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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의 김일성 지도1.jpg|950픽셀|섬네일|가운데|[지도 1] * [https://www.google.com/maps/place/Okeanskaya/@43.1121289,130.914813,9z/data=!4m5!3m4!1s0x0:0xaf35a2730a273d7d!8m2!3d43.2350027!4d132.0070943 훈춘 - 포시예트 - 라즈돌노예 및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구글지도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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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
김일성이 소련으로 월경 후 오케얀스카야 또는 오케얀스크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주장도 보인다.<ref>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5.</ref> 이는 남야영이 잘못 알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 위 지도에 나온대로 블라디보스톡의 서쪽 해안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라는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 나온다. 남야영이 있던 라즈돌노예와는 그리 멀지는 않다. 하지만 김일성이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던 적은 없다. 일설에는 이곳은 만주나 조선 쪽으로 정찰나가는 사람들의 출발지였다고 하므로, 출발전에 여기서 간단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김일성이 소련으로 월경 후 오케얀스카야 또는 오케얀스크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주장도 보인다.<ref>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5.</ref> 이는 남야영이 잘못 알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 위 지도에 나온대로 블라디보스톡의 서쪽 해안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라는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 나온다. 남야영이 있던 라즈돌노예와는 그리 멀지는 않다. 하지만 김일성이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던 적은 없다. 일설에는 이곳은 만주나 조선 쪽으로 정찰나가는 사람들의 출발지였다고 하므로, 출발전에 여기서 간단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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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
* [https://theseoultimes.com/ST/?url=/ST/db/read.php%3Fidx=1937 Kim Il Sung's Anti-Japanese Fighting] The Seoul Times
* [https://theseoultimes.com/ST/?url=/ST/db/read.php%3Fidx=1937 Kim Il Sung's Anti-Japanese Fighting] The Seoul Times
{{인용문|The Soviets had three training camps in Siberia - (1) <u>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u>, (2)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3) the 88th Special Independent Guerrilla Brigade of the Soviet Army in a wooded area near Khabarovsk. The Soviets planned to use these units as vanguards of their planned attack on Manchuria and Korea.}}
{{인용문|The Soviets had three training camps in Siberia - (1) <u>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u>, (2)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3) the 88th Special Independent Guerrilla Brigade of the Soviet Army in a wooded area near Khabarovsk. The Soviets planned to use these units as vanguards of their planned attack on Manchuria and Korea.}}

2022년 7월 11일 (월) 10:4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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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북한 김일성이 일본군에 쫓겨 1940년 10월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도주한 이후 소련에서의 그의 이동 경로와 체류 장소 및 1945년 해방 후 북한으로 입북하는 경로를 정리해 본다.

김일성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한 것과 같이 소련을 상대로 조선독립을 위한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인이 되어 소련이 시키는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소련의 목적에 맞는 임무를 수행할 자로 키워졌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월경 직후 체포, 수감되었던 포시예트의 감옥.

월경 후 수감 및 남야영 입영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1940년 가을 김일성이 쫓기던 만주에서의 마지막 장소는 함경북도 북단에 인접한 훈춘(琿春)이다.[1] 아내 김정숙과 부하 10여명을 데리고 훈춘에서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불법 월경한[2][3][4] 그는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Посьет, Posyet) 항으로 끌려가 수감된다.[5]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이 1941년 1월 2일에 김일성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고[3], 1월 5일에는 김일성이 3로군 총사령이었던 장수전(張壽籛, 李兆麟)을 만나고 있으므로[6] 김일성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1941년 1월 2일~1월 5일 사이이다.

남야영(B야영) 입영

이후 다른 동북항일연군 월경자들과 함께 하마탄(Хаматан, 虾蟆塘) 마을에 있던 남야영(南野營, B 야영, Южный лагерь, «лагерь В»)에 수용된다.[7] 하마탄은 오늘날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로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에서 남쪽으로 33 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8]. 우수리스크의 당시 지명은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Voroshilov)였고, В 야영(남야영)의 В는 여기서 첫글자를 따온 것이다.

《주보중전(周保中傳)》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9]

항일연군(抗日聯軍) 대원들은 임시로 설치된 남북야영(南北野營)에 갈라져 주둔하고 있었다. 북야영(北野營, A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북방(北方) 75㎞ 떨어진 흑룡강변(黑龍江邊, 아무르강변) 비야츠크(中國名 費雅斯克)란 마을에 설치했으며 한인(韓人)으로서는 강신태(姜信太, 강건)·이경호(李京鎬) 등이 여기에 배치되어 임시당부(臨時黨部)의 서기(書記)와 선전위원(宣傳委員)을 맡고 있었다.[註 022] 한편 남야영(南野營, B야영)은 울라지오스토크와 울라스노프(지금의 우스리스크, 中國名 雙城子) 사이의 작은 기차역부근 하마탄(蛤螞塘)이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일성(金日成)·안길(安吉)·박덕산(朴德山, 김일[金一])·김윤호(金潤浩)·최현(崔賢) 등 한인(韓人)들도 군(軍) 및 당부(黨部)의 요직을 내정(內定)받고 있었다.[註 023]

[註 022] 劉文新·李毓卿,《周保中傳》(哈爾濱:黑龍江人民出版社, 1986) p.266
[註 023] 위와 같음.
'울라지오스토크'는 '블라디보스토크', '울라스노프'는 '보로실로프'의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

김일성이 소련으로 월경 후 오케얀스카야 또는 오케얀스크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주장도 보인다.[10] 이는 남야영이 잘못 알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 위 지도에 나온대로 블라디보스톡의 서쪽 해안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라는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 나온다. 남야영이 있던 라즈돌노예와는 그리 멀지는 않다. 하지만 김일성이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던 적은 없다. 일설에는 이곳은 만주나 조선 쪽으로 정찰나가는 사람들의 출발지였다고 하므로, 출발전에 여기서 간단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The Soviets had three training camps in Siberia - (1)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2)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3) the 88th Special Independent Guerrilla Brigade of the Soviet Army in a wooded area near Khabarovsk. The Soviets planned to use these units as vanguards of their planned attack on Manchuria and Korea.
The Korean communist fighters who had arrived in the USSR in 1941 were completely dedicated to the communist cause and fiercely loyal to Moscow. After putting them at first under the command of the Chinese, the Soviet Union decided to use them as the core of a Soviet-controlled Korean Army. The most promising among them were sent to higher military schools, primarily the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the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a field training site in Khabarovsk. There, they were groomed to play a future role in a Soviet dominated Korea, present-day North Korea. Kim Il-Song's wife followed him to the USSR and they had a son, Kim Jong-Il. As a child Kim Jong-Il was known by the Russian name Yura.

유라(김정일)의 출생

김일성이 하마탄의 남야영에 머물 때인 1941년 2월 16일 장남 유라(김정일)가 태어났다. 김정일이 출생한 집은 라즈돌노예 88번지로 기차역에서 800m 가량 동쪽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기차역에서 도보로 11분 정도 거리)

[지도 2] * 라즈돌노예 기차역 - Lazo가 88번지 (김정일 생가) (구글 지도 링크) : 라즈돌노예 기차역에서 큰 길(Ulitsa Lazo)을 따라 동쪽으로 800 m 정도 가서 북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옴.

참고

만주 파견

김일성은 직속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 ~ 1941)을 찾아 오라는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의 명을 받고 1941년 4월10일 남야영을 떠나 만주로 갔다가 그해 11월12일에 소련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8월 10일~9월 14일 기간에 소련에 돌아와 보고를 하고 다시 갔다.[11][12][3] 위증민은 그가 만주로 출발도 하기 전인 1941년 3월 8일에 죽었는데, 김일성은 이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채 소련으로 돌아 온다.


참고

88여단 창설 및 뱌츠코예 이주

소련으로 월경해온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일부는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에서 동북쪽으로 87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있는 뱌츠코예(Вя́тское, Vyatskoe) 마을의 북야영 (北野營, A 야영, Северный лагерь, «лагерь А»)에 수용되었다.[7] A 야영의 A 는 아무르(Амур)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1942년 7월 남, 북 야영의 동북항일연군 대원 대다수를 수용한 소련군 88여단이 뱌츠코예 마을에 창설되면서 남야영의 김일성 일가도 이때 뱌츠코예로 이주하여 해방될 때까지 머문다. 남야영 근처 우수리스크와 북야영 근처 하바로프스크 사이의 거리는 667 km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흔히 김정일이 태어난 곳이 하바로프스크 (뱌츠코예)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고, 실제 출생지는 라즈돌노예이며, 뱌츠코예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44년 김일성의 둘째 아들 슈라가 뱌츠코예에서 태어났다.

[지도 3] * 우수리스크 - 하바로프스크 (구글지도 링크)

뱌츠코예와 88여단의 위치

88여단이 있던 뱌츠코예 마을은 아래 지도에서와 같이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87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있다.

오늘날 뱌츠코예 88여단 유적지는 당시 건물은 거의 다 허물어져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마을 옆의 넓은 사각형 모양 부지이다.

김일성이 소련 시절 농사를 지었다는 증언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

88여단의 김일성은 소련 극동군 장성들과 NKVD (KGB 전신)의 추천으로 1945년 9월 초 모스크바로 스탈린에게 불려가 면접시험을 보고 북한 지도자로 내정을 받는다.

참고

해방 후 입북 경로

김일성 일행이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 탔던 소련군함 푸가초프호(Pugachev 號)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여 평양에 도착한 것은 1945년 8월 26일이고, 8월말까지는 38도선 이북의 점령이 완료되었다.

이후 소련군은 스탈린이 북한 지도자로 내정한 88여단의 김일성과 그 일행을 비밀리에 입북시킨다.

김일성과 88여단 조선인 대원들 일행은 평양으로 가기 위해 뱌츠코예를 떠나 1945년 9월 중순 만주의 무단장(牡丹江, 목단강)에 도착한다.[13] (무단장 시는 위의 [지도 3]에 나와 있다.) 거기서 기차로 북한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기차 터널을 폭파하여 철로가 막힌 탓에 육로 입북을 포기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배를 타고 입북하게 된다. 이들을 태운 소련 군함 푸가초프(Пугачев, Pugachev)호가 원산항에 도착한 것은 1945년 9월 19일 오전 11시경이었다.[14][15][16]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이다.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과 두 아들 유라슈라 및 다른 대원들 가족은 이들보다 늦게 1945년 11월 25일 함경북도 웅기항으로 들어왔다.[17]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

김일성이나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연구하자면 여러 나라 문헌을 참고해야 할 경우가 많으므로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법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
지명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하바로프스크 Хабаровск Khabarovsk 哈巴罗夫斯克(哈巴羅夫斯克), 伯力, X城 ハバロフスク
뱌츠코예 Вя́тское Vyatskoye 维亚茨科耶, 費雅斯克, B街 ヴャツコエ
보로실로프
(우수리스크)
Вороши́лов
(Уссури́йск)
Voroshilov
(Ussuriysk)
伏罗希洛夫(伏羅希洛夫), 雙城子,
B城, B火車站(보로실로프 기차역)
尼古里斯克(니콜리스크)[18]
ウオロシロフ
(ウスリースク)
하마탄
(라즈돌노예)
Хаматан
(Раздольное)
Hamatan
(Razdol'noye)
蛤蟆塘, 蛤螞塘, 虾蟆塘, 蝦蟆宕 ハマタン
(ラズドリノエ)
모스크바 Москва́ Moscow(Moskva) 莫斯科, 莫府 モスクワ
블라디보스톡 Владивосто́к Vladivostok 해삼위(海蔘威), 海參崴, 符拉迪沃斯托克
浦潮(포조), 浦潮斯德[18], 浦鹽(포염)
ウラジオストク
오케안스카야 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オケヤンスカヤ
연해주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Primorsky Krai (Maritime Territory) 沿海州, 滨海边疆区(濱海邊疆區) 沿海州, 沿海地方
시베리아 Сиби́рь Siberia 西伯利亚(西伯利亞), 西比利亞 シベリア

함께 보기

각주

  1. 標題:8 昭和15年8月1日から昭和15年8月31日 p.16 : 間島省内匪賊状況週報ニ関スル件 (在琿春 領事 木内忠雄 1940년 8월 31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8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2.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3. 3.0 3.1 3.2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4.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5.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1940년 3월 ~ 1945년 8월 /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4. 1940년 가을
  6.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东北抗日游击日记)》 p.567 : 1941년 1월5일 김일성, 최석천(최용건), 계청이 장수전(張壽籛) 처에 도착해서 담화.
  7. 7.0 7.1 Ким Ир Сен - Википедия (러시아어 wikipedia)
  8. 우수리스크 - 라즈돌노예 (구글지도)
  9. 北韓政治史硏究 序論(梁好民) > Ⅱ. 東北抗日聯軍과 金日成의 人蘇 國史館論叢 第27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11-05)
  10.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5.
  11. 东北抗联B野营一九四一年、一九四二年被派遣各分队人员名单 (1944年10月13日), 《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甲65卷 p.297
  12. 중국인 대원 유의권(劉義權, 刘义权, 1930~?)은 당시 이름이 유옥전(刘玉全)으로, 김일성과 같은 날인 1940년 10월 23일 입소하였고, 김일성을 따라 1941년 4월 10일 만주로 파견되어 1941년 11둴 12일에 남야영으로 돌아옴. :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13. 하바로프스크 - 무단장시(牡丹江市) (구글지도)
  14.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pp.18~19 :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i.e. 쓰여진]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의회도서관
  15.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16. "「蘇軍(소군)대위 金日成(김일성)」元山(원산)까지 수송" 45년 당시 蘇(소)해군중위 니주니코프 證言(증언) 1992.08.30 동아일보 4면
  17. 김정일의 청소년 시절 KBS 북한백과 2006-03-20
  18. 18.0 18.1 標題:第1軍管区月報 昭和9年12月分 p.121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085300、昭和10年 「満受大日記 別冊 第2号」(防衛省防衛研究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