칭만 바꿔 보존하고 있다. 나중에 33호 관저 앞에 본관을 지었다. 남한에서는 본관을 ‘주석궁’ 이라고 부르는데, 공식명칭은 ‘금수산 의사당’ 이다. 입법을 관장하는 기관의 청사 이름이지만 최고인민회의와는 관계없는 김일성의 집무실이다.

슈라의 죽음에 대한 강상호(姜尙昊, 1909~2000)[13][14] 전 북한 내무성 부상의 증언이 있다.

강의를 듣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김일성 집 마당에 있었던 무리를 보았습니다. 바로 같은 곳에서 김책(金策, 1903~1951)을 만났고, 김책은 김일성의 집안에 재난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김일성의 아들이 우물에 익사했다고 했습니다. 잠깐 집에 돌아간 후에 우리는 같이 김일성을 찾았습니다. 그때에 이미 술을 많이 마신 김일성은 자기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동생이 2명이 있었고, 큰 남동생이 공산주의 청년 조직의 열성자였고, 일본인에게 체포당한 후에 실종됐다고 했습니다. 김일성은 바로 전날에 이 남동생이 꿈에 나왔다고 했고, 나쁜 징조였다고 했습니다.

이때 김일성은 문일(文日)[15]에게 보드카를 더 달라고 했지만 문일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보드카는 제가 관리합니다. 김일성 동지께선 모든 것을 관리하셔도 되고, 나라까지 관리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보드카는 저의 것입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김일성은 "손님들이 와서 보드카를 주어야지"라고 한 후에 문일이 한 병을 더 가져 왔습니다. 김일성을 달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며 보냈죠.

김일성이 전날 꿈에 보았다는 남동생은 김철주(金哲柱, 1916~1935)이다.


슈라는 어릴 때 평양의 노동당사 건물 앞 분수대에 빠져 익사했으며, 김정일이 밀어넣어 죽였다는 주장도 있으나[16], 확실하지 않다. 당시의 노동당사 건물은 일제시대 상품진열소 건물로, 지금은 당창건사적관으로 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그 앞에 분수대를 만들었으나[17], 슈라가 익사한 후 철거했다고 하며, 지금은 없다. 당시 김일성이 살던 자택도 노동당사 건물에서 서쪽으로 100 m 정도 떨어진 지근 거리에 있었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18][19]

우종창 기자는 6.25 때 노획된 북한 문서에 김정일이 부친 김일성이 보는 앞에서 동생 슈라를 연못에 익사시켰다고 나와 있다고 했다.[20] 또 김일성은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들이 익사한 당시 서울서 조계종 스님을 모셔다 죽은 아들을 위한 재를 올리게 했다고 한다.[20]

슈라의 한국식 이름에 대해

그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金萬日)[21] 또는 김평일(金平日)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로 보기 어려우며, 그는 익사할 때까지 슈라로 불렸을 뿐이고 한국식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만일(金萬日, 金萬一)

각종 Wikipedia 등 인터넷 사전류에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라면서 김만일(金萬日, 金萬一, 金万一), Kim Man-il 등의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러나 그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이라는 어떤 근거 문헌도 찾기 어렵고, 잘못 알려진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평일(金平日)

슈라의 한국식 이름이 김만일 아닌 김평일(金平日)이라는 주장도 있다.[22][23][1][24]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고,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 부여단장이었던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의 아내 김정순(金貞順, 조선족)의 증언이다.

신동아 2000년 8월호[1]

이조린(李兆麟)의 아내인 김정순(金貞順)은 김찬정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다.[22] “교도여단(제88여단)에서 5년 동안 살며 결혼한 여성대원들은 어린애들을 출산했습니다.

(생략) 김정숙도 김정일과 김평일(金平日) 형제를 출산했습니다. (생략) 평일은 김정숙 귀국 후 사고로 죽었습니다. 현재의 김일성 부인 김성애의 자식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왜 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평양에서 김일성의 이웃으로 살았으며, 비서실장이었던 홍순관(洪淳寬)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김정숙과 김일성 사이에는 그 때(해방 직후) 자식이 셋 있었다. 둘은 아들이었고 하나는 딸이었다.

(생략) 위의 아들은 유라라고 부르고, 다음 아들은 슈라였으며, 딸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김정일 남동생의 아명이 ‘슈라’였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서 밝혀졌지만, 한국 이름이 ‘평일(平日)’이라는 것은 김정순의 증언뿐이다.

어쨌든 김정일의 남동생은 1944년 출생했다는데,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러시아 이름 ‘알렉산드르’의 애칭이 슈라지만, ‘사샤’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슈라가 이복 동생 김평일과 같은 한국식 이름을 가졌다는 김정순의 증언은 좀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나중에 태어난 동생에게 일찍 죽은 형과 같은 이름을 붙이는 사례는 없다. 불길한 이름으로 여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슈라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다.

김정일이 해방 후에도 한국식 이름은 없이 유라(Юра, Yura)라는 소련식 이름을 계속 쓰다가 1960년 7월에야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사실을 볼 때 슈라(Шура, Shura)에게는 한국식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형이 계속 소련식 이름 유라로 불리고 있었는데, 동생만 한국식 이름을 지어 붙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아이의 이름을 나중에 개명했을 리도 만무하다.

뱌츠코예에서 익사한 김정일 동생이 또 있나?

김정일의 동생 슈라는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으므로 평양에 온 다음 익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88여단 관련자 또는 여단이 있던 뱌츠코예 마을 주민들 중에 김정일의 동생이 뱌츠코예에서 익사했고, 그곳에 묘까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88여단 1대대 부대대장 박성훈은 김일성의 두 아들 중 하나가 뱌츠코예에서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다[25]. 이런 증언을 하는 사람이 박성훈 외에도 더러 있는데[26][27][28],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김일성에게는 당시 김정숙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 또 있었다는 말도 있으므로 그 경우에 해당할 가능성도 있다[29].

가브릴 코로트코프는 김일성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소련에서 우연히 알게된 여인에게서 낳은 딸 한 명이 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으나 잊고 지낸다고 하였다[30]. 이러한 딸의 존재는 국내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성이 거쳐간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많으므로 그 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녀를 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들 중 한 명이 뱌츠코예에서 또 익사했는지도 모른다.

뱌츠코예에는 88여단 대원들 가족들 중 사망한 사람의 묘가 몇 기 남아 있다. 그러나 묘비가 없어 그 중에 뱌츠코예에서 죽었다는 김일성의 아들 묘가 있는지 명확한 확인이 어렵다.

박선영 "김정일 형의 묘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한국경제 2011.12.07
박 의원은 "김슈라의 묘는 하바롭스크에서 동북쪽으로 80㎞ 떨어진 뻬아츠코예에 위치하고 있고, 묘에는 '러시아 88여단 붉은별 부대에서 사망한 사람과 그 가족의 묘'라고 쓰인 동판이 붙어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김일성 주석이 1937년부터 하바롭스크에 살다가 1945년 북한으로 돌아갔고 1947년 하바롭스크로 돌아와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며 "김슈라는 김 주석이 북한으로 들어간 1945년∼1947년 하바롭스크 인근 아모르강에 빠져 죽었다"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이 지역 고려인들은 모두 이 묘가 김 위원장의 형의 묘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이 마을에서 김일성 주석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는 고려인과 그의 가족들도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은 김슈라의 묘를 자주 왕래하고 있고, 2009년 가을에는 보수공사를 하고 잔치도 했다"고 밝혔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 만은 없을 것 같으나 사실여부를 밝히는 것도 쉽지 않을 것같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1.3 완전해부 인간 김정일 미스터리 :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pp.122~131
  2. 비화 김일성과 북한 :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 <4> 김성애는 시종비서 여군 출신 1990.05.13 동아일보 5면
  3. 3.0 3.1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
  4. [Russia 포커스] 러시아인 이름에 담긴 사회학 [중앙일보] 입력 2014.01.24
  5.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 DIM) : 어떤 말에 덧붙어 원래의 뜻보다 더 작은 개념이나 친애의 정 등을 나타내는 접사. 또는, 그렇게 하여 파생된 말.
  6. 한재덕(韓載德, 1911~1970) 위키백과
  7. 단행본 :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8. 이기봉, 김정일, 그는 어떤 인물인가 서울: 남북문제연구소, 1993
  9. 呂永茂 ; 高英煥, 眞相! 北韓의 實勢 金正日·金正日그룹 ; 亡命 北韓外交官 高英煥 증언 <對談> 新東亞. 386(1991.11), pp.374-405
  10. 이한영, 《김정일 로열 패밀리 :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의 수기》 (시대정신, 2004년 02월 25일)
  11. 리일남 수기 제18부 김정일 왕족을 위한 시설들 국민통일방송
  12. <김정일의 로열패밀리-2> 독서토론회 통일역사연구실 2013.05.11
  13. [삶과 추억] 고 강상호 전 북한 내무성 부상 중앙일보 2000.12.19
  14. 강상호(姜尙昊)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 비서. 나중에 숙청된 후 소련 망명.
  16. (김씨 일가의 실체) 김경희의 불우한 삶 자유아시아방송 2011-11-08 : 당창건 기념관은 박정식의 개인저택이 아니라 일제시대 상품진열소 건물임.
  17. 平壤商品陳列所에 噴水臺設置 夜間에 開放 매일신보(每日申報) 1927년 07월 30일 04면 03단
  18. 당창건사적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당창건사적관’의 숨겨진 계보 자유아시아방송 2017-10-17
  20. 20.0 20.1 [장성민의 시사탱크] 충격 공개! 北 '노획문서'…김씨왕조 속살 드러나 TV조선 2013.06.06
  21. 김만일 위키백과
  22. 22.0 22.1 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항일(抗日) 빨치산》, (서울 : 東亞日報社, 1992) p.26
  23. 정창현, 김정일의 성장과정과 후계체제 확립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6
  24. 연해주에서 북·러 정상회담 가진 김정일의 출생비밀 미래한국 2002.08.30 : 슈라는 김평일
  25.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75; pp.167~168.
  26. [뉴스A]단독/‘은둔형 지도자’ 김정일 소꿉친구 “여느 아이들처럼 놀았다” 채널A 2012-07-09
  27. [러 할머니] “김정일 위원장 어릴적 모습이 선해…” 조선일보 2002/08/22
  28. 최보식의 뱌츠코예 방문기 : 김정일생가 터엔 대학시설물 조선일보 1993.06.30 / 23 면
  29. 진짜 김정일이 태어난 곳 (연해주 고려인 아나톨리 리의 글)
  30.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