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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56891437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거나 복면을 벗었다는 말은 삭제되었다.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56891437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거나 복면을 벗었다는 말은 삭제되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곧바로 공개 행보를 시작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f>[http://www.much.go.kr/museum/nrms/view.do?idnbr=PS01002025008-007749-00000 명칭 : 매일신보 1945년 10월 17일자 / 소장품번호 : 구입7749]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f><ref name="chos">[http://www.much.go.kr/L/rjTbYI5oTh.do 명칭 : 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18일자 특보 / 소장품번호 : 구입5658]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f><ref name="chosk">[http://www.much.go.kr/L/lnpbYI56Wi.do 명칭 : 조선인민보 1945년 11월 23일자 / 소장품번호 : 구입5659]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f>  명색이 북한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 환영인파도 없이 초라한 행색으로 귀국하는 것을 공개할 수는 없었다. 1달여간 숨어다닌 이유도 국내사정을 파악하며 어떤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야할지 탐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국내서 유명하지만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사칭하는 방안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1945년 11월 1일자 기사<ref>[https://unibook.unikorea.go.kr/material/view?materialScope=&format=&pageSize=10&sortField=publishYear&sortDirection=DESCENDING&method=KEYWORD&fields=ALL&keywords=%EC%A0%95%EB%A1%9C+1945&uid=CAT-00000000000056988 北韓關係 史料集 31 : 正路(1945.11.1~1946.5.19) /국사편찬위원회 편] (과천: 국사편찬위원회,1999)</ref>에 분국 설치를 결의한 1945년 10월 13일<ref>기사 본문에는 9월 13일로 일자가 잘못 적혀 있다.</ref> 열린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에서 <u>김영환(金永煥) 동무의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u>고 하였다. 이 김영환(金永煥)은 김일성이다. 당시 분국의 책임자로는 [[김일성]] 아닌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B%B2%94 김용범(金鎔範, 1902 ~ 1947)]이 뽑혔으나, 12월 17일에 [[김일성]]으로 교체된다.
 
그가 이렇게 김영환이란 가명을 쓰며 행동한 이유는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곧바로 공개 행보를 시작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f>[http://www.much.go.kr/museum/nrms/view.do?idnbr=PS01002025008-007749-00000 명칭 : 매일신보 1945년 10월 17일자 / 소장품번호 : 구입7749]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f><ref name="chos">[http://www.much.go.kr/L/rjTbYI5oTh.do 명칭 : 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18일자 특보 / 소장품번호 : 구입5658]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f><ref name="chosk">[http://www.much.go.kr/L/lnpbYI56Wi.do 명칭 : 조선인민보 1945년 11월 23일자 / 소장품번호 : 구입5659] 대한민국역사박물관</ref>  명색이 북한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 환영인파도 없이 초라한 행색으로 귀국하는 것을 공개할 수는 없었다. 1달여간 숨어다닌 이유도 국내사정을 파악하며 어떤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야할지 탐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국내서 유명하지만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사칭하는 방안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도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항일영웅으로 떠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몰래 귀국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무명인사였기 때문에 몰래 귀국한 것이며,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김일성이 어떻게 귀국했는지 진실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항일영웅(?)의 귀환 행색으로는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도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항일영웅으로 떠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몰래 귀국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무명인사였기 때문에 몰래 귀국한 것이며,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김일성이 어떻게 귀국했는지 진실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항일영웅(?)의 귀환 행색으로는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다.

2022년 7월 21일 (목) 16:05 판

김일성에 대해 무엇이 궁금한가요? →
김일성 관련 표제어 보기
김일성 (생애전반) 김일성 가짜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김일성 관련 원천사료 목록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김일성 진짜론 반박
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동명이인)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은 북한에서는 신격화 되어 있고, 근자에는 한국에서조차 학계가 종북화되어 북한의 조작된 주장을 대부분 수용하며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그가 했다고 주장하는 보천보사건은 교과서에도 들어와 있다. 보천보사건6.25 남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언론과 학계조차 김일성의 실상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김일성의 정확한 실체는 만주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다 일본군에 쫓겨서 소련으로 도주하여 해방전 5년간 소련군에 복무한 덕에 소련의 꼭두각시 앞잡이로 선택받아 그들의 일방적 지원으로 지도자가 되어 북한 주민들의 주권을 강탈해간 자이다. 해방 당시 그는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몰랐으며, 지지세력도 전혀 없어 집권의 정당성이 전무했음에도 소련이 왜 그를 데려와 지도자로 강제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였던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숨겼고, 무명의 핸디캡을 일제시대 전설적 항일영웅으로 널리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여 극복하려다 가짜 김일성 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오늘날 북한의 김일성 일족 세습 전제왕조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의 영웅적 항일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이 낳아 놓은 사생아(私生兒)에 불과하다.

개요

지도자가 되었던 인물에 대해서는 그가 권력을 잡는 과정이 어떠했고, 집권 후에 무슨 일을 했는가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전에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는 다소간 참고는 할 수 있겠으나 큰 의미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가는 중요하지만, 그 전에 별 영향력이 없던 시절에 한 일들을 시시콜콜 다 캐내어 논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고질병은 나중에 지도자가 된 사람에 대해서 그가 지도자로서 한 일은 무시하고, 그전 일제시대에 무엇을 했느냐로 평가하려드는 것이다. 그 사람이 일제시대에 무얼했든 이전에는 관심도 없다가 지도자가 되어 훌륭한 일을 하면 그 일에 대한 평가는 내팽개치고 일제시대 일만 뒤져 친일파로 몰아 모든 업적을 부정한다. 또 지도자가 제아무리 폭정을 해도 일제시대에 항일투쟁을 했다며 영웅으로 떠받들기도 한다. 자신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위치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는 따지지 않고,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던 시기의 일만 가지고 모든 평가를 재단한다. 이렇게 해서 조작된 김일성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김일성이 엄청난 항일투쟁을 했으니 그가 지도자가 된 후 국가를 사유화하여 국민을 노예로 부리고 제마음대로 죽이고 가두며,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최고권력을 세습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유민주국가의 시민이 되기에는 수준미달이지만 김일성 일족의 노비될 자격은 충분하다 하겠다.

김일성에 대해 집권과정과 집권 후에 한 일로 평가하면 자동적으로 사상 최악의 지도자를 면할 수 없지만, 이를 정당화시키는 유일한 탈출구가 지도자가 되기 전에 했다는 항일투쟁이다. 후일 지도자가 된 인물을 일제시대 경력으로 평가하려는 것을 한국인들은 워낙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에 김일성이 실제로 무슨 항일투쟁을 했고 어떻게 해서 권력을 잡았는지 실체를 다 밝혀보고자 한다.

북한 김일성은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는 소련이 내세운 괴뢰(앞잡이)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한 가짜이며,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은 좀 한 것 같으나 대단한 전공은 없다는 정도로 알려졌다. 당시에는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 구체적 활동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했을 뿐, 의도적으로 폄하한 것은 아니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일제시대 어린 시절부터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 해방 후 평양에 나타난 불과 33세의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옛날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도저히 나이가 맞지 않아 사실로 인정할 수 없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일제시대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라 북한 김일성이 가짜인 줄 직관적으로 알던 세대들이 퇴장하거나 세상을 떠나고, 학계를 좌파들이 주도하게 되자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 부담스러워서, 또는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몰았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내놓고 사람들도 이런 엉터리 주장을 따라 갔다. 그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알지도 못했던 보천보사건을 끄집어내어 동아일보가 당시 호외를 발행하여 크게 보도했기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이러한 일로 북한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알려져 해방 후 마치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집권하게 된 것처럼 주장한다. 타락한 종북 학계 때문에 이런 주장이 교과서에까지 들어와 버젓이 교육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료들이 새로 발굴되고, 새로운 증언들이 나와 북한 김일성의 실체는 좌파들이 장악한 학계 다수의 주장과 달리 과거에 알려졌던 쪽이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과거에는 몰랐던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 행적들이 상당히 밝혀졌는데, 그다지 대단한 것도 없을 뿐더러 북한이 자랑하는 소위 보천보 전투라는 것도 당시 흔했던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전사한 다른 김일성이 한 일을 북한 김일성이 자신의 공으로 가로챘다느 것까지 밝혀진다.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 신화"를 이야기 하지만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북한이 날조한 것을 남한의 종북 인사들이 받아서 떠들어댄 것에 불과하다.

김일성에 대한 모든 논란은 해방 당시 보잘것 없던 인물이 소련의 앞잡이로 북한 지도자가 되어 온갖 경력들을 조작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경력이 분명치 않아 이런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그가 지도자가 될만큼 대단한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 해외에서 귀국한 이승만이나 김구 등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런 논란이 벌어질 여지도 없었는데 왜 유독 김일성에 대해서만 논란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김일성의 실체는 항일투쟁의 영웅이 아니라 해방직전 5년간 소련군인이었으며 이 때문에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그는 항일투사 아닌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북한 주민의 주권을 강탈한 자이며, 북한은 해방된 적이 없고 압제자가 "일본 제국 → 소련 군정 → 김일성 일족"으로 바뀌어 왔을 뿐이다.
김일성의 소련군 경력은 숨기고 만주시절 항일투쟁만 미화, 강조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일족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해방을 여전히 필요로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감춰주는 마취제 역할을 할 뿐이다.

김일성은 어떻게 해서 북한 지도자가 되었나?

해방 직전 5년간 항일투쟁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내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상관의 허락도 받지 않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蘇滿) 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냈다. 1941년에 몇 달간 만주로 파견나가기는 했지만 항일투쟁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다. 남들이 목숨걸도 투쟁할 때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집권 후 소련군 경력은 숨기고 항일투쟁은 자기 혼자만 다 한 것처럼, 북한을 자신이 해방시킨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고, 끝까지 투쟁한 사람들을 숙청, 처형했다.

동료를 감시, 밀고하는 비밀요원으로 소련군 상관들의 신임 얻어

김일성이 소련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는 대체적인 과정은 알려져 있다. 김일성이 속했던 88여단은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소련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산하로,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Purkayev, 1894~1953) 대장 아래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orkin, 1899~1980) 소장이 88여단 관련 일들을 관장했다.

당시 김일성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чэн)이었고,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으나, 빨치산 동료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푸르카예프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NKVD (KGB 전신) 비밀 요원이었다. 그는 이런 비밀 역할을 잘 수행하여 소련군 상관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이들 소련군 상관들이 일본 패전후 북한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모스크바에 추천해 올린 것이 그가 북한 지도자가 되는 배경이다. 그는 만주서의 항일투쟁 공적 때문이 아니라 소련군 88여단에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 밀고하는 프락치 역할을 잘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 지도자가 된 것이다.

소련군 상관들의 추천으로 스탈린이 진지첸 대위를 북한 지도자로 발탁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게되면서 북한 지역에 지도자로 내세울 사람을 급히 구하게 된다. 일본전을 위해 설치된 극동군 총사령부에서는 푸르카예프 대장과 극동군 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 상장이 후보자 물망에 오른 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불러 면접시험을 보고 그를 적임자로 모스크바에 추천해 올린다. 소르킨 소장은 당시 소련의 2인자였던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 1899 ~ 1953)가 신임하던 사람이었다. 베리야가 극동에서 올라온 NKVD 보고서 (소르킨), 극동군 총사령부의 면접 보고서 등을 본 후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강력히 추천하고,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여 1945년 9월 초 머나먼 극동 군부대의 말단 대위 진지첸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시험을 보고 그 자리에서 지도자로 결정한다.

소련군의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 공작

스탈린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북한 현지에서 그가 실제로 지도자 노릇을 하자면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두 가지는 진지첸 대위가 국내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인물이라는 점과, 북한지역에서 조만식에 대한 지지가 워낙 높다는 점이었다.

전설화된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첫번째 난관은 진지첸 대위를 당시 국내에서 이름은 유명했지만 누구인지는 불분명한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하여 돌파를 시도한다. 이때문에 진지첸 대위에게는 줄곧 가짜라는 꼬리표가 달리게 된다.

어릴 때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같은 사람이 되라는 교육을 받은 것이 아마도 그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선호하게된 이유인 것같고, 종국에는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였다.

소련군의 조만식 제거

두번째 난관인 조만식은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지지 요구를 끝내 거절하자 신문 방송에서 그를 친일파로 몰게 한 다음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하여 모든 정치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가장 유력한 공산주의자였던 현준혁은 1945년 9월 초에 암살 당했는데, 암살 사유는 그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조만식에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배후 인물로는 장시우가 거론되고 있다. 범인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잡히지 않았고 사건에 대한 조사도 흐지부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 군정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정황이다. 소련군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반공 민족주의자 조만식에게 협력하며 힘을 실어주는 공산주의자를 제거할 필요가 느꼈을 것이다.

소련군이 무에서 창조해낸 지도자

소련은 국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하던 김일성에게 이런 저런 조직을 만들어 그 장으로 앉혀주고, 1946년 2월 8일에는 사실상의 임시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앉힌다. 이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이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 김일성에 대한 지지도가 상당히 올라가게 된다. 모든 일을 입안하는 최종결정권자는 여전히 소련이었지만 표면에 김일성을 내세워 그가 하는 것처럼 꾸며 대중들에게 그가 지도자임을 각인시켜 나간다. 소련군정 3년간은 김일성의 지도자 견습기간이고, 그가 지도자 노릇을 하는데 필요한 각종 권력 기관들을 만드는 기간이었다. 또한 북한 전역을 소련군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공산화시키는 기간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발탁과 소련군의 정치공작을 통해 점점 지도자 자리를 굳혀가서 마침내 1948년 9월 9일 정식 수상으로 취임한다. 이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점점 확고하게 다져가서 결국은 세습전제왕조를 만들게 된다.


소련군정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한 레베데프 소장은 후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

"그가 권좌를 향한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우리의 조언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는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의 회고나,[2] "우리는 지도자 김일성을 무에서 만들어 내었다. (We created him from zero.)"고 말한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1915~2006)의 후일 증언은[3] 결코 과장이 아니다.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이 되어 인민의 주권을 강탈

소련군정은 북한 주민들이 자유선거를 통해 원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길을 막고,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운 꼭두각시 지도자 김일성을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 선거의 형식을 빌리기도 했지만 인민들은 자유 의사를 반영할 수 없는 흑백함 투표 등을 통해 정해진 결과를 추인하는 투표밖에 할 수 없었다. 김일성은 스스로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이 되어 북한 인민들의 주권을 강탈해간 것이다. 결국 북한은 해방된 것이 아니라 일제 총독 치하에서 소련이 내세운 조선인 총독 치하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북한정권 출범 후에도 코민포름 산하 특경부(特警部)의 감시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는 사실상 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 즉 까삐딴 진지첸(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эн)의 변신 과정은 눈부시다. 중국공산당에 붙었다 소련군에 붙었다 하다가 스탈린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간택받아 북한의 지도자 자리까지 꿰어찬 『까삐딴 진(капитан Цзин)』의 놀라운 변신술에 비하면 전광용(全光鏞, 1919~1988)의 소설 『꺼삐딴 리』[4][5]의 주인공은 차라리 애교스럽게 보인다. 현실은 항상 소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꺼삐딴은 까삐딴을 다르게 적은 것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과대 선전은 집권을 사후 정당화하기 위한 것

김일성은 항일투쟁의 공로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집권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소련의 꼭두각시 앞잡이로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으로 집권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가 집권 후 만주에서의 빨치산 투쟁을 과도하게 조작하고 부풀려 선전하는 이유는 이런 추악한 집권 내막을 감추고 마치 그가 항일투쟁한 업적으로 집권한 것처럼 꾸며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당시 학력이나 경력, 식견 그 어느 것도 지도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데다 조선의 역사나 국내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도 않아 지지세력도 전무하던 인물이 소련의 지원으로 집권하고 이를 정당화할 방법은 항일투쟁 경력을 부풀려 조작해서 선전하는 것 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김일성 발탁이 북한 비극의 시작

스탈린에 의해 김일성이 북한 최고지도자로 발탁되자 그의 동료 빨치산 그룹이 북한 핵심 권력층이 된다. 이들은 평균학력이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다[6], 만주 산야를 숨어다니며 마적질인지 항일투쟁인지 모를 일들을 벌이다 1940년 소련으로 도주해서 해방직전 5년간 소련군이 필요로 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었다. 국가 통치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해본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준비도 경험도 전무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집권하여 오늘날의 북한과 같은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인민군 소장 출신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7]

만주항일연군에 소속돼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던 항일 빨치산들은 蘇聯(소련) 땅에 쫓겨갈 때까지 극좌노선의 지배를 받을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어 정치이론을 배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학교 교본조차 보지 못했다. 蘇聯(소련) 땅에 들어가 있는 5년동안 蘇聯(소련) 공산당 역사와 레닌주의 제문제를 배우기는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보고 접촉한것은 전쟁에서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사람들 뿐이었다. 그 5년동안에 항일 빨치산들속에는 蘇聯(소련) 안전기관의 비밀정보원이 생겨나고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악랄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政治(정치) 몰라 비극심화

항일빨치산들의 그런 공통적인 특징은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된것이다. 적개심만 있을뿐 정치가 무엇인지 모를뿐 아니라 실천경험이 없고 극단적 좌경노선을 그대로 갖고있는 이들에게 국가통치의 大權(대권)이 부여됨으로써 북조선의 비극은 심화됐던 것이다.

이들 빨치산들은 대부분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조선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조선의 역사나 사정에도 어두우며,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고 지지세력도 전무했다. 중국에 거의 동화되어 조선족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자력으로는 북한의 정치무대에 얼굴도 내밀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이 소련군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이 쥐어주는 북한의 핵심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해방 당시 그가 과연 지도자가 될만큼 주요 인물이었나?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국내서 미지의 인물

해방 당시 국내에는 소련군 88여단의 존재나 거기에 진지첸 대위와 같은 인물이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은 단 1명도 없었고, 중공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해방 직전 5년간 항일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에 복무하다 온 사실을 끝까지 숨겼고, 북한은 수많은 당시 문서가 공개된 오늘날에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도진(刀盡)'이라는 필명의 북한 사람이 한국에서 출판된 '반디'라는 필명의 북한 반체제 작가가 쓴 소설 《고발》을 읽고[8] 남한으로 보내온 독후감에는 조기천서사시 《백두산(白頭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는데[9], 그 전까지는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으나 이 시가 발표된 후부터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어릴 때의 기억이 한 가지 나는 것이 있는데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이다.
북쪽 땅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이 시를 배우고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에 대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나 역시 김일성의 위대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댔다. 그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조기천은 시에서 김일성을 우리 민족을 구원한 빨찌산 대장,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우리 민족을 이끌 위인으로 노래하였다. 거짓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이 詩가 2000만의 넋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조기천은 이 시를 1946년에 썼다. 그 전까지는 우리 인민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김일성은 항일전의 공로가 아니라 이 시로 인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
내가 시인 작가들을 혐오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라는 데 대해 생각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나라의 시인 작가들은 독재자의 賣文(매문) 문필가로써 민족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반디 선생의 분노의 작품 앞에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몰래 귀국하여 가명쓰며 숨어다닌 이유는?

소련군 88여단 1대대장 진지첸 대위는 해방 후 1달여 뒤인 9월 19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극비리에 입북했다. 정상진(鄭尙鎭, 1918~2013) 등 원산항에 마중 나온 인사들에게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다.[10]

기차로 9얼 22일 평양에 도착해서는 김영환이라는 새로운 가명을 쓰며 비밀리에 국내 사정과 민심을 살피러 다녔다.

한재덕(韓載德)의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將軍 凱旋記)』의 몰래 귀국하여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쓰고 다녔다는 부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1945년 11월 1일자 기사에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에서 김영환(金永煥, 김일성의 가명) 동무의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고 하였다.
장군(將軍)이 조선(朝鮮)에 돌아오기는 그보다 훨씬 전(前)이었다. 비행기(飛行機) 우에서 내려다보이는 고국(故國)의 산천(山川)은 너무나 아름다웟다. 『이 강산(江山)을 위하여 내 어찌 아니 싸울 수 있었으랴! 그러나 노력(努力)은 이제부터다.』 그럼으로 장군(將軍)은 떠들지 않고 돌아왓다.

소리없이 개선(凱旋)한 장군(將軍)은 돌아온 그날부터 또 맹활동(猛活動)을 개시(開始)하였다. 사정(事情)에 의(依)하여 이름도 김영환(金永煥)으로 변명(變名)을 하고. 二十年 그리던 고향(故鄕), 조부모(祖父母) 친척(親戚)을 二十里 밖에 두고도 비화(飛火)같이 달리는 마음을 달래며 이날까지 꾹 참어온 것이다.

그러나 복면(覆面)을 벗은 이제 엇더케 하로를 참으랴! 장군(將軍)은 날듯이 할아버지 할머니 계신 옛집으로 달려 온 것이다.

당시 한재덕은 김일성이 소련군함 타고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으로 온 것을 모르고 비행기 타고 왔다고 했다. 또 김일성이 몰래 귀국한 것을 "떠들지 않고 돌아왔다"거나, "소리없이 개선(凱旋)했다"고 미화하고 있고, 김영환(金永煥)으로 변명(變名)을 하고 다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선 것을 복면(覆面)을 벗었다고 표현했다. 이런 솔직한 표현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는 아직 김일성의 권위가 확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거나 복면을 벗었다는 말은 삭제되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1945년 11월 1일자 기사[11]에 분국 설치를 결의한 1945년 10월 13일[12] 열린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에서 김영환(金永煥) 동무의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김영환(金永煥)은 김일성이다. 당시 분국의 책임자로는 김일성 아닌 김용범(金鎔範, 1902 ~ 1947)이 뽑혔으나, 12월 17일에 김일성으로 교체된다.

그가 이렇게 김영환이란 가명을 쓰며 행동한 이유는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곧바로 공개 행보를 시작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3][14][15] 명색이 북한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 환영인파도 없이 초라한 행색으로 귀국하는 것을 공개할 수는 없었다. 1달여간 숨어다닌 이유도 국내사정을 파악하며 어떤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야할지 탐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국내서 유명하지만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사칭하는 방안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한국에서도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항일영웅으로 떠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몰래 귀국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무명인사였기 때문에 몰래 귀국한 것이며,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김일성이 어떻게 귀국했는지 진실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항일영웅(?)의 귀환 행색으로는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다.

소련군 문서에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는 진지첸으로 나오다가 10월 2일부터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이때가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날이다. 마침내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공개적으로 대중앞에 나선다.

자력으로 정계에 얼굴 내밀 능력 안돼

만일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군의 배경이 없이 부하 몇명만 데리고 귀국했다면 국내의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그는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친족과 고향마을 사람들 몇명 외에는 없었다. 당연히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 수도 없었고, 지지세력도 없었다. 국내에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고, 국내 사정에도 어두운데다 조선말도 잘 못해 더듬거리던 그가 자기 혼자 힘으로 정계에 얼굴내밀 형편도 되지 않았다. "내가 바로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오."한들 믿어줄 사람도 없었고, 돌이나 맞았을 것이다.

소련군이 대중 집회를 조직해 그가 "김일성 장군"으로 데뷔할 무대를 만들어 주고, 가짜 김일성이란 말을 못하도록 탄압하고, 이런 저런 정치조직이나 행정조직을 만들어 그를 우두머리로 앉혀주고, 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16] 등 반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반대파들을 억압해 정치 활동을 못하게 만들고, 소련군이 장악한 언론이 그에게 촛점을 맞추어 띄워준 덕택에 겨우 자리를 잡아간 것이다.

해방 직후 거론되던 유력한 김일성은 다른 사람

해방 직후부터 10월 14일 북한 김일성이 출현하기 이전의 기록에 나오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다른 사람이다.

잡지 선구(先驅)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의 여론조사에서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로는 여운형 1위, 이승만 2위, 김일성 6위지만, 대통령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이승만이 압도적 1위, 김일성은 순위에 들지 못하고, 대신 군무부장 적임자로 1위에 올랐다.

잡지 선구(先驅)에 실린 여론조사에 나오는 김일성은 흔히 북한 김일성이라며 그의 인지도가 상당히 높았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사람도 북한 김일성으로 볼 수 없고, 동진공화국 군무부장 김일성과 같이 전설적 이름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지지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북한 김일성이 여론조사 기간중인 10월 14일 평양집회에 처음 나타나긴 했지만, 남한 신문에는 이에 대한 보도도 거의 없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11월 초순까지도 김일성의 주목받을만한 공개적인 행보는 없었다.

일제시기 국내 언론에 보도된 항일연군의 김일성

1930년대 후반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의 기사를 검색해보면 1936년 가을 ~ 1937년말 기간에는 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 1939년초 ~1940년 여름 기간에는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관한 보도가 많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당시는 문맹률이 80%를 넘고, 신문 구독자도 소수인데다, 여러 기사들 틈에 조그마하게 난 기사를 눈여겨 보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보았다고 해도 김일성 부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양민들을 약탈하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니 마적단 쯤으로 생각하지 대단한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여겼을 리도 없다.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그 후에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해방 당시 그는 조선말도 잘 못해

김일성은 중국에서 교육 받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성장하여 해방 당시 중국어는 능하지만 우리 말이 서툴고, 지적 수준도 낮았다는 증언이 많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북한에서 46년 9월부터 48년 2월까지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재직하며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ML) 주의 이론 교육을 시켰던 박일(朴一, 페테르 알렉산드로비치)씨의 증언이다.

朴(박)씨는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1백여편의 그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金(김)의 지적능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17]

김일성은 소련어는 전혀 못했고, 조선말도 몹시 서툴렀다. 그는 중국말로 생각한 뒤 이를 조선어로 번역한 뒤 말하느라 말이 몹시 느렸다.[18]

박씨는 『김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면서 김이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설명했다.[19]

아래는 소련에 파견되었다 탈북한 북한 노동자 출신 이영일의 증언이다.[20]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공산정권이 무너지자 옛날에는 철저한 국가기밀로 되어있던 김일성에 대한 실화들이 러시아 신문지상에 공개 되군 했다.

너무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 온 탓에 북한공산당 창건대회 때 그는 한국말로 된 연설문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기사도 직접 읽었다. 당시 스탈린 정권이 파견한 고려인 장교들에게서 한국말과 역사를 배우며 북한정권의 초대 수상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두 신문기사에서 알게 되었다.

그때마다 강한 심리적 충격을 받았지만 이런 사실을 발설했다가는 어느 순간에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자신을 억제하군 했다.

이 외에도 해방당시 김일성이 우리 말에 서툴렀다고 증언한 사람들은 소련군정 장교들과, 10월 14일 김일성의 첫 연설을 현장에서 들었던 사람들[21] 등 셀 수 없이 많다.

해방 당시 김일성은 중국에 반쯤 동화된 인물

해방 전 김일성은 혈통은 조선인이지만 만주에서 교육받고 성장하는 동안 의식 세계는 중국에 동화된데다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해 국내에 와서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그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을 리도 만무한데도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조작되어 있다. 해방 당시 김일성은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지지 세력도 없으며, 학력이나 경력이 턱없이 미비한데다 우리 말까지 서툴러 지도자가 되기에는 무리한 상황인데도 소련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88여단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을 했던 소련의 고려인 출신 유성철은 당시 조선인들끼리도 중국말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였다.[22] 1945년 9월 중순 입북 길에 오른 김일성 일행을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은 당시 그들이 조선인들 뿐인데도 중국어로 대화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23][24]

항일연군 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일본이 패망하면 되면 중국 공산당이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다.[25] 또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이었던 이을설(李乙雪, 1921-2015)은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소련 시절의 김일성은 소련서 살고 싶어 했고, 국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26]

이런 사례들로 보아 김일성이 만주에서 설사 항일투쟁을 좀 했다고쳐도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만주서는 그냥 중국공산당을 위해 투쟁했을 뿐이고, 소련에 가서는 소련의 목적에 맞은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그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갈망같은 것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남북한 및 미군정 문서의 김일성 경력도 보잘것 없어

아래에 해방 직후 남한 간행물과 미군정 문서에 나오는 김일성 관련 기록들이다. 북한 김일성의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잘 모르고 있다. 그는 당시까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증거이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간행되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나 좌익지 조선인민보에 실린 북한의 김일성을 소개하는 기사에는 무조건적인 찬사만 잔뜩 늘어놓았을 뿐, 그가 실제로 어디서 무얼하다 온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정보도 없다. 당시 공산주의자들도 김일성의 실제 경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미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해방일보 1946년 4월 8, 9일자는 이에 대한 변명 기사를 싣고 있지만, 그다지 설득력도 없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0년경부터 유명했으므로 청년영웅이라는 말과 양립할 수도 없다. 청년이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니 가짜 소리를 들은 것이다. 종북화된 남한 학계에서는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항일영웅으로 떠올랐다고 주장하지만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해방 직후 어느 신문도 보천보사건을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으므로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서울의 공산 계열 신문들은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적인 찬사만 보내고 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북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소련이 내세우는 사람은 누구인지 몰라도 무조건 지지한다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기사들이다.

1930년말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 김일성을 알았던 최형우가 해방 직후 서울에서 펴낸 책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도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별 대단한 내용은 없고, 보천보사건도 나오지 않는다. 김일성과 관련된 부분은 북한의 실력자로 막 등장한 그에게 잘 보일 의도에서인지 상당히 미화하여 기술했다.

해방 직후 북한 문헌에 나오는 김일성의 경력도 보잘것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1946년 8.15해방 1주년에 간행된 약력에는 보천보 사건도 나오지 않는다.[27] 2페이지 짜리 약력의 절반은 해방 후의 경력이며, 우상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김일성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의도적으로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나?

위에서 본 대로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은 국내에서 미지의 인물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알 수 있었던 그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수많은 연구가 진행된 오늘날에도 그의 해방 전 전력은 여전히 논란거리인데, 당시 사람들이 알 수 있었던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거의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람이 일찍부터 알려졌던 전설적 이름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가짜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종북화된 한국 학계에서는 이승만 또는 박정희 정부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또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에 부담을 느껴 그를 가짜로 몰았다는 둥 하며 별별 말을 지어내어 김일성을 띄우고, 한국의 과거 정부를 비난하기에 열중한다.

나는 통일 후 북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김일성 신화를 벗겨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옛날 반공교육 시대에 만들어진 김일성 가짜설로는 어림도 없다.
김일성을 지주(소련의 스탈린)의 하인(모택동)이 부리는 소로 그린 6.25 대북전단.[28]

심지어 친일파 박정희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많은 과거 문헌들이 전산화된 덕에 해방 전후의 김일성 관련 기록들을 다수 찾아내고, 공산권 붕괴 후 평양 소련군정 인사들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까지 나오면서 북한 김일성은 국내에서 무명인 처지에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가짜가 맞다는 것이 재차 명백히 확인되었다. 박정희김일성에 대해 컴플렉스를 느껴 그를 가짜로 만들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다. 남한에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많이 퍼진 것은 수많은 월남민들이 증언한 때문이고, 1990년 이후 좌파학자들이 김일성을 진짜로 둔갑시켜 놓았지만 그가 원래대로 가짜가 맞다는 것이 다시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비판은 굳이 그를 가짜로 몰 필요도 없이 소련의 꼭두각시 앞잡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6.25 때 뿌려진 대북 전단에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보다는 그가 소련의 하수인이자 앞잡이로 그려진 것이 대다수이다.

만주 조선족들의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에 대해

만주의 조선족들은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이 맞으므로 진짜가 맞으며, 한국의 가짜설은 김일성을 폄하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가짜설이 나온 배경을 잘못 안 것이다.

만주 사람들은 항일연군의 김일성을 알았을 수도 있고,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는 다소 지명도가 있었을 지도 모르나, 해방전후 국내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도 소련군 88여단도 거기에 김일성이 있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해방 후 평양에 온 그가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소련군이 데려온 33세의 청년이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기 때문이다.

북한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한 사람이 맞으니 가짜가 아니라거나, 해방전에 김일성 이름을 썼으니 가짜가 아니라는 주장은 본질을 교묘하게 흐리는 말이다. 그가 가짜라는 주장은 1920년대부터 알려진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말일 뿐, 항일투쟁을 했는지 아닌지, 김일성 이름을 썼는지 아닌지와는 관계없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실제 이름은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조선족들 중에는 김일성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데, 동북항일연군에 그들의 조상인 조선인들이 다수 참여했고, 그중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족들의 조상인 당시 만주의 조선인들 거의 대부분은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하던 만주국 편에 섰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또 조선족들은 같은 중공당 산하지만 만주 아닌 중국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훨씬 더 많은 수의 연안파에 속하는 조선인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관심도 없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김일성과 빨치산 집단이 초기에는 연안파들과 협력하다 나중에 모두 숙청, 처형한 것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조선족들은 만주에서 활동한 김일성 일파들에 대해서만 동류의식을 느끼고 찬양할 뿐, 훨씬 더 많은 수의 중공당 산하 연안파들의 활동이나 운명에 대해서는 냉담하다. 그들은 또한 공산화된 중국에서 교육받고 생활하다보니 북한의 체제나 세계 최악인 인권 문제 및 6.25 남침전쟁 도발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한 일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자신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항일연군출신자들이 만든 나라를 비판하고싶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족들은 전반적으로 북한 주민들이 아니라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김일성 일족과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같다.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의 해방전 김일성 일대기이다. 저자는 항일연군 관련 중국측 기록이나 관련자들 200여명의 후일 증언과 각국의 여러 문헌을 토대로 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무리한 주장이나 명백한 오류도 많이 발견되며,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보천보사건을 둘러싼 여러 논란의 진실

보천보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나?

1937년 6월 보천보사건 때 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하여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식의 어이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 그런 사건은 흔했다. 그 중에도 상당히 규모가 큰 사건인 1933년 6월의 독산사건(獨山事件), 1934년 1월의 토성사건(土城事件), 1935년 2월의 동흥사건(東興事件)이 일어났을 때도 여러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며 크게 보도했지만 오늘날 이 사건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사건들보다 오히려 규모도 작은 보천보사건만 유독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고 나서 자신의 항일 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보천보사건도 흔한 일과성 사건으로 곧 잊혀졌다. 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동아일보 호외를 핑계로 좌파들이 근거없이 지어낸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1930년대의 대규모 무장단 침입 사건과 호외 간행 상황
사건 일자 호외 간행 신문
독산사건(獨山事件) 1933년 6월 5일 조선일보[29], 조선중앙일보[30]
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 1934년 1월 22일 동아일보, 조선일보[31], 매일신보[32]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 1935년 2월 13일 동아일보, 조선일보[33]
보천보사건(普天堡事件) 1937년 6월 4일 동아일보 호외 1, 호외 2 ; 조선일보[34]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집권한 때문에 보잘것없고 잊혀졌던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지고, 주재소 경관 5명뿐인 국경의 산골 마을 습격사건이 무려 "보천보 전투"로 승격되며 대단한 항일 전공으로 되었다.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행하여 보천보사건과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가짜로 알려졌던 김일성을 진짜로 둔갑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말이다. 이전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의 존재는 부인하고, 김일성 이름이 보천보사건 때문에 비로소 유명해진 것이라 주장하며, 그 사건의 주역이 바로 북한 김일성이라는 것이다. 또 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생각해 젊은 북한 김일성을 가짜라고 한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펼친다. 희망사항을 사실이라 주장하지만 가공의 소설일 뿐이다.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

보천보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두 사람의 동일인 여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으나, 많은 과거 사료들이 전산화된 후 검색으로 발견된 상당수의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하면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나이는 35~36세 가량,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혜산진)으로 북한 김일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북한은 보천보사건을 김일성의 최대 항일공적으로 조작하여 전적지를 꾸며 우상화 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전 노동당 비서 황장엽(黃長燁)은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 본인이 자신의 항일투쟁에 대해서 했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35]

한때 김일성 자신도 우리들에게 “우리가 무장투쟁을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한 것이 안 한 것보다는 나을 터인데 왜 그것을 자꾸 깎아 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하지만 그것이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줄만한 사건이 아니며, 북한을 ‘해방’하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였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조선독립운동으로 보기 힘들어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군대이고,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감독을 받았으므로 김일성은 중공당이나 소련의 목적에 맞는 투쟁을 했을 뿐이지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소련은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과 1937년 가을의 연해주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에서 보듯이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하게 탄압한 국가이다. 그들이 동북항일연군을 때로는 지원하고 때로는 억제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에 지렛대로 이용할 목적 때문이지 조선독립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동북항일연군 내에서도 중국인들이 민생단 사건을 일으켜 조선인 공산주의자을 1천명 가까이 학살했다. 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함께 한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김일성은 만주서 중국인 학교를 다니며 성장하여 중국에 반쯤 동화된 사람이며 조선말도 잘 하지 못해 더듬거렸다. 만주 시절에는 일본이 쫓겨나면 중공당이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나 시켜주기를 바랐고,[25] 소련군에서는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기를 바랐을 뿐 조선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26] 그가 소련군에 있을 때인 1942년 집필했다는 「항련제1로군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에도 조선독립이란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36]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은 金日成의 중국어 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다. 이에 비해 해방전 중국에 있을 때 영문 외교문서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Kim Ku, Kim Koo 등으로[37],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Tjosowang, Tjo So Wang, Joe So-ang 등[37][38][39] 우리말 발음으로 적었다.

해방전의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 희미했고, 어디에서도 그가 간절히 조선독립을 원해서 투쟁했다는 증거가 없다. 다만 소련군 상관들에게 잘 보여 운좋게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을 뿐이다.

북한 정권의 범죄집단적 행태는 항일연군에 기원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의 과거 일제시대 기사들이 DB화 되어 손끝을 조금만 놀려 검색해도 항일연군 산하 부대들이 벌인 무고한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와 마약밀매 등의 행위들에 대한 기사가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 중 상당수는 6사장 김일성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가 한 일이다. 더 이상 미화하며 숨길 수가 없는 단계에 와 있다. 항일연군에 관한 가장 많은 자료는 당시 만주의 신문들에 실려 있을 것이나, 중국이 이를 DB화 하여 공개하지 않는 이유도 숨길 것이 많아서가 아닌지 의심된다.

북한 정권이 보이고 있는 인권말살, 밀수, 위조지폐와 마약 제조 및 유통, 기쁨조 운용 등의 각종 범죄적 행태는 그 뿌리가 김일성 등 북한 핵심권력층들이 소속되었던 동북항일연군에 있다.

북한은 해방된 적이 없어

오늘날 북한에서는 소련군도 아닌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한은 해방된 적도 없고, 소련군의 북한 점령후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입북한 김일성 집단에게 나라를 강탈당했다.

  • 김일성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는 우선 남침 전쟁과 수많은 대남도발을 겪은 한국인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더 큰 피해자는 수천만 북한 주민들이다. 김일성 일당에게 주권은 물론 사유재산과 생활상의 모든 자유를 강탈 당하고 일생을 수령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주권이 일본 천황에게 있을 때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이 했다는 그 잘난 항일투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한 것인가?
  • 북한은 해방된 적이 없고, 압제자가 "일본 제국 -> 소련 군정 -> 김일성 일족"으로 바뀌어 왔을 뿐이다. 해방된 적이 있다면 8.15로부터 평양에 소련군이 진주해오기 직전까지 단 열흘 뿐이었다. 북한이 소련군이나 김일성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 그것이 진실인 줄로 착각하도록 만들어 진정한 해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마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김일성의 그 잘난 항일투쟁이란게 결국은 동족을 일제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탄압하는 명분으로나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만주국이 일본이 세운 괴뢰국가라고 불리는 것처럼 북한도 소련이 만든 괴뢰국가로 출발했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나서부터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갔을 뿐이다. 좌파들이 좋아하는 표현방식을 따른다면 북한은 "일제 강점기"에서 "소련 강점기"를 거쳐 "김씨 강점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체제도 지도자도 자유의사로 선택할 권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

역사 조작

해방전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내다 와서는 스탈린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발탁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집권하여 목숨 걸고 끝까지 항일투쟁한 사람들을 죄다 숙청 처형하였다. 1963년부터는 소련군 아닌 자신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역사를 조작하여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백두혈통 조작

김일성이 만주의 백두산 인근 지역 안도, 무송, 장백 등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은 맞지만 백두산에 밀영을 만들어 있은 적은 없다. 그럼에도 김정일의 출생지라며 가짜 밀영을 만들어 놓고, 주요 항일전적지도 만주 아닌 국내로 옮겨놓은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1. 중국의 동북항일연군 관련 문헌에 나오는 김일성의 활동은 미미하다. 이것도 자신이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있지도 않은 부대를 날조한 이유가 될 수 있다.
  2. 항일유적지가 국내에 있어야 마음대로 관리하고 거대한 기념물도 세울 수 있다.
  3. 항일유적지가 국내에 있어야 학생, 주민, 군인들을 강제 답사시키며 우상화 교육을 할 수 있다.

김일성 영생교 (주체교)의 교주

김일성 미화 사례

한국 방송의 김일성 미화 사례

[KBS 역사저널 그날]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youtube 2020. 3. 24
잡지 선구에 실린 여론조사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의 김일성과 같은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이다. 소련군이 데려온 북한 김일성은 아이돌 스타가 아니라 국내 사람들 누구도 잘 모르는 미지의 인물에 불과했다.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2002.02.03) : YouTube 방송보기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맞고, 가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한국의 교과서에도 들어온 보천보사건

남한 교과서도 보천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다.[40][41]

이번 교과서 논쟁에서 꾸준히 거론되는 사건이 보천보 전투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가 조국광복회 조직원들과 함경남도 보천보에 침투해 경찰주재소 등을 습격한 사건이다. 북한은 이를 김일성 우상화에 활용한다.

현행 교과서들은 보천보 전투를 비중 있게 다뤘다. 금성·동아출판·미래엔·천재교육 등이 공통적으로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했다. 유일하게 김일성을 직접 언급한 동아출판은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됐다” “북한은 이 사건을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하였다”고 썼다.

교육부는 당시 일본 군·경이 입은 미미한 피해를 교과서들이 과장했다고 평가한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이 ‘가짜’란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무비판적으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계의 생각은 다르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주로 만주, 연해주를 본거지로 활동했기에 국내 투쟁으로는 보천보 전투가 특징적이라고 본다. 특히 동아출판은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되고 있음을 밝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40]

조만간 별 의미도 없는 보천보사건이 김일성의 6.25 남침보다 더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질 기세다.

참고 자료

北 김정은 할아버지 김일성의 6가지 역사조작 사례

함께 보기

각주

  1.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룡,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룡 (朴吉龍,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2.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 "I want you[Grigory Mekler] to work on this person," said Meretskov, referring to Kim. "At the moment not many people know him. Travel to every corner of North Korea with him. It will be useful for both of you." Kim Il Sung, who gained the rank of major in the Soviet army, returned to Korea in 1945 with the occupying forces, and Mekler and other Soviet advisers spent a year touring with him, even helping to write his speeches. "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 recollected the Soviet colonel.
  3.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4. 껍데기만 남은 인간의 자화상, '꺼삐딴 리'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2017. 11. 2
  5. 《꺼삐딴 리》 위키백과
  6.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7.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2> 1990.07.08 동아일보
  8. '1984'와 짝을 이루는 '고발' 讀後記 조갑제닷컴 2014-05-12
  9. 소설 '고발'을 읽은 북한 사람이 보낸 글 조갑제닷컴 2016-03-20 : 북한에 사는 작가가 쓴 反체제 소설을, 한국의 출판계를 매개로 하여 북한 사람이 읽었다는 건 하나의 사건이다.
  10.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2009년 6월 20일 조선일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1992년) 상권 pp.72~74
  11. 北韓關係 史料集 31 : 正路(1945.11.1~1946.5.19) /국사편찬위원회 편 (과천: 국사편찬위원회,1999)
  12. 기사 본문에는 9월 13일로 일자가 잘못 적혀 있다.
  13. 명칭 : 매일신보 1945년 10월 17일자 / 소장품번호 : 구입7749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4. 명칭 : 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18일자 특보 / 소장품번호 : 구입5658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5. 명칭 : 조선인민보 1945년 11월 23일자 / 소장품번호 : 구입5659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6. 신의주반공학생의거(新義州反共學生義擧)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7.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18. 「金日成은 나에게 마르크스·레닌主義를 배웠다」 前 金日成大學 부총장 朴一 회고 / 朴 一 ,『신동아』, 1991년 10월호 pp.350-359 p.354
  19. 김일성의 이념교수 구소거주 한인 폭로 ◎“김은 빨치산 가담만하고 안싸워/항일투쟁 거짓말… 평범한 농부였다”: 국민일보, 1992-03-11
  20. [탈북 수기] 시베리아 벌판의 농노들 이영일 씨 <7> 통일신문 2015/06/12
  21.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22.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한국일보 1990.11.03 : 88여단에는 중국인이 많고 만주에 침투,첩보활동을 했기 때문에 모든 교육과 훈련은 중국어로 실시됐고 조선인끼리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
  23.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24.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25. 25.0 25.1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01.25) p.224
    해방되면 안도현장(安圖縣長)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26. 26.0 26.1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27.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약력(畧歷) : 우리의 太陽 : 金日成 將軍 讚揚特輯.(김일성장군 찬양특집) (平壤 :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p.1 (p.4)
  28. 유물명 : 6.25전쟁 삐라 / 유물번호 : 서울역사029740 서울역사박물관
  29. 무장단 오십명 출현(武裝團 五十名 出現) 경관 4명(警官 四名)을 살상(殺傷), 혜산진 관내 독산 대안(惠山鎭 管內 獨山 對岸)에서 오일(五日) 아침 격전(激戰) 끗헤 조선일보 1933.06.07 석간 2면 : 호외재록(號外再錄)
  30. 국경방면(國境方面)의 무장단(武裝團), 경관대(警官隊)를 포위사격(包圍射擊), 경관 고전(警官苦戰), 전사 6명(戰死六名), 5일(五日) 함남 혜산진 대안(咸南 惠山鎭 對岸)의 사변(事變) 조선중앙일보 1933년 06월 07일 02면 : 호외재록(號外再錄)
  31. 본지호외발행(本紙號外發行) 조선일보 1934.01.24 석간1면 : 본사(本社)에서는 이십삼일(二十三日) 자성군하(慈城郡下)의 토병습격사건(土兵襲擊事件)으로 호외(號外)를 발행(發行)하엿습니다.
  32. 三百餘의 大匪賊團 昨夜中江鎭에 侵入 放火와 掠奪의 警急을 듯고 警官과 守備隊가 出動擊退 매일신보(每日申報) 1934년 01월 24일 석간 7면 : 호외재록(號外再錄)
  33. 본보 호외 발행(本報號外發行) 조선일보 1935.02.14 조간 1면 : 본사(本社)에서는 십삼일 후창군내(十三日 厚昌郡內)에 공군(共軍)이 출현(出現)한 사건(事件)에 관(關)하야 호외(號外)를 발행(發行)하엿습니다
  34. 共軍大部隊 越境襲來(공군대부대 월경습래) 조선일보 1937-06-06 석간(5일 토) 2면 : 호외재록(號外再錄)
  35.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 북한민주화 전략집》 (시대정신, 2006.04.15) p.40
  36.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金日成의 自筆 빨치산 日誌》 金贊汀 新東亞. 390('92.3) pp.380-393 /東亞日報社
    <다시쓰는한국현대사>7.東北항일聯군활동기 金日成 자필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37. 37.0 37.1 [747]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February 7, 1942
  38. [746]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January 3, 1942
  39. [750]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March 20, 1942
  40. 40.0 40.1 [역사교과서 편향성 논란 해부]‘보천보 전투’ 상세히 소개 → 항일운동 대표사례 불가피 - 국민일보 2015-10-20
  41. [집중분석] 국사 교과서 편향성 논란 : 월간조선 2015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