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동생 김영주(95)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2015년 7월 19일 고령의 몸을 이끌고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투표에 참가했다.[1]

김영주(金英柱, 1920년 9월 21일 ~ )는 북한의 정치인으로 김일성의 동생이다. 일제시대에 일본군의 통역을 하다 해방 후 형 김일성이 북한의 지배자가 되자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으나, 후계 경쟁에서 조카 김정일에 밀려 실권하고 18년 동안 자강도에 유폐되었다.[2] 김일성이 사망 직전인 1993년에 그를 평양으로 불러올려 다시 공식 석상에 나왔으나, 형식적인 직책을 맡는데 그치고 있다.

생애 초기

김영주(金英柱)는 1920년 만주에서 김형직강반석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는 김형직 부부가 임강현(臨江縣)에 살 때이다.[3][4] 형으로 성주(聖柱,김일성), 철주(哲柱)가 있다. 부모를 따라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 무송현(撫松縣) 등지로 옮겨가며 살다가[5][6] 6세(1926년) 때 부친을, 12세(1932년) 때 모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채 만주 각지를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

만주에서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34년 둘째형 철주(哲柱)가 죽고, 맏형 성주가 있는 동북항일연군 부대를 찾아가서 그들과 같이 머물다가 1937년 초 공비토벌에 나선 안도현 치안대장(安圖縣 治安隊長) 이도선(李道善, 警佐)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이도선의 형 이도일(李道日)은 김형직의 친구였는데, 그 아들 김영주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집에서 몇년간 같이 살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 김영주는 도시에서 일하고 싶다며 신경(新京, 장춘)으로 가서 일본인 상점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이도일의 아들 이벽오(李碧梧)가 신경(新京)에 볼 일이 있어 갔을때 그는 김영주와 어울려 같이 놀기도 했다. 그때 김영주는 술도 잘 먹고 노래도 잘 부르며 싸움도 잘하는 건달패 같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7]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일본말을 아주 잘 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어느 때인가부터 일본군 통역이 되어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김영주의 일본군에서 이름은 김일선(金日鮮)이었다.[8] 그는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15 이후에도 통역으로 모택동의 고향인 중국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縣)의 일본군 부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중국말도 잘 했으므로 국민당 군이 9월 15일 그가 속한 일본군 부대의 항복을 받을 때 통역을 맡았는데, 중국군 부대장이 그의 언어능력을 높이사서 중국군으로 받아들여 통역일을 맡겼다. 이후 중국군에서 복무하다 그 부대에서 사귄 친구 이용상(李容相,1924∼2005)과 함께 1946년 4월 30일 상해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온다. 5월 4일 밤 서울역에 도착하여[9] 서울의 이용상의 집에서 머물다 5월 6일 서울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 평양방송을 듣고 북한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김일성이 바로 자신의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또 평양으로 떠나면서 자신이 일본군 통역을 한 사실을 알면 형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걱정을 하였다고 한다.

친구 이용상은 김영주에 대해[10]

그(김영주)의 대인관계는 지극히 명랑했고 신의가 있었다. 춤 잘 추고(특히 왈츠 곡), 총 잘 쏘고, 건달기질·깡패기질도 충분했지만 안광만은 항상 또렷하게 바로 박혀 있었다.

라고 말했다. 또 김영주는 해방된 한국이 살길은 소련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길 밖에 없다고도 하였다.[11] 이는 박헌영이 한 발언[12]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소련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고질적인 저열한 특성을 김영주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평양에 도착한 후 그는 한동안 김일성의 관저에서 같이 살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김일성은 집에 고바야시 카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인 여성을 식모로 두었다. 고바야시는 일본으로 돌아와 1970년에 쓴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13][14]라는 글에서 1946년 5월초 김일성 집에 온 김영주(金英柱)가 어떻게도 일본말을 잘 하는지 일본 사람인줄 착각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하루는 고바야시의 언니가 평양의 불량청년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발생했는데, 김영주는 권총과 몽둥이를 들고 보안대원 수명을 데리고 나가 청년들을 붙잡아 실컷 두들겨 패주고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김영주(金英柱)의 사촌인 영주(永柱), 원주(元柱) 등도 평양에 나가 보안대 간부가 되어 권총을 차고 다니며 으시대었다고 한다.[15]


그는 만주에서는 학교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중국어, 일본어 등을 잘 했다는 것으로 보아 언어 능력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형 덕택에 특혜를 받아 모스크바 종합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된다.

북한 정권에서의 경력

소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주는 형 덕택에 북한 정권에서 한동안 승승장구하다 조카 김정일과의 후계 경쟁에서 밀려 1976년 5월 이후 권력 전면에서 사라졌다. 김정일이 후계권력 승계에 방해가 되는 삼촌인 김영주와 그 가족을 자강도 산골로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쌍둥이인 딸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도 퇴학하여 부모들을 따라 자강도로 내려갔고[16], 이들 가족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1993년 김일성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김정일을 설득하여 18년간 유폐시켰던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김영주에게는 ‘명예 국가부주석’이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김영주는 그해 7월 27일 이른바 조국해방전쟁 40주년 승리기념탑 준공식에 김일성 부자(父子)를 비롯한 고위 당정(黨政) 간부들과 함께 참석, 18년 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2]

그는 1972년에 남북조절위원회의 북한측 위원장을 맡았으나, 신병을 핑계로 직접 나서지는 않고, 박성철(朴成哲)이 대행했다.[17][18]

북한 정권에서 그의 이력은 아래와 같다.[19][20]

모스크바종합대학 (정경학부) 졸업[2][20]
1954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
1957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부장
1957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과장
1960.0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부장
1961.09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4차 당대회)
1962.10 최고인민회의 제 3기 대의원
1966.10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66.10 비서국 비서
1967.11 최고인민회의 제 4기 대의원
1967.11 상임위원회 위원
1969.12 비서국 비서
1969.12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70.11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70.11 비서국 비서
1970.11 정치국 위원
1972.07 남북 조절위원회 공동위원회 위원장
1972.12 최고인민회의 제 5기 대의원
1972.12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73.09 조직지도부 부장(해임) *후임 : 김정일
1974.02 정무원 부총리
1993.12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3.12 최고인민회의 제 9기 대의원(보선)
1993.12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
1993.12 국가 부주석
1993.12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1994.07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5.02 오진우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1998.09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1998.09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3.09 최고인민회의 제 11기 대의원
2003.09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8.10 박성철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2009.0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2009.04 최고인민회의 제 12기 대의원
2010.09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해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해임)
2012.02 김정일훈장 수훈
2014.03 최고인민회의 제13기 대의원
2014.04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이용상(李容相)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

해방 직후 1945년9월 15일부터1946년 5월 6일까지 중국군에서 김영주와 붙어 살다시피 한 이용상(李容相,1924.7.1∼2005.4.11)[21]은 1991년 중앙일보에 『나의 친구 김영주』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일에 대한 회고의 글을 5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 연재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용상 자신도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만, 김형직도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해주며,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김영주가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므로, 이 때문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선호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아닌 가짜가 맞다고 그의 친동생 김영주가 이미 해방 직후에 증언했던 것이다.

"백발장군이 어떻게 33세인가" 꼬리문 의문 : 노장군이 물려준 이름이라는 김영주의 변명[8]

김일성의 친동생인 그가 자기 큰 형 이름이 원래는 김성주였는데 지금은 김일성, 즉 오늘(1945년10월14일)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 시민환영을 받은 김일성이라고 분명히 필자에게 말했다. 김성주가 지금은 김일성으로 됐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필자가 10세 전후일 때 우리 아버님은 약주를 드시면 언제나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이 피면」하는 『봄 노래』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노래가 끝나면 반드시 『이제 곧 김일성 장군이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김일성 장군은 백발노인으로 축지법을 쓰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 백발장군이 지금은 몇살쯤 되셨을까. 나는 김영주에게 물었다.
『김 동지, 형님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길래 김일성 장군이란 말씀입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33세라고 대답했다. 33세라면 내 계산과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김영주는
『네, 알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해야 할 김일성 장군 나이가 왜 33세냐는 말씀이지요. 나 역시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얘기하셨으니까요.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요.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은 내가 6세때 돌아가시고 모친도 내가 12세때인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성주형을 따라다니며 유격대 노릇을 했습니다. 그 위험한 나날로 보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참 용한 거지요. 철주라는 작은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19세때 남만주 동령현 노흑산에서 전사했지요(노흑산은 산명이 아니라 간도성에 있는 지명이라고 했다).
성주형님은 만주에 있는 우리독립군 사단장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전투를 잘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름을 물려준 겁니다. 형님에게 이름을 물려준 김일성 장군도 역시 그 전대의 진짜 장군으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답니다.』

『네, 그것을 양명이라고 하지요. 이름을 물러 받은 김 동지의 형님은 승명한 것이고. 김 동지, 그런 연유로 형님이 젊은 나이에 김일성 장군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김 동지의 「김일선(金日鮮)」이란 이름은 누구에게서 승명한 겁니까.』
『이것은 내가 적당히 지은 겁네다. 왜「일선」 인지 아십니까.』
『…….』
『아주 간단합네다. 일본 놈들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속임수로 떠들던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 몸과 같다고 기만하기 위해 만든 조선총독부 표어)를 본떠 나는 일선(일본과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내 속셈은 급할 때 일본군경에게 「자 보시오. 나는 내 이름까지도 일선 일체라는 뜻에서 일선이라고 지었지 않느냐」고 둘러대기 좋게 만든 이름입니다. 실제로 일선이라는 이름의 효과도 봤디요.

그러나 일선의 참뜻은 김일성형의 「일」과 조선의 「선」을 딴겁네다.』

김영주는 자신이 형과 같은 부대에 있을 때인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습격에도 참여했다고 주장했다하나, 그는 보천보 사건 발생 이전인 1937년 초에 안도현 치안대장(安圖縣 治安隊長) 이도선(李道善, 警佐)에게 붙잡혔으므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도선은 1937년 4월 24일 사망하므로 그 이전에 붙잡혔음.[7]] 일본군 통역으로 있은 것을 부끄럽게여겨 자신이 항일투쟁을 한 경력도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이 아닌가 한다.

참고 자료

각주

  1. 북한 김일성 동생 김영주 95살 고령에도 지방의회 투표 연합뉴스 2015년 7월 19일
  2. 2.0 2.1 2.2 [김정은 특집] 김정은과 그 형제들 월간조선 2010년 10월호
  3. 白山武士團員 逮捕의 件 : 1921년 05월 12일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 康晋錫(變名 金在龍, 韓成龍,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大正 9년 (1920) 음력 2월.....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의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체류하다 같은 해 음력 4월 2일 임강현 천금동에서 목재 벌채 종사...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 1921년 4월 24일 >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康晋錫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4.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 서울신문 1992-10-27 4면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1992. 12. 08 (화) | 서울신문
  5.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 3 > 陸軍側 調査에 관계된 鴨綠江 沿岸地方 支那地에서의 在住 朝鮮人의 戶口 其他에 관한 件 1925-05-05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작성 : p.24
  6.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 구글맵
  7. 7.0 7.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 293-294
  8. 8.0 8.1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51)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36) -「김일성」으로 둔갑 중앙일보 1991.05.2 종합 9면
  9.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16)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1) 중앙일보 1991.03.09 종합 9면
  10.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16)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1) - 이야기를 마치며 중앙일보 1991.03.09 종합 9면
  11.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58)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431) - 김영주의 첫 「사상」 고백 중앙일보 1991.06.21 종합 21면
  12.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
  13.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
  14. 박갑동(朴甲東, 1919~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160) 중앙일보 1990.11.12 종합 9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397
  15.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 344
  16.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김영주 RFA 2016-12-06
  17. 한적대표단, 박성철과 참석 | 김영주대리, 3시간 내일 하오6시 서울 귀환 중앙일보 1972.09.01 종합 1면
  18. [월간조선] "박정희 때는 비서보다 높은 정치위원(김영주, 박성철)이 나왔다" 2013.06.21
  19. 김영주 통일부 북한정보 포털
  20. 20.0 20.1 김영주(金英柱) NK 조선 2013-11-06
  21.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李容相) 오마이뉴스 2005.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