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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13일 도올 김용옥 봉원재에서 아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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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1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같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후 당시 나눈 대화들을 수록한 책 《대화》(통나무, 1991)에서 김우중 회장을 극찬하였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294 김우중과 김용옥 “대화는 변혁의 힘”] 시사저널 1991.04.25 </ref> 대우 사태가 불거지자 몇몇 기자가 그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데 그는 기자 입에서 ‘김우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뒷말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고 한다.  
그는 1991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같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후 당시 나눈 대화들을 수록한 책 《대화》(통나무, 1991)에서 [[김우중]] 회장을 극찬하였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294 김우중과 김용옥 “대화는 변혁의 힘”] 시사저널 1991.04.25 </ref> 대우 사태가 불거지자 몇몇 기자가 그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데 그는 기자 입에서 ‘김우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뒷말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력이 있으므로, 이후의 그의 발언들이 종북적 경향을 띄는 것도 확고한 학문적 신념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시류의 변화에 영합하여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는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만하다. 그의 친형인 김용준은<ref>[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4967/1 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신동아 2005-11-29</ref> 동생이 지속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 것이 있다고 하였고, 아래 신동아 기사도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ref>[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1046/1 인물탐구 ‘압도적 인간’ 도올 김용옥] 신동아 2005-04-18</ref>
이러한 전력이 있으므로, 이후의 그의 발언들이 종북적 경향을 띄는 것도 확고한 학문적 신념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시류의 변화에 영합하여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는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만하다. 그의 친형인 김용준은<ref>[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4967/1 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신동아 2005-11-29</ref> 동생이 지속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 것이 있다고 하였고, 아래 신동아 기사도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ref>[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1046/1 인물탐구 ‘압도적 인간’ 도올 김용옥] 신동아 2005-04-18</ref>

2019년 12월 10일 (화) 08:46 판

김용옥

김용옥(金容沃, 1948년 6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광산. 호는 도올(檮杌)이다. 도올이란 호의 뜻은『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를 비롯하여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등에서 밝혔듯 "돌"이다. 어릴 때부터 이해가 느리고 아둔하여 스스로 "돌대가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생애

김용옥은 초등학교를 천안에서 졸업하고,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고려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에서 수학한 후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72년 9월 중화민국으로 가서 국립 타이완 대학 철학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면서 〈노자 "자연" 철학에서의 "무위" 의 기능(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일본으로 가서 1977년까지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에서 수학하며 〈왕선산의 동론(王船山の動論)〉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7년에 미국으로 가서 펜실베니아 대학교 동방학과 대학원과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어문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는데, 하버드에서 〈왕부지의 철학, The Philosophy of Wang Fu-chih(1616~1692)〉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0년에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에 입학하여 한의학사학위도 취득하였다.[1]

젊은시절 김용옥

대학교수이자 학자이며 철학자, 사상가, 언론인, 한의사, 극단의 단원으로도 활동, 연출가로서, 영화와 연극의 시나리오를 쓴 극작가로서, 언론에 기사와 칼럼을 써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동,서양 철학과 종교사상까지 다양한 저작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82년 9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부교수가 되고 85년 9월에는 동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1986년 양심선언("한국의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의 양심선언")을 하며 고려대학교 교수직을 사퇴한 후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등을 강의했다. 1988년 무렵부터 방송 강연에 출강하였다.

그는 문화계에서도 몇가지 활동을 했다. 악서고회(樂書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국악을 콘템포러리 뮤직으로 승화시키는 다양한 기초작업을 하였다.(1984년 3월~1987년 12월). 한국의 전통음악을 이끄는 대표적 주자, 백대웅, 김혜숙, 박범훈, 송방송, 이성천, 권오성, 최종민, 이보형, 양승희 등이 참여했다. 이후 한대수와 록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도도회(檮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 교수들과 그 대학 출신 화가들(이종상,김병종,김호득,장상의,심현희,장혜용,이민주 등)과 정기적인 활동을 했다. (1988년 6월~1999년 6월)

영화와 연극활동도 했는데 대중의 사랑을 받는 마당극으로 유명한 극단 미추를 손진책, 김성녀와 함께 창단(1986년 8월)하여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키는 많은 연극 작업을 했다. 《시간의 그림자》, 《그 불》등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잠시 영화인 심포지움을 만들어 유현목,김수용,임권택,이장호,김호선,하명중,정지영,박광수,이두용,황기성 등과 활동했다. 이후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 《개벽》, 《취화선》의 대본을 썼고, 특히 《취화선》은 2002년 55회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획득하였다. 《취화선》과 《왕의 남자》의 자막은 직접 영역했다.

유기화학자 김용준과 함께 신과학운동 세미나를 주도하고, 대우재단지원 과학사상연구회(科學思想硏究會)를 설립했다.(1984년 3월~1990년 2월) 한국의 대표적인 과학자․과학사상가들(조순탁,이성범,장회익,김두철,서정선,신중섭,이봉재 등)이 참여했으며 이후 꾸준히 과학과 철학이라는 학술지를 출간했다.

1989년에는 한국사상사연구소(Korean Institute of Classical Studies)를 세워 한국고전 최초의 일자색인인 《삼국유사인득》을 출간했다. 이 작업은 후에 제자 김현 교수의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전체 한글번역 프로그램인 CD-ROM작업으로 이어졌다. 1993년에는 도올서원을 세워 15기에 걸쳐 3,000여 명의 학생을 배출했다. 그리고 민족문화추진회의 한국고전국역사업을 지원하였고, 그 기관은 이후 한국고전번역원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에는 태권도철학세미나를 개최하여 무술의 본질과 태권도문화의 세계화를 논하였다. 유병관,양진방,김영선,김용범,최의정,임신자,바비 클레이튼(Bobby Clayton),스티븐 카프너(Steven D. Capener) 등이 참여했고 이 세미나의 결과물로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를 집필․출간했다. 이 작업의 정신과 성과는 이후 무주 태권도공원으로 이어졌다.

한의대 졸업 후 도올한의원을 개원하여 2년간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중앙일보에는 《도올고함(檮杌孤喊)》이라는 칼럼을, 중앙선데이에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신발굴 성서자료)를 연재하였다.

학력

  • 천안제3국민학교 졸업
  • 보성중학교 졸업
  • 보성고등학교 졸업(55회)
  • 1968년 3월~1972년 2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문학사, 〈버트란드 럿셀의 논리원자주의〉)
  • 1972년 3월~1972년 8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대학원
  • 1972년 9월~1974년 6월 중화민국 국립 타이완 대학 철학연구소 (철학석사, 〈노자 "자연" 철학중 "무위" 지공능(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
  • 1974년 9월~1975년 3월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연구생
  • 1975년 4월~1977년 2월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철학석사, 〈왕선산의 동론(王船山の動論)〉)
  • 1977년 2월~1977년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동방학과 대학원
  • 1977년 9월~1982년 6월 미국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어문학과 (철학박사, 〈왕부지의 철학, The Philosophy of Wang Fu-chich(1616~1692)〉)
  • 1990년 3월~1996년 2월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 (한의학사)

논란

노태우 찬양 기고문

『신동아』 1990년 1월호에 실은 《노태우대통령께 아뢰옵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2][3] 당시의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아부성 발언을 하였다.

신동아 1990년 1월호의 김용옥 기고문 《노태우대통령께 아뢰옵니다》
노태우대통령께 아뢰옵니다

(전략)

나는 나의 아내를 사랑한다. 그런데 나는 이 순간 노태우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쓴다. 왜냐? 노태우는 이미 개인이 아니다. 그는 개인은 개인이로되 보편세계사적 개인(world-historical individual)이다. 철학자인 나는 그 노태우라는 개인의 보편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나의 아내보다도 더...아내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중략)

민중과 학생의 욕을 얻어먹더라도 저는 당신의 아름다운 6공의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싶습니다.

1989년 12월13일 도올 김용옥 봉원재에서 아뢰옵니다.

그는 1991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같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후 당시 나눈 대화들을 수록한 책 《대화》(통나무, 1991)에서 김우중 회장을 극찬하였다.[4] 대우 사태가 불거지자 몇몇 기자가 그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데 그는 기자 입에서 ‘김우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뒷말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전력이 있으므로, 이후의 그의 발언들이 종북적 경향을 띄는 것도 확고한 학문적 신념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시류의 변화에 영합하여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으려는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만하다. 그의 친형인 김용준은[5] 동생이 지속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 것이 있다고 하였고, 아래 신동아 기사도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6]

도올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주목받는 삶’에 대한 집착이다. 도올의 한 지인은 그를 두고 “두 사람이 밥을 먹어도 자기가 중심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박박 깎은 머리, 검고 흰 중국복식이나 두루마기, 화려한 목도리며 독특한 디자인의 모자들…. 외모의 꾸밈부터 그는 철저히 ‘주목받음’을 지향한다.

그는 오늘날 노태우나 김우중을 찬양하거나, 우파적 발언을 했다가는 아무 언론도 그를 불러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천안함 피격사건 발언 무혐의

2010년 5월 23일 서울 봉은사에서 '코뿔소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 동서화통의 깨달음'이라는 특별강연에서 천안함 사태에 대한 합동조사단 발표를 강력히 비판하여 라이트 코리아 등 우파단체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소 당했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신유철 부장검사)는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들이 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비난한 혐의로 도올 김용옥을 고발한 사건을 두고 무혐의 처리했다고 9월 27일 밝혔다.[7]

춘성과 육두 문자

2002년 10월 당시 방송 강연 중 일제 시대대한민국의 선승 춘성의 육두 문자 발언을 방송에 인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8][9] 이때 방송 강연에서 그는 승려 춘성 의 욕설과 육두문자를 그대로 전하여 논란이 되었다.

정치적 성향 및 6.25 전쟁에 대한 관점과 발언

광주에서 열린 자신의 강의에서 김용옥은 6.25에 대해 “서울까지 단숨에 내려온 부대는 인민군이 아니라 중국내전에서 갈고 닦은 조선의용군 10만명”이라며 “남침이지만 남침이라 표현할 수 없다. 남침을 유도한 남한사회의 구조가 있다”고말하면서 “최고 원흉은 일본. 다음은 미국”이라며 “한국전쟁은 남침, 북침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역사와 미국 제국주의 역사가 조선에서 만든 악랄한 죄악”이라고 주장했다.[10][11][12][13]

다큐멘터리 내용

2005년 그가 제작한 EBS 10부작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도산 안창호의 중국 지린(吉林) 강연회에서 김일성은 안창호에게 ‘민족개조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질문을 하자 “안창호는 조금 전까지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 짓고 연탁 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고 김일성의 회고록에 기재된 내용의 전체를 소개하며 어린 학생의 질문에 안창호가 성급하게 나갔다는 것은 과장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사실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일화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과장 또는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심지어 사실일 가능성 조차 있지만 명확한 것은 아직 없다.[14]

박근혜 대통령 하야 발언 논란

2014년 5월 2일 한겨레 신문에 '세월호 참사 특별 기고'를 했다. 이 기고에서 김용옥은 여러 비판적인 말을 했는데, "박근혜, 그대의 대통령의 자격이야말로 근본적인 회의의 대상이다"라고 하였다.[15]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의 대통령이라는 명분은 오로지 선거라는 합법적인 절차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것인데, 그 정당화의 법률적 근거인 선거 자체가 불법선거였다는 것은 이미 명박한 사실로서 만천하게 공개된 것이다"

또한 트위터상에 올라오는 어린 학생들의 문구 속에서 항변의 언사들이 많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민들이여! 분노하라! 거리로 뛰쳐나와라!", "박근혜여! 그대가 진실로 이 시대의 민족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라고 발언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발언 논란

도올의 주장

도올 김용옥은 KBS 방송을 통해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라는 등 거세게 비판했다. 김용옥은 2019년 3월 16일 KBS 1TV'도올아인 오방간다' 11회에서 "이 전 대통령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이승만은 미국의 퍼핏(puppet), 괴뢰"라고 말했다.

11회는 완전한 독립을 위한 해방을 주제로 한 방송이었는데 도올은 맥아더가 미국의 말을 잘 듣는 이승만을 데리고 왔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 외에도 "소련이야말로 한국을 분할 점령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국이 분할 점령을 제시한 것에 대해서 소련은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독립시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에 찬성했으면 분단도 없었을 것" 등의 발언을 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처음에는 똑똑하고 유능한 인물이어서 사태를 파악하고 장악할 능력이 있었지만 나쁜 방향의 극단으로 간 지식인이라고,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하게 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6]

각계의 반박

이에 KBS 공영노동조합은 21일 성명을 내고 "김용옥씨가 이미 특정 이념과 정파성에 경도된 인물이라고 치더라도 그의 발언을 여과없이 그대로 내보낸 KBS게 공영방송이 맞느냐"라고 비판했다.[17]

조선일보에서는 김명섭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도올의 잘못된 역사 정치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했다.[18]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 교수는[19] 펜앤마이크 칼럼에서 역사를 함부로 재단하는 사이비 학자들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20]

역사지식이 일천할수록, 디테일을 모를수록, 공부가 짧을수록, 지혜가 얕을수록, 통찰력이 부족할수록, 시비판단이 거침없고, 선악구분이 성급하다. 인물품평을 일삼고, 얄팍한 지식을 뽐낸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인류의 역사가 고작 몇 명의 악인들이 망쳐 놓은 난장판이거나 몇 명 위대한 영웅들의 서사시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예외 없이 과거의 인물들을 역사의 법정에 세워 놓고 인민재판식 즉결처분을 통해 악인의 명부를 만든다. 동시에 소수의 선인을 가려내선 영웅의 신전에 배향한다. 조금만 역사를 공부해 보면 누구나 그런 식의 단순한 역사관은 어리석은 아집(我執)이며 망념(妄念)임을 깨닫게 된다. 큰 스승 밑에서 학부강의를 한 번만 들어도, 역사책 한 권만 정독을 해도, 두렵고 무서워서 과거사에 대한 망언과 폭언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다.
........
그런 대한민국에서 더는 편향된 지식, 왜곡된 정보, 폭력적인 언어로 대중을 오도하는 단 한 명의 극단주의자에 전파를 몰아줄 순 없다. 세계인의 상식을 거부하고, 전체주의 정권을 옹호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독하는 'F학점의 역사강의'가 용납될 순 없다. "F학점의 역사강의"를 제작해서 나라의 교육을 망치는 엉터리 공영방송은 더더욱 용납될 수 없다.


이승만 학당의 교장이자 전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는 이승만 TV 유튜브 방송을 통해 김용옥을 화적떼라고 표현했다.

도올의 반박

자유민주진영의 반박에 도올은 "논란이 커질수록 이승만이 불리해져", "이승만은 국민을 원수로 생각한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도올은 2019년 3월 24일 김용민의 팟캐스트에서 "별 관심 없어 몰랐는데 엄청난 공격이 자를 향해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어떻게 이승만이 국부이고 건국의 아버지인가. 근원적 재평가가 이루어 져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어 "이 이야기가 나올수록 우리 승리가 확실하다"고 말했다.[21]

도올, 명예훼손으로 피소

' TV프로그램 등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수차례 비판한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유족에게 고소를 당했다.
26일 경찰 등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 양자 이인수 박사는 지난달 24일 김 교수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이 박사는 김 교수가 책과 TV 프로그램에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을 적시해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

각주

  1. [1] 김용옥 프로필
  2. 기고문 전문 링크 : 김용옥, 《노태우대통령께 아뢰옵니다》 『신동아』 1990년 1월호
  3. 도올 "노태우 대통령께 아뢰옵니다"…15년전 칼럼 네티즌 논란 동아닷컴 2004-12-01
  4. 김우중과 김용옥 “대화는 변혁의 힘” 시사저널 1991.04.25
  5. 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신동아 2005-11-29
  6. 인물탐구 ‘압도적 인간’ 도올 김용옥 신동아 2005-04-18
  7. "천안함 발표 0.0001%도 믿을수 없다" 도올 김용옥 무혐의
  8. 도올 TV 강의서 육두문자 인용 구설수
  9. 도올 TV 강의 육두문자 논란- 한국일보
  10. <일문일답> EBS 다큐멘터리 연출 도올 김용옥 연합뉴스 2005년 8월 2일작성
  11. 도올 김용옥, “이제 ‘침략사’ 아닌 ‘항거사’ 써야한다” 노컷뉴스 2005년 8월 3일 작성
  12. 극단으로 갈린 '도올EBS다큐' 연합뉴스 2005년 8월 23일 작성
  13. 도올 김용옥 "6.25를 남침이라 불러선 안돼" 2011년 3월 19일 뉴스웨이브
  14. 김일성 예찬에 신명 경제풍월 2005년 10월호
  15. 김용옥 "국민들이여, 거리로 뛰쳐나와라!" 2014년 5월 2일
  16. 도올아인 오방간다 도올 김용옥, "이승만은 거룩한 사기꾼, 국립묘지에서 이장해야"
  17. 김용옥 "이승만 묘지서 파내야" 발언 논란...KBS "반론도 소개"(종합)
  18. "이승만이 괴리?...도올의 '역사정치'는 위험하다
  19. Jaeyoon Song, Ph.D. McMaster University Faculty of Humanities
  20. [송재윤 칼럼] 'F학점의 역사강의'는 가라! 가짜역사는 가라! pennmike 2019.03.27
  21. 도올, 이승만 논란에 "국민을 원수로 생각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