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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 후 수감 및 남야영 입영==
==월경 후 수감 및 남야영 입영==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1940년 가을 [[김일성]]이 쫓기던 만주에서의 마지막 장소는 함경북도 북단에 인접한 훈춘(琿春)이다.<ref>[https://www.jacar.archives.go.jp/das/image/B02032042800 標題:8 昭和15年8月1日から昭和15年8月31日] p.16 : 間島省内匪賊状況週報ニ関スル件 (在琿春 領事 木内忠雄 1940년 8월 31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8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ref> 아내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과 부하 10여명을 데리고 훈춘에서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불법 월경한<ref name="stat">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ref><ref name="joins">[http://news.joins.com/article/3106307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ref><ref>[https://web.archive.org/web/20190506234828/http://blog.sina.com.cn/s/blog_616c456c0102e15t.html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ref> 그는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Посьет, Posyet) 항으로 끌려가 수감된다.<ref>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1940년 3월 ~ 1945년 8월 /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4. 1940년 가을</ref>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1940년 가을 [[김일성]]이 쫓기던 만주에서의 마지막 장소는 함경북도 북단에 인접한 훈춘(琿春)이다.<ref>[https://www.jacar.archives.go.jp/das/image/B02032042800 標題:8 昭和15年8月1日から昭和15年8月31日] p.16 : 間島省内匪賊状況週報ニ関スル件 (在琿春 領事 木内忠雄 1940년 8월 31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8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ref> 아내 [[김정숙 (김일성처)|김정숙]]과 부하 10여명을 데리고 훈춘에서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불법 월경한<ref name="stat">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ref><ref name="joins">[https://joongang.co.kr/article/3106307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ref><ref>[https://web.archive.org/web/20190506234828/http://blog.sina.com.cn/s/blog_616c456c0102e15t.html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ref> 그는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Посьет, Posyet) 항으로 끌려가 수감된다.<ref>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p.49 : 1940년 3월 ~ 1945년 8월 /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4. 1940년 가을</ref><ref>[https://www.google.com/maps/place/%EB%9F%AC%EC%8B%9C%EC%95%84+692705+%ED%94%84%EB%A6%AC%EB%AA%A8%EB%A5%B4%EC%8A%A4%ED%82%A4+%ED%81%AC%EB%A0%88%EC%9D%B4+%ED%8F%AC%EC%8B%9C%EC%98%88%ED%8A%B8/@42.5887899,130.6207677,11.18z/data=!4m6!3m5!1s0x5fb5ae80950ad10d:0x90b7d70404466817!8m2!3d42.652462!4d130.8008973!16s%2Fm%2F02wxtsh?entry=ttu 포시예트(Посьет, Posyet) 항] 구글 지도</ref>
{{인용문|'''[8권 p.49]''' 나는 대원들이 있는 방에 가서 너무 답답해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br>
동무들이 국경에서 며칠간 지체하니 섭섭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쏘련동무들이 우 리를 푸대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매개나라에는 국경통과규정이라는 것이 있 다. 그 국경출입질서에 따라 필요한 신원조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생검열을 하는 것은 전염병 보균자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최근에 만주에 있는 관동군의 세균전 연구집단이 쏘련원동에 전염병을 퍼뜨려 놓았다. 그래서 쏘련정부가 입국검사를 철저히 할 데 대한 결정까지 채택하였다고 한다. 우리앞에는 할 일도 많고 넘어야 할 시련의 고비도 많다. 우리 혁명은 이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의 날도 멀지 않다. 그러니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혁명가요를 높이 부르면서 조국해방의 그날까지 억세게 싸워나가자고 하였습니다.<br>
<u>그 후 쏘련사람들은 우리 동무들을 뽀비예뜨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Then, Soviet guards took us to Posiet.<ref>With the Century; Reminiscences of Kim Il Sung, Vol.8,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Pyongyang, Korea, 1998) p.69</ref>)</u>}}
김일성 회고록 한글판에는 그들이 입소 후 끌려간 곳이 뽀비예뜨라 했으나, 영문판 회고록에는  Posiet로 나온다. 뽀비예뜨는 뽀시예뜨의 오기인 듯 하다.


[https://zh.wikipedia.org/wiki/%E5%91%A8%E4%BF%9D%E4%B8%AD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이 1941년 1월 2일에 김일성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고<ref name="joins"/>, 1월 5일에는 김일성이 3로군 총사령이었던 장수전(張壽籛, 李兆麟)을 만나고 있으므로<ref>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东北抗日游击日记)》 p.567 : 1941년 1월5일 김일성, 최석천(최용건), 계청이 장수전(張壽籛) 처에 도착해서 담화.</ref> 김일성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1941년 1월 2일~1월 5일 사이이다.
[https://zh.wikipedia.org/wiki/%E5%91%A8%E4%BF%9D%E4%B8%AD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이 1941년 1월 2일에 김일성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고<ref name="joins"/>, 1월 5일에는 김일성이 3로군 총사령이었던 장수전(張壽籛, 李兆麟)을 만나고 있으므로<ref>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东北抗日游击日记)》 p.567 : 1941년 1월5일 김일성, 최석천(최용건), 계청이 장수전(張壽籛) 처에 도착해서 담화.</ref> 김일성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1941년 1월 2일~1월 5일 사이이다.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https://ko.wikipedia.org/wiki/뱌츠코예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 야영, Северным лагерем, «лагерь А»)과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 하마탄(蛤蟆塘, 오늘날의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A6%88%EB%8F%8C%EB%85%B8%EC%98%88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南野營, B 야영, южным лагерем, «лагерь В») 두 곳에 분산 수용된다. 북야영은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ref>[https://en.wikipedia.org/wiki/Far_Eastern_Front Far Eastern Front] Wikipedia</ref>이, 남야영은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에 사령부를 둔 연해주군단<ref>[https://ru.wikipedia.org/wiki/%D0%9F%D1%80%D0%B8%D0%BC%D0%BE%D1%80%D1%81%D0%BA%D0%B0%D1%8F_%D0%B3%D1%80%D1%83%D0%BF%D0%BF%D0%B0_%D0%B2%D0%BE%D0%B9%D1%81%D0%BA Приморская группа войск] (Primorsky Group of Forces) : Википедия / [https://en.wikipedia.org/wiki/Maritime_Group_of_Forces Maritime Group of Forces] Wikipedia</ref>이 각각 관할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야영(B야영) 입영===
===남야영(B야영) 입영===
이후 다른 [[동북항일연군]] 월경자들과 함께 하마탄(Хаматан, 蛤蟆塘, 蛤螞塘) 마을에 있던 남야영(南野營, B야영, Южный лагерь, «лагерь В»)에 수용된다.<ref name="rukim">[https://ru.wikipedia.org/wiki/%D0%9A%D0%B8%D0%BC_%D0%98%D1%80_%D0%A1%D0%B5%D0%BD Ким Ир Сен] - Википедия (러시아어 wikipedia)</ref> 하마탄은 오늘날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로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에서 남쪽으로 33 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ref>[https://www.google.com/maps/dir/%EC%9A%B0%EC%88%98%EB%A6%AC%EC%8A%A4%ED%81%AC+%D0%A3%D1%81%D1%81%D1%83%D1%80%D0%B8%D0%B9%D1%81%D0%BA/%EB%9F%AC%EC%8B%9C%EC%95%84+%ED%94%84%EB%A6%AC%EB%AA%A8%EB%A5%B4%EC%8A%A4%ED%82%A4+%ED%81%AC%EB%A0%88%EC%9D%B4+%EB%9D%BC%EC%A6%88%EB%8F%8C%EB%85%B8%EC%98%88/@43.6796709,131.8231809,11z/data=!3m1!4b1!4m13!4m12!1m5!1m1!1s0x5fb2e82c7a30123d:0x3ea6992838cb31b3!2m2!1d131.963089!2d43.8023134!1m5!1m1!1s0x5fb30473c02566b3:0x6b4abccb564916df!2m2!1d131.9293384!2d43.5580238 우수리스크 - 라즈돌노예] (구글지도)</ref>. 우수리스크의 당시 지명은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Voroshilov)였고, В 야영(남야영)의 В는 여기서 첫글자를 따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를 쌍성자(双城子)라 칭하기도 했다.
이후 다른 [[동북항일연군]] 월경자들과 함께 하마탄(Хаматан, 蛤蟆塘, 蛤螞塘) 마을에 있던 남야영(南野營, B야영, южным лагерем, «лагерь В»)에 수용된다.<ref name="rukim">[https://ru.wikipedia.org/wiki/%D0%9A%D0%B8%D0%BC_%D0%98%D1%80_%D0%A1%D0%B5%D0%BD Ким Ир Сен] - Википедия (러시아어 wikipedia)</ref> 하마탄은 오늘날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로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에서 남쪽으로 33 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ref>[https://www.google.com/maps/dir/%EC%9A%B0%EC%88%98%EB%A6%AC%EC%8A%A4%ED%81%AC+%D0%A3%D1%81%D1%81%D1%83%D1%80%D0%B8%D0%B9%D1%81%D0%BA/%EB%9F%AC%EC%8B%9C%EC%95%84+%ED%94%84%EB%A6%AC%EB%AA%A8%EB%A5%B4%EC%8A%A4%ED%82%A4+%ED%81%AC%EB%A0%88%EC%9D%B4+%EB%9D%BC%EC%A6%88%EB%8F%8C%EB%85%B8%EC%98%88/@43.6796709,131.8231809,11z/data=!3m1!4b1!4m13!4m12!1m5!1m1!1s0x5fb2e82c7a30123d:0x3ea6992838cb31b3!2m2!1d131.963089!2d43.8023134!1m5!1m1!1s0x5fb30473c02566b3:0x6b4abccb564916df!2m2!1d131.9293384!2d43.5580238 우수리스크 - 라즈돌노예] (구글지도)</ref>. 우수리스크의 당시 지명은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Voroshilov)였고, В 야영(남야영)의 В는 여기서 첫글자를 따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를 쌍성자(双城子)라 칭하기도 했다. 뱌츠코예 마을에 있었던 북야영(北野營)을 A 야영이라고도 한 것은 근처를 지나는 아무르(Амур) 강의 첫 글자를 따온 것이다.
[[파일:연해주 하마탄 - 1937년.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일본군이 1937년 그린 지도에 나오는 남야영(南野營, B 야영)이 있었던 우수리스크(双城子) 남쪽 근교의 하마탄(蛤蟆塘, 라즈돌노예) 마을. 蛤蟆塘 위에 ラズドリノエ(라즈도리노에), 아래에 ハマタン(하마탄)이라 병기되어 있어, 당시에도 두 가지 지명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15km 정도 북상하면 나오는 오케안스카야(Okeanskaya)에 있었던 소위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가 남야영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김일성 회고록에 남야영은 블라디보스톡 아닌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 근교라고 분명히 밝혔고,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철길이 있고, 자그만 기차역이 있다고 하였다.<ref>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ref> 오케안스카야에도 철길과 기차역이 있지만 역의 서편은 바다이므로 거기에 남야영이 있었을 리는 없다. <u>남야영은 하마탄(라즈돌노예) 기차역의 서편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u>


남야영이 하마탄(Хаматан, 蛤蟆塘, 蛤螞塘)에 있었다는 것은 주로 중국 문헌에 나온다.
남야영이 하마탄(Хаматан, 蛤蟆塘, 蛤螞塘)에 있었다는 것은 주로 중국 문헌에 나오는데,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88여단]] 출신 중국인들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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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주보중전(周保中傳)》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ref>[http://db.history.go.kr/id/kn_027_0050_0020 北韓政治史硏究 序論(梁好民)  >  Ⅱ. 東北抗日聯軍과 金日成의 人蘇] 國史館論叢 第27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11-05)</ref>
<li>《주보중전(周保中傳)》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ref>[http://db.history.go.kr/id/kn_027_0050_0020 北韓政治史硏究 序論(梁好民)  >  Ⅱ. 東北抗日聯軍과 金日成의 人蘇] 國史館論叢 第27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11-0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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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울라지오스토크'는 '블라디보스토크', '울라스노프'는 '보로실로프'의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small>}}</li>
<small>'울라지오스토크'는 '블라디보스토크', '울라스노프'는 '보로실로프'의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small>}}</li>
<li>[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98%8E%E8%B4%B5 왕명귀(王明贵, 1910~2005)]의 회고록(回忆录) 《답파 흥안 만중산(踏破兴安万重山)》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ref>踏破兴安万重山 :  王明贵回忆录。赵亮等整理。黑龙江人民出版社 1988年1月版。  p.216</ref>
{{인용문|1942年 6 月末,我奉张寿鏟的命令,到北野营工作和训练。当时东北抗联在苏联境内有南、北两个野营,北野苕亦称八野营, 孽地在伯力东北75公里处苏联境内的黑龙江江南岸费,亚斯克村附近。<u>南野营亦称 B野营, 驻地在 乌苏里斯克(우수리스크, 双城子) 蛤蟆塘。</u> 北野营是一处山淸水秀、土质肥沃的鱼米之乡。从 1941年起,抗联越境人员逐渐到这两个野营里集中,开始有 1(3) 余人, 以后达到二三百人。}}</li>


<li>중국어 위키백과(维基百科) [https://zh.wikipedia.org/wiki/东北抗日联军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联军)] 및 바이두 백과(百度百科) [https://baike.baidu.com/item/东北抗日联军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联军)]
<li>[https://zh.wikipedia.org/zh-tw/%E5%BD%AD%E6%96%BD%E9%B2%81 팽시로(彭施魯, 1916~2009)]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ref>彭施魯,〈在蘇聯北野營的五年〉(《黑龍江黨史資料》10, 1987)</ref><ref>[https://zhy55415.tistory.com/6733270 88독립여단 2대대 3중대장 팽시로(彭施魯)의 회고록 발췌]</ref>
{{인용문|1940年底,退入苏联境内的抗联部队(主要是冬季被日满军队循雪地脚印追缴无法立足的抗联第2路军部队),驻扎在伯力市东北75公里的维亚茨科耶村以南的黑龙江边的森林野营地。称之为北野营,约300人。<u>在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华人称蛤蟆塘)设有南野营,近200人。</u><br>
{{인용문|병영은 산림 속에 은폐해 있었다. 흑룡강(아무르강) 가까이에 위치했다. 부근에 弗亞斯克(뱌츠코예)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서 소련 사람들은 이 야영을 弗亞斯克野營(뱌츠코예 야영)이라고 불렀다.<br>
<small>海参崴 : 블라디보스톡 ; 双城子 : 보로실로프 (우수리스크)</small>}}
 
중국어 위키백과에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대다수 중국인들은 남야영이 하마탄(라즈돌노예)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li>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부근의 蛤蟆塘에도 또 하나의 야영지가 있었는데 南野營이라 했다.}}
팽시로(彭施魯)는 [[88여단]] 제2대대(第二营) 제3연(第三连) 연장(连长)이었다.<ref name="zh88"/>
</li>


<li>抗联余辉【4】-- 党史频道<ref name="hama">[http://dangshi.people.com.cn/n/2014/0114/c85037-24115206-4.html 抗联余辉] 北京日报 2014-01-14</ref>
<li>[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6%98%8E%E8%B4%B5 왕명귀(王明贵, 1910~2005)]의 회고록(回忆录) 《답파 흥안 만중산(踏破兴安万重山)》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ref>踏破兴安万重山 :  王明贵回忆录。赵亮等整理。黑龙江人民出版社 1988年1月版。  p.216</ref>
{{인용문|남야영(南野营)은 블라디보스톡(海参崴)과 우수리스크(雙城子) 사이에 있는 작은 기차역(小火车站) 부근의 현지인들이 하마탕(蛤蟆塘)이라 부르는 곳에 위치했다. (南野营位于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附近,当地人称蛤蟆塘。/ 南野營位于海參崴與雙城子之間的一个小火車站附近,當地人稱蛤蟆塘。)<ref name="hama"/>}}</li>
{{인용문|1942年 6 月末,我奉张寿篯的命令,到北野营工作和训练。当时东北抗联在苏联境内有南、北两个野营,北野营亦称A野营, 驻地在伯力东北75公里处苏联境内的黑龙江江南岸费,亚斯克村附近。<u>南野营亦称 B野营, 驻地在 乌苏里斯克(우수리스크, 双城子) 蛤蟆塘。</u> 北野营是一处山淸水秀、土质肥沃的鱼米之乡。从 1941年起, 抗联越境人员逐渐到这两个野营里集中, 开始有 100 余人, 以后达到二三百人。}}
왕명귀(王明贵)는 [[88여단]] 제3대대장(第三营长)을 지냈으므로<ref name="zh88">[https://zh.wikipedia.org/wiki/%E8%8B%8F%E8%81%94%E8%BF%9C%E4%B8%9C%E6%96%B9%E9%9D%A2%E5%86%9B%E7%8B%AC%E7%AB%8B%E7%AC%AC88%E6%AD%A5%E5%85%B5%E6%97%85 苏联远东方面军独立第88步兵旅] 维基百科</ref> 그의 증언은 믿을만하다.</li>


<li>"[[김정일|김정일(金正日)]] 출생지는 소() 「하마탄」 마을"<ref name="kimji">[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130020920901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6-13&officeId=00020&pageNo=9&printNo=21852&publishType=00020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 「하마탄」 마을"] 동아일보 1992.06.13</ref><br>
<li>남야영이 하마탄에 있었다는 남야영 출신 여성 빨치산 김선(金善)의 증언<br>
[[항일연군]] 여대원 출신 김선(金善)은 남야영이 「하마탄」 마을에 있었고, 여기가 [[김정일]]의 출생지라 증언.
[[항일연군]] 여대원으로 남야영 출신인 김선(金善)은 남야영이 「하마탄」 마을에 있었고, 여기가 [[김정일]]의 출생지라 증언하였다.<br><br>[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130020920901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6-13&officeId=00020&pageNo=9&printNo=21852&publishType=00020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9면 : 재일 한국인 논픽션 작가 金賛汀(김찬정)씨와 증언자 金善(김선) 여사
{{인용문|金正日(김정일)이 출생할 당시 그의 어머니 金晶淑(김정숙)과 함께 지냈던 빨치산 출신의 金善(김선) 여사(현재 中國(중국) 延吉(연길) 거주)가 새로운 사실을 확인해주었다.<br>
{{인용문|金正日(김정일)이 출생할 당시 그의 어머니 金晶淑(김정숙)과 함께 지냈던 빨치산 출신의 金善(김선) 여사(현재 中國(중국) 延吉(연길) 거주)가 새로운 사실을 확인해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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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동북방 70km 지점에 있는 흑룡강 연안 벽촌 바츠코에 부근에 있었다. 소련측은 그 곳에 몇 개의 오두막을 세우고 텐트를 쳐서, 퇴각해온 빨치산들을 수용했다. 이 병영에는 주로 제2로군계와 제3로군계의 대원들이 수용됐다. 김정순(金貞順)과 이민(李敏), 팽시로(彭施魯) 등이 이 야영에 있었다.<br>
북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동북방 70km 지점에 있는 흑룡강 연안 벽촌 바츠코에 부근에 있었다. 소련측은 그 곳에 몇 개의 오두막을 세우고 텐트를 쳐서, 퇴각해온 빨치산들을 수용했다. 이 병영에는 주로 제2로군계와 제3로군계의 대원들이 수용됐다. 김정순(金貞順)과 이민(李敏), 팽시로(彭施魯) 등이 이 야영에 있었다.<br>
<u>남야영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블로시로프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 하마탄 교외에 있었다.</u> 남야영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제1로군계 생존대원들과 제2로군계의 제5군인 시세영(柴世榮)의 부대가 주보중(周保中)의 지시로 동만 주에서 활동하다 여기로 수용됐다. 여영준(呂英俊)과 김선(金善)은 이 남야영으로 들어왔다.}}
<u>남야영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블로시로프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 하마탄 교외에 있었다.</u> 남야영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제1로군계 생존대원들과 제2로군계의 제5군인 시세영(柴世榮)의 부대가 주보중(周保中)의 지시로 동만 주에서 활동하다 여기로 수용됐다. 여영준(呂英俊)과 김선(金善)은 이 남야영으로 들어왔다.}}
김찬정(金贊汀)은 재일교포로 중국에서 김정순(金貞順), 이민(李敏), 팽시로(彭施魯),  여영준(呂英俊), 김선(金善) 등 다수의 [[88여단]] 출신자들을 인터뷰하였으므로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남야영이 하마탄(라즈돌노예)에 있었다고 한 것이다.<ref>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http://www.nl.go.kr/nl/search/SearchDetail.nl?category_code=ct&service=KOLIS&vdkvgwkey=250530&colltype=DAN_HOLD 《비극의 抗日 빨치산》] (서울: 동아일보사, 1992) pp.67~80에 여영준(呂英俊), 김선(金善), 이민(李敏) 인터뷰 내용이 나옴.</ref><ref name="shin">김찬정, [http://dl.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1992017569_2&resultPage= "빨치산 만가(挽歌), 김일성과 88독립여단"], 『신동아』, 1992년 7월호 p.368</ref><br><br>
남야영이 있던 하마탄(라즈돌노예)은 김정일의 출생지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일생을 다룬 KBS 특집방송에 김찬정(金贊汀)이 라즈돌노예 현지를 방문하여 당시의 흔적을 찾아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남야영이 있던 하마탄(라즈돌노예)은 김정일의 출생지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일생을 다룬 KBS 특집방송에 김찬정(金贊汀)이 라즈돌노예 현지를 방문하여 당시의 흔적을 찾아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408277 <nowiki>[KBS 특별기획]</nowiki> 김정일 ①유라 킴] 2011.12.22 (23:38) 방영</li>
: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408277 <nowiki>[KBS 특별기획]</nowiki> 김정일 ①유라 킴] 2011.12.22 (23:38) 방영</li>
<li>중국어 위키백과(维基百科) [https://zh.wikipedia.org/wiki/东北抗日联军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联军)] 및 바이두 백과(百度百科) [https://baike.baidu.com/item/东北抗日联军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联军)]
{{인용문|1940年底,退入苏联境内的抗联部队(主要是冬季被日满军队循雪地脚印追缴无法立足的抗联第2路军部队),驻扎在伯力市东北75公里的维亚茨科耶村以南的黑龙江边的森林野营地。称之为北野营,约300人。<u>在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华人称蛤蟆塘)设有南野营,近200人。</u><br>
<small>海参崴 : 블라디보스톡 ; 双城子 : 보로실로프 (우수리스크)</small>}}
중국어 위키백과나 바이두 백과에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중국 학계에는 남야영이 하마탄(라즈돌노예)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의미이다. 다수의 중국인 [[88여단]] 출신자들이 그렇게 증언했다.</li>
<li>抗联余辉【4】-- 党史频道<ref name="hama">[http://dangshi.people.com.cn/n/2014/0114/c85037-24115206-4.html 抗联余辉] 北京日报 2014-01-14</ref>
{{인용문|남야영(南野营)은 블라디보스톡(海参崴)과 우수리스크(雙城子) 사이에 있는 작은 기차역(小火车站) 부근의 현지인들이 하마탕(蛤蟆塘)이라 부르는 곳에 위치했다. (南野营位于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附近,当地人称蛤蟆塘。/ 南野營位于海參崴與雙城子之間的一个小火車站附近,當地人稱蛤蟆塘。)<ref name="hama"/>}}</li>
<li>Геннадий Константинов, "[https://ru.apircenter.org/wp-content/uploads/2015/11/88_%d0%b1%d1%80%d0%b8%d0%b3%d0%b0%d0%b4%d0%b0-%d1%81-%d0%bf%d1%80%d0%b0%d0%b2%d0%ba%d0%be%d0%b9.pdf Особая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ая.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фронта]"
:(第. 88. 国. 际. 特. 别. 旅. 중국어 번역도 같이 있음.)
:Gennady Konstantinov, Special International 88th Separate Rifle Brigade of the Far Eastern Front
: - Khabarovsk: Priamurskiye Vedomosti, 2015. - 239 p. : illustration, portrait, fax; 25 cm; ISBN 978-5-8003-0350-6
: Dedicated to the 70th anniversary of the victory of the Soviet and Chinese people in World War II
: Посвящается:70-летию победы советского и китайского народов во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е
:谨以此书献给苏联和中国人民在第二次世界大战中取得胜利70周年
{{인용문|'''[pp.100~101]''' <u>另一处驻屯所设在海参崴符拉迪沃斯托克)以北26公里处的蛤蟆塘。</u> 因该地区属双城子军分区管辖,双城子俄文名称叫沃罗什洛夫城,故称沃罗什洛夫野营。沃罗什洛夫俄文字头为“B”,所以也称B野营。又因其地理位置在哈巴罗夫斯克以南,又叫南野营。这里原是苏联远东军的一个驻屯地,也是山区,山高林密,人迹罕至。南野营驻扎的主要是柴世荣、季青所率第二路军第五军部队。后又有抗联第一路军警卫旅,第二、第三方面军越境部队人员。}}</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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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수용되었던 (남)야영의 위치를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현 우수리스크) 또는 그 근교라고 기록한 문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김일성이 수용되었던 (남)야영의 위치를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현 우수리스크, 중국명 双城子) 또는 그 근교라고 기록한 문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1941년도 일본측 첩보 자료에도 소련에서 만주로 파견나온 김일성 등이 보로쉴로프(ウオロシロフ) 인근 병사에 수용되어 있었다고 나온다.  남야영의 위치가 블라디보스톡 근교의 오케안스카야로 볼 수 없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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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주① В野营, 又称南野营, 系东北抗日联军战略转移后 设在苏联<u>沃罗什诺夫(보로실로프)城郊</u>的营房。 因沃罗什诺夫的俄文字头为“В”, 故称“В野营”。}}</li>
{{인용문|주① В野营, 又称南野营, 系东北抗日联军战略转移后 设在苏联<u>沃罗什诺夫(보로실로프)城郊</u>的营房。 因沃罗什诺夫的俄文字头为“В”, 故称“В野营”。}}</li>


<li>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li>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제8권》 p.88 :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인용문|조선혁명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파일:1941-03-01 남야영 시절의 김일성과 김정숙.jpg|한장의 사진]] 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활달한 친필이 적혀있는 사진이다.<br>
{{인용문|조선혁명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파일:1941-03-01 남야영 시절의 김일성과 김정숙.jpg|한장의 사진]] 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활달한 친필이 적혀있는 사진이다.<br>
언제인가 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사진앞에서 이 사진은 자신께서 제일 아끼던 사진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언제인가 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사진앞에서 이 사진은 자신께서 제일 아끼던 사진이라고 말씀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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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사진을 찍은것은 남야영에 머물러있을 때입니다. <u>남야영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 항일련군 1로군 산하의 부대들이 초기에 사용한 워로쉴로브(Вороши́лов) 근방의 림시기지입니다. 남야영을 B야영이라고도 불렀습니다.</u><br>
내가 이 사진을 찍은것은 남야영에 머물러있을 때입니다. <u>남야영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 항일련군 1로군 산하의 부대들이 초기에 사용한 워로쉴로브(Вороши́лов) 근방의 림시기지입니다. 남야영을 B야영이라고도 불렀습니다.</u><br>
거기서 한해 겨울을 난 다음 나는 다시 만주와 국내에 나와 소부대활동을 벌렸습니다.}}</li>
거기서 한해 겨울을 난 다음 나는 다시 만주와 국내에 나와 소부대활동을 벌렸습니다. 1942년 여름부터 우리는 쏘독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급변한 정세의 요구에 맞게 동북항일련군과 쏘련군부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뭇고 북야영에 정착하였습니다. 항일투사들이 A야영이라고 부르는 하바롭스크부근에 있는 기지가 바로 북야영입니다.
 
나는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 다음 남야영으로 갔습니다.
 
우리보다 한발 먼저 남야영에 와있던 최현이 멀리까지 나와 우리를 마중해주었습니다. 그가 털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쓴 나를 눈이 떼꾼해서 쳐다보다가 웬 신사인가 했더니 김장군이였구만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최현이 어찌나 포옹을 세게 했던지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였습니다.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회의를 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무슨 회의를 그렇게 오래 했는가고 투정비슷하게 롱도 하였습니다.
 
<u>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하바롭스크에서 울라지보스또크로 통하는 철길이 있고 자그마한 철도역이 있었습니다.</u>
 
남야영에 모인 인민혁명군대원들은 자체로 병실도 더 짓고 주택도 짓고 창고며 식당이며 세면장도 지었습니다. 병실은 반토굴식이였는데 인민군대의 현재병실들처럼 침대를 2층으로 놓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그때 건설공사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병실앞에는 널직한 운동장도 있었습니다.
 
남야영에 있을 때 국내와 만주에서의 소부대활동을 준비하면서 정치학습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대부분이 그때 처음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곳에 간 다음부터는 식량걱정을 안해도 되였습니다. 끼당 200그람 정도씩 얇게 썬 빵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입에 잘 당기지 않았습니다. 입에 선 서양음식인데다가 찬도 변변치 않아서 다들 식성이 맞지 않아했습니다.}}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철길과 기차역이 나온다고 했으므로, 남야영은 철길과 기차역에서 서편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케안스카야는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 근교가 아닌 블라디보스톡 근교에 있으며 철길과 기차역 서편은 바다이므로 남야영이 블라디보스톡 근교 오케안스카야에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li>


<li>목단강(牡丹江) 영사대리(領事代理) 후루야 카츠마사(古屋克正)의 1941년 5 ~ 6월 보고서
<li>목단강(牡丹江) 영사대리(領事代理) 후루야 카츠마사(古屋克正)의 1941년 5 ~ 6월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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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1941년 5월 31일자 및 6월 11일자 보고서<br>
<li>1941년 5월 31일자 및 6월 11일자 보고서<br>
[https://www.jacar.archives.go.jp/aj/meta/image_B02032038500 「5 昭和16年4月18日から昭和16年6月1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385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A-6-2-0-2_8)(外務省外交史料館)<br>
[https://www.jacar.archives.go.jp/aj/meta/image_B02032038500 「5 昭和16年4月18日から昭和16年6月1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385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A-6-2-0-2_8)(外務省外交史料館)<br>
p.24 (5월 31일자) : 김일성, 최현(崔賢), 시세영(柴世榮), 안상길(安尙吉) 등 - 쌍성자(双城子) 병사(兵舍)에 1백 4~5십명 수용 되어 있음. 김일성은 교관으로 교련중 중국역사, 반일가(反日歌) 가르침.<br>
p.17 (5월 28일자) : 3월말에 종료된 제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대한 언급이 나옴 : 哈府匪首會議<br>
p.24 (5월 31일자) : 김일성, 최현(崔賢), 시세영(柴世榮), 안상길(安尙吉) 등 - 쌍성자(双城子, 보로쉴로프) 병사(兵舍)에 1백 4~5십명 수용 되어 있음. 김일성은 교관으로 교련중 중국역사, 반일가(反日歌) 가르침. 김일성은 부하 28명을 데리고 선발대로 약 1개월 전 입만(入滿)<br>
p.45 (6월 11일자) : 입소중인 김일성, 시세영 비단 1백 4~5십명이 보로쉴로프(ウオロシロフ)에 수용되어 있고, 김일성이 교관.</li>
p.45 (6월 11일자) : 입소중인 김일성, 시세영 비단 1백 4~5십명이 보로쉴로프(ウオロシロフ)에 수용되어 있고, 김일성이 교관.</li>
<li>1941년 6월 17일자 보고서<br>
<li>1941년 6월 17일자 보고서<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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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 16年(1941년) 5月 31日 關東軍 參謀部 調製
::昭和 16年(1941년) 5月 31日 關東軍 參謀部 調製
:p.9 : 김일성(金日成) 시세영(柴世榮) 최현(崔賢) 등 소재 판명
:p.9 : 김일성(金日成) 시세영(柴世榮) 최현(崔賢) 등 소재 판명
:::제2로군 제5군장 시세영, 제1로군 김일성 최현 비등 약 150명 무장해제 후 보로실로프(ウオロシーロフ) 모소(某所) 수용
:::제2로군 제5군장 시세영, 제1로군 김일성 최현 비등 약 150명 무장해제 후 보로실로프(ウオロシーロフ) 모소(某所) 수용. 김일성이 부하 29명을 데리고 선발대로 약 1개월 전 입만(入滿)
: [https://www.jacar.archives.go.jp/das/image/C01003690000 「匪賊情報月報の件」]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690000、昭和16年 「陸満密大日記 第9冊 1/3」(防衛省防衛研究所)
: [https://www.jacar.archives.go.jp/das/image/C01003690000 「匪賊情報月報の件」]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690000、昭和16年 「陸満密大日記 第9冊 1/3」(防衛省防衛研究所)
::五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  匪賊情報月報 第四号 判決
::五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  匪賊情報月報 第四号 判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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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 첩보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피서지로, 소련으로 넘어온 항일연군 인원들 중 부상자나 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와 요양(療養)을 하는 야영이 있었다고 한다.<ref name="okey">[https://www.jacar.archives.go.jp/das/image/B04010624300 「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0624300、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C-8-0-0-X4)(外務省外交史料館) p.15</ref>  하지만 소련으로 넘어갈 당시 김일성은 부상 당하거나 병에 걸린 것은 아니므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던 적은 없다.
일본측 첩보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피서지로, 소련으로 넘어온 항일연군 인원들 중 부상자나 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와 요양(療養)을 하는 야영이 있었다고 한다.<ref name="okey">[https://www.jacar.archives.go.jp/das/image/B04010624300 「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0624300、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C-8-0-0-X4)(外務省外交史料館) p.15</ref>  하지만 소련으로 넘어갈 당시 김일성은 부상 당하거나 병에 걸린 것은 아니므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던 적은 없다.
블라디보스톡 근교 오케안스카야에는 1933년에 처음 설립된 군용 요양소(military sanatorium)가 있고 온천(spa)도 있다고 한다. 병원시설도 같이 있으므로 이곳에 항일연군 부상자나 환자들을 수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Okeanskaya Sanatorium에서 1974년 11월 23 ~ 24일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의 군축 정상회담이 열렸다.
* [https://vladnews.ru/2021-02-18/185227/carskie_horomy Царские хоромы: приморцы обсуждают «дворец» в пригороде Владивостока] VladNews February 18, 2021
:Tsar's mansions: Primorye residents are discussing the "palace" in the suburbs of Vladivostok
* [https://www.google.com/maps/place/Okeanskiy+Voyennyy+Sanatoriy/@43.2249874,131.9883183,3a,75y,90t/data=!3m8!1e2!3m6!1sAF1QipNbTm_PWhOM_mNBaTHkStn5rfsxvvBaajuS2HmQ!2e10!3e12!6shttps:%2F%2Flh5.googleusercontent.com%2Fp%2FAF1QipNbTm_PWhOM_mNBaTHkStn5rfsxvvBaajuS2HmQ%3Dw86-h114-k-no!7i6000!8i8000!4m8!3m7!1s0x0:0xd90455119af6f13e!5m2!4m1!1i2!8m2!3d43.225186!4d131.9882869 Okeanskiy Voyennyy Sanatoriy] 구글지도 사진 모음
* [https://mil-ru.ru/dalnevostochnye-sanatorii/28-okeanskij Океанский : Все Военные санатории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 (Military Sanatoriums)
: [https://skk-dv.ru/san-okeansky/ Санаторий «Океанский»]
* [https://www.google.com/maps/place/Okeanskiy+Voyennyy+Sanatoriy/@43.2286257,131.9806909,2938m/data=!3m1!1e3!4m8!3m7!1s0x0:0xd90455119af6f13e!5m2!4m1!1i2!8m2!3d43.225186!4d131.9882869 Okeanskiy Voyennyy Sanatoriy : Океанский Военный Санаторий] 구글지도
: Okeanskaya Sanatorium은 오케안스카야 역보다는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한 정거장 더 간 [https://mapcarta.com/N6988594887 Sanatornaya (Санаторная)] 역에서 더 가깝다.
* [https://www.fordlibrarymuseum.gov/library/exhibits/vladivostok/varrival.asp The Vladivostok Summit Meeting on Arms Control] Gerald R. Ford Presidential Library & Museum
: [https://www.fordlibrarymuseum.gov/library/exhibits/vladivostok/okeanskaya.pdf Background on the Okeanskaya Sanatorium]
* [https://en.wikipedia.org/wiki/Vladivostok_Summit_Meeting_on_Arms_Control Vladivostok Summit Meeting on Arms Control] - Wikipedia
* [https://news.rambler.ru/asia/44019885-vechnyy-prezident-severnoy-korei/  Вечный президент Северной Кореи (Eternal President of North Korea) - Рамблер/новости (Rambler/news)] 2020. 4. 14.
:이 기사에는 남야영이 오케안스카야에 있은 것으로 추정하나 김일성 회고록에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철로와 기차역이 있다고 한 말과 모순되어 확실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2000년대에 북한 영사관 고용인이 역사학자들에게 블라디보스톡 교외에 있는 김일성이 거주했다는 건물에 대해 문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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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연해주 하마탄 - 1937년.jpg|일본군이 1937년 그린 지도에 나오는 남야영(南野營, B 야영)이 있었던 우수리스크(双城子) 남쪽 근교의 하마탄(蛤蟆塘, 라즈돌노예) 마을. 蛤蟆塘 위에 ラズドリノエ(라즈도리노에), 아래에 ハマタン(하마탄)이라 병기되어 있어, 당시에도 두 가지 지명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일:오케안스카야 - 1937년.jpg|일본군이 1937년 그린 지도에 나오는 블라디보스톡 북쪽 교외의 오케안스카야[オケアンスカヤ (タチイ)]
파일:오케안스카야 - 1937년.jpg|일본군이 1937년 그린 지도에 나오는 블라디보스톡 북쪽 교외의 오케안스카야.(オケヤンスカヤ)
파일:1943-05-15 특무휘보 제4호.pdf|만주국(滿洲國) 발행 「특무휘보(特務彙報)」、 제4호(第4號, 1943.05.15) pp.22~25. 1940년 10월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직후의 [[김일성]]의 행방이 나온다.
파일:1943-05-15 특무휘보 제4호.pdf|만주국(滿洲國) 발행 「특무휘보(特務彙報)」、 제4호(第4號, 1943.05.15) pp.22~25. 1940년 10월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직후의 [[김일성]]의 행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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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88여단]]이 있는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크예 마을로 이주하기 전에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증언이나 기록의 사례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하마탄(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 수용되었고, 부상병이나 환다를 수용했던 오케안스카야 야영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일성이 [[88여단]]이 있는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크예 마을로 이주하기 전에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증언이나 기록의 사례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하마탄(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 수용되었고, 부상병이나 환자들을 수용했던 오케안스카야 야영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된다.
 
<u>오케안스카야 일대는 해안가를 따라 좁은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철로와 대로가 지나고 있어 비밀을 요하는 항일연군을 수용한 부대가 있기 어렵다. 블라디보스톡에는 일본 영사관이 있어서 부대 정보도 유출되기 쉬운 곳이다.
 
다만 남야영이 있었던 하마탄(라즈돌노예)과 부상병을 수용한 요양소가 있는 오케안스카야 사이의 거리는(60 km 가량) 북야영까지의 거리(700km 가량)에 비해 얼마되지 않으므로 두 곳을 모두 통칭해서 남야영이라 불렀을 가능성은 있을 것같다.</u>
 
<ul>
<ul>
<li>《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在満朝鮮人不逞團體の策動ニ關スル件)》소화 19년(1944년)<br>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로 김일성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ref>《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1. 하바롭스크 회의</ref>
<li>《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在満朝鮮人不逞團體の策動ニ關スル件)》소화 19년(1944년)<br>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로 김일성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ref>《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1. 하바롭스크 회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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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쏘련 붉은군대의 직속산하에 있는 오께안스까야 야영소 계통 군사책임자의 지위에 있다.》
김일성은 쏘련 붉은군대의 직속산하에 있는 오께안스까야 야영소 계통 군사책임자의 지위에 있다.》
:<small>[《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在滿朝鮮人不逞團體의 策動에 關한 件,  在満朝鮮人不逞團體の策動ニ關スル件)》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 소화19년(1944년)]</small>}}</li>
:<small>[《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在滿朝鮮人不逞團體의 策動에 關한 件,  在満朝鮮人不逞團體の策動ニ關スル件)》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 소화19년(1944년)]</small>}}</li>
<li>《특고월보(特高月報)》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 11월분 p.76<br>
<li>《특고월보(特高月報)》<ref name="tk">[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kwd=%ED%8A%B9%EA%B3%A0%EC%9B%94%EB%B3%B4 「특고월보(特高月報)」], 일본 내무성 경보국 특별고등경찰(日本 内務省 警保局 特別高等警察) : 국립중앙도서관<br>[https://library.history.go.kr/library-services/search/all-collections/811515?index=2 「특고월보(特高月報)」] : 국사편찬위원회 도서관</ref>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 11월분 p.76<br>
김일성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ref name="cent">《세기와더불어 8권》 제 24 장 거족적인 반일항전으로, 5.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ref>
김일성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ref name="cent">《세기와더불어 8권》 제 24 장 거족적인 반일항전으로, 5.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ref>
{{인용문|《김일성의 활동상황<br>
{{인용문|《김일성의 활동상황<br>
<u>김일성은… 현재 쏘련 원동(遠東) 울라지보스또크 부근의 오께안스까야 야영학교에 있으면서</u> 만주에 있는 불령선인들의 획득령도에 암약중인바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미쏘합작의 비밀협정에 기초하여 중국에 있는 미공군의 만선지방공습에 호응하여 만선지대에서 만선련락의 철도파괴에 의한 군수수송을 방해하는것과 함께 민심교란공작을 전개하기 위하여 가까운 만선주요지구에 공작원을 밀파하려고 목하 준비중이라고 한다.
<u>김일성은… 현재 쏘련 원동(遠東) 울라지보스또크 부근의 오께안스까야 야영학교에 있으면서</u> 만주에 있는 불령선인들의 획득령도에 암약중인바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미쏘합작의 비밀협정에 기초하여 중국에 있는 미공군의 만선지방공습에 호응하여 만선지대에서 만선련락의 철도파괴에 의한 군수수송을 방해하는것과 함께 민심교란공작을 전개하기 위하여 가까운 만선주요지구에 공작원을 밀파하려고 목하 준비중이라고 한다.
즉 김일성은 지난 6월중순경 전후 두차례에 걸쳐 모스크바에 다녀온 외에 중경, 연안에 건너가 주중 쏘미대사관들과 중공관계기관과 여러가지 협의를 한후 장래에 대처하는 …공작밀파요원을 그전에 압록강연안지대에서 활동하였던 당시의 선만인항련비로써 철도파괴모략단 및 사상모략공작반을 재편성하고 <u>쏘련 하바롭스크부근에서 이 모략공작의 교육훈련중</u>이라고 전해지고있다.》
즉 김일성은 지난 6월중순경 전후 두차례에 걸쳐 모스크바에 다녀온 외에 중경, 연안에 건너가 주중 쏘미대사관들과 중공관계기관과 여러가지 협의를 한후 장래에 대처하는 …공작밀파요원을 그전에 압록강연안지대에서 활동하였던 당시의 선만인항련비로써 철도파괴모략단 및 사상모략공작반을 재편성하고 <u>쏘련 하바롭스크부근에서 이 모략공작의 교육훈련중</u>이라고 전해지고있다.》
:<small>[《특고월보(特高月報)》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11월분 76페지]</small>}}</li>
:<small>[《특고월보(特高月報)》<ref name="tk"/>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11월분 76페지]</small>}}
 
스칼라피노<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6593283 <nowiki>[삶과 추억]</nowiki> 스칼라피노 UC버클리 교수 별세] - 중앙일보 2011. 11. 4</ref>와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5%EC%8B%9D_(%EC%A0%95%EC%B9%98%ED%95%99%EC%9E%90) 이정식(李庭植, Chong-Sik Lee, 1931~2021)]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Communism in Korea)』에도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ref name="leecs">[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kwd=CNTS-00047899332 Scalapino, Robert A. and Lee, Chong-Sik, 『Communism in Kore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lifornia, 1972) Vol.1 p.227.</ref>
{{인용문|Kim Il-song holds the posts of political commissar of the North Manchuria Province Committe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commander of the Tenth Branch Unit of the Third Area Army of the North-east Anti-Japanese Allied Army. The Chief of the Third Area Army is Chang Shou-hsien.<ref>Chang Shou-hsien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던 장수전(張壽籛[张寿篯]) 즉 [https://zh.wikipedia.org/wiki/%E6%9D%8E%E5%85%86%E9%BA%9F 이조린(李兆麟, 1910~1946)]이다.</ref> Kim Il-song at present is at the Og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busily training insurgent Koreans for activities in Manchuria. According to information recently received, Kim is preparing to dispatch agents to important points along the Korean-Manchurian border area in order to destroy railroads in coordination with the air raids of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this same area. The destruction of railroads is intended to hamper the transport of military supplies as well as to disturb the people of the area. Air raids are being planned via secret agreement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USSR.<br>
Kim Il-song went to Moscow in mid-June 1944; he also went to Chungking and Yenan. He conferred with personnel of the American and Chinese embassies in the Soviet Union, as well as with the Chinese Communists. At that time, he received instructions regarding the above-mentioned operations.<sup>143</sup><br>
<small>143. Naimushō, Keihokyoku (Ministry of Home Affairs, Police and Security Bureau), Tokkō geppō (Special Higher Police Monthly Report), Nov. 1944, p. 76.</small>}}
특고월보에 실린 위와 같은 정보는 어떻게 입수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대부분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1944년 11월 당시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톡이 아니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88여단]]에 있었고, 그가 모스크바를 다녀온 적이 있다는 것 외의 다른 활동은 거의 사실이 아니다.</li>


<li>[[유성철|유성철(兪成哲, 1917-1995, Yu, Song-ch'ol)]]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의 증언<ref>[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78/2005551562v78.pdf 유성철(兪成哲, 1917-1995), 피바다의 비화] p.12 : 미의회도서관</ref>
<li>[[유성철|유성철(兪成哲, 1917-1995, Yu, Song-ch'ol)]]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의 증언<ref>[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78/2005551562v78.pdf 유성철(兪成哲, 1917-1995), 피바다의 비화] p.12 : 미의회도서관</ref>
{{인용문|1939-1940년 사이 50명 가량 남은 유격대원들이 일군에 쫓겨 월경하였다. <u>처음에는 여성들과 환자 부상병들을 월경시켰다.</u> 다음으로는 지도자들이 국경을 넘었다. 먼저 이들은 해삼 감옥에 있었고 다음에는 오께안스크 역촌에 있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이들은 원동전선군 사령부 정찰에 복무하게 되였으며 그들은 88여단 조직에 망라된 것이다.}}
{{인용문|1939-1940년 사이 50명 가량 남은 유격대원들이 일군에 쫓겨 월경하였다. <u>처음에는 여성들과 환자 부상병들을 월경시켰다.</u> 다음으로는 지도자들이 국경을 넘었다. 먼저 이들은 해삼 감옥에 있었고 다음에는 오께안스크 역촌에 있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이들은 원동전선군 사령부 정찰에 복무하게 되였으며 그들은 88여단 조직에 망라된 것이다.}}
유성철의 말대로 환자와 부상자들이 먼저 월경해서 소련으로 넘어가 오케안스카야 야영에 수용되어 치료와 요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okey"/></li>
유성철의 말대로 환자와 부상자들이 먼저 월경해서 소련으로 넘어가 오케안스카야 야영에 수용되어 치료와 요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okey"/><br>김찬정과의 인터뷰에서는 유성철은 김일성이 입소 직후 투옥되었다가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오케안스카야의 남야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ref name="shin"/></li>


<li>김창국(Kim, Ch'ang-guk, 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의 증언<ref>[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30/2005551562v30.pdf 김창국(Kim, Ch'ang-guk, 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 대좌] p.5 : 미의회도서관</ref>
<li>김창국(Kim, Ch'ang-guk, 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의 증언<ref>[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30/2005551562v30.pdf 김창국(Kim, Ch'ang-guk, 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 대좌] p.5 : 미의회도서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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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보로실로프 첩보대장 リユウシソ(리우시소?) 大佐
:::    7. 보로실로프 첩보대장 リユウシソ(리우시소?) 大佐
:p.15 : 2. 보로실로프 첩보부는 블라디보스톡(浦潮斯德) 부근 오케안스카야에 야영이라 칭하는 수용소 개설,  1940년말 150명 공비 수용. 하바로프스크(哈府) 적군첩보부가 설치한 뱌츠코예 북야영과 대비 남야영이라 칭함.  
:p.15 : 2. 보로실로프 첩보부는 블라디보스톡(浦潮斯德) 부근 오케안스카야에 야영이라 칭하는 수용소 개설,  1940년말 150명 공비 수용. 하바로프스크(哈府) 적군첩보부가 설치한 뱌츠코예 북야영과 대비 남야영이라 칭함.  
:: 남야영 소재지 오케안스카야는 제정(帝政)시대 피서지로 항련 입소자 중 부상 당하거나 병걸린(罹病) 사람 수용- 요양(療養)케 함. 별명 歇伏場(避暑地의 뜻) - 歇伏 : 在伏天避暑休息。
:: 남야영 소재지 오케안스카야는 제정(帝政)시대 피서지로 항련 입소자 중 부상 당하거나 병걸린(罹病) 사람 수용- 요양(療養)케 함. 별명 헐복장(歇伏場, 避暑地의 뜻) - 헐복(歇伏) : 在伏天避暑休息(무더운 날의 피서, 휴식)。
:: 1940년말 보로실로프 남야영 수용 인원 : 김일성, 시세영, 계청, 최현, 안상길..
:: 1940년말 보로실로프 남야영 수용 인원 : 김일성, 시세영, 계청, 최현, 안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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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는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ref>와다 하루키 저 / 이종석 역, [https://www.changbi.com/books/9044?board_id=6424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ref>에서 일본 문헌에 나오는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는 보로실로프 인근에 있던 남야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는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ref>와다 하루키 저 / 이종석 역, [https://www.changbi.com/books/9044?board_id=6424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ref>에서 일본 문헌에 나오는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는 보로실로프 인근에 있던 남야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용문|'''[p.246]''' : 이렇게 살펴오면 [[만주국]] 경찰 특고과의 『특무휘보(特務彙報)』 강덕 10년 (1944년) 제4호에 실린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의 기사가 주목된다.<sup>74)</sup> 이것은 43년에 체포된 항일연군 멤버의 자백에 근거를 두고 있다. <u>‘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에 대해서는 블라디보스또끄의 부근에 있다는 기술이 다른 자료에도 있다.</u><sup>75)</sup> 앞의 기사내용에 따르면 이 야영학교에 40년 11월 최초로 수용된 것이 서철(徐哲) 이하 5, 6명, 최현부대의 유삼손(柳三孫) · 최춘국(崔春國) · 황춘빈(黃春彬) 외 12, 13명 그리고 제2방면군 지도원 황광림(黃光林), 같은 경위 연장 지갑룡(池甲龍)외 부상자 5명, 시세영부대 약 10명 이었다. 12월에는 손장상·최현 이하 33명과 경위려 전 제3단 정치위원 최옥춘(崔玉春) 이하 6, 7명 그리고 계청부대 6명, 기타 15명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41년 1월이 되어서야 겨우 김일성부대 약 20명이 들어왔다. 김일성은 1940년 말에 입소했지만 소련측과 연락이 없었던 상태에서 입소했기 때문에 소련측에게 억류되어 일시적으로 보로실로프의 감옥에 있었는데, <u>주보중이 개입하여 김일성은 석방되어 하바로프스끄로 가고, 부대원은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로 온 것이라고 씌어 있다.</u>  
{{인용문|'''[p.246]''' : 이렇게 살펴오면 [[만주국]] 경찰 특고과의 『특무휘보(特務彙報)』 강덕 10년 (1944년) 제4호에 실린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의 기사가 주목된다.<sup>74)</sup> 이것은 43년에 체포된 항일연군 멤버의 자백에 근거를 두고 있다. <u>‘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에 대해서는 블라디보스또끄의 부근에 있다는 기술이 다른 자료에도 있다.</u><sup>75)</sup> 앞의 기사내용에 따르면 이 야영학교에 40년 11월 최초로 수용된 것이 서철(徐哲) 이하 5, 6명, 최현부대의 유삼손(柳三孫) · 최춘국(崔春國) · 황춘빈(黃春彬) 외 12, 13명 그리고 제2방면군 지도원 황광림(黃光林), 같은 경위 연장 지갑룡(池甲龍)외 부상자 5명, 시세영(柴世榮) 부대 약 10명 이었다. 12월에는 손장상(孫長祥)·[[최현|최현(崔賢)]] 이하 33명과 경위려 전 제3단 정치위원 최옥춘(崔玉春) 이하 6, 7명 그리고 계청(季靑) 부대 6명, 기타 15명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41년 1월이 되어서야 겨우 김일성부대 약 20명이 들어왔다. 김일성은 1940년 말에 입소했지만 소련측과 연락이 없었던 상태에서 입소했기 때문에 소련측에게 억류되어 일시적으로 보로실로프의 감옥에 있었는데, <u>주보중이 개입하여 김일성은 석방되어 하바로프스끄로 가고, 부대원은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로 온 것이라고 씌어 있다.</u>  
:74) [[:파일:1943-05-15 특무휘보 제4호.pdf|『特務彙報』 康德 10年(1944) 第4號, 22~24면]],  『增補 アルバム・謎の金日成』 (東アジア問題研究会 著, 成甲書房, 1977) 134~35면에 실린 사진에 의거함.<ref name="leemy"/><ref name="mbc"/>
:74) [[:파일:1943-05-15 특무휘보 제4호.pdf|『特務彙報』 康德 10年(1944) 第4號, 22~24면]],  『增補 アルバム・謎の金日成』 (東アジア問題研究会 著, 成甲書房, 1977) 134~35면에 실린 사진에 의거함.<ref name="leemy"/><ref name="mbc"/>
:75) 『特高月報』 昭和 19年(1944) 11月號, 76면.<ref name="cent"/>
:75) 『特高月報』 昭和 19年(1944) 11月號, 76면.<ref name="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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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유라(김정일)]]의 출생===
===[[김정일|유라(김정일)]]의 출생===
김일성이 하마탄(지금의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에 머물 때인 [[김정일 생년|1941년 2월 16일]] 장남 [[김정일|유라(김정일)]]가 태어났다.<ref name="kimji"/> 김정일이 출생한 집은 라즈돌노예 88번지로 기차역에서 800m 가량 동쪽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기차역에서 도보로 11분 정도 거리)
김일성이 하마탄(지금의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에 머물 때인 [[김정일 생년|1941년 2월 16일]] 장남 [[김정일|유라(김정일)]]가 태어났다.<ref name="kimji">[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130020920901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6-13&officeId=00020&pageNo=9&printNo=21852&publishType=00020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9면</ref> 김정일이 출생한 집은 라즈돌노예 88번지로 기차역에서 800m 가량 동쪽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기차역에서 도보로 11분 정도 거리)


[[파일:소련의 김일성 지도2.jpg|600픽셀|섬네일|가운데|[지도 2] * [https://www.google.com/maps/dir/Razdol'noye/43.5589756,131.9212777/@43.5581516,131.9149529,795m/data=!3m1!1e3!4m8!4m7!1m5!1m1!1s0x5fb3039beeb3c063:0x3197888b5f80ab5b!2m2!1d131.9130575!2d43.5569601!1m0 라즈돌노예 기차역 - Lazo가 88번지 (김정일 생가)] (구글 지도 링크)
[[파일:소련의 김일성 지도2.jpg|600픽셀|섬네일|가운데|[지도 2] * [https://www.google.com/maps/dir/Razdol'noye/43.5589756,131.9212777/@43.5581516,131.9149529,795m/data=!3m1!1e3!4m8!4m7!1m5!1m1!1s0x5fb3039beeb3c063:0x3197888b5f80ab5b!2m2!1d131.9130575!2d43.5569601!1m0 라즈돌노예 기차역 - Lazo가 88번지 (김정일 생가)] (구글 지도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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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파견===
===만주 파견===
[[김일성]]은 직속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http://dangshi.people.com.cn/n/2014/0325/c85037-24731367.html 위증민(魏拯民, 1909 ~ 1941)]을 찾아 오라는 [https://zh.wikipedia.org/wiki/%E5%91%A8%E4%BF%9D%E4%B8%AD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의 명을 받고 1941년 4월10일 남야영을 떠나 만주로 갔다가 그해 11월12일에 소련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8월 10일~9월 14일 기간에 소련에 돌아와 보고를 하고 다시 갔다.<ref>东北抗联B野营一九四一年、一九四二年被派遣各分队人员名单 (1944年10月13日), 《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甲65卷 p.297</ref><ref>중국인 대원 [http://www.cnpeople.com.cn/figure/rwzk/24218_20170808022139.html 유의권(劉義權, 刘义权, 1930~?)]은 당시 이름이 유옥전(刘玉全)으로, 김일성과 같은 날인 1940년 10월 23일 입소하였고, 김일성을 따라 1941년 4월 10일 만주로 파견되어 1941년 11둴 12일에 남야영으로 돌아옴. : [https://web.archive.org/web/20190506234828/http://blog.sina.com.cn/s/blog_616c456c0102e15t.html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ref><ref name="joins">[http://news.joins.com/article/3106307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ref> 위증민은 그가 만주로 출발도 하기 전인 1941년 3월 8일에 죽었는데, 김일성은 이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채 소련으로 돌아 온다.
[[김일성]]은 직속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http://dangshi.people.com.cn/n/2014/0325/c85037-24731367.html 위증민(魏拯民, 1909 ~ 1941)]을 찾아 오라는 [https://zh.wikipedia.org/wiki/%E5%91%A8%E4%BF%9D%E4%B8%AD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의 명을 받고 1941년 4월10일 남야영을 떠나 만주로 갔다가 그해 11월12일에 소련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8월 10일~9월 14일 기간에 소련에 돌아와 보고를 하고 다시 갔다.<ref>东北抗联B野营一九四一年、一九四二年被派遣各分队人员名单 (1944年10月13日), 《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甲65卷 p.297</ref><ref>중국인 대원 [http://www.cnpeople.com.cn/figure/rwzk/24218_20170808022139.html 유의권(劉義權, 刘义权, 1930~?)]은 당시 이름이 유옥전(刘玉全)으로, 김일성과 같은 날인 1940년 10월 23일 입소하였고, 김일성을 따라 1941년 4월 10일 만주로 파견되어 1941년 11둴 12일에 남야영으로 돌아옴. : [https://web.archive.org/web/20190506234828/http://blog.sina.com.cn/s/blog_616c456c0102e15t.html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ref><ref name="joins"/> 위증민은 그가 만주로 출발도 하기 전인 1941년 3월 8일에 죽었는데, 김일성은 이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채 소련으로 돌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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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의 김일성 지도5.jpg|[지도 5] [https://www.google.com/maps/place/%EB%9F%AC%EC%8B%9C%EC%95%84+680525+%ED%95%98%EB%B0%94%EB%A1%9C%EB%B8%8C%EC%8A%A4%ED%82%A4+%EB%B3%80%EA%B2%BD%EC%A3%BC+%EB%B1%8C%EC%B8%A0%EC%BD%94%EC%98%88/@48.7381711,135.7176968,2927m/data=!3m1!1e3!4m5!3m4!1s0x5ee531ac5be7e2a9:0xa7ed3997f215de68!8m2!3d48.733333!4d135.7166669 뱌츠코예의 88여단 터] (구글지도 링크) : 아무르강 가의 마을 옆 넓은 사각형 부지가 88여단이 있던 곳이다.
파일:소련의 김일성 지도5.jpg|[지도 5] [https://www.google.com/maps/place/%EB%9F%AC%EC%8B%9C%EC%95%84+680525+%ED%95%98%EB%B0%94%EB%A1%9C%EB%B8%8C%EC%8A%A4%ED%82%A4+%EB%B3%80%EA%B2%BD%EC%A3%BC+%EB%B1%8C%EC%B8%A0%EC%BD%94%EC%98%88/@48.7381711,135.7176968,2927m/data=!3m1!1e3!4m5!3m4!1s0x5ee531ac5be7e2a9:0xa7ed3997f215de68!8m2!3d48.733333!4d135.7166669 뱌츠코예의 88여단 터] (구글지도 링크) : 아무르강 가의 마을 옆 넓은 사각형 부지가 88여단이 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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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뱌츠코예에서 김일성이 살았던 집===
*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71418 KBS취재팀, 김정일 실제 출생지 확인 위해 러시아 비야스크 마을 촬영] KBS 뉴스 1997.03.03 (21:00)
::김정일의 출생지가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여 km 떨어진 아무르강가의 비야스크(뱌츠코예) 마을이라 하고 있으나, 잘못 안 것이다.  뱌츠코예에서는 [[김정일]]의 동생 [[김슈라]]가 태어났다.
::뱌츠코예 마을의 김일성이 살았다는 집과 묘지도 잠간 나온다.
::뱌츠코예에는 [[김일성]]이 [[88여단]] 시절 깊이 사귀었다는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고 [[황장엽]]이 증언했다는 말도 나온다.


===김일성이 소련 시절 농사를 지었다는 증언===
===김일성이 소련 시절 농사를 지었다는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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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바로프스크 || Хабаровск || Khabarovsk || 哈巴罗夫斯克(哈巴羅夫斯克), 伯力, X城 || ハバロフスク, 哈府
| 하바로프스크 || Хабаровск || Khabarovsk || 哈巴罗夫斯克(哈巴羅夫斯克), 伯力, X城 || ハバロフスク, 哈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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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뱌츠코예 || Вя́тское || Vyatskoye || 维亚茨科耶, 費雅斯克, B街 || ヴャツコエ
| 뱌츠코예 || Вя́тское || Vyatskoye || 维亚茨科耶, 費雅斯克, 费亚斯克, B街 || ヴャツコ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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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연해주 하마탄 - 1937년.jpg|보로실로프]]<br>(우수리스크) || Вороши́лов<br>(Уссури́йск) || Voroshilov<br>(Ussuriysk) || 伏罗希洛夫(伏羅希洛夫), 双城子, 雙城子,<br>B城, B火車站(보로실로프 기차역)<br>尼古里斯克(니콜리스크)<ref name="nk">[https://www.jacar.archives.go.jp/das/image/C01003085300 標題:第1軍管区月報 昭和9年12月分] p.121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085300、昭和10年 「満受大日記 別冊 第2号」(防衛省防衛研究所)」</ref> || ウオロシロフ,<br>ウオロシーロフ<br>(ウスリースク)
| [[:파일:연해주 하마탄 - 1937년.jpg|보로실로프]]<br>(우수리스크) || Вороши́лов<br>(Уссури́йск) || Voroshilov<br>(Ussuriysk) || 伏罗希洛夫(伏羅希洛夫), 双城子, 雙城子,<br>B城, B火車站(보로실로프 기차역)<br>尼古里斯克(니콜리스크)<ref name="nk">[https://www.jacar.archives.go.jp/das/image/C01003085300 標題:第1軍管区月報 昭和9年12月分] p.121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085300、昭和10年 「満受大日記 別冊 第2号」(防衛省防衛研究所)」</ref> || ウオロシロフ,<br>ウオロシーロフ<br>(ウスリース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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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연해주 하마탄 - 1937년.jpg|하마탄]]<br>(라즈돌노예) || Хаматан<br>(Раздольное) || Hamatan<br>(Razdol'noye) || 蛤蟆塘, 蛤螞塘, 虾蟆塘, 蝦蟆宕 || ハマタン<br>(ラズドリノエ)
| [[:파일:연해주 하마탄 - 1937년.jpg|하마탄]]<br>(라즈돌노예) || Хаматан<br>(Раздольное) || Hamatan<br>(Razdol'noye) || 蛤蟆塘, 蛤螞塘, 虾蟆塘, 蝦蟆宕 || ハマタン<br>(ラズドリノ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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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  Москва́ || Moscow(Moskva) || 莫斯科, 莫府 || モスクワ
| 모스크바 ||  Москва́ || Moscow(Moskva) || 莫斯科, 莫府 || モスクワ(Moskva),<br>モスコー(Mos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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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오케안스카야 - 1937년.jpg|블라디보스톡]] || Владивосто́к ||  Vladivostok || 해삼위(海蔘威), 海參崴, 符拉迪沃斯托克<br>浦潮(포조), 浦潮斯德<ref name="nk"/>, 浦鹽(포염) || ウラジオストク
| [[:파일:오케안스카야 - 1937년.jpg|블라디보스톡]] || Владивосто́к ||  Vladivostok || 해삼위(海蔘威), 海參崴, 符拉迪沃斯托克<br>浦潮(포조), 浦潮斯德<ref name="nk"/>, 浦鹽(포염) || ウラジオスト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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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탄(Хаматан)은 오늘날의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A6%88%EB%8F%8C%EB%85%B8%EC%98%88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로 [[김정일 생가|김정일의 출생지]]이다.
* 하마탄(Хаматан)은 오늘날의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A6%88%EB%8F%8C%EB%85%B8%EC%98%88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로 [[김정일 생가|김정일의 출생지]]이다.
* X城, B城, B街 등은 러시아어 지명의 첫글자를 딴 약식 표기로,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人民出版社, 1991) 등에 보인다.
* X城, B城, B街 등은 러시아어 지명의 첫글자를 딴 약식 표기로,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人民出版社, 1991) 등에 보인다.
==참고 자료==
* [http://whytimes.kr/news/view.php?idx=14341 <nowiki>[정세분석]</nowiki> "블라디보스토크는 중국 영토?" 뒤통수 맞은 러시아] whytimes 2023-03-01
:- 중국 지도에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 한자병기 명령
:- 청나라 시절 영토 회복 꿈을 가진 중국
:- 우크라전 패배로 러시아 제국 분열시 영토 회복 욕심
{{인용문|-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하이선와이(海參崴)’<br>
- 우수리스크(Ussuriysk); ‘쐉청즈(雙城子)’<br>
- 하바롭스크(Khabarovsk); ‘보리(伯力)’<br>
- 블라고베셴스크(Blagoveshchensk); ‘하이란파오(海蘭泡)’<br>
- 사할린 섬(Ostrov Sakhalin); ‘쿠예다오(庫頁島)’<br>
- 네르첸스크(Nerchinsk); ‘니부추(尼布楚)’<br>
- 니콜라옙스크(Nikolayevsk); ‘먀오졔(廟街)’<br>
- 스타노보이 산맥(Stanovoi Mts.); ‘와이씽안링(外興安嶺)’}}


==함께 보기==
==함께 보기==

2024년 2월 29일 (목) 03:1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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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관련 표제어 보기
김일성 (생애전반) 김일성 가짜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김일성 관련 원천사료 목록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김일성 진짜론 반박
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동명이인)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북한 김일성이 일본군에 쫓겨 1940년 10월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도주한 이후 소련에서의 그의 이동 경로와 체류 장소 및 1945년 해방 후 북한으로 입북하는 경로를 정리해 본다.

김일성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한 것과 같이 소련을 상대로 조선독립을 위한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인이 되어 소련이 시키는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소련의 목적에 맞는 임무를 수행할 자로 키워졌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월경 직후 체포, 수감되었던 포시예트의 감옥.

월경 후 수감 및 남야영 입영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1940년 가을 김일성이 쫓기던 만주에서의 마지막 장소는 함경북도 북단에 인접한 훈춘(琿春)이다.[1] 아내 김정숙과 부하 10여명을 데리고 훈춘에서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불법 월경한[2][3][4] 그는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Посьет, Posyet) 항으로 끌려가 수감된다.[5][6]

[8권 p.49] 나는 대원들이 있는 방에 가서 너무 답답해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동무들이 국경에서 며칠간 지체하니 섭섭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쏘련동무들이 우 리를 푸대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매개나라에는 국경통과규정이라는 것이 있 다. 그 국경출입질서에 따라 필요한 신원조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생검열을 하는 것은 전염병 보균자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최근에 만주에 있는 관동군의 세균전 연구집단이 쏘련원동에 전염병을 퍼뜨려 놓았다. 그래서 쏘련정부가 입국검사를 철저히 할 데 대한 결정까지 채택하였다고 한다. 우리앞에는 할 일도 많고 넘어야 할 시련의 고비도 많다. 우리 혁명은 이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의 날도 멀지 않다. 그러니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혁명가요를 높이 부르면서 조국해방의 그날까지 억세게 싸워나가자고 하였습니다.

그 후 쏘련사람들은 우리 동무들을 뽀비예뜨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Then, Soviet guards took us to Posiet.[7])

김일성 회고록 한글판에는 그들이 입소 후 끌려간 곳이 뽀비예뜨라 했으나, 영문판 회고록에는 Posiet로 나온다. 뽀비예뜨는 뽀시예뜨의 오기인 듯 하다.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이 1941년 1월 2일에 김일성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고[3], 1월 5일에는 김일성이 3로군 총사령이었던 장수전(張壽籛, 李兆麟)을 만나고 있으므로[8] 김일성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1941년 1월 2일~1월 5일 사이이다.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 야영, Северным лагерем, «лагерь А»)과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 하마탄(蛤蟆塘, 오늘날의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南野營, B 야영, южным лагерем, «лагерь В») 두 곳에 분산 수용된다. 북야영은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9]이, 남야영은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에 사령부를 둔 연해주군단[10]이 각각 관할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야영(B야영) 입영

이후 다른 동북항일연군 월경자들과 함께 하마탄(Хаматан, 蛤蟆塘, 蛤螞塘) 마을에 있던 남야영(南野營, B야영, южным лагерем, «лагерь В»)에 수용된다.[11] 하마탄은 오늘날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로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에서 남쪽으로 33 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12]. 우수리스크의 당시 지명은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Voroshilov)였고, В 야영(남야영)의 В는 여기서 첫글자를 따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를 쌍성자(双城子)라 칭하기도 했다. 뱌츠코예 마을에 있었던 북야영(北野營)을 A 야영이라고도 한 것은 근처를 지나는 아무르(Амур) 강의 첫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일본군이 1937년 그린 지도에 나오는 남야영(南野營, B 야영)이 있었던 우수리스크(双城子) 남쪽 근교의 하마탄(蛤蟆塘, 라즈돌노예) 마을. 蛤蟆塘 위에 ラズドリノエ(라즈도리노에), 아래에 ハマタン(하마탄)이라 병기되어 있어, 당시에도 두 가지 지명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15km 정도 북상하면 나오는 오케안스카야(Okeanskaya)에 있었던 소위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가 남야영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김일성 회고록에 남야영은 블라디보스톡 아닌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 근교라고 분명히 밝혔고,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철길이 있고, 자그만 기차역이 있다고 하였다.[13] 오케안스카야에도 철길과 기차역이 있지만 역의 서편은 바다이므로 거기에 남야영이 있었을 리는 없다. 남야영은 하마탄(라즈돌노예) 기차역의 서편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남야영이 하마탄(Хаматан, 蛤蟆塘, 蛤螞塘)에 있었다는 것은 주로 중국 문헌에 나오는데,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 88여단 출신 중국인들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 《주보중전(周保中傳)》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14]
    항일연군(抗日聯軍) 대원들은 임시로 설치된 남북야영(南北野營)에 갈라져 주둔하고 있었다. 북야영(北野營, A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북방(北方) 75㎞ 떨어진 흑룡강변(黑龍江邊, 아무르강변) 비야츠크(中國名 費雅斯克)란 마을에 설치했으며 한인(韓人)으로서는 강신태(姜信太, 강건)·이경호(李京鎬) 등이 여기에 배치되어 임시당부(臨時黨部)의 서기(書記)와 선전위원(宣傳委員)을 맡고 있었다.[註 022] 한편 남야영(南野營, B야영)은 울라지오스토크와 울라스노프(지금의 우스리스크, 中國名 雙城子) 사이의 작은 기차역부근 하마탄(蛤螞塘)이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일성(金日成)·안길(安吉)·박덕산(朴德山, 김일[金一])·김윤호(金潤浩)·최현(崔賢) 등 한인(韓人)들도 군(軍) 및 당부(黨部)의 요직을 내정(內定)받고 있었다.[註 023]

    [註 022] 劉文新·李毓卿,《周保中傳》(哈爾濱:黑龍江人民出版社, 1986) p.266
    [註 023] 위와 같음.
    '울라지오스토크'는 '블라디보스토크', '울라스노프'는 '보로실로프'의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 팽시로(彭施魯, 1916~2009)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15][16]
    병영은 산림 속에 은폐해 있었다. 흑룡강(아무르강) 가까이에 위치했다. 부근에 弗亞斯克(뱌츠코예)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서 소련 사람들은 이 야영을 弗亞斯克野營(뱌츠코예 야영)이라고 불렀다.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부근의 蛤蟆塘에도 또 하나의 야영지가 있었는데 南野營이라 했다.

    팽시로(彭施魯)는 88여단 제2대대(第二营) 제3연(第三连) 연장(连长)이었다.[17]

  • 왕명귀(王明贵, 1910~2005)의 회고록(回忆录) 《답파 흥안 만중산(踏破兴安万重山)》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18]
    1942年 6 月末,我奉张寿篯的命令,到北野营工作和训练。当时东北抗联在苏联境内有南、北两个野营,北野营亦称A野营, 驻地在伯力东北75公里处苏联境内的黑龙江江南岸费,亚斯克村附近。南野营亦称 B野营, 驻地在 乌苏里斯克(우수리스크, 双城子) 蛤蟆塘。 北野营是一处山淸水秀、土质肥沃的鱼米之乡。从 1941年起, 抗联越境人员逐渐到这两个野营里集中, 开始有 100 余人, 以后达到二三百人。
    왕명귀(王明贵)는 88여단 제3대대장(第三营长)을 지냈으므로[17] 그의 증언은 믿을만하다.
  • 남야영이 하마탄에 있었다는 남야영 출신 여성 빨치산 김선(金善)의 증언
    항일연군 여대원으로 남야영 출신인 김선(金善)은 남야영이 「하마탄」 마을에 있었고, 여기가 김정일의 출생지라 증언하였다.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9면 : 재일 한국인 논픽션 작가 金賛汀(김찬정)씨와 증언자 金善(김선) 여사
    金正日(김정일)이 출생할 당시 그의 어머니 金晶淑(김정숙)과 함께 지냈던 빨치산 출신의 金善(김선) 여사(현재 中國(중국) 延吉(연길) 거주)가 새로운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金(김)여사는 40년 10월 일본군에 쫓겨 부대원 30여명과 함께 琿春縣(훈춘현) 에서 소련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41년 4월 그곳으로 대피해온 金日成(김일성) 부부 및 제5군 柴榮世(시영세) 지휘부대와 함께 「남야영」이라고 불리는 「하마탄」의 병영에 수용됐다.

    柴榮世(시영세)는 柴世榮(시세영)의 오류임.
  • 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抗日빨치산』 (서울 : 東亞日報社, 1992) p.203 [원표제: 『パルチザン挽歌』]
    국경을 넘어 소련령으로 넘어온 빨치산들을 소련측은 하바로프스크 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 각기 병영을 만들어 수용했다. 병영은 남북으로 약 500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항일연군측은 북쪽의 병영을 북야영, 남쪽의 병영을 남야영이라고 불렀다.

    북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동북방 70km 지점에 있는 흑룡강 연안 벽촌 바츠코에 부근에 있었다. 소련측은 그 곳에 몇 개의 오두막을 세우고 텐트를 쳐서, 퇴각해온 빨치산들을 수용했다. 이 병영에는 주로 제2로군계와 제3로군계의 대원들이 수용됐다. 김정순(金貞順)과 이민(李敏), 팽시로(彭施魯) 등이 이 야영에 있었다.

    남야영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블로시로프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 하마탄 교외에 있었다. 남야영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제1로군계 생존대원들과 제2로군계의 제5군인 시세영(柴世榮)의 부대가 주보중(周保中)의 지시로 동만 주에서 활동하다 여기로 수용됐다. 여영준(呂英俊)과 김선(金善)은 이 남야영으로 들어왔다.

    김찬정(金贊汀)은 재일교포로 중국에서 김정순(金貞順), 이민(李敏), 팽시로(彭施魯), 여영준(呂英俊), 김선(金善) 등 다수의 88여단 출신자들을 인터뷰하였으므로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남야영이 하마탄(라즈돌노예)에 있었다고 한 것이다.[19][20]

    남야영이 있던 하마탄(라즈돌노예)은 김정일의 출생지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을 당시 그의 일생을 다룬 KBS 특집방송에 김찬정(金贊汀)이 라즈돌노예 현지를 방문하여 당시의 흔적을 찾아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KBS 특별기획] 김정일 ①유라 킴 2011.12.22 (23:38) 방영
  • 중국어 위키백과(维基百科)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联军) 및 바이두 백과(百度百科)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联军)
    1940年底,退入苏联境内的抗联部队(主要是冬季被日满军队循雪地脚印追缴无法立足的抗联第2路军部队),驻扎在伯力市东北75公里的维亚茨科耶村以南的黑龙江边的森林野营地。称之为北野营,约300人。在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华人称蛤蟆塘)设有南野营,近200人。
    海参崴 : 블라디보스톡 ; 双城子 : 보로실로프 (우수리스크)
    중국어 위키백과나 바이두 백과에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중국 학계에는 남야영이 하마탄(라즈돌노예)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의미이다. 다수의 중국인 88여단 출신자들이 그렇게 증언했다.
  • 抗联余辉【4】-- 党史频道[21]
    남야영(南野营)은 블라디보스톡(海参崴)과 우수리스크(雙城子) 사이에 있는 작은 기차역(小火车站) 부근의 현지인들이 하마탕(蛤蟆塘)이라 부르는 곳에 위치했다. (南野营位于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附近,当地人称蛤蟆塘。/ 南野營位于海參崴與雙城子之間的一个小火車站附近,當地人稱蛤蟆塘。)[21]
  • Геннадий Константинов, "Особая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ая.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фронта"
    (第. 88. 国. 际. 特. 别. 旅. 중국어 번역도 같이 있음.)
    Gennady Konstantinov, Special International 88th Separate Rifle Brigade of the Far Eastern Front
    - Khabarovsk: Priamurskiye Vedomosti, 2015. - 239 p. : illustration, portrait, fax; 25 cm; ISBN 978-5-8003-0350-6
    Dedicated to the 70th anniversary of the victory of the Soviet and Chinese people in World War II
    Посвящается:70-летию победы советского и китайского народов во Второй мировой войне
    谨以此书献给苏联和中国人民在第二次世界大战中取得胜利70周年
    [pp.100~101] 另一处驻屯所设在海参崴符拉迪沃斯托克)以北26公里处的蛤蟆塘。 因该地区属双城子军分区管辖,双城子俄文名称叫沃罗什洛夫城,故称沃罗什洛夫野营。沃罗什洛夫俄文字头为“B”,所以也称B野营。又因其地理位置在哈巴罗夫斯克以南,又叫南野营。这里原是苏联远东军的一个驻屯地,也是山区,山高林密,人迹罕至。南野营驻扎的主要是柴世荣、季青所率第二路军第五军部队。后又有抗联第一路军警卫旅,第二、第三方面军越境部队人员。


김일성이 수용되었던 (남)야영의 위치를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현 우수리스크, 중국명 双城子) 또는 그 근교라고 기록한 문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1941년도 일본측 첩보 자료에도 소련에서 만주로 파견나온 김일성 등이 보로쉴로프(ウオロシロフ) 인근 병사에 수용되어 있었다고 나온다. 남야영의 위치가 블라디보스톡 근교의 오케안스카야로 볼 수 없는 근거이다.

  • 周保中, 《东北杭日游击日记》 (人民出版社, 1991) p.574
    주① В野营, 又称南野营, 系东北抗日联军战略转移后 设在苏联沃罗什诺夫(보로실로프)城郊的营房。 因沃罗什诺夫的俄文字头为“В”, 故称“В野营”。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제8권》 p.88 :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조선혁명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한장의 사진 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활달한 친필이 적혀있는 사진이다.

    언제인가 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사진앞에서 이 사진은 자신께서 제일 아끼던 사진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항일혁명시절을 추억하실 때마다 김정숙동지를 자주 회고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언제나 경애하는 수령님의 마음속 깊은곳에 가장 귀중하고 친근한 동지로, 잊을수 없는 혁명전우로 살아계시였다.

    내가 이 사진을 찍은것은 남야영에 머물러있을 때입니다. 남야영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 항일련군 1로군 산하의 부대들이 초기에 사용한 워로쉴로브(Вороши́лов) 근방의 림시기지입니다. 남야영을 B야영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거기서 한해 겨울을 난 다음 나는 다시 만주와 국내에 나와 소부대활동을 벌렸습니다. 1942년 여름부터 우리는 쏘독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급변한 정세의 요구에 맞게 동북항일련군과 쏘련군부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뭇고 북야영에 정착하였습니다. 항일투사들이 A야영이라고 부르는 하바롭스크부근에 있는 기지가 바로 북야영입니다.

    나는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 다음 남야영으로 갔습니다.

    우리보다 한발 먼저 남야영에 와있던 최현이 멀리까지 나와 우리를 마중해주었습니다. 그가 털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쓴 나를 눈이 떼꾼해서 쳐다보다가 웬 신사인가 했더니 김장군이였구만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최현이 어찌나 포옹을 세게 했던지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였습니다.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회의를 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무슨 회의를 그렇게 오래 했는가고 투정비슷하게 롱도 하였습니다.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하바롭스크에서 울라지보스또크로 통하는 철길이 있고 자그마한 철도역이 있었습니다.

    남야영에 모인 인민혁명군대원들은 자체로 병실도 더 짓고 주택도 짓고 창고며 식당이며 세면장도 지었습니다. 병실은 반토굴식이였는데 인민군대의 현재병실들처럼 침대를 2층으로 놓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그때 건설공사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병실앞에는 널직한 운동장도 있었습니다.

    남야영에 있을 때 국내와 만주에서의 소부대활동을 준비하면서 정치학습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대부분이 그때 처음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곳에 간 다음부터는 식량걱정을 안해도 되였습니다. 끼당 200그람 정도씩 얇게 썬 빵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입에 잘 당기지 않았습니다. 입에 선 서양음식인데다가 찬도 변변치 않아서 다들 식성이 맞지 않아했습니다.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철길과 기차역이 나온다고 했으므로, 남야영은 철길과 기차역에서 서편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케안스카야는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 근교가 아닌 블라디보스톡 근교에 있으며 철길과 기차역 서편은 바다이므로 남야영이 블라디보스톡 근교 오케안스카야에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 목단강(牡丹江) 영사대리(領事代理) 후루야 카츠마사(古屋克正)의 1941년 5 ~ 6월 보고서
    1. 1941년 5월 31일자 및 6월 11일자 보고서
      「5 昭和16年4月18日から昭和16年6月1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385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A-6-2-0-2_8)(外務省外交史料館)
      p.17 (5월 28일자) : 3월말에 종료된 제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대한 언급이 나옴 : 哈府匪首會議
      p.24 (5월 31일자) : 김일성, 최현(崔賢), 시세영(柴世榮), 안상길(安尙吉) 등 - 쌍성자(双城子, 보로쉴로프) 병사(兵舍)에 1백 4~5십명 수용 되어 있음. 김일성은 교관으로 교련중 중국역사, 반일가(反日歌) 가르침. 김일성은 부하 28명을 데리고 선발대로 약 1개월 전 입만(入滿)
      p.45 (6월 11일자) : 입소중인 김일성, 시세영 비단 1백 4~5십명이 보로쉴로프(ウオロシロフ)에 수용되어 있고, 김일성이 교관.
    2. 1941년 6월 17일자 보고서
      「6 昭和16年6月12日から昭和16年10月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386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A-6-2-0-2_8)(外務省外交史料館)
      p.8 : 1941년 6월 17일자 보고서 - 내용이 김일성 회고록에 아래와 같이 인용되어 있다.[22]
      《김일성, 최현, 안상길, 채세영(柴世榮) 등 유력비단(有力匪團)은 본년 초두까지 전부 쏘련에 들어가 워로쉴로브(ウオロシーロフ)에서 각종 훈련을 받고 4월이래 새로운 편성과 새로운 방침밑에 차례로 만주로 들어오고 있다.》
      목단강 령사대리 후루야의 보고, [소화16년(1941년)6월 17일]
  • 「3月~5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A03032214400、匪賊情報月報-第2~4号・3月~5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国立公文書館)
    五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 匪賊情報月報 第四号 判決
    昭和 16年(1941년) 5月 31日 關東軍 參謀部 調製
    p.9 : 김일성(金日成) 시세영(柴世榮) 최현(崔賢) 등 소재 판명
    제2로군 제5군장 시세영, 제1로군 김일성 최현 비등 약 150명 무장해제 후 보로실로프(ウオロシーロフ) 모소(某所) 수용. 김일성이 부하 29명을 데리고 선발대로 약 1개월 전 입만(入滿)
    「匪賊情報月報の件」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690000、昭和16年 「陸満密大日記 第9冊 1/3」(防衛省防衛研究所)
    五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 匪賊情報月報 第四号 判決
    p.7에 동일한 내용이 나옴
  • 「六月ニ於スル 共産匪軍態勢図送付の件」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704400、昭和16年 「陸満密大日記 第10冊 5/6」(防衛省防衛研究所)
    昭和 16年(1941년) 6月 30日 關東軍 參謀部 調製
    p.3 : 六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 匪賊情報月報 第五号 判決
    三、第二路軍系匪団活溌ナル策動ナシ 「ウオロシーロフ」ニ於テ教育訓練中ナル柴世榮匪入満ヲ予想セラルルモ其確報ヲ得ス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

김일성이 소련으로 월경 후 오케안스카야 또는 오케얀스크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주장도 보인다.[23] 이는 하마탄(라즈돌노예)의 남야영과 혼동해서 잘못 알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 위 지도에 나온대로 블라디보스톡의 서쪽 해안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オケヤンスカヤ)라는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 나온다. 남야영이 있던 라즈돌노예와는 그리 멀지는 않다. [러시아어 오케안(Океан, Okean)은 영어 ocean과 같은 의미이다.]

일본측 첩보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피서지로, 소련으로 넘어온 항일연군 인원들 중 부상자나 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와 요양(療養)을 하는 야영이 있었다고 한다.[24] 하지만 소련으로 넘어갈 당시 김일성은 부상 당하거나 병에 걸린 것은 아니므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던 적은 없다.

블라디보스톡 근교 오케안스카야에는 1933년에 처음 설립된 군용 요양소(military sanatorium)가 있고 온천(spa)도 있다고 한다. 병원시설도 같이 있으므로 이곳에 항일연군 부상자나 환자들을 수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Okeanskaya Sanatorium에서 1974년 11월 23 ~ 24일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간의 군축 정상회담이 열렸다.

Tsar's mansions: Primorye residents are discussing the "palace" in the suburbs of Vladivostok
Санаторий «Океанский»
Okeanskaya Sanatorium은 오케안스카야 역보다는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한 정거장 더 간 Sanatornaya (Санаторная) 역에서 더 가깝다.
Background on the Okeanskaya Sanatorium
이 기사에는 남야영이 오케안스카야에 있은 것으로 추정하나 김일성 회고록에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철로와 기차역이 있다고 한 말과 모순되어 확실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2000년대에 북한 영사관 고용인이 역사학자들에게 블라디보스톡 교외에 있는 김일성이 거주했다는 건물에 대해 문의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88여단이 있는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크예 마을로 이주하기 전에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증언이나 기록의 사례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하마탄(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 수용되었고, 부상병이나 환자들을 수용했던 오케안스카야 야영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케안스카야 일대는 해안가를 따라 좁은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철로와 대로가 지나고 있어 비밀을 요하는 항일연군을 수용한 부대가 있기 어렵다. 블라디보스톡에는 일본 영사관이 있어서 부대 정보도 유출되기 쉬운 곳이다.

다만 남야영이 있었던 하마탄(라즈돌노예)과 부상병을 수용한 요양소가 있는 오케안스카야 사이의 거리는(60 km 가량) 북야영까지의 거리(700km 가량)에 비해 얼마되지 않으므로 두 곳을 모두 통칭해서 남야영이라 불렀을 가능성은 있을 것같다.

  • 《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在満朝鮮人不逞團體の策動ニ關スル件)》소화 19년(194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로 김일성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25]
    《현재 쏘련의 령도하에 만주에 대한 책모를 행하고있는 조선공산당의 요소는 구 제1, 제2, 제3로군의 나머지세력으로서 그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것은 김일성이다.…

    김일성은 쏘련 붉은군대의 직속산하에 있는 오께안스까야 야영소 계통 군사책임자의 지위에 있다.》

    [《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在滿朝鮮人不逞團體의 策動에 關한 件, 在満朝鮮人不逞團體の策動ニ關スル件)》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 소화19년(1944년)]
  • 《특고월보(特高月報)》[26]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 11월분 p.76
    김일성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27]
    《김일성의 활동상황

    김일성은… 현재 쏘련 원동(遠東) 울라지보스또크 부근의 오께안스까야 야영학교에 있으면서 만주에 있는 불령선인들의 획득령도에 암약중인바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미쏘합작의 비밀협정에 기초하여 중국에 있는 미공군의 만선지방공습에 호응하여 만선지대에서 만선련락의 철도파괴에 의한 군수수송을 방해하는것과 함께 민심교란공작을 전개하기 위하여 가까운 만선주요지구에 공작원을 밀파하려고 목하 준비중이라고 한다. 즉 김일성은 지난 6월중순경 전후 두차례에 걸쳐 모스크바에 다녀온 외에 중경, 연안에 건너가 주중 쏘미대사관들과 중공관계기관과 여러가지 협의를 한후 장래에 대처하는 …공작밀파요원을 그전에 압록강연안지대에서 활동하였던 당시의 선만인항련비로써 철도파괴모략단 및 사상모략공작반을 재편성하고 쏘련 하바롭스크부근에서 이 모략공작의 교육훈련중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특고월보(特高月報)》[26]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11월분 76페지]

    스칼라피노[28]이정식(李庭植, Chong-Sik Lee, 1931~2021)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Communism in Korea)』에도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29]

    Kim Il-song holds the posts of political commissar of the North Manchuria Province Committe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commander of the Tenth Branch Unit of the Third Area Army of the North-east Anti-Japanese Allied Army. The Chief of the Third Area Army is Chang Shou-hsien.[30] Kim Il-song at present is at the Og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busily training insurgent Koreans for activities in Manchuria. According to information recently received, Kim is preparing to dispatch agents to important points along the Korean-Manchurian border area in order to destroy railroads in coordination with the air raids of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this same area. The destruction of railroads is intended to hamper the transport of military supplies as well as to disturb the people of the area. Air raids are being planned via secret agreement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USSR.

    Kim Il-song went to Moscow in mid-June 1944; he also went to Chungking and Yenan. He conferred with personnel of the American and Chinese embassies in the Soviet Union, as well as with the Chinese Communists. At that time, he received instructions regarding the above-mentioned operations.143

    143. Naimushō, Keihokyoku (Ministry of Home Affairs, Police and Security Bureau), Tokkō geppō (Special Higher Police Monthly Report), Nov. 1944, p. 76.
    특고월보에 실린 위와 같은 정보는 어떻게 입수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대부분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1944년 11월 당시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톡이 아니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88여단에 있었고, 그가 모스크바를 다녀온 적이 있다는 것 외의 다른 활동은 거의 사실이 아니다.
  • 유성철(兪成哲, 1917-1995, Yu, Song-ch'ol)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의 증언[31]
    1939-1940년 사이 50명 가량 남은 유격대원들이 일군에 쫓겨 월경하였다. 처음에는 여성들과 환자 부상병들을 월경시켰다. 다음으로는 지도자들이 국경을 넘었다. 먼저 이들은 해삼 감옥에 있었고 다음에는 오께안스크 역촌에 있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이들은 원동전선군 사령부 정찰에 복무하게 되였으며 그들은 88여단 조직에 망라된 것이다.
    유성철의 말대로 환자와 부상자들이 먼저 월경해서 소련으로 넘어가 오케안스카야 야영에 수용되어 치료와 요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24]
    김찬정과의 인터뷰에서는 유성철은 김일성이 입소 직후 투옥되었다가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오케안스카야의 남야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20]
  • 김창국(Kim, Ch'ang-guk, 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의 증언[32]
    김일성 부대는 처음 국경을 월경하다가 국경수비대에게 몽땅 체포되어 블라지보스또크에 수용소에 감금되여 있다가 중공당이하 주보중 여단장이 보증을 서고 석방식혔으며, 자기 부대에 편입 식혔다. 1940년도에 아직 주보중 부대에 편입되기 전에 김일성 부대는 블라지보쓰또크 주변 오께안쓰크에서 채소 농사를 짛었다고 주보중 부대 사람들은 말하였다.
  • Young Ick Lew(류영익), BRIEF HISTORY OF KOREA —A Bird's-EyeView— (The Korea Society New York, 2000) p.24
    Chinese Communist Party. One of its leaders was Kim Sǒng-ju, later known as Kim Il-sung. Kirn's guerrilla unit, which numbered about three hundred at most, was composed mainly of Korean residents of Jiando (Kando in Korean) in southeastern Manchuria. In the early spring of 1941, it sought refuge from the Kwantung Army attacks in Vladivostok in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There, Kim and his band were incorporated into the 88th Regiment, a special task force of the Far Eastern Command of the Soviet Army. They received special training at the Okeanskaya Field School in Vladivostok and later at other similar institutions in Khabarovsk while awaiting the end of World War II.
  • Kim Il-sung (North Korea Leadership Watch, 2009/09) p.2
    Kim Il-sung liaisoned with the Soviets around 1939, and joined other members of the Chinese and Korean partisan units in the Soviet Union (via Siberia) in 1941. He was trained with other partisans (including Kim Chaek) at Okeanskaya Field Training School near Vladivostok.

아래는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 (88여단), 보로실로프 인근 남야영 외에 오케안스카야에 야영학교가 따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문헌이다.

  •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2022)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5.
    Suh, Dae-Sook, 『Kim Il Sung - The North Korean Leade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pp.48~49.
    소련은 1930년대 후반에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카자흐와 우즈벡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에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오는 중국인 및 한인 유격대원들을 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모든 연군 부대의 생존자들은 1940년부터 1941년 사이의 여러 시기에 소련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의 오케안스카야 야전학교와 니콜스크의 보로쉴로프 (Voroshilov)부대와 하바로프스크 남쪽의 삼림지대에 있는 훈련장의 세곳에서 숙영하며 훈련을 받았다.29) 한인 빨치산들은 이 세곳의 소련 훈련장에 각각 흩어져 있었으며, 김일성은 오케얀스카야 야전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는 결국 저우바오중이 이끄는 부대원을 포함하여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김광협(金光俠) 등 제2로군 및 제3로군에서 온 모든 한인들과 만났는데, 제1로군의 그의 부대원 가운데 생존자인 서철 (徐哲), 안길(安吉), 최춘국(崔春國) 등은 그와 함께 니콜스크와 불라디보스토크 가까이에 있는 남쪽 막사에 있었다.
    29) 滿洲國治安部警務司對共課、「特務彙報」、 第4號(1943.5), pp. 23-32.[33][34] ・ハバロフスク(하바로프스크)野営学校の状況、「外事月報」.

    The Soviet Union seems to have welcomed the Chinese and Korean guerrillas from Manchuria in the 1940s after they had forcibly relocated Korean residents from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to the Central Asian republics of Kazakhstan and Uzbekistan in the latter half of the 1930s. Survivors of all units of the United Army eventually retreated at various times from 1940 to 1941 into the Soviet Union. They were camped and trained in three locations: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Voroshilov Camp in Nikolsk, and a training camp in a wooded area south of Khabarovsk.29) Korean partisans were scattered in all three Soviet training camps, and Kim Il Sung was trained at Okeanskaya Field School. Kim eventually met all Koreans from the Second and Third Route Armies including those under Zhou Baozhong, among them Ch'oe Yong-gon, Kim Ch'aek, and Kim Kwang-hyop, but survivors of Kim's own group from the First Route Army, including Sở Ch'ol, An Kil, and Ch'oe Ch'un-guk, stayed with Kim in the southern camps near Nikolsk and Vladivostok.

    29) Manshūkoku, chianbu, keimushi, tokumuka, Tokumu ilo (May 1943), no. 4, pp. 23-32. "Habarosuku yaei gakko no jökyö," Gaiji geppo.
  • Kim Il Sung's Anti-Japanese Fighting The Seoul Times
    The Soviets had three training camps in Siberia - (1)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2)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3) the 88th Special Independent Guerrilla Brigade of the Soviet Army in a wooded area near Khabarovsk. The Soviets planned to use these units as vanguards of their planned attack on Manchuria and Korea.
  • Yossef Bodansky, Crisis in Korea Spi Books (July 1, 1994), pp.32~33
    The Korean communist fighters who had arrived in the USSR in 1941 were completely dedicated to the communist cause and fiercely loyal to Moscow. After putting them at first under the command of the Chinese, the Soviet Union decided to use them as the core of a Soviet-controlled Korean Army. The most promising among them were sent to higher military schools, primarily the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the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a field training site in Khabarovsk. There, they were groomed to play a future role in a Soviet dominated Korea, present-day North Korea. Kim Il-Song's wife followed him to the USSR and they had a son, Kim Jong-Il. As a child Kim Jong-Il was known by the Russian name Yura.
  • 「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0624300、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C-8-0-0-X4)(外務省外交史料館)
    p.14 : 6. 김일성, 최현, 안상길비 북만 이동 약탈
    7. 보로실로프 첩보대장 リユウシソ(리우시소?) 大佐
    p.15 : 2. 보로실로프 첩보부는 블라디보스톡(浦潮斯德) 부근 오케안스카야에 야영이라 칭하는 수용소 개설, 1940년말 150명 공비 수용. 하바로프스크(哈府) 적군첩보부가 설치한 뱌츠코예 북야영과 대비 남야영이라 칭함.
    남야영 소재지 오케안스카야는 제정(帝政)시대 피서지로 항련 입소자 중 부상 당하거나 병걸린(罹病) 사람 수용- 요양(療養)케 함. 별명 헐복장(歇伏場, 避暑地의 뜻) - 헐복(歇伏) : 在伏天避暑休息(무더운 날의 피서, 휴식)。
    1940년말 보로실로프 남야영 수용 인원 : 김일성, 시세영, 계청, 최현, 안상길..
    p.18 남북야영 합병설 : 오케안스카야 소재의 남야영과 합병. 하바로프스크(哈府) 극동군 사령부 직할. 부상환자 수명은 오케안스카야 잔류
    이 기록에서는 부상자와 환자를 수용한 블라디보스톡 부근 오케안스카야의 야영과 김일성, 시세영 등을 수용한 보르실로프의 야영 둘 다를 남야영이라 칭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는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35]에서 일본 문헌에 나오는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는 보로실로프 인근에 있던 남야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p.246] : 이렇게 살펴오면 만주국 경찰 특고과의 『특무휘보(特務彙報)』 강덕 10년 (1944년) 제4호에 실린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의 기사가 주목된다.74) 이것은 43년에 체포된 항일연군 멤버의 자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에 대해서는 블라디보스또끄의 부근에 있다는 기술이 다른 자료에도 있다.75) 앞의 기사내용에 따르면 이 야영학교에 40년 11월 최초로 수용된 것이 서철(徐哲) 이하 5, 6명, 최현부대의 유삼손(柳三孫) · 최춘국(崔春國) · 황춘빈(黃春彬) 외 12, 13명 그리고 제2방면군 지도원 황광림(黃光林), 같은 경위 연장 지갑룡(池甲龍)외 부상자 5명, 시세영(柴世榮) 부대 약 10명 이었다. 12월에는 손장상(孫長祥)·최현(崔賢) 이하 33명과 경위려 전 제3단 정치위원 최옥춘(崔玉春) 이하 6, 7명 그리고 계청(季靑) 부대 6명, 기타 15명도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41년 1월이 되어서야 겨우 김일성부대 약 20명이 들어왔다. 김일성은 1940년 말에 입소했지만 소련측과 연락이 없었던 상태에서 입소했기 때문에 소련측에게 억류되어 일시적으로 보로실로프의 감옥에 있었는데, 주보중이 개입하여 김일성은 석방되어 하바로프스끄로 가고, 부대원은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로 온 것이라고 씌어 있다.
74) 『特務彙報』 康德 10年(1944) 第4號, 22~24면, 『增補 アルバム・謎の金日成』 (東アジア問題研究会 著, 成甲書房, 1977) 134~35면에 실린 사진에 의거함.[33][34]
75) 『特高月報』 昭和 19年(1944) 11月號, 76면.[27]

강덕(康德) 10년은 1944년 아닌 1943년으로 착오임.

[p.255] : A야영과 B야영
야영지는 항일연군부대가 잇따라 입소한 이상 소련군으로서도 이것을 편의상으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남북에 두 개의 야영이 만들어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1940년 겨울부터 보로실로프(현재 우수리스끄) 근처의 철도역에서 들어간 곳에 남야영, 또다른 이름으로 러시아어인 보로실로프의 머리글자를 따서 B야영이 만들어지고, 하바로프스끄 북동쪽 70km 지점에 있는 아무르 강가의 비야쯔꼬에 마을에 북야영, 혹은 아무르강에서 따서 A야영으로 불리는 야영이 생겼다.102) 이 남야영이 일본 관헌자료에서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라고 나오는 것일 것이다.

102) 胡淑英, 『東北抗日聯軍敎導旅始末』, 「黑龍江黨史資料』 第10輯, 1987, 167, 168면, 『東北抗日聯軍鬪爭史』, 443~44면.

유라(김정일)의 출생

김일성이 하마탄(지금의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에 머물 때인 1941년 2월 16일 장남 유라(김정일)가 태어났다.[36] 김정일이 출생한 집은 라즈돌노예 88번지로 기차역에서 800m 가량 동쪽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기차역에서 도보로 11분 정도 거리)

[지도 2] * 라즈돌노예 기차역 - Lazo가 88번지 (김정일 생가) (구글 지도 링크) : 라즈돌노예 기차역에서 큰 길(Ulitsa Lazo)을 따라 동쪽으로 800 m 정도 가서 북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옴.

참고

만주 파견

김일성은 직속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 ~ 1941)을 찾아 오라는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의 명을 받고 1941년 4월10일 남야영을 떠나 만주로 갔다가 그해 11월12일에 소련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8월 10일~9월 14일 기간에 소련에 돌아와 보고를 하고 다시 갔다.[37][38][3] 위증민은 그가 만주로 출발도 하기 전인 1941년 3월 8일에 죽었는데, 김일성은 이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채 소련으로 돌아 온다.


참고

88여단 창설 및 뱌츠코예 이주

소련으로 월경해온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일부는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에서 동북쪽으로 87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있는 뱌츠코예(Вя́тское, Vyatskoe) 마을의 북야영 (北野營, A 야영, Северный лагерь, «лагерь А»)에 수용되었다.[11] A 야영의 A 는 아무르(Амур)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1942년 7월 남, 북 야영의 동북항일연군 대원 대다수를 수용한 소련군 88여단이 뱌츠코예 마을에 창설되면서 남야영의 김일성 일가도 이때 뱌츠코예로 이주하여 해방될 때까지 머문다. 남야영 근처 우수리스크와 북야영 근처 하바로프스크 사이의 거리는 667 km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흔히 김정일이 태어난 곳이 하바로프스크 (뱌츠코예)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고, 실제 출생지는 라즈돌노예이며, 뱌츠코예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44년 김일성의 둘째 아들 슈라가 뱌츠코예에서 태어났다.

[지도 3] * 우수리스크 - 하바로프스크 (구글지도 링크)

뱌츠코예와 88여단의 위치

88여단이 있던 뱌츠코예 마을은 아래 지도에서와 같이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87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있다.

오늘날 뱌츠코예 88여단 유적지는 당시 건물은 거의 다 허물어져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마을 옆의 넓은 사각형 모양 부지이다.

뱌츠코예에서 김일성이 살았던 집

김정일의 출생지가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여 km 떨어진 아무르강가의 비야스크(뱌츠코예) 마을이라 하고 있으나, 잘못 안 것이다. 뱌츠코예에서는 김정일의 동생 김슈라가 태어났다.
뱌츠코예 마을의 김일성이 살았다는 집과 묘지도 잠간 나온다.
뱌츠코예에는 김일성88여단 시절 깊이 사귀었다는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고 황장엽이 증언했다는 말도 나온다.

김일성이 소련 시절 농사를 지었다는 증언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

88여단의 김일성은 소련 극동군 장성들과 NKVD (KGB 전신)의 추천으로 1945년 9월 초 모스크바로 스탈린에게 불려가 면접시험을 보고 북한 지도자로 내정을 받는다.

참고

해방 후 입북 경로

김일성 일행이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 탔던 소련군함 푸가초프호(Pugachev 號)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여 평양에 도착한 것은 1945년 8월 26일이고, 8월말까지는 38도선 이북의 점령이 완료되었다.

이후 소련군은 스탈린이 북한 지도자로 내정한 88여단의 김일성과 그 일행을 비밀리에 입북시킨다.

김일성과 88여단 조선인 대원들 일행은 평양으로 가기 위해 뱌츠코예를 떠나 1945년 9월 중순 만주의 무단장(牡丹江, 목단강)에 도착한다.[39] (무단장 시는 위의 [지도 3]에 나와 있다.) 거기서 기차로 북한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기차 터널을 폭파하여 철로가 막힌 탓에 육로 입북을 포기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배를 타고 입북하게 된다. 이들을 태운 소련 군함 푸가초프(Пугачев, Pugachev)호가 원산항에 도착한 것은 1945년 9월 19일 오전 11시경이었다.[40][41][42]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이다.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과 두 아들 유라슈라 및 다른 대원들 가족은 이들보다 늦게 1945년 11월 25일 함경북도 웅기항으로 들어왔다.[43]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

김일성이나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연구하자면 여러 나라 문헌을 참고해야 할 경우가 많으므로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법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
지명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하바로프스크 Хабаровск Khabarovsk 哈巴罗夫斯克(哈巴羅夫斯克), 伯力, X城 ハバロフスク, 哈府
뱌츠코예 Вя́тское Vyatskoye 维亚茨科耶, 費雅斯克, 费亚斯克, B街 ヴャツコエ
보로실로프
(우수리스크)
Вороши́лов
(Уссури́йск)
Voroshilov
(Ussuriysk)
伏罗希洛夫(伏羅希洛夫), 双城子, 雙城子,
B城, B火車站(보로실로프 기차역)
尼古里斯克(니콜리스크)[44]
ウオロシロフ,
ウオロシーロフ
(ウスリースク)
하마탄
(라즈돌노예)
Хаматан
(Раздольное)
Hamatan
(Razdol'noye)
蛤蟆塘, 蛤螞塘, 虾蟆塘, 蝦蟆宕 ハマタン
(ラズドリノエ)
모스크바 Москва́ Moscow(Moskva) 莫斯科, 莫府 モスクワ(Moskva),
モスコー(Moscow)
블라디보스톡 Владивосто́к Vladivostok 해삼위(海蔘威), 海參崴, 符拉迪沃斯托克
浦潮(포조), 浦潮斯德[44], 浦鹽(포염)
ウラジオストク
오케안스카야 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奥肯斯卡亚,[45][46] 奥金斯卡娅, 奥克恩斯卡娅 オケヤンスカヤ
연해주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Primorsky Krai (Maritime Territory) 沿海州, 滨海边疆区(濱海邊疆區) 沿海州, 沿海地方
시베리아 Сиби́рь Siberia 西伯利亚(西伯利亞), 西比利亞 シベリア

참고 자료

- 중국 지도에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 한자병기 명령
- 청나라 시절 영토 회복 꿈을 가진 중국
- 우크라전 패배로 러시아 제국 분열시 영토 회복 욕심
-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하이선와이(海參崴)’

- 우수리스크(Ussuriysk); ‘쐉청즈(雙城子)’
- 하바롭스크(Khabarovsk); ‘보리(伯力)’
- 블라고베셴스크(Blagoveshchensk); ‘하이란파오(海蘭泡)’
- 사할린 섬(Ostrov Sakhalin); ‘쿠예다오(庫頁島)’
- 네르첸스크(Nerchinsk); ‘니부추(尼布楚)’
- 니콜라옙스크(Nikolayevsk); ‘먀오졔(廟街)’

- 스타노보이 산맥(Stanovoi Mts.); ‘와이씽안링(外興安嶺)’

함께 보기

각주

  1. 標題:8 昭和15年8月1日から昭和15年8月31日 p.16 : 間島省内匪賊状況週報ニ関スル件 (在琿春 領事 木内忠雄 1940년 8월 31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8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2.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3. 3.0 3.1 3.2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4.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5.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p.49 : 1940년 3월 ~ 1945년 8월 /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4. 1940년 가을
  6. 포시예트(Посьет, Posyet) 항 구글 지도
  7. With the Century; Reminiscences of Kim Il Sung, Vol.8,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Pyongyang, Korea, 1998) p.69
  8.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东北抗日游击日记)》 p.567 : 1941년 1월5일 김일성, 최석천(최용건), 계청이 장수전(張壽籛) 처에 도착해서 담화.
  9. Far Eastern Front Wikipedia
  10. Приморская группа войск (Primorsky Group of Forces) : Википедия / Maritime Group of Forces Wikipedia
  11. 11.0 11.1 Ким Ир Сен - Википедия (러시아어 wikipedia)
  12. 우수리스크 - 라즈돌노예 (구글지도)
  13.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14. 北韓政治史硏究 序論(梁好民) > Ⅱ. 東北抗日聯軍과 金日成의 人蘇 國史館論叢 第27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11-05)
  15. 彭施魯,〈在蘇聯北野營的五年〉(《黑龍江黨史資料》10, 1987)
  16. 88독립여단 2대대 3중대장 팽시로(彭施魯)의 회고록 발췌
  17. 17.0 17.1 苏联远东方面军独立第88步兵旅 维基百科
  18. 踏破兴安万重山 : 王明贵回忆录。赵亮等整理。黑龙江人民出版社 1988年1月版。 p.216
  19. 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抗日 빨치산》 (서울: 동아일보사, 1992) pp.67~80에 여영준(呂英俊), 김선(金善), 이민(李敏) 인터뷰 내용이 나옴.
  20. 20.0 20.1 김찬정, "빨치산 만가(挽歌), 김일성과 88독립여단", 『신동아』, 1992년 7월호 p.368
  21. 21.0 21.1 抗联余辉 北京日报 2014-01-14
  22. 《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1. 하바롭스크 회의
  23.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2022)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5.
  24. 24.0 24.1 「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0624300、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C-8-0-0-X4)(外務省外交史料館) p.15
  25. 《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1. 하바롭스크 회의
  26. 26.0 26.1 「특고월보(特高月報)」, 일본 내무성 경보국 특별고등경찰(日本 内務省 警保局 特別高等警察) : 국립중앙도서관
    「특고월보(特高月報)」 : 국사편찬위원회 도서관
  27. 27.0 27.1 《세기와더불어 8권》 제 24 장 거족적인 반일항전으로, 5.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28. [삶과 추억] 스칼라피노 UC버클리 교수 별세 - 중앙일보 2011. 11. 4
  29. Scalapino, Robert A. and Lee, Chong-Sik, 『Communism in Kore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lifornia, 1972) Vol.1 p.227.
  30. Chang Shou-hsien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던 장수전(張壽籛[张寿篯]) 즉 이조린(李兆麟, 1910~1946)이다.
  31. 유성철(兪成哲, 1917-1995), 피바다의 비화 p.12 : 미의회도서관
  32. 김창국(Kim, Ch'ang-guk, 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 대좌 p.5 : 미의회도서관
  33. 33.0 33.1 이 자료는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이 1977년에 먼저 소개했다 :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著、『アルバム・謎の金日成 -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成甲書房, 1977/09) pp.132~133
  34. 34.0 34.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근거자료집』, ([서울] :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2002) p.198 : 국회도서관
  35. 와다 하루키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36.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9면
  37. 东北抗联B野营一九四一年、一九四二年被派遣各分队人员名单 (1944年10月13日), 《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甲65卷 p.297
  38. 중국인 대원 유의권(劉義權, 刘义权, 1930~?)은 당시 이름이 유옥전(刘玉全)으로, 김일성과 같은 날인 1940년 10월 23일 입소하였고, 김일성을 따라 1941년 4월 10일 만주로 파견되어 1941년 11둴 12일에 남야영으로 돌아옴. :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39. 하바로프스크 - 무단장시(牡丹江市) (구글지도)
  40.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pp.18~19 :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i.e. 쓰여진]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의회도서관
  41.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42. "「蘇軍(소군)대위 金日成(김일성)」元山(원산)까지 수송" 45년 당시 蘇(소)해군중위 니주니코프 證言(증언) 1992.08.30 동아일보 4면
  43. 김정일의 청소년 시절 KBS 북한백과 2006-03-20
  44. 44.0 44.1 標題:第1軍管区月報 昭和9年12月分 p.121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085300、昭和10年 「満受大日記 別冊 第2号」(防衛省防衛研究所)」
  45. 符拉迪沃斯托克军备控制首脑会议 - Vladivostok Summit Meeting on Arms Control 百科全书 site:ewikizh.top
  46. The Vladivostok Summit Meeting on Arms Control The Gerald R. Ford Presidential Digital Libr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