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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북한 김일성이 일본군에 쫓겨 1940년 10월 만주에서 소련으로 불법 월경하여 도주한 이후 소련에서의 그의 이동 경로와 체류 장소 및 1945년 해방 후 북한으로 입북하는 경로를 정리해 본다.

김일성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한 것과 같이 소련을 상대로 조선독립을 위한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인이 되어 소련이 시키는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소련의 목적에 맞는 임무를 수행할 자로 키워졌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월경 직후 체포, 수감되었던 포시예트의 감옥.

월경 후 수감 및 남야영 입영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1940년 가을 김일성이 쫓기던 만주에서의 마지막 장소는 함경북도 북단에 인접한 훈춘(琿春)이다.[1] 아내 김정숙과 부하 10여명을 데리고 훈춘에서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불법 월경한[2][3][4] 그는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Посьет, Posyet) 항으로 끌려가 수감된다.[5]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이 1941년 1월 2일에 김일성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고[3], 1월 5일에는 김일성이 3로군 총사령이었던 장수전(張壽籛, 李兆麟)을 만나고 있으므로[6] 김일성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1941년 1월 2일~1월 5일 사이이다.

남야영(B야영) 입영

이후 다른 동북항일연군 월경자들과 함께 하마탄(Хаматан, 蛤蟆塘, 蛤螞塘) 마을에 있던 남야영(南野營, B야영, Южный лагерь, «лагерь В»)에 수용된다.[7] 하마탄은 오늘날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로 우수리스크(Уссурийск)에서 남쪽으로 33 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8]. 우수리스크의 당시 지명은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Voroshilov)였고, В 야영(남야영)의 В는 여기서 첫글자를 따온 것이다. 중국인들은 보로실로프(우수리스크)를 쌍성자(双城子)라 칭하기도 했다.

남야영이 하마탄(Хаматан, 蛤蟆塘, 蛤螞塘)에 있었다는 것은 주로 중국 문헌에 나온다.

  • 《주보중전(周保中傳)》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9]
    항일연군(抗日聯軍) 대원들은 임시로 설치된 남북야영(南北野營)에 갈라져 주둔하고 있었다. 북야영(北野營, A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북방(北方) 75㎞ 떨어진 흑룡강변(黑龍江邊, 아무르강변) 비야츠크(中國名 費雅斯克)란 마을에 설치했으며 한인(韓人)으로서는 강신태(姜信太, 강건)·이경호(李京鎬) 등이 여기에 배치되어 임시당부(臨時黨部)의 서기(書記)와 선전위원(宣傳委員)을 맡고 있었다.[註 022] 한편 남야영(南野營, B야영)은 울라지오스토크와 울라스노프(지금의 우스리스크, 中國名 雙城子) 사이의 작은 기차역부근 하마탄(蛤螞塘)이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일성(金日成)·안길(安吉)·박덕산(朴德山, 김일[金一])·김윤호(金潤浩)·최현(崔賢) 등 한인(韓人)들도 군(軍) 및 당부(黨部)의 요직을 내정(內定)받고 있었다.[註 023]

    [註 022] 劉文新·李毓卿,《周保中傳》(哈爾濱:黑龍江人民出版社, 1986) p.266
    [註 023] 위와 같음.
    '울라지오스토크'는 '블라디보스토크', '울라스노프'는 '보로실로프'의 착오인 것으로 보인다.
  • 왕명귀(王明贵, 1910~2005)의 회고록(回忆录) 《답파 흥안 만중산(踏破兴安万重山)》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10]
    1942年 6 月末,我奉张寿鏟的命令,到北野营工作和训练。当时东北抗联在苏联境内有南、北两个野营,北野苕亦称八野营, 孽地在伯力东北75公里处苏联境内的黑龙江江南岸费,亚斯克村附近。南野营亦称 B野营, 驻地在 乌苏里斯克(우수리스크, 双城子) 蛤蟆塘。 北野营是一处山淸水秀、土质肥沃的鱼米之乡。从 1941年起,抗联越境人员逐渐到这两个野营里集中,开始有 1(3) 余人, 以后达到二三百人。
  • 중국어 위키백과(维基百科)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联军) 및 바이두 백과(百度百科) 동북항일연군(东北抗日联军)
    1940年底,退入苏联境内的抗联部队(主要是冬季被日满军队循雪地脚印追缴无法立足的抗联第2路军部队),驻扎在伯力市东北75公里的维亚茨科耶村以南的黑龙江边的森林野营地。称之为北野营,约300人。在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华人称蛤蟆塘)设有南野营,近200人。
    海参崴 : 블라디보스톡 ; 双城子 : 보로실로프 (우수리스크)
    중국어 위키백과에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대다수 중국인들은 남야영이 하마탄(라즈돌노예)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 抗联余辉【4】-- 党史频道[11]
    남야영(南野营)은 블라디보스톡(海参崴)과 우수리스크(雙城子) 사이에 있는 작은 기차역(小火车站) 부근의 현지인들이 하마탕(蛤蟆塘)이라 부르는 곳에 위치했다. (南野营位于海参崴与双城子之间的一个小火车站附近,当地人称蛤蟆塘。/ 南野營位于海參崴與雙城子之間的一个小火車站附近,當地人稱蛤蟆塘。)[11]
  • "김정일(金正日) 출생지는 소(蘇) 「하마탄」 마을"[12]
    항일연군 여대원 출신 김선(金善)은 남야영이 「하마탄」 마을에 있었고, 여기가 김정일의 출생지라 증언.
    金正日(김정일)이 출생할 당시 그의 어머니 金晶淑(김정숙)과 함께 지냈던 빨치산 출신의 金善(김선) 여사(현재 中國(중국) 延吉(연길) 거주)가 새로운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金(김)여사는 40년 10월 일본군에 쫓겨 부대원 30여명과 함께 琿春縣(훈춘현) 에서 소련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41년 4월 그곳으로 대피해온 金日成(김일성) 부부 및 제5군 柴榮世(시영세) 지휘부대와 함께 「남야영」이라고 불리는 「하마탄」의 병영에 수용됐다.

    柴榮世(시영세)는 柴世榮(시세영)의 오류임.
  • 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抗日빨치산』 (서울 : 東亞日報社, 1992) p.203 [원표제: 『パルチザン挽歌』]
    국경을 넘어 소련령으로 넘어온 빨치산들을 소련측은 하바로프스크 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 각기 병영을 만들어 수용했다. 병영은 남북으로 약 500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항일연군측은 북쪽의 병영을 북야영, 남쪽의 병영을 남야영이라고 불렀다.

    북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동북방 70km 지점에 있는 흑룡강 연안 벽촌 바츠코에 부근에 있었다. 소련측은 그 곳에 몇 개의 오두막을 세우고 텐트를 쳐서, 퇴각해온 빨치산들을 수용했다. 이 병영에는 주로 제2로군계와 제3로군계의 대원들이 수용됐다. 김정순(金貞順)과 이민(李敏), 팽시로(彭施魯) 등이 이 야영에 있었다.

    남야영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블로시로프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 하마탄 교외에 있었다. 남야영에는 김일성을 포함한 제1로군계 생존대원들과 제2로군계의 제5군인 시세영(柴世榮)의 부대가 주보중(周保中)의 지시로 동만 주에서 활동하다 여기로 수용됐다. 여영준(呂英俊)과 김선(金善)은 이 남야영으로 들어왔다.


김일성이 수용되었던 (남)야영의 위치를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 또는 그 근교라고 기록한 문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 周保中, 《东北杭日游击日记》 (人民出版社, 1991) p.574
    주① В野营, 又称南野营, 系东北抗日联军战略转移后 设在苏联沃罗什诺夫(보로실로프)城郊的营房。 因沃罗什诺夫的俄文字头为“В”, 故称“В野营”。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조선혁명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한장의 사진 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활달한 친필이 적혀있는 사진이다.

    언제인가 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사진앞에서 이 사진은 자신께서 제일 아끼던 사진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항일혁명시절을 추억하실 때마다 김정숙동지를 자주 회고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언제나 경애하는 수령님의 마음속 깊은곳에 가장 귀중하고 친근한 동지로, 잊을수 없는 혁명전우로 살아계시였다.

    내가 이 사진을 찍은것은 남야영에 머물러있을 때입니다. 남야영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 항일련군 1로군 산하의 부대들이 초기에 사용한 워로쉴로브(Вороши́лов) 근방의 림시기지입니다. 남야영을 B야영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거기서 한해 겨울을 난 다음 나는 다시 만주와 국내에 나와 소부대활동을 벌렸습니다.
  • 목단강(牡丹江) 영사대리(領事代理) 후루야 카츠마사(古屋克正)의 1941년 5 ~ 6월 보고서
    1. 1941년 5월 31일자 및 6월 11일자 보고서
      「5 昭和16年4月18日から昭和16年6月1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385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A-6-2-0-2_8)(外務省外交史料館)
      p.24 (5월 31일자) : 김일성, 최현(崔賢), 시세영(柴世榮), 안상길(安尙吉) 등 - 쌍성자(双城子) 병사(兵舍)에 1백 4~5십명 수용 되어 있음. 김일성은 교관으로 교련중 중국역사, 반일가(反日歌) 가르침.
      p.45 (6월 11일자) : 입소중인 김일성, 시세영 비단 1백 4~5십명이 보로쉴로프(ウオロシロフ)에 수용되어 있고, 김일성이 교관.
    2. 1941년 6월 17일자 보고서
      「6 昭和16年6月12日から昭和16年10月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386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A-6-2-0-2_8)(外務省外交史料館)
      p.8 : 1941년 6월 17일자 보고서 - 내용이 김일성 회고록에 아래와 같이 인용되어 있다.[13]
      《김일성, 최현, 안상길, 채세영(柴世榮) 등 유력비단(有力匪團)은 본년 초두까지 전부 쏘련에 들어가 워로쉴로브(ウオロシーロフ)에서 각종 훈련을 받고 4월이래 새로운 편성과 새로운 방침밑에 차례로 만주로 들어오고 있다.》
      목단강 령사대리 후루야의 보고, [소화16년(1941년)6월 17일]
  • 「3月~5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A03032214400、匪賊情報月報-第2~4号・3月~5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国立公文書館)
    五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 匪賊情報月報 第四号 判決
    昭和 16年(1941년) 5月 31日 關東軍 參謀部 調製
    p.9 : 김일성(金日成) 시세영(柴世榮) 최현(崔賢) 등 소재 판명
    제2로군 제5군장 시세영, 제1로군 김일성 최현 비등 약 150명 무장해제 후 보로실로프(ウオロシーロフ) 모소(某所) 수용
    「匪賊情報月報の件」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690000、昭和16年 「陸満密大日記 第9冊 1/3」(防衛省防衛研究所)
    五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 匪賊情報月報 第四号 判決
    p.7에 동일한 내용이 나옴
  • 「六月ニ於スル 共産匪軍態勢図送付の件」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704400、昭和16年 「陸満密大日記 第10冊 5/6」(防衛省防衛研究所)
    昭和 16年(1941년) 6月 30日 關東軍 參謀部 調製
    p.3 : 六月ニ於ケル共産匪軍態勢要図 / 匪賊情報月報 第五号 判決
    三、第二路軍系匪団活溌ナル策動ナシ 「ウオロシーロフ」ニ於テ教育訓練中ナル柴世榮匪入満ヲ予想セラルルモ其確報ヲ得ス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

김일성이 소련으로 월경 후 오케안스카야 또는 오케얀스크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주장도 보인다.[14] 이는 하마탄(라즈돌노예)의 남야영과 혼동해서 잘못 알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 위 지도에 나온대로 블라디보스톡의 서쪽 해안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オケヤンスカヤ)라는 기차역이 있는 마을이 나온다. 남야영이 있던 라즈돌노예와는 그리 멀지는 않다.

일본측 첩보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피서지로, 소련으로 넘어온 항일연군 인원들 중 부상자나 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와 요양(療養)을 하는 야영이 있었다고 한다.[15] 하지만 소련으로 넘어갈 당시 김일성은 부상 당하거나 병에 걸린 것은 아니므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던 적은 없다.

김일성이 88여단이 있는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크예 마을로 이주하기 전에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에 있었다는 증언이나 기록의 사례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 《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在満朝鮮人不逞團體の策動ニ關スル件)》소화 19년(194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로 김일성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16]
    《현재 쏘련의 령도하에 만주에 대한 책모를 행하고있는 조선공산당의 요소는 구 제1, 제2, 제3로군의 나머지세력으로서 그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것은 김일성이다.…

    김일성은 쏘련 붉은군대의 직속산하에 있는 오께안스까야 야영소 계통 군사책임자의 지위에 있다.》

    [《재만조선인불령단체의 책동에 관한 건(在滿朝鮮人不逞團體의 策動에 關한 件, 在満朝鮮人不逞團體の策動ニ關スル件)》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도 경찰부장에게 보낸 서류, 소화19년(1944년)]
  • 《특고월보(特高月報)》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 11월분 p.76
    김일성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17]
    《김일성의 활동상황

    김일성은… 현재 쏘련원동 울라지보스또크부근의 오께안스까야 야영학교에 있으면서 만주에 있는 불령선인들의 획득령도에 암약중인바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미쏘합작의 비밀협정에 기초하여 중국에 있는 미공군의 만선지방공습에 호응하여 만선지대에서 만선련락의 철도파괴에 의한 군수수송을 방해하는것과 함께 민심교란공작을 전개하기 위하여 가까운 만선주요지구에 공작원을 밀파하려고 목하 준비중이라고 한다. 즉 김일성은 지난 6월중순경 전후 두차례에 걸쳐 모스크바에 다녀온 외에 중경, 연안에 건너가 주중 쏘미대사관들과 중공관계기관과 여러가지 협의를 한후 장래에 대처하는 …공작밀파요원을 그전에 압록강연안지대에서 활동하였던 당시의 선만인항련비로써 철도파괴모략단 및 사상모략공작반을 재편성하고 쏘련 하바롭스크부근에서 이 모략공작의 교육훈련중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특고월보(特高月報)》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 소화19년(1944년)11월분 76페지]
  • 유성철(兪成哲, 1917-1995, Yu, Song-ch'ol)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의 증언[18]
    1939-1940년 사이 50명 가량 남은 유격대원들이 일군에 쫓겨 월경하였다. 처음에는 여성들과 환자 부상병들을 월경시켰다. 다음으로는 지도자들이 국경을 넘었다. 먼저 이들은 해삼 감옥에 있었고 다음에는 오께안스크 역촌에 있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이들은 원동전선군 사령부 정찰에 복무하게 되였으며 그들은 88여단 조직에 망라된 것이다.
    유성철의 말대로 환자와 부상자들이 먼저 월경해서 소련으로 넘어가 오케안스카야 야영에 수용되어 치료와 요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15]
  • 김창국(Kim, Ch'ang-guk, 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의 증언[19]
    김일성 부대는 처음 국경을 월경하다가 국경수비대에게 몽땅 체포되어 블라지보스또크에 수용소에 감금되여 있다가 중공당이하 주보중 여단장이 보증을 서고 석방식혔으며, 자기 부대에 편입 식혔다. 1940년도에 아직 주보중 부대에 편입되기 전에 김일성 부대는 블라지보쓰또크 주변 오께안쓰크에서 채소 농사를 짛었다고 주보중 부대 사람들은 말하였다.
  • Young Ick Lew(류영익), BRIEF HISTORY OF KOREA —A Bird's-EyeView— (The Korea Society New York, 2000) p.24
    Chinese Communist Party. One of its leaders was Kim Sǒng-ju, later known as Kim Il-sung. Kirn's guerrilla unit, which numbered about three hundred at most, was composed mainly of Korean residents of Jiando (Kando in Korean) in southeastern Manchuria. In the early spring of 1941, it sought refuge from the Kwantung Army attacks in Vladivostok in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There, Kim and his band were incorporated into the 88th Regiment, a special task force of the Far Eastern Command of the Soviet Army. They received special training at the Okeanskaya Field School in Vladivostok and later at other similar institutions in Khabarovsk while awaiting the end of World War II.
  • Kim Il-sung (North Korea Leadership Watch, 2009/09) p.2
    Kim Il-sung liaisoned with the Soviets around 1939, and joined other members of the Chinese and Korean partisan units in the Soviet Union (via Siberia) in 1941. He was trained with other partisans (including Kim Chaek) at Okeanskaya Field Training School near Vladivostok.

아래는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 (88여단), 보로실로프 인근 남야영 외에 오케안스카야에 야영학교가 따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문헌이다.

  •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5.
    Suh, Dae-Sook, 『Kim Il Sung - The North Korean Leade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pp.48~49.
    소련은 1930년대 후반에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카자흐와 우즈벡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킨 뒤에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오는 중국인 및 한인 유격대원들을 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모든 연군 부대의 생존자들은 1940년부터 1941년 사이의 여러 시기에 소련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의 오케안스카야 야전학교와 니콜스크의 보로쉴로프 (Voroshilov)부대와 하바로프스크 남쪽의 삼림지대에 있는 훈련장의 세곳에서 숙영하며 훈련을 받았다.29) 한인 빨치산들은 이 세곳의 소련 훈련장에 각각 흩어져 있었으며, 김일성은 오케얀스카야 야전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는 결국 저우바오중이 이끄는 부대원을 포함하여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김광협(金光俠) 등 제2로군 및 제3로군에서 온 모든 한인들과 만났는데, 제1로군의 그의 부대원 가운데 생존자인 서철 (徐哲), 안길(安吉), 최춘 국(崔春國) 등은 그외 함께 니콜스크와 불라디보스토크 가까이에 있는 남쪽 막사에 있었다.
    29) 滿洲國治安部警務司對共課、「特務彙報」、 第4號(1943.5), pp. 23-32.[20][21] ・ハバロフスク(하바로프스크)野営学校の状況、「外事月報」.

    The Soviet Union seems to have welcomed the Chinese and Korean guerrillas from Manchuria in the 1940s after they had forcibly relocated Korean residents from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to the Central Asian republics of Kazakhstan and Uzbekistan in the latter half of the 1930s. Survivors of all units of the United Army eventually retreated at various times from 1940 to 1941 into the Soviet Union. They were camped and trained in three locations: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Voroshilov Camp in Nikolsk, and a training camp in a wooded area south of Khabarovsk.29) Korean partisans were scattered in all three Soviet training camps, and Kim Il Sung was trained at Okeanskaya Field School. Kim eventually met all Koreans from the Second and Third Route Armies including those under Zhou Baozhong, among them Ch'oe Yong-gon, Kim Ch'aek, and Kim Kwang-hyop, but survivors of Kim's own group from the First Route Army, including Sở Ch'ol, An Kil, and Ch'oe Ch'un-guk, stayed with Kim in the southern camps near Nikolsk and Vladivostok.

    29) Manshūkoku, chianbu, keimushi, tokumuka, Tokumu ilo (May 1943), no. 4, pp. 23-32. "Habarosuku yaei gakko no jökyö," Gaiji geppo.
  • Kim Il Sung's Anti-Japanese Fighting The Seoul Times
    The Soviets had three training camps in Siberia - (1)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2)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3) the 88th Special Independent Guerrilla Brigade of the Soviet Army in a wooded area near Khabarovsk. The Soviets planned to use these units as vanguards of their planned attack on Manchuria and Korea.
  • Yossef Bodansky, Crisis in Korea Spi Books (July 1, 1994), pp.32~33
    The Korean communist fighters who had arrived in the USSR in 1941 were completely dedicated to the communist cause and fiercely loyal to Moscow. After putting them at first under the command of the Chinese, the Soviet Union decided to use them as the core of a Soviet-controlled Korean Army. The most promising among them were sent to higher military schools, primarily the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the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a field training site in Khabarovsk. There, they were groomed to play a future role in a Soviet dominated Korea, present-day North Korea. Kim Il-Song's wife followed him to the USSR and they had a son, Kim Jong-Il. As a child Kim Jong-Il was known by the Russian name Yura.
  • 「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0624300、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C-8-0-0-X4)(外務省外交史料館)
    p.14 : 6. 김일성, 최현, 안상길비 북만 이동 약탈
    7. 보로실로프 첩보대장 リユウシソ(리우시소?) 大佐
    p.15 : 2. 보로실로프 첩보부는 블라디보스톡(浦潮斯德) 부근 오케안스카야에 야영이라 칭하는 수용소 개설, 1940년말 150명 공비 수용. 하바로프스크(哈府) 적군첩보부가 설치한 뱌츠코예 북야영과 대비 남야영이라 칭함.
    남야영 소재지 오케안스카야는 제정(帝政)시대 피서지로 항련 입소자 중 부상 당하거나 병걸린(罹病) 사람 수용- 요양(療養)케 함. 별명 歇伏場(避暑地의 뜻) - 歇伏 : 在伏天避暑休息。
    1940년말 보로실로프 남야영 수용 인원 : 김일성, 시세영, 계청, 최현, 안상길..
    p.18 남북야영 합병설 : 오케안스카야 소재의 남야영과 합병. 하바로프스크(哈府) 극동군 사령부 직할. 부상환자 수명은 오케안스카야 잔류
    이 기록에서는 부상자와 환자를 수용한 블라디보스톡 부근 오케안스카야의 야영과 김일성, 시세영 등을 수용한 보르실로프의 야영 둘 다를 남야영이라 칭하고 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는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22]에서 일본 문헌에 나오는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는 보로실로프 인근에 있던 남야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p.246] : 이렇게 살펴오면 만주국 경찰 특고과의 『특무휘보(特務彙報)』 강덕 10년 (1944년) 제4호에 실린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의 기사가 주목된다.74) 이것은 43년에 체포된 항일연군 멤버의 자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에 대해서는 블라디보스또끄의 부근에 있다는 기술이 다른 자료에도 있다.75) 앞의 기사내용에 따르면 이 야영학교에 40년 11월 최초 로 수용된 것이 서철 이하 5, 6명, 최현부대의 유삼손(柳三孫) · 최춘국(崔春國) · 황춘빈(黃春彬) 외 12, 13명 그리고 제2방면군 지도원 황광림(黃光 林), 같은 경위 연장 지갑룡(池甲龍)외 부상자 5명, 시세영부대 약 10명 이었다. 12월에는 손장상·최현 이하 33명과 경위려 전 제3단 정치위원 최옥춘(崔玉春) 이하 6, 7명 그리고 계청부대 6명, 기타 15명도 들어와 있었 다. 그리고 41년 1월이 되어서야 겨우 김일성부대 약 20명이 들어왔다.
74) 『特務彙報』 康德 10年(1944) 第4號, 22~24면, 『增補 アルバム・謎の金日成』 (東アジア問題研究会 著, 成甲書房, 1977) 134~35면에 실린 사진에 의거함.[20][21]
75) 『特高月報』 昭和 19年(1944) 11月號, 76면.[17]

강덕(康德) 10년은 1944년 아닌 1943년으로 착오임.

[p.255] : A야영과 B야영
야영지는 항일연군부대가 잇따라 입소한 이상 소련군으로서도 이것을 편의상으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남북에 두 개의 야영이 만들어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1940년 겨울부터 보로실로프(현재 우수리스끄) 근처의 철도역에서 들어간 곳에 남야영, 또다른 이름으로 러시아어인 보로실로프의 머리글자를 따서 B야영이 만들어지고, 하바로프스끄 북동쪽 70km 지점에 있는 아무르 강가의 비야쯔꼬에 마을에 북야영, 혹은 아무르강에서 따서 A야영으로 불리는 야영이 생겼다.102) 이 남야영이 일본 관헌자료에서 ‘오께얀스까야 야영학교'라고 나오는 것일 것이다.

102) 胡淑英, 『東北抗日聯軍敎導旅始末』, 「黑龍江黨史資料』 第10輯, 1987, 167, 168면, 『東北抗日聯軍鬪爭史』, 443~44면.

유라(김정일)의 출생

김일성이 하마탄(지금의 라즈돌노예) 마을의 남야영에 머물 때인 1941년 2월 16일 장남 유라(김정일)가 태어났다.[12] 김정일이 출생한 집은 라즈돌노예 88번지로 기차역에서 800m 가량 동쪽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기차역에서 도보로 11분 정도 거리)

[지도 2] * 라즈돌노예 기차역 - Lazo가 88번지 (김정일 생가) (구글 지도 링크) : 라즈돌노예 기차역에서 큰 길(Ulitsa Lazo)을 따라 동쪽으로 800 m 정도 가서 북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옴.

참고

만주 파견

김일성은 직속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 ~ 1941)을 찾아 오라는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의 명을 받고 1941년 4월10일 남야영을 떠나 만주로 갔다가 그해 11월12일에 소련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8월 10일~9월 14일 기간에 소련에 돌아와 보고를 하고 다시 갔다.[23][24][3] 위증민은 그가 만주로 출발도 하기 전인 1941년 3월 8일에 죽었는데, 김일성은 이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채 소련으로 돌아 온다.


참고

88여단 창설 및 뱌츠코예 이주

소련으로 월경해온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일부는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에서 동북쪽으로 87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있는 뱌츠코예(Вя́тское, Vyatskoe) 마을의 북야영 (北野營, A 야영, Северный лагерь, «лагерь А»)에 수용되었다.[7] A 야영의 A 는 아무르(Амур)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1942년 7월 남, 북 야영의 동북항일연군 대원 대다수를 수용한 소련군 88여단이 뱌츠코예 마을에 창설되면서 남야영의 김일성 일가도 이때 뱌츠코예로 이주하여 해방될 때까지 머문다. 남야영 근처 우수리스크와 북야영 근처 하바로프스크 사이의 거리는 667 km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흔히 김정일이 태어난 곳이 하바로프스크 (뱌츠코예)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고, 실제 출생지는 라즈돌노예이며, 뱌츠코예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44년 김일성의 둘째 아들 슈라가 뱌츠코예에서 태어났다.

[지도 3] * 우수리스크 - 하바로프스크 (구글지도 링크)

뱌츠코예와 88여단의 위치

88여단이 있던 뱌츠코예 마을은 아래 지도에서와 같이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87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에 있다.

오늘날 뱌츠코예 88여단 유적지는 당시 건물은 거의 다 허물어져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마을 옆의 넓은 사각형 모양 부지이다.

김일성이 소련 시절 농사를 지었다는 증언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

88여단의 김일성은 소련 극동군 장성들과 NKVD (KGB 전신)의 추천으로 1945년 9월 초 모스크바로 스탈린에게 불려가 면접시험을 보고 북한 지도자로 내정을 받는다.

참고

해방 후 입북 경로

김일성 일행이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 탔던 소련군함 푸가초프호(Pugachev 號)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여 평양에 도착한 것은 1945년 8월 26일이고, 8월말까지는 38도선 이북의 점령이 완료되었다.

이후 소련군은 스탈린이 북한 지도자로 내정한 88여단의 김일성과 그 일행을 비밀리에 입북시킨다.

김일성과 88여단 조선인 대원들 일행은 평양으로 가기 위해 뱌츠코예를 떠나 1945년 9월 중순 만주의 무단장(牡丹江, 목단강)에 도착한다.[25] (무단장 시는 위의 [지도 3]에 나와 있다.) 거기서 기차로 북한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기차 터널을 폭파하여 철로가 막힌 탓에 육로 입북을 포기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배를 타고 입북하게 된다. 이들을 태운 소련 군함 푸가초프(Пугачев, Pugachev)호가 원산항에 도착한 것은 1945년 9월 19일 오전 11시경이었다.[26][27][28]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이다.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과 두 아들 유라슈라 및 다른 대원들 가족은 이들보다 늦게 1945년 11월 25일 함경북도 웅기항으로 들어왔다.[29]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

김일성이나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연구하자면 여러 나라 문헌을 참고해야 할 경우가 많으므로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법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소련 지명의 각 언어별 표기
지명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하바로프스크 Хабаровск Khabarovsk 哈巴罗夫斯克(哈巴羅夫斯克), 伯力, X城 ハバロフスク, 哈府
뱌츠코예 Вя́тское Vyatskoye 维亚茨科耶, 費雅斯克, B街 ヴャツコエ
보로실로프
(우수리스크)
Вороши́лов
(Уссури́йск)
Voroshilov
(Ussuriysk)
伏罗希洛夫(伏羅希洛夫), 双城子, 雙城子,
B城, B火車站(보로실로프 기차역)
尼古里斯克(니콜리스크)[30]
ウオロシロフ 또는 ウオロシーロフ
(ウスリースク)
하마탄
(라즈돌노예)
Хаматан
(Раздольное)
Hamatan
(Razdol'noye)
蛤蟆塘, 蛤螞塘, 虾蟆塘, 蝦蟆宕 ハマタン
(ラズドリノエ)
모스크바 Москва́ Moscow(Moskva) 莫斯科, 莫府 モスクワ
블라디보스톡 Владивосто́к Vladivostok 해삼위(海蔘威), 海參崴, 符拉迪沃斯托克
浦潮(포조), 浦潮斯德[30], 浦鹽(포염)
ウラジオストク
오케안스카야 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オケヤンスカヤ
연해주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Primorsky Krai (Maritime Territory) 沿海州, 滨海边疆区(濱海邊疆區) 沿海州, 沿海地方
시베리아 Сиби́рь Siberia 西伯利亚(西伯利亞), 西比利亞 シベリア

함께 보기

각주

  1. 標題:8 昭和15年8月1日から昭和15年8月31日 p.16 : 間島省内匪賊状況週報ニ関スル件 (在琿春 領事 木内忠雄 1940년 8월 31일)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8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2.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3. 3.0 3.1 3.2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4.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5.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1940년 3월 ~ 1945년 8월 /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4. 1940년 가을
  6.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东北抗日游击日记)》 p.567 : 1941년 1월5일 김일성, 최석천(최용건), 계청이 장수전(張壽籛) 처에 도착해서 담화.
  7. 7.0 7.1 Ким Ир Сен - Википедия (러시아어 wikipedia)
  8. 우수리스크 - 라즈돌노예 (구글지도)
  9. 北韓政治史硏究 序論(梁好民) > Ⅱ. 東北抗日聯軍과 金日成의 人蘇 國史館論叢 第27輯 (국사편찬위원회, 1991-11-05)
  10. 踏破兴安万重山 : 王明贵回忆录。赵亮等整理。黑龙江人民出版社 1988年1月版。 p.216
  11. 11.0 11.1 抗联余辉 北京日报 2014-01-14
  12. 12.0 12.1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 「하마탄」 마을" 동아일보 1992.06.13
  13. 《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1. 하바롭스크 회의
  14.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45.
  15. 15.0 15.1 「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0624300、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C-8-0-0-X4)(外務省外交史料館) p.15
  16. 《세기와더불어 8권》 제23장 국제 반제 력량과 련합하여, 1. 하바롭스크 회의
  17. 17.0 17.1 《세기와더불어 8권》 제 24 장 거족적인 반일항전으로, 5. 반일애국력량과의 단합을 위하여
  18. 유성철(兪成哲, 1917-1995), 피바다의 비화 p.12 : 미의회도서관
  19. 김창국(Kim, Ch'ang-guk, 1916~1981) 전 인민군 정찰국 부국장, 대좌 p.5 : 미의회도서관
  20. 20.0 20.1 이 자료는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이 1977년에 먼저 소개했다 :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著、『アルバム・謎の金日成 -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成甲書房, 1977/09) pp.132~133
  21. 21.0 21.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근거자료집』, ([서울] :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2002) p.198 : 국회도서관
  22. 와다 하루키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23. 东北抗联B野营一九四一年、一九四二年被派遣各分队人员名单 (1944年10月13日), 《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甲65卷 p.297
  24. 중국인 대원 유의권(劉義權, 刘义权, 1930~?)은 당시 이름이 유옥전(刘玉全)으로, 김일성과 같은 날인 1940년 10월 23일 입소하였고, 김일성을 따라 1941년 4월 10일 만주로 파견되어 1941년 11둴 12일에 남야영으로 돌아옴. :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25. 하바로프스크 - 무단장시(牡丹江市) (구글지도)
  26.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pp.18~19 :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i.e. 쓰여진]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의회도서관
  27.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28. "「蘇軍(소군)대위 金日成(김일성)」元山(원산)까지 수송" 45년 당시 蘇(소)해군중위 니주니코프 證言(증언) 1992.08.30 동아일보 4면
  29. 김정일의 청소년 시절 KBS 북한백과 2006-03-20
  30. 30.0 30.1 標題:第1軍管区月報 昭和9年12月分 p.121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085300、昭和10年 「満受大日記 別冊 第2号」(防衛省防衛研究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