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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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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나, 한자로는 여러 가지로 적혀 어느 것이 맞는지 논란이 되고 있다. 그가 언제부터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했는지도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 과거 문헌이 전산화되어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그가 해방전에 사용했던 이름들이 시기별로 거의 모두 확인이 되고 있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 김성주(金成柱), 김성주(金誠柱) 등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1930년 경에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등의 별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 유격대에 투신한 후로는 주로 김일선(金日善), 김일선(金一善)등의 이름으로 기록에 나오다가 1938년경부터 한자로 金日成이라 쓰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 이것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11월 전사한 후 따라서 쓴 이름이라는 증언이 많다. 이후로 그는 마치 자신이 6사장 김일성이었던 것처럼 행세하며 그의 행적을 자신의 것으로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북항일연군에서 중국인들 틈에 섞여 활동하며 이름을 김일성 아닌 중국어 발음으로 읽었으며,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소련군에서의 공식적 이름은 金日成의 중국어 발음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이었다. 해방 직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 평양에 와서는 또다른 가명 김영환(金永煥)을 사용하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김일성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나섰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확한 신분은 소련군 진지첸 대위였을 뿐 해방전 어디에서도 그가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던 적은 없다. 국내인들은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으며, 진지첸 자신도 해방직전 5년간 항일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에서 복무하다 왔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겼다. 또 국내에서 완전한 무명인사였던 약점을 감추기 위해 1920년경부터 조선인들 사이에 유명했던 실체가 불분명한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가짜 김일성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본명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로 알려져 있지만, 이의 정확한 한자 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북한에서는 김성주(金成柱)라 주장하고, 남한에서도 이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 또는 해방 직후 기록에 나타나는 본명 김성주의 한자 표기는 김성주(金聖柱), 김성주(金成柱), 김성주(金誠柱), 김성주(金成周)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명확하지 않다. 김성주(金誠柱)나 김성주(金成周)는 오기로 보이고, 김성주(金聖柱)와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성주(金成柱) 중 어느 것이 맞느냐가 주된 논란의 대상이다. 호적이나 학적부 등에 정확한 한자 표기가 나올 것으로 보이나 현재 공개된 것이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도대체 金日成(김일성)은 八·一五(팔일오) 解放(해방) 후 처음으로 國民(국민)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어두운 그늘을 지니고 있었다. 가짜 金日成(김일성)이라는 衆論(중론)에 대해 진짜라고 줄곧 우겨대왔었는데 마침내 감출 길이 없었는지 本名(본명)이「金成柱(김성주)」라는 것은 是認(시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도 造作(조작)이고 實名(실명)은「金聖柱(김성주)」라는 異論(이론)도 一部(일부)에는 있다고 한다. 하여간 자기 이름 석字(자)부터 分明(분명)치가 못한 爲人(위인)이다.

김성주(金聖柱)로 나오는 문헌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를 잘못 적은 것이다. 이것이 김성주가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사례이다
자서전 서두에 필자가 50년전 1900년에 출생했다고 하여 1950년 경 집필한 것임.
조혁군(朝革軍)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1]을 말한다.
[pp.6 ~ 7] 내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간부(中央幹部)가 되고 조혁군(朝革軍)의 참모장(參謀長)이 됨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들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과 격렬(激烈)한 정면(正面) 충돌(衝突)을 불면(不免)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동지(同志)들을 많이 죽이고 또 나를 죽이려고 많이 힘썼다. 또 나도 나의 직권(職權)이 있는 한도내(限度內)에서 그들과 여하(如何)한 투쟁(鬪爭)도 불사(不辭)하여 처음에 이론(理論)으로부터 나중에는 실제행동(實際行動)에 이르기까지 치열(熾烈)한 투쟁(鬪爭)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실제행동(實際行動)이라 함은 물론(勿論) 서로 총칼을 가지고 상쟁(相爭)하였음을 말함이며, 그때 그들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책임자(責任者) 현익철(玄益哲)[2], 조혁군(朝革軍)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3], 동참모장(同參謀長) 나를 가리켜 「삼대살인반동영수(三大殺人反動領袖)」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금 북한(北韓)의 괴수(魁首)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원명(原名)이 김성주(金聖柱)인 바,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집은 장백(長白)에 있었고 그의 부친(父親)은 우리 민족진영(民族陣營)의 일원(一員)이었다. 우리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주어 길림(吉林) 육문중학(毓文中學) 2학년(學年)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그 후 그는 조혁군(朝革軍) 제(第)1중대(中隊) 이종락(李鍾洛) 대장(隊長) 아래 있다가 공산주의(共産主義)로 사상(思想)을 전환(轉換)한 것이다. 1929년(年) 내가 길림(吉林)에 어떤 대표(代表)로 가서 있을 때에 그는 상기(上記) 육문중학(毓文中學)에서 공부하면서 길림(吉林)에 있는 소년(少年)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小年隊)를 조직(組織)하고 그가 대장(隊長)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 다니던 것이 기억(記憶)되며, 내가 참모장(參謀長)으로 1932년(年) 하(夏) 당취오군(唐聚五軍)[4]과 같이 통화(通化)에 사령부(司令部)를 설치(設置)하고 있을 때 그는 무송(撫松)으로부터 한국공산청년(韓國共産靑年) 수십명(數十名)을 데리고 중국인(中國人) 유본초(劉本初)라는 사람과 동행(同行)하여 통화성(通化城)에 있는 양사령(梁司令)[3]과 나를 찾아와, 자기(自己)네도 항일(抗日)할 터이니 무기(武器)를 달라고 요구(要求)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사상적(思想的)으로 우리와는 적대진영(敵對陣營)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지불리(置之不理)해 보냈던 것도 생각난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그의 기도(企圖)가 세계(世界)를 정복(征服)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와는 언제든지 양립(兩立)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과 타협(妥協)이니 하는 것은 호상(互相) 자기(自己)네의 정략전략(政略戰略)에 의한 일종(一種) 시간(時間)을 쟁취(爭取)하는 수단(手段)에 불과(不過)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pp.94, 103, 109, 152 에 김일성의 창덕학교(彰德學校) 급우나 만주에서 그를 알았던 지인 등이 그의 본명이 「金聖柱」라고 하는 증언이 나온다.

김성주(金成柱)로 나오는 문헌

  • 1930년 3월 14일 국민부(國民府)는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북한 김일성(金成柱)이 선출되었다.[5]
  • 1931년 3월 24일에 김일성(金成柱)이 세화군(世火軍)[6]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委員)으로 선임되었다는 일제의 기록이 있다.[7]
함경남도 국경지대 압록강 대안(對岸)에 반거(蟠踞)하는 소위 김일성(金日成) 일파라 칭하는 무장단(武裝團)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1路軍) 제2군(第2軍) 제6사(第6師)로서 김일성(金日成)을 사장(師長), 위민생(魏民生)을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하는 한인(韓人) 중국인(中國人) 혼합의 무장단이다. [김일성(金日成)의 신원(身元)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본명(本名) 김성주(金成柱), 당 29세(當 29歲),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平安南道 大同郡 古坪面 南里) 출신(出身)으로 어릴 때 실부모(實父母)를 따라 간도(間島) 방면으로 이주하여 그 지방에서 성인(成人)이 되어 무장단(武裝團)에 투신(投身)한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그의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pp.8~9.≫[8]

그러나 위 기록은 1939년 9월 당시 제2방면군장으로 활동하던 북한 김일성과 1937년 11월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이 이름이 같아서 동일인으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기록도 같은 종류이다.

북한 김일성을 보천보 사건 당사자라 하고, 본명을 金成桂라 하였다. (桂는 柱의 오기)

김성주(金誠柱)로 나오는 문헌

최동오(崔東旿, 1892~1963)는 월북한 최덕신(崔德新, 1914~1989)의 부친으로 김일성이 1926년 봄 정의부(正義府)에서 세운 만주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9]을 3개월여 다닐 때 숙장(塾長)이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제자 김일성을 만난다며 평양을 다녀왔는데, 6.25 때 납북 당했다고 하나 월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성주(金成周)로 나오는 문헌

1930년 6월 27일에 국민부 소년단(國民府 少年團)이 창립되었는데, 단원 52명으로 총대장 이윤홍(李允洪) 아래 제3분대장으로 김성주(金成周)가 나온다. 김성주(金成周)라는 이름은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周는 아마도 柱의 오기로 추정되며 북한 김일성이 맞을 것이다.

공개가 금지된 소학교 학적부

김일성 본명의 정확한 한자를 알 수 있는 공신력이 높은 자료로 만주 장백현(長白縣)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의 학적부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공개가 금지되어 있어 불행히도 아직은 확인할 수 없다.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 이름을 접한 시기

김성주가 어릴 때부터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여러 건 있다. 이것이 그가 후에 1930년말 또는 1931년 초 만주 오가자(五家子) 시절부터 김일성이란 이름 또는 별명을 사용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신이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며 우쭐대는 과대망상증의 기미를 일찍부터 보였다.

김형직이 아들들에게 김일성 장군처럼 되라고 가르쳤다는 증언

해방 직후 중국에서 김성주(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 )를 만나 중국 국민당 군대에서 9개월간 침식을 같이하며 지냈던 시인 이용상(李容相,1924∼2005)[10]이 당시 김영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11][12]

그 김일성 장군은 백발노인으로 축지법을 쓰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 백발장군이 지금은 몇살쯤 되셨을까. 나는 김영주에게 물었다.

『김 동지, 형님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길래 김일성 장군이란 말씀입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33세라고 대답했다. 33세라면 내 계산과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김영주는

『네, 알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해야 할 김일성 장군 나이가 왜 33세냐는 말씀이지요. 나 역시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얘기하셨으니까요.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요. .......』

김성주는 부친의 가르침대로 김일성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만주 오가자(五家子) 시절부터 김일성 이름을 쓰며 김일성 장군 흉내를 내었고,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자신이 바로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다 가짜 김일성이란 꼬리표를 달게 된다.

김성주가 어릴 때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다는 다른 증언들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p.32] 더욱 흥미로운 證言은 以北의 金聖柱와 平南 大同郡 龍山面 下里 七谷의 彰德學校라는 普通學校에서 같이 공부했던 東國大學校의 趙義俊博士로부터 들을 수가 있었으니 그는 彰德學校 五學年 때 (1924년) 「김일성장군」이란 분이 滿洲에서 獨立運動을 위해서 活躍하고 있는데 日軍들이 붙잡으려고 해도 못 붙잡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以北의 金聖柱도 어릴 때부터 「김일성장군」이란 名聲 높은 獨立鬪士의 이름을 듣고 자랐음이 틀림없다.

옛 「김일성장군」의 實在와 또 以北의 金聖柱가 어릴 때부터 옛 「김일성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하는 것을 證言해 주는 사람으로 玄應洙(1892년생. 市內 금호동 거주)씨가 있다. 玄씨는 “1919년 2월 15일에 平南 大同郡 龍山面 下里 七谷에 있는 彰德學校에 敎員으로 부임했다. 當時 校長은 金聖柱의 外祖父인 康敦煜長老였으며 金聖柱는 아직 學校에도 가기 前이었는데 그 때는 外家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以北의 金聖柱傳에도 그때 外家에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때 우리는 滿洲에서 活躍하고 있는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자주 듣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김일성 장군의 活躍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에 찬 마음으로 주고 받고 있을 때 金聖柱는 외할아버지인 康長老 곁에 앉아 있곤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라고 玄翁은 筆者에게 증언해 주었던 것이다.

[pp.122 ~ 124] 어느날 三成학교 선생 최형우(崔衡宇)(당시 三三,四세, 定州사람)가 金聖柱에게 『만주에서는 中國사람식으로 堂號(別號)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堂號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金聖柱는 좋은 堂號 하나를 지어달라고 崔衡宇에게 부탁했다. 崔衡宇는 堂號 몇 개를 지어 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金聖柱는 여러 개의 堂號 가운데서 「一星」 두 글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崔衡宇는 『그래 그럼 우선 별 하나만 달아보자』 하며 「一星」 이란 堂號를 써 주었다. 이때 金聖柱가 여러 개의 別號 가운데서 하필이면 「一星」을 골라잡은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金佐鎭장군을 죽인 金一星, 間島폭동 사건의 金一星 등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면 그것에 영향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金聖柱가 「一星」이 마음에 든다고 골라잡으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다는 그 心理狀態에는 다음의 두가지 사연이 영향했다고 분석할 수가 있다. 1919년 2월 15일에 大同郡 龍山面 下里에 있던 彰德學校에 선생으로 부임했던 玄應洙(八二세, 서울 金湖洞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창덕학교에 부임한지 꼬박 10여일만에 三一운동이 터졌다. 창덕학교에서는 三월 四일에 만세를 불렀다. 당시 교장은 康敦煜장로였고 四년제 학교에 학생은 50명 정도였다. 그때 金聖柱는 外祖父인 康長老한테 와 있었는데 학교에 다니기 전이었다. 三一운동 직후부터 露滿 국경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용감히 싸우고 있는 김일성 장군 (일본 육사출신 金日成 장군에 해당)의 이야기가 들려왔는데 글자는 어떻게 쓰는지 몰라도 김일성 장군이라 했다. 나는 교장 康장로집 안방에서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때 金聖柱는 康장로 무릎 앞에 앉아서 우리 어른들 이야기를 듣곤 했다.』

金聖柱는 어릴 때 들은 「김일성」 장군 이름에 영향되어 「一星」이란 별호를 골랐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그래서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한가지 사연은 金聖柱가 五家子에 있을 때 같은 패의 한 사람인 변달환(邊達煥)의 아버지 변대우(邊大宇)로부터 또 한번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邊大宇는 鐵馬團이란 獨立團의 단장이었던 사람인데 鐵馬團은 후에 正義府에 흡수되었다. 이 邊大宇가 韓日合倂 직후부터 「김일성」 이란 獨立軍 隊長이 咸鏡道와 間島 사이에서 용감하게 싸웠는데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端川출신 金一成장군에 해당)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李善一씨는 金聖柱와 같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金聖柱가 「一星」을 고른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도 있음직하다.

1916년 5월 발표된 평안남도 교원시험합격자 (평양) 명단에 현응수(玄應洙)가 나오는데, 1919년 2월 15일 창덕학교(彰德學校) 교사로 부임한 위의 증언자로 보인다. 위의 현응수씨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김일성은 어릴 때 외가에서 살면서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그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는데 대해 외조모 위돈신(魏敦信)이 못마땅해 했다는 증언들이 있다.[13][14]

김일성은 창덕학교 시절에 외갓집에서 다니면서 진짜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이 창덕학교 교장이었고 당시 그 학교의 교사였던 현응수도 1920년 전후로 자주 칠골 외갓집에 가서 진짜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는데 그때 어린 김일성과 외할머니인 위돈신도 함께 듣곤 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외할머니는 김일성 이름을 사칭하는 외손자 김성주가 이런 큰 거짓말로 위장하고 나서는 모습이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별명

유격대에 투신하기 전인 1931년 경에 그는 본명 김성주 외에도 김일성(金一成) 또는 김일성(金一星)의 별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金一成)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의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되었다는 1931년 3월 26일자 및 5월 4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3월 26일자 조선일보 기사.

김일성(金一星)과 한별

일성(一星)은 북한 김일성이 1930년 말 ~ 1931년 초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 머물던 시절에 최형우(崔衡宇, 1905~1950)가 지어준 별호이다.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22~124.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9) 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1974.04.15 종합 3면
어느날 삼성(三成)학교 선생 최형우(당시33∼34세·정주사람)가 김성주(三成)에게 『만주에서는 중국사람식으로 당호(堂號, 별호)란 게 있어야 하는데 자네도 당호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김성주는 좋은 당호 하나를 지어 달라고 최형우에게 부탁했다.

최형우는 당호 몇개를 지어보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다. 김성주는 여러 개의 당호 가운데서 「일성(一星)」두 글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자기도 한번 장군이 되고싶다고 했다.

그래서 최형우는 『그래, 그럼 우선 별 하나만 달아보자』하며 「일성(一星)」이란 당호를 써주었다.
당시 김성주는 삼성학교 설립자 이만진(李萬鎭)의 집에서 아들 이선일(李善一, 1912년생, 서울 영등포 거주)씨와 함께 한방에서 살았는데, 이명영은 1970년대초 이선일씨로부터 이러한 증언을 들었다. 이명영은 당시 김성주가이 최형우가 제시한 여러 개의 당호 중에 하필 「일성(一星)」을 선택한 것은 그가 일찌기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15]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최형우가 쓴 책에는 이 일에 대해 아래와 같이 나온다.
동지들은 그의 장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성(一星)」이라는 아호(雅號)의 선물을 주었다.
조선사회(朝鮮社會)의 효성(曉星)이 되여달나는 것이다. 이로부터 金은 「一星」 또는 「日成」으로 행명(行名)하였다.

한편 북한은 김혁(金赫)이라는 시인이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동지들이 이를 한자로 "一星"이라 적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조선의 별"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 이를 선전했다.[16][17]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김혁의 본명은 김근혁(金根赫)으로 김일성이 알던 인물이기는 하나 그보다 7~8년 이상 연장자이고 선배격이었다.[18] "한별"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 김인묵이라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19][20]

오가자(五家子)의 살인범 홍종환(洪鍾煥)은 누구인가?

초기 만주 빨치산 시절 : 1932년 7월 ~ 1936년 2월

북한 김일성이 1932년말 경 유격대에 투신한 초기에 어디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엄청난 전과들은 믿을만한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유격대 투신 초기인 1932년에서 1936년까지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찾아내어 검토한 사람은 허동찬(許東粲, 1932 ~ )이다.[22] 그가 찾아낸 기록들을 보면 유격대 내에 약간의 지위를 가진 인물로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의 이름이 어지럽게 나오는데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판별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이런 이름의 사람이 둘 이상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일선은 김일성과 관계없는 이름처럼 보이지만, 김일성의 이칭으로 명기된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같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허동찬은 이런 기록들 속에서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과 북한 김일성을 분간해내려 시도했으나, 이름만 보고 이들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종석은 항일 유격대 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사람은 북한 김일성 한 사람뿐이라면서 허동찬을 맹비판하고 있다.[23] 그렇지만 실제로 이러한 이름의 인물이 2명 이상인 것은 기록상으로 확실하다.

근래에 북한 김일성이 소련군 시절인 1942년에 직접 지은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나[24]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인 1941년 1월 작성한 이력서가[25] 발굴되었는데 여기에는 이 시기에 그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단 (제2사 제1단이라고도 함.) 소속으로 단장(團長) 방진성(方振聲) 아래에서 참모장과 정치위원을 지냈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위 기록들에 부하가 30~40명인 제3단의 제3연장(連長)으로 나오는 김일선(金日善, 金一善)도 북한 김일성으로 보아 큰 무리가 없다.

부하가 100명인 김일성(金一星)도 김일선(金日善)과 같은 제3단의 제3연장(連長)으로 나오나, 이는 두 사람의 이름이 거의 같아서 생긴 혼선일 것이다. 부하가 100명이면 연장(連長)보다 훨씬 높은 직급이라야 하며, 3단의 단장 방진성(方振聲)보다도 더 상급자로 보인다. 이 사람이 1936년 봄 2군의 제3사장(후에 제6사장으로 개칭)이 되는 김일성(金日成)이 확실해 보인다. 3단의 참모나 연장(連長) 지위에 있은 북한 김일성은 경력이 턱없이 못미쳐서 사장(師長)으로 승진할 수 있는 계제가 전혀 아니었다. 그가 사장이 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소대장이나 중대참모급 인물을 중대장과 대대참모들을 제치고 갑자기 대대장으로 승진시키는 것과 같으며, 어떤 군대에서도 이런 인사는 하지 않는다.

김의성(金義成)이란 이름도 썼나?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왕윤성(王潤成)에게 보낸 1936년 2월 21일자 편지에[26] 그의 이름이 김의성(金義成)으로 나온다.

위증민은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북만에(額穆) 와 있는 동북인민혁명군 2군 3단장 방진성(方振聲)을 만나 3단 내부의 변동 사항에 대해 알게 되는데, 3단의 김의[일]성(金义[日]成), 임수산(林水山)은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았다고 하였다.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1936년 2월 21일자로 왕윤성(王潤成)에게 보낸 서신.[26] 위민생(魏民生)은 위증민의 다른 이름이다. 방단장(方團長)은 2군 2사 1단(3단) 단장 방진성(方振聲)이다.
나는 액목(額穆)에 무사히 도착하여 방단장(方團長) 등을 만나보았습니다. 3단(三團)의 내부에 상당한 변동이 있었으며, 김의[일]성(金义[日]成), 임수산(林水山) 2 동지는 서부로 전근하여 다른 일을 맡게 되었고, 3단 정위(三團 政委)는 왕자균(王紫鈞) 동지가 맡았으며, 각 연장(連長)과 정치지도원(政治指導員)이 또 변경되었습니다. .......

我安全到额穆和方团长等见了面, 对于三团的内部有相当的变动, 金义[日]成、林水山二同志调西部另有工作担负, 三团政委由王紫钧同志担任, 各连长政治指导员亦有变更。 .......

원래 편지에는 연도가 적혀있지 않았으나 자료집 편집시 1935년으로 추정하여 기재했는데, 위증민과 방진성이 북만의 액목(額穆)에서 만날 수 있는 시기는 그 해가 아닌 1936년이다. 2군 2사가 북만으로 이동하여 5군과 혼성군을 편성하던 시기임.

편지에 북한 김일성을 왜 김의성(金義[义]成)이라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1936년 초 북만에서 편성된 2군과 5군 혼성부대 지휘부의 金日成과 구분하기 위해 다르게 적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 : 1936년 3월 ~ 1937년 12월

조국광복회와 김동명

오늘날 북한은 김일성이 1936년 5월 김동명이란 가명으로 이동백(리동백), 여운형(려운형)과 같이 주도하여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7][28] 그러나 북한이 말하는 이런 단체는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며, 실존한 적이 없다. 김동명이란 가명도 후대에 만들어낸 것이지 실제로 당시에 쓰던 가명으로 보기 어렵다.

조국광복회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주요 간부인 오성륜(吳成崙, 1900~1947 ?)·이상준(李相俊, 李東光, 1904~1937)·엄수명(嚴洙明)[29] 등이 주도해 만든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30][31]를 흉내내어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金日成)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명백히 다른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초기에 김일선(金一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등으로 적히다 1935년말 북만주로 가서 주보중(周保中, 1902~1964)항일연군 제5군과 혼성부대를 편성할 때부터[32] 이후 1937년 11월 전사할 때까지 김일성(金日成)으로 나온다.

6사장 김일성의 활동기간인 1936년 4월 ~ 1937년말 사이에는 그에 대한 기록만 나오며, 이 기간에 북한 김일성은 어디에 소속되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만한 기록은 없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 1938년 11월 ~ 1940년 10월

1939년 ~ 1940년간에 활동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기간에 국내 신문에 김일성(金日成)으로 보도된 사람도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부분 양민에 대한 약탈과 관련한 것이며, 후면에 단신으로 처리된 것이어서 크게 주목받을만한 기사는 없다.

이전에는 그의 이름이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선(金日善), 김일선(金一善)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며, 간혹 김일성(金日成)으로 기재된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었던 상관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한 이후 같은 김일성(金日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증언이 많고, 실제로도 그 이후부터 대부분 기록에 김일성(金日成)으로 나타난다.

북한 김일성이 그의 이름을 한자로 金日成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37년 11월 13일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 전사한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상관인 6사장 김일성과 같은 金日成으로 쓰기는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렇게 적힌 기록은 많지 않다.

김일성 이름의 발음

소련군 문서에 러시아어로 적힌 김일성의 이름 진지첸(Цзин Жи-чэн).[33]

북한 김일성의 이름은 시기에 따라 한자로 金一成, 金一星, 金日成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 이름의 한국어 발음은 모두 같은 김일성이라서 같은 이름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중국어나 일본어 발음은 전부 달라서 같은 이름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어려서 만주로 이주하여 거기서 성장하며 중국인 학교를 주로 다녔기 때문에 그의 모국어는 중국어에 가까우며, 해방 당시 한국말은 상당히 서툴고 더듬거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34][35][36]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이름 金日成도 김일성 아닌 중국어 발음 [예를 들면 Jīn rì chéng 등] 으로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들끼리 말할 때는 김일성으로 했을 수도 있겠지만,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중국에 거의 동화된 사람들이 많아 자기들끼리 대화도 중국어로 할 때가 많았다.[37][38]

이러한 사실은 그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한 이후 소련군 문서에 러시아어로 적힌 그의 이름에서 확인이 된다.

소련군 88여단 진지첸 대위

소련군 88여단에서 공식적인 그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чэн)이었고 계급은 대위(капитан)였다. 까삐딴(капитан)은 영어의 captain에 해당된다.

해방 직후

해방 후 소련군 까삐딴 진지첸(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эн)의 변신 과정은 눈부시다. 중국공산당에 붙었다 소련군에 붙었다 하다가 스탈린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간택받아 북한의 지도자 자리까지 꿰어찬 『꺼삐딴 진(капитан Цзин)』의 놀라운 변신술에 비하면 전광용(全光鏞, 1919~1988)의 소설 『꺼삐딴 리』[39]의 주인공은 차라리 애교스럽게 보인다. 현실은 항상 소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원산항 입북 당시 본명 김성주로 소개

김일성은 해방 후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88여단을 떠나 1945년 9월 19일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로 원산항에 입북할 때 배에서 내리면서 마중나온 인사들에게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다고 한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후 북한의 문화성 부상을 지낸 정상진(鄭尙進, 1918~2013)의 증언이다.

정상진(鄭尙進)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45년 9월18일 원산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대좌로부터 「내일 김일성이 원산항에 도착하니 함께 나가 통역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음날인 19일 오전 소련군 사령부 고위장교 2명과 함께 부두에 나갔지요. ...........』
............

정씨의 증언도 비슷하다.

김일성은 배에서 내린 후 환영인사들과 인사를 나눌때 「김성주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더군요.

환영나온 인사들에게 사실대로 『'진지첸'입니다』 하기는 뭣하고, 그렇다고 대중들 앞에 달리 무슨 이름으로 나설지 아직 결정한 바도 없으므로 우선 본명 김성주를 댔을 것이다.

평양에 와서 가명 김영환(金永煥)으로 행세

원산항으로 입북한 김일성은 9월 22일에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이후로 한달 가까이 비밀리에 잠행하며 김영환(金永煥, 金英煥)이라는 새로운 가명을 사용하였다.[40][41]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고 이름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데다 지지세력도 전무하니 대중 앞에 어떻게 나설지, 이름은 진지첸 아닌 무엇으로 할 지 탐색하며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재덕(韓載德)의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將軍 凱旋記)』의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썼다는 부분.
장군(將軍)이 조선(朝鮮)에 돌아오기는 그보다 훨씬 전(前)이었다. 비행기(飛行機) 우에서 내려다보이는 고국(故國)의 산천(山川)은 너무나 아름다웟다. 『이 강산(江山)을 위하여 내 어찌 아니 싸울 수 있었으랴! 그러나 노력(努力)은 이제부터다.』 그럼으로 장군(將軍)은 떠들지 않고 돌아왓다.

소리없이 개선(凱旋)한 장군(將軍)은 돌아온 그날부터 또 맹활동(猛活動)을 개시(開始)하였다. 사정(事情)에 의(依)하여 이름도 김영환(金永煥)으로 변명(變名)을 하고. 二十年 그리던 고향(故鄕), 조부모(祖父母) 친척(親戚)을 二十里 밖에 두고도 비화(飛火)같이 달리는 마음을 달래며 이날까지 꾹 참어온 것이다.

그러나 복면(覆面)을 벗은 이제 엇더케 하로를 참으랴! 장군(將軍)은 날듯이 할아버지 할머니 계신 옛집으로 달려 온 것이다.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는 말이 삭제되었다.

『김일성 장군 개선기』는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귀국 후 처음 대중 앞에 나섰던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동이 일자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기자들을 대동하고 처음으로 고향마을 만경대로 가서 조부모를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보일 당시 수행기자였던 한재덕이 10월 19일부터 평양민보에 연재한 기사이다. 한재덕도 그가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항으로 귀국한 줄은 모르고 비행기로 온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며,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귀국한 것을 '떠들지 않고 돌아왔다'고 했다. 국내에서 무명인사였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공개리에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할 형편이 못되었다.

『정로(正路)』 1945년 11월 1일자의 김영환(金永煥)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1945년 11월 1일자 기사에 분국이 설치를 결의한 1945년 10월 13일 열린 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에서 김영환(金永煥) 동무의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김영환(金永煥)은 김일성이다. 당시 분국의 책임자로는 김일성 아닌 김용범(金鎔範, 1902 ~ 1947)이 뽑혔으나, 12월 17일에 김일성으로 교체된다.

  • [朝鮮共産黨 北部朝鮮分局 設置 : 劃期! 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 : 『정로(正路)』 1945년 11월 1일자

김동환(金東煥)이란 가명도 썼는가?

박갑동(朴甲東, 1919~ )은 그가 입북 직후 김동환(金東煥)이란 가명을 썼다고 했고[42][43], 중앙일보사에서 간행한 『비록(祕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김동환(金東煥)으로 나온다.[44][45] 당시 그가 실제로 이런 가명도 썼는지 아니면 김영환(金永煥)의 착오인지 분명하지 않다.

소련군 문서에 1945년 10월 2일부터 진지첸을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어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Ivanovich Korotkov, 1925~ )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 문서에는 북한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적혀 있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코로트코프박사는 소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인 지난해 10월 당시 국방장관 샤포슈니코프 원수(현재 독립국가연합 통합군 총사령관)로부터 "한국전쟁에 관한 진실을 규명, 공식적인 입장을 정립하라"는 특별지시를 받고 93년 7월까지 작업완료를 목표로 자신을 팀장으로 한 5명의 연구원이 현재 비밀문건들을 연구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불법화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중앙문서보관소에 가장 가치있는 관련 자료들이 비장돼 있음을 알게 됐으며 여기서 金日成(김일성)의 개인신상과 한국전쟁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 내용들을 파악하게 됐다고 말했다.

金日成(김일성)의 이름과 관련, 1945년 10월 1일까지 작성된 모든 문건에는「진지첸」이란 中國(중국) 이름으로 표기됐으나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최종 선택된 10월 2일부터는 현재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했음을 증명한다.

당시 소련군정은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46] 당시 일에 대한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47]

김일성이 나의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극동사령부의 스티코프 중장(후에 대장)으로부터 암호 전문이 날아왔다.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감은 적중했다.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드는 작전에 들어갔다. 특수선동부장 코비첸코(V.V. Kovyzhenko)에게 김일성의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히고 가슴에 달고 다니는 적기 훈장도 떼어 내라고 지시했다. 일부 북조선 인민들의 반소감정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박정애[48]와 김용범[49]은 두 벌의 신사복을 구해 오는 등 붉은 군대 사령부 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47]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선 소련군 진지첸 대위. 가슴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은 맨 오른 쪽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다.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한재덕(韓載德)이 김일성에 해방 후 처음으로 장군 칭호 수여.[50]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箕林里 公設運動場)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는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다. 33세의 그가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사람들은 나이가 맞지 않은 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가짜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회가 끝나자 단상으로 몰려가 항의하는 사람들을 몽둥이를 휘둘러 쫓기도 했고, 총소리도 들렸다고 한다.[51]


그는 북한 주민들이 선택한 지도자가 아니고 소련군이 조만식을 제거하고 강제로 만들어준 지도자일 뿐이다. 소련군이 아니었으면 국내에 아무 기반도 지지세력도 없는 그가 해방 후 평양의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방법도 없었다. 자기 입으로 아무리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라 한들 믿어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해방 전에 장군이라 불린 적 없어

김일성은 해방 전에는 만주 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 어디에서도 장군이라 불린 적이 없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들도 그를 장군이라 부르지 않았다고 황장엽이 증언했다.[52]

한때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투쟁에 참가한 임춘추는 사람들이 '김일성 장군님' 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무슨 장군님이라는 말을 쓰겠소? 그저 김일성 동무라고 불렀지" 라고 말하였으며, 최현이나 최용진 같은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은 '김일성 동무'라고도 하지 않고, “내가 김일성에게 전화했소" 또는 “김일성이 오늘 나를 수산상으로 임명하였소" 라고 대중들 앞에서도 공공연히 말하곤 하였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김일성과 김정일뿐만 아니라, 임춘추가 제 이름자 도 쓸 줄 몰랐다고 말한 김정숙까지 우상화하여 항일의 여장군' 이라고 하면서 김일성·김정일과 함께 '3대장군 기념비'를 세우는 소동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소련군 대위 진지첸(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대중들에게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지만, 만주나 소련에서 그가 장군으로 불리웠던 적도 없고, 평양에 온 소련군 장성들도 처음에는 그를 「다와리시치 김일센 (товарищ Ким Ир Сен [Comrade Kim Ir Sen])」 즉 '김일성 동무'라고 불렀다.[53]

해방 후 갑자기 그에게 장군이란 칭호를 처음 달아준 사람은 당시 그를 수행하며 기사를 쓰던 평양민보 편집국장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이라고 한다. 이런 말은 한재덕이 평양에서 1946년 봄에 쓴 글이나,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후에 쓴 글에서 확인이 된다.

이는 1946년의 북한 문헌에서도 확인이 되는 것이니 사실로 보인다.

함께 보기


각주

  1.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 백과사전
  2. 현익철(玄益哲, 1890~193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3.0 3.1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梁世鳳) 위키백과
  4. Tang Juwu, Tang Chu-wu,唐聚五,(20 April 1898 – 18 May 1939) Wikipedia
  5.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6.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 위키백과
  7.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 김성주(金成柱)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8. 8.0 8.1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 第一. 所謂 惠山事件の 槪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39.09.01) pp.8~9.
  9. 화성의숙(華成義塾) 터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10.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李容相) 오마이뉴스 2005.04.14
  11.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51)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36) -「김일성」으로 둔갑 중앙일보 1991.05.27 종합 9면
  12. 이용상(李容相, 1924-2005),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 (서울 : 한줄기, 1994) pp.251~253
  13. 김씨 일가의 우상화-만경대혁명사적지 자유아시아방송 2019-04-30
  14. (국방일보 기획/연재) <1> 가짜 김일성의 정체(상) : 김성주(김일성의 본명), 항일 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위장 평양 입성 국방일보 2016. 04. 12 / <2> 가짜 김일성의 정체(하) 김성주, ‘보천보 전투’ 이끈 김성주 이름·업적 도용 국방일보 2016. 04. 20
  15.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김성주가 김일성 장군 이름을 접한 시기 우남위키
  16. 조선의 별(朝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조선의 별 위키백과
  18. 남만한인청년총동맹 - 위키백과
  19. 김일성의 이름은 어떻게 신화가 됐을까 rfa 2017. 2. 24
  20. 한별 김인묵은 [연변 녀성운동의 선구자 — 김영신 (1905―1932)]의 남편이라고 한다.
  21. 만주(滿洲)의 비밀결사(秘密結社) 농민동맹사건 공판(農民同盟事件公判) : 조선일보 1933.02.03 석간6면
  22.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속] (金日成 評傳 [續])』,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8년 4월 1일.
  23. 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p.442~444.
  24.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
  25. [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16개항 경력 관련 질문에 답변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단독]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26. 26.0 26.1 「魏民生關于三, 四團情況給王潤成信 (1935年 2月 21日)」, 中共延边州委党史研究所编, 《东满地区革命历史文献汇编》 上冊 (中共延边州委会党史研究室, 2000年) p.336
  27.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 제12장 광복의 새 봄을 앞당겨 (1936년 3월 ~ 1936년 5월) / 5. 조국광복회』
  28.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 제18장 중일 전쟁의 불길 속에서 (1937년 7월 ~ 1937년 11월) / 6. 《혜산 사건》을 겪으면서』
  29. 엄수명(嚴洙明)은 동북항일연군 1로군 군수처장이었던 엄필순(嚴弼順, ? ~ 1936)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30. 「昭和十二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の狀況」 사상휘보 제14호 1938-03-01
  31. ≪中國 共産黨の 朝鮮內 抗日人民戰線 結成および日支事變 後方攪亂 事件≫ : 강덕상(姜徳相) 편, 『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30 : 朝鮮 6』(東京, みすず書房, 1976) p.265
  32.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북만(北滿)의 2군과 5군 혼성부대 지휘관 김일성(金日成) 우남위키
  3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MBC 2002.02.03 방영) youtube
  34.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35.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36.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37.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한국일보 1990.11.03 : 88여단에는 중국인이 많고 만주에 침투,첩보활동을 했기 때문에 모든 교육과 훈련은 중국어로 실시됐고 조선인끼리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
  38. 1945년 9월 중순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서 귀국길의 김일성 일행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39. 《꺼삐딴 리》 위키백과
  40. 한재덕(韓載德),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27) 1962.06.01 동아일보 2면 [1959년 한국으로 귀순 후 쓴 글]
  41.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04.15) p.134.
  42. 박갑동, 『박헌영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인간사, 1983, p. 144~145
  43. (49)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2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136
  44.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1992), pp. 80-83.
  45. 김일성의 사전조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5) - 중앙일보 1991. 9. 2
    김일성 환영대회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 중앙일보 1991. 9. 5.
  46. 김일성 환영대회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4~90
  47. 47.0 47.1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룡,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룡 (朴吉龍, 1920~)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48. 박정애(朴正愛, 1907 ~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9. 김용범(金鎔範, 1902 ~ 1947) - 위키백과
  50.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p.80~87. (위 이미지는 p.87임)
  51.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09.05 종합 5면
  52.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 북한민주화 전략집⟩, (시대정신, 2006.04.15) p.40.
  53.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3회)  : 〈金日成直屬(김일성직속) 記者(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 년 05 월 16일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