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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직은 한의원을 하면서 아편 밀거래에도 간여했다는 증언이 많은데, 이 때문인지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ref>[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12242018114448.html 북한의 종교-김일성과 기독교(2)]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8-12-25</ref>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부터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지는데, 당시 무송지방에 횡행하던 마적떼에게 재산을 약탈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허동찬 허동찬(許東粲, 1932~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30223005002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 39)》] 서울신문 1993-02-23 5면</ref><ref>[https://ko.wikipedia.org/wiki/허동찬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7, pp.94~95</ref>
 
김형직은 한의원을 하면서 아편 밀거래에도 간여했다는 증언이 많은데, 이 때문인지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ref>[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12242018114448.html 북한의 종교-김일성과 기독교(2)]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8-12-25</ref>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부터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지는데, 당시 무송지방에 횡행하던 마적떼에게 재산을 약탈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허동찬 허동찬(許東粲, 1932~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30223005002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 39)》] 서울신문 1993-02-23 5면</ref><ref>[https://ko.wikipedia.org/wiki/허동찬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7, pp.94~9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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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24_1_0032537 이용상(李容相,1924∼2005)]<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9037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李容相)] 오마이뉴스 2005.04.14</ref>은 해방 직후 1945년 9월 15일부터 1946년 5월 6일까지 중국군에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김영주(金英柱, 1920~ )]]와 같이 숙식하며 붙어 살다시피한 친구였는데, 그로부터 부친 김형직이 생전에 아들들에게 유명한 김일성 장군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면서 그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2567178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51)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36) -「김일성」으로 둔갑 ] 중앙일보  1991.05.2 종합 9면</ref> 북한 김일성이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것이 나중에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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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4일 (금) 21:21 판

동명이인 김일성 보기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영어: Kim Il-sung, 러시아어: Ким Ир Сен)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북한) 출범 당시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다.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 기반이 전혀없었던 그는 운좋게 스탈린의 간택을 받아 소련의 도움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초기에는 연안파, 남로당파 등 여러 세력과 연합할 수 밖에 없었다. 6.25 남침 전쟁 실패후 책임을 박헌영 등에게 덮어씌워 남로당파를 숙청하고,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연안파, 소련파 등을 숙청하여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1967년 마지막 남은 갑산파를 숙청한 후부터 장남 김정일에로 권력 승계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김일성을 능가하게 되어 김일성은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로 전락하였다. 그는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케 한 전범이고, 정치적 반대 계층을 탄압하고 수십만을 수용소에 가두어 반인도적 범죄를 자행한 최악의 반인권 사범이며, 국가를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의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화한 총책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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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출생과 가계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1]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리 (平壤府 龍山面 下里)[2] 칠골의 외가에서 김형직(金亨稷, 1894~1926)강반석(康盤石, 1892~1932)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했다.[3][4] 그의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萬景臺) 고향집은 조부모 김보현(金輔鉉, 1871~1955)과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이 살던 집이며[5],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 남동(平壤府 古順和面 南洞)[6]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들 지역은 평양부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대동군(大同郡)에 속하게 되어[7] 주소가 친가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古平面 南里) 만경대, 외가는 대동군 용산면 하리(龍山面 下里) 칠골로 바뀌게 된다. 오늘날 칠골과 만경대는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 만경대구역에 편입되어 있다.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 ~ 1943)과 모친 강반석이 다니던 칠골교회는 김일성의 지시로 1992년에 복원했다고 한다.[8][9]

흔히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라고 하나, 그의 어린 시절 학교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성주(金聖柱)가 맞을 가능성이 크고[10], 김성주(金誠柱)로 기록한 문헌도 있다.[11][12] 김일성은 3가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맞다고 했다 한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金膺禹, 1845~1878)는 남의 집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1860년부터 평양에 살고 있던 지주 리평택(李平澤)의 조상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로 만경대에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은 김응우가 제네랄 셔먼호 격침[13]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나[14], 이런 말은 1967년 갑산파 숙청후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할 필요성 때문에 지어낸 것이다.

조부 김보현은 평범한 농부였고, 부친 김형직은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만경대와 평안남도 강동군 봉화리에서 서당 교사를 하다, 장일환(張日煥, 1886 ~ 1918) 등이 주도한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15][16][17] 1919년 무렵 중강진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5월에 압록강 대안(對岸)인 만주 임강현(臨江縣)으로 피신한다.[18][19] 만주에서는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내걸고 무면허 한의원을 개업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수학기

김일성은 임강현에 살 때인 1920년 봄에 중국인 학교인 임강 소학교(臨江小學校, 즉 모아산현립소학교)에 입학하고,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모아산현립소학교(帽兒山縣立小學校)는 1927년 당시 한인을 박해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반동 소학교였다.[20] 이어 1921년 여름 부모가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로 이주하자[21][22] 팔도구 소학교에 다니게 된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내가 다니는 팔도구소학교는 4년제 중국인 학교였는데 수업도 중국말로 하고 취급하는 과목도 중국의 것이었다. 시내에는 조선학교가 없었다.」고 했다.[23]

장백현 팔도구소학교의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으나 중국 당국이 공개를 금하고 있다.[24]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

김일성은 1923년 1월 만주 8도구에서 걸어서 외가인 칠골로 와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1943)이 운영에 간여하던 창덕학교(彰德學校)를 2년간 다니다가 부친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25년 1월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만주로 갔다고 한다. 이때 그가 창덕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월남한 당시 급우들의 증언으로 사실 확인이 된다. 그러나 당시 어린 아이였던 그가 수백 km 의 먼길을 한겨울에 혼자 걸어서 왕복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눈덮히고 얼어붙은 산골 길을 어린 아이 혼자 걷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도중에 숙식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을 때이다. 올 때는 부친이 동행했고, 돌아갈 때도 누군가가 동행했을 것이다. 한 겨울에 그 먼길을 어린 아이 혼자 걸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식이 그렇게 하도록 방치했다고 자기 부모를 욕보이는 짓이다.

북한에서는 왕복 모두 김일성 혼자 걸은 것으로 주장하며, 칠골로 걸어 왔다는 경로를 배움의 천리길, 1925년 1월 칠골 외가를 떠나 같은 길을 거꾸로 걸어 만주로 돌아간 길을 광복의 천리길이라 명명하고, 매년 학생들이 이 길을 따라 걷도록 하는 행군을 시키고 있다.[25] 당시 김일성이 만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느면서 맹세했다고 하는 말이 각종 김일성 전기에 판박이처럼 나온다.[26]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지어낸 것으로, 그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평양민보(平壤民報) 1945년 10월 19일자에 처음 실렸다.[27][28][29]

부친 김형직의 사망

만주로 돌아온 김일성은 부모를 따라 무송현(撫松縣)으로 이주하여 소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봄에 정의부(正義府)에서 운영하고, 최동오(崔東旿, 1892∼1963)가 숙장(塾長)으로 있던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들어갔으나 그해 6월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그만두게 된다.[30]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경향의 사람으로 만주에서도 찾아온 환자들이 공산주의자인 경우 치료를 거부하고 돌려보내 이들의 분노를 사서 테러를 당해 죽었다고 한다.[31][32]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pp.96~97] 당시(當時) 무송(撫松)에 살았던 이도일(李道日)씨(79세, 釜山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형직(亨稷)이랑 같이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인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에 관계(關係)했었다. 단장(團長)은 김호(金虎)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였다. 그런데 그때 공산당 운동(共產黨運動)이 벌어지면서부터 독립운동 진영(獨立運動陣營)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의(漢醫)였던 김형직(金亨稷)은 독립군(獨立軍)한테는 약도 주고 치료(治療)도 해주었으나 공산당(共產黨)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아 공산당한데 원한을 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공산당(共產黨)들이 와서 분풀이로 형직(亨稷)이를 살해(殺害)하고 말았다. 김성주(金聖柱)는 자기 아버지를 누가 죽인지도 모르고 지금 공산당(共產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형직은 한의원을 하면서 아편 밀거래에도 간여했다는 증언이 많은데, 이 때문인지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33]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부터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지는데, 당시 무송지방에 횡행하던 마적떼에게 재산을 약탈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34][35]

시인 이용상(李容相,1924∼2005)[36]은 해방 직후 1945년 9월 15일부터 1946년 5월 6일까지 중국군에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 )와 같이 숙식하며 붙어 살다시피한 친구였는데, 그로부터 부친 김형직이 생전에 아들들에게 유명한 김일성 장군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면서 그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37] 북한 김일성이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것이 나중에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중학교 과정

부친이 사망한 후 김일성은 한 동안 방황하다 마골단(馬骨團) 이라는 부유한 사람들을 골라 죽이고 재물을 강탈하는 극좌 폭력집단에 들어가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때 정의부(正義府)에서는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파견하여 이들을 제압하는데, 이종락은 김일성을 불쌍히 여겨 데려와 봉천(奉天)의 평단중학교(平旦中學校)에 입학시켜주었다고 한다.[38] (평단중학 재학은 그 학교 출신자의 증언에 의한 것으로 북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도 얼마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나 몇몇 사람의 후원을 얻어 길림의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들어가게 된다. 김학규(金學奎, 1900~1967)의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이 생전에 정의부 사람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으므로 정의부에서 김일성에게 장학금을 대어주었다고 한다.[39] 그러나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조직 사건으로[10] 경찰의 단속을 받아 육문중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이것이 북한에서 인정하는 김일성의 최종학력이다.

2019년에 공개된 1941년 1월 작성의 김일성 이력서에 의하면[40] 1929년에 길림시(吉林市)에서 국민당 당국에 체포되어 5개월간 수감되었다고 하였는데, 조선공산청년회 사건 때문일 것이다. 증거가 없고 보증인들이 있어 석방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작성된 또 다른 소련군 시절 이력서에는 1930년에 6개월간 길림시의 감옥에 있었다고 하여 이력서의 기록들도 100%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41]

반국민부 활동기 (1929~1932)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당시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민족 진영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계략에 빠져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족진영과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은 서로 공존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유시 참변을 모면한 민족진영 사람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1920년대 중반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등 소위 3부가 정립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만주의 젊은 층들에는 공산주의 열풍이 불어 3부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조직의 존립기반 자체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3부 통합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서로간의 의견차가 커서 완전한 통합은 이루지 못하고, 두 갈래로 부분 통합을 하게된다.[42][43][44][45]

정의부의 주류 세력들과 신민부, 참의부 일부 인사가 참여하여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가 만들어졌고[46], 산하에 군사조직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두게 된다[47][48]. 그러나 국민부 내에도 이미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 있어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1931년 2월 3일자 동아일보 2면의 이종락 체포 기사와 사진 : 맨 오른 쪽이 김일성의 상관 이종락이다.

원래 정의부 소속이었던 이종락(李鐘洛)은 그대로 국민부에 소속되는데, 육문중학을 중퇴하고 갈 곳없는 김일성을 데려다 국민부 산하 간부 양성기관인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약칭 南滿學院)에 입학시킨다. 남만학원은 국민부 본부가 있던 요녕성(遼寧省)의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에 있었는데, 김일성의 남만학원 재학사실은 당시 왕청문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의 증언에 의해 알려진 것으로 북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49]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

당시 김일성은 국민부 산하 청년조직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청총)에 가입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부 지도부는 1929년 10월 중순 남만청총에 침투해 들어와 접수하려는 극렬 ML파 공산주의자들 6명을 체포하여 사살하였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이 사건을 거론하며 국민부 지도부를 비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종락(李鐘洛)과 김일성도 국민부 지도부 편에 서서 이 사건의 사후 수습에 협조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분파간에 알력이 심해 ML파 공산주의자들은 이종락등도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1930년 3월 14일 국민부 산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북한 김일성(金成柱)이 선출되었다.[50]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 초까지 길림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나[51], 1930년 3월 14일에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 간부로 선출되고 있으므로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아마도 당시 '반동단체' 국민부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런 조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와 세화군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9대장이었던 이종락(李鐘洛, 1907~1940)국민부(國民府) 내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 8월 국민부를 탈퇴하고 나와 김광렬(金光烈, 1896 ~ ?)의 동아혁명군(東亞革命軍)과 연합하여 9월 10일에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라는 군사조직을 만든다.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서 이탈해 나온 조직인데다, 국민부 타도를 목적으로 하면서도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혼란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가 내세운 강령을 보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타도, 국민부 타도,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공산혁명 완수 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고 있고, 조선독립이나 항일투쟁이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52] 순수한 조선인들만의 조직인데도 중국인 공산당원처럼 사고하며 행동하고 있다. 당시 18세의 김일성도 이런 조직의 일원이었으니 조선독립운동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이종락(李鍾洛)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되었다는 동아일보 1931-03-26 일자 2면기사.
체포된 이종락(李鍾洛)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길림성 정부로 호송된다는 동아일보 1931-05-04 일자 2면기사

1931년 1월말 이종락 등 지도부가 구속된 후 잔존세력이 세화군(世火軍),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조금 더 존속하나 1931년 말에 완전히 소멸한다.

1931년 3월 24일에 김일성(金成柱)이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委員)으로 선임되었다는 일제의 기록이 있다.[53] 그러나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자 기사에 "이종락(李鐘洛) 부하 김일성(金一成) 등 3명이 체포"되었다고 하였고[54], 이어 같은 신문 5월 4 일자 기사에는 조사를 받은 이 3명이 길림성 정부로 호송된다고 하였다.[55] 그가 이때 길림의 감옥에 갇혔던 것은 사실로 보이나 얼마나 오래 투옥되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아일보 기사로 보아 당시 김성주는 김일성(金一成)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30년 말 이종락 부대의 세금 징수원이 되어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 가 있던 시기에 삼성학교(三成學校) 교사였던 최형우(崔衡宇, 1905~1950)가 일성(一星)이란 별호를 지어 주었다는 증언이 있고[56][57][58], 북한은 김혁이라는 시인이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동지들이 한자로 一星이라 적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59] 어쨌던 당시 한때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것은 사실로 보이나, 본명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쓰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변성명이 필요할 때 김일성이라고 둘러댄 것이 아닌가 한다.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

김일성이 1930년말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 가 있었다는 것은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나온다.[60] 당시 그는 삼성학교(三成學校)를 세운 이만진(李萬鎭)의 집에서 아들 이선일(李善一, 1912~?)과 한 방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선일이 1970년대 초 이명영(李命英, 1928~2000)에게 증언한 바에 의하면 오가자에 두세달 머물 당시 그는 일련의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재빨리 도망쳤다고 한다.[61][62][63]

이종락의 길흑농민동맹(吉黑農民同盟)은 오가자에도 지부를 설치했는데 변달환(邊達煥, 당시25∼26세)이 그 책임자였다. 변은 동시에 오가자 지부의 군사세포의 대장이었으며 이선일(李善一)씨도 잠시 그 부대장(副隊長)으로 있은 일이 있다. 대원엔 이선일씨의 사촌 처남 한영서(韓永瑞)와 문시선(文時宣) 등이 있었다. 오가자 에 있어서 김성주는 농사일 같은 것을 자진해서 돕기도 했으나 그 성격은 사나운 정도를 넘어서 점점 잔인한 면이 나타났다. 그 잔인성 때문에 드디어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 저지르고 재빨리 도주>

오가자에 50리쯤 떨어진 대유수(大楡樹)란 곳에 정모(鄭某)라는 동포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을 반동으로 몰아 교살한 것이 바로 김성주 였다. 김성주는 변달환(邊達煥)·한영서(韓永瑞) 등과 같이 정모를 붙잡아 오가자로 데려오다가 도중에서 김성주가 정(鄭)을 교살해 버린 것이다. 또 이선일씨는 김성주가 중국인 두 사람을 반동으로 몰아 때려죽이는 것을 오가자에서 목격했었다. 갖고 있던 총도 쓰지 않고 일부러 교살·타살하는 것이 김성주의 본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살인 사건을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이라 했다.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었다.

이 농민동맹사건 때문에 변달환(邊達煥)·한영서(韓永瑞)·천학진(千學振) 등이 붙잡혀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했다. 천학진은 해방되어 출옥했다. 그러나 김성주는 이 사건 때도 재빨리 도망을 쳐서 붙잡히지 않았다. 길림에서도 그랬고 남만 학원 때도 그랬고 또 이 사건에서도 그는 도망을 치는데는 아주 머리가 빨랐다. 해방 후 김성주가 평양에 나타나 권력을 잡자 이들은 모두 한 자리씩 했다. 한영서는 대동군 농민위원장, 문시선은 문화성, 변달환·천학진도 정권기관에서 일했다. 이선일씨는 같이 일 하자는 걸 뿌리치고 월남했다.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을 보도한 1933-02-01 동아일보 3면 기사.[64] 달아난 공범 홍종환(洪鍾煥)이 김성주로 보이며, 가명이거나 임의로 둘러댄 이름일 것이다.

이선일이 증언한 1970년대 초에는 이런 일은 현지에서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었다. 과거 신문들이 DB화 된 오늘날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면 위의 증언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므로 사실로 보아도 무방하다. 기사에 의하면 살인사건이 일어난 날자는 음력 1930년 12월 25일 (양력 1931년 2월 12일)이고, 피살자 정모(鄭某)씨의 이름은 정원일(鄭元一), 체포된 살인범 이름은 변달환(邊達煥)·한용서(韓用瑞)·천학진(千學振)이다.[65][66][67][64][68] 피살자가 교살 당했다는 것까지 정확하다. 다만 달아난 공범으로 홍종환(洪鍾煥)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김성주의 가명이거나, 잡힌 사람들이 엉뚱한 이름을 댔을 가능성이 크다.

이선일의 위 증언에 나오는 사건 관련자들 변달환(邊達煥)·한용서(韓用瑞)·문시선(文時宣)과 변달환의 친척 변가리(邊佳里)는 1930년도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서의 김일성에 대한 회상기를 남겼으므로[69][70] 그의 증언은 틀림없는 사실로 볼 수 있다.

재일교포인 허동찬(許東粲)과 임택삼(林擇三)은 비슷한 시기에 암살당한 정신(鄭信, 1898~1930)의 암살범이 이종락 부하라는 기록을 근거로 김성주에 의해 피살된 정모씨가 정신이라고 주장하나[71][72],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위의 당시 신문 기사에서 확인이 된다. 정신이 암살된 시기는 이보다 조금 먼저인 1930년 12월 초순경이다.[73]

변달환(邊達煥, 1897~?)은 길림농민동맹(吉林農民同盟)에 가입하여 지부장으로서 활동한 적이 있고 공산주의를 신봉한다고 일제의 기록에도 나오며, 변대우(邊大于, 1878~?)의 아들이다. 이들 부자에 대한 이야기는 《세기와 더불어》에도 장황하게 나온다.[74]

이선일은 당시 변대우가 "한일합병(韓日合倂) 직후부터 「김일성」 이란 독립군 대장(獨立軍 隊長)이 함경도(咸鏡道)와 간도(間島) 사이에서 용감하게 싸웠는데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김성주와 같이 들었다는 증언도 하였다.[56][57] 이 김일성은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1888 ~ 1926)으로 보인다. 김성주도 어려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선호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고 그가 일찍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다.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는 김일성 아닌 이종락이 조직

북한은 김일성이 1926년 화성의숙 재학시절에 조직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이 오늘날 조선노동당의 뿌리이고 현대사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1968년 에 새로 나온 것으로 전에는 없던 말이다.[75] 다수 학자들의 연구와 중국의 문헌 등에 의하면 ‘ㅌ·ㄷ’는 김성주(김일성) 아닌 이종락(李鍾洛)이 조직한 것이며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의 다른 이름이다.[76] 1931년 3월 17일자 《중국공산당 남만특위(南滿特委) 보고서》도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중심 지도자는 이종락이며 근거지는 고유수(孤楡樹), 회덕현(懷德縣) 등이라고 밝히고 있다.[77] 매일신보 1932년 5월 5일자 체포된 이종락의 재판 관련 보도에도 이종락이 『타도○○○○주의(打倒○○○○主義)』를 표방하는 단체를 만들었다고 하였다.[78]

북한의 주장은 1945년 12월 간행된 최형우(崔衡宇, 1905 ~ 1950, 최일천)의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에 나오는 말을 뒤늦게 발견하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11] 그러나 이 책에는 연대 오류가 많고, 최형우가 북한에 나타난 김일성이 자신이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에 알던 김성주인 것을 알고 그에게 아부하기 위해 부풀려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79] 최형우가 김일성을 안 것은 1930년말 오가자 시절이므로[80], 그가 1926년 화성의숙을 다닐 때의 일을 잘 알았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일성이 화성의숙을 잠간 다닐 때는 동급생들이 대부분 그보다 나이가 4~5세 연상이었고, 그 이후로도 이종락의 말단 부하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당시 그는 무슨 조직을 주도적으로 만들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최형우는 해방 후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에 살았는데, 6.25 때 인민군에게 처형 당했다. 북한은 1990년대에 뒤늦게 그를 복권시켰다고 한다.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 참살

믿고 따랐던 상관 이종락이 체포 구금되고, 속했던 군사조직도 흐지부지 와해되자 의지할 데를 잃은 김일성은 무송(撫松)으로 돌아가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은 이 패거리들을 제압하러 1932년 2월 중순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하 10명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장거리 행군에 지쳐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81][82][83] 이것이 김일성의 최초의 무장투쟁이다.

이 사건에 대한 당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으나, 피살된 고동뢰 소대원 중 한 명이었던 김문빈(金文彬)의 친구이자 당시 김일성과도 알고 지냈던 이시찬(李時燦)의 증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증언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1974년 당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나, 조선혁명군에 고동뢰 소대장이 실제로 있었고, 그가 나오는 마지막 기록은 1932년 2월 상순이라는 것이 확인된다.[84] 또 조선혁명군 측에 김성주 일당을 제압해주도록 요청했다는 조선혁명군 중대장을 지낸 장철호(張喆鎬, 1892~?)라는 인물도 확인이 된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그가 길림에서 육문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친구 장철호(張喆鎬)로부터 학비 후원을 받았다고 하였다.[85] 김형직도 정의부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므로 장철호를 알았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세졌던 사람조차 괴롭히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8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마치 심용준과 대단한 친분이 있었고, 그가 은퇴한 후에도 자신을 도와주려한 것처럼 장황하게 써 놓았으나 거짓말로 보인다.[87] 심용준은 김일성이 살해한 고동뢰 소대 10명의 직속 상관 중대장이었으므로 김일성을 원수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88]

모친 강반석의 사망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도망갔던 김일성은 1932년 초여름 조선혁명군 양세봉 총사령을 다시 찾아와서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고 조선혁명군에 자신을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세봉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는 했지만, 못 미더워하여 그가 원하는 직책은 맡겨주지 않았다. 이에 김일성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89] 김학규(金學奎, 1900~1967)의 자서전에 의하면 1932년 여름 김일성(金聖柱)이 양세봉을 찾은 것은 사실이다.[39]

이해 7월 31일에 안도현(安圖縣)에서 살던 모친 강반석이 병으로 사망한다.

중공당 산하 유격대 활동기 (1932~1940)

소련이 공산혁명에 성공하면서, 만주에는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 사조가 몰려온다. 1930년 5월 30일에 간도폭동이 있었고,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 1932년 3월 만주국이 수립되자 만주 도처에서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抗日遊擊隊)가 조직되기 시작한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安圖縣) 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주장하며 이날을 인민군 창건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는 당시 안도현 유격대 대장은 이영배(李英培)로 나오며, 김일성의 이름은 없다. 다른 정황을 보아도 이때 김일성이 유격대를 창건했다고 보기 힘든 점이 많다. 1932년 여름 조선혁명군 양세봉 총사령을 찾아 자신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7월 31일에 모친이 사망하므로, 그가 유격대에 투신한 것은 적어도 모친 사망 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주 빨치산 출신으로 북한의 최고재판소장을 지낸 이국진(李國鎭, 1905~1980)은 김일성이 1932년 초겨울(연말) 안도 유격대를 찾아와 가담했다고 증언한다.[90]

李國鎭(이국진)(前 국가최고검찰장)의 증언.
"1932년에 들어와서야 中國(중국) 공산당이 직접 이끄는 反日(반일)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했소. 항일홍군유격대라고 불린 이 유격대는 처음에는 인원이 많아야 10명 내외였으며 총도 몇 자루 없었소. 1932년 초겨울 安圖(안도) 유격대에 金成柱(김성주)라는 학생 옷차림의 청년이 참가했는데 그는 원래 3년제 소학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소. 이 사람이 바로 金日成(김일성) 동지요. 그 당시 유격대를 지휘한 이들은 중국인 주보중(周保中) 양정우(楊靖宇) 이연록(李延祿) 동장영(童長榮) 등과 조선인인 이홍광(李紅光) 이동광(李東光)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이광(李光) 등이었소. 부대 명칭은 처음에 반일홍군유격대였고 33년 1월 중국 공산당이 「만주의 각급 당조직과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다시 36년 2월 중국공산당 공산국제주재대표단의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이 발표된 뒤[91] 해방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소"

당시의 명문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김일성이 잠간 소학교 선생을 한 것은 맞는 것 같다.[92] 중국공산당 공산국제주재대표단이란 코민테른(Comintern, Communist International, 국제당[國際黨]) 주재 대표단을 말하며, 동북항일연군이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았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위 이국진의 증언은 다른 내용들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므로, 김일성이 1932년 초겨울에 유격대에 들어왔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또한 김일성이 유격대에 처음 투신할 때의 이름은 본명 김성주 그대로였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공산당 가입

다수 기록에는 김일성이 1932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나온다.[93][94][95] 그러나 최근 발굴된 김일성이 소련으로 도피한 직후인 1941년 1월 자필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력서에는 1931년 이청산(李靑山)의 보증으로 봉천성 안도현(奉天省 安圖縣)의 중공당 조직에 가입하였다고 했다.[40]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滿洲省委)의 안도현위(安圖縣委) 간부로 이청산(李靑山)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나[96], 중공당 가입 시기가 이력서의 1931년이 정확한지는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소련군 시절 작성된 김일성의 또 다른 이력서에는 중국 공산당 아닌 조선 공산당 당원이라고 한 것[41], 1935년에 중공당원이 되었다고 한 것[97], 1935년에 동만주에서 조선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 것[98] 등도 있어 이력서들도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렵고, 검증을 요한다.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1930년대 초 만주에는 잡다한 성격의 무장단체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만주를 지배하던 마적 출신 군벌 장작림(張作霖, 1873~1928)이 1928년 폭사한 후 그의 잔존 세력이었던 군대, 각종 마적 집단,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홍군 유격대 등이다. 항일 투쟁을 위해 이런 집단들이 통합하거나 연대를 모색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성립하지만, 통일된 지휘체계를 가진 조직이 아니라 1군부터 11군까지 나뉘어져 각 군의 군장이 지휘하는 체제였다. 좀더 많은 무장단체를 규합하고, 지휘체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명칭에서 공산주의 색채를 드러내는 "인민혁명"을 떼어내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바꾸어 무색무취한 항일군인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력이 더 강화되었고, 이들은 중공당 만주성위와 코민테른의 지휘 감독하에 있었다. 중공당원들이 주축이었지만, 연안의 중공당 중앙과는 거리가 멀어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다.

11개 군을 활동 지역에 따라 3그룹으로 묶어 1, 2, 3로군(路軍)으로 편성한다. 이 중에서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1군과 2군을 묶은 것이 1로군이며, 총사령은 양정우(楊靖宇, 1905~1940)였다. 동만주의 2로군 총사령은 주보중(周保中, 1902-1964), 북만주의 3로군 총사령은 조상지(趙尙志)[나중에 이조린(李兆麟)으로 교체]였으며, 3개 로군을 총괄하는 지휘체계를 만드는데는 실패했다. 부대가 각지에 분산되어 유격전을 벌이며 수시로 이동해 다녀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단일 지휘체계를 갖춘다 해도 실효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김일성이 유격대에 투신한 초기에 어디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엄청난 전과들은 믿을만한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유격대 투신 초기인 1932년에서 1936년까지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찾아내어 검토한 사람은 허동찬(許東粲, 1932 ~ )이다.[99] 그가 찾아낸 기록들을 보면 유격대 내에 약간의 지위를 가진 인물로 김일성(金日成),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등의 이름이 어지럽게 나오는데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판별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이런 이름의 사람이 둘 이상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김일선은 김일성과 관계없는 이름처럼 보이지만, 김일성의 이칭으로 명기된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같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북한 김일성이 유격대 시절 초기에 어떤 이름을 썼는지도 명확하지 않으므로 이런 기록들 중에 실제 북한 김일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청천(李靑天), 양세봉(梁世奉, 梁瑞鳳) 등 계열의 한인 독립군 각파 회의에 고이허(高而虛)파 대표로 김일성(金一成)이란 인물이 참석했다는 1934년 8월 17일자 조선신문(朝鮮新聞) 보도도 있어, 그가 이 무렵까지 국민부(國民府)와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이허는 회덕현 오가자(懷德縣五家子)의 삼성학교 교사를 지냈고, 1930년 초에 국민부 산하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의 상무집행위원이었는데, 당시 김일성(金成柱)은 그 아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한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이었다.[50]

나중에 동북항일연군에서 두드러진 직책에 있었던 김일성(金日成)은 처음의 1로군 2군 6사장, 나중의 제2방면군장 두 경우가 있는데, 둘 다 북한 김일성이 맞는지 여부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많은 자료가 새로 발굴된 지금은 이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가능하다.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에 일어난 보천보사건의 주역인데, 그는 그해 11월 13일 전사한 것이 확실하다.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나중의 제2방면 군장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나, 새로 발굴된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이는 북한 김일성이 확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보천보 주역 김일성은 전사했고, 그 이후부터 북한 김일성이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을 썼다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6사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하며, 그가 전사했다는 기록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며 전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북한도 보천보 사건 주역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고, 김일성 회고록에도 그렇게 써 놓았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군장(軍長)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
1군 군장 양정우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100][101]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102]


1939년~1941년 3월간 일본 관동군 노조에(野副) 토벌대의 항일연군 1로군에 대한 집중토벌로 1940년 2월말 총사령 양정우가 전사하고, 불리한 전세에서 살아날 길이 없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상관인 총사령 대행 위증민의 허락도 없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 소련으로 도주한다.[100][101] 이듬해 3월 위증민이 전사하면서 항일연군 1로군은 완전히 궤멸된다.

전투중의 지휘관이 도주한 김일성과 같은 행위는 정상적인 군율에 따르면 사형을 면할 길이 없으나, 처벌 권한을 가진 직속 상관들이 모두 전사하여 운좋게 처벌을 면한다. 소련군 88여단에서는 1로군 상관들이 모두 전사한 덕에 1로군을 대표하는 인사가 되어 비겁한 도망자가 오히려 더 대접을 받는 희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김일성 귀순 공작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가 항일연군 1로군을 상대로 집중적인 토벌을 벌이던 때와 같은 시기에 경찰 쪽은 항일연군 요인들 귀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귀순공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의 1949년 반민특위 증언과[103] 1940년 4월 만선일보(滿鮮日報)에 5회에 걸쳐 연재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에[104] 의하면 귀순공작의 마지막 대상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으로 체포되어 6년여 옥고를 치른 이종락(李鐘洛, 1907~1940)과,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체포되어 역시 옥고를 치른 박차석(朴且石)은[105][106] 석방되자 변절하여 일본 측에 협력하게 되는데, 김창영은 이들을 김일성 귀순 공작에 투입한다. 김일성으로서는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들로 생각하던 터라 부대로 찾아온 이들의 설득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종내에는 귀순을 결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귀순 후의 안전보장을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거는 바람에 협상이 지연되면서 이러한 상황이 1로군 총사령 양정우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1940년 1월말 부하를 이끌고 김일성 부대에 들이닥친 양정우는 협상차 들어와 있던 이종락을 체포하여 끌고 가서 사살한다. 이때문에 김일성 귀순공작은 막을 내리지만, 양정우 본인도 한달여 뒤 전사하고 만다.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의 성격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산하 조직이지만 중공당 본부와 거리가 멀어 실제로는 코민테른(국제당, 國際黨)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107][108][109] 중국공산당이나 코민테른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단체이며, 조선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코민테른은 조선의 독자성을 인정 하지도 않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따로 조선공산당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일본 공산당이나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도록 강제했다. 뿐만아니라 자유시 참변을 일으켜 조선인 항일 무장세력의 씨를 말리고,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소련 아닌 중국과 전쟁을 시작한 1937년 가을에는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으로 일본과의 마찰이 일어날까봐 연해주의 조선인 지도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시켜 그 중 1/3 이 첫해 겨울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게 만들었다.[110] 만주의 중국인들도 초기에 공산당 내에 조선인 간부들이 많은 것에 불만을 품고 민생단 사건을 일으켜 조선인 간부와 당원들 수백명을 처형하였다.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중국에 동화되어 중국을 위해 열심히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만 보아도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은 거짓인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중공당 본부가 1935년 8월 1일자로 발표한 이른바 「8·1선언」을 따라[111] 만주성위는 하부 당에 동북항일연군조직에 관한 지령을 내리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108]

『제2조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한 각 부대는 다음 3항을 준수한다.
①반만 항일(反滿抗日), 동북실지의 회복(東北失地의 回復), 중화조국의 옹호(中華祖國의 擁護)
②일적(日賊)·주구의 재산몰수
③민중과 연합하여 항일 구 중국(抗日救中國)』

이처럼 항일연군은 철저히 중국인들의 목적을 위한 조직일 뿐 조선독립운동과는 무관하였다.

김일성이 말년에 작가들을 동원하여 꾸며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빛나는 항일 무용담들로 가득차 있으나, 주요 줄거리들이 모두 조작 또는 과장된 것이다.

중공당원으로 만주 적화 위해 투쟁 - 김일성 자필 《항련 제1로군 약사》

김일성이 소련군에 있을 당시인 1942년에 중국인 상관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지시를 받고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는[112][113][114][115][116] 김일성 자신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간략한 역사인데, 만주에서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쓰고 있다. 여기에는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자신들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실패했다고 자인하고 있다. 김일성 자신도 그냥 중국 공산당원의 한 사람으로 중국인들 틈에 섞여 만주적화를 위해 투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내세우는 보천보 사건에 대해서조차 단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재일교포 빨치산 연구가 김찬정(金贊汀)에 의하면, 일본의 중국 유학생에게 김일성이 중국어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를 번역하게 했더니,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 많고 중학생 수준의 문장이라고 혹평하였다 한다.[115]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전 노동당 비서 황장엽(黃長燁)은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 본인이 자신의 항일투쟁에 대해서 했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117]

한때 김일성 자신도 우리들에게 “우리가 무장투쟁을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한 것이 안 한 것보다는 나을 터인데 왜 그것을 자꾸 깎아 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하지만 그것이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줄만한 사건이 아니며, 북한을 ‘해방’하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였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만주 안도현장(安圖縣長)이 꿈

항일연군 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는데,[118] 이런 것을 보면 당시 그는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여영준 본인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

또한 김일성 부대 뿐만 아니라 많은 항일연군 부대들이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일삼았다는 기록도 엄청나게 많다.[119][120][121][122] 그들이 생업에 종사한 것도 아니고, 몰래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봐야 턱없이 부족한데다 보급품을 조달할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본 군부대나 관공서를 쳐서 물자를 빼앗기에는 치러야할 희생이 너무 크고, 만만한 대상이 양민일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나올 것이 많은 돈많은 부잣집을 털고는 적당히 친일파를 응징했다고 구실을 붙여주면 되는 것이다. 납치해온 사람들 중 나이든 사람은 인질대금을 받고 풀어주고, 젊은 사람은 손실된 병력과 인력을 충당하게 했다. 항일연군의 여자 대원들도 납치되어 온 경우가 많다. 공산주의의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정당하다는 그들만의 논리야 있겠지만 사실상 마적단이나 다를바가 별로 없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던 정당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韓民)』 1936년 11월 30일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부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다.[123]

김일성의 비적(匪賊) 행위를 보도한 1936년 11월 30일자 『한민(韓民)』 기사. 『한민(韓民)』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던 정당 한국국민당의 기관지이다.[124]
여기의 김일성은 1937년 6월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공군(共軍)의 화해(禍害) 장백현을 근거로 하여 공산당으로 조직한 소위 동북 인민혁명군은 이주 동포의 재물을 약탈하며 사람을 붙잡아가며 인명을 살해함으로 해 지방이 거의 적지가 되어 사람이 붙어 살수가 없다는데 그중에도 김일성이 영솔한 부하가 명수도 사오백 명에 달하고 또 활동이 그중 제일 많다 한다. 그들은 촌리로 다니면서 곡식과 재물은 있는 대로 빼앗고 그래도 조금만 불만하면 집을 불사르고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기도 하는데 금년 일년 동안에 그들이 동포의 촌락을 습격한 회수가 사백이십팔회요 피해자의 수효는 이천이백사 명이며 十月 한달 동안에만 잡혀가서 인명의 손해 받은 것이 이백사 명이라 한다. 일본 군대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적극 행동을 취한다 하니 손해 받는 자는 가련한 한인뿐이다."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 브레미야'(Новое Время, The New Times, 新時代)는 1993년 4월 구 소련 군인 시절때 金日成을 잘 알고 있던 게오르규 트마노프의 증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125]

「제 2차 대전중 소련군 대위로서 극동 군관구 저격여단 소속 조선인 대대 대대장을 역임하며 하바로프스크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김일성은 1944년 7월에 열린 同여단 공산당 회의에서 중국인 대대(大隊) 정치위원으로부터 " 조선인 대대는 중국 길림성에서 현지 도둑과 짜고 민중에 대한 약탈행위를 반복했으며 중국 공산당원도 살해했다"고 고발당했다. 중국 정치위원은 "이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보다 공산당을 죽이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의에서"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스트"라고 변명했다.

탈북한 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 북한에 있을 때 김정숙 이전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金惠順)을 1980년대 중반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녀도 당시 마적질을 한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고 한다.[126]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많은 시일이 지나서야 나는 끝내 여 투사의 입을 열수 있었다.

“임자들은 항일 무장투쟁이다 하면 그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늘 왜놈토벌대들에게 쫓겨 다니고 굶고 떨고 그런 줄만 알겠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영화에서 본 것도 다 그런 것들뿐인데요”

“물론 그렇긴 했지,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늘 그렇게 굶고 배고프고 언제 죽을지도 모를 위협에 시달린다면 누가 그 짓을 하겠나. 아무리 명분이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말일세. 사실대로 말하면 집단부락이나 왜놈 목재소 같은 걸 하나 제대로 치면 며칠은 정말이지 배를 두드리며 잘 먹는 때도 있었어. 그 멋이 없다면 십여 년씩 산에서 싸우기가 힘들었을 거야.”

소련 도피 시기 (1940~1945)

만주서 항일 빨치산(게릴라) 활동을 하던 김일성은 일본군에 쫓겨 상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의 허락도 없이, 전투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1940년 10월 23일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100][101] 김일성과 소련 월경을 동행하였던 서순옥(徐順玉)[127]은 월경 전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128]

“1940년 8월에 김일성, 강위룡[129] 등 우리 16명은 소련으로 향하여 떠났다. 소련 땅에 들어서기 전에 훈춘의 어느 산꼭대기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혼례를 하였는데 혁명가를 부르며 오락을 진행하였다.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 유격대 전사들은 소련땅에 들어선 다음 김일성 동지가 강위룡과 다른 한 동무를 파견하여 소련 변방 전사들에게 체포당하라고 지시하였다. 체포된 다음에 정황을 소련 당조직에 알리자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체포되어 땅굴 감옥에 감금되었다.”

월경 직후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포시예트(Posyet) 항으로 끌려갔다가[130] 얼마간 감옥에 갇혔는데, 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101]

1940년 12월19일 주보중은 왕신림(王新林)에게 편지를 보내 김일성을 찾아줄 것을 요청했고[131], 41년 1월 2일에는 『검사 수속이 완료된 후 빨리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132] 이러한 주보중의 노력으로 풀려난 후 김일성은 하바로프스크[우수리스크의 착오] 근처 남야영에 머물렀다.

왕신림(王新林)은 만주서 넘어온 빨치산 문제를 담당하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의 중국식 암호명인데, 1941년 3월 부임해온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의 전임자로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후임자 소르킨도 왕신림(王新林)이란 이름을 그대로 썼다. 주보중이 1월 2일에 김일성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고, 1월 5일에는 김일성이 3로군 총사령이었던 장수전(張壽籛, 李兆麟)을 만나고 있으므로[133] 김일성이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1941년 1월 2일~1월 5일 사이이다.

오늘날 한국인 연해주 관광객들이 더러 찾는 포시에트항의 '김일성 감옥'이란 것이 있는데, 아마도 월경직후 김일성이 수감되었던 곳으로 보인다.[134]

김일성과 안길 (安吉, 1907∼1947), 서철(徐哲, 1907∼1992)이 1941년 1월 1일자로 왕신림(王新林)에게 올린 보고서가 중국측 사료에 나오는데[135], 그들이 소련으로 넘어오기 전 항일연군 1로군의 편성과 부대 상황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는 내용이다.

남야영(南野營)

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88여단 대원 사진. 제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達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제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제2열:장광적(張光迪, 중국), 풍중운(馮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貴, 중국), 팽시로(彭施魯, 중국)。제3열:양청해(楊淸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俠, 조선), 수장청(隋長靑, 중국)。제4열 :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進,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

소련으로 도피한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 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 Вя́тское, Vyatskoye)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 캠프)과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약간 떨어진 하마탄(Хаматан, Hamatan, 虾蟆塘), 즉 지금의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Razdolnoye) 마을의 남야영(南野營, B 캠프)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수용된다.

소련은 1937년 가을에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 지도급 인사 2천여명을 처형하고, 17만 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다.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가서 한겨울에 허허벌판에 내팽개쳐진 한인들은 첫 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정도가 사망했다.[110] 이런 만행으로 연해주에서의 한인독립운동은 완전히 맥이 끊기지만, 소련이 만주서 넘어온 조선인 빨치산들을 수용하여 교육과 훈련을 시킨 것은 나름대로 이용할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고,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돕기위한 목적으로 볼 수는 없다.

라즈돌노예의 기차역이 바로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인데, 불과 3년 뒤 남야영이 들어서고, 김일성 등이 거기에 수용된 것이다. 남야영에서 1941년 2월 16일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이 태어났다. 하지만 북한은 김정일의 생년은 1942년, 출생지는 백두산 밀영이라고 조작해 놓고있다. 그러나 라즈돌노예 마을길 88번지의 김정일이 실제 태어난 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도 많이 찾고 있으며, 잘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한 이후 남야영에 있을 때 상관 위증민(魏拯民, 1909 ~ 1941)을 찾아 오라는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의 명을 받고 1941년 4월10일 만주로 출발했다가 그해 11월12일에 소련으로 돌아왔다. 중간에 8월 10일~9월 14일 기간에 소련에 돌아와 보고를 하고 다시 갔다.[136][137][101] 위증민은 그가 만주로 출발도 하기 전인 1941년 3월 8일에 죽었는데, 김일성은 이 사실도 확인하지 못한채 소련으로 돌아 온다. 주보중은 김일성을 만주로 파견할 당시 그가 상관의 허락도 없이 소련으로 도주해온데 대해 적절히 처벌할 것을 요청하는 위증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려보냈다.[138][101]

『그 어떤 곤란과 원인이 있든 김일성. 이준산(伊俊山) 두 동지 소속부대원들이 소련 국경을 넘은 것은 오류다. 이 오류가 비록 전반적 혁명입장이 동요되었거나 총적 방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제1로군 총부대를 이탈하고 유격대가 투쟁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한 조건을 포기한 것이다. 또 전반 환경을 이해하지 않고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았으며 곤란을 극복할 방법을 더 많이 생각지 않고 기회주의적 성격인 월경방법을 취한 것이다.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김일성과 그 부하들 및 당간부들이 각성하고 그 오류를 비록 승인하기는 했지만 기율상에서 김일성 동지등에게 적당한 처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적당한 처분을 주기 바란다.』

그러나 처벌 권한이 있는 직속 상관 위증민이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처벌을 모면한다.

제88독립보병여단

1942년 7월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극동전선군 산하 제88독립보병여단(第88獨立步兵旅團,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88th Separate Infantry Brigade), 통칭 88여단이 북야영이 있는 뱌츠코예 마을에 창설되면서 김일성 일가는 이때 하마탄(라즈돌노예)에서 뱌츠코예로 이주한다. 88여단의 여단장은 주보중(周保中)이었으며, 김일성은 부하 100 여명을 통솔하는 제1대대 영장(대대장)이 되었고, 대위(Капитан, Captain)의 계급을 받았다. 88여단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던 사람은 왕신림(王新林)이란 암호명으로도 불리던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orkin, 1899 ~ 1980) 소장이었으며, 극동전선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았다.

소련군에서 김일성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는데, 이는 한자 이름 金日成을 중국식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139][140][141] (표준 중국어 보통화 발음은 아닌 듯함.)

88여단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1945년 8월 소련이 만주와 조선을 침공하는 대일본전을 개시할 때도 전혀 참전하지도 못했다. 여단장 주보중은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참전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장문의 건의서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소련이 부대를 만든 주된 목적이 그들이 전쟁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전후 점령지역에 그들을 투입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북한 지역을 점령한 후에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데려와 핵심 권력을 맡기며, 중국인들도 중국으로 귀환하여 88여단은 해체된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김일성이 해방 직전 5년간 소련군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해방 직전 5년간 항일활동 전무

김일성은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 해방 때까지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보냈다. 따라서 해방 당시 김일성의 전력은 항일투사라기보다 단순한 소련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크게 문제삼는다.

주소 북한대사를 지낸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는 1989년 방한 때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일과, 가장 중요한 항일투쟁 시기인 1940년에서 해방 때까지 하바로프스크의 88여단에 도피해 있은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142] 북한 전문가 이현웅도 이 점을 비판한다.[143]

항일무장투쟁은 194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 전 5년 간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김일성은 이 기간에 소련으로 도망쳐 극동군사령부 소속 ‘88여단’에서 만주 등 국경지역 침투 및 정보수집을 위한 간첩교육을 받았을 뿐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이런 약점들을 덮기 위해 ‘보천보전투’를 신화적 수준으로 날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다할 업적이 없는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신화수준으로 날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건마저도 그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빨치산 선배인 전사한 2군 6사장 김일성과 같은 같은 이름을 사용하여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144]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는 것이 꿈

만주서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간 김일성은 중국보다 앞선 소련의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이었던 이을설(李乙雪, 1921-2015)은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소련 시절의 김일성은 소련서 살고 싶어 했고, 국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145]

북한 전문가 란코프(Andrei Lankov)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146][147]

많은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매우 명백히 다음과 같이 내다보고 있었다.
즉 군대나 군사 아카데미에서 복무 후, 연대 또는 사단 지휘관이 되는 것 등으로, 역사가 조금만 다른데로 흘렀어도 후일 모스크바의 어디선가에 소련군 퇴역 대령 혹은 소장 출신인 김일성이 존재했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 유라(김정일)는 지금쯤 모스크바에 있는 어떤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민주주의 러시아'나 이와 비슷한 형태의 조직이 주도하는 많은 군중이 모인 가두행진에 열성적으로 참가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김일성은 빨치산 시절에는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118], 소련군 시절에는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런 그가 조선독립에 무슨 관심이 있어 목숨걸고 투쟁했겠는가? 그가 조선독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까지 맺어 일본과의 충돌을 극구 피하던 소련에 꼭꼭 숨어서 해방전 5년간 편안하게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 독립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소련에서 출세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88여단도 해체될 운명이라 장래가 불투명해져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소련 국방성 전사(戰史) 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던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Ivanovich Korotkov)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148]

진지첸이 자신의 생애 중 15년을 투자했던 ‘빨치산 전(戰)’은 지금 상태에서는 스탈린에게도 모택동에게도 필요치 않았다. 소련 극동전선으로 된 제88국제여단은 그 기본적 기능을 잃어버렸다. 막 군사적기 훈장을 받은 육군대위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군대의 집단 동원 해제가 시작되면서 매우 많은 장교들이 군사업무를 계속하느냐 ‘시민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육군대위 진치첸은 실망했다. 제88여단은 재편성돼야 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채소밭에서 야채가꾸기를 계속하거나 보잘것없는 공무원이 되고싶지 않았다. 물론 당의 직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것이 ‘상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같이 소련군에서 출세할만한 자격 요건도 갖추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그에게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다.

당시 그는 88여단을 관장하던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의 비밀 정보원(KGB 전신인 NKVD 요원)이 되어[149][150][151][152]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1953) 대장에게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을 하였다.[90][153][151][154] 이러한 프락치 역할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것이 그가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이다.

소련의 고려인 출신으로 소르킨 소장 밑에서 정보사업에 관여했고, 해방 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창설 초기부터 6.25때까지 정찰국장을 지냈고, 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으로 있다가 숙청당한 최원(崔元)은 88여단에서 김일성의 비밀스런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던 사람인데,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90]

최원(崔元)(소장·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의 증언
(崔元(최원)은 본래 蘇聯(소련)군 상위로서 원동사령부 솔로킨 소장 밑에서 정보사업을 했었다).
"소련 원동방면군 사령부에서는 중국 만주 항일연군 사람을 믿지 않았지요. 사령관 부르가예프(Purkayev) 대장이나 솔로킨(Sorkin) 소장도 그랬소. 솔로킨 소장은 베리야(1899~1953)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고 소련 국가안전위원회(NKVD, KGB전신)의 원동방면 책임자였는데 자주 항일연군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金日成(김일성)은 믿을 수있는 우리사람이라고 합디다. 솔로킨은 88여단의 내부 상황을 金(김)장군을 통해 손금보듯 파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솔로킨 소장이 金(김)장군을 우리사람이라고 한 것은 국가안전위원회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金(김)장군이 88여단에 있을때 모스크바에 두 번 갔는데 그것은 솔로킨 소장이 소련 수뇌부에 金(김)장군을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국가안전위원회는 KGB (Committee for State Security)를 말하며, 당시의 명칭은 그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위와 같은 최원의 증언을 듣고 기록으로 남긴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은 인민군 소장으로 사단(師團) 정치위원을 지내다 숙청, 투옥되어 10년 형기를 마치고 중국으로 탈출했는데, 1991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155]

소련인들은 어찌하여 金日成(김일성)을 그토록 어여삐 보았는가.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항일연군이 소련에 건너가기 전부터 두 군대 사이에는 크고 작은 마찰이 계속돼 왔다. 항일연군 전군이 소련으로 건너간 뒤에도 이런 마찰은 그칠 사이가 없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에서도 소련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소련을 조국으로 여기고 소련에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金日成(김일성)이었다.
反蘇(반소)독립군 蘇(소)에 密告(밀고)

중국말을 아는 솔로킨 소장은 이런 상황에서 金日成(김일성)과 손을 잡고 그에게 의지했다. 金日成(김일성)은 反蘇(반소) 경향을 가진 자신의 전우들을 솔로킨에게 고해 바쳤다. 金日成(김일성)은 소련 안전위원회(비밀경찰 KGB前身(전신))의 정보원이 된 것이다. 소련안전위원회는 金日成(김일성)과 기타 정보원을 통해 항일연군 내부 상황을 손금보듯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솔로킨과 金日成(김일성)의 관계는 88여단을 편성하기 전인 1941년 후반부터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金日成(김일성)을 88여단의 대대장으로 임명하는데는 솔로킨의 간섭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항일연군을 통솔했던 중국 공산당 측에서 보자면 혁명사업에 앞장서왔고 지도자로서 나무랄데 없는 재질을 갖춘 조선인 동지는 崔庸健(최용건) 金策(김책) 許亨植(허형식)이었다. 함께 싸웠던 항일 빨치산들도 모두 이를 긍정하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또 모두 金日成(김일성)을 지도했던 金日成(김일성)의 상관이었다.

소련인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했다. 그들의 관심의 초점은 소련이 시키는대로 할 사람은 누구이며 소련에 끝까지 충성할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련 비밀경찰의 정보원인 金日成(김일성)이 선택됐던 것이다.

88여단 당시 김일성이 소련 NKVD 비밀 정보원이었다는 것은 1985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 요원 Oleg Gordievsky(1938~ )가 공개한 KGB 문서에서도 밝혀졌다.[149][150][156]

김일성은 영명한 빨치산 작전으로 1945년 8월에 그의 조국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저항전쟁의 영웅으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KGB 본부는 김이 1945년 8월엔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북한지역이 소련군에 의하여 해방되고 있을 때 김은 러시아에서 赤軍의 대위 겸 NKVD(KGB의 前身)의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Kim posed as a wartime resistance hero who had freed his country from Japanese yoke in August 1945 after a partisan campaign of unsurpassed brilliance. The Center, however, was well aware that Kim had not even been in Korea in August 1945. While Korea was being liberated by Soviet troops, Kim had been serving in Russia as both a lieutenant in the Red Army and an agent of the NKVD (the predecessor of the KGB).

스탈린이 북한 지도자를 결정할 때 참고한 것은 NKVD와 극동군 사령부의 보고서였다. NKVD 총책임자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 1899 ~ 1953)는 NKVD 비밀 요원인 김일성을 밀었다. 88여단 자체도 베리야를 보좌하며 전선 후방의 첩보활동과 파괴공작활동을 하기 위한 ‘특수임무부대(Special Tasks)’의 기획과 실행을 담당했던 수도플라토프(Pavel A. Sudoplatov, 1907~1996)의 지도 아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88여단 소르킨 - NKVD 제4국 책임자 수도플라토프 - NKVD 수장 베리야 라인이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강력히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157] NKVD 수장 베리야와 국방상 보로쉴로프(Kliment Voroshilov)가 1939년 4월 15일 극동지역 NKVD 책임자들에게 만주 게릴라들을 도우라고 내려보낸 지령서가 있으므로[158], 베리야도 이들에 대해 일찍부터 보고를 받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극동군 사령부에서 북한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면접한 사람은 그에게 우호적일 수 밖에 없는 제2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Purkayev, 1894~1953)와 극동군 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이었으므로[159][160] 당연히 김일성에 대해 좋은 평가가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면접에서 오간 문답은 아래와 같았다.[139]

◇지도자로 선택된 과정: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金은 "특별인터뷰를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소련군 통역관은 후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고 나에게 말했다. 金에게는 질문에 답변만 하도록 허락되었는데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金 -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은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로 시작됐다.]

--귀관은 한국인인가?

▲ 그렇다.

--남평양에서 태어났는가?

▲그렇다.

--공산당원인가?

▲그렇다.

--가족은?

▲결혼했고 아들이 하나 있다.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은가?

▲그렇다.

--그렇다면 북한에 가서 일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계혁명에 도움이 된다면 어디든 가겠다.

(여기서 소련장군들은 "좋아. 대답 잘했어"라고 칭찬)

두 장군은 이어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金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국국적을 가진 전문가들이 북한에 보내지고 있다. 현재 북한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 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金日成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탈린은 1945년 9월초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지도자로 낙점하였다.[161][162][163]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키고,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안내하도록 했다고 한다.[162] 당시 바실렙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Ivan Ivanovich Kovalenko, 1919~2005)[164][165]는 후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61]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부관 이반 이바노비치 코바렌코씨의 증언

코바렌코씨에 따르면 극동군 총사령부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 후보로 추천한 이유는 그가 3년여 동안 소련 군대에서 정치 · 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그의 리더십과 계략이 뛰어나다고 판단됐으며, 30년대 중국과 만주 국경 지대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활동을 했을 뿐 조선공산당 등 종파 투쟁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바렌코씨의 증언은 이어진다.

"[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바실레프스키 사령관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있는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켜 놓고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불러온 후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모스크바로 안내토록 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전용 별장으로 직행, 그곳에서 한참동안 대기하다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받은 것이지요. 스탈린은 극동군과 KGB 극동본부에서 올린 김일성에 대한 평정서를 검토한 후 평정서 내용대로 조목조목 질문을 하더라는 겁니다. 간단한 식사를 곁들인 이 면접은 4시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소련군 대위 견장을 단 김일성은 자리가 자리인만큼 너무 긴장해 "예" "예" 만 연발할 뿐 한마디도 못했다고 훗날 중앙당에서 이 자리에 배석했던 고위 간부에게 들었습니다. "
코바렌코씨는 "김일성을 면접한 스탈린은 배석했던 군 고위 책임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 북한 정권의 주역이 결정됐다"고 회고 했다.

평양의 소련군정 요원으로 김일성과 자주 만나며 그에게 정치적 조언을 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 (당시 계급 중좌)도 김일성이 귀국전 스탈린의 면접심사를 받은 것을 증언했다.[166][167] 그는 이런 말을 김일성 본인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일성이 귀국전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보고 지도자로 결정되었다는 것에 회의적이나, 당시 일을 직접 알만한 위치에 있었던 위의 코발렌코와 메클레르의 증언은 믿을만한 것이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김일성이 귀국 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사실이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168] 또 극동군 사령부에서 김일성을 불러 면접심사한 것도 스탈린이 그를 만나기 전에 미리 알아보고 보고서를 올리라는 상부지시에 따른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지도자 결정은 스탈린 아닌 극동군 사령부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김일성은 사실상 북한 지도자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그가 항일투쟁 한 공적을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빨치산 동료들의 동태를 감시 밀고하는 밀정 역할로 극동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orkin, 1899~1980) 소장이나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Purkayev, 1894~1953) 대장 등 상관들의 신임을 얻은 덕분이다.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추천해 올리는데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김일성을 직접 잘 알던 소르킨과 푸르카예프 두 사람이다. 소련 사람들에게는 항일투쟁을 얼마나 했는지는 관심사가 아니었고, 자신들의 말을 얼마나 잘 들을지만 중요했다.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을 항일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실제와 상관없이 선전선동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소련은 잘 알고 있었고, 후일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동료를 밀고하는 프락치 노릇으로 일단 정권을 잡은 김일성은 자신을 조국을 해방시킨 엄청난 항일영웅으로 조작하는데 성공하고, 권력을 자자손손 대물림하는데까지 나아간다.

해방과 입북 - 소련군정기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만주 침공을 단행하며 대일본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의 북한 침공은 1945년 8월 9일 웅기 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전의를 상실해 있던 일본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소련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평양에 도착한 날은 8월 26일이다. 북한 점령은 많은 일본군 사상자를 낸채 소련군은 최소한의 피해만 입고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김일성을 비롯한 하바로프스크 88여단의 조선인들은 소련군의 대일전에 단 한명도 참전하지 못했다.

  • 북한에 진주하는 소련군 부대와 지휘 관할에 대해서는 극동의 소련군 참고.

평양에 처음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상부로부터 아무 지침이 없어 당시 북한주민들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을 조선인 대표로 인정하고, 여러가지 일을 진행한다. 그러나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 - 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라인으로 소련 군정 지휘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조만식에게도 많은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입북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169][170]

다음은 蘇聯軍(소련군)의 포로취급을 받다 탈출, 歸還途中(귀환도중) 滿州(만주) 목단江驛(강역) 構內(구내)에서 金日成(김일성) 일당의 入北(입북)을 우연히 목격하게된 李奇建(이기건)씨(五三(오삼)·현內外問題研究所長(내외문제연구소장)·예비역준장)의 얘기.
......「하루빈」가는 기차를 타려고 목단江驛前(강역전)을 서성거릴 때입니다. 그때가 아마八月(팔월) 하순경이 아닐까요. 驛構內(역구내)에 소련군장교 三(삼), 四十(사십)명 가량이 몰려있어요. 가까이갔더니 中國(중국)말로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어투로 봐서 韓國人(한국인)임이 틀림없었읍니다. 나는 中國語(중국어)에 능했지요. 그래서 그중 인상이 좋아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우리말로 "당신 朝鮮(조선) 사람 아니요" 하고 반갑게 말을 붙였더니 그 말엔 대꾸를 않고 "당신은 누구요" 하고 우리말로 되물어요. 그래서 "나도 조선사람이요"했더니" 우리가 급히 조선으로 들어가려는데 왜놈들이 기차터널을 폭파해서 못 가고 있소"라고 대답합디다. 당시 목단江(강)에서 韓國(한국)의 청진 회령으로 들어가는 철도가 있었지만 咸鏡道(함경도)에서 가까운 老松嶺(노송령) 터널을 日軍(일군)이 폭파해서 막히는바람에 교통이 두절됐었지요. 그리고는 이어 "지금 朝鮮內部事情(조선내부사정)이 어떻게 됐느냐"고 캐물어요. 그래서 목단江市(강시)에서 "朝鮮(조선)에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 탄생됐다"【注(주) : 해방직후인 八(팔)월하순 東震共和國(동진공화국)이라는 벽보내각이 나붙었으나 그 출처는 모른다】는 放送(방송)을 들은 기억이 떠올라 그 말을 전했더니 그 소련軍上尉(군상위) 복장을 한 韓國人(한국인)은 "金九(김구)요, 李承晩(이승만)이요" 하고 물읍디다. 모른다고 했읍니다. 한참있다 그 소련군 장교는 "우리는「블라디보스독」으로 일단 가서 거기서 배타고 朝鮮(조선)으로 들어가겠소"라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 일당이 누구인지 모르고 헤어졌다가 내가 四七(사칠)년 북한에가서 소위 人民軍(인민군) 창설에 관여하면서 보니까 그때 목단江驛(강역)에서 보았던 그 蘇聯軍上尉(소련군상위)가 바로 北傀(북괴) 괴뢰軍總參謀長(군총참모장)으로 올라앉은 安吉(안길)이었읍니다. 安吉(안길)이와 함께 있던 中尉(중위)에서 소좌에 이르는 三十(삼십)여명의 소련군 장교중엔 나중에 北韓(북한)을 틀어쥔 金日成(김일성) 金策(김책) 金一(김일) 崔賢(최현) 林春秋(임춘추)등도 서있었다고 봅니다. 아마도 金日成(김일성) 일당이 韓國(한국)으로 나오고 있던 한 장면이었다고 여깁니다.

김일성 일행은 귀국길에 올라서도 자기들끼리 중국말로 대화할 정도로 중국에 동화된 사람들이라는 증거이고, 또한 그들도 오랜 외국생활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세가 이승만, 김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될 수 있다. (이기건은 해방 직후 서울로 와서 여운형의 비서관을 했으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자 월북하여 인민군 창설에 참여한다. 그러나 북한은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월남하여 국군에 들어갔다. 이기건이 위와 같은 증언을 한 1972년에는 김일성의 해방 후 입북 과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김일성 일행은 안길이 말한대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로 출발, 9월 19일 오전 11시 원산항에 입항한다. 항구에 출영나온 인사들에게 김일성은 자신을 "김성주"라는 본명으로 소개했다.[171] 9월 22일에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이후로는 한동안 비밀리에 잠행하며 김영환(金英煥)이라는 새로운 가명을 사용하였다.[172][173][174]

평양에 온 김일성은 레베데프 소장에게 자신들도 일본과의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 달라고 졸랐으나 거절당했다.[175][176]

○ 일군 격퇴”는 날조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들은 도처에서 정예를 자랑하던 일제의 조선 주둔군을 격멸,소탕하면서 진격해 드디어 일제를 패망시키고 조국을 반세기에 미치는 오랜 일제 식민지 통치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북한의 주장은 여러 증언자에 의해 즉각 부인된다. 레베데프 장군은 이 부분에 대해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이 부관 문일을 앞세우고 소련 카피탄(대위) 계급장을 단채 45년 9월 하순 우리 사령부를 처음 찾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몇마디 인사를 나눈 뒤 「사령관님,우리 항일 빨찌산도 해방전에 참전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지요.』

레베데프는 『당시는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감안, 애교로 돌렸지만 훗날 평양방문시 그들이 사실을 왜곡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고 회고했다.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 박사의 증언은 차라리 「희극적」이다.

『북한의 그 역사책은 소련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가 발간한 「조선의 해방」이라는 책의 내용을 변조한 것이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의 해방」에 수록된 치스차코프 25군 사령관의 회고록 「제25군의 전투행로」에 나오는 내용중 「소련군 25군」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바꾸어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북한은 1963년까지도 북한을 해방시킨 것은 소련군이라고 하였으나, 이후로 소련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북한을 해방시켰다고 조작한 내용을 교육시키고 있다.[177]

비공개 활동

김일성이 평양에 와서 처음 맡은 직책은 평양지구위수사령부(平壤地區衛戍司令部) 부사령관(副司令官)이었다.[93][178] 북한 각 지역의 위수사령관은 소련군이 맡고, 부사령관은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88여단 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179]

처음에는 김영환(金英煥) 또는 김동환이란 가명으로 비공개 활동을 하는데, 가장 급선무가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 일환으로 원산으로 가서 공산당원을 모집하다 그 지역 터줏대감 이주하(李舟河, 1905~1950)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적이 있다 한다. 박갑동(朴甲東, 1919~ )은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180][181]

해방 후 이주하는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원산시당과 강원도당을 조직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김동환(金東煥)이란 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공산당을 조직합네 하고 돌아다니더라는 것이었다. 새파란 청년이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라 웃어 넘기려 했으나 그의 측근들이 김동환이란 자가 너무 설친다고 하기에 하루는 부하들을 동원해 그를 잡아 가두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곧 소련군부대에서 그 청년을 풀어주라는 지시가 왔고 그대로 한 뒤 알고 보니 그 김동환이란 자가 김일성이었다고 했다. 이 얘기는 실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이지만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1국 1당의 원칙 때문에 북한에 따로 공산당을 만드는 것에 논란이 많았다. 비밀리에 방북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당수 박헌영과 회합을 가지고 격론 끝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만들게 되는데, 10월 10일 ~ 13일간에 열린 조선공산당 이북5도(以北5道)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김일성이 기조연설을 했으나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북조선 분국의 책임비서(대리)로 선임되었다.[182][183] 그해 12월 17일과 18일에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김일성을 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하였다.[184] 분국은 원칙적으로는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 하부기구였으나 현실적으로는 북조선 5도당을 장악하게 되었다.[185] 1945년 10월13일 이북 5도 당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고, 결정서에 『서울의 당 중앙에 충실히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고 명기하였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181] 김일성 일파는 북한지역만의 조선공산당중앙을 고집하여, 공개회의의 결정을 거치지 않고 1946년 4월부터 분국이 아닌‘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는 사실상 분리되었다. 북한은 1945년 10월 10일을 당 창건일로 하고 있고, 10월 10일 ~13일간의 대회를 제1차 당대회라고 주장한다.[186]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 기자를 하다 1959년 남한으로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조선공산당 북부조선책임자 및 열성자 당원회의”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창설하던 과정을 증언했다.[187]

“당시 김일성은 서툰 조선말 인사를 읽어 내려갔다. 이 인사 연설문은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온 소련 태생 조선인 이른바 카레이스키들이 러시아어 원문을 서툰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어서 연설문으로나 문법상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이었다. 이 연설문을 김일성이 읽으려 하자 오기섭(吳琪燮)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김일성 동무는 무슨 권한으로 그 의장석에 앉았는가?’ 그러자 김일성은 창 밖을 가리키며 회의장을 둘러싸고 있는 소련군을 보면서 ‘위대한 소련해방군 영도자가 나에게 이 회의를 주도하라고 명령해서 이 자리에 앉았다’고 했다. 즉 스탈린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 앉았던 것이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누군지도 모르는 새파란 젊은이가 모든 일을 주도하니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김일성 본인도 자신이 소련의 대리인이 되어 소련이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당시 스티코프 등 소련군정 요인들은 박헌영보다는 국내 기반이 전무하여 100% 소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것을 선호했지만 그의 교육 수준이 너무 낮아 당과 정부 운용 방침을 따로 교육시켜야만 했다.[188]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가슴에 소련군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김일성의 왼편은 소련군 강미하일 소좌 (소련의 고려인)이고, 뒷줄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스티코프 당시 연해주 군관구 정치위원이 보낸 보고서에는 김일성은 "골수부터 뼛속까지 소비에트 사람이며, 자식들이 우리나라(소련)에서 태어난 빨치산"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박헌영과 같은 남로당 지도자들은 남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 관계자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던 반면,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관저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자주 놀러와 술을 함께 마시고 당구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교육 정도가 낮은 것이 문제가 돼 소련 군정은 재소 한인들을 불러 김일성에게 당과 정부 운용 방침을 교육시켰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

해방 당시 국내에는 소련군 88여단에 조선인 빨치산들이 다수 있고, 특히 진지첸(김일성) 대위와 같은 인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지지세력도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생소한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특단의 방안이 강구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고안된 방법이 조선인들 사이에 김일성 장군이란 이름이 유명한 것을 알고, 그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었다.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1일까지 김일성의 이름을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적다가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189][190]

이렇게 해서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현 김일성 종합경기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전설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앞에 처음 나서게 된다. 물론 집회 자체도 소련군이 김일성을 데뷔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었고, 김일성은 소련군이 작성한 연설원고를 번역하여 읽었다. 아래는 1945년 10월 15일자 평양민보 창간호에 실렸던 연설문의 요지이다.[191]

김일성 장군(金日成 將軍)의 연설요지(演說要旨)
우리의 해방(解放)과 자유(自由)를 위하여 싸운 붉은군대에게 진심(眞心)으로 감사를 드린다.
36년간(三十六年間) 우리를 압박하던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는 쏘련(聯)을 비롯하여 연합국(聯合國)에게 멸망을 당하였다. 우리 민족(民族)은 36년간(三十六年間)의 암흑생활(暗黑生活)에서 광명(光明)을 맞나 해방(解放)과 자유(自由)를 얻고 또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은 찬연한 아침 햇발과 같이 희망에 빛나게 되었다.
조선민족(朝鮮民族)은 이제로부터 새 민주조선건설(民主朝鮮建設)에 힘을 합하여 나가야하겠다. 어떠한 당파(黨派)나 개인(個人)만으로 이 위대(偉大)한 사명(使命)을 완수(完遂)할 수는 없는것이다. 돈있는 者는 돈으로, 지식(知識)있는 者는 지식(知識)으로, 노력(勞力)을 가진 者는 노력(勞力)으로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民主)를 사랑하는 전민족(全民族)이 완전(完全)히 대동단결(大同團結)하여 민주주의(民主主義) 자주독립국가(自主獨立國家)를 건설(建設)하자 !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 !
쏘련(聯)군대와 쓰딸린 대원수(大元帥) 만세(萬歲) !
조선민족(朝鮮民族)의 굳은 단결(團結) 만세(萬歲) !

그러나 33세의 그가 1920년 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가 연설을 시작하자 청중들 사이에서 가짜라는 소동이 일어났다. 당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진두 지휘했던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이다.[192]

김일센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이 주석단 앞까지 몰려와 「가짜 김일성이다」며 소동을 벌였지요.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주최측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이같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회 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센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 모두를 소개했지요. 그랬더니 인민들의 여론이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연설할 때 우리 말도 서툴고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193][194][195] 그는 데뷔 첫 날부터 가짜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 학계는 종북화되어 수많은 가짜라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어 있고,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인민의 주권을 강탈해간 김일성 미화에 열심이다.

우리 말 서툴고, 지적 수준 낮아

김일성은 중국에서 교육 받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성장하여 해방 당시 중국어는 능하지만 우리 말이 서툴고, 지적 수준도 낮았다는 증언이 많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북한에서 46년 9월부터 48년 2월까지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재직하며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ML) 주의 이론 교육을 시켰던 박일(朴一, 페테르 알렉산드로비치)씨의 증언이다.

朴(박)씨는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1백여편의 그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金(김)의 지적능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193]

김일성은 소련어는 전혀 못했고, 조선말도 몹시 서툴렀다. 그는 중국말로 생각한 뒤 이를 조선어로 번역한 뒤 말하느라 말이 몹시 느렸다.[196]

박씨는 『김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면서 김이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설명했다.[197]

아래는 소련에 파견되었다 탈북한 북한 노동자 출신 이영일의 증언이다.[198]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공산정권이 무너지자 옛날에는 철저한 국가기밀로 되어있던 김일성에 대한 실화들이 러시아 신문지상에 공개 되군 했다.

너무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 온 탓에 북한공산당 창건대회 때 그는 한국말로 된 연설문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기사도 직접 읽었다. 당시 스탈린 정권이 파견한 고려인 장교들에게서 한국말과 역사를 배우며 북한정권의 초대 수상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두 신문기사에서 알게 되었다.

그때마다 강한 심리적 충격을 받았지만 이런 사실을 발설했다가는 어느 순간에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자신을 억제하군 했다.

이 외에도 해방당시 김일성이 우리 말에 서툴렀다고 증언한 사람들은 소련군정 장교들과, 10월 14일 김일성의 첫 연설을 현장에서 들었던 사람들[195] 등 셀 수 없이 많다.

해방 전 김일성은 혈통은 조선인이지만 만주에서 교육받고 성장하는 동안 의식 세계는 중국에 동화된데다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해 국내에 와서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그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을 리도 만무한데도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조작되어 있다. 해방 당시 김일성은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지지 세력도 없으며, 학력이나 경력이 턱없이 미비한데다 우리 말까지 서툴러 지도자가 되기에는 무리한 상황인데도 소련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초기에는 지도자가 되는 것에 극심한 부담 느껴

김일성은 자기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스탈린으로부터 지도자 낙점을 받았지만, 평양에 와서 보니 자신이 실제로 지도자가 되기는 만만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상당한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진주했던 소련 25군의 정치담당관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 중좌는 자신이 북한에 왔을 당시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199][200][201] 김일성은 접하는 주위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이 초라하기 이를데 없어 열등감도 느꼈을 것이다. 최고 지도자가 되기에는 학식이나 경륜도 없고, 국정이나 정치에 대해 무지하며,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지지세력도 없었다. 소련도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그를 지도자로 만드는 일을 강행한 이유는 88여단에서 그의 KGB 상관이었던 N씨의 증언에서 드러난다.[202]

N씨는 또 金日成(김일성)을 해방후 북한지도자로 만든 것은 스탈린이었지만 스탈린은 그 이전에 金(김)을 만난 일이 없기 때문에 내무인민위원부(NKVD) 및 군사령부의 조사를 신뢰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당시 모스크바는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누구든지 좋았다. 두뇌는 소련고문단이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독자 세력을 가진 박헌영 등의 국내 토착 공산주의자나, 중국 모택동 휘하에 있었던 연안파 등은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다지 믿을만한 사람들로 보지 않았다. 반면에 학력이나 경력이 모자라고 국내에 독자적 지지세력도 없고 뚜렷한 정치적 식견도 있을 수 없는 김일성이 자신들의 지시를 잘 이행할 인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가 권좌를 향한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우리의 조언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는 그리고리 메클레르의 회고나,[203] "우리는 지도자 김일성을 무에서 만들어 내었다. (We created him from zero.)"고 말한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1915~2006)의 후일 증언은[201] 결코 과장이 아니다.

당시 김일성은 자신이 국정에 대한 지식과 비전이 결여되어 있고, 국가를 이끌 정치적 식견과 능력도 없으며, 낮은 학력과 일천한 경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열등감도 느끼고, 대부분 자신보다 10~30년 연장자인 그들을 통솔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자신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는 가짜라는 소문이 퍼져 있는 것에도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대중을 계속 속이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을 수 있다. 한때는 자신의 본명은 김성주이며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김일성으로 했다"고 신문기사로 내보냈다가 이것이 큰 실수라고 여겨 기사가 실린 신문을 모두 회수해 갔다는 월남민의 증언도 있다.[204]

국민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88여단에 대해 거의 몰랐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은 김일성이 활동한 만주의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이란 조직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소련에 조선인들을 수용한 88여단이란 부대가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전무했다. 남한 신문에도 1945년 11월 중순 이후 북한 김일성에 대한 기사가 더러 실리지만 그를 항일영웅이라 치켜세우던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해방일보(解放日報) 등 좌익계열 신문들조차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찬양만 늘어놓았을 뿐 그에게 무슨 구체적 항일투쟁 공적이 있는지 밝히지도 못했다.[205][206][207] 소련이 데려온 꼭두각시를 무조건 찬양만 할 뿐 사실상 그가 어디서 뭐하다 온 사람인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해방 전 행적에 대해서는 중국의 개방과 구 소련 붕괴 후 관련 문서들이 공개되고, 관련자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비로소 대강의 줄거리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정확한 내용을 거의 알 수 없었던 것도 김일성이 이처럼 해방 당시 무명인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 일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논란이 되고 있다. 일각의 주장대로 해방 당시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불투명한 김일성의 전력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고 하지만, 내세울만한 뚜렷한 전과도 없는데다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국내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고, 연안파들도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항일투쟁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해방 직전 5년간 소련으로 도피하여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보냈다는 것도 큰 약점이었다. 만일 이런 사실이 알려졌다면 그 기간동안 목숨걸고 투쟁했던 사람들을 제치고 그가 지도자로 나설 명분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주소 북한대사를 지낸 이상조(李相朝, 1915~1996)나 북한 전문가 이현웅도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하며 비판한다.[142][143] 이 약점 때문에 그는 자신이 소련군에 있었다는 사실을 계속 숨겼으므로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소련이 그를 지도자로 적극 미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지만 전력도 잘 알 수 없는 새파란 젊은 이가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최고 지도자로 나서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당연히 많았을 수 밖에 없었다. 단적인 예가 남로당 중앙위원회 간부 부장인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의 발언이다. 그는 1947년 여름 소련 유학을 간다면서 평양에 들렀다가, 당시 북로당 중앙 간부 부장이었던 이상조(李相朝, 1915~1996)김창만(金昌滿 1907~1966) 등과의 술자리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중 누가 더 지도자로 적합한가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 이현상이 했다는 발언을 박갑동(朴甲東, 1919~ )이 증언했다.[208]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람(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들의 지시로 외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것밖에 더 있느냐. 그러나 박헌영은 국내에서 투쟁했다. 그것도 그 사람보다 15년이나 일찌기 말이다. 박헌영은 25년에 조선 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 탄압에도 국내에서 투쟁해 왔다. 그의 경력이야말로 한점의 흐린데도 없는 사람이다.
김일성은 내가 듣기로는 본명이 김성주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가 명백하지도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한 것을 알리지 않아 불투명한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해방 후 외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경력 불명의 자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다른 사례로 1946년 8.15 때 북한서 간행된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에는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조앗다.」라는 제목의 박석정(朴石丁, 1911~?)의 시가 나와 있다.[209]

...(전략)...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좋았다 / 우리는 우리 옆에 그를 찾어 내었고 ...(중략)...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물어서 무었하랴 / 그대가 가는 곳에 인민(人民)이 있고 / 인민(人民)이 가는 곳에 장군(將軍)이 있다.

이런 것도 당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해방 전 전력을 거의 알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시가 김일성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듬해 간행된 박석정의 개인 시집 《개가(凱歌)》에는 이 시가 대폭 개작되어 제목도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으로 바뀌고,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좋았다"는 말은 삭제되고, 끝 부분의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물어서 무었하랴"는 "장군(將軍)의 과거(過去)는 우리의 영예(榮譽)"로 바뀌었다.[210]

지도자를 못 맡겠다고 하다 권총 협박 당해

김일성 본인도 사람들 사이에 자신의 전력을 의심하는 이런 말들이 나도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고, 굉장한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김일성은 초기에 한때 자신이 최고 지도자가 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과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에게 자신은 지도자 자리를 못 맡겠다고 했다가 그들로부터 억지로 맡으라며 권총으로 위협까지 받았다고 한다. 게오르기 플로트니코프(Georgy Kuzmich Plotnikov, Георгий Кузьмич Плотников, 1924~ ?)[211]는 6.25 때 소련 군사고문관으로 참전하여 7년간 북한에 있었으며, 소련국방부 군사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을 지내고 대령으로 예편한 후 1992년을 전후하여 러시아의 한국전 참전용사회 회장을 지냈는데, 치스차코프 (레베데프)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라면서 당시 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188][212]

조선일보(1997/06/29)[188] : 한국전쟁 당시 북한 군사고문이었던 게오르기 플로트니코프(73) 소련군 퇴역대령은 29일 모스크바 중앙TV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붉은 왕조'에출연, "김일성은 처음 조직활동을 두렵다는 이유로 북한정부를 맡는 것을 거부했으나, 치스차코프 장군(제25군 사령관)과 레베제프 장군(군사회의 위원)이 권총을 들이대며 '해 봐, 통치해 보라구'라고 강권했다"고 증언했다.

플로트니코프 전북한 군사고문은 조선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이야기는 90년경 조-소우호협회의 한 모임에서 고(故) 레베제프 장군에게 직접 들었으며,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에도 실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1997/06/30)[212] : 해방이후 소련 점령군의 치스차코프 장군은 김일성을 호출, 정부를 맡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김은 조직사업과 정부지도자 직책에 대해 겁을 내며 이틀 동안 이를 거절했다. 일이 지지부진해지자 치스차코프 장군은 권총으로 김을 위협, 중책을 맡도록 강요했다. 치스차코프는 이같은 사실을 플로토니코프에게 털어 놓았다.

당시 소련 제25군의 군정 7과 과장이었던 코비젠코(V.V. Kovyzhenko)도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을 힘들어하며, 소련군에서 출세하는 것을 더 선호하고 원했다고 증언했다.[213][214]

Thus in early 1946 Kim Il Sung formally became ruler of North Korea. Although in retrospect much has been said about his cunning and ambitions, V.V. Kovyzhenko, who often met Kim in late 1945 and 1946, insists that he was rather frustrated by the turn of events and took his political appointment without much enthusiasm. At the time Kim Il Sung might have preferred a career as a Soviet army officer to the strange and complicated life of a politician. V.V. Kovyzhenko, then head of the 7th Department of the political administration of the 25th Army, who often met Kim, says: 'I remember very well when I visited Kim Il Sung after he was invited to become the head of the people's committees. He was very frustrated and told me: "I want (to command) a regiment and then - a division. What is this for? I don't understand anything and don't want to do this"
[Interview with V.V. Kovyzhenko, 2 August 1991, Moscow.]

코비젠코를 인터뷰했던 러시아 출신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프(1963~ )는 이런 증언을 토대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김일성이 집권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고 주장하나[215] 이는 지나치게 피상적인 관찰이다. 그는 김일성이 귀국 전 스탈린을 만났다는 것이나,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이 근거없다고 하는 등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216][217]

이처럼 김일성은 처음에는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이 자신의 능력에 벅찬 일이라 힘들어 하다 소련군정 인사들의 집중적인 교육과 지원을 받아 차츰 권력을 굳혀 나간 것이다. 소련이 남한의 미군정과 달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그를 위원장에 앉힌 것도 군정기간 동안 그에게 지도자의 자리를 굳혀가도록 정치적인 훈련을 시키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군대의 창설

일본 항복 직후 북한 지역에는 소련군 외에는 어떠한 무장 세력도 허용되지 않았다. 소련군에 저항할 어떤 무장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정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정치 상황을 마음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고, 소련의 의사에 반하는 조만식 등 민족진영은 정치활동의 자유가 거의 없었다. 국내에 아무 기반도 지지세력도 없는 소련의 대리인 김일성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 군대를 만들고 군권을 장악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45년 10월 21일 소련군 88여단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보안대를 조직하였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는 《6.25 전쟁사》에서 보안대의 창설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218]

북한주둔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M. Chistiakov) 대장은 1945년 10월 12일 북한의 사설 무장단체인 치안대와 적위대에 대하여 해산을 명령하고 그들이 무장했던 일제 병기와 군용물자는 소련 위수사령부에 압수하도록 조치하는 한편, 동 사령부에서는 동년 11월초에 새로이 제한된 병력의 ‘보안대’를 조직 하였다. 즉, 치스챠코프 대장은 김일성을 위시한 소련파를 위해 국내 각종 무장 세력의 해산을 지시하면서 이들이 소지한 무기를 전부 반납할 것을 아래와 같은 요지의 명령으로 하달하였다.
  1. 북조선 지역 내에 있는 모든 무장부대를 해산시킬 것
  2. 모든 무기, 탄약 및 군수물자를 소련군 위수사령부에 바칠 것
  3. 평민 중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임시도민위원회는 소련군 사령부와 협의하에 지정된 인원수의 보안대를 조직함을 허가함.

동 명령의 목적은 소련군이 새로운 강력한 중앙 지도기관을 수립하고 지방의 분권적 영향력을 통제하기 위한 첫 조치로써 군사조직부터 정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소련이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전후하여 '한반도내 우호적인 국가 수립’이라는 기본목표를 이행하는 과정이었다. 즉 소련은 한반도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가 되어서는 안되며 장차 수립될 정부는 소련에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목표였다.

이를 통해 김일성을 등장시키고 기타 우호 세력을 흡수한 후에 보안대를 조직하여 북한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하려고 기도했다. 이 명령에 따라 치안대, 자위대, 적위대가 모두 해산되었고 대신 새로운 군사조직의 보안대가 편성되었다.

보안대는 1945년 10월 21일 진남포(鎭南浦)에서 2천명을 선발하여 창설되었고 각 도에서도 ‘도 보안대’가 조직되었다. 보안대는 초기 국내치안용 무장 세력으로써 후에 북한의 정규 무장력의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였다.

보안대는 1948년 2월 8일 공식 창설되는 조선인민군의 모태가 되었다.[219] 이렇게하여 김일성과 88여단 출신 빨치산들은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뒷받침해줄 군권을 장악해 간다. 조만식 등 민족진영 뿐만 아니라 국내파 공산주의자 등 다른 정파들은 연안파 일부만 제외하고 누구도 군권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인민들의 지지를 받더라도 소련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김일성과 정권경쟁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소련군정은 1946년 2월 9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220] 사진의 현수막에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에 政府(정부)이다."라고 씌어 있다. 북한은 이미 단독의 임시정부를 만들어 토지개혁까지 실행했어도 소련은 남한을 직접 통치한 미국과 달리 조선인(김일성)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다고 찬양받는다. 하지만, 이승만은 남한 단독의 임시정부가 필요하다고 한 그의 발언이 실현되지도 않았는데도 분단의 원흉으로 몰린다. 이것이 한국 학계의 수준이다.

1945년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남한은 물론이고 북한에서도 반탁 움직임이 상당했다. 소련은 주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조만식이 소련의 찬탁 회유에도 불구하고 반탁 입장을 굽히지 않자 1946년 1월 5일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하여 일체의 활동을 못하게 하고, 어떠한 반탁 운동도 금지시켰다.

이어 북조선에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에 따라 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킨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며, 이날 김일성은 중앙주권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북한 단독의 정부수립을 의미한다.

Item #166 민주조선 자주독립의 길, 김일성 장군 중요 논문집 (북조선로동당중앙본부 선전선동부, 1947) p.5

이 연설문은 1963년판 "김일성선집"에 수정된 채 실렸다가, 이후 모두 회수 폐기되었다.[221] 북한이 먼저 단독정권을 수립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2월 9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며, 이로서 북한에는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었다.[222][223][224] 물론 세세한 일 하나하나까지 소련군 민정청의 지시 감독을 받고, 주요 사항도 민정청이 결정했지만, 주민들을 상대로 이를 실행하는 것은 임시인민위원회에 맡겨 대외적으로 정부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를 두고 친북학자들은 북한의 소련군정은 조선인을 전면에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지만 남한의 미군정은 직접통치를 했으니 더 나쁘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소련과 김일성은 무슨 짓을 해도 정당하고 올바르지만, 미국은 하나같이 나쁜 일만 골라서 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소련이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대외적으로 북한은 소련군 아닌 조선인이 통치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도 있지만, 자신들이 대리인으로 내세운 김일성이 국내 기반이 취약하여 소련군정 기간 동안 권력기반을 충분히 다질 수 있도록 해 주는데에 주안점이 있었다. 김일성은 북한 주민들이 선택한 지도자가 아니라 소련이 권력을 쥐어준 꼭두각시 대리인이었다. 북한도 남한처럼 자유 경쟁구도로 갔더라면 북한지도자는 김일성 아닌 조만식이 되었어야 한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5일 소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사실상 토지의 소유권 아닌 경작권만 배분하는 것이었지만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들이 이 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그러자 6월 27일에 슬그머니 소출의 25%를 현물세로 징수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토지개혁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부터 계획한 것을 임시인민위원회 이름으로 실행했을 뿐이다. 무상분배했다는 토지는 6.25 전쟁 이후 다시 몰수하여 농민들은 개인 땅은 한 평도 없는 집단농장의 인부로 전락하였다.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 앞에서 재차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다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선임된 데 대해 불만을 가진 박헌영 측이 소련에 집요한 이의를 제기하여 스탈린은 1946년 7월 초순 김일성과 박헌영 두 사람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지만 김일성을 그대로 최고 지도자로 정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준다.[225][226][227][228] 처음부터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이반 이바노비치 코발렌코(Ivan Ivanovich Kovalenko, 1919~2005)[164]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함께 스탈린에게 불려가서 면접시험을 보는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229]

당시 소련 극동군 사령부 부관이었던 코바넨코는 “김일성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박헌영이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1946년 5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만을 폭발했다”고 밝히면서 “이 편지는 의외의 효력을 발휘해 박헌영이 처음으로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을 면담하는 기회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사령관 부관이었던 코바넨코의 자세한 증언은 다음과 같다.
1946년 5월 KGB 극동본부에서 박헌영이 보낸 편지를 가지고 사령관을 찾아왔습니다. 당시는 극동권 총사령부가 해체되고 극동군구로 바뀌어 사령관 역시 마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 1898-1967) 원수로 교체되었습니다. 소련어로 된 장문의 편지는 일제때 지하에서 항일투쟁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무시하고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인사들만 앞세우는 등 독재가 많았으며, 중앙당을 무시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남한 실정에 맞지 않는 정책 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나(박헌영)를 추종하는 당원들을 배제하면서 당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등 김일성을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이 편지는 소련군정 지도부가 당 총책임자인 자신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김일성에게만 적극 협력하고 있어 당의 권위가 추락해 혁명사업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등 소련군정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사령관은 한참동안 심사숙고 끝에 최종 판단은 스탈린 대원수께서 내릴 수 있도록 모스크바 당중앙에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KGB에서 보낸 이 편지를 놓고 중앙당에서도 한 때 고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국 박헌영의 편지는 스탈린에게 보고되었지요. 스탈린은 이 편지를 읽고 박헌영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근거가 있다고 보이니 평양의 25군과 김일성 진영에 지시하여 즉시 시정토록 하라고 KGB 본부에 강력히 지시했습니다. 스탈린의 지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부에서 강력히 주장했던 ‘박헌영지도자론’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박과 김을 내가 직접 만나 볼테니 그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라”는 의외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러시아어로 쓰인 박헌영의 편지는 당시 서울 주재 쏘련 총영사관 부영사 샤브신(KGB 소속)을 통해 하바로브스크의 KGB 극동본부에 전달되었던 것이다.[230]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소장, 김두봉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정애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 발라사노프 소련군정 정치고문. 뒤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다.

코발렌코가 말하는 말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 1898-1967) 원수는 당시 트랜스바이칼-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으로 북한과는 별 관계가 없었으므로, 연해주 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를 잘못 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메레츠코프가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231]

김일성은 생전에 황장엽(黃長燁) 비서에게 자신이 스탈린에게 불려가 시험을 잘 쳐서 박헌영을 누르고 지도자로 뽑혔다고 자랑했다고 한다.[232]

모스크바를 다녀오자마자 김일성은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연안파)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1946년 8월 28일 북조선노동당(북로당) 창당대회를 열게 되는데, 이는 스탈린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233] 북로당의 위원장은 김두봉(金枓奉, 1889~1961?), 부위원장은 김일성이 되었다. 북로당은 1949년 6월 남로당과 합당하여 지금의 조선노동당으로 되며, 김일성이 위원장이 된다.[234]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1947년 2월 23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임시"라는 말을 떼어내고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김일성이 여전히 위원장을 맡는다.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스탈린이 1945년 9월 초에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결정했다는 것은 이미 이때 북한을 분할 점령하여 통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스탈린이 9월 20일에 극동군 사령부와 평양의 소련 25군 사령부에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건설하라"비밀 지령문을 내려보낸 것은 당시 북한 분할 통치를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다는 명시적 증거이다.

  •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건설하라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235]
  • 1945년 12월 25일 쉬킨 보고서 :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Iosif Shikin, 1906~1973)이 북한에 스탈린의 지령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으므로 토지개혁 등 실행해야 할 구체적 방안제시[235][236]
  • 1946년 1월 5일 반탁입장을 굽히지 않고, 소련과 타협을 거부하는 조만식 선생을 고려호텔에 연금
  • 1946년 2월 9일 사실상 북한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 1946년 3월 5일 소위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토지개혁 단행 - 남북한의 이질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해짐.

분단은 스탈린의 뜻에 의해 해방 직후 결정되어 있었고 1945년 말에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나 찬탁 반탁 운동, 미소공동위원회 등은 미군정과 남한 사회를 흔들어 놓기 위한 소련의 전략이나, 미국은 스탈린의 속셈을 알지 못해 말려들었다. 소련은 처음부터 북한에서 일체의 반대 세력을 허용하지 않고 제거 또는 무력화 시키고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화를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다. 남한도 공산화를 수용하지 않는한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1948년 봄의 남북 협상은 김구, 김규식등 남한 인사들이 소련과 김일성에 놀아난 것이다.

북한 정권 공식 출범

북한 초대 내각 구성원들 사진 : 앞줄 좌로부터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2열 좌로부터 보건상 이병남, 국가검열상(국방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영하, 상상(商相) 장시우, 재정상 최창익, 내상(內相) 박일우. 3열 좌로부터 농림상 박문규, 무임소상 이극로, 도시경영상 이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이승엽, 노동상 허성택.

소련은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한 1945년 9월 초부터 북한 지역에 단독의 공산국가 수립을 계획하고, 소련군정 기간 동안 1945년 10월 10일 북조선 공산당 창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3월 토지개혁 등을 거치며 여러 가지 법령을 만들어 시행하는 등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부터 법령과 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나, 북한은 이미 군대와 헌법까지 만들고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초대 내각이 출범하며 자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성립을 공식 선포하지만[237][238],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북한은 소련이 세운 괴뢰 국가

미군정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 1894~1971)가 평양방문 후 국무장관에게 올린 1947년 7월 7일자 보고서에는 "스탈린과 한국인 꼭두각시인 김일성의 사진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photos of Stalin and Korean stooge Kim II Sung everywhere)"라고 했다.[239] 북한이 소련이 세운 괴뢰 국가라는 것은 단지 최고 지도자로 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대리인 꼭두각시 김일성을 앉힌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 법정대(法政大) 교수 시모토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 1948 ~ )는 저서 『아시아 냉전사(冷戰史)』(2004년).[240][241][242]에서 당시 공개된 러시아 문서를 많이 인용하면서 북한정권의 탄생이 철저하게 스탈린의 시나리오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국호(國號)도 소련에서 작명한 것을 직역(直譯)한 것이고, 북한의 헌법도 1948년 4월 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스탈린 별장에서 스탈린, 몰로토프(1890~1986), 즈다노프(1896~1948)가 참석한 가운데 결정했으며, 이 자리에는 북한 요인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243]

김일성, 김두봉 등이 김구, 김규식 등 평양에 간 남한 인사들과 함께 남북협상을 한창 벌이던 바로 그 시점에 모스크바에서는 북한 단독 정권 수립을 위한 헌법을 결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남북협상 자체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남한의 5.10 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이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구 등 남한 방북단은 소련과 김일성의 계략에 이용 당하고 놀아난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프(1963~ )는 '북한정권은 소련 제25군이 만든 괴뢰국가'라고 단정했다. 그는 동구(東歐) 공산국가를 만들 때보다도 소련의 역할이 더 절대적이었다고 분석했다.[244][241][245]

스칼라피노(Robert Scalapino, 1919~2011)이정식(李庭植, Chong-Sik Lee, 1931~ )도 소련이 북한에서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김일성은 그 당시 어느 지도자보다 외국의 “괴뢰”(a puppet of a foreign power)라고 주장한다. 소련의 북한통치기구는 북한정권이 수립된 후에 점령군 사령부로부터 소련대사관으로 이전하였을 뿐이라고 지적하였다.[246]

김일성,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法)'

또한 스탈린 생전에는 모든 행사장에 김일성 사진과 함께 스탈린 사진이 반드시 내걸렸을 뿐만 아니라[233][247] 전국 도처에 스탈린 사진이 걸려 있었고, 심지어 거제도의 인민군 포로 수용소에서도 스탈린 사진을 내걸었다는 것[248]도 북한이 소련의 괴뢰국가였다는 증거이다.

김일성은 심지어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法)이다’고까지 말했다.[249]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 후부터 소련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중소 이념분쟁을 틈타 양다리 외교를 펼치면서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은 쇠퇴하는 대신 김일성의 권력이 절대화 되어 갔다. 그러나 지금의 북한 김일성 일족 세습 전제왕조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이라 해도 소련이 낳아 준 괴뢰 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변함없다. 아이가 자라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도 부모가 바뀌지는 않는다.

요즘은 바뀌었지만 1990년 이전에 남한이 북한을 가리켜 북괴(北傀)라고 칭한 것도 정확한 사실의 반영이다.


'국토 完整' 내세우며 무력 적화통일 공언 조선일보 2018.09.05


헌법도 스탈린이 제정. 초대 내각 각료 선정도 소련이 주도

6.25 남침

1949년 3월 초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이 모스크바의 Yaroslav 역에서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250] 앞줄 왼쪽부터 김일성, A.I. Mikoyan, Andrei Gromyko, 박헌영, 홍명희.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전쟁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다 거절당했다.

김일성은 북한 정권 공식 출범 6개월 후인 1949년 3월초 박헌영(朴憲永), 최용건(崔庸健), 홍명희(洪命憙) 등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그는 당시 스탈린에게 남한 적화를 위한 남침 전쟁의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250][251][252][253][254][255]

한용원 한국교원대 교수는 “1949년 9월 스탈린스티코프 상장에게 ‘아직은 무력 공격의 시기가 아니다. 전력도 압도를 못하고 있고 미군도 철수한 직후여서 돌아올 수 있다’고 지시했다”며 “이를 전해들은 김일성은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이다’고 했다는 구 소련 관계자의 증언이 공개된 적이 있다”고 했다.[249]

김일성은 48차례나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전쟁 승인을 요청한 끝에 마침내 허락을 얻어낸다.[256][257] 이를 두고 6.25는 김일성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는 반면에, 어린애가 위험한 놀이를 하게 해달라고 부모를 졸랐다고 해도 막상 사고를 당했을 때 책임은 이를 허락해준 부모에게 있지 어린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비유로 남침 전쟁을 주도한 인물은 스탈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일성에 못지 않게 박헌영도 남침 전쟁을 적극 주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두 사람의 속셈은 전혀 다른데 있었다고 보여진다. 김일성은 스탈린에 의해 지도자로 발탁되었지만 내세울만한 항일 전공도 없이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으로 집권하여 정당성이 취약했으므로, 전쟁을 통해 남한 적화에 성공하면 그 공을 내세워 최고 지도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심산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북한에 권력 기반이 약한 박헌영은 남한에 남로당 지하세력 등 자신의 지지세력이 많다고 생각하여 "전쟁이 시작되면 수십만 남로당원이 폭동을 일으켜 남한을 삼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호언장담했다.[258][259][260] 이들의 봉기로 남한 적화에 성공하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확대되어 김일성으로부터 최고 지도자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중앙일보 정창현(鄭昌鉉) 현대사전문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260]

박헌영은 북쪽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남쪽에서 뚜렷한 「투쟁성과」를 올려야 했다. 48년 남한정부 수립후 남로당이 폭력투쟁과 「유격투쟁」을 강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실제로 그는49년 「8.15해방 제4주년에 즈음한 보고서」[261]에서 『조선의 통일이 지연되면 될수록 남조선의 인명은 더욱 더 잃어질 것이므로 통일은 당과 인민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즉각적인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한국전쟁에 대한 박헌영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남쪽을 회복함으로써만이 노동당내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고, 김일성과도 동등 내지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1950년 초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전쟁을 승인한 배경에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최종 승리하여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한반도 유사시 중공군이 개입할 여건이 마련된 것과, 소련이 미국에 이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등의 상황변화가 있었다.

6.25 남침 전쟁 시작은 김일성의 간청과 모택동의 지원 약속, 스탈린의 승인으로 이루어졌지만, 전쟁의 주도권은 스탈린이 쥐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패주하자 중공군이 개입하고 북진한 유엔군이 후퇴하다 3.8선 부근에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김일성과 모택동은 상호간에 인명 피해만 계속내면서 지루하게 계속되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으나 스탈린은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어 다른 지역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할 목적으로 정전을 허락하지 않는다.[262][263] 그러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돌연 사망하자 휴전 협상은 급진전되어 7월 말 타결을 보게 된다.

남한 요인 납북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1) 1991.10.01 동아일보 5면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2) 1991.10.02 동아일보 5면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3) 1991.10.03 동아일보 5면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4) 1991.10.04 동아일보 5면
實錄(실록)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 前(전)북한정무원 부부장 申敬完(신경완)씨 증언 (5) 1991.10.05 동아일보 5면
「拉北(납북)인사들의 最後(최후)」책나와 1991.10.07 동아일보 10면 : 망명申敬完(신경완)씨「압록강변의 겨울」



전쟁 실패 책임을 정적들에게 덮어씌워 숙청에 이용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평양이 국군과 유엔군에 점령당하고 북한군이 중국 국경으로 내몰리면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 책임을 두고 격심하게 다투게 되며, 이것이 박헌영과 남로당파 등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진다. 전쟁 실패의 최고책임자는 당연히 김일성 본인이지만, 그는 책임을 박헌영 등 정적들에게 뒤집어 씌워 그들을 숙청하는데 성공한다. 남침전쟁 실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김일성이 휴전 후에 권력을 훨씬 더 강화하게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정적 숙청과 김일성 유일체체 확립

지리산 빨치산들이 발행한 소식지 "지리산 특보" 제5호 1953년 (단기 4286년) 8월 20일자 : 오호(嗚呼) ! 박헌영(朴憲永, 1900~1956) 선생(先生) - 8월 2일자 평양방송에서 외무상이던 박헌영 자리에 남일이 임명되었다고 보도한 것을 듣고 박헌영이 숙청된 것을 알고 김일성이 남로당의 원수라고 비분강개하고 있다. 빨치산 대장이었던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은 며칠 뒤인 9월 17일 사살되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유일체제를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직계인 만주 빨치산 출신자들만 제외하고 엄혹한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았던 독립운동가, 항일투사들을 거의 모두 처형한다. 처형을 면한 사람들도 투옥되거나 오지로 추방되어 비참한 말년을 보낸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간 이름있는 항일운동가 중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 남한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도 6.25 때 납북되어 비참한 운명을 마친 분이 많다. 그가 죽인 항일투사들은 일제가 죽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친일파라도 도움이 되면 기용하고, 항일투사는 대부분 숙청했다. 이것이 그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남한 좌파들 주장의 내막이다.

조만식 선생과 민족 진영 인사들 처형

김일성은 6.25 남침전쟁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UN군과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해오자 평양을 점령 당하기 직전 10월 18일에 1946년 1월 5일부터 고려호텔에 연금했던 조만식 선생과 다른 민족진영 인사 500여명을 모두 총살하고, 달아났다고 박길용 (朴吉用, 1920~1997) 전 북한 외무성 부상이 증언했다.[264][265][266]

박헌영과 남로당파 숙청

전(前) 북한 내무 부상겸 군총정치국장을 지냈으며, 박헌영 숙청과 재판에도 간여했던 강상호(姜尙昊. 1909~2000.12.12)는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갔는데, 1993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에서 박헌영 숙청과 재판 및 처형 과정에 대해 30회에 걸쳐 비교적 자세히 밝혔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터지자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이 그에 대한 처형 지시를 내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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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글들도 검색하면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8월 종파 사건과 연안파, 소련파 숙청

1956년 8월 김일성이 동유럽을 순방 중인 사이에 연안파들을 중심으로 김일성을 권좌에서 축출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최용건이 김일성에게 이를 보고하여 긴급 귀국한 김일성이 연안파들을 숙청하게 된다. 이를 8월 종파사건이라 한다. 이어 해방 직후 김일성 체제 구축에 적극 협력했던 소련파들도 대부분 숙청 당하여 소련으로 쫓겨 가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1990년 동아일보에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를 연재 (총 18회).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1> 1990.04.22 동아일보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2> 1990.04.29 동아일보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 <18> 1990.07.22 동아일보

북한해방은 소련군 아닌 김일성이 한 것으로 역사 조작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은 1963년 8.15 행사 때까지는 소련군이 북한을 해방시켰다고 하여 경축행사 때마다 이를 강조하고 소련에 감사표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부터 소련은 지우고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역사를 조작해 나갔다고 한다.[177]

2012년에 탈북한 김영운 씨는 70세의 노인이십니다. 그 분은 50년 전(1963년) 양강도 혜산에서 김일성이 참가한 8.15 해방 기념보고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 불렀던 해방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양강도 혜산에서 8.15 해방 기념행사가 크게 열렸다. 평양에서 김일성이 내려오고 소련 사람들도 많이 참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임위원회 내각 부수상인 이주현이 내려와 행사를 지도하였다. 혜산이 생긴 후 처음 으로 집단체조를 했고, 김일성도 연설하고 소련 대표도 연설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운 씨는 "그땐 혜산이 온통 꽃 바다로 장식되고, 조소문화회관에서는 소련군대의 업적을 전하는 공연을 진행하였다. 소련이 없으면 오늘의 해방도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있었고 조소친선을 형상한 유화들이 거리마다 내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63년 당시 거리를 행진하며 불렀던 8.15해방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쏘베트 용사들이 찾아준 내 나라 영광 찬 강산을 낙원으로 꽃폈네 항일전통 빚내며 천리마로 달리니 5개년의 큰 계획 앞당겼다네 아 ~ 슬기로운 이 나라 자유의 땅 우리는 언제나 소련과 함께 있네’ 그러던 북한은 1963년 이후 소련에 대한 업적 내용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각 도마다 세워졌던 조소기념탑도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고 문화회관 옆에 위치했던 조소문화회관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63년 후부터는 해방의 은인이 소련이라고 거리마다 가득했던 구호 판들도 더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해방 절만 다가오면 기업 소마다 당위원회 조직부서들이 직장별• 작업반별 정치강연을 조직했습니다.

내용인즉 오늘의 해방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승리로 이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민을 일제의 억압 속에서 해방시킨 것은 김일성이라고 주입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 북한 주민들은 해방을 소련군의 업적으로 알고 있었고 또 정권도 그렇게 칭송했었는데 갑자기 해방절 18주년 행사 이후에는 소련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데 대해 의아해했습니다.

오늘날 북한주민들은 오랫동안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는 것같다.

김일성이 이렇게 역사를 조작할 수 있었던 배경은 1963년 쿠바 핵미사일 위기때 소련이 한발 물러서자 중공이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맹비난하여 중소 이념분쟁이 심화되는데, 이때 북한은 재빨리 중공 쪽으로 줄을 바꾸어 서면서 소련의 역할을 격하시키고 중공의 6.25 참전(항미원조)을 더 평가하는 노선을 취했기 때문이라 한다. 지금은 김일성에 의한 북한 해방이라는 역사 날조가 소위 백두혈통이라는 김일성 일족의 세습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중요한 구실이 되어 있다.

갑산파 숙청과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

1967년에 마지막 남은 파벌인 박금철 등 갑산파(甲山派)를 숙청하고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하여 장남 김정일로의 후계 구도의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였다.

갑산파 숙청 후 1970년 11월 2일~13일 간의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당 규약을 개정하여 주체사상을 당의 지도이념으로 표방한다. 이로서 김일성 유일체제가 확립되고, 당은 무력화되어 김일성 개인의 사당으로 전락하여, 김일성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나올 수 있는 토양 자체도 없어져 버렸다. 이후 당대회조차 열지도 않다가 1980년 10월 10일~14일간의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 후계를 공식화 한다.[186] 그후로는 2011년 김정일이 사망할 때까지도 당대회는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1당 아닌 1인 체제가 된 북한에서 당은 아무런 주도적 역할을 못하고 수령의 명령이나 집행하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다. 2016년 5월 6일~9일간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는 김정은 체제를 공식화한다.[267]

폭압 통치와 연쇄적 대남 도발

갑산파 숙청으로 김일성 유일체제를 확립하고, 장남 김정일 후계 구도를 굳히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중공업에 치중하여, 민생 경제를 붕괴시키고, 잇다른 대남 무력도발로 남북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월남전과 남북한

월남전이 격화되고 1965년 한국이 월남(남 베트남) 파병을 하자 북한군도 비밀리에 월맹(북 베트남)에 파견하였다. 나아가 김일성은 제2의 남침전쟁을 계획하기도 했다.

  1. THE TWO KOREAS AND THE VIETNAM WAR This collection of primary source documents traces how both North Korea and South Korea responded to, participated in, and were influenced by the Vietnam War.
  2. DANIEL OH, ESSAYS : THE TWO KOREAS AND THE VIETNAM WAR
  3. GENERAL VO NGUYEN GIAP’S DECISION ON NORTH KOREA’S REQUEST TO SEND A NUMBER OF PILOTS TO FIGHT IN VIETNAM SEPTEMBER 21, 1966
북한이 월맹에 공군 조종사를 파견하면서 부대 사항을 협의하는 문서.
김일성 "더 늙기전에 한번 더 南쪽과 겨뤄보고 싶다". 조선일보 2013.10.24
[中 외교문서에서 드러난 '北의 제2 한국전쟁 준비']
金, 6·3사태·베트남 파병 등으로 어수선한 南韓 노려
"유엔軍 철수시키라" 주장하며 1·21사태 등 끊임없는 도발
1975년 訪中때도 제2의 남침 요청… 中 정부 부정적 반응
Balázs Szalontai, Whose War Plan Was It? Sino-DPRK Relations and Kim Il Sung’s Militant Strategy, 1965-1967 April 2016 : Wilson Center
김일성 "남한엔 베트남처럼 게릴라전 할 땅이 없다" 한탄 조선닷컴 2010/07/03
북한 김일성 주석이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패망을 전후해 중국과 소련에 남침 의지를 밝히고 남한에 대한 무력 공세를 폈지만 그 이면에선 베트남 주둔 미군의 남한 이동을 우려하고 남침이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동아일보가 3일 보도했다. 이는 미국 정부연구기관인 우드로윌슨센터와 북한대학원대가 독일 문서보관소에 있던 옛 동독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 4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다.

주요 대남도발 사건

평창 오대산 일대까지 북상하여 이승복 소년 일가 살해. 베트남에서와 같은 게릴라전을 시험해본 것으로 보임.
  • 1974년 8.15 기념식 행사장에 조총련 문세광이 침투하여 박정희 대통령 살해 시도 : 영부인 육영수 여사 피살
  •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 1977년 7월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 사건[268]
  • 1978년 1월 신상옥-최은희 납북 사건[269] :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이 주도

장남 김정일의 권력 강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남 김정일이 점차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여 김일성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전락해 간다.

1983년 버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살해를 시도한 소위 아웅산 사건을 일으켜 수행원 17명을 폭사케 한 것도 김정일이 주도한 것이다.

1984년 여름 남한이 큰 수해를 당하자 북한은 남한이 당연히 응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대외적인 생색용으로 쌀과 옷감 등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예상과 달리 남한이 이 제안을 수용하자 크게 당황하여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지원을 거부하려다 입장이 옹색해지자 할 수 없이 상당량의 쌀과 옷감을 지원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이미 수해 정도는 어렵지 않게 극복을 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북한의 지원을 받을 필요도 없었지만 이를 수용하여 북한의 허를 찌른 셈이되었다. 북한이 지원한 쌀은 싸래기가 많고, 옷감의 질도 좋지 않아 남북간의 경제 격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게 되자 김정일은 여러 국가들의 올림픽 참가를 방해하기 위해 김현희 등 2명의 공작조를 보내 1987년 11월 29일 귀국하는 중동 파견 근로자를 태운 KAL기를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시켜 국제적인 공분을 샀다.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世界靑年學生祝典,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을 평양으로 유치하였으나, 별 중요성도 없는 행사에 과도하게 외화를 낭비하여 북한 경제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기울어져 간다.

남한 인사들의 연쇄 밀입북

남한에서는 1987년말 현행헌법으로 개정한 후 대선을 거쳐 1988년 초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북한의 수많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그해 가을 12년만에 당시 국교가 없던 공산권 국가들을 포함한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한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다. 이에 대응하여 북한은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는데, 이를 전후하여 남한 인사들이 연쇄 밀입북이 있었다. 대개 남한서 민주화(?) 운동을 한다던 인물들인데, 말로는 통일을 위해 방북했다고 주장했지만, 해방 직후부터 북한을 철권통치해온 진짜 독재자에 대한 비판은 하지도 못하고 남한에만 비판적인 언행들을 보였다. 아래는 당시 밀입북했던 인사들인데, 대부분 김일성도 만났다.

이들은 북한에서 살 마음은 없었던지 처벌을 감수하고 모두 남한으로 돌아왔다. 당시 학생이었던 임수경은 북한서 돌출 행동을 많이해서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어 북한측은 골치가 아파 남한에 빨리 데려가 달라고 간청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다.

국정 최우선 순위를 수령 옹위와 우상화에 두어 민생 경제 파탄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ㆍ김정일 동상 앞에서 절하는 북한 주민들[270]. 전국 도처에 이런 동상을 세우는데 천문학적 비용을 들였다. 북한 주민들의 김일성 일족 숭배는 강요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신앙수준이다.
평양 시내를 내려다보는 만수대의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 사진들.

북한의 국정 최우선 순위는 수령(김일성 부자) 결사 옹위와 우상화이다. 수령에 대한 강력한 호위체계를 구축하고, 수령에 도전하는 어떠한 세력도 생겨날 수 없도록 모든 국가 조직과 주민들을 감시 감독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나아가 전국민들이 가정에 김일성 부자 사진을 걸어두고 정성을 다해 사진을 모시도록 강요하였다. 심지어 재난 사태가 발생해도 수령의 사진을 제일 먼저 안전하게 대피시키지 않으면 강력히 처벌하여, 자신과 가족의 목숨보다 수령의 사진을 먼저 구하도록 요구하였다. 아래는 이에 관한 자유아시아방송의 보도이다.[271]

북한에서 지난 대홍수 때 사망한 사람들이 충성심 선전소재로 아주 요긴하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12일 홍수 현장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를 구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해도 장군님(김정일)만 계시면 살 길이 열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습니다.

전국 도처에 김일성 우상화물과 동상을 만들어 그 총 수를 알기도 어렵지만 수만개는 족히 넘는다. 이런 비생산적인 일들에 국가 재정을 낭비하여 민생경제는 파탄이 나고 1990년 무렵에는 사회주의 경제의 핵심인 배급망도 거의 와해되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한 후에는 기존의 김일성 동상은 헐어내고, 그 자리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동상을 다시 세우는 일을 도처에서 벌이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2007-07-11 일자 보도는 북한은 김일성 부자 우상화 사업을 위해 매년 국가예산의 40%를 쓴다고 하였다.[272][273]

미국의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신문은 북한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우상화 작업을 위해서 국가 전체 예산의 40% 가량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도 했습니다. 올해 책정된 북한 예산은 4천 333억원입니다. 미화로 따지면 북한의 공식 환율 1달러당 140원정도라고 치고 약 31억 달러입니다. 이 가운데 40%면 12억 달러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12억 달러면 북한 주민들이 일년 반동안 먹고 살 수 있는 곡물을 살 수 있는 돈인데요, 북한 당국은 이렇게 중요한 돈을 주민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마당에, 우상화 작업에 쏟아 붓고 있다고 하니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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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대 앞에 세워져 있는 김일성 동상은 북한에서 가장 큰 동상입니다. 그리고 세계에도 잘 알려진 김일성 우상화의 대표적 상징물이기도 하죠. 왜냐면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만수대 동상 앞에서 시민들이 눈물바다를 이룬 장면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색적인 인상을 주었었거든요.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해 건립된 이 동상은 높이가 20M에 이르고 동상과 3M의 받침대로 구성돼 있습니다. 처음에는 동상 전신에 금을 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북한을 방문했던 덩샤오핑 전 중국 주석이 '너무 화려하지 않냐'고 질책하자 김일성이 금 도금을 벗기도록 지시해 현재의 동상 형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는 만수대 김일성 동상과 같은 동상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북한이 워낙 폐쇄된 사회다 보니 김일성 동상에 대한 정확한 숫자에 대한 자료는 없습니다. 다만 북한 전역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과 반신 석고상의 수가 적어도 3만개가 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장 보편적입니다.

김일성 일족이 백두혈통이라는 신화 조작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 시절에도 백두산 인근인 만주의 장백현, 무송현, 안도현 등지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이나, 깊은 백두산 속에 밀영을 만들어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925년 초 자신이 칠골 외가를 떠나 만주의 부모에게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면서 조국이 해방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주장과도 맞지 않는다. 외부까지 거리가 멀어 보급품 조달이 어렵고, 일본인들과 만날 일도 없는 깊은 산속에 밀영을 둔다는 것은 상식 밖이다. 그럼에도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 칭해지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가계를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다.

항일투쟁시기의 김일성과 백두산을 연계시키는 조작은 해방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친일 시인 이찬(李燦, 1910~1974)이 1946년에 작사한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시초이고[274][275], 1947년에 간행된 조기천(趙基天,1913~1951)의 서사시 《백두산》[276]도 그런 맥락에서 지어진 것이다.

그러다 장남 김정일이 후계자로 결정되고 1980년대에 들어서며 김일성 지시로 김정일의 출생지를 실제의 소련 연해주 라즈돌노예가 아닌 백두산으로 조작하여, 가짜 밀영을 만들고 주변 봉우리 이름도 '정일봉'이라고 고쳐 지으면서 김일성 일족을 신성한(?) '백두혈통'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277]

1992년 2월 16일 김정일의 50세(실제로는 51세) 생일에 김일성은 아들에게 아부하는 한시와 번역문까지 지어 주었다.[278]

光明星讚歌 광명성찬가

白頭山頂正日峯 백두산정정일봉 : 백두산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小白水河碧溪流 소백수하벽계류 : 소백수 푸른 물은 굽이쳐 흐르누나

光明星誕五十週 광명성탄오십주 :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돐인가

皆贊文武忠孝備 개찬문무충효비 :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萬民稱頌齊同心 만민칭송제동심 :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歡呼聲高震天地 환호성고진천지 :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

김일성이 아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로 전락한 상황이 반영된 시로 보인다.

1994년 사망

김정일에 권력을 빼앗기고 망명까지 타진

김일성은 말년에는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거의 다 빼앗긴 채 감금생활 비슷하게 지내며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한다. 그가 죽기 직전에 평양을 방문했던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1936~ ) 회장에게는 해외에 망명지를 알아봐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279]

가령 김일성은 1994년 죽기 직전 북한을 드나들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게 “내가 외국에 나갈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시오!”라고 부탁했다 한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잠시 밖에 나갔던 부속실 직원이 쏜살같이 되돌아와 김 회장을 밖으로 내보낸 뒤 “수령님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라고 책망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한다. 김일성이 70세가 되던 1982년쯤 전권을 아들 김정일에게 물려준 뒤 사실상 유폐됐었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추진은 이런 김정일을 견제하기 위한 김일성의 승부수가 아니었겠냐는 추측이다.

밖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말년에 김우중 회장과 상당히 자주 만났다고 한다.[280]

북한 핵문제의 대두와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

1994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북한을 개인 자격으로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부부와 김일성 부부.[281] 김일성은 당시 카터에게 미국 방문을 희망한다고 말했다.[282]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는 이후 김정일 집권기 내내 연금당해 있다 2014년 사망했다고 한다.

김일성 말년에 북한 핵문제가 불거졌다. 1993년 3월12일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1994년 6월까지 핵 위기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논의될 정도로 고조되었으나, 6월 중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의 평양회담〉에서 극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김일성은 방북한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회담을 결정한다. 회담 날짜는 7월25~27일, 장소는 평양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김일성은 회담을 준비하던 중인 7월 8일 심근경색으로 돌연 사망하였다.

김일성이 1994년 사망할 당시 북한에서는 있었던 일들은 다음과 같다. (참고 : 북한 연표)

북한 핵문제는 김일성의 사후인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미국과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합의로 일단 봉합된다.[283] 그러나 북한과의 합의문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휴지 조각에 지나지 않아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없고 기만 전술에 불과했다.[281] 지금은 몇 차례의 핵실험 후 핵무기 대량생산과, ICBM 완성 단계에까지 도달해 있다.

사망 원인에 대한 주장들

김일성이 사망에 이른 것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하느라 무리한 때문이라는 주장, 정상회담을 반대하던 김정일과의 불화로, 김정일이 쓰러진 그에게 의료진의 접근을 고의로 막아 죽도록 방치했다는 설 등이 나돌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 중국 공안요원: 『아버지 金日成이 제안한 남북 정상회담을 아들 金正日이 반발, 회의석상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金日成에게 심장발작이 발생했다』
● 조총련 의장 한덕수: 『金日成은 회장실에서 죽었다』
● 金日成의 중국 은사 가족: 『金日成은 집무실 책상에서 숨을 거뒀다』
● 金日成 사망 당시 주치의는 현장에 없었고, 경호책임자는 판문점에 있었다
● 1993년 북한 NPT 탈퇴 후 권력 일선에 재등장한 金日成은 아들 金正日을 질책하고, 金正日 측근인 김달현·김용순을 좌천시켰다
● 金日成 급사 4일 전부터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는 「黨중앙」(金正日)을 믿고 따르라고 방송했다
[최초 공개] 김일성 사망 전 김정일에 의해 해임당한 심장 주치의(醫) 김용서는 누구인가
⊙ 김일성은 사망 직전인 94년 6월 訪北한 카터와 대동강 선상(船上)회담 중 심장 이상으로 배에서 내렸다
⊙ 김일성, 카터와 선상회담서 일선 복귀 시사… 김일성의 권력 재등장 우려한 김정일
⊙ 주치의 김용서 “사망 이전에도 두 번의 심장 이상으로 내가 인공호흡을 한 일이 있다”
⊙ 93년 12월 당 전원회의서 김일성이 경제정책 실패 강력 비판하며 김정일과 거리 두기 시작
⊙ 93년 말 김정일이 김용서 해임 후 이듬해 7월 김일성 사망
⊙ 김용서 “내가 곁에 있었으면 주석님은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대성통곡
⊙ 김정일은 독일제 심장 기계 운용팀을 김일성 사망 당시 묘향산에 따라가지 못하게 했다

그가 사망한 장소는 묘향산에 있는 특각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정일 생전에 철거해 버린 것이 위성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부자 갈등이 반영된 일로 보인다.[284]

김일성 영생교의 성지

김일성이 사망하자 권력을 공식 승계한 장남 김정일은 레닌, 모택동, 호치민 등의 전례를 따라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 영구보존하는 방안을 택한다.

김일성의 영생을 믿고, 초호화 궁전에 안치한 김일성 미이라를 숭배하는 주체교(Juche-ism) 또는 김일성 영생교의 성지.[285][286][287]

이 건물을 짓던 1990년대 중후반은 고난의 행군 시기로 정확한 숫자는 알수 없으나 백만명 이상 많게는 3백만명 가까이가 굶어 죽었다. 하지만 김일성 미이라 보존 처리와 초호화 건물을 짓는데에는 10억불 가까이 투입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 돈으로 식량을 구입했으면 대규모 아사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김일성이나 그 아들 김정일이나 일족 모두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 다름 아니다.

북한은 신년에나 김일성, 김정일 관련 주요 기념일에 김정은이 수하를 대동하고 주체교(김일성 영생교)의 성지인 금수산 태양궁전의 김일성, 김정일 미이라를 참배하고 있다.


김일성의 처

1940년 4월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으로 보이는 인물.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8권에 나오는 사진이다. 4권에는 《꾀꼬리》로 소문난 반일자위대원 김혜순으로만 나온다.[288]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김일성의 처는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金正淑, 1917~1949)과, 후처 김성애(金聖愛, 1924~2014 ?) 둘 뿐이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과 결혼했던 사실도 확인 되며, 정식 결혼이 아닌 복잡한 여자 관계도 많았다.


한성희(韓聖姫)

김일성의 첫번째 처로, 김일성의 유격대 동료 한흥권(韓興權, 1912~1938)의 동생이라는 주장이 있다.[289][290]


김혜순(金惠順)

김혜순(金惠順)은 만주 유격대 시절의 처로, 194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되었다[291].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북한에서 살았다.[292] 1994년 김일성 사망 때까지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293]


김정숙(金正淑, 1917~1949)

김일성이 만주서 소련으로 도주하기 직전인 1940년 가을에 결혼하였다. 장남 김정일(유라), 차남 슈라, 장녀 김경희의 생모이다. 김정숙(金貞淑)으로도 쓴다. 김일성은 김정숙 생전에 나중에 후처가 된 김성애와 바람을 피워 가정 불화가 심했다고 하며, 김정숙의 사인은 병사라는 설[294], 아기를 낳다 난산으로 죽었다는 설, 임신 중 김일성에게 배를 차여 죽게 되었다는 설[295] 등 여러 주장이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홍영숙(洪永淑, 1923~?)

부수상 홍명희(洪命憙, 1888 ~ 1968)의 딸이며, 김정숙 사망 후 1950년 1월에 김일성과 결혼했으나[296][297], 결혼 초에 일찍 사망하여 김일성과의 결혼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홍명희는 월북하기 전에 쌍둥이 딸 주경(姝瓊), 무경(茂瓊)과 3녀 계경(季瓊)을 두고 있었다고 하므로, 김일성과 결혼한 사람은 쌍둥이 딸 중 한명일 것이나, 신문에 보도된 이름과는 왜 다른지 이유는 미상이다. 월북한 문인들이 대부분 숙청 당해 처형되거나 비참한 말로를 맞았지만 홍명희와 그 일가가 고위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가 한때 김일성의 장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성애(金聖愛, 1924~2014)

처음 이름은 김성팔(金星八)이며, 김일성 타자비서 출신으로[219][297], 3남 김평일의 생모이다. 정확한 일자는 미상이나 201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298][299] 1928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김정일이 계모를 극도로 미워하여 김일성 사후에는 연금되어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300]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였던 김광협(金光俠, 1915~ ?)의 동생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301] 김광협은 요직을 거쳤지만 김일성 유일체제를 반대하다 1970년경 숙청되었다고 알려져 있다.[302]

김일성 연보

김일성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나 북한 간행 전기들이 조작이 많아 정확한 진실을 알기 어렵고, 아직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아래의 김일성 연보도 작성자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잘못된 것들도 있다.

김일성 자필 이력서

해방전 소련군 시절 김일성 본인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력서가 2건 알려져 있다.

  • 영도인원지역이표(領導人員之歷履表) 김일성(金日成) : 1941년 1월
[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단독]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 진지첸 대위의 이력서 : 1945년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1권 pp.163~164.

김일성에 대한 평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黨) 기관지 아키하다(赤旗) 평양 특파원을 지낸 하기와라 료(萩原遼, 1937~2017)[303] 기자는

"북한은 나라 전체가 허위에 쌓인 사회이며 지극히 유감스럽게도 김일성(金日成) 김정일(金正日) 부자는 희대의 사기꾼이다"

라고 토로하였다.[304]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더 보탠다면 김일성은 일생동안 북한인민들을 기만해온 인물이고, 그 아들 김정일도 전문적인 거짓말쟁이였다. 또 북한의 김일성 일족 정권은 자유선거를 통해 창출된 인민의 뜻이 반영된 정권(政權)이 아닌 스탈린과 소련군이 만들어준 불법 괴뢰정권(傀儡政權)이다.

김정일에 의해 1978년 납북되었다가 1986년 부인 최은희(崔銀姬, 1926 ~ 2018)와 함께 탈출하여 자유세계로 돌아온 신상옥(申相玉, 1926 ~ 2006) 감독은 수년간 북한 권력 핵심부의 행태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는데, 그가 내린 평가는 더욱 정곡을 찌른다.[305][306]

'마적단이죠. 북한이란 마을을 점령하고 노략질하여 주민들을 굶겨 죽이면서도 하나도 양심의 가책이 없이 파티를 즐기는 마적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이라는 국가 자체를 강탈해간 마적 두목에 지나지 않는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시절에도 항일투쟁을 빙자하여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하던 마적단의 일원에 불과했다.

김일성 사망 후에는 북한체제의 마적단 속성에 수령이 영생한다는 사교(邪敎)의 성격이 추가되었다.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해방 당시 그는 국내에서 완전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설적인 항일영웅으로 알려져 있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사람들을 기만하였다.

항일투쟁 경력 조작

크게 내세울 만한 공적도 없는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조작하여 남의 공적을 가로채고, 북한을 소련군이 아닌 자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으로 역사를 조작하였다.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되어 집권하여 인민의 주권을 강탈

만주에서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친 도망자가 소련군에 들어가 동료를 밀고하는 프락치 노릇으로 상관에게 잘보여 스탈린에 의해 일약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고, 소련군 무력과 정치공작의 도움으로 북한 주민들의 주권을 강탈해 갔다. 북한 주민들은 해방이후 단 한번도 체제나 지도자 선택권을 가져본 적이 없고, 소련군이 김일성에게 쥐어 준 주권은 김일성 일족에게 세습되고 있다.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

남한을 적화하여 자신의 공적으로 삼겠다는 망상으로 남침 전쟁을 벌여 수백만의 사상자와 수천만의 이산가족을 양산하였다. 한 인간의 헛된 욕망이 민족 전체에 미증유의 재앙을 불러온 사례이다.

무자비한 정적 숙청

엄혹한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아 해방 후 북한을 택했던 수많은 유무명의 항일투사, 독립운동가들이 김일성의 손에 숙청, 처형되고 유배되었다. 김일성 직계 빨치산들을 제외하면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북한 주민의 인권 말살과 노예화

북한 주민들의 언론의 자유, 여행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대부분 자유를 박탈하고, 수시로 주민들을 무임금의 강제 노역에 동원하며, 인명을 경시하여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힌 사람들은 정당한 수사와 재판 과정도 없이 마구잡이 처형을 자행해 왔다. 수용소를 만들어 적대 계층으로 분류된 수십만을 감금하고 강제노동을 시켜왔다.

무수한 대남 도발로 수많은 인명 살상

해방 후 지금까지 북한의 대남도발은 셀 수 없이 많고, 무자비한 도발로 인해 희생된 인명도 수 천명 수준이다.

김일성 일족 세습 전제 왕조를 만들어 국가를 사유화

소련의 꼭두각시로 집권하여 점차 권력을 강화해 김일성 일족의 세습전제왕조를 만들어 국가를 사유화하고, 인민을 노예로 만들었다.

사교(邪敎) 전체주의 체제의 교주로 타락[307]

김일성의 영생을 믿고, 호화 궁전에 모신 김일성 미이라를 숭배하는 북한의 주체사상교(주체교, Juche-ism)는 신도 수 면에서 세계 10대 종교 중의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285][286][287]

김일성의 저작

김일성이 해방 전 소련군 88여단 시절 중국어로 쓴 몇 건의 문건이 남아 있다. 해방 후 북한 지도자가 된 다음에는 김일성의 이름으로 작성 발표된 문건이 수없이 많고, 김일성 저작집, 김일성 선집 등에 수록되어 있는데, 자신이 직접 썼다기 보다는 참모나 비서진이 쓴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많은 문건들이 처음 발표된 그대로가 아니라 후일의 필요에 따라 첨삭되었다. 만년에 회고록을 펴냈는데 이 또한 작가들이 쓴 것이라고 한다.


  • 《김일성, 안길, 서철이 왕신림에게 올린 보고서 - 항일연군 제1로군 정황과 문제에 관하여 (金日成, 安吉, 徐哲 給王新林的報告 - 關于抗聯第一路軍情況和對問題的答複)》: 《东北地区 革命历史文件 汇集》 甲60 pp.95~105。및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2000. 09.)
원문보기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2002) p.314.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직후인 1941년 1월 1일에 김일성, 안길 (安吉, 1907∼1947), 서철(徐哲, 1907∼1992)이 왕신림(王新林)에게 올린 보고서가 중국측 사료에 나온다. 왕신림은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의 암호명인데, 두번째 왕신림인 나움 소르킨(Naum Sorkin)이 부임해 오기 직전의 전임자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류쉔코 장령이라고 했으나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소련군이 만주서 넘어온 빨치산들에게 자신들이 했던 일에 대한 자술서를 쓰게 했기 때문에 제출한 문건으로 보이며,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사정을 아는데 약간의 도움이 된다..
  •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金日成의 自筆 빨치산 日誌》 金贊汀 新東亞. 390('92.3) pp.380-393 /東亞日報社
<다시쓰는한국현대사>7.東北항일聯군활동기 金日成 자필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1942년 88여단 여단장 주보중의 지시를 받고 김일성이 자필로 쓴 기록이다. 김일성은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최고위 생존자였으므로, 완전히 궤멸된 1로군의 역사를 정리하라는 명을 받았을 것이다. 김일성 자신의 항일투쟁사를 총정리한 문건으로 볼 수 있는데, 아무런 미화도 하지 않고 솔직하게 쓰고 있다. 조선독립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고,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중국인들과 섞여 만주 적화를 위해 싸운 것이다. 엄청난 전과라고 자랑하는 보천보 전투에 대한 언급도 한 마디도 없고, 자신들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난 것을 자인하고 있다.


6.25 당시 미군의 노획문서에 들어있는 것으로, 후일의 첨삭이 가해지기 전의 원문을 볼 수 있다.
朝鮮臨時政府樹立을 앞두고 二十個條 政綱發表[308] : 1946년 3월 23일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당시 김일성이 방송을 통해 발표
目前朝鮮政治形勢와 北朝鮮人民委員會의 組織問題에 關한 報告 :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당시 연설문
北朝鮮 民主主義 民族統一戰線委員會 結成에 對한 報告[309] : 1946년 7월 22일 조직
八.一五 一週年을 記念하면서 朝鮮同胞에게 告함 : 1946년 8.15 해방 1주년 기념 연설
歷史的인 民主選擧日 앞두고 朝鮮人民에게 告함 : 1946년 11월 3일 인민위원회 선거를 앞두고
北朝鮮民主選擧의 總結과 人民委員會의 當面課業 : 1946년 11월 3일 인민위원회 선거 결산


김일성이 만년에 자필로 쓴 것이라 주장하나, 회고록 편찬에 간여했던 황장엽의 증언에 의하면 작가들이 대필한 것이다. 미화, 조작된 내용이 많고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책이다.
북한 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1953년부터 1964년까지 발간된 김일성 저작의 체계적인 선집.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1979년부터 1998년까지 총 50책으로 발간한 김일성우상화를 위한 선전물로서 소련의 역할을 부정하고 김일성의 항일관계 문건을 수록한 저작집.
김일성의 회고적 자료를 모아놓은 전집. 북한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1992년부터 간행하기 시작하여 2012년 1월에 100권을 완간하였다.

김일성 전기

김일성의 전체 일생을 담은 전기는 그의 사후 24년이 지났지만 남북한 어디에서도 아직 간행된 것이 없는 것같다. 지금까지 간행된 전기는 대부분 해방 이전까지만 다루고 있다. 해방 이후의 행적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북한 최고 권력자였으므로 북한의 역사 자체와 맞물려 있어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개인의 전기로 쓰기에는 어려움이 큰 탓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에서는 김일성 개인의 해방 전 경력까지도 공식 역사에 편입되어 있기도 하다.

북한 간행 전기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 김일성이 아주 젊은 나이일 때부터 전기가 출판되기 시작해서 모두 열거하기도 어렵지만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역사서에도 김일성 전기가 편입되어 있다. 주요 내용이 수시로 바뀌고, 조작이 심해 거의 믿을 수 없다.

pp.1~2 :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약력(畧歷)》
pp.3~12 : 한재덕(韓載德, 1911-1970),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 유격대 전사(遊擊隊 戰史)》
pp.382~401 : [第 六章 日本帝國主義 大陸侵略戰爭] 제3절 김일성 장군의 항일무장투쟁 / p.411~ 第 七章 쏘련의 對日戰爭과 朝鮮解放
  •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략전(畧傳)》, 조선 로동당출판사, 1952. 4. 15 : 같은 날 노동신문에도 게재됨.
  • 이나영, 《조선민족해방투쟁사》, 1958년
  •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 근대 혁명 운동사》, 1961년
  • 백봉,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1968년
  •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전사》, 1979년~1992년 (16권 ~ 34권이 "현대편"으로 김일성과 관련한 내용임.)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전8권, 1992년~1998년

북한 간행 전기 비판

위와 같은 북한에서 간행된 전기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에 없던 내용이 첨가되고, 역사적 기록과 어긋나거나, 사실로 보기 어려운 의심스러운 내용들이 많다. 정확한 전기를 쓰려는 사람들은 이런 북한 간행물들은 단지 참고만 하고, 당시의 원천 기록들을 직접 찾아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북한 간행 김일성 전기물에 대한 비판서도 나와 있다.

김일성 자서전 연구 재일 조선대교수 20년… 김일성연구 1인자 / 집필자 허동찬씨는… 서울신문 1992. 10. 01 (목) 5면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 자서전 연구 : 2) 1992. 10. 06 (화) 서울신문 3면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 자서전 연구 : 55·끝) 1993. 05. 07 (금) 서울신문 6면
p.217의 "<표 Ⅳ-1> 역사적 사건별 주도자에 대한 사실과 북한 역사서 왜곡"에 주요 왜곡 사항을 표로 정리함.
(보천보 사건 주역이 북한 김일성이라고 인정한 것은 잘못임.)

한국 간행 전기

북한 간행 김일성 전기가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고,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과 소련군 경력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 많아 남한에서 간행된 전기도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 앞으로 더 밝혀져야 할 부분이 많으나, 북한의 김일성 일족 체제가 무너진 후에나 가능할 듯하다.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Y: Columbia Univ. Press, 1988/1995
서대숙(徐大肅)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일본 간행 전기

[1회] : 林 択三, 《独裁者・金日成の伝説-1-》, 自由 / 「自由」編集委員会 編 25(7) 1983.07 pp.128~136
[103회] : 林 択三, 《金日成の虚像-103完-日本の敗戦と朝鮮解放》, 自由 / 「自由」編集委員会 編 36(4) 1994.04 pp.67~75
동북아역사넷을 林擇三으로 검색하면 소장한 「自由」지 일부를 확인 가능.
일부는 한국어로 「共産圈硏究」에 실리기도 함. : 국회도서관 林擇三으로 검색
  • 和田春樹(1938~ )、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1992年。 : 와다하루키(和田春樹) 저,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
  • 李命英, 《四人の金日成》 (成甲書房 <東アジア叢書>,1976年)
  • 《アルバム 謎の金日成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 / 編著者 代表 李命英, (成甲書房, 1978年)[310]
  • 李命英, 《金日成は四人いた - 北朝鮮のウソは、すべてここから始まっている!》 成甲書房, 2000 (成甲書房刊 1976年版・改訂版)[311]
  • 李命英, 《北朝鮮金日成は四人いた》, <ワニ文庫>、2003年. (成甲書房刊 2000年版を文庫化)

각주

  1. 이 날은 타이타닉(Titanic)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날이며, 북한은 이를 또한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출생은 타이타닉 침몰보다 더한 재난이다.
  2. 용산방(龍山坊)이 1896년 용산면으로 개편 북한지역정보넷
  3. [문화] 파워인터뷰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문화일보 2016년 01월 01일
  4. 김씨 일가의 우상화-만경대혁명사적지 자유북한방송 (RFA) 2019-04-30
  5. 김씨 일가의 우상화-만경대혁명가정 자유북한방송 (RFA) 2019-05-07
  6. 고순화방(古順和坊)이 1896년 고순화면 (古順和面)으로 개편 북한지역정보넷
  7.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북한지역정보넷) : 고순화면(古順和面)과 평천면(平川面)이 통합되어 고평면(古平面)이 됨.
  8. 북한의 종교-칠골교회 RFA 2019-02-12
  9. 북한교회를 가다③ 평양칠골교회 편(상) 통일뉴스 2016.01.04
    북한교회를 가다④ 평양칠골교회 편(하) 통일뉴스 2016.01.11
  10. 10.0 10.1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1929년 5월 14일자 길림 총영사의 보고문
  11. 11.0 11.1 최형우(崔衡宇, 1905~1950), 최형우(崔衡宇),《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檀紀 4278[1945]년 12월 10일 발행) p.28 : "9. ㅌ·ㄷ와 김일성"
  12.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13. 제너럴셔먼호사건(─號事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김응우와 샤만호격침기념비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7-06-20
  15.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二 >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平安南道警務部長報告要旨) (1918년 02월 18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送付에 관한 건 (1919년 03월 26일) p.60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第二 壹部 參考 送付 (1919년 03월 26일) p.61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7.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25, 조선(朝鮮) 1 (みすず書房, 1967)
    金日成의 父 金亨稷 조선국민회활동 사실로 확인돼 연합뉴스 1998-03-25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독립기념관에 소장 연합뉴스 2005-03-23
  18. 白山武士團員 逮捕의 件 : 1921년 05월 12일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 康晋錫(變名 金在龍, 韓成龍,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大正 9년 (1920) 음력 2월.....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의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체류하다 같은 해 음력 4월 2일 임강현 천금동에서 목재 벌채 종사...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 1921년 4월 24일 >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康晋錫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19.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 서울신문 1992-10-27 4면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1992. 12. 08 (화) | 서울신문
  20. 새전기「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 20) 서울신문 1992. 12. 10
  21.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 3 > 陸軍側 調査에 관계된 鴨綠江 沿岸地方 支那地에서의 在住 朝鮮人의 戶口 其他에 관한 件 1925-05-05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작성 : p.24
  22.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 구글맵
  23. 「세기와 더불어Ⅰ」 p.72.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 연구:21) 서울신문 1992-12-15 5면
  24.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25.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
  26. 김일성저작집1 p.361
  27.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
  28.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7~68 ; p.110.
  29.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05.24, 2면
    한재덕(韓載德), 『김일성을 고발한다』 (내외문화사, 1965) p.96
  30. 화성의숙 숙장 최동오(崔東旿, 1892∼1963)는 6.25때 납북 당했는데, 박정희 정권 때 외무장관을 지내고 1986년 월북한 최덕신(崔德新, 1914~1989)의 부친이다. 최덕신의 월북에는 부친과 김일성의 인연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3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96~97.
  32. 허동찬(許東粲),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1. 金亨稷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
  33. 북한의 종교-김일성과 기독교(2)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8-12-25
  34. 허동찬(許東粲, 1932~ ),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 : 39)》 서울신문 1993-02-23 5면
  35.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7, pp.94~95
  36.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李容相) 오마이뉴스 2005.04.14
  37.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51)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36) -「김일성」으로 둔갑 중앙일보 1991.05.2 종합 9면
  38. 이명영, 《김일성 열전》 (신문화사, 1974) pp.97~98
  39. 39.0 39.1 김학규(金學奎, 1900~1967),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11) 부록(附錄) 자료 I(資料 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p.7 (p.589)
  40. 40.0 40.1 [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16개항 경력 관련 질문에 답변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단독]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41. 41.0 41.1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동아일보사, 1993) pp.163~164
  42. 5. 재만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정원옥(전 조선대 교수) :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독립전쟁 > Ⅱ. 독립군의 재편과 3부의 활동 > 5. 재만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43. 1)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편성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3. 한중연합군의 항일전과 독립군의 수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4.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독립전쟁 / Ⅱ. 독립군의 재편과 3부의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88년 12월 30일)
  45.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 추헌수(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1988년 12월 30일)
  46. 장세윤(張世胤), 국민부(國民府) 연구(硏究) - 성립 및 헌장, 자치활동을 중심으로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8년) pp.83-124
  47. 장세윤(張世胤),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연구(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년)
  48. 장세윤(張世胤), 조선혁명군 정부 연구(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1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년)
  49. 이명영, 《김일성 열전》 (신문화사, 1974) pp. 107~108
  50. 50.0 50.1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51. 『김일성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1』 제3장 길림시절 / 10. 철창 속에서
  52. 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 宣言 口號 : 1930-09-20 일자 관동청 경무국장(關東廳 警務局長)이 작성한 보고문.
  53.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 김성주(金成柱)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54. 이종락(李鍾洛)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 동아일보 1931-03-26 일자 2면기사.
  55. 이종락(李鍾洛) 부하 김일성(金一成)이 체포, 길림성 정부로 호송 동아일보 1931-05-04 일자 2면기사
  56. 56.0 56.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22~124.
  57. 57.0 57.1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9) 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1974.04.15 종합 3면
  58. 최형우(崔衡宇, 1905~1950), 최형우(崔衡宇),《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檀紀 4278[1945]년 12월 10일 발행) p.31 : 동지들은 그의 장래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일성(一星)」이라는 아호(雅號)의 선물을 주었다.
  59. 조선의 별 위키백과
  60. 《세기와 더불어》 2권 제4장 9.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 1930년 10월 오가자에 가 있었다고 함
  61.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0) | 김성주의 살인벽 | 총을 쓰지 않고 타살·교살을 밥먹듯 중앙일보 1974.04.17
  6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135
  6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권력(權力)의 역사(歷史)》 제2판 (종로서적 1989) pp.303~305
  64. 64.0 64.1 邊達煥等 最高 七年 求刑(변달환등 최고 칠년 구형) 1933.02.01. 동아일보 3면
  65. 治維違反及殺人事件最高七年을 求刑 공범二명은 五년과 三년을 구형 判決言渡는 來六日 매일신보(每日申報) 1933.02.02
  66. ○○團員 三名(단원 삼명) 長春領警(장춘령경)에 被逮(피체) 1932.08.15. 동아일보 2면
  67. 農民同盟事件(농민동맹사건) 廿一日 公判(입일일 공판) 1932.12.14. 동아일보 2면
  68. 密偵殺害(밀정살해)한 農盟員 判决(농맹원 판결) 1933.02.08. 동아일보 3면
  69.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력사연구소,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년대순) 제1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p.117 이하; 문시선(文時宣)의 회상기 : 제1권 p.171
  70. 임택삼(林擇三), 金日成 傳記의 虛像, 24 : 테러리스의 형성과정 共産圈硏究 79 (極東問題硏究所 '85.9), p.72
  71.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북한연구소, 1987.06)" p.368
  72. 임택삼(林擇三), 金日成 傳記의 虛像, 24 : 테러리스의 형성과정 共産圈硏究 79 (極東問題硏究所 '85.9), pp.64-77
    林択三, 中国大陸の資料にみる告発 -24- 金日成・伝記上の虚像と実像 自由 / 「自由」編集委員会 編 27(8) 1985.08 pp.116~128
  73.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37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九巻(I-4-5-2-3_10_009)(外務省外交史料館)」: 件名標題 : 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九巻 分割4 昭和五年十二月二十七日在吉林総領事石射猪太郎 外務大臣男爵幣原喜重郎殿 - p.38에 이종락 부하가 中東線 카륜(卞倫)역 부근에서 정신을 암살했다는 1930년 12월 27일자 길림총영사 보고문이 나옴.
  74.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 제4장 9.《리상촌》을 혁명촌으로; 제2권 제4장 10. 잊을수 없는 사람들; 제6권 제16장 6. 스쳐버릴수 없었던 사연
  75. [북한알기 키워드] 타도제국주의동맹 (ㅌ·ㄷ) : 조선노동당의 뿌리' 주장 MK Chosun 2001.10.09
  76.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연구총서 06-11, 통일연구원, 2006년 12월 26일) pp.60~61. : 국립중앙도서관 원문 보기
  77. 《중국공산당 남만특위(南滿特委) 보고서》 『東北地區朝鮮人革命鬪爭資料匯編』, (심양: 요녕민족출판사, 1992), p. 727
  78. 滿洲를 土臺로 劃策한 大陰謀事件終豫 武器까지 購入하야 中國軍閥撲滅企圖 / 爆彈製造에 滿鐵社員도 關與 每日申報 1932년 05월 05일 07면 01단
  79. 최영재, 소년 김일성, 날조된 경력 진상과 ‘ㅌ·ㄷ’ 실체 자유일보 2019.01.14
  80.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제4장 9.《리상촌》을 혁명촌으로;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4장 10. 잊을수 없는 사람들
  81.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2> 비적두목에 권총사들여 약탈 일삼던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3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3>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8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83. 國史館論叢 第4輯 >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한국사데이타베이스
  8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권 한국독립당 Ⅰ > 기관지 > 『震光』 > 『震光』 제6호(1934년 9월호) :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85. 『김일성 회고록 - 세기와 더불어 3권』제8장 반일의 기치 높이(1934년 2월 ~ 1934년 10월) / 1. 리광 : 나에게 학비를 대준 사람들은 대부분 오동진, 손정도,량세봉,장철호,현묵관과 같이 길림시내에 거주하거나 류하, 흥경,무송,화전을 비롯한 독립군의 본거지들에 있으면서 정의부 본부에 들락날락하던 아버지의 친구들이였다.
  86.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87.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
  88. 조선혁명군 제3중대장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아래 제1소대장 고동뢰(高東雷) : 1932년 초의 조선혁명군 편성표
  89. 이명영(李命英), 眞僞 金日成 列傳 (13) |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90. 90.0 90.1 90.2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1> 1990.04.22 동아일보 : 솔로킨 소장이 소르킨 정찰국장이고, 부르가예프 대장은 극동전선군(원동방면군) 사령관 Maksim Purkayev 대장이다.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 『붉게 물든 대동강 : 前 인민군 사단 정치 위원의 수기』,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1991.07.01
  91. 「동북항일연군 통일군대 건제선언(東北抗日聯軍 統一軍隊 建制宣言)」 1936년 2월 20일 발표
  92.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김일성 출생의 진실 RFA 2010-09-14 : 서대숙(徐大肅)은 김일성이 순덕 소학교에서 선생을 했다고 하나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다.
  93. 93.0 93.1 김일성 항일전 참전못했다 중앙일보 1992년 06월 15일 종합 1면
    88여단 북한 정치지도자 양성 주력/문건으로 밝혀진 김일성의 행적 중앙일보 1992년 06월 15일 종합 3면
  94.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61
  95. 88여단장 주보중이 작성한 김일성에 대한 적기훈장 수여 요청서 : 1945년 8월 30일자
  96. 이청산 (李靑山) : 중국공산당滿洲省委, 安圖縣委 간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國外に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 (京城 : 行政學會, 昭和9[1934]) p.324
  97.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동아일보사, 1993) p.172.
  98.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동아일보사, 1993) p.181.
  99.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속] (金日成 評傳 [續])』,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8년 4월 1일.
  100. 100.0 100.1 100.2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101. 101.0 101.1 101.2 101.3 101.4 101.5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102. 항일군 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09.13
  103. 김창영(金昌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반민특위 조사 기록) 1949년 4~5월 / 김창영(金昌永, 1890-1967)
  104.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전5회)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105. 逮捕(체포)된 拳銃犯人(권총범인)은 國民府員(국민부원)으로 判明(판명), 潜入目的(잠입목적)은 軍資募集(군자모집) 1930.09.05 동아일보 2면
  106. 최효일, 김형권, 박차석, 정계빈 등 판결문 1932/04/04 경성복심법원
  107.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13081260200、第六十八議会用調書 別冊(最近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概況)(議TA-10)(外務省外交史料館)」 2、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近況 昭和 10년 (1935년) 12월 p.6 : 만주공산운동 주도 기관인 중공당 만주성위는 코민테른(국제당, 國際黨) 블라디보스톡(포조, 浦潮) 지부의 지도를 받음.
  108. 108.0 108.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 (28) 동북 항일 연군 6사장 중앙일보 1974.06.10 종합 3면
  109.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2006-12-26) pp.52~53
  110. 110.0 110.1 고려인의 강제 이주 위키백과
  111. 為抗日救國告全體同胞書 : 中國共產黨中央委員會 1935年 8月 1日 : 維基文庫
  112. 《抗聯 第一路軍 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113.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114.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115. 115.0 115.1 《金日成의 自筆 빨치산 日誌》 김찬정(金贊汀), 新東亞. 390('92.3) pp.380-393 /東亞日報社
  116. <다시쓰는한국현대사>7.東北항일聯군활동기 金日成자필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117.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 북한민주화 전략집》 (시대정신, 2006.04.15) p.40
  118. 118.0 118.1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01.25) p.224
    해방되면 안도현장(安圖縣長)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119. 長白縣(장백현)에 燒失(소실)된 家屋(가옥) 勿驚(물경)! 千百餘戶(천백여호) 1937.07.27 동아일보 2면
  120.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121.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삼천리(三千里)》 제10권 제11호 1938년 11월 01일
  122. 三千里 緊急 揭示板, 金日成 匪中에 武裝 女群, 拉致된 二十五名 無事히 돌아오다 《삼천리(三千里)》 제12권 제4호 1940년 04월 01일
  123. 『한민(韓民)』 1936년 11월 30일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2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5권 한국국민당 Ⅰ > 해제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125. 金日成 중국에서 약탈,도둑질 일삼아 연합뉴스 1993-04-19 18:04 : Георгий Афанасьевич Туманов (George Afanasyevich Tumanov)는 필명이라고 했다.
  126.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127. 김일성주석 연고자 김명주 서순옥 항일투사 가족 막내아들 김진송 선생이 회고한 부모. 유튜브
  128.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p.206~207
  129. 강위룡(姜渭龍, 1914~?)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위룡 - 북한지역정보넷
  130.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계승본 2편, 1998년 출간): 1940년 3월 ~ 1945년 8월 / 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4. 1940년 가을
  131. 周保中关于请求同抗联负责人会面问题给王新林的信(1940年12日19日), 《周保中抗日救国文集》 (吉林大学出版社, 1996)
  132. 周保中关于解除对季青的误解等问题给王新林的信 (1941年1月2日), 《周保中抗日救国文集》 (吉林大学出版社, 1996)
  133.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东北抗日游击日记)》 p.567 : 1941년 1월5일 김일성, 최석천(최용건), 계청이 장수전(張壽籛) 처에 도착해서 담화.
  134. (기행문)연해주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서 -4 대전 투데이 2015.09.09
  135. 《金日成, 安吉, 徐哲 給王新林的報告 - 關于抗聯第一路軍情況和對問題的答複 (一九四一年 一月 一日)》,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2000 - 09
    원문 보기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동향/연구보고서』, (서울 :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2002) p.314.
  136. 东北抗联B野营一九四一年、一九四二年被派遣各分队人员名单 (1944年10月13日), 《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甲65卷 p.297
  137. 중국인 대원 유의권(劉義權, 刘义权, 1930~?)은 당시 이름이 유옥전(刘玉全)으로, 김일성과 같은 날인 1940년 10월 23일 입소하였고, 김일성을 따라 1941년 4월 10일 만주로 파견되어 1941년 11둴 12일에 남야영으로 돌아옴. :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138. 周保中、金策 关于来X城 商讨东北党和 游击运动等 问题 给魏拯民的信(1941年 3月 12日): 《 东北地区 革命历史文件 汇集》 甲61卷 pp. 103~110 및 《周保中抗日救国文集》 (中共吉林省委党史研究室编, 吉林大学出版社), 위증민이 X城 즉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로 오기를 요청함.
  139. 139.0 139.1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40.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14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142. 142.0 142.1 李相朝(이상조)씨—申一澈(신일철)교수 對談(대담) : 8月宗派(월종파)사건「反金(반김) 세력」제거 造作劇(조작극) 1989.09.18 동아일보 5면 : 李(이) = 그 기간중 金日成(김일성)이 소련에가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金日成(김일성)이가 소련 하바로프스크로 도망한 것은 전적으로 그가 혁명가로서의 조직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는 전략상 후퇴한 것이 아니라 도주한것입니다. 滿洲(만주)야말로 항일투쟁의 최요충지인데 어떻게 그곳을버리고 도망갈 수있겠습니까. 도저히 용서못할 일입니다.
    李相朝(이상조)씨「칼칼한 所信(소신)」인상적 1989.09.21 동아일보 8면 : 李(이)씨는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20명 규모의 보잘것없는 부대였다고 증언했으며, 가장 중요한 항일투쟁 시기인 1940년에서 해방때까지 金(김)이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敎導旅團(교도여단)」에 도피해 있었다고 밝혔다.
  143. 143.0 143.1 “보천보전투, 조작된 항일무장투쟁 신화” 자유아시아방송 2017-06-07 : "항일무장투쟁은 194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 전 5년 간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김일성은 이 기간에 소련으로 도망쳐 극동군사령부 소속 ‘88여단’에서 만주 등 국경지역 침투 및 정보수집을 위한 간첩교육을 받았을 뿐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이런 약점들을 덮기 위해 ‘보천보전투’를 신화적 수준으로 날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144. 김일성 가짜설#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
  145.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146. A. N. Lankov, 《From Stalin to Kim Il Sung :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2002.) p.57
  147. <화제> "金日成 집권 우연한 일" 연합뉴스 1995-08-19
  148.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75~176]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49. 149.0 149.1 美(미)정보전문 간행물 발표 "金日成(김일성) 항일투쟁은 조작" 1994.06.09 동아일보 5면
    KGB 비밀문서, 金日成 抗日투쟁 경력 일축 연합뉴스 1994-06-08
  150. 150.0 150.1 Christopher M. Andrew, ‎Oleg Gordievsky, More Instructions from the Centre: Top Secret Files on KGB Global Operations 1975-1985, (Psychology Press, 1992) pp. 78~79
  151. 151.0 151.1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pp.50~55.
  152. 김일성은 소련 비밀경찰(NKVD)의 요원이었다! NewDaily 2015.12.02
  153. ◇金日成, 그는 누구인가 [수정보완] 연합뉴스 1991.03.21 (목) 오후 4:04 : "중국.소련등지로 망명한 北韓의 일부 고위간부들은 그가 KGB요원이었으며 蘇聯에 있을때 동료한인들의 言行을 蘇聯당국에 고해바쳐 소련인들의 신임을 얻었다고 전하고 있다."
  154. 김충석,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2)
  155.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2> 1990.04.29 동아일보
  156. "김일성은 소련 비밀경찰(NKVD) 요원이었다!" New Daily 2015.12.02
  157. 孫世一의 비교 評傳 (7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平壤市民衆大會에 나타난 ‘金日成 장군’ 월간조선 2010년 8월호
  158. ОРГАНЫ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СССР В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Е. (Том I) : ОБ ОКАЗАНИИ ПОМОЩИ КИТАЙСКОМУ ПАРТИЗАНСКОМУ ДВИЖЕНИЮ В МАНЬЧЖУРИИ, 15 апреля 1939 г.
    Translation : The bodies of state security of the USSR in the Great Patriotic War : Vol. 1 Day Before : FOR ASSISTANCE CHINESE guerrilla movement In Manchuria, April 15, 1939
  159.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Ivanovich Korotkov)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1, 2권)≫ (동아일보사, 1993) : 1권 pp.175~176.
  160.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1부> ⑤ 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동아닷컴 2004-09-12
  161. 161.0 161.1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162. 162.0 162.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163.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 pp.122~125.
  164. 164.0 164.1 Stanislav Levchenko / Ivan Kovalenko wikipedia
  165. [obituaries] Ivan Kovalenko, overseer of Soviet-Japan postwar relations, 87 2005.08.11
  166.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 소련군 정치장교 G .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167.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Moscow Times 07/22/2004
  168.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8권, pp. 450~451.
  169.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170.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171.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2009년 6월 20일 조선일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1992년) 상권 pp.72~74
  172.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p.84 -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는 말이 삭제됨.
  173. 한재덕(韓載德),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27) 1962.06.01 동아일보 2면 [1959년 한국으로 귀순 후 쓴 글]
  174.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04.15) p.134.
  175.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77 : 레베데프와의 인터뷰 (모스크바, 1991. 6. 11)
  176. 김일성 대일 해방전 참가 못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 [중앙일보] 입력 1991년 08월 26일 종합 5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77
  177. 177.0 177.1 해방절이 없는 북한 - 장진성∙탈북 작가 2013-08-20
  178. 이상조(李相朝)씨 - 신일철(申一澈)교수 대담(對談) : 8월 종파(宗派)사건 「반김(反金)세력」 제거 조작극(造作劇) 1989.09.18. 동아일보 5면
    김일성 정권의 수립과정: 소련군 첫 입성 자유아시아방송 2013-05-14
  179.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1) 소련군의 북한 진주 우리 역사넷
  180. 박갑동, 『박헌영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인간사, 1983, p. 144~145
  181. 181.0 181.1 (49)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2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136
  182. Soviet Report on Communists in Korea, 1945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 소련군정 인사, 아마도 스티코프가 1945년 11월경 작성한 문서.
  183. 朝鮮共産黨 以北5道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 金日成이 기조연설 대한민국사 연표 1945년 10월 10일
    [1945년 10월 13일 朝鮮共産黨 以北5道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閉幕, 朝鮮共産黨 北朝鮮分局 설치] 대한민국사 연표 1945년 10월 13일
  184. [1945년 12월 17일 朝鮮共産黨 北朝鮮分局, 제3차 擴大會議 개최 (책임비서 金日成)] 대한민국사 연표 1945년 12월 17일
  185. 박헌영 ­김일성 연쇄비밀회담(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9) 중앙일보 1991.09.16 종합 5면
  186. 186.0 186.1 조선노동당 통일부 북한정보포털
  187. 개인숭배사상으로 청년, 지식인을 바보취급하지 말아야 RFA 2018-10-22
  188. 188.0 188.1 188.2 [붉은왕조 증언요약] 소, 김일성에 강제로 북한 떠맡겼다 조선닷컴 : 1997/06/29
  189. 蘇(소),「6.25南侵(남침)」비밀文件(문건) 공개 1992.06.17 동아일보 2면
  190.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191. 金日成 將軍 凱旋記 / 韓載德 著.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 : p.106
  192.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종합 5면
  193. 193.0 193.1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194.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195. 195.0 195.1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196. 「金日成은 나에게 마르크스·레닌主義를 배웠다」 前 金日成大學 부총장 朴一 회고 / 朴 一 ,『신동아』, 1991년 10월호 pp.350-359 p.354
  197. 김일성의 이념교수 구소거주 한인 폭로 ◎“김은 빨치산 가담만하고 안싸워/항일투쟁 거짓말… 평범한 농부였다”: 국민일보, 1992-03-11
  198. [탈북 수기] 시베리아 벌판의 농노들 이영일 씨 <7> 통일신문 2015/06/12
  199. 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49
  200.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위클리 조선
  201. 201.0 201.1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202. "「金正日(김정일) 백두산出生(출생)」은 거짓말" 김일성의 KGB 상관 N씨 증언 1991.12.26 동아일보 15면
  203.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 "I want you[Grigory Mekler] to work on this person," said Meretskov, referring to Kim. "At the moment not many people know him. Travel to every corner of North Korea with him. It will be useful for both of you." Kim Il Sung, who gained the rank of major in the Soviet army, returned to Korea in 1945 with the occupying forces, and Mekler and other Soviet advisers spent a year touring with him, even helping to write his speeches. "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 recollected the Soviet colonel.
  204.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 거진읍 거주 월남민 김청구씨 증언 <조선일보 1989년 4월 13일자 독자 의견>
  205. 조선의 청년 영웅 김일성 장군을 환영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5년 11월 5일
  206. 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상)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4월 8일 / 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하)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4월 9일
  207. 지도자 군상 - 김일성론 :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1946년 4월 12일 1면
  208. 박갑동(朴甲東),『내가 아는 박헌영』 (108회) 중앙일보 1973.07.04 종합 5면
    박갑동(朴甲東), 『박헌영(朴憲永)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서울, 인간사, 1983) p.190 : 위 중앙일보 연재물을 책으로 간행한 것임.
  209. 《우리의 太陽 : 金日成 將軍 讚揚特輯.(김일성장군 찬양특집)》 (平壤,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pp.22 ~ 23.
  210. 凱歌(시집), 朴石丁 저 (문화전선사, 1947) p.11
  211. ПЛОТНИКОВ Георгий Кузьмич
  212. 212.0 212.1 蘇(소), 金日成(김일성) 권총협박 정권 떠맡겨" 러 중앙TV「金父子(김부자)특집」 1997.06.30 동아일보 10면
  213. Andreĭ Nikolaevich Lanʹkov, 《From Stalin to Kim Il So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C. Hurst & Co., 2002) p.59
  214. 코비젠코는 1950년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 한국에 관한 소책자를 아르메니아어로 출판했다 : Kovizhenko, V. V., 《Korea》 (Erevan : Haypethrat, 1950) : in Armenian - 하버드 대학 Widener 도서관 소장.
  215. Andrei Lankov, The Accidental Leader Korea Times 7/26/2005
  216. <화제> "金日成 집권 우연한 일" 연합뉴스 1995-08-19
  217. [북한, 이게 문제지요-31] 김일성, 해방 후 권력 유지 위해 정적 잔인하게 숙청 자유아시아방송(RFA) 2012-05-15
  218. 《6.25 전쟁사 제1집 - 전쟁의 배경과 원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2004) pp. 229~230
  219. 219.0 219.1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
  220.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21. 김일성, 1945년 말부터 북한 단독 정권 준비했다 최영재 기자, 아시아 투데이 2015. 04. 20 : 1946년 2월 8일 임시인민위원회 출범일날 김일성의 연설 - 회수 폐기.
  222. 임시인민위원회 구성원 : 북한연표 해설목록 국사편찬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223.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조직, 인민정부 진용 자유신문 1946년 02월 20일
  224. 북선위원회진용(鮮委員會陣容) 공업신문 1946.02.21 1면
    北朝鮮 臨時人民委員會 樹立, 委員長 委員二十五人等 部署決定 중앙신문, 1946.02.20
  225. 김일성이냐 박헌영이냐/레베데프 당시 정치사령관 첫 증언 중앙일보 1991.11.30종합 1면
    스탈린/김일성 오른쪽 앉혀 낙점 암시/45년만에 밝혀진 북한 비사 중앙일보 1991.11.30 종합 3면[
  226.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9) 박헌영-김일성 4차 회동(3) 중앙일보 1992.01.06 종합 11면
  227.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235~237;
  228.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선인, 2010) p.70 : 김일성과 박헌영의 4차 회동이 1946년 6월 27일~ 7월 12일경까지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때 박헌영과 김일성에 대한 스탈린의 면접 시험이 있었다.
  229.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 pp.126~127
  230.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1992년) pp. 210~212
  231.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상권 pp.326~327.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데려갔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가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에서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232.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거쳐 수괴로 임명된 김일성 조선 Pub 2014-07-08
  233. 233.0 233.1 [BOOK책갈피] “소련은 일제때부터 김일성을 키웠다” 중앙일보 2008.06.27 종합 19면
  234.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35. 235.0 235.1 <제40회 이승만 포럼> 원문으로 본 그 비밀의 정체 :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New Daily 2014.06.24
    <제40회 이승만 포럼> 북한의 소련 체제이식은 동유럽의 경우와 어떻게 달랐는가? New Daily 2014.06.21
  236. 구소 북 장악음모 “결정적 자료”/쉬킨중장 비밀보고서 내용·의미 한국일보 1995.08.14
  237. 北韓人民共和國(북한인민공화국) 首相(수상)에金日成氏(김일성씨) 1948.09.10 동아일보 1면
  238. 北韓組閣完了(북한조각완료) 동아일보 1면 1948-09-11
  239. 미소공위 평양회의와 관련한 결론 - 소련은 북한을 공산화시키고 있다
  240. 下斗米伸夫, 『アジア冷戦史』 (中公新書, 2004年)
  241. 241.0 241.1 시모토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 1948 ~ ) 저, 이혁재 역, 《기밀 해제된 구(舊)소련 공산당 정치국 사료로 본 북한 정권 탄생의 진실》 (기파랑, 2006년 01월 10일)
    (기밀 해제된 구 소련 공산당 정치국 사료로 본) 북한 정권 탄생의 진실 국립중앙도서관
  242. 시모토마이 노부오 저, 정연식 역, 『아시아 냉전사』, 경북대학교출판부, 2017년 10월 27일
  243. Andreĭ Nikolaevich Lanʹkov, 《From Stalin to Kim Il So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C. Hurst & Co., 2002) pp.42~44.
  244. Andreĭ Nikolaevich Lanʹkov, 《From Stalin to Kim Il So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C. Hurst & Co., 2002) 서문 p.ix : North Korea was created as a Soviet puppet state, and perhaps this derogatory term is more applicable to Korea of the late 1940s to most of the other Soviet-controlled countries at that time.
  245. 조갑제, 소련에 충성했던 김일성 : 김일성은 抗日무장투쟁을 했지만 조선독립운동은 하지 않았다. 2008-09-06
  246. Robert Scalapino, and Chong-Sik Lee, Communism in Korea, Part I: The Movemen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2), pp. 317~318, pp. 381~382.
  247. 피의 날 삼월 일일 기념 대회, 그의 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 해방후 첫 3.1절 행사에 이 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스탈린 사진이 크게 내걸려 있다.
  248. [6·25 전쟁 60년]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1)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중앙일보 2011.11.03
  249. 249.0 249.1 김일성 “스탈린의 말, 내게는 곧 法” 조선일보 2006.06.30
  250. 250.0 250.1 1949 The Korean Government Delegation's Visit to Moscow (Korean Version)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251. 北(북), 南侵(남침) 48년부터 준비 1992.08.19 동아일보 1면
  252. "南侵(남침)준비는 48년부터" 1990.06.23 경향신문 13면
  253. March 05, 1949 Meeting between Stalin and Kim Il Sung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254. 北韓代表(북한대표)의 名簿(명부) 1949.03.06 경향신문 1면
  255. 蘇(소)에 借款要求(차관요구) 北韓代表派遣(북한대표파견) 1949.03.06 동아일보 1면
  256.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257.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 2010.06.24 (22:03)
  258. 내가 치른 북한 숙청 (6) 전 내무성부상 강상호| <남로당파 제거> (1) 중앙일보 1993.02.16 종합 11면
  259. 이지수,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4] "이 자식아, 전쟁지면 너도 책임있어" 김일성, 박헌영에 잉크병 집어 던져 조선일보 2010. 6. 24 종합 A08면
  260. 260.0 260.1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4 <김일성명령서> 金日成.朴憲永입장 중앙일보 1995.07.04 종합 10면
  261. 8.15 해방 4주년 기념 보고 - 8.15 4주년 평양시 기념대회에서, 박헌영 국립중앙도서관
  262. Anatoly Vasilyevich Torkunov (1950~ ) The War in Korea 1950 - 1953: Its Origin, Bloodshed and Conclusion (Fairfax, VA: ICF Publishers, 2000)
    [행복한 책읽기]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A.V.토르쿠노프 지음, 구종서 옮김/에디터 중앙일보 2003.06.27 5면
  263. 스탈린에게 이용당한 김일성 "한국전쟁을 질질 끌어라"는 스탈린의 지시에 순종한 김일성의 비참한 모습. 조갑제닷컴 2008-11-20
  264. 김국후특파원이 소서 만난 전 북한관리 박길용씨 회고 중앙일보 1991년 07월 20일 : ◎“조만식 선생 총살 공공연한 비밀” - /“놀라운 용기로 신탁통치 반대 /처형소식 듣고 고려호텔서의 「첫 인상」떠올라”
  265. 曺晩植(조만식)선생 유해 국립묘지 안장 1991.11.03 동아일보
  266. [國軍(국군)의 平壤 入城直前(평양 입성직전) 曺晩植先生 被殺(조만식선생 피살), 50年(연) 10月(월) 15日(일) 비오는 밤의 慘變(참변)] 1962.04.06. 동아일보 3면 : 위대한 민족주의자 曺晩植(조만식)선생이 68세를 일기로 괴뢰 내무서원 韓圭滿(한규만) 소좌가 지휘하는 내무서원들의 무자비한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마루바닥에 쓰러진 사실을 목격자들....
  267. 차두현, 북한 제7차 당대회 분석: 비장한 각오와 허세의 공존 아산정책연구원 2016.05.19
  268. [안치용 大기자의 발굴특종] 백건우-윤정희 북한납치 미수 사건 외교문서 단독 공개 Sunday Journal USA 2017/07/20
  269. [단독] 최은희 신상옥 납치 경위 담은 1984년 안기부 문건 월간조선 2018.04.17
  270. 한국전쟁 정전협정 62주년...남북한 시각차 극명 VOA 2015.7.27
  271. 초상화 사망자가 좋은 선전소재로 되는 이유 자유아시아방송(RFA) 2007-10-17
  272.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실체 - 김일성 동상 자유아시아방송(RFA) 2007-07-11
  273. N. Korea escalates 'cult of Kim' to counter West's influence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January 3, 2007
  274.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275. 우리의 太陽 : 金日成 將軍 讚揚特輯.(김일성장군 찬양특집), (平壤 :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p.16
  276. 조기천(趙基天,1913~1951)의 서사시 《백두산》 : 위키문헌
  277. 김정일#출생과 유년기 : 우남위키
  278. 평양시내 곳곳 김 치적 찬양 네온사인/김일성 생일잔치 이모저모 중앙일보 1992.04.16 종합 5면
  279. “권좌 밀려난 김일성, 김우중에 해외 보내달라 부탁” 한국일보 2016.11.22
    노진환 전 서울신문 사장 회고록 '시대의 격랑 속에서' (예지, 2016년 11월 04일)
  280. [김우중과의 대화]② "김일성과 20여번 만나…박정희 대통령은 날 '우중아'라고 불러" Chosun Biz 2014.08.21
  281. 281.0 281.1 카터의 세 차례 방북(訪北)이 남긴 교훈 미래한국 2016.04.20
  282. "김정남과 낚시 즐긴 김일성, 카터에 '아끼는 손자'라고 말해"(종합) 연합뉴스 2017-02-15
  283. 1994년 10월 21일 북-미 제네바 합의 국가기록원
  284. 묘향산 초대소 완전 철거 주간동아 2014-05-07
  285. 285.0 285.1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실체 : 주체사상의 교주 김일성 자유아시아방송(RFA) 2007-07-05
  286. 286.0 286.1 북한 언론 뒤짚어 보기: 10대종교 주체사상이 가져다 준 해악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07-05-11
  287. 287.0 287.1 Juche Is Classified As a Major World Religion Daily NK 2007.05.10
  288.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4권 p.183 : 제12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 (1936.3-1936.5) - 1. 새 사단의 탄생
  289.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9~70
  290.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권)』, (지원출판사, 2017)
  291.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이 체포되어 전향했다는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
  292.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293. 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294. 6.25北(북)에서 본 證言(증언) <16> 제4부 開戰準備(개전준비) 진행 (1949년) 1980.07.03. 경향신문 3면
  295. 김일성에게 배를 걷어차여 숨진 본처 김정숙 premium.chosun 2014.09.24
  296.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0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297. 297.0 297.1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298. 北노동당 '금고지기'에 한광상…김일성 부인 김성애 2014년 사망(종합) 연합뉴스 2018-12-27 16:47 : 1928년생이라는 설도 있다고 함.
  299. 통일부 “김정일 의붓 어머니, 김성애 2014년 사망” 중앙일보 2018.12.27
  300. [김씨 일가의 실체]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 실성하다 RFA 2012-09-18
  301. 김성애의 출생지는 평안남도 강서군이나, 김광협은 함경북도 회령군 출신이므로 남매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302. [인민무력부장傳(2)] 김평일 때문에 숙청된 김광협 중앙일보 2016.11.15
  303. [인물연구] 하기와라 료(萩原遼) : 월간조선 2001년 3월호
  304. 하기와라 료(萩原遼), 「서울과 평양』 (서울 : 도서출판 가나, 1990), p.108
  305. 김정일의 파멸을 앞당긴 故 신상옥 감독 자유북한방송 2006-04-26
  306. 조갑제(趙甲濟), 북한정권의 붕괴를 보지 못하고 간 최은희, 신상옥 Pub 조선 2018-04-17
  307. 김일성의 [짬뽕] 전체주의는 어디서 왔을까? - 뉴데일리 2013.08.09
  308. 20개 정강 네이버 한국근현대사사전
  309.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다음백과
  310. 《アルバム 謎の金日成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 / 編著者 代表 李命英, (成甲書房, 1978年)
  311. 《金日成は四人いた - 北朝鮮のウソは、すべてここから始まっている!》 成甲書房,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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