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번째 줄: 607번째 줄:
| 6 || [[:파일:1938-07-19-Kim Il-sung.jpg|나가오카 토모타로(永丘智太郞), 『極東の計劃と民族』, 1937년 10월 초순]] || 만주(滿洲)의 비적적화공작(匪賊赤化工作)과 조선인 ||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金日成)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910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出身)이며, 그 지방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고 하였다.  
| 6 || [[:파일:1938-07-19-Kim Il-sung.jpg|나가오카 토모타로(永丘智太郞), 『極東の計劃と民族』, 1937년 10월 초순]] || 만주(滿洲)의 비적적화공작(匪賊赤化工作)과 조선인 ||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金日成)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910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出身)이며, 그 지방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고 하였다.  
|-
|-
| 7 || [[:파일:보천보 김일성 사살.jpg|경성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7면]] ||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 共産匪 金日成の 死 || 김일성은 함남 출신. 19세에 모스크바로 가서 10년 체류. 공산대학 졸업. 만주사변 때 돌아옴.<ref name="cent"/>
| 7 || [[국경경비진 주파기#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1939년 6월 23일|조선일보 1939년 6월 23일자 7면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 || 김일성이 "본적을 함남 갑산군(甲山郡)에 두엇다 하는 말도 잇스나 평남 출생이란 말이 더 근사하다고 한다."
|-
| 8 || [[국경경비진 주파기#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 1939년 6월 23일|조선일보 1939년 6월 23일자 7면 ||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 || 김일성이 "본적을 함남 갑산군(甲山郡)에 두엇다 하는 말도 잇스나 평남 출생이란 말이 더 근사하다고 한다."
|}
|}



2022년 9월 29일 (목) 20:12 판

김일성에 대해 무엇이 궁금한가요? →
김일성 관련 표제어 보기
김일성 (생애전반) 김일성 가짜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김일성 관련 원천사료 목록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김일성 진짜론 반박
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동명이인)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김일성 가짜설은 해방 후 소련군이 데려온 북한 김일성(金日成)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 대중앞에 나선 당시 나이가 33세로 너무 젊어서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 사이에 가짜라는 소동이 벌어지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이후 김일성 가짜설은 수많은 월남민들에 의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져 당연한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 일찌기 김일성 장군 소문을 듣고 자라 직관적으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알았던 월남민 1세대 대다수가 작고하거나 퇴장할 무렵부터 김일성은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주장이 나와 점점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금도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개요

김일성 가짜설의 기원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서던 날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1][2][3][4] 군중들의 태반은 김일성보다 나이가 연상이었을텐데, 당시 33세이던 북한 김일성은 나이로 보아 그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집회 참석자들이 쉽게 간파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오랜 외국 생활로 연설하면서 한국말을 심하게 더듬거렸고[5][6], 그의 본명이 김일성 아닌 김성주라는 것이 알려진 것도 그가 가짜라는 확신을 더하게 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 대위(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эн)"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그가 너무 젊었기 때문에 가짜 소동이 일어났다. 뒷줄 소련군 장성들은 맨 오른 쪽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다. 레베데프는 당시 무명의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민족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했다고 1991년에 증언했다.[7] 김일성 왼편은 강 미하일 소련군 소좌.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김일성은 어려서 만주로 가 거기서 성장했고, 만주와 소련에서 활동하여 국내에는 연고가 거의 없는 낯선 사람이었으니 대중들은 해방 전 그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실제 이름이 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1920년 무렵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도 만나본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두 사람의 나이가 맞지 않아 동일인이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자명했다. 이후 많은 월남민들에 의해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져 사실로 인식되었다.

북한 김일성에 대해 가짜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인물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행적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된 오늘날에도 베일에 가려진 부분도 많고, 진위 논쟁조차 선명히 가려지지 않고 있는데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귀국한 이승만, 김구 같은 분들을 두고는 진위논란이 벌어질 여지가 없었지만, 김성주가 사칭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명성과 달리 실체가 애매한 이름이었던 것도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실체가 분명한 사람을 함부로 사칭할 수는 없으므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애매했기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었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해방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던 북한 김일성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어릴 때부터 아는 익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북한이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선전해온 조작된 김일성 경력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간 반면에, 일제시대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 이름을 듣고 자랐던 월남민 1세대들은 점차 세상을 떠나고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새로운 세대들이 주축이 되니 김일성 가짜설은 힘을 잃고 진짜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는 북한 김일성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으므로, 해방전에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일 조차 없고,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것이 점차 밝혀져 마치 독립운동을 한 영웅이 맞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그의 본명은 김성주이지만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진짜가 맞다고 주장할 빌미가 마련된 것도 진짜설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월남민 1세대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오늘날 학계와 일반에는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어, 월남민들이 남긴 가짜 증언은 깡그리 무시되고, 그들은 항일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로 몬 멍청이 쯤으로 치부된다. 선배세대들에 대한 모독이다.

김일성과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짜로 여긴 것은 역사적 사실인데,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사람들이 왜 그를 가짜로 여겼는지 이유는 연구하지 않고, 그가 상당한 항일투쟁을 한 것이 맞으니 진짜라거나, 과거 한국 위정자들이 반공정책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식의 근거도 없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기록은 1945년 10월 14일 그가 평양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로 부터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당시는 그가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될지도 알 수 없던 시점이다. 그를 가짜로 기록한 미군정 시기의 문헌도 수두룩하므로,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은 대중을 속이기 위해 지어낸 그럴듯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연구자라면 김일성과 동시대 사람들이 왜 그를 가짜로 여겼는지 이유나 밝혀야지, 가짜를 진짜로 바꿔치기를 시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냥 잊혀졌으면 그뿐인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인물이 스탈린과 소련군 덕분에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50년가까이 절대 권력을 유지하다 일족이 세습하는 체제로 만들어 놓다보니 그의 진위는 물론이고 세세한 행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북한내의 김일성 가짜설 확산과 이에 대한 억압

함경북도 도민회장을 지낸 김허남(金許男, 1920~2020)은 해방 직후 김일성이 처음 대중앞에 나서는 평양의 집회에 참석했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이 소학교때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나이가 맞지 않아 북한 김일성 측에서 일하던 친척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가 살고싶으면 그런 말을 꺼내지 말라는 협박을 당했다고 하였다.[8] 이런 식으로 언론자유가 없는 김일성 치하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지만, 단편적으로 이를 거론한 사례는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2]

서울에서 간행되던 잡지 『민성(民聲)』[10] (제2권 제2호 1946년 1월 20일자)[11]에는 1945년 12월 평양에서 한일우(韓一宇)가 작성하여 보내온 기고문 《凱旋한 우리 팔티산 名將 金日成將軍會見記》와 홍순목(洪淳穆) 기자의 1945년 11월 18일 ~ 12월 14일 기간 북한 방문기 《北韓 三十八度以北暗行記 : 蘇聯進駐下의 北朝鮮現狀》가 실려있는데, 이 기사들을 보면 당시 평양에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돌아 이에 대한 해명성 답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민성(民聲)』 제3권 제4호(1947.05.01)에 실린 박찬식(朴燦植) 기자의 《북조선답사기(北朝鮮踏査期 [完])》에도 1946년 12월 3일 평양에서 나웅(羅雄, 1909~ ?)을 만나 김일성의 진위에 대해 문답하는 내용이 나온다.[12] 북한 사람들은 사전에 지침을 받은 듯이 한결같이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변명성 해명으로 일관한다.

소련 군정 문서에는 1946년 3월 5일 시행된 토지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황해도 사리원시와 안악군에서 김일성이 가짜라는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고 나온다.[13][14]

또 1958년 소련으로 망명한 북한 유학생 김종훈은 당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김일성은 가짜이고, 살인 방조자이며 전범"이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고 증언했다.[15]

소련의 고려인으로 북한 외무성 부상을 지내다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간 박길용은 해방 후 1945년 10월 중순 그가 처음 북한에 왔을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16]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을 지내다 59년말 소련파로 몰려 자진귀국형식으로 소련으로 되돌아가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으로 있는 박길용 박사(73·모스크바시)의 증언.
『북한정권에 참여,김일성을 도우라는 소련정부의 지시를 받고 평양에 도착하니 「김일성 장군」이 소련군에 의해 인민들에게 애국투사로 부상되어 있더군요.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민족민주진영·기독계 인사·젊은층 등의 소비예트화 거부와 가짜 김일성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만만치 않더군요. 도착과 동시에 나는 소련 25군 정치사령부에서 통역 및 내근요원을 맡았기 때문에 당시 북한정세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지요. 소련군 수뇌부는 조만식 선생을 끌어들이는데 안간힘을 쏟았지요. 그러나 조만식 선생은 자신의 민족·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많은 지식인들과 지주·청년층이 그를 추앙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소련군 지도부는 소련정부에 공산당 조직과 정치·행정경험이 있는 소련의 한인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요. 이 그룹이 바로 소련파 제3진에 해당됩니다.』

88여단에서 김일성 부대 통역관으로 있었고, 해방 후 북한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도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 대중앞에 나서던 날의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하기와라 료(萩原遼, 1937~2017), 『朝鮮戰爭』(文藝春秋, 1993/12)
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한국논단, 1995), pp.40~41.

앞에서 말한 유성철(兪成哲)씨도 이때 회장에 있었다. 그는 평양에 온 뒤 헌병사령부에 배속되었다. 당일에는 회장의 경비를 겸하여 세론(世論)수집이라고 부르는 인심의 파악 일을 명 받았었다.

"나는 회장을 돌아다니면서 민중의 반응을 탐색했습니다만, 김일성의 연설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가짜다' '러스키의 앞잡이다' '저건 애송이가 아니냐. 뭐가 김일성 장군이란 말이냐'라고 저마다 중얼거렸다. 곧바로 회장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너무나 젊고 그의 조선말이 서툴렀기 때문이었죠.”

김일성 장군으로 탈 바꿈한 김성주 청년은 소련군 사령부가 마련한 짧은 연설 원고를 더듬더듬 조선말로 읽어 내려갔다.
그는 일곱살 때 한방의를 하고 있던 부친의 사업 사정으로 고향인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를 떠나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인 학교에 다녔고 33세에 귀국할 때까지 거의 중국말로 생활해 왔다. 그 때문에 그의 조선말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형편 없었다고 당시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은 적지않다.

저자 하기와라 료(萩原遼)는 1991년 11월 타시켄트로 유성철을 방문하여 위의 증언을 직접 들었다.

국내 공산주의자로 해방 직후 북한의 고위간부 중 한 명이었던 오기섭(吳琪燮, 1903-?)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문건을 배포했다가 자아비판을 당했다는 고준석(高峻石, 1910~1994)의 증언이 있다.[17] 1948년 남북협상 당시 평양을 방문했던 고준석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옛친구 임해(任海)는 일본에서 활동하다 해방 직후 귀국해 월북한 사람으로 본명은 임길봉(任吉鳳)이다.

임해(任海) 부부는 나의 방문을 대단히 기쁘게 맞이해 주었다. 그날 밤, 나는 임해로부터 북한 지도자 군상을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그에게 퍼부었다.
임해(任海) 동지, 오늘밤 나는 여러 가지 얘기를 동지로부터 듣고 싶습니다. 지난 달에 열린 북로당 제2차 대회의 보고나 토론은 언젠가 문서로 읽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도 북조선의 지도적 동지들의 인물에 관해서 무엇이라도 좋으니 들려 주실 수 없습니까?”

“그것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박헌영파인 오기섭(吳琪燮)이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 비판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책임 비서였던 당시부터 분파주의 활동을하여 김일성 동지를 가짜라고 하는 문서를 당 하부 조직 (당 세포)에까지 유포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 비판을 요구당했는데, ‘나는 조선의 트로츠키스트입니다. 이것을 자기 비판하겠읍니다.’ 하고 말하는 오기섭에게 김일성 동지가, ‘지금의 오기섭 동지의 말은 자기 비판이 될 수 없읍니다. 자기 비판이란 것은 자신이 이러저러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쁘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힐책했습니다. 그로부터 황해도 도 당부 책임자 - 이 동지는 김일성 동지와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 가 일어나서, 수첩의 페이지를 뒤적이며 김무정 동지가 모월 모일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 수많은 구체적 사실을 들어 김의 분파주의 언동을 지적하여 자기비판을 요구했습니다. 김무정박헌영파라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구체적인 분파주의 언동이 폭로되었으므로 이 마음이 약한 장군은 시종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양 소련군정 장교 출신자들 중에도 후일 구소련 붕괴 후 인터뷰에서 북한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고 증언한 사람이 다수 있다.[1] (구체적 사례는 아래에 나온다.)

해방 직후 북한에 살다 6.25 때 월남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은 소련군정이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의 확산을 막기 위해 취한 일들에 대해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18][19]

그해(1945) 10월14일 평양시 고누꼴 공설(公設)운동장에서 개최된 김일성장군 환영대회에서 주인공(主人公)으로 소개된 사람은 약관 33세(1912년 4월생)의 본명 김성주(金聖柱)이다.

역사적 인물,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을 보려고 1백리 거리 안팎의 먼곳에서까지 소달구지를 타고 모여든 군중들 가운데서 누군지도 모르게 “저자는 가짜 김일성 장군이다”는 함성을 질렀다. 삽시간에 “가짜 김일성이다”는 함성이 터졌다. 미리 배치해 놓은 경비원들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는 군중을 막고 환영대회는 순서대로 무사히 진행되었다.

이때로부터 북한지역에서는 “가짜 김일성 장군이 나타났다”는 화제(話題)로 들끓게 되었다. 소련 군정당국(軍政當局)은 공산당을 앞세워 이것을 막느라고 온갖 수단을 다했다.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좀처럼 들뜬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가짜 김일성’ 설은 더욱 왕성하게 유포되었다. 그러자 소련군정당국은 공산당을 시켜 ‘김성주가 왜 김일성 장군인가'를 해설하기 위해 「영웅(英雄)의 가계(家系)」라는 소책자(小册子)까지 발행하게 되었다. 이 조치는 비록 김성주(金聖柱)가 소련군정에 의해 개선장군으로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는 평양에서 멀지않은 만경대에서 출생했고 그의 생가(生家)에는 그의 조부모(祖父母)가 살고 있으며 조부(祖父) 김보현(金輛鉉)은 아직도 내 장손(長孫)은 김성주(金聖柱)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차라리 세상이 다알고 있는 사실은 그대로 내놓으면서 ‘그러나 그는 만주에서 민족의 태양으로 영웅이 되었다’는 주장은 확고히 밀고나가야 한다는 방침의 실천이었다. 이때로부터 다시는 누구도 '가짜 김일성’ 설을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엄금했으며 이 금령(禁令)을 어기면 처벌을 받았다. 마치 봉건시대의 임금에 대한 일종의 ‘불경죄(不敬罪)'와도 같은 것이었다.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연구

초기의 김일성 가짜설은 북한 김일성이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정도의 의미로 확산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도 북한 김일성의 실제 전력이나, 진짜 김일성 장군이 어떤 사람인가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단편적인 주장만 몇가지 나왔을 뿐이다. 당시는 전후 복구에 바쁜데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가난하던 시절이라 김일성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엄두를 못낼 상황이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김일성에 대해 본격적인 심층적 연구를 한 사람은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허동찬(許東粲, 1932~ ) 등이다.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일제시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에 대한 많은 월남민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는데,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김일성 장군의 풍문이 있었으며, 1920년대 초에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20] 사람마다 증언하는 내용이 다양하여 김일성 장군을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김일성 장군 전설의 원형이 되는 인물로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 의병장 김일성 (金一成, 1888 ~ 1926)과, 일본 육사 나오고 백마타고 다녔다는 김일성 장군에 해당하는 인물로 김광서(金光瑞, 1888 ~ 1942) 장군을 들었다. 또 북한 김일성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1937년 6월 보천보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의 2군 6사장 김일성은 그 해 11월 13일 전사했다고 밝히고, 그 후에 나오는 제2방면 군장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 김일성이 유격대에 투신하기 전의 행적도 그의 창덕학교 동창이나 만주에서 그를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상당 부분 밝혔다. 다만 김일성이 1932년 유격대 투신한 후부터 북한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의 실제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히지 못했는데, 그 시기의 일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자료 입수가 어려웠던 탓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는 일제시대 문헌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무슨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어려웠고, 국교도 없던 중공이나 소련의 문헌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김창순, 허동찬 등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연구 논문이나 저서를 다수 남겼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이명영과 다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김일성 진짜론의 대두와 논리 -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

1980년 말 이후 미국 하와이대 교수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과 일본 동경대 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는 북한 김일성이 만주 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을 한 1로군 제6사장 및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맞으므로 그가 가짜라는 종래의 주장은 틀렸고 진짜가 맞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이들의 연구에 힘입어 국내에서도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20년 무렵부터 알려진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 6월의 보천보사건 때부터 이며, 동아일보 등이 호외를 발행하며 크게 보도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으므로 그가 진짜가 맞다는 논리를 편다. 또한 보천보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데, 사람들이 유명한 인물이니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가짜라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북한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 나설 당시에 사람들이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당사자가 아니라서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라고 한 사안의 본질을 교묘하게 왜곡한 것으로 논리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straw man fallacy)[21]"에 해당한다.

그들은 해방 당시 보천보사건이 과연 그렇게 유명한 것이었는지,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정말 유명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입증한 바가 없다. 오히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보천보사건도, 그 사건을 6사장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것도 몰랐고, 그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고 대다수 언론이 보도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는 많다.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고 나서 자신의 항일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집권한 때문에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진 것이다.

또 그들은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수많은 기록과,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6사장 김일성의 신원 기록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반박을 내놓지 못한 채 잘못된 기록이라고만 주장하는 형편이다. 나아가 보천보사건보다 2년 전인 1935년 2월에 그보다 더 큰 이홍광이 주도한 동흥습격사건이 있었고, 1934년 1월에는 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이 있었지만 모두 잊혀져 있다는 것은 무시하고, 유독 북한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보천보사건에만 지나치게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역으로 해방 후 김일성 아닌 이홍광이 집권했더라면 보천보사건은 잊혀지고, 동흥사건이 유명해졌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또 만주는 기후가 혹독해서 나이 든 사람들이 활동하기 힘든 곳이므로 나이든 김일성 장군은 있을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만주가 젊은 사람만 사는 곳도 아니고, 만주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는 것도 아닌데 나이든 김일성 장군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망발이다.

공산권 붕괴와 문헌 전산화 이후 발굴된 새로운 자료와 증언

1990년 무렵 구소련 붕괴와 중국의 개방으로 전에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산권 자료와 증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일제시대 문헌의 전산화로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어, 지금은 김일성의 진위 논란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놓은 잡다한 주장들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이 발굴 제시했던 근거 자료들과 새로 발굴된 증언과 원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북한 김일성의 진위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1990대 초 한소 수교와 구소련 붕괴 직후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해방 당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 공작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한 평양 소련군정의 핵심 인사들인 니콜라이 레베데프(1901~1992) 소장,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 ~ 2006) 중좌, 레오니드 바신(1915 ~ 2006) 소좌 등이 한결같이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도록 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들은 김일성 정권 탄생의 공로자일 뿐, 그에게 박해를 당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니 일부러 거짓 증언을 지어내서 할 이유도 없으므로, 이 사안에 대해 이들보다 더 정확히 알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국내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들의 증언이 나온지 3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내놓지 않고 있어, 불리한 증거들을 고의로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사고 있다.

새로 발굴된 대다수 일제시대 및 해방 직후 자료들도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뒤집은 배경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당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지도자가 된 꼭두각시(괴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직결된다. 오늘날 친북화된 학계에서 그를 항일투쟁의 영웅이 맞다며 진짜로 둔갑시켜놓은 가장 큰 이유도 그에게 가짜라는 멍에를 벗겨줌과 동시에 그가 소련의 괴뢰가 아닌 항일투쟁의 영웅이라 북한주민들이 선택한 지도자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남한에서 과거와 달리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그를 진짜로 둔갑시킨 사람들의 목적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나아가 일제시대 만주군 소위를 1년여 지낸 박정희를 거물 친일파로 몰아 항일영웅(?) 김일성과 대비시켜 북한이 남한보다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한국인들의 항일투쟁 때문에 해방이 된 것도 아닌데, 해방 후 80년이 다된 오늘날까지도 이런식으로 항일투쟁만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최고 가치인 양 떠받들고 다른 가치는 무시한다면 김일성과 같은 최악의 "항일팔이 사기꾼"에게 주권(主權)도 자유도 다 빼앗기고 노예로 살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공개된 소련 문헌들이나 평양 소련 군정 인사들의 후일 증언은 거꾸로 그가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철저히 소련이 만들어낸 지도자일 뿐, 항일투쟁의 영웅이라서 집권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소련 군정 3년간은 자신들이 5년간 훈련시켜 데려온 꼭두각시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워 지도자 훈련을 시키며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권력기반을 다져주는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의 양상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기록은 그가 대중 앞에 나선 직후인 1945년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록이나 증언의 구체적 내용은 연대순으로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이 중에는 드물지만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하는 것도 있다. 물론 아직 발견되지 않아 누락된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들 기록이나 증언에 나오는 김일성 장군은 일찍부터 알려진 거의 전설화된 인물이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의미이고, 보천보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서 가짜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1974)』에도 여러 월남민으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증언을 듣고 채록한 것이 나온다.[20]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특이한 것은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 ~ 1943)이 운영하던 창덕학교(彰德學校) 교사를 지낸 월남민 현응수(玄應洙, 1892 ~ ?)의 증언이다.[22] 그는 3.1운동 발발 보름 전인 1919년 2월 15일 창덕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당시 교장인 강돈욱의 집도 자주 방문하였는데, 그와 만주에서 활약하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강돈욱의 어린 외손자 김성주도 옆에 앉아 듣곤 했다고 하였다.[23][24] 김성주가 코흘리개일 때도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는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이고, 어린 김성주도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같이 들은 것이다.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도 전설상의 김일성 장군 이야기는 적어도 191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북한 김일성과는 무관하다고 하였다.[25][26]

‘보천보 습격’의 김일성이 누구냐'를 가지고 정치역사학자들 가운데는 그가 오늘의 북한 김일성이다 아니다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문제를 놓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인 김일성장군과 보천보습격의 주인공(主人公) 더구나 북한 김일성이 동일인(同一人)이 아니라는 것만은 다툴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인 김일성장군은 1919년 8월과 10월 또는 1929 년 6월에 있은 혜산진(惠山鎭),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습격사건의 주인공(主人公)으로 거슬러 올라가며,[19] 더 광범위하게는 1920년대의 만주각지(滿洲各地)에서 활약한 출중한 무장독립운동계의 명장(名將)을 상징하는 추상적 존재인데, 북한의 김일성은 1912년 4월생이니까 1919년에는 7세 밖에 안되는 아동(兒童)이며 1929년에는 17세일뿐이다.

구정상(口傳上)으로도 7세 또는 17세의 김일성장군은 없기 때문에 북한의 김일성을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인 김일성장군과 동일시(同一視)하는 시도는 누구의 작품(作品)이든 간에 어불성설(語不成說)의 낭설(浪說)에 불과하다.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의 김일성(金一成, 1888 ~ 1926) 장군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도 1919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증언 사례들로 볼 때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한 것은 1919년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920년대에는 상당히 퍼져 있었다는 증언이 너무 많아서 북한 김일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은 충분히 입증된다.

1944년 11월 18일 일본 귀족원 사상조사위원회(貴族院 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에 당시 조선에 "김일성이 영웅(金日成 英雄)"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다고 했다.[27]

또 사실 확인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해방 직후 김일성 장군 행세하던 김성주가 외조모인 위돈신(魏敦信)을 찾았을 때, 외조모는 그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다고 못마땅해 했다고 하는데,[28][29] 일찍부터 남편 강돈욱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던 때문일 것이다. 김일성의 외가 쪽 10촌 동생인 탈북자 강명도(康明道, 1958 ~ )도 TV에 출연하여 김일성은 가짜라고 하면서, 자신들 집안에서도 그가 김일성인 줄 몰랐다고 하였다.[9]

일제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일제의 기록에 나오지 않으니 믿을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제의 기록도 전혀 없지는 않다. 1944년 11월 18일 일본 귀족원 사상조사위원회(貴族院 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에 당시 조선에 "김일성이 영웅(金日成 英雄)"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다고 했다.[27] 이 김일성이 바로 유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보이며, 축지법을 쓴다거나 하늘을 난다거나 하는 믿기 어려운 말들이 떠도니 실제 인물로 보기 어려워 유언비어라고 했을 것이다.

북한도 일찌기 1910년대부터 김일성 장군의 전설이 있었다고 인정한 바 있다.[30] 물론 이런 것도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려고 하다 혼선을 빚은 것이다.

김형직도 아들들에게 김일성 장군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해방 직후 1945년 9월 15일부터 1946년 5월 6일까지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縣)의 중국군 부대에서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2021)와 침식을 같이하며 붙어 살다시피 한 이용상(李容相,1924∼2005)[31]은 1991년 중앙일보에 『나의 친구 김영주』라는 제목으로 당시 일에 대한 회고의 글을 50회에 걸쳐 연재하였고, 1994년에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이라는 책으로 간행하였다.[32]

이 연재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용상 자신도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만, 김형직(金亨稷, 1894~1926)도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해주며,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김영주가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므로, 이 때문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선호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종국에는 본인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였고, 이로인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 것이다. 그의 동생 김영주가 형이 가짜가 맞다고 해방 직후에 증언한 셈이다. 중국군에 있을 당시 김영주는 평양방송을 듣고 북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김일성이 자신의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백발장군이 어떻게 33세인가" 꼬리문 의문 : 노장군이 물려준 이름이라는 김영주의 변명[33][34]

김일성의 친동생인 그가 자기 큰 형 이름이 원래는 김성주였는데 지금은 김일성, 즉 오늘(1945년10월14일)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 시민환영을 받은 김일성이라고 분명히 필자에게 말했다. 김성주가 지금은 김일성으로 됐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필자가 10세 전후일 때 우리 아버님은 약주를 드시면 언제나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이 피면」하는 『봄 노래』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노래가 끝나면 반드시 『이제 곧 김일성 장군이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김일성 장군은 백발노인으로 축지법을 쓰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 백발장군이 지금은 몇살쯤 되셨을까. 나는 김영주에게 물었다.
『김 동지, 형님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길래 김일성 장군이란 말씀입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33세라고 대답했다. 33세라면 내 계산과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김영주는
『네, 알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해야 할 김일성 장군 나이가 왜 33세냐는 말씀이지요. 나 역시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얘기하셨으니까요.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요.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은 내가 6세때 돌아가시고 모친도 내가 12세때인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성주형을 따라다니며 유격대 노릇을 했습니다. 그 위험한 나날로 보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참 용한 거지요. 철주(哲柱)라는 작은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19세때 남만주 동녕현(東寧縣) 노흑산(老黑山)에서 전사했지요(노흑산은 산명이 아니라 간도성에 있는 지명이라고 했다).
성주 형님은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군 사단장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전투를 잘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름을 물려준 겁니다. 형님에게 이름을 물려준 김일성 장군도 역시 그 전대의 진짜 장군으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답니다.』

『네, 그것을 양명(讓名)이라고 하지요. 이름을 물려 받은 김 동지의 형님은 승명(承名)한 것이고. 김 동지, 그런 연유로 형님이 젊은 나이에 김일성 장군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김 동지의 「김일선(金日鮮)」이란 이름은 누구에게서 승명한 겁니까.』
『이것은 내가 적당히 지은 겁네다. 왜「일선」 인지 아십니까.』
『…….』
『아주 간단합네다. 일본 놈들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속임수로 떠들던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과 같다고 기만하기 위해 만든 조선총독부 표어)를 본떠 나는 일선(일본과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내 속셈은 급할 때 일본군경에게 「자 보시오. 나는 내 이름까지도 일선 일체라는 뜻에서 일선이라고 지었지 않느냐」고 둘러대기 좋게 만든 이름입니다. 실제로 일선이라는 이름의 효과도 봤디요.

그러나 일선의 참뜻은 김일성 형의 「일(日)」과 조선의 「선(鮮)」을 딴겁네다.』

이 외에도 북한 김일성이 소시적에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증언이 다수 있다.

이런 일들이 그가 일찌기 1930년말 만주 회덕현(懷德縣)오가자(五家子) 시절부터 김일성 이름을 쓰며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김일성 이름의 한자 표기는 계속 바뀌어 왔으며,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선(金日善), 김일선(金一善) 등으로 다양하게 쓰이다가 1937년 11월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 전사한 이후 자신의 이름 한자도 金日成을 물려받아 그대로 쓰기 시작했다. 이들 이름은 한국어 발음은 모두 같거나 유사하여 같은 이름처럼 보이지만, 중국어 발음은 모두 달라서 같은 이름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

김일성 가짜설이 나오게 된 정확한 배경

북한 김일성의 진위에 대해 논하려면 우선 가짜설의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만 시비를 정확히 가릴 수 있다. 그가 항일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니 가짜가 아니라거나, 일제시대에 김일성 이름을 쓴 적이 있으니 가짜가 아니라는 주장은 문제를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그가 가짜라는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섰을 때이다. 청중들 태반은 김일성보다 연상이었을텐데 어디서 무얼 하던 누구인지 모르는 33세의 젊은 사람이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명성을 들어왔던 김일성 장군이라고 하니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하므로 가짜라 한 것이다.[1] 청중들은 그가 무슨 항일투쟁을 했는지, 이름은 무얼 썼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이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고, 그가 청중들이 일찍부터 이름을 들어 알고 있던 그 김일성 장군이 맞느냐가 문제의 본질이다.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의 보천보사건 때부터라고 주장하면서 북한 김일성이 그 사건의 당사자가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해방 당시 보천보사건 자체나, 그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고 다수 언론에 보도된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35] 1935년 2월에 일어난 이홍광(李紅光, 1910∼1935)동흥습격사건보천보사건보다 일본측 피해도 더 컸고, 1934년 1월에는 토성습격사건도 있었지만 오늘날 이 사건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홍광이 국내에서 항일 영웅으로 부각된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천보사건과 그 주역 김일성에 대해서도 실제로는 마찬가지 였다.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공적으로 보천보사건을 대대적으로 부풀려 선전한 때문에 그 사건이 유명해졌을 뿐이다.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19년 3.1운동 무렵에도 퍼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고, 적어도 1920년대 초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36] 평양의 집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눈앞의 김성주가 보천보사건의 주역 김일성이 아니라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라고 한 것이다. 나아가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사건의 실제 당사자도 아니면서 남의 공적을 자신이 한 일로 조작까지하였다.

북한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그 명성을 훔쳤다.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는 것은 근래에 발굴된 해방 직후부터 평양에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 2개월간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에서 밝혀진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부터 서울과 전국 도처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며,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 기타 미정" 등의 내용이 든 출처불명의 벽보와 비라가 나돌았다.[37][38][39][40][41]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55명 명단에도 이승만, 김구와 함께 김일성(金一成)도 들어 있다.[42][43]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에 발표된 대통령과 각료 적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군무부장 적임자로 김일성이 최다득표(309표 32%)를 하기도 했다.[44]

북한 김일성이 아직 소련군 88여단에 있거나, 평양에 왔더라도 아직 주목받을만한 공개행보도 없어 남한 언론에 보도도 되지 않던 때에 이승만, 김구와 나란히 거명되던 이 김일성은 당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 대위였던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45] 풍문으로 떠돌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인 것을 그 시기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 정관해(鄭觀海, 1873~1949)의 《관란재 일기(觀瀾齋日記)》[46]에는 동진공화국 조각명단과 함께 김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38][47]
    1945년 8월 17일 (음력 7월 10일) :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고, 국호는 동진(東振)공화국이며 연호는 영세(永世)라 한다. 대통령은 안모 (안모는 전일의 안중근의 아들)이고, 내무대신은 여운형, 외무대신은 김일성(金日成)이라고 한다. [朝鮮爲獨立國, 國號東振共和國 年號永世, 大統領 安某, 安某 卽前日安重根之子, 內大 呂運亨, 外大 金日成云]"

    1945년 8월 26일 (음력 7월 19일) : "김일성군(金日成軍)은 말타고 하루 500리를 달릴 수 있으며, 그 정예하기가 비할데 없다고 한다. [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

    김일성 군대는 말타고 천리마에 준하는 속도인 하루 5백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김일성은 거의 전설화된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이나 소련군 시절 말타고 다니거나 기병부대를 거느린 적이 없다.


    전라북도 진산군(珍山郡,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거주했던 최병채(崔炳彩, 1907~1974)가 쓴 《최병채 일기(崔炳彩日記)》 1945년 8월 18일(음력 7월 11일)자에도 아침 식사 후 친지들과 대전에 나갔다가 들은 바를 적고 있다.[48][49]

    1945년 8월 18일 (음력 7월 11일) 토요일 : 七月十一日己未(陽八月十八日、土曜日)
    대전시에 나갔다가 들은바로 조선의 독립이 확실하며 나라 명칭은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이고, 연호도 역시 동진(東辰)이라 한다. [往大田市、依見聞、則朝鮮獨立的確、而名稱乃東辰共和國、年號亦東辰也。]
    .............
    대통령은 김구, 총리대신은 이승만, 외무대신은 여운형, 육군대신은 김일성이다. [大統領 金九、總理大臣 李承晩、外務大臣 呂運亨、陸軍大臣 金日成。]

    《중선일보(中鮮日報)》 1945년 8월 17일자는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 탄생(誕生)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이처럼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전국적으로 퍼져있었고, 각료 명단도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은 거의 빠짐없이 나타난다. 당시 하바로프스크 인근 소련군 부대에서 5년째 복무하고 있던 진지첸 (Цзин Жи-чэн, 북한 김일성) 대위는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사로, 이런 명단에 단골로 끼일만한 사람이 못되었다. 조각명단의 김일성은 일찍부터 유명했고, 적어도 함께 거론되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라야 한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소련 군함을 얻어타고 비밀리에 입북하여 한달간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50] 잠행하며 민심을 살피고 돌아다닌 이유도 그가 무명인사였기 때문이다.

  • 일본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東京版)』 1945년 10월 3일자[51]는 해외 각지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 金日成 씨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출신. 만주에서 ‘김일성 軍’을 조직하여 만주사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약 조선 반도민의 인기를 획득하였고 이동휘 (李東輝, 1873-1935) 씨의 세력 실추 후 친소파의 제일인이 되었다. 중공은 그를 이용하여 만주 방면의 지반 획득을 위해 그에게 북만성위원, 東北抗日聯 제3路軍 제10 지대장 및 정치위원의 지위를 주었고 이번 소련의 북조선 진주와 함께 평양에 들어온 모양이다.
    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김일성이 일본 육사를 나오고 만주사변(1931년) 때부터 유명해졌다고 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후대에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김일성과 동일인물로 알고 있는 듯하다.
  • 해방당시 국민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한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이날은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날 평양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기대했던 김일성 장군도 이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김성주는 데뷔 첫날부터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자유신문(自由新聞) 1945년 10월 17일자 기사 : 莫府(모스크바)서 작전을 연구(作戰을 硏究) / 일군 항복(日軍 降服) 전(前)에 대반격전(大反擊戰)을 준비(準備) / 김일성 장군(金日成 將軍)은 건재 활동 중(健在 活動 中)


  •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는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를 소개하는 연재기사에 이승만, 김구에 이어 5번째로 김일성을 소개하면서, 을지문덕, 이순신에 비견되는 유명한 장군이며, 일본군 장교 교육과정(일본 육사)을 이수했으나 독립운동에 나섰고, 그 부하가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을 저격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52]
    명사(名士)의 편영(片影) (其五) : 김일성씨(金日成氏)

    金일성氏는 유명(有名)한 장군(將軍)이다. 그 웅용(雄勇)한 기상(氣像)은 을지문덕(乙支文德) 추억(追憶)하게 되고 그 지모(知謀)의 종횡(縱橫)은 이충무공(李忠武公)을 연상(聯想)하게 된다.

    김장군(金將軍)은 청년(靑年)에 급(笈)을 부(負)하고 병학(兵學)을 수(修)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국주의시대(帝國主義時代)의 장교(將校)되기는 실허하였다. 그는 편신(片身)으로 비주(飛走)하야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갔다. 당시(當時)는 한국(韓國)이 일본(日本)에게 합병(合倂)되야 일본인(日本人)의 학염(虐焰)은 三千里 江山을 덮었고 일본군(日本軍)의 견봉(堅鋒)은 두만강북(豆滿江北)까지 진출(進出)하야 당시(當時) 북만(北滿)에 있는 조선(朝鮮)의 독립당(獨立黨)을 초멸(剿滅)하야 그 참혹잔인(慘酷殘忍)이 극(極)하였더니라. 이때이었다. 金일성 장군(將軍)은 의용병(義勇兵)을 모집(募集)하야 일본(日本)과 항전(抗戰)하였다. 그의 과소(寡少)한 병중(兵衆)으로도 일본병(日本兵)의 가슴을 서늘케한 일이 자조 있었다.

    당시(當時) 조선(朝鮮) 와있던 일본인(日本人) 총독 모(總督 某)는 조선(朝鮮)의 국경(國境)을 순시(巡視)키 위(爲)하야 혜산진(惠山鎭) 방면(方面)을 향(向)하였다. 일본인(日本人) 총독(總督)이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 남안(南岸)으로 내려갈 때에 압록강(鴨綠江) 북편(北便)에서 날아오는 탄환(彈丸)은 총독 모(總督 某)의 심담(心膽)을 놀래기 극(極)하였다. 총독 모(總督 某)는 황겁(惶怯)하야 여행(旅行)을 중지(中止)하고 도라왔다. 그런데 그 탄환(彈丸)은 金일성 장군(將軍) 휘하(麾下) 용사(勇士)의 탄환(彈丸)이라 한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이러나고 세계전쟁(世界戰爭)이 열리매 김장군(金將軍)은 소련대군(蘇聯大軍)과 일치행동(一致行動)하야 다수(多數)한 조선병사(朝鮮兵士)를 거느리고 용감(勇敢)히 전투(戰鬪)하였다. 그는 맛침내 승리(勝利)의 월계관(月桂冠)을 취(取)하고 지금 소련(蘇聯) 연해주(沿海州) 방면(方面)에 있어 조만(早晩)에 귀국(歸國)한다는 말이 전(傳)해 온다.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10.14 [52]

    급(笈)을 부(負)하다 : 책 상자를 짊어지다.

    이 기사가 나간 날은 공교롭게도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이처럼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실제로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있었는데,[53][54] 나중에 다른 사람이 한 일로 밝혀지지만[55][56], 항간에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57] 당시는 1921년 9월 24일의 갑산군 함정포(含井浦) 사건[58][59] 등 국경 근처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사건은 으례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57]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37년 보천보사건 때부터가 아니라 1920년대 초에도 이미 유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1945년 10월 17일자 『자유신문(自由新聞)』은 유명한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이 독일 패망 후,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대반격전을 준비하기 위해 장교단 100 여명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가서 독·소전(獨·蘇戰)의 작전을 연구중에 해방을 맞았으며, 나이가 금년 쉬은하나(51)라고 하였다.[60] 이 김일성장군도 명백히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나타난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쓴 기사이다.

  • 해방후 북한 김일성이 대중앞에 처음 나서기 직전의 위와 같은 기록들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각료 물망에까지 올리던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실존 인물 누구라고 지목하기는 어려운 반전설적 인물로 나이가 적어도 50세 가량은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평양에 온 33세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을 때 사람들이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가짜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평양의 대중들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국내에서 소련군에 그런 인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는 누구도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모르는 낯선 사람에 불과했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지만, 위에서 보다시피 해방 직후 김일성 관련 기록들 어디에도 보천보사건은 거론조차 되지 않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김일성(金一成)이 어떤 사람인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43] 당시 북한 김일성은 아직 소련군 88여단에 있었고, 북한 지도자로 결정되기도 전이라 국내에는 그런 사람의 존재도 알려지기 전이다. 따라서 이는 동진공화국 조각 명단의 김일성이나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는 이승만, 김구도 귀국하기 전이라 본인 동의없이 임의로 만든 명단이므로 김일성 이름도 그런 식으로 넣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잡지 선구의 여론조사[44] 1945.10.10 ~ 11.09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당시 지지도라면서 흔히 인용된다. 하지만 조사 기간 중인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북한 김일성에 대해 남한에는 아무 것도 알려지기 전이므로 동진공화국 육군대신 김일성이나 10월 14일자 민중일보 기사에 난 것처럼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지지도로 보아야 한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조차 1945년 11월 5일에야 《조선의 청년영웅 김일성장군을 환영》이라는 기사[61]에서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에 대해 처음 보도했고, 대다수 신문들은 11월 중순 이후부터 북한 김일성에 대한 기사를 싣는다. 조사 당시 평양에서는 북한 김일성에 비해 조만식(曺晩植)에 대한 지지도가 압도적이었으므로, 서울에서 김일성의 지지도가 조만식보다 높게 나온 것은 북한 김일성에 대한 지지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든 소련 군정 당사자들의 '김일성 가짜' 증언

    해방 후 공개적으로 귀국하여 곧바로 활동을 시작한 이승만, 김구와 달리 김성주는 9월 19일 비밀리에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으로 왔고, 연해주 사령부의 스티코프(Terentii Shtykov, 1907-1964) 중장은 평양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1992) 소장에게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고 지시했다.[7] 김일성은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50] 한 달 가까이 잠행하며 민심을 살피다 10월 14일에야 공개석상에 등장했다. 이런 일은 김일성 본인이나 소련군정이 그가 국내에서 무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무명인사가 대중앞에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서는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군정은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7][1] 당시 일에 대한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

    "김일성이 나의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극동사령부의 스티코프 중장(후에 대장)으로부터 암호 전문이 날아왔다.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감은 적중했다.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드는 작전에 들어갔다. 특수선동부장 코비첸코(V.V. Kovyzhenko)에게 김일성의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히고 가슴에 달고 다니는 적기 훈장도 떼어 내라고 지시했다. 일부 북조선 인민들의 반소감정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박정애[62]와 김용범[63]은 두 벌의 신사복을 구해 오는 등 붉은 군대 사령부 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
    "[7]

    이 사안에 대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평양 현지에서 직접 진두 지휘한 레베데프 소장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을 사칭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이에 대해 더 이상 논란할 여지는 없다. 레베데프는 또한 10월 14일의 집회에서 가짜 김일성 소동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증언한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 당일의 사진. 좌로부터 통역을 맡았던 강 미하일 소련군 소좌 (고려인), 김일성 및 소련군 그리고리 메클레르(Григорий Меклер, 1909~2006) 중좌.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1992년)≫ 에 수록된 레베데프의 증언[1]
    『숨김없이 말한다면 김일센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인민들에게 잘 알려진 위대한 반(半)전설의 애국 영웅 김일성장군을 상징하기 위해 김일센과 그의 부하, 그리고 당시 북한 내 공산주의자들과 상의해 「김일성장군」으로 소개했던 거지요.....(중략)..... 마지막으로 김일센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이 주석단 앞까지 몰려와 「가짜 김일성이다」며 소동을 벌였지요.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주최측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이같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회 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센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 모두를 소개했지요. 그랬더니 인민들의 여론이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장준익(張浚翼, 1935~ )[64],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 1991년 8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레베데프 소장과 저자의 대담 중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환영집회에 대한 증언[3]

    『金日成 동지의 발언이 있겠다고 소개하니까 그곳에 모인 군중은 열화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는 金日成장군에 대한 국민들의 대단한 인기를 알 수 있었고, 연설이 끝난 후 金日成(김성주)은 진짜 金日成 장군이 아니다 라는 여론이 비등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군정당국은 우익단체의 사람들을 만경대(김성주의 生家가 있는 곳)로 데려가서 항일투쟁에 참가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려 했습니다.』


    소련군정 당시 KGB 장교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공작에 간여했던 레오니트 바신(Leonid Vassin, 1915~2006)도 후일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했다.[65][66]

    김(일성)의 이름이 전설적인 공을 세운 연상(年上)의 게릴라와 연관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가 완전한 사기라고 의심했으므로, 다음 단계는 김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조선의 지도자로 일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그를 영웅의 지위로 끌어 올렸다."고 Vassin은 말한다. " 우리는 그가 진짜이며, 백두산의 호랑이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 우리는 만경대 마을에서 그의 친척들을 찾아내야 했고, 또 남한에 퍼져있는 그가 진짜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문도 불신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그가 모국을 해방시킨 맹활약한 전사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66]
    [Jasper Becker,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1.]


    소련군정에서 김일성의 정치담당 고문역을 했던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 중좌도 후일 증언에서 자신이 1944년 하바로프스크88여단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소련군에서의 당시 이름은 진지첸) 대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만났으며, 김일성은 유명한 죽은 전임자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67] 그는 또한 이런 말을 북한 김일성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도 했다.[68] 당시 김일성은 자신이 북한 지도자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때라 사실대로 말해도 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1992년 6.25 발발 42주년 KBS 특집방송에서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69]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가 끝난 후 저녁 무렵 만경대를 찾은 김일성.[70][71] 앞줄 왼쪽 끝이 강 미하일 소좌, 오른 쪽 끝이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 화살표가 김일성. 세 사람의 복장이 민중대회 행사 당일의 것과 동일하며, 김일성은 여전히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메클레르씨 (84세 모스크바 거주 / 소련 25군 정치담당 / 44년 88여단에서 김일성 만나고 해방 직후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운 소련군 실무장교중 유일한 생존자)[72]

    44년 88여단에서 처음 김일성을 만났을때 그는 별 특징이 없었고,그를 지도자로 만들 생각도 없었다. 45년 9월 미네스코와 (메레츠코프의 오기) 원수와 군사위원회 스티코프 상장으로부터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33세 김일성 가짜"

    그 당시 사람들에게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전설적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33세의 김일성을 본 후 가짜가 왔다고 인민들 사이에 여론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디어를 내어 기자-카메라 기자들에게 연락후 만경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그의 할아버지-할머니-삼촌 등을 만나 그의 위신을 높여 주었다. 기자를 통해 선전한후 가짜 김일성이라는 말이 없어지고 진짜 김일성이라 인민들이 믿게 되었다. 만경대를 찾아갔을 때 동생인 김영주가 있었는데, 신발도 안신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옷을 마련해 그를 모스크바로 유학보냈다.

    이처럼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 수령만들기 정치공작을 직접 지휘하고 수행한 소련군정 고위 장교들도 후일 한결같이 북한 김일성이 남의 이름을 빌려 사용한 것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10월 14일의 평양 군중 집회에서 가짜 김일성 소동이 벌어지자, 이런 소문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집회가 끝난 후 저녁 무렵 기자들 및 여러 사람들을 김일성의 고향 만경대 마을로 데려가 그가 조부모와 친척 및 고향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 보여 이런 소문을 잠재우려 했다는 것도 당시 사진과 기록에서 사실로 확인된다. 당시 김일성의 만경대 방문에 기자로 수행했던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김일성장군 개선기(金日成將軍 凱旋記)」라는 제목으로 보도 기사를 썼고,[70]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하여 그때 일에 대한 자세한 글을 남겼다.[71]

    이렇게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과정을 직접 주도했던 소련군 장교들이 후일 한결같이 그가 가짜가 맞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좌경화된 한국의 학계에서는 이런 증언들이 외면 당하고,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해방 직후 북한 문헌 속의 김일성 가짜 증거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나섰다가 가짜 소동이 일자, 이러한 소문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기자들과 여러 사람들을 고향인 만경대 마을로 데려가서 조부모와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 보이던 당시 수행기자였던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은 이 일에 대해 쓴 기사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를 10월 19일부터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연재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73]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3] 8.15 해방(八ㆍ一五 解放)이 되자 이 「혁명가(革命家)의 집」에서 나오는 소리는 「일성(日成)」 두 字뿐이었다. 과연(果然) 얼마 지나서 김일성(金日成)이 평양(平壤)에 나와 있다는 소식(消息)이 들려왔다. 그러나 소문(所聞)에 의(依)하면 그 일성(日成)이는 五十이 넘었다느니 장개석(蔣介石)이 친구(親舊)라느니 이런 말 뿐이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는 「그럼 그것은 우리 일성(日成)이는 아닌 가보다」 이런 말을 하며 궁금해 하였다.

    [p.87] 「새로운 개선(凱旋)의 날」

    장군(將軍)이 귀국(歸國)한 후(後) 그 제일성(第一聲)과 용자(勇姿)를 맨처음으로 지상(紙上, 平壤民報)에 취급(取扱)하는 영광(榮光)과 장군(將軍)에게 「장군(將軍)」이라는 칭호(稱號)를 지상(紙上)을 통(通)하여 처음으로 받드는 영광(榮光) – 기자생활(記者生活) 최대(最大)의 영광(榮光)을 지닐 수 있은 필자(筆者)는 또한 장군(將軍)의 만경대(萬景台)에의 개선행(凱旋行)에 수행(遂行)을 하여 그 세기적(世紀的) 감격장면(感激場面)을 몸소 가슴깊이 인상(印象)받을 수 있었다.

    북한 김일성을 찬양하기 위해 쓴 위 글에서조차 당시에 북한 김일성이 아닌, 나이가 50이 넘었고, 장개석(蔣介石, 1887 ~ 1975)과 친구라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소문만 나돌고 있었다고 의도하지 않은 고백을 하고 있다. 장개석의 친구라는 말은 이북(李北)의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1950)에 "장개석씨(蔣介石氏)도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 陸軍士官學校)에서 수업(修業)을 하였는데 氏의 3년 후배(三年 後輩)로서 김일성 장군(金一成將軍)은 제2위(第二位)의 성적(成績)으로 졸업(卒業)하시었다."라 한 것이나[74], 조선일보 1953년 7월 27일자 기사에 "김일성(金日成)과 김석원(金錫源)장개석(蔣介石) 등(等)은 한때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 陸軍士官學校) 학생(學生)이었던 것이며 추후(追後) 그들은 각자(各自)의 행로(行路)를 취택(取擇)하여 모다 유명(有名)하여진 것이다."라 한 것[75] 등과 같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장개석과 같은 일본 육사 동창이라 친분이 있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필자 한재덕의 의도와 무관하게 역설적으로 해방 당시 북한 지역에 널리 알려진 김일성은 나이 50이 넘고 일본 육사 나왔다고도 하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일 뿐, 소련군 진지첸 대위였던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글 마지막의 「새로운 개선(凱旋)의 날」은 한재덕이 1946년 봄 만경대를 재차 방문한 후 쓴 것으로 『문화전선(文化戰線)』 간행 때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 한재덕은 자신이 처음으로 북한 김일성에게 「장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붙여 활자화 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소련군 대위 출신의 북한 김일성이 그 전에는 「장군」이라 불리지도 않았고, 그는 전설같은 풍문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한재덕은 1959년 귀순 후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에서 그가 김일성에게 처음 「장군」이란 칭호를 붙여주게 된 과정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76]

    해방후 평양에서 처음 나온 신문,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기관지 「平壤民報 (평양민보)」창간호는 낡은 윤전기로써는 미처 찍어낼 수가 없으리만큼 날개가 돋혀 뿌려졌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목마른 사람 냉수 마시듯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다브로이드」판의 빈약한 것이었으나 문제의 인물 의문의 인물 金日成 (김일성)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환영군중대회」를 취급한 제一(일)면 「톺」기사에서부터 金日成(김일성)의 말에 의하여 그의 경력, 포부, 그의 고향, 가정일 등을 소개한 「내리다지」기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각면 전부가 金日成(김일성)에 관한 것으로 메워져 있었다. 그 선전효과는 가히 짐작할만한 일이다.
    .............
    그 기사와 글 끝에서 나는 처음으로 金日成(김일성)을 「장군」으로 부르고 「민족적 영웅」으로 추켜 세웠다. 「凱旋(개선)」이라는 말도 이때 내가 처음 쓴 말이었다. 金日成(김일성)이 처음 공개될 때에 그를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하는 것이 잠시 논의되었다. 공산사회식으로 「동무」나 「동지」라고만 하는 것은 우상화하려는 「영도자」에 대해 너무 위신이 안선다. 「氏(씨)」라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선생」이라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남같이 「박사」라고 하기도 안되었다. 그래서 「소련」 사람들도 처음(「다마야」에서의 환영간담회 때만 해도) 그를 우리에게 소개할제 어제까지 자기 군대의 「소좌」로 있던 사람을 갑자기 「장군」 이라고 하는 것이 차마 쑥스러웠든지 아직 그저 「다와리시치· 김일쎈」(김일성 동무)라고 했었다.
    그것을 李周淵(이주연)등이 金日成(김일성)의 본심을 받들어 궁리를 한끝에 「장군」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소련」장군들도 이 땅 공산주의자들의 아첨 기술에 새삼 감탄하고 만족하였다. 「마이용(少佐(소좌))·김일쎈」은 일약 「게네랄 (將軍(장군))·김일쎈」으로 수계급 특진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장군」칭호를 처음으로 활자(活字)화하고 지상으로 처음 「임명」한 것이 내가 된 셈이었다. 이래로 북한에서는 金日成(김일성) 밑에는 반드시 「장군」이란 「렛텔」이 달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金日成(김일성)을 「장군」 으로 「임명」하고 영웅화한 것이 韓載德(한재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부 터 유래한 것이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들도 그를 장군이라 부르지 않았다고 황장엽이 증언했다.[77]

    한때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투쟁에 참가한 임춘추는 사람들이 '김일성 장군님' 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무슨 장군님이라는 말을 쓰겠소? 그저 김일성 동무라고 불렀지" 라고 말하였으며, 최현이나 최용진 같은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은 '김일성 동무'라고도 하지 않고, “내가 김일성에게 전화했소" 또는 “김일성이 오늘 나를 수산상으로 임명하였소" 라고 대중들 앞에서도 공공연히 말하곤 하였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김일성과 김정일뿐만 아니라, 임춘추가 제 이름자 도 쓸 줄 몰랐다고 말한 김정숙까지 우상화하여 항일의 여장군' 이라고 하면서 김일성·김정일과 함께 '3대장군 기념비'를 세우는 소동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소련군 대위 진지첸(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대중들에게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지만, 만주나 소련에서 그가 장군으로 불리웠던 적도 없고, 평양에 온 소련군 장성들도 처음에는 그를 「다와리시치 김일센 (товарищ Ким Ир Сен [Comrade Kim Ir Sen])」 즉 '김일성 동무'라고 불렀다는 것도 그가 일찍부터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졌던 반전설적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은 국내에서 무명인사

    북한 김일성은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거기서 성장하였고, 오랜 외국 생활로 해방 당시 조선 국내에는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완전한 무명인사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 본인은 물론이고 소련군 고위관계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무명인사를 여러 가지 정치 공작을 통해 대중들이 지도자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소련군정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은 김일성이 활동한 만주의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이란 조직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소련에 조선인들을 수용한 88여단이란 부대가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전무했다. 일본 군경의 강력한 정보망도 소련으로 도피한 동북항일연군을 수용한 남야영(南野營, B캠프), 북야영(北野營, A캠프)이나 88여단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 일반 조선인들이 거기에 진지첸 (Цзин Жи-чэн, 김일성) 대위 같은 사람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김일성의 해방 전 행적에 대해서는 중국의 개방과 구 소련 붕괴 후 관련 문서들이 공개되고, 관련자들 증언이 나오면서 비로소 대강의 줄거리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정확한 내용을 거의 알 수 없었던 것도 김일성이 해방 당시 무명인사였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 결과가 나온 오늘날에도 그의 행적 일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논란이 되고 있다. 일각의 주장대로 해방 당시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당시 김일성이 국내에서 무명인사였다는 증거는 많지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증언을 소개한다.

    해방 후 북한으로 오기 직전 메클레르 중좌는 김일성과 함께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이 소속된 제1 극동전선군의 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를 만났는데, 후일 그때의 일에 대해 회상하면서, 김일성을 포상한 후에 메레츠코프 원수가 메클레르를 불러서

    "이 사람을 잘 도와주게. 오랫동안 타국에 머물다 처음으로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북한에는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네. 그를 데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그를 알리게."
    "I want you to work on this person," said Meretskov, referring to Kim. "At the moment not many people know him. Travel to every corner of North Korea with him. It will be useful for both of you."

    라고 당부했다고 하였다.[67][68] 메클레르는 실제로 메레츠코프가 지시한대로 김일성과 함께 북한 각지를 다니며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그를 알리고, 지방 조직을 점검하였다.[78]


    또 해방 직후 평양에서 살았던 김병기 (金秉騏, 1916~ ) 화백은 당시 김일성이 화가들을 소집하기에 가서 만났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장군’의 곁에 경호책임자 임춘추가 서 있었다. 젊은 김일성이 다소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짧은 상고머리에, 호탕한 성품임을 보여주면서, 지식인 풍모까지 연상시켰다. 그는 만주에서 펼친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평양 사람들은 김일성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예술인들에게 요구했다. “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예술인 여러분께서 나를 선전해 주시오.” 《한겨레 2017. 02. 02》[79]

    ―김일성도 만나보셨나요?

    “김일성이 미술에서 셋, 문학에서 셋, 음악에서 셋, 이렇게 부르더라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자기 그림(초상화)도 좀 그려주고 ‘드라마(이미지)’를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때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다’, ‘일정 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항일 투쟁하던 그 김일성이 아니다’ 그런 소문이 있었거든.” 《조선일보 2005. 08. 23》[80]

    이처럼 김일성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 예술인들까지 동원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안우생(安偶生, 1907~1991)도 1945년 12월 5일의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씨는 상당한 고령이며, 평양에 와 있는 33세의 청년 김일성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였다.[81]

    문(問): 김일성씨(金日成氏)와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관계(關係)는 어떠하며 최근(最近) 평양(平壤)에 와잇는 삼십이세(三十二歲)의 청년(靑年)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어떤 분인지?
    답(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만주(滿洲)서 활동(活動)하엿슴으로 임시정부(臨時政府)와는 아무 연락(連絡)도 업섯다. 그리고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지금(至今) 상당(相當)한 고령(高齡)인데 평양(平壤)에 와 잇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엇던 분인지 모른다.[81]

    다른 사례로 1946년 8.15 때 북한서 간행된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에는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조앗다.」라는 제목의 박석정(朴石丁, 1911~?)의 시가 나와 있다.[82]

    ...(전략)...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좋았다 / 우리는 우리 옆에 그를 찾어 내었고 ...(중략)...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물어서 무었하랴 / 그대가 가는 곳에 인민(人民)이 있고 / 인민(人民)이 가는 곳에 장군(將軍)이 있다.

    이런 것도 당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해방 전 전력을 거의 알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시가 김일성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듬해 간행된 박석정의 개인 시집 《개가(凱歌)》에는 이 시가 대폭 개작되어 제목도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으로 바뀌고,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좋았다"는 말은 삭제되고, 끝 부분의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물어서 무었하랴"는 "장군(將軍)의 과거(過去)는 우리의 영예(榮譽)"로 바뀌었다.[83]


    이처럼 전력을 잘 알 수 없는 김일성에 대해 가장 직설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한 사람은 남로당 중앙위원회 간부 부장인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이다. 그가 소련유학을 위해 강동정치학원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던 1948년 7월에[84] 북로당 중앙 간부 부장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김창만(金昌滿 1907~1966) 등과의 술자리에서 김일성박헌영 중 누가 더 지도자로 적합한가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이현상이 했다는 발언을 박갑동(朴甲東, 1919~ )이 증언했다.[85]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람(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들의 지시로 외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것밖에 더 있느냐. 그러나 박헌영은 국내에서 투쟁했다. 그것도 그 사람보다 15년이나 일찌기 말이다. 박헌영은 25년에 조선 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 탄압에도 국내에서 투쟁해 왔다. 그의 경력이야말로 한점의 흐린데도 없는 사람이다.
    김일성은 내가 듣기로는 본명이 김성주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가 명백하지도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한 것을 알리지 않아 불투명한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해방 후 외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경력 불명의 자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이현상의 발언은 박헌영을 추종하던 남로당 계열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북한 지도자 자리를 굳혀가던 김일성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남로당 간부가 북한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면 남북한의 일반 국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박헌영 본인도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 사이의 논쟁을 박헌영김일성이 알게 되자 박헌영은 재빨리 이현상을 견책하여 소련유학을 취소시키고 서울로 보냈다. 김일성은 이상조를 간부 부장직에서 해임, 상업관리국장으로 강등시켰다고 한다.[85] 이상조는 1989년 방한하여 자신과 김창만이 이현상과 사이가 껄끄러워 한직으로 좌천되었으며, 6.25 당시 자신은 상업성 상업관리국장의 한직에 있었기 때문에 남침 계획을 사전에 잘 알지 못했다고 하였는데[86], 이는 박갑동의 위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이와같은 논쟁에 대해서는 전 북한 외무부상 박길룡이나[87] 전 내무부상 강상호도 같은 증언을 했으므로[84][88] 사실로 볼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에 맞서 결사항전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하여 해방 때까지 5년간 아무 항일투쟁을 하지도 않고 지냈다는 것도 그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이현상과의 논쟁에서 김일성을 강력히 옹호했던 이상조는 1989년 방한 때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일과, 가장 중요한 항일투쟁 시기인 1940년에서 해방 때까지 하바로프스크의 88여단에 도피해 있은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89] 북한 전문가 이현웅도 "항일무장투쟁은 194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 전 5년 간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김일성은 이 기간에 소련으로 도망쳐 극동군사령부 소속 ‘88여단’에서 만주 등 국경지역 침투 및 정보수집을 위한 간첩교육을 받았을 뿐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이런 약점들을 덮기 위해 ‘보천보전투’를 신화적 수준으로 날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평가한다.[90]

    이런 일들에서 보듯이 해방당시 김일성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고, 해방전 그가 어디서 무얼하다 온 사람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므로 33세에 불과한 그가 일찍(적어도 1920년대초)부터 명성이 드높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가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에서 그가 가짜라는 말이 널리 퍼진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를 폄하하기 위해 지어낸 탓이 아니라 수많은 월남민들의 말을 통해서 였다. 미군정이나 한국정부, 또는 남한의 여러 사람들이 북한 김일성에 대해 남긴 기록을 보아도 그가 막연히 만주에서 게릴라 활동을 한 전력이 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측 주장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력이 조금씩 드러나기는 하지만 정확한 그의 행적은 수많은 문헌과 증언들이 나온 지금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고 논란이 지속된다. 소련군이 그를 훈련시켜 지도자로 발탁해서 데려온 과정도 1990년대 소련 붕괴 후에나 제대로 밝혀졌다. 이런 실정이니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나?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도 그를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 보천보사건의 주역으로 보기 어렵다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 6월의 보천보사건 때부터라면서, 그가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고 내세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컸던 동흥습격사건이나 토성습격사건이 잊혀져 있는 사례에 비추어 보면 보천보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증명되어야 할 사안인데,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아무 증명없이 그냥 기정사실로 인정한다. 보천보 사건은 당시에 일본 측에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신문에 며칠 보도되었다고 해서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유명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의 이 호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는 문맹률이 80~90% 에 달해[91]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고, 열악한 도로나 교통수단으로 전국적으로 신속히 배달할 수도 없었다. 김일성 이름이 중간 정도 활자로 크지도 않게 나왔는데, 이 때문에 하루 아침에 김일성이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고 사람들이 그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했겠는가?

    8.15 해방과 같은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을 때도 당일날은 서울 시내조차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고 한다. 이튿날부터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왔고, 심지어 해방이 뭐냐고 묻는 사람도 많을 정도로 민도도 낮았다.[92] 그런데도 그보다 8년전의 보천보사건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했다고 그렇게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겠는가? 일제시대에는 오늘날과 달리 문맹률도 80~90%를 넘나들고[91], 교통이나 운송 사정도 열악해 신문 보급이 어려워 구독자도 얼마되지 않았으므로, 신문에 난 일도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언론의 대중 전달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신문에 이름이 몇 번 난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던 때가 아니다. 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했다고 해도 서울시내 정도에서나 속보 역할을 할 수 있었을 뿐이고 당시 운송 체계로는 신속히 전국적으로 배포할 방법이 없어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을 리도 없다. 호외를 보아도 문맹인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국한문 혼용의 기사를 읽을 수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1930년에 있었던 혈성결사대(血成决死隊) 김선학(金善學) 사건[93]은 동아일보가 호외를 3차례나 간행하며 보도했지만[94] 이 때문에 김선학이 전국적인 유명 인물로 부상한 적도 없다.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동아일보매일신보가 호외를 발행하며 보도했지만 완전히 잊혀졌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호외 간행은 자주 있었지만 대중 전달력은 미약했고, 보천보 사건의 호외 간행으로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것이다.

    1930년대의 대규모 무장단 침입 사건과 호외 간행 상황
    사건 일자 호외 간행 신문
    독산사건(獨山事件) 1933년 6월 5일 조선일보[95], 조선중앙일보[96]
    토성습격사건(土城襲擊事件) 1934년 1월 22일 동아일보, 조선일보[97], 매일신보[98]
    동흥습격사건(東興襲擊事件) 1935년 2월 13일 조선일보[99]
    보천보사건(普天堡事件) 1937년 6월 4일 동아일보 호외 1, 호외 2 ; 조선일보

    위 표에 나오는 것처럼 1930년대 초중반에 보천보 사건과 비슷하거나 더 큰 규모의 사건도 여러 건 있었고, 그때마다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오늘날 이 사건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보천보 사건도 마찬가지로 잊혀졌지만, 해방 후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대단한 항일 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새롭게 유명해졌을 뿐이다. 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과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말은 사실이 될 수가 없다.

    해방 당시 사람들이 보천보사건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근거는 많다.

    경찰 47명이 상주하는 경찰서가 있는 소읍(小邑)을 습격한 1935년 2월의 이홍광이 이끈 동흥습격사건은 경관 5명이 상주하는 주재소가 있는 면단위 마을을 습격한 보천보사건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큰 사건이었지만, 해방 당시나 지금이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홍광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부상한 적도 없다. 이홍광이 19세의 남장 미인이라는 대중의 시선을 끌만한 언론보도까지 있었지만 그는 잊혀졌다.[100][101] 두 사건 모두 당시 신문들은 비교적 크게 보도했는데도 동흥사건이홍광은 잊혀지고, 2년 뒤의 보천보사건과 김일성만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일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었다. 해방 당시 동흥습격사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보천보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보천보 사건을 신문들이 크게 보도한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면, 대다수 신문이 그 유명한 김일성이 1937년 11월 18일 전사했다고 보도했는데도 해방 당시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리도 없다.

    해방 직후의 기록을 보아도 김일성과 관련하여 보천보사건이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일성이 집권한 북한에서조차 해방 직후 1946년까지는 보천보사건이 거의 거론되지 않다가 1947년부터 김일성 우상화 문건이 쏟아져 나오면서 보천보사건을 거론하기 시작하며, 그의 가장 중요한 항일 업적으로 본격적으로 선전하는 것은 6.25 이후이다. 실례로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실린 《김일성장군 부대(金日成將軍 部隊)와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중견간부(中堅幹部) 좌담회(座談會)》 기사[102],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1946.7.25)에 실린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의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 개선기(凱旋記)》나[103], 해방 1주년 기념으로 간행된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104]에 실린 필자 미상의 《김일성 장군의 약력》(p.1), 한재덕의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 유격대 전사(遊擊隊 戰史)》(p.3), 한설야(韓雪野)의 《혈로(血路)》(p.40) 등에도 보천보사건은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김일성이 항일연군 6사장, 제2방면군장 등을 지냈다고는 나오는데도 그렇다. 심지어는 김일성 본인이 1942년에 직접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나[105], 소련군 시절 작성한 이력서들에도[106][107] 보천보사건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으므로 그 자신도 이 사건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1947년에 들어서야 조기천(趙基天)의 서사시 『백두산』(로동신문사, 1947.04.30)이나,[108] 한재덕의 《김일성 장군 유격대의 투쟁과 생활》(1947년 8월 15일 민주조선 게재)[109] 등에서부터 보천보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한다. 특히 조기천의 ≪백두산≫은 이후 북한 김일성을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떠받들게하는 세뇌교육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한국에서 출판된 '반디'라는 필명의 북한 반체제 작가가 쓴 소설 《고발》을 읽고[110] '도진(刀盡)'이라는 필명의 북한 사람이 남한으로 보내온 독후감에는 조기천의 백두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111]

    어릴 때의 기억이 한 가지 나는 것이 있는데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이다.

    북쪽 땅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이 시를 배우고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에 대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나 역시 김일성의 위대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댔다. 그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조기천은 시에서 김일성을 우리 민족을 구원한 빨찌산 대장,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우리 민족을 이끌 위인으로 노래하였다. 거짓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이 詩가 2000만의 넋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조기천은 이 시를 1946년에 썼다. 그 전까지는 우리 인민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김일성은 항일전의 공로가 아니라 이 시로 인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

    내가 시인 작가들을 혐오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라는 데 대해 생각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나라의 시인 작가들은 독재자의 賣文(매문) 문필가로써 민족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반디 선생의 분노의 작품 앞에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북한이 보천보사건을 본격적으로 미화 선전하기 시작하는 것은 6.25 전쟁 휴전 후부터로, 1955년 6월에 양강도 보천군을 ‘보천보혁명전적지’로 명명하고 보천보전투승리기념비와 동상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으로 보천보전투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전개했다.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중심으로 전투진행과정을 보여주는 보천경찰관주재소, 포대, 전투지휘장소, 곤장덕 등 보천보전투 관련 장소들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1962년에 보천보전투 25주년을 맞아 김일성 동상을 완공했다. 또 보천보전투 30주년인 1967년 6월 4일에 양강도 도 소재지인 혜산시의 도심 중앙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건립하고 중앙과 도급 간부들과 군인, 청년, 근로자 등 5만여 명의 군중들을 제막식에 참가시켰다.[112] 김일성 집권 후 벌인 이러한 대대적 선전의 결과로 잊혀졌던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는 해방 직후는 물론이고, 김창순 (金昌順, 1920 ~ 2007)『북한 15년사(北韓 15年史)』 (지문각(知文閣, 1961)에까지도 보천보사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는 남한에서 월남민들에 의해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자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가 1946년 4월 8일, 9일 이틀에 걸쳐 실은 가짜설을 반박하고 김일성을 옹호한 권용호(權勇浩)의 기고문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에도 김일성이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했다고 신문에 난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113][114] 1945년 11월 5일자 해방일보, 1946년 4월 12일자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에도 북한 김일성에 대한 글을 실었으나, 그가 청년영웅이라며 찬양만 늘어놓았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밝히지 못하고 있다.[115] 북한에 나타난 김일성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는 기사를 쓴 사람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북한서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이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에서 북한 김일성이 한 일로 보천보 사건이 나오며,[116] 이후 다른 문헌에서도 북한 김일성의 경력으로 보천보사건을 더러 기록하기 시작한다.[117] 이는 북한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일각에서 말하는 친일파(?) 박정희가 항일투쟁한 김일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그를 가짜라고 선전했다는 식의 주장이 근거 없는 마타도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들어 처음으로 보천보사건을 김일성의 구체적 항일투쟁 경력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런 사례만 보아도 보천보사건에 대해 해방 당시 사람들이 거의 몰랐고,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항일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더라면 보천보사건동흥사건이나 토성습격사건처럼 잊혀졌을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히는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집권했기 때문에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진 것이다. 해방 후 김일성 아닌 이홍광이 집권했더라면 보천보 사건은 잊혀지고, 대신 동흥사건이 유명해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 큰 문제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남의 전공까지 자신의 것인 양 조작했다.

    동북항일연군 김일성에 대한 신문 보도의 영향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에 대한 소문은 1920년경부터 나돌았다고 1920년대 소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증언하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金日成)의 활동에 대한 신문 보도가 다수 있었다. 당시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1936년 가을 ~ 1937년말 기간에는 보천보 사건 주역인 6사장 김일성에 대한 보도인데, 1937년 11월 그가 전사했다는 보도 이후 1938년에는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다. 1939년 초부터 1940년 여름까지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다시 나타나는데 이는 북한 김일성으로 보인다 [아래 참고]. 그러나 대부분 양민에 대한 약탈 기사로 후면에 조그마하게 난 것이라 챙겨본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는 문맹률이 80~90%에 이르고, 대부분 국민들이 신문이 배달되기 어려운 농어촌에 살면서 사는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일도 거의 없을 때라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거의 모르고 살 때였다. 바깥 세상 일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고 해도 주로 학교나 시장터에서 얻어듣는 것이 주였으므로 신문에 난 항일연군 김일성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어쩌다 그런 기사를 본 사람들도 일찍부터 소문이 돌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과 항일연군 김일성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방법도 없었다. 함경북도 도민회장을 지낸 김허남(金許男, 1920~2020)은 자신이 소학교 다닐 때인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들은 김일성 장군은 항일 영웅으로 소문이 났는데, 나중에는 양민을 괴롭히는 비적으로 바뀌어 알려지더라고 했다.[8] 항일연군의 김일성 기사를 본 사람이라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나 김구 같은 분들이 유명했던 것도 신문에 이름이 자주 나서가 아니라, 오랜 기간 구전으로 이름이 많이 전해진 탓이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경우도 같은 식으로 오랜 기간 입으로 소문이 퍼져 유명해진 것이지, 1930년대 후반에 일시적으로 동북항일연군 김일성의 이름이 신문에 수차례 보도된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해방 직후 사람들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도 이승만, 김구처럼 상당히 나이든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북한 김일성이 실제 썼던 이름은?

    북한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라고 주장하고, 남한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은 김일성의 창덕학교 동창이나 만주에서 그를 직접 알았던 사람들의 후일 증언을 토대로 그의 실제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아닌 김성주(金聖柱)이며,[118] 전사한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본명이 金成柱인 것을 따라, 자신이 그 사건의 주역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본명까지 金成柱로 고쳤다고 주장한다.[119] 일제시대 기록에는 그의 본명이 金成柱/金聖柱 두 가지가 다 나와서 어느 쪽이 맞는지 명확히 가리기가 쉽지 않다. 그의 본명을 金誠柱로 적은 문헌도 있다.[120][121]

    그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김일성 회고록에는 1920년대말 김혁이 김성주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를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나중에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별"이라는 이름은 김성주 아닌 김인묵이라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122] 이명영은 1930년 말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五家子) 시절 김일성의 지인이었던 최형우(崔衡宇, 1905~1950)[123]가 그에게 일성(一星)이란 별호를 지어주었다는 증언을 소개했고,[24][119] 최형우 본인도 저서에서 유사한 말을 했다.[124] 동아일보는 1931년 3월과 5월에 이종락(李鍾洛) 부하(部下) 김일성(金一成)이 체포되었다고 두 차례 보도했다.[125] 이런 것들로 보아 김성주는 1931년 전후에 김일성(金一星) 또는 김일성(金一成)이란 이름을 별호 비슷하게 쓰기도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 후 1930년대 중반까지 그가 어떤 이름을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본명의 한자 표기 "成柱 / 聖柱 / 誠柱"나 별명의 한자 표기 "一星 / 一成 / 日成"은 한국어 발음은 서로 같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당시 김일성이 주로 쓰던 말 중국어로는 글자 뿐만 아니라 발음까지 모두 달라서 같은 이름들이 아니다.


    김성주가 1930년대 중후반에 소속되었던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이 신문에 자주 나오게 되는 것은 1936년 8월 ~ 1937년 말의 기간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과 1939년 초 ~1940년 7월 기간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의 활동 보도에서이다. 이 중 1937년 6월의 보천보사건 주역이었던 6사장 김일성은 그해 11월 전사하므로 북한 김일성이 아니며, 후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자세히 설명한다.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 시절 1938년 이후와 소련군에서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확인되나,[126][127][128] 러시아어로는 김일성 아닌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45] 해방 전 88여단 시절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이었고, 6.25 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兪成哲, 1917-1995)보천보사건을 일으킨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말 전사하자 그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으로 활동하며 공을 가로챘다고 하였다.[129][130]

    해방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당시에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131], 또 평양에 온 초기에는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 행세했으므로[50],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본명 대신 김일성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도 동진공화국 소문과 함께 김일성 장군이 곧 귀국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132] 평양으로 온 김성주가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쓰며[50] 잠행할 때 이런 것을 놓쳤을 리 없다. 또 만주와 소련에서 오래 생활한 그는 돌아올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은 전사했으니 만주에는 그렇게 불릴만한 사람이 없고, 연해주에도 김광서(金光瑞, 1888-1942, 金擎天)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 외에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소련의 탄압을 받아 1937년 무렵 처형되거나 중앙아시아로 끌려가고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으니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라고 자칭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그의 이름을 이전의 진지첸(Цзин Жи-чэн)에서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133]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많은 월남민들이 증언한대로 북한 김일성은 누구인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인 것이 재확인된다.


    참고 : 『김일성 1912~1945』 3권을 지은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에 의하면 양좌청(楊佐青, 楊君武, 1911~1970)의 회억록(回憶錄)이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 중 하나에 동북항일연군 내의 몇몇 사람들에게 일본측에 보다 많이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을 따라 개명하도록 중공당 만주성위 차원에서 결정, 권고했다고 나온다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는 본명이 마상덕(馬尙德)이고 장관일(張貫一)이란 변명(變名)을 썼는데, 양군무(楊君武)나 양림(楊林, 1898~1936)의 이름을 따라 개명하도록 권했으나 양(楊)씨 성만 따르고, 이름은 다르게 지었다 한다.[134] 일본 패망후 흑룡강 성장을 지낸 이범오(李範五, 1912-1986)는 오평(吳平, 1907-1942)[135]의 변명인 양송(楊松)을 따라 비슷한 장송(張松)이라는 변명을 쓰게되었다고 하며, 당의 결정에 따라 꼭같은 이름을 쓰게된 사례로 김일성(金日成)을 들고 있다고 한다. 중공당 만주성위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일본측에 혼란을 주기 위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북한 김일성도 남의 이름을 따라 같은 이름을 쓰게 되었다는 부분이다. 전사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썼다는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증언이다. 또한 그 이름을 따라 쓴 것이 개인이 임의로 한 것이 아니라 중공당의 권고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이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전사한 상급자의 이름을 개인이 임의로 그대로 따라쓰는 것은 항련내에서도 허용되지 않을만한 사안이나, 일본측에 혼란을 주기위해 당차원에서 그렇게 하도록 결정을 했다면 상당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양좌청의 회억록 원문은 구해보기 쉽지 않으나, 양정우(楊靖宇)나 이범오(李範五)의 사례가 확인이 되므로 김일성에 대한 말도 사실로 보인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모델인 김경천(金擎天, 1888~1942) 장군.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에 김경천은 김일성(金日成)씨의 초명(初名)이라 하였고,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시가 나온다.[136]

    전설의 김일성 장군은 누구인가?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풍문의 내용이 구구하여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36][38][52]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 1888-1942, 金擎天)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에도 김경천(金擎天)은 김일성(金日成)의 초명(初名)이라 하였고,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나온다.[136][137] 1945년 12월에 간행된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진상(朝鮮眞相)』에도 북한 김일성은 김광서(金光瑞, 金擎天) 장군의 명의를 상속 중이라 한다고 했다.[138]

    김광서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인 김준원(金埈元, 1888~1969)은 1918~1922년간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 때 일본군 중위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김광서가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139]

    윤치영(尹致暎, 1898~1996)도 북한 김일성은 가짜이고, 진짜 김일성은 일본 육사 나온 김광서(金光瑞, 1888-1942)라고 하였다.[140] 김광서는 일본 육사 선배로 친하게 지내던 그의 형 윤치성(尹致晟, 1875~1936)을 자주 찾아왔기 때문에 윤치영도 어릴 때 그를 자주 보았다. 윤치성은 김광서가 독립운동하러 조선을 탈출할 때 재정 지원도 하였다고 한다. 김광서의 부친 김정우(金鼎禹, 1857~1908)는 육군 공병 참령(工兵 參領)으로, 윤치영의 백부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부관(副官)을 지냈으므로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윤치영의 증언은 믿을만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만주 시절 말타고 활동한 적이 없는데도, 그의 기마상을 그린 그림이나 동상이 많은 것도 백마탄 김일성 장군으로 통하던 김광서 장군의 이미지를 도용한 것으로 보인다.[141][142][143]

    일제시대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시발점은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황곡리(端川郡 水下面 黃谷里) 출신의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1888 ~ 1926, 본명 金昌希) 장군으로 보기도 한다.[144][145] 이 김일성 장군은 함경남도 및 백두산 일대에서 상당히 유명했다고 하며, 보훈처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였다.[146] 그의 외4촌형(外從兄) 설린(薛麟, 본명 寬建)은 「모스크바」공산대학 출신으로서 해방 후 정치대학(건국대학 전신) 사무장으로 있었는데, 평양에 왔다는 소위 「김일성 장군」이 김창희, 즉 자신의 고종 동생인줄 알고 평양까지 가서 면회를 신청했다가 붙잡혀서 곤욕을 당했다 한다. 간신히 석방되어 월남했다가 6·25 때 납북되었다.[145][147][148]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은 일찍부터 구전상의 김일성 장군은 김양녕(金楊寧) 장군이라고 하였다.[149][150] 김양녕은 양림(楊林, 1901~1936)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알려져 있으나 본명은 김훈(金勛)이고, 양녕(楊寧)이라는 다른 이름을 쓰기도 했다.[151]

    위 세 사람 외에도 일제시대 문헌들을 검색해보면 김일성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나오지만, 대다수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로 전설의 주인공으로 보기 어렵다. 김용삼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11명의 동명이인 김일성을 들고 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다.[152][153]

    비슷한 시기에 김일성이란 이름의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 김일성 장군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는 소문의 원인일 가능성은 있다.

    김일성 진짜설이 득세하게 되는 과정

    월남민들의 증언으로 남한에 널리 인식되어 있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뒤집고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득세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사람은 서대숙(徐大肅)이다. 그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이승만 정부가 만들어낸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154]

    “모든 학문이 그렇듯 시작은 호기심이었어요. 이승만 정권의 ‘김일성 가짜설’을 비롯해 ‘북한’이란 단어조차 금기가 되는 것을 보면서 객관적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컸어요. 학문의 목적은 진실 추구이고, 학자는 목을 내놓더라도 진실과 소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북한 김일성이 평양에 나타난 직후인 1945년말부터 이미 그가 가짜라고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승만 집권 이전에 그러한 말을 기록한 문헌도 셀 수 없이 많다. 오히려 한국 정부 기록에는 그런 말은 거의 보이지 않고, 정부 차원에서 그가 가짜라고 선전했다는 증거도 없다. 이승만에 대한 반감이 그런 근거없는 선입견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목을 내놓더라도 지키고자 한 진실과 소신은 김일성 가짜설에 관한 한 잘못된 것이다. 그런 말을 했다고 미국 시민권자인 그에게 목을 내놓아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그러기 전에 자신의 소신이 진실인지부터 확인했어야 할 것이다.

    김일성이 진짜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툭하면 가짜설이 이승만 또는 박정희 정권이 지어내서 집중교육했다거나,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런 말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아무 근거없는 그 사람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례로 역대 국사 교과서를 "김일성"으로 검색해보아도 그가 가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김일성 관련 항목은 18건이 검색되지만 그가 가짜라고 한 것은 없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학교에서 집중 교육하여 퍼진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심지어는 김일성이 항일영웅이라며 미화에 앞장선 한홍구도 남한의 교과서에 김일성이 가짜라고 실린 적은 없다고 인정한다.[155]

    이남의 교과서에 실려 있지는 않으나 실제로 이남의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이 행해졌고 남북관계가 새롭게 변한 지금도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고 믿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학교에서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교육이 행해졌다는 것은 자신이 당시 전국의 교실마다 지켜보지 않았던 이상 알 수 없는 일인데 사실처럼 말하고 있다.

    서대숙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이 유명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런 유명한 인물은 실존하지 않고, 북한 김일성이 만주서 실제로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항일 투쟁을 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될 수 없다고 했다.[156][157]

    서대숙: 김일성이란 이름은 유명했다. 김일성이 공식석상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모두 “가짜다” 라고 했다. 가짜가 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 김일성. 전설에 나오는 그런 김일성은 없다. 우리가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란 전설적인 사람은 없다.[156]

    해방 당시 김일성 전설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그 내용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편차가 심하여 실존 인물 한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바로 그 점을 북한 김일성이 악용한 것이다. 그의 실체가 분명했다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다. 김일성은 바로 그 실체가 불분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 완전 무명인사였으므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였다. 자신의 항일투쟁 성과로 얻은 명성이 아닌 국내에 널리 퍼져 있던 실체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쳤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어릴 때 고국을 떠나 만주서 빨치산 투쟁한다며 산야를 숨어 다니다, 해방직전 5년간 소련 극동의 시골마을에 숨어 있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의 존재를 국내 사람들은 알래야 알 수도 없었다. 보천보 사건 때문에 만주 빨치산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유명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최고 권력을 잡고 자신의 항일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이전에는 보천보 사건은 전혀 유명한 사건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는 그 사건의 주역도 아니고 전사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써서 남의 전공을 훔쳤을 뿐이다. 사람들이 북한 김일성이 아닌 진짜 김일성 장군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름을 들은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인데도,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사람들은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지니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알았다는 식으로 호도한다.

    이종석은 서대숙의 연구가 과학적 분석이 결여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말하는 과학적 분석이라는 것이 가짜 김일성을 소위 내재적 관점으로 더욱 미화하는 것이라 어처구니 없다.[158]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넣은 히틀러나 스탈린, 모택동도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나름대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왜 남한에 대해서만은 단 한번도 그런 내재적 관점으로 분석한 적이 없는지 신기하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정창현은 아래와 같은 식으로 말한다.[159]

    북조선의 김일성이 전설상의 '김일성 장군 이름을 도용한 가짜라는 주장은 해방 직후부터 일부에서 제기된 바 있다. 남한에서 이러한 견해가 등장하게 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찬탁과 반탁'을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이 표면화되고,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빼앗긴 대지주들이 월남하던 1946년 초부터이다. 처음에는 주로 김일성의 나이가 너무 젊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등장하였다.

    그는 마치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빼앗기고 월남한 대지주들이 남한에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퍼뜨린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수많은 월남민들은 대다수가 대지주도 아니었을 뿐더러 [북한에 대지주가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처음 평양의 대중들 앞에 나서던 현장에서부터 나온 말이며, 미군정청은 그 직후인 1945년 11월부터 이미 그가 가짜라고 기록하고 있다. 1945년 12월말 시작된 반탁운동이나 1946년 3월의 북한 토지개혁 이전부터 남한에서도 그가 가짜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창현은 또한 자신의 견해가 옳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160]

    [김일성이 가짜라는] 이러한 견해는 이제 이명영, 허동찬 등 몇몇을 제외하면 학계에서 더 이상 설 자리를 상실하였다. 심지어 초기에 '김일성 위조설' 을 주장하였던 김창순조차도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재 북한의 김일성이 만주의 항일연군에 속해 있던 그 김일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새로 발굴된 김일성이 가짜라는 수많은 증거들은 외면하고 자신과 같은 주장만 학계에서 인정한다고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새로운 가짜 증거들에 대해 해명할 말이 궁하다는 반증이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는지, 아닌지와는 별 관계가 없다. 뿐더러 이명영이나 허동찬도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동경대 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의 주역이며 자신의 항일투쟁 공로로 유명해졌으니 진짜가 맞다고 주장한다.[161] 또 만주는 겨울철 기후가 혹독해서 나이많은 노장군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162]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되는 게릴라전의 지휘관은 젊은 체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주의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보다 훨씬 이전에 1920년 경부터 유명한 김일성 장군에 대한 풍문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하여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고 있다. 만주에서 유격전을 하면 긴 세월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이상한 논리처럼 보인다. 이런 주장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1920년 봉오동 전투 당시 홍범도(洪範圖, 1868~1943)의 나이가 52세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서대숙와다 하루키는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고,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하여 국내의 김일성 연구가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수준에서 길을 잃고 오히려 퇴보하게 만든 주역이다. 그 이후로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던 월남민 1세대 대다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국내의 김일성 연구는 그가 진짜가 맞다고 하는 신진학자들의 경연장이 되어, 앞서 김일성이 가짜라고 밝히는 연구를 한 선배 학자들을 어용으로 몰았다.

    이들은 가짜 김일성 소문이 북한에서 그를 직접 본 월남민들에 의해 퍼졌다는 사실은 감추고, 남한 정부가 조작해서 퍼뜨렸다고 하면서 친일파가 득세한 남한이 김일성이 항일영웅인 것을 부담스러워서, 또는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것처럼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163]

    나는 통일 후 북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김일성 신화를 벗겨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옛날 반공교육 시대에 만들어진 김일성 가짜설로는 어림도 없다.

    해방 당시 소련군이 데려온 북한 김일성의 전력은 아무 것도 알려진 게 없었고, 북한의 선전은 예나 지금이나 믿을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이 만주에서 활동한 빨치산들은 남한으로 온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적성국가였던 소련과 중공 등으로부터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어 미군정이나 남한 정부도 그가 해방 전 어디서 뭘 하던 자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6.25 전쟁복구와 기아 문제 해결에 진력하느라 김일성 연구 같은데에는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제대로된 연구는 1970년대부터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상당한 연구가 진행된 지금에도 그의 행적의 전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은데 과거 한국 정부가 무슨 수로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있었겠는가? 김일성이 해방 직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극동의 소련군에 복무했다는 사실도 공산권이 붕괴한 1990년 이후에야 제대로 밝혀졌지만 북한은 해방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이를 감추고 있다. 그가 무슨 항일 공적이 있는지를 미군정이나 한국 정부가 알 수 없었다면 남북한의 일반 국민들은 더 모를 수 밖에 없었다. 북한 김일성은 국내 누구도 어디서 무얼하던 사람인지 몰랐던 항일 영웅이라는 말은 넌센스이다.

    대다수 과거 자료들이 전산화되어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진 근래에 발굴된 수많은 새로운 자료들과 공산권 붕괴 이후 나온 여러 증언들은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일 뿐만 아니라,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의 전과도 훔쳤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고, 이명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북한 김일성이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보천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서 금방 잊혀졌다. 김성주가 이전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 것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대중들은 그의 전력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항일투쟁을 한 적이 없다거나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적이 없는 것으로 잘못 안 때문에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나이로 보아 절대로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가짜라 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항일연군에서 투쟁한 김일성이 맞으니 진짜라거나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맞으니 진짜라는 주장은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Straw Man Fallacy)"이며, 대중을 속이는 허위이다. 나아가 남한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 부담스러워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김일성은 비록 만주서 항일투쟁을 했다고 하지만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다[130]. 소련으로 넘어간 후인 1942년에 그가 직접 지은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를 보면 그들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만주 실지 회복을 위해 한 것으로 중국공산당사의 일부일 뿐이고, 조선독립과는 무관하다고 자인하고 있다. 뿐더러 그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패배로 귀결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105] 그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보급투쟁이라는 미명하에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해를 자행하는 비적(匪賊) 수준의 저급한 것이었다.[164][165] 그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그 명성을 훔쳤고, 다른 김일성의 보천보 전과를 훔친 것이 명백히 밝혀진 것으로 해서 그의 항일투쟁이란 것은 더 이상 거론할 것도 없다. 해방 당시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지지세력도 전무했던 인사가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그들의 무력과 정치공작의 도움으로 억지로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여 인민들의 주권을 강탈해간 것이 정확히 그가 한 일이다.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여 절대권력을 확보한 후 전무후무한 세습 전제 왕조를 만든 것이 그의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위에서 본대로 그가 적어도 1920년 무렵부터 알려졌던 반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1937년 6월의 보천보사건 당사자가 맞는가, 아닌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후대에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보천보사건 때부터라고 하면서, 그가 사건의 당사자가 맞으므로 진짜라고 사안을 왜곡해 놓았다. 하지만 해방 당시 보천보사건도, 그 사건의 주역이 6사장 김일성이라는 것도, 그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고 대다수 언론이 보도한 것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비로소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평생을 김일성과 북한 연구에 바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전 북한연구소 이사장도 이런 점을 일찍부터 지적하였다.

    근래 '김일성 연구가‘로 자처하는 정치역사학자들 가운데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普天堡) 습격사건의 주인공이다 아니다‘로써 진짜 김일성(金日成)이다 아니다를 가리려고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 金日成은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166]

    그러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러한 지적을 애써 무시하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당사자이므로 진짜가 맞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MBC가 2002년 2월 3일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 48 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167] 불리한 자료는 무시하고,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만 방영하였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원천적으로 틀린 것이다. 설사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당사자가 맞다고 해도 틀린 것이지만, 그는 이 사건의 당사자조차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은 박갑동(朴甲東, 1919~ )이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에서 처음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168] 이듬해 이명영은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169]과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기록과 증언 등을 제시하며 이를 본격적으로 거론했다.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 기사. 전사한 김일성은 함남 출신, 36세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여 신원도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같은 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주요 신문들이 모두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했다.
    참고 : 같은 기사의 다른 이미지 보기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

    북한 김일성은 해방 후 평양에 와서도 전설의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였지만, 만주 빨치산 시절에도 전사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였다.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국군 제7단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당시 기록과[170][171][172] 신문 기사로[35] 확인할 수 있고, 신원도 당시 나이 36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태생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등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이전에도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는데, 1936년 11월 27일자 매일신보는 김일성의 나이가 37~8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혜산진 출신으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만주로 왔다고 했고[173], 만주국군 기관지 월간 『철심(鐵心)』 1937년 5월호에는 김일성이 30세 가량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 하였다.[174][175]

    보천보사건 당시 북한 김일성의 나이는 25세에 불과한데, 10년 이상의 나이차는 외모로도 확연히 구분되므로 나이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경성일보는 6사장 김일성이 녹림(綠林) 유일의 인텔리라고 하였는데, 구체적 학력을 모르더라도 지식 정도는 평소 언행에서 드러나므로 중학 중퇴 학력의 북한 김일성을 두고 이런 말을 할 수는 없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6사장 김일성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근래의 옛문헌 전산화 덕택에 6사장 김일성의 신원(身元)과 전사(戰死)에 관한 1937년 전후 기록들이 20여건 이상 발굴되었으며, 이런 기록들로 부터 6사장 김일성은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신원도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고, 북한 김일성으로 볼만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현재까지 발굴된 보천보사건 주역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에 대한 1938년 이전의 신원 기록이나 피살 기록은 아래와 같다. 수록처를 클릭하면 자료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수록처 기사 제목 김일성(金日成)에 대한 기록 내용
    1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 1932년 7月 18日 中国共産党延吉縣委及所屬機關ノ組織狀況ニ關スル件 연길현 의란구(依蘭溝) 유격대원 김일선(金一善), 30세, 주소 왕청현(汪淸縣); 노두구(老頭溝) 유격대원 왕덕태(王德泰).
    2 경성일보 1936년 9월 11일 조간 5면 同胞六名を拉致 巨額の身代金その他要求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으로 나이 28세라고 함. [石陽里는 석우리(石隅里)의 착오로 보임.]
    3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 (11월 26일 석간) 3면 공비 김일성파 내막(共匪金日成派內幕) 김일성은 함남 혜산진(惠山鎭) 출신. 키 5척 8촌(176 cm). 카이젤 수염. 37~8세.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 지령을 받아 북만주로 옴.
    4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 1936년 12월 12일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동북항일연군 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 - 노두구 유격대원.
    2군 제3사장(師長) 金日成(金一善) - 의란구 유격대원 김일선(金一善).
    5 월간 『철심(鉄心)』 1937年 5月 15日號 pp.98~114 동변도토비행(東邊道討匪行)[174] 김일성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며, 나이는 30세 미만이라 함.[174][175]
    6 오카모토 고이치(岡本吾市), 「満洲に於ける中国共産党と共産匪」, 1937년 5월 "現在 活動中の 主要匪首及 其身元" 김일성은 농부 출신으로 “농업을 경영하다가 공비의 선전에 의해 비화(匪化)된 인물"로 가족관계는 “불상(不詳)"이고 나이는 30세라 함.
    7 경성일보 1937年 6月 6日 (6月 5日 夕刊) 2面 김일성은 27세의 청년(金は廿七歲の靑年) 김일성은 평양 출신, 27세 청년. 15세에 모스크바 군사훈련 전문학교 수학. 22세(1932년)에 동변도(東邊道)로 돌아옴. 부친이 한일병합 후 만주로 가서 마적 두목이 됨.
    8 조선일보 1937년 6월 6일 석간2의 2면 김일성의 내력(金日成 來歷) 평양 출신, 나이 27세. 부친 때부터 만주로 가서 그 방면(共産系 兵匪)에 참여하고 있는 자. [위의 경성일보 기사와 같은 내용에서 일부 누락]
    9 조선일보 1937년 6월 8일 석간2의 2면 김일성 일당 중에는 여당원(女黨員)도 10여명. 보천보 습격사건 후보 6사장 김일성은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 나이 34~35세.
    10 나가오카 토모타로(永丘智太郞), 『極東の計劃と民族』, 1937년 10월 초순 만주(滿洲)의 비적적화공작(匪賊赤化工作)과 조선인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金日成)은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出身)이며, 그 지방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고 하였다.
    11 월간 『철심(鉄心)』 1937年 11月 15日號 pp.70~75 「김일성비 토벌 상보(金日成匪討伐詳報)」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 측의 토벌상보[176]
    12 경성일보 1937年 11月 18日 (17日 夕刊) 2面 金日成殺さる 김일성비(金日成匪)가 13일 만주군의 토벌에 격전 5시간 끝에 섬멸됨. 수급(首級)을 취해 옴.
    13 동아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 김일성피살(金日成被殺)? 김일성이 피살되었다는 보도.
    14 조선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 김일성 피착 참수(金日成被捉斬首) 김일성이 사살되어 참수(斬首)되었다는 보도
    15 매일신보 1937년 11월 18일 3면 共匪 金日成 被殺 - 十三日 滿洲國 討伐軍에 김일성 피살보도. 19세에 모스크바로 가서 10년 체류. 공산대학 졸업 후 적위군(赤衛軍) 입대. 만주사변 때 돌아옴. 부자(父子) 2대가 비적이됨 (아버지는 수령, 아들은 부하).
    16 경성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7면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 共産匪 金日成の 死 김일성 피살보도. 함남 출신. 19세에 모스크바로 가서 10년 체류. 공산대학 졸업. 만주사변 때 돌아옴. 녹림 유일의 인텔리. 부자(父子) 2대가 비적이됨 (아버지는 수령, 아들은 부하).[176]
    17 조선신문(朝鮮新聞) 1937년 11월 18일 7면 5단 反滿抗日の匪頭金日成遂に年貢を納む 김일성이 사살되어 참수(斬首)되었다는 보도
    18 治安狀況(昭和 12年) 제38보 1937년 11월 19일 鮮外情報 - 共匪 金日成 射殺의 件 김일성을 사살하고 목을 베어와 신원 확인중.
    19 조선일보 1937년 11월 19일 조간 4면 기회(機會) 엿보든 공비단(共匪團) 동기(冬期)들며 대발호(大跋扈). 金周賢, 曺國鉉, 金日成 일파 암중 활약. 어제 김일성이 총살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20 일본 외무성 동아국 업무보고서 1937년 12월 1일 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 p.49 김일성을 사살.
    21 매일신보 1937년 12월 19일 2면 국경 경비진을 강화(國境警備陣을 强化) 왕봉각(王鳳閣, 1897-1937)에 이어 김일성(金日成)도 사망(死亡)
    22 경성일보 1937年 12月 19日 조간(朝刊) 7面 國境 冬の陣 强化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日成)이 차례로 죽음(斃).
    23 조선신문(朝鮮新聞) 1937년 12월 19일 3면 2단 匪賊の蠢動に備へ國境冬の陣を强化, 對岸のバチルスは凡そ三千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日成)이 차례로 죽음(斃).
    24 조선일보 1937년 12월 19일 2면 1단 三千匪賊(삼천비적) 殲滅次(섬멸차) 國境警備陣(국경경비진) 强化(강화)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一成) 일파 등이 차례로 섬멸당함.
    25 매일신보 1938年 2月 23日 (22日 夕刊) 2면 공비 최현 일당 궤멸(共匪 崔賢一黨 潰滅) 최현이 사살 되었다는 기사[177][178]. 김일성도 작년 가을 총살됨.
    26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 1938.2.25 匪賊九千に激減 / 満洲国治安完成へ 일만군(日満軍)이 작년 전투에서 비수를 죽인 것은 김일성 등 59명(匪首を仆すこと金日成以下五十九), 체포한 비수는 왕봉각 등 28명.
    27 일본 외무성 동아국 업무보고서 1938년 6월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김일성을 사살. (1937년 12월 1일자 동아국 업무보고서와 같은 내용)
    28 국민신보(國民新報) 1939년 11월 12일 7면 アリナレ河畔, 世紀の轉換 : 警備彌增す平安北道. 김일성(金日成)은 효수(梟首)되었음.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5일자로 호외를 간행하여 보천보 사건을 보도하였지만[179],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피살되었다는 보도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36세로 함남출신이며,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1937년 11월 13일 전사하였다.[35]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매일신보의 11월 18일자 기사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37~8세 가량으로 함남 혜산진 출신이라는 1936년 11월 27일자 매일신보 기사. 북한 김일성은 당시 24세로 평남 대동군 출신이므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위의 1번 자료는 1932년 7월 18일 재간도(在間島) 일본 총영사(日本 総領事) 오카다 겐이치(岡田兼一, 1882~1960)가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内田康哉, 1865~1936)에게 올린 보고서인데, 연길현 의란구구 유격대(延吉縣 依蘭溝區 遊擊隊)의 대원으로 30세인 왕청(汪淸)현의 김일선(金一善)이 나오고, 노두구 구유격대(老頭溝 區遊擊隊) 대원으로 왕덕태(王德泰,1907~1936)가 나온다.[180][181]

    이 유격대들이 통합해서 연길현 유격대로 되었다가 항일연군 2군으로 발전하는데, 왕덕태는 2군 군장이 된다. 4번 자료에는 2군 3사장(후에 6사장으로 개칭) 김일성도 김일선(金一善)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했으므로[182] 이 사람은 의란구구 유격대 김일선이 분명하며, 나이가 1932년에 30세이면 1937년에 35세가 되므로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천보 김일성의 나이와 거의 같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에 나오는 혜산사건(惠山事件) 수사 책임자나,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당사자의 후일 증언도 위의 기록들이 명백한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당시 함남도경의 경부(警部)로 혜산사건 수사 책임자였던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는 1971년 2월의 증언에서 여자 대원으로 잡혔던 박록금(朴祿金, 1915-1940)이 김일성(金日成)의 나이가 36세,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고 만주사변 후에 소련에서 만주로 온 사람이란 것을 처음으로 진술했고, 이어서 권영벽(權永壁, 1909∼1945) 등 다른 사람들도 이를 확인해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당시 함남도경의 순사부장이었던 미나기 요시오(皆木善男)도 전화통화에서 이치하라와 같은 증언을 하였다.[183]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경부는 혜산사건 수사의 공로로 총독부 경무국장의 표창을 받은 것이 당시 신문에서 확인되므로 그의 증언은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184]

    당시 함남도경이 작성한 수사기록인 신문조서(訊問調書)는 함흥법원에 남아 있었는데, 해방후 북한 소유가 되었다. 이것은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맞는지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이나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가 6사장이 아니기 때문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 만주군 장교로 6사장 김일성 사살 작전에 직접 참가했던 야기 하루오(八木春雄, 1910-2002)는[185] 1973년 여름의 증언에서 당시 일만군(日滿軍) 부대가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186]에서 김일성 부대와 교전을 벌여 그를 사살하고, 시신의 목을 베어와 마을 사람들에게 신원을 확인한 결과 김일성이 틀림없었다고 증언하였다.[187][171] 김일성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벌인 일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당시 신문기사에도 김일성이 많은 마을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므로 그의 신원은 정확히 확인된 것으로 판단된다.[188][189] 별다른 경력도 없는 중학 중퇴의 북한 김일성은 당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할만한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위에 열거한 문헌 중에서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가 나오는 기록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로부터 그의 출신지는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隣面)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석우리(石隅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수록처 기사 제목 김일성(金日成)의 출신지
    1 경성일보 1936년 9월 11일 조간 5면 同胞六名を拉致 巨額の身代金その他要求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으로 나이 28세라고 함. [石陽里는 석우리(石隅里)의 착오로 보임.]
    2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 (11월 26일 석간) 3면 공비 김일성파 내막(共匪金日成派內幕) 김일성은 함남 혜산진(惠山鎭) 출신. 37~8세.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 지령을 받아 북만주로 옴. (혜산진은 당시 갑산군 소속으로 회린면과 가까움.)
    3 경성일보 1937年 6月 6日 (6月 5日 夕刊) 2面 김일성은 27세의 청년(金は廿七歲の靑年) 김일성은 평양 출신, 27세 청년. 15세에 모스크바 군사훈련 전문학교 수학. 22세(1932년)에 동변도(東邊道)로 돌아옴.
    4 조선일보 1937년 6월 6일 석간2의 2면 김일성의 내력(金日成 來歷) 평양 출신, 나이 27세. 부친 때부터 만주로 가서 그 방면(共産系 兵匪)에 참여하고 있는 자. [위의 경성일보 기사와 같은 내용에서 일부 누락]
    5 조선일보 1937년 6월 8일 석간2의 2면 김일성 일당 중에는 여당원(女黨員)도 10여명. 보천보 습격사건 후보 6사장 김일성은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 나이 34~35세.
    6 나가오카 토모타로(永丘智太郞), 『極東の計劃と民族』, 1937년 10월 초순 만주(滿洲)의 비적적화공작(匪賊赤化工作)과 조선인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金日成)은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出身)이며, 그 지방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고 하였다.
    7 조선일보 1939년 6월 23일자 7면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 김일성이 "본적을 함남 갑산군(甲山郡)에 두엇다 하는 말도 잇스나 평남 출생이란 말이 더 근사하다고 한다."

    위에 열거한 자료에서 보듯이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이라고 한 것이 대다수인 것도 그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증거이다. 그중에서도 1번 자료 (경성일보 1936년 9월 11일자)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이라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2번 자료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자)에서는 그가 함남 혜산진(惠山鎭) 출신이라 하였고, 5번 자료 (조선일보 1937년 6월 8일자)에서도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 출신이라 했다. 6번 자료는 나가오카 토모타로(永丘智太郞)가 1937년 10월 초순 북조선 지방을 시찰하고 와서 쓴 글인데, 김일성이 역시 함남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 출신이라고 기록했다.[190] 서로 다른 시기 별개의 기록들에 그의 출신지가 모두 함남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을 매우 높여준다.

    조선일보 1939년 6월 23일자 7면의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에는 김일성이 "본적을 함남 갑산군(甲山郡)에 두엇다 하는 말도 잇스나 평남 출생이란 말이 더 근사하다고 한다."고 했다.[191] 이것은 6사장 김일성 전사 후 제2방면군장이 된 북한 김일성이 1939년 6월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 일대 두만강 양안에 출몰할 당시의 글이다. 종전에 알려진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으로 적고 있어 두 사람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북한 김일성의 출신지 정보가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3번과 4번 자료처럼 보천보 사건 보도 기사에 그의 출신지를 평양이라 한 것도 있기는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는 15세에 모스크바 군사훈련 전문학교 수학하고, 22세(1932년)에 동변도(東邊道)로 돌아왔다고 하여 북한 김일성과는 다르다.

    함경남도 행정구역 개정안 부도(1913년)의 갑산군(甲山郡) 지도[192] : 갑산(甲山) 바로 북쪽에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 회린면(會麟面)이 있다. 그 북쪽으로 압록강에 면해서 혜산진(惠山鎭)이 있고, 또 그 북쪽으로 보천보(普天堡)가 보인다.

    혜산진도 당시는 갑산군에 속했으며[193], 회린면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북청∼혜산간의 도로가 허천강(虛川江)을 따라 회린면을 지나간다.[194] 회린면 출신자도 인접한 지명도가 높은 혜산진 출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성일보 기사의 회린면 석양리(會隣面 石陽里)는 회린면 석우리(會麟面 石隅里)를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석우리(石隅里)는 회린면의 중심 리(里)로, 면사무소, 주재소, 소방서가 있었다.[195][194] 회린면은 그 부근 지역 거주자가 아닌 외부 사람들은 알기 어려운 지명이므로 6사장 김일성의 신상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일 것이다. 또 나가오카는 김일성이 그 지역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고 했으므로 회린면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 망국 직전인 1910년 1월 20일자 관보에 갑산군(甲山郡)의 회면(會面), 허린면(虛麟面) 및 신복면(新福面)을 폐하고 회린면(會麟面)을 설치한다고 나와 있다.[196]

    오늘날 북한에서는 면단위 행정구역은 폐지되었으나, 양강도 갑산군 회린리(甲山郡 會麟里)와 그 북서쪽 혜산방향 일대가 회린면 지역이다. 석우리(石隅里)의 일부가 회린리(會麟里)로 편입되었다 한다.[197]

    이처럼 6사장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출신이라는 기록이 많고, 특히 회린면(會麟面)이라는 면단위 지명까지 나온다는 것은 그가 실제로 그 지역 출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갑산군은 외부 사람들도 많이 알지만 회린면이라는 면단위 지명은 그 지역 인근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이런 구체적인 정보는 갑산 지역의 사람들이 김일성이 그 지역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갑산군의 혜산진이나 회린면은 역시 갑산군에 속했던 문제의 보천보와 가까이 있는 지역이다. 6사장 김일성이 이 지역 출신이라면 일대의 지리도 잘 알 것이고, 근처에 아는 사람도 많아서 포섭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이것이 보천보를 습격 목표지역으로 정한 이유도 될 수 있다. 보천보사건의 후속인 혜산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된 사람이 수백명에 이른다는 것도 6사장 김일성이 이 지역 출신이라 포섭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루자들 중에는 북한 김일성보다 연장자들도 많았다. 평남 대동군 출신의 북한 김일성은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성장하여 중국말은 능하나,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고 하므로, 조선말도 서툴고 나이도 젊은 그가 무연고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의 소련 연고

    위의 표에 제시된 자료들 중 다수에는 6사장 김일성이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거나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는 말이 나온다. 6사장 김일성이 활동할 당시의 아래와 같은 신문보도에도 그가 소련과 연고가 있고, 소련식 전법(戰法)을 배운 인물이라는 증거들이 더러 보인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 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기 이전에는 소련과 아무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들은 6사장이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1번 자료 매일신보 기사에는 김일성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북한이나 중국측에서 말하는 1936년 9월 1일, 2일에 있었다는 6사장 김일성의 대덕수(大德水), 소덕수(小德水) 전투에 대한 보도이다.[198][199] 북한은 이 전투에서 김일성군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주장하나, 이 기사에 의하면 2시간의 교전 끝에 일본군 혜산진 부대는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상대방에 큰 손해를 주었다고 했다.

    수록처 기사 제목 김일성(金日成)의 소련 관련 기록 내용
    1 매일신보 1936년 09월 06일 3면 戰法은 蘇聯軍同一 蘇聯將校潜在? 惠山鎭對岸匪賊의 武器精巧 그 전법(戰法)은 소련군(蘇聯軍)의 전법과 동일(同一)하다. 수명의 소군 장교(蘇軍 將校)가 있는 것이 확실한 듯하다. [6사장 김일성의 소덕수(小德水) 전투에 대한 보도]
    2 매일신보 1936년 09월 11일 2면 頭目은 金日成: 대부분 조선인, 관헌과 흡사한 복장입어 장백현(長白縣) 십륙도구(十六道溝)의 소덕수리(小德水里), 대덕수리(大德水里)를 약탈한 김일성 부대는 러시아식 장총과 중국식 장총 및 권총으로 무장.
    3 매일신보 1936년 10월 03일 02면 함남 국경 대안(咸南國境對岸) 공비의 동정(共匪 動靜) 김일성 부대는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고, 쏘비에트 러시아인도 가입해 있다고 한다.
    4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 3면 공비 김일성파 내막(共匪金日成派內幕) 김일성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가지고 북만주에 들어와 다시 중국 공산당과 연락을 취하여....무기는 모다 로서아제의 정예(精銳)한 것으로...
    5 동아일보 1937-06-08 조간 2면 장백밀림(長白密林)을 근거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 "그들은 쏘비에트의 전법을 그대로 이용하야 교묘하게 하는 까닭에..." [소련식 군사교육 받음]
    6 동아일보 1937-07-29 2면 무송현(撫松縣)서 두목대회(頭目大會) 김일성의 동료 조국안(曹國安)이 쏘비에트 국경에서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와 무송현서 두목대회를 열고 활동 계획을 논의함.

    이명영(李命英)에 의하면 제6사장 김일성에게 「이스라므」라고 하는 소련인 군사지도 원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200]

    이처럼 6사장 김일성의 활동 기간인 1937년 말까지는 그가 소련과 관계있는 인물이라는 기사가 자주 보이나, 이와는 달리 1939년 ~ 1940년 여름간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활동을 보도한 신문기사에는 그가 소련과 관련있는 인물로 볼만한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북한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한 후부터 소련과 처음 관련을 맺는다.

    만주국군월보의 6사장 김일성 사살 기록

    만주국군월보(満洲国軍月報)는 만주국 각 군관구(軍管區)와 각 지역 헌병대(憲兵隊)에서 매월 작성해 올린 월보(月報)을 취합한 극비문건이다. 일본의 아시아 역사자료센터에 1937년 10월 ~ 1938년 2월과 1938년 6, 7월의 월보 전문이 올라 있다. 매 월보는 1,0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그중 6사장 김일성과 관련된 부분은 제1군관구 월보(第一軍管區 月報)와 제1헌병대 월보(第一憲兵隊 月報)에 나온다.


    1937년 11월 만주국군월보(満洲国軍月報)[201]에 6사장 김일성 사살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들이 나온다. (페이지는 pdf 파일의 것이며, 괄호 속 숫자는 원본 각 페이지에 거꾸로 찍혀있는 일련번호이다.)

    1. [p.28 (0085)] 제1헌병대 월보(第一憲兵隊 月報) / 치안정황(治安情况)
      11월 13일 무송현 소서남차(撫松縣 小西南岔)[202]에서 공산비단(共産匪團)의 거괴(巨魁) 김일성(金日成)을 사살(擊斃).

    2. [p.406 (0454)] 제1군관구 월보(第一軍管區 月報)

    3. [pp.410-411 (0458-0459)] 비수 김일성이 사살당한 후 세력이 현저히 쇠퇴, 비를 근멸하는 것은 시간문제. 무송 남부, 장백 임강 북부 현경계에 김일성 잔당이 있음.
      於北部東邊道之共匪以朝鮮獨立革命爲標榜之鮮匪雖多但已無其介在之餘地 其現狀不過三三, 五五 自金日成匪首被擊斃後其勢著見衰退匪之根滅僅時日問題耳 目下之匪情於撫松南部長白臨江北部縣境有金日成匪之殘黨濛輝縣境有若干群匪之潛伏 但依糧食之缺乏及嚴寒之襲來完全失去戰意逃避我軍之銳鋒
      濛輝縣境 : 몽강현(濛江縣)과 휘남현(輝南縣)의 경계

    4. pp.412~413 (0460~0461) - 2. 무송토벌지구(撫松討伐地區)
      무송동남부의 김일성의 정보를 예의 수집한 결과 확실한 증거를 얻어 정확한 준비 토벌을 할 때 보병 제7단 제1영이 유력한 비적의 정보를 얻어 출격하여 13일 흉악한 비적 김일성의 수급을 취하였다. 잔비가 아직도 있으므로 군은 예정된 계획을 살펴 행동을 일제히 개시하였다. 기병 제3단과 보병 제7단은 북방과 서방에서, 촌목부대와 보병제3단 1영은 동방에서, 교도보병단과 기병 제6단은 남방에서 상호협력하여 실시하여 열흘 동안 소탕하여 김일성의 패잔비는 완전히 사방으로 흩어졌고, 부근에 분산해 있는 토비들과 함께 점차 남방으로 도주하였다. 그리하여 부대는 11월 30일 각자 원래 소속 담임지구로 돌아가 철저히 소탕중이다.
      又對撫松東南部蝟集之金日成之情報蒐集銳意之結果槪得確證 正準備討伐時恰値步兵第七團第一營 搜得有力之匪情而出擊於十三日則將凶惡匪金日成之首級取下 但尙有殘匪之介在故軍則按豫定計劃 自二十日早一齊開始行動騎兵第三團及步兵第七團由北方及西方 村木部隊及步兵第三團之一營由東方敎導步兵團並騎兵第六團由南方 相互協力實施旬日間之掃蕩而金日成之敗殘匪完全四散與附近分散之土匪相携漸次向南方遁走 故部隊於十一月三十日各歸原所屬擔任地區之徹底的掃蕩中

    5. [p.457 (0505)] 13. 첩보선전모략(一三. 牒報宣傳謀略)
      김일성비가 사살되자 각지로부터 감사전문(感謝電文)이 들어와 이를 인쇄하여 전선 각부대에 분배하여 관내에 선전하게 했다.
      尤利用前次擊斃金日成匪之好機於臨江城內開催排共市民大會依其結果亦頗擧顯著之效果
      尤對金日成匪之擊斃由各地所收之感謝電完全印刷分配於前線諸對以資管內之宣傳

    6. [p.495 (0541)] 보병 제7단 조직표
      제1군관구 사령관 상장 왕정수(王靜修) / 혼성(混成) 제6려 旅長 육군소장 동국화(董國華)-駐撫松縣城 / 보병제7단장 양춘욱(楊春煜) / 제1영장(營長) 손단중(孫端中) / 제2연장(連長) 여영발(呂永發) - 김일성 사살 현장 지휘관

    7. [p.511 (0554)] 부표(附表) 제5 제1군관구 토벌성과일람표
      11월 13일 보병7단 제2연장 이하 40명이 무송 서남차 북방 967 고지에서 김일성 사살. 동료 만순(萬順)이 보자고 하는 것처럼 속여서 김일성을 불러내어 기회를 틈타 사살(擊斃)하고, 이어 공비들을 공격하자 지탱하지 못하고 도주함.
      步七團 第二連長以下 40名 / 撫松西南岔 北方 九六七高地 / 連長與匪答話 僞裝 萬順匪 請金日成來答話 乘機 將金匪擊斃並攻擊匪不支逃走 / 擊斃匪首金日成 一, 死四. 傷多數 / 蔡准尉輕傷


    이 월보는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당사자인 만주군이 당시에 기록한 것이므로 위에 제시한 당시 신문 기사나 다른 기록들보다도 훨씬 더 믿을만한 것이며,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월별로 만주국군월보(満洲国軍月報)에 나오는 김일성 관련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작성연월 치안 상황 비적(匪賊) 조사표 비적 분포 요도(要圖)
    1937.10 임강(臨江) 동부 김일성계비(金日成系匪) 200명
    10월 27일 1로군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전사.
    김일성비 200명, 조잔비(曹殘匪) - 100명 김일성비 200, 조잔비(曹殘匪), 왕봉각(王鳳閣, 1897-1937) 잔당(殘黨)
    1937.11 11월 13일 1로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을 사살(擊斃). 김일성 잔당 100, 왕봉각 잔당 30 백두산 서쪽 김일성비 잔당 100, 집안(輯安) 서쪽 왕봉각 잔당
    1937.12 보병 제6, 7단이 무송(撫松) 서남지구에서 토벌중.
    지난달 북부 동변도에서 공산비단(共産匪團)의 거괴(巨魁) 김일성을 죽임(斃).
    김일성 잔당(殘黨), 최현(崔賢) 부하 100명 김일성 잔비(殘匪), 최현 부하
    1938.01 김일성은 사망(斃). 최위단(崔僞團), 조비잔당(曹匪殘黨), 김일성비 잔당 최단장(崔團長), 김잔비(金殘匪) 100, 조잔비(曹殘匪) 김잔비, 최단장, 조잔비
    1938.02 2월 4일 1로군 4사 1단장 최현(崔賢) 사살 김(金)과 최비(崔匪) 잔당 150, 조잔당 백두산 서편 김잔당 150, 그 서편에 조잔당 등 200
    1938.06 6월 29일 1로군 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투항
    통화성(通化省) : 김일성 잔당 김위사령비(金僞司令匪), 조위사령비(曹僞司令匪) 준동
    최잔당(崔殘黨) 50명, 김일성 조국안(曹國安, 1900~1937) 잔당 200명 김일성 조국안 잔당. 동쪽 임참모장
    1938.07 통화성 금천현(金川縣) 동남부 용강(龍崗)지대 김일성 잔당, 조비단 최현 잔당 60, 전주임, 임우성, 조위사령(曹僞司令) 김위사령(金僞司令) 조위사령 김위사령, 왕봉각 잔당, 최현 잔당

    위에서 잔비(殘匪) 또는 잔당(殘黨)은 두목이 전사하고 남은 부하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가짜 사령(僞司令), 가짜 단장(僞團長)등은 생존해 있는 두목을 비하해서 칭하는 말이다. 조잔비(曹殘匪)는 전사한 1로군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의 부하들이며,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부터 그의 부하들도 김일성 잔당이나 김잔비(金殘匪)로 칭하고 있다. 최단장(崔團長)은 최현(崔賢)이며, 1938년 2월 4일 그가 전사하자 남은 부하들을 최잔당(崔殘黨)이라 칭하고 있다.

    1938년 6, 7월이 되면 죽은 6사장 김일성의 잔당 중에 김위사령(金僞司令), 조위사령(曹僞司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생존해 있는 인물들이며, 죽은 김일성을 대신한 새로운 두목으로 볼 수 있다. 사장급 이상 지휘관이 거의 모두 희생된 1로군은 1938년 7월에 편제를 축소 개편하는데, 군(軍)과 사(師)를 없애고 대신 3개의 방면군(方面軍)을 두게 된다. 제1방면군장이 조아범(曹亞範, 1911 ~ 1940), 제2방면군장이 김일성(북한 김일성)이므로, 조위사령(曹僞司令), 김위사령(金僞司令)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은 1937년말까지 주요 지휘관 대부분을 잃고, 많은 병력 손실을 당하여 1938년에는 조국안, 김일성, 최현의 활동에 대한 신문보도가 거의 전무하다. 이것도 이들이 모두 전사했다는 증거이다. 이들이 살아있었다면 왜 유독 1938년에만 거의 아무 활동도 하지 않았겠는가? 1938년에 김일성의 이름이 나오는 보도가 어쩌다 한 두건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그가 살아있어서라기 보다는 위 만주국군월보에 나오는대로 김일성 잔당들의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신문에 다시 김일성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1939년에 들어서인데, 이는 6사장 김일성이 아닌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으로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같은 이름을 썼기 때문에 동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도 생겨나지만, 이런 것이 6사장 김일성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아니라는 증언들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부터 같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련군 88여단 출신자들의 후일 증언도 다수 있다. 당시는 김성주가 최고 권력자가 되기 전이므로 빨치산 동료들이 그의 신상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을 때라 그들은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 88여단 시절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이었 소련의 고려인 출신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은 6.25 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냈는데, 1991년 카자흐스탄의 고려일보에 실은 회상기 ≪피바다의 비화≫에서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전사하고, 그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129][130]
    유성철이 한소수교 직후인 1990년 10월 방한했을 당시에 한국일보에 연재된 그의 회상기에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다고 한 것처럼 나왔는데[203][204], 이 기사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와 인터뷰한 한국일보 기자와 연세대 최평길(崔平吉) 교수가 정리한 것이다. 소련으로 돌아간 유성철은 이 기사가 자신의 뜻을 잘못 전달한 것이라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피바다의 비화≫를 쓴다고 밝혔으므로, ≪피바다의 비화≫의 내용이 정확한 그의 증언이다.
    • 소련의 고려인으로 88여단 1대대장 김일성 아래 부대대장이었던 박성훈 대위(капитан Пак Сен Хун)는 진지첸(북한 김일성)은 1939년 가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만주 빨치산 영웅 김일성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했다고 증언하였다.[205] (1937년 가을에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후 북한에서 내무성 부상까지 지내다 1959년 소련으로 망명한 강상호(姜尙昊, 1910~2000)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205]
    박성훈(Пак Сен Хун)은 해방 후 북한으로 오지 않고 소련군에 남았기 때문에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88여단에서 1대대 대대장 김일성 아래 부대대장으로 있었다는 것은 다른 소련문헌에도 나온다.[206][207] 88여단의 부여단장, 부대대장 등 각 단위의 부책임자는 만주 빨치산 출신자 아닌 소련인을 임명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 평양 소련군정 당시 중좌로 김일성의 정치 상담역을 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는 1944년 88여단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여러 조선인들을 만났는데. 김일성의 이름은 전사한 존경받던 전임 게릴라 지도자의 이름에서 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67] 그는 또 이런 말을 북한 김일성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도 했다.[68]
    (러시아어를 구글로 영역하여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68]
    ............
    1930년대 중반부터 그(북한 김일성)는 김일성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국인들 사이에 대단한 권위를 가졌던 전사한 대장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Since the mid-30s, he began to use the pseudonym Kim Il Sung, taking the name of his deceased squad leader, who enjoyed great authority among Koreans.
    [С середины 30-х гг. стал пользоваться псевдонимом Ким Ир Сен, взяв фамилию своего погибшего командира отряда, пользовавшегося большим авторитетом у корейцев.]
    ............
    다른 동지들의 경우처럼 그(북한 김일성)도 존경받던 전사한 게릴라 부대 지휘관을 기념하여 그 이름을 따라 썼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The fact that, following the example of his other comrades-in-arms, he took this name in memory of his deceased beloved and respected guerrilla unit commander, he himself told me.
    [То что, он по примеру других своих боевых товарищей взял себе эту фамилию в память о своем погибшем любимом и уважаемом командире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он сам мне говорил.]
    러시아어 фамилию 은 보통 성(surname)을 의미하지만 때로는 이름(name), 성명(full name)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208] 여기서는 그가 쓰는 가명 김일성(псевдонимом Ким Ир Сен, pseudonym Kim Il Sung)이 죽은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쓴 것이라는 의미이며, 김씨 성을 물려받아 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원래부터 김씨이니 다른 사람의 성을 따라 쓴 것이 아니다.
    김성주(북한 김일성)가 죽은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물려받아 써서(襲名), 유명한 비수와 같은 사람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다는 1940년 4월 18일자 만선일보 기사
    •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18일자 기사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2)』에는 북한 김일성이 만주사변(1931년) 때 죽은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습명(襲名)하였다고 하였다. 1931년에는 빨치산의 활동도 없었고,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도 보이지 않는데다 북한 김일성도 아직 어릴 때이므로, 1937년 7월 지나사변(支那事變, 日支事變)[209] 발발 직후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의 이름을 습명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김성주를 죽은 유명한 비수 김일성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였다. 이 기사가 보도된 때 북한 김일성은 아직 만주에 있었고, 이 해 10월 23일에 소련으로 도망갔다. 만선일보는 5회에 걸쳐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를 싣고 있는데[126], 보천보사건에 대한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 것도 그가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거나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관련자들의 증언도 다수 있다.

    • 박갑동(朴甲東, 1919~ )은 혜산사건으로 투옥되었다 해방 직후 풀려난 박달(朴達, 1910~1960)박금철(朴金喆, 1911~1967 ?)에게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찍어다 보여 주었더니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이 아니라 했다고 증언하였다.[168][210][211][212] 그는 또 1974년 중앙일보 기고문에서도 "박금철은 현재 평양 김일성의 전대(前代)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 자"라고 하여[213],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 증언했다.
    • 박갑동(朴甲東, 1919~ )은 또 "1951년 평양에서 보천보를 김일성과 같이 습격한 군인과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이던 김일성은 전사하고 없어 출세도 못하고 만년 소령으로 있다."고 했다는 증언을 하였다.[214][215]
    • 박갑동(朴甲東, 1919~ )의 또 다른 증언 : 월북하여 문화선전성 구라파 부장으로 있다 남로당 숙청 때 산골로 추방된 그에게 밥을 해 주던 할머니가 자기 아들이 6사장 김일성의 부하로 1937년 전사했는데, 지금의 김일성은 다른 사람이라 자신은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있다고 하였다.[216]
    • 해방 직후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 ~ 2001은 1945년 10월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해방 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역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朴金喆)과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게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217]
    • 이진구(李鎭九, 1898~?) 목사(牧師)는 1941년 7월 함흥형무소에서 혜산사건으로 수감된 박달(朴達, 1910~1960)과 같은 감방에 있었는데, 그때 박달이 자기 나이는 31세, 김일성의 나이는 10년 위인 41세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은 1901년생 쯤으로 전사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나이와 거의 같다.[218]
    • 해방 직후 만주 통화성(通化省) 일대의 한인(韓人) 사이에서 전사한 김일성(金日成)의 추도비(追悼碑)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고 당시 모금에 참여했던 이창훈(李昌勳)이 증언하였다. 보천보 김일성이 통화성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전사했다.[219][186]

    일만군(日滿軍)의 집중 토벌로 항일연군 1로군 초기 편제의 주요 지휘관들은 총사령겸 1군 군장 양정우만 살아남고, 부사령겸 2군 군장 왕덕태 및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일본에 투항해 버렸으므로, 수많은 전사 기록과 증언이 있는 6사장 김일성만 혼자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다.

    국내 신문의 항일연군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는 1936년 가을부터 나오는데 1937년말 6사장 김일성 전사 보도 이후로는 이듬해 1938년말까지는 거의 보도가 없다. 그러다가 1939년 초부터 1940년 여름까지 기간에 다시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으로 추정됨)이다.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동일인이라면 1938년 1년 동안은 왜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거의 전무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으므로 이것도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의 상관에 다른 김일성이 있었다.

    허동찬(許東粲, 1932~ )은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에서 일제시대 간도 영사관 기록등을 근거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두 사람의 김일성이 있었으며, 그 중 직급이 낮은 쪽이 북한 김일성이고, 높은 쪽이 6사장 김일성이라고 하였다.[220][221] 그러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으로 다양한데다, 누가 누구인지 식별하기가 모호하여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후 발굴된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나[105], 김일성이 소련에서 작성한 이력서에서[106] 그의 소속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3단(2사 1단)이며 단장(團長) 방진성(方振聲) 아래에서 참모장, 정치위원 등을 지냈다고 한 것이 밝혀지면서[222] 당시 소속이 명확해져서 허동찬의 주장을 사실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935년 가을에 일본군의 토벌이 강화되자 부하 100명인 높은 직급의 김일성은 1935년말 북만(北滿)으로 가서 주보중(周保中)의 5군과 연합하여 혼성부대를 편성하며, 김일성은 지휘부에 참여한다.[223] 낮은 직급의 김일선(金一善, 북한 김일성)은 상관 방진성(方振聲)과 함께 1936년 1월까지도 왕청현(汪淸縣)에 있다가 2월경에 북만으로 가서 2군 지도부와 합류한다. 2군의 두 김일성은 같은 시기에 북만과 왕청현에 나누어져 있었으며, 먼저 북만으로 간 김일성이 상급자로 1936년 4월경 3사장(후에 6사장으로 개칭)이 된 것이 명백하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두 김일성의 존재는 최근 1935년 9월과 1936년 2월의 동북항일구국군(동북인민혁명군) 편성표가 발견되면서 더욱 명확해졌다.[224][225]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2군 제2(독립)사의 사장(師長)은 박춘산(朴春山)이고, 정치위원이 김일성(金一成)으로 밝혀지며, 그가 1936년 봄에 3사장(6사장)이 된다. 2사 1단장(3단장) 방진성(方振聲)의 부하로 나오는 김일선(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으로 그는 아직 사장이 될만한 경력이 미비했다.

    북한 김일성은 6사장이 될 수 없는 하위 직급에 있었다.

    북한 김일성 본인이 소련군 시절인 1942년에 직접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나[105], 1941년 1월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 작성한 이력서에도[106] 자신이 마치 6사장(師長)이 된 것처럼 적어놓아[222] 이때부터 경력 조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들 문건들에 그가 거친 직책들이 적혀있는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서 사장(師長)이 되기 전에 3단(團)의 참모장과 정치위원을 지냈다고 하였다. 당시 3단(2사 1단이라고도 함)의 단장(團長)은 중국인 방진성(方振聲)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2군 3사장(후에 6사장으로 개칭)에 임명된 것은 1936년 3~4월 경인데, 이 시기에 북한 김일성의 직책은 일본측 기록에도 3단의 참모장이나, 그 아래 제3련(連)의 연장(連長)으로 나온다.[221] 이런 낮은 직급에서는 사장으로 승진이 불가능하다. 사(師)를 대대급으로 본다면 단(團)은 그 하위의 중대, 연(連)은 그 아래 소대이다. 중대 참모나 소대장을 곧바로 대대장으로 승진시키는 군대는 어디에도 없다. 대대장이 되려면 대대 참모나 최소한 고참 중대장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부하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지휘관을 경력도 미비한 사람에게 시키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북한 김일성이 연장(連長)이나 3단(團)의 참모에서 단장(團長)이나 사(師)의 참모직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장(師長)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있을 수 없는 승진 사례에 해당된다.

    이런 측면에서도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일 수 밖에 없다. 북한 김일성이 사장 승진에 필요한 단장(團長)이나 사(師)의 참모를 지냈다면 이력서나 항련 제1로군 약사에 그보다 낮은 직급은 쓰면서 이를 적지 않았을 리도 없다.

    같은 시기 2군의 1사장이 된 안봉학(安鳳學, 1909~1937)은 1사 1단장에서 승진하였지만, 북한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3단장(2사 1단장이라고도 함) 중국인 방진성(方振聲)은 사장으로 승진하지도 못했다. 북한 김일성이 직속 상관 방진성을 제치고 3사장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당시 3사장이 된 김일성은 명백히 다른 사람이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맞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한 김일성은 전사한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을 사칭하여 그의 전과를 훔친 것이 확실하다.

    1937년 11월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한 이후 국내 신문에는 1938년 1년간은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다가 1939년부터 1940년 여름까지 다시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나온다. 다시 나타난 김일성은 제2방면군장으로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을 사칭한 북한 김일성으로 판단된다.[126][127] 일본군의 토벌로 항일연군 1로군은 수많은 병력과 지휘관을 잃고 1938년 7월 편제를 개편하였는데, 사장(師長)이란 직책은 없어지고 북한 김일성은 제2방면군장이 되었다.[128] 따라서 1939년 이후 다시 나타나 활동하고 있는 김일성, 즉 북한 김일성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있다. 만선일보 1940년 4월 18일자 기사에도 김성주가 김일성(金日成) 이름을 습명(襲名)하여, 그를 죽은 유명한 비수 김일성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는데[126], 이런 기록들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1939년 당시 일만(日滿) 경찰측은 북한 김일성의 청소년 시절 상관 이종락(李鍾洛, 1907~1940)과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의 동료 박차석(朴且石, 1909 ~ ?) 등을 동원하여 귀순 공작을 벌이고 있을 때이므로 그의 신원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126][127]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기록을 근거로 내세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의 6사장 김일성 신원 기록 (1939년 9월)

    서울의 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思想部)에서 간행한 1939년 9월 1일자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나온다.[226]

    함경남도 국경지대 압록강 대안(對岸)에 반거(蟠踞)하는 소위 김일성(金日成) 일파라 칭하는 무장단(武裝團)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1路軍) 제2군(第2軍) 제6사(第6師)로서 김일성(金日成)을 사장(師長), 위민생(魏民生)을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하는 한인(韓人) 중국인(中國人) 혼합의 무장단이다. [김일성(金日成)의 신원(身元)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본명(本名) 김성주(金成柱), 당 29세(當 29歲),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平安南道 大同郡 古坪面 南里) 출신(出身)으로 어릴 때 실부모(實父母)를 따라 간도(間島) 방면으로 이주하여 그 지방에서 성인(成人)이 되어 무장단(武裝團)에 투신(投身)한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그의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pp.8~9.≫[226]

    이는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상당히 유사하여,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라는 명확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227]

    『사상휘보 思想彙報』 제20호에 실린 혜산사건 보고 부문에는 김일성에 관한 본명, 나이, 출생지, 항일무장투쟁 투신과정 등의 경력이 거의 완전히 파악되어 있어, 과거 일각의 ‘가짜 김일성’ 논란에 대한 명확한 반론의 증거가 되고 있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pp.8~9 에 나오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은 북한 김일성과 유사하여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북한 김일성의 정확한 나이는 27세였고, 모친 강반석은 이미 1932년 7월 사망했지만, 출생지는 정확히 일치하여 이 기록의 김일성은 대체로 북한 김일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만하다.

    이 기록을 1977년에 처음 찾아낸 사람은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이다.[228] 김창순은 이를 근거로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보면서도, 그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도용한 가짜라는 입장은 견지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종석은 같은 기록을 근거로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229]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소문이 일찍부터 퍼져있었다는 것은 부인하고,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사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939년 9월 사상휘보의 기록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간행했으므로 권위 있는 기록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이는 수사나 재판 기록도 아니고, 필자도 미상인 단순한 보고서에 불과하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밝히고 있으니, 그중에는 1939년 당시 활동하고 있던 같은 이름을 쓰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오인한 설이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바로 이런 것을 채택한 경우로 볼 수 있다. 당시는 교통 통신 사정이 열악하여 총독부 검사국과 혜산사건을 수사한 함흥 경찰,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 보병7단 간에 원활한 정보 공유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 상당히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이미 죽은 사람의 신원을 새로 면밀히 조사할 방법도 없으니, 위와 같은 기록들은 당시 활동하고 있던 북한 김일성을 죽은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하며, 두 사람이 실제로 동일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다시 면밀히 조사한 끝에 얻은 결론이라면, 국내 대다수 신문이 이미 그가 전사했다고 보도한 것이 오보였다는 언급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위 글의 내용으로 봐서는 필자가 이러한 언론보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것을 정확한 기록으로 보기는 무리이다.

    혜산사건을 종합적으로 다룬 1938년 기록이 다수 있는데도[230][231][232], 6사장 김일성과 정치위원 위민생(魏民生) 등의 이름만 나올 뿐, 신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는데다,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지도 않은 서울의 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이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새로 정확히 조사해서 알아내었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1939년 9월의 사상휘보의 보고서는 작성자가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추가해 넣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흥법원의 혜산사건 1심 판결 일자가 1941년 8월 28일이므로[233] 위 사상휘보의 보고서가 작성된 1939년에는 함흥에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라 서울의 총독부 검사국에서는 사건 수사 기록이나 재판 서류들을 열람할 수가 없었을 것이므로 위와같은 기록은 불확실한 첩보에 의존한 탓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있다고 한 것도 이러한 사정의 반영일 것이다. 수사 대상 인원이 700여명이 넘어서 신문조서(訊問調書)가 2톤 트럭에 가득 실릴 정도로 방대하여[234] 기소를 담당한 검사조차 조서 내용을 제대로 검토해 보지도 못하고 경찰의 의견을 따라 기소장을 썼다고 하니,[235] 서울의 총독부 검사국이 그 내용을 자세히 알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위 기록이 간행된 1939년에는 북한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康盤石, 1892~1932)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도 "생존해있는 모양이다"고 한 것으로부터 이러한 정보는 당시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에 대한 귀순공작을 벌이던 일만(日滿) 경찰측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126][127] 당시 일만(日滿) 경찰은 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모 이보익(李寶益, 1876 ~ 1959)을 만주로 데려가서 귀순을 설득하도록 시도하기도 했다.[236][237] 귀순공작에 동원한 조모를 모친으로 착각해서 이런 말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김일성의 신원정보는 귀순공작에 중재자로 나섰던 김일성의 청소년 시절 상관 이종락(李鍾洛, 1907~1940)과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의 동료 박차석(朴且石, 1909 ~ ?)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만주에서 자라 중국말을 잘 했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2001)은 소년시절 김일성 귀순공작을 벌이던 특무기관장의 부탁으로 그들의 통역을 맡아 공작반을 따라 다녔는데, 그들이 데려온 김일성의 조모를 모친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기도 하다.[238] 이기건도 6사장 김일성의 전사 소식은 듣지 못했는지 귀순공작의 대상 제2방면군장 김일성을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상휘보의 필자도 6사장 김일성을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착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6사장 김일성의 전사소식은 당시 대부분 주요 신문들이 보도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잊혀져 1974년에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이 이 기사들을 재발견하여 소개하면서 비로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239][240]

    조선일보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위의 사상휘보 기록보다 2달여 앞선 1939년 6월 23일의 조선일보 기사[241]에는 당시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 지역에서 제2방면군장 김일성 부대와 대치하고 있던 일본 경찰 경비대 방문 당시 들은 내용으로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이라거나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는 등의 말이 나온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인 줄로 알고 종전까지 알려진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사상휘보는 거꾸로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1939년 9월 당시 활동 중이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것을 적어놓은 것이다. 신원 기록의 내용은 정반대이지만 양쪽 다 6사장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을 동일인으로 혼동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상휘보 기록에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고 한 것도 이런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질의응답 자료의 김일성 기록

    1944년(昭和19年) 11월 18일 일본제국의회 귀족원(貴族院) 사상조사위원회(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의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에도 김일성(金日成)의 본명은 金成桂(주:金成柱의 誤記인듯), 나이 33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생이며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장으로 1937년 혜산사건 당시 조선으로 침입했다고 나온다.[242] 이 기록 역시 위 사상휘보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6사장 김일성 전사 후에 다시 나타난 김일성을 동일인물로 오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1938년 이전의 6사장 김일성의 전사 또는 신원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아 20 여건 이상 되지만, 모두 그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기록이거나, 신원이 모스크바 공산 대학을 나왔다거나, 나이가 36세라거나 한 것들 뿐이고, 북한 김일성으로 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1939년 이후에야 6사장이 북한 김일성으로 볼만한 기록들이 나오는 것은 1939년 당시 활동하던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오인했기 때문으로 볼 수 밖에 없다. 1939년 이후의 이런 애매한 기록 한두 건이 1938년 이전의 20 여건이 넘는 기록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며 무시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사상휘보의 기록처럼 1939년 9월에 당시 활동하고 있던 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대체로 파악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2년 가량 앞서 기록된 수많은 6사장 김일성의 신원기록이나 전사기록도 못 믿을 이유는 없으므로, 대체로 맞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혜산사건 판결서의 6사장이 김성주(金成柱)라는 기록 (1941년 8월)

    1941년 8월 28일자 함흥지법의 혜산사건(惠山事件) 판결서(判決書)에 6사장의 이름이 김성주(金成柱)로 나오는데[233][243], 이는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맞으므로 그가 6사장이 맞다고 한다.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의 김일성(金日成) 4촌형(從兄) 김성보(金成甫) 체포 기사.
    함흥지방법원의 1941년 8월 28일자 혜산사건판결서의 일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이 본명 김성주(金成柱)로 적혀 있다.

    그러나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라는 것이 위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의 증언에도 나온다.[183]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원래 김성주(金聖柱)였으나[118] 본명도 보천보 김일성을 따라 김성주(金成柱)로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金聖柱 어느 쪽인지도 논란이 되나[244] 일제시대 기록들에는 두 가지가 다 나오므로[245][246] 어느 쪽이 맞는지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 김일성의 초등학교 학적부가 중국 장백현에 남아 있다고 하니 거기서 확인이 가능할 수 있으나 공개가 금지 되어 있다.[247]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도 흔히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두 사람이 본명이 같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본명이 같거나 유사한 것이 김일성 이름도 따라서 쓰는 빌미가 되었을 수도 있다.

    김일성(金日成)의 4촌형(從兄) 김성보(金成甫)를 검거했다는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 기사가 있는데[248], 북한 김일성에게는 4촌형이 없으므로,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인 6사장 김일성의 4촌형으로 추정된다. 북한 김일성의 형제와 4촌은 항렬이 柱자 이나, 6사장 김일성의 경우는 항렬이 成으로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집안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6사장 김일성은 체포되지 않아 혜산사건 재판의 피고인이 아니었으므로, 판결서에는 이름을 김성주(金成柱)로 기록한 것 외에 그의 신원에 대한 말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1심 판결일자가 1941년 8월 28일인 것도 후에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 6사장 김일성을 동일인으로 오인하여 판결문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때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도 소련으로 도주하고 난 이후이다.

    위증민(魏拯民)은 북한 김일성의 상급자

    6사장 김일성을 북한 김일성으로 볼 경우 위의 사상휘보나 혜산사건 판결서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사상휘보에는 6사(師)의 사장(師長)이 김일성(金日成), 정치위원이 위민생(魏民生)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249]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6사 사장이 김성주(金成柱), 정치위원이 위극민(魏極民)이라 했는데, 이는 위증민(魏拯民)의 拯자를 비슷한 모양의 極으로 잘못 쓴 것이다. (일제의 문헌에는 거의 대부분 위증민(魏拯民)을 위극민(魏極民)으로 잘못 적고 있다.) 문제는 위증민은 중공당이나 동북항일연군 1로군에서 북한 김일성보다 서열이 훨씬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6사장이 맞다면 사장보다 아래 직책인 정치위원을 맡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위증민이 6사의 정치위원이라면 사장 김일성은 위증민과 비슷하거나 높은 서열의 사람이어야 하므로 북한 김일성이 될 수 없다. 북한 김일성은 1938년 11월께에 1로군의 제2방면군장이 되는데, 위증민은 1로군 부사령을 맡았다가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 ~ 1940)가 전사한 후 총사령 대행을 맡았다. 따라서 6사의 정치위원이 위증민이라는 것은 사장 김일성이 위증민의 하급자인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6사장이 자신이라는 북한 김일성 자필 기록들의 신빙성에 대해

    북한 김일성이 소련군 시절 자필로 작성한 아래 두 문건에 6사장이 자신인 것처럼 기록해 놓아, 이것이 그가 6사장이 맞다는 근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 김일성(金日成) 자필 이력서 : 1941년 1월
    최근 주간조선 2551호(2019.04.01)에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넘어간 직후인 1941년 1월 작성한 자필이력서 "영도인원의 이력서(領導人員之歷履表)"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106] 한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인 북한 연구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Fyodor Tertitskiy)가 이 문서의 존재를 알고 부친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와 함께 소련 당국에 공개를 요청하여 이번에 그 내용이 처음 공개된 것이라 한다. 이 문건에 김일성 자신이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 : 1942년[105]
    중국 문헌에 나오는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는 북한 김일성이 1942년에 88여단장 주보중의 지시를 받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의 간행본에는 필자 이름도 삭제되어 있고, 내용에 金日成 이름이 있던 곳은 모두 "xxx"로 나오는데, 간행한 할 때 북한을 의식하여 김일성의 이름을 지운 것이라 한다. 여기에는 6사장 이름도 "xxx"로 되어 있으나 金日成을 지운 것이므로, 그 자신이 6사장이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105]

    이 문건들에는 김일성 최대의 항일전공이라 주장하는 보천보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학계 다수의 사람들은 이 문건이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되기 훨씬 이전에 작성한 것이므로 믿을만하며, 그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다는 확실한 증거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에 소개한대로 이 무렵 88여단의 김일성 대대(1대대)에 근무하면서 그의 전력에 대한 이야기를 빨치산 동료들로부터 충분히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성철과 1대대 부대대장 박성훈은 북한 김일성이 전사한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했다고 증언했다. 또 88여단에 가서 김일성과 조선인 대원들을 만난 적도 있고, 해방후 북한에서 김일성의 정치 담당 고문역할을 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는 그가 전사한 상관의 이름을 이어서 썼다는 말을 김일성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했으니[68], 자신이 6사장이라는 북한 김일성의 자필 기록은 믿기 어렵다. 유성철, 박성훈 및 메클레르 등이 굳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 증언할 이유가 없는데다, 서로 별 관계없는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한다는 것도 이 증언들이 사실인 것을 뒷받침한다. 뿐만아니라 이들의 증언은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당시 신문보도나 일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소련으로 월경해 조사받으면서 쓴 이력서에 거짓을 쓰면 처벌받으므로 사실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가 소련군88여단에서 쓴 다른 이력서도 많은데 내용이 중구난방이고 서로 일치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 가입 연도를 위의 이력서와 달리 1932년이나[250][251] 1935년으로 쓴 것도 있고[252], 중국 공산당이 아니라 당시 있지도 않았던 조선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 것도 있다.[107][253] 이력서 내용을 제대로 검증하는 절차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간행 김일성 전기가 검증의 대상일 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해방 전에 김일성 본인이 쓴 이 기록도 마찬가지로 검증대상이지 사실관계를 입증할 근거로 이용하기는 어렵다. 북한 김일성이 자신의 전력을 날조하기 시작한 것은 집권한 해방 후부터이니, 해방전 기록은 믿을만하다고 할 지도 모르겠으나, 죽은 상관의 이름을 물려받아 쓰는 사람이 그 행적까지 도용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작가들을 동원해 자신의 전기에 수없는 거짓 조작을 하도록 만든 사람이 해방전에는 그러지 않고 정직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 나이브하다. 따라서 북한 김일성의 해방전 자필 문건들은 이미 그 당시부터 자신의 경력을 조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뿐, 그가 6사장이 맞다는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또 소련은 '지도자'로 준비시키고 있었던 정치 군사 활동가들의 경력을 자주 날조했다는 증언도 있으므로 소련군 시절 작성된 김일성 관련 문서들에 나오는 특이한 내용들은 김일성 자필 문건이라도 검증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254]

    김일성에 대해 언급한 자료들은 정확히 사실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모스크바에 있는 외국 활동가들 사이에는 이야기를 과장 시키는 것이 유행이었다. 즉 모스크바(코민테른, 공산주의 당중앙위원회의 정치부와 스탈린 개인)는 장래의 '민족 영웅'과 다른 나라의 '지도자'로 준비시키고 있었던 정치 군사 활동가들의 진실한 삶의 여정을 비밀로 묻어두기 위해 경력을 날조하곤 했다.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다른 근거들에 대해

    이 외에 아래와 같은 사유들도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는 증거라고 한다.

    • 1로군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1940년 4월에 쓴 보고서에 전사한 간부들 명단이 나오지만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말은 없으므로[255] 그는 죽지 않았다.
      이 보고서에 전사한 사람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기록할 당시 기억나지 않아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당시는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동할 때이므로, 진짜 6사장의 죽음을 밝히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아 쓰는 것은 적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것이니 내부에서도 굳이 그것을 밝혀 기록할 이유도 없다.
    • 이상조 (李相朝, 1916~1996) 전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1989년 내한 당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지휘한 당사자가 맞다고 증언하였다.[256][257]
      ≪동아일보 1989년 9월 12일 3면 기사≫

      - 김일성(金日成)이 항일(抗日)투쟁 및 역사적 공적을 이룩한 진짜 인물인지, 만일 진짜 인물이라면 북한(北韓)이 김일성(金日成)에 대해 선전하고 있는 어느 부분이 진짜인지 알고 있는 점을 말해달라.

      『그 질문이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김일성(金日成)이냐고 묻는 것이라면 김일성(金日成)은 진짜이다. 김일성(金日成)이 일본군(日本軍)과 전투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日本)의 1백만 관동군이 김일성(金日成)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됐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김일성(金日成)의 군대는 적을 때는 20명에서 많을 때는 1백80명이었는데 해방후 북한(北韓)에 돌아왔을 때는 부인과 여자들까지합쳐 20명이 못됐다. 나는 그 당시 만주(滿洲) 공산당의 지시로 지하운동을 전개하면서 김일성(金日成)을 찾아 도와주라는 지시를 받고 사람들을 여러곳으로 보내 김일성(金日成)을 찾아 보았으나 김일성(金日成)은 어디에도 없었다. 김일성(金日成)은 제국주의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가장 중요한 때에 응당 고수해야 할 진지를 고수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현재의 김일성(金日成)이 만주(滿洲)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北韓)에서 선전하는 김일성(金日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북한(北韓)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의 전투 횟수를 10여만 회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그것을 인정하려면 매일 수십 번 전투를 했다는 계산이다. 이는 논리상 통하지 않으며 결국 거짓말이다.』
      이상조는 연안파로 김일성이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한 후 만주로 가서 해방 전에는 그를 만나 본 적이 없다. 유성철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항할 때 빨치산 동료들에게 자신의 전력에 대한 함구령을 내렸다고 하였다.[129] 이상조는 해방 후 1946년 1월 입북했는데,[258] 이때는 이미 아무도 공개적으로 김일성의 전력을 함부로 거론할 수 없게된 후라서 정확한 정보를 접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 허진(許眞, 1928~1997)도 저서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것이 맞다고 말한다.[259]
      허진(본명 허웅배)은 소련 유학생 시절인 1957년 11월 소련으로 망명하였으므로 북한 권력층의 내막을 잘 아는 위치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상조는 허진의 책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이라 하였으므로,[260] 이상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허진의 동료 유학생으로 역시 소련으로 망명한 김종훈은 1958년 1월 망명 당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김일성은 가짜"이고, 살인 방조자이며 전범이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고 증언하였다.[15]
    •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 )의 친구인 이용상(李容相, 1924 ~ 2005)[261]김영주가 자기 형이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했으므로 자신은 그 말을 믿는다고 했다[262]. 그러나 이용상의 글에 나오는 김영주의 진술은 그도 형(북한 김일성)과 같이 보천보 습격에 참여했다는 정도의 말로 보인다. 즉 그의 형이 보천보 습격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이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으므로, 그의 형 김성주는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그의 부하로 습격에 참여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이명영도 김일성 열전에서 부모와 둘째형 철주(哲柱)까지 잃은 김영주가 의지할 데가 없어 김일성(金日成) 부대에 있는 큰 형 김성주(金聖柱)를 따라 소년대원으로 있었다는 증언을 소개한 바 있다.[263] 김영주는 형과 같은 부대에 있다가 1937년 초 안도현 치안대장(安圖縣 治安隊長)에 이도선(李道善, 警佐)에게 붙잡혀서 그 후로 이도선의 형이자 부친 김형직의 친구였던 이도일(李道日)의 집에 몇년간 머물게 되므로 그 자신도 보천보 습격에 참여했다는 말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일본군 통역으로 있었던 것이 부끄러워 자신도 항일투쟁을 한 전력이 있는 것처럼 꾸며낸 말일 가능성이 크다. 이도선은 보천보 사건 1개월여 전인 1937년 4월 24일 사망하므로[264] 김영주는 그 이전에 붙잡힌 것이다.
      김영주는 자신의 형이 죽은 유명한 김일성의 이름을 물려받아 쓴 것이라고도 했는데[33], 김성주가 이름을 물려받을만한 죽은 유명한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6사장 김일성 밖에 없다.


    위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에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며, 북한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을 사칭하여 보천보 전공을 가로챈 것이 확실하다. 이에 반하는 증거로 보이는 기록이나 증언들도 근거가 미약하여 이러한 결론을 뒤집을 수는 없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전기 및 후기 편제 지휘관들

    1932년 만주국(満洲国)이 세워진 후 만주에는 각종 항일 무장단체들이 생겨나는데, 이들이 합종연횡하여 1군(軍) ~11군(軍)까지 만들어졌다. 이들이 다시 연합하여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되었다가 1936년에 3개 로군(路軍)으로 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발전한다.[265] 11개군 중 1군과 2군이 함께 1로군이 된다. 항일연군은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군대이지만 연안(延安)의 중공당 중앙과는 연락이 두절되어 소련의 코민테른 극동지부의 지휘를 받았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전기 및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의 운명을 비교해보면 그 조직에 속해 있었던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의 인물들의 실체가 보다 분명히 보인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군장(軍長)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266]
    1군 군장 양정우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267][268]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269]


    전기 편제에서 2군의 4, 5, 6사(師)는 원래 1, 2, 3사(師)였으나 1군과 함께 1로군으로 편성되면서 개칭한 것이다. 일본 관동군(関東軍)은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3년간 '만주국 치안숙정 3개년 계획(満洲国治安粛正三箇年計画)'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항일연군에 대한 집중적인 토벌로[270] 위 표에서와 같이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은 총사령 양정우만 살아 남고, 부사령 왕덕태와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해버렸다. 6사장 김일성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전사하자 김성주가 전사한 김일성의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세하여 보천보 전공을 가로챈 것이다.


    일제의 집중적 토벌로 대다수 지휘관과 수많은 병력을 잃은 1로군은 1938년 7월에 위의 아래 표와 같이 편제를 축소 개편한다. 이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도 일만군경이 합동작전으로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벌인 동남3성 (東南3省 = 吉林 通化 間島) 치안숙정공작 (治安肅正工作)으로[271] 간신히 살아남았던 총사령 양정우를 포함한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하고,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만 결사 항전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았다.

    김일성 회고록 속의 가짜 증거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1992년부터 1998년에 걸쳐 총 8권이 간행되었다. 이때는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거나 북한 김일성과는 신원이 다른 인물이라는 기사가 몇 가지 발굴되어 학계에 알려져 있을 때인데, 회고록에서는 이 기사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175][176]

    회고록의 내용 중에도 그가 보천보사건 당사자 6사장 김일성(金日成)이 아니라는 증거가 다수 있다. 당사자라면 모를 수 없는 일을 엉터리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측 2차 문헌에는 항일연군 1로군 2사장 조국안(曹國安)이 1936년 12월 21일 전사했다고 나오나[272], 1936년 12월 24일자 매일신보는 조국안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이 폭설에 막혀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였다. 이듬해 1937년에도 조국안 부대가 6사장 김일성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이 자주 신문에 보도되므로[273], 조국안의 전사 시점은 1936년말이 아닌 1937년 가을 무렵이 확실하다. 김일성 회고록에 조국안이 1936년 11월 전사했다고했는데[274],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맞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사건 직후인 1937년 6월 30일에 벌어진 소위 간삼봉 (間三峰) 전투에 관한 것이다.[275] 일본측 기록이나 김일성 회고록이나 모두 이 전투는 항일연군 1군 2사(師), 2군 4사와 김일성이 지휘하는 2군 6사가 일본군과 벌인 것이라고 한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회고록에는 당시 전투에 참여한 1군 2사장(師長) 조국안(曹國安, 1900~1937)이 그 전해인 1936년 11월 말에 죽었다고 하면서, 1937년 3월에 조아범(曹亞範, 1911~1940)이 후임 사장이 되었다고 했고,[274] 일본군 측 지휘관은 김석원(金錫源,1893~1978) 소좌라고 하였는데,[275] 이는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당시 같이 전투를 벌인 동료 지휘관도, 맞서 싸운 상대도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는 실제 전투를 수행한 6사장 김일성이 아닌 가짜일 수 밖에 없다. 2사장 조국안이 1936년에 죽고, 조아범이 그 후임 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중국측의 2차 문헌들에 보이는 것으로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은 당사자가 아니라서 자신의 기억에 없는 사안에 대해 중국측의 잘못된 고증을 무심코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측 기록에는 당시 전투 쌍방의 지휘관들이 자세히 나오는데, 항일연군측 지휘관은 김일성, 조국안, 최현이고, 일본군측 지휘관은 함흥 74연대에서 파견된 김소좌(김인욱(金仁旭)) 외에 혜산진 수비대장 쿠리타 대위(栗田 大尉)이다.[276]

    보천보사건을 전후하여 당시 국내 신문들은 1936년 가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김일성, 조국안 및 최현(崔賢)의 부대가 연합하여 활동하는 것을 상당히 자주 보도하고 있으며,[277][273][278][279] 심지어 보천보 사건도 김일성, 조국안, 최현 연합 비단이 일으켰다는 보도도 많다.[280] 이처럼 1936년 가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6사장 김일성과 늘 함께 활동한 조국안을 김일성 회고록에서 1936년 11월 죽었다고 한 것은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1937년 11월 18일자 신문들은 일제히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했고,[35] 1938년 2월에는 최현도 전사했다고 보도했으나,[177][178] 조국안의 전사에 대한 보도는 없다. 다만 이후 조국안의 활동에 대한 보도도 끊어졌다. 조국안이 1937년 가을 무렵 전사했다는 것은 일본측 기록에 나온다.[281][282] 또한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이 1940년 4월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조국안은 1937년에 죽고, 그의 후임사장은 조아범이 아니라 양준형(楊俊衡, 1910-1938)인데, 그도 1938년 전사했다고 하였다.[255]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36년 4월 3일자에 김일성이 2군 2사장(나중에 2군 6사장으로 개칭)이 되었고, 조아범은 2사(6사)의 정치위원이라고 나온다.[283] 이로보아 조아범은 2군 소속으로 6사장 김일성보다 서열이 아래이다. 그가 소속 군을 옮겨 1군의 2사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적고, 뒷받침하는 당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항일연군 1로군은 사장급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하여 1938년 7월 편제를 개편하여 제 1, 2, 3의 3개 방면군을 두기로 결정한다. 7월에 조아범이 제1방면군장이 되고, 11월에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 이듬해 진한장이 제3방면군장이 된다. 이로 보아 조아범은 북한 김일성보다는 서열이 분명히 높다. 조아범보다 서열이 높은 6사장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 동일인물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전사한 것이 맞다.

    또한 간삼봉 전투에 참가했던 일본군 지휘관은 당시 서울 용산연대(20사단 78연대) 소속이었던 김석원(金錫源,1893~1978)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함흥연대(19사단 74연대) 소속이었던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284] 이는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285] 여러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잘 밝혀져 있다.[286] 심지어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간행된 한재덕(韓載德)의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에도 김인욱 소좌라고 나와 있다.[287] 극작가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은 처남의 장인이 김인욱이라 당시 일에 대해서 김인욱 본인의 말을 정확히 전해 들었던 사람이다. 해방 직후 평양에 있을 때 김일성과 몇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 김일성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이 당사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288] 오영진에 의하면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김석원은 해방 전에는 북한 김일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6.25 때 남침한 그의 군대와 맞서 전투를 벌인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김석원이 간삼봉 전투 당사자라며 온갖 모욕적 언사를 동원해 비방하는 것은 김일성이 가짜라고 실토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회고록에는 혜산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동희 (馬東熙, 1912∼1938)가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다 죽자 그 부친 마호룡이 아들의 시신을 인수해 운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289] 그러나 혜산 사건으로 3년 징역을 받은 사람 중에 마호룡(馬虎龍, 1910~?), 마청룡(馬靑龍, 1910~?)이 있고,[290] 나이도 마동희와 거의 비슷하여 그의 부친이 될 수 없다. 동명이인이 되기에는 마씨나, 호룡이라는 이름이 너무 드물어 가능성도 지극히 희박하다. 당시 징역형을 받은 사람 중에는 마해원(馬海元)도 있는데, 드문 성인 마씨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집안의 동년배 사람들로 보이며, 부자 관계는 아니다.

    김일성 회고록의 이러한 뻔뻔한 거짓 기록들은 그가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 회고록 등에서는 6사장 김일성을 자신이라고 속이고 있으므로 6사장 김일성의 활동 기간인 1936~1937년 중 북한 김일성의 실제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만주 안도현의 치안대장으로 있던 이도선(李道善)이란 한인 간부가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2021)를 체포한 적이 있는데, 김영주는 김일성(金日成) 부대에 있는 큰 형 김성주(金聖柱)를 따라 소년 대원으로 있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으므로, 그가 6사장 김일성 부대에 대원으로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263]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김일성 관련 기사

    시인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 ~ 1958)이 간행하던 잡지 《삼천리(三千里)》에는 김일성에 관련된 기사가 4건이 나온다.

    1.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2. 귀순한 여당원과 김일성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운명(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삼천리 제10권 제11호》 (1938년 11월 01일)
    3. 김일성 비중에 무장 여군(金日成 匪中에 武裝 女群), 납치(拉致)된 二十五名 무사(無事)히 돌아오다 《삼천리(三千里) 제12권 제4호》 (1940년 04월 01일)
    4. 김일성 등 반국가자에게 권고문, 재만동포 백오십만의 총의로(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三千里) 제13권 제1호》 (1941년 01월 01일)

    이중 1937년 10월 기사는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혜산진(惠山鎭) 지국장 양일천(梁一泉, ? ~ 1946) 기자가 쓴 것으로, 보천보 사건 주역 제6사장 김일성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가 지휘하는 부대가 양민들에게 입힌 피해보도가 주이고, 후반부는 김일성 부대에 납치된 김정부(金鼎富) 노인이 1936년 12월에 김일성과 회견하며 나눈 문답이다.

    1938년 11월 기사는 기자 이름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역시 양일천이 쓴 것으로 보이며,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부분에 귀순한 여당원들은 지난 봄에 김일성을 처음 보았다고 하므로 이 사람은 1937년 11월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은 아닐 것이다. 뒷부분은 1937년 10월 기사에 이어지는 것으로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있던 김정부(金鼎富)가 1936년 12월에 김일성과 나눈 대화의 속편이다.

    양일천은 1938년 4월 동아일보 지국장을 사직하므로[291] 그 후에 쓴 기사로 보이는데,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과 1938년 가을 귀순한 여당원들이 말하는 김일성을 동일인으로 보는듯하나 자세한 취재는 하지 않은채 그냥 이름이 같으니 같은 사람으로 여긴 듯 하다. 이 기사의 김정부(金鼎富)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3장 6절 "애국지주 김정부"에 나오는 사람으로, 빨치산들에 협조적이었다며 칭찬하는 사람이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삼천리의 기사도 거론하지만 1936년 가을에 김정부를 납치한 사람은 6사장 김일성으로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삼천리 기사(1938년 11월)에는 1936년 12월의 회견 때 6사장 김일성이 김정부에게 자신의 신상에 대해 한 말로 당시 24세, 평양 출신이라고 했으니 북한 김일성과 유사한 점이 있어 보이나, 어릴 때 간도로 왔고, 장백현(長白縣)에 온지 30년이 되었다고도 했으니 나이가 35~6세는 될 것이므로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간도에 부모와 처자가 있다고 한 것은 당시 처자도 없고, 부모도 세상을 떠난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르다.

    김 (김정부): 「이렇게 농민을 붓들이 오고 하니 백성이 어떻게 산단 말이오」
    K (김일성): 「내가 장백현(長白縣)으로 온 지 30년이나 되는데 그 사정은 대강 알지요. (하략)
    김: 「그도 그러치만 우마(牛馬)를 잡어다 저럿케 굼겨 죽이니 너머도 잔인하지 않느냐」
    K: 「일 없소. 어느 새에 그것을 다 돌보겠소」
    김: 「지금 무슨 생(生)이요?」
    K: 「무슨 생(生)이랄게 업소. 시방 수물 네살이외다」 (3년 전 冬에 [註: 1936년 12월임])
    김: 「고향은?」
    K: 「평양 태생인데 유시(幼時)에 간도(間島)로 왔소. 지금 간도(間島)에 집이 있고 부모 다 처자 다 있소. 집에서는 생활도 넉넉한데 나는 보리죽을 먹으며 이 고생을 하오」
    김: 「어듸 金 씨요?」
    K: 「선산(善山) 金가 올시다」

    이 대화에서 6사장 김일성은 김정부에게 자신의 부모가 간도에 생존해 있다고 말하며, 김정부는 그의 부모를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자신이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 ~ 1926)으로부터 김정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하고, 김정부도 자신이 1926년에 이미 사망한 김형직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말한다.[292]

    《실례이지만 장군(김일성)은 이 졸부(김정부)의 과거를 어쩌면 그렇게도 잘 알고계시오?》

    《선생의 함자는 선친을 통해서도 듣고 오동진, 장철호, 강진건 선생들을 통해서도 익혀두었습니다.》

    《선친의 성함이 무엇이기에?》

    《김형직이라고 합니다. 우리 아버님께서 팔도구와 무송에 계실 때 선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런 변이라구야!…》

    김정부는 눈을 슴뻑거리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김장군이 김형직의 자제분이라는걸 모르고있었다니… 이 늙은게 몇해째 초야에 묻혀 속절없이 지냈더니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것도 모르는 속물이 되고말았소이다. 이렇건저렇건 장군의 선친과 나는 가까운 사이였지요. …오늘 선친이 밟고다니던 땅에 군사를 이끌고 온 장군을 보니 그 감격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이 대화는 명백히 지어낸 거짓이며, 북한 김일성은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김일성 회견 기사는 1937년 10월호의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1938년 11월호에 실린 속편 기사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김일성 회고록 편찬자들이 이를 보지 못하고 위와 같은 거짓 대화를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김정부는 만인(滿人) 유력자 천성보(千成寶) 등과 함께 1936년 8월 31일 십구도구 상관방자(十九道溝 上官房子)에서 김일성 부대에 납치 당했는데, 이듬해 3월 3일 일만(日滿) 혼성 토벌대가 이십도(二十道) 오지(奧地)의 김일성 부대 산채를 급습할 때 구출 되었다.[293] 김정부와 함께 기사에 나오는 정도익(鄭道益)은 1936년 11월 6일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었다가[294], 이듬해 3월 김정부와 같이 구출되었다.

    경성일보(京城日報) 1936년 9월 11일자 조간 5면 기사에는 김일성이 납치한 김정부(金鼎富)의 몸값으로 현금 1만원을 요구했다고 나온다. 또 이 기사에는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이라고 하여 북한 김일성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김정부는 십구도구 관방자(十九道溝 官房子)에 종산학교(宗山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하던 사람인데, 그가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가 있던 기간인 1937년 1월 25일 밤 김일성 부대가 관방자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민가 10 여호와 학교까지 불질러 태워버렸다.[295] 이로인해 마을주민들과 학생들이 많은 고초를 겪고 있고, 김일성 부대에서 구출되어 나온 김정부 노인도 학교 복구을 위해 노심초사한다는 보도기사가 있다.[296][297] 따라서 김일성과 김정부는 김일성 회고록에 나오는 것과 같이 우호적인 사이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김일성 회고록의 김정부 이야기는 삼천리 잡지를 참고하여 지어낸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1940년 4월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은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일텐데,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 일부를 풀어준 것에 대한 보도이다.

    1941년 1월 기사는 일본군에 쫓기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격문으로 비행기로 뿌린 것으로 보이는데, 김일성이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월경 도주한 뒤의 일이라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이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기사는 6사장 김일성이 활동할 당시의 것으로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김일성 부대가 항일투쟁을 빌미로 양민들을 대상으로 납치, 약탈, 방화, 살인을 자행하여 괴롭혔다는 증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1938년 12월 말에 비수(匪首) 김일성이 2명 존재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이 1938년(昭和 13年) 발간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의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에는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이 임강현(臨江縣, 부하 200 명)과, 무송현(撫松縣, 부하 300 명) 두 곳에 나온다.[298] 2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1명은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이고, 다른 1명은 이후 그와 같은 이름을 쓰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 된 것은 1938년 11월의 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1937년 9월말의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에는 장백현(長白縣)에 김일성(金日成)과 최현(崔賢)을 두목으로하는 300명의 비단(匪團), 조국안(曹國安)을 수령으로 하는 150명의 비단이 나와있다.[299] 여기에는 김일성이 한 곳에만 나오며, 조국안과 함께 활동하던 6사장 김일성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이 동시에 2명 나오는 1938년 12월말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는 1937년 11월 전사한 6사장 김일성에서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넘어가는 과도적 단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조금 더 후에 위에서 본 문제의 1939년 9월 1일자 사상휘보 제20호의 기록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6사장 김일성을 당시 활동하고 있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오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아래 기사는 평양에 사는 한일우(韓一宇)가 1945년 12월 김일성을 회견한 후 서울의 월간잡지 『민성(民聲)』[10]에 기고한 글인데, 남한 사람들에게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도는데 대한 해명과 함께 그를 선전할 목적의 기고로 보인다. 당시 북한 실정을 감안할 때 필자가 독자적으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고 김일성 본인이나 소련군이 지시하고, 기고문 내용까지 검토를 거쳤을 것이다. 소련제25군사령부 특별정치선전공작대 부책임자였던 레오니트 바신(1915~2006)은 후일 남한에 퍼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공작을 했다고 증언했는데[300], 남한 잡지에 이런 회견문을 싣게 한 것도 그러한 공작의 일환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도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과거 경력은 전혀 이야기 하지 않고, 현재와 장래의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낭설이 나왔다고 변명하였다. 또 항일투쟁을 한 김일성이 맞다는 근거를 댈 필요를 느껴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1935년 2월의 동흥사건(東興事件)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며, 동흥사건의 주역은 사건 당시부터 이홍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이 맞다면 불과 8년전 자신이 주도한 사건은 제쳐두고 10년전 남이 주도한 사건을 자신이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6사장 김일성이 아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을 몰라서 동흥사건을 끌어와 자신이 주도했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모르고 있는 북한 김일성은 6사장이 아니고, 본인도 모르는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6.01.20 (국립중앙도서관) p.4
    서울에서 간행되던 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1946.01.20)에 실린 평양 거주 한일우(韓一宇)의 기고문 《개선(凱旋)한 우리 팔티산 명장(名將) 김일성장군회견기(金日成將軍會見記)》
    (전략)...

    그러면서도 自己의 過去, 또는 體驗談은 極히 避하고, 다만 現在와 將來의 「일」에만 關心을 가지었기 때문에, 한때 「가짜 金日成」이라는 流說까지 낳았었다。
    이것은 最近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하여 確實히 「같은」 金日成將軍임이 分明하여졌다。

    一九三x年 겨울 어떤날 새벽, 平北 鴨綠江 上流 東興에는 突然 對岸 滿洲로부터 反滿軍 一隊가 警察署를 襲擊하여 警察官 多數를 죽이고 武器多數를 빼앗아가지고 凱旋의 나팔을 불며 悠悠히 돌아갔다。 日本軍警은 이 反滿軍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을 때에、 돌아온 人質이 다음같은 事實을 말하였다----
    어떤 깊은 山中 密林地帶로 끌려갔는데、 거기에는 큰 共産村落이 있어 男女老若이 모두 즐기며 살고 있다는 것、 모두 每日같이 工夫를 하고 軍隊訓鍊을 한다는 것、 人質에게 씩錢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 그밖에 軍人中에는 十八九歲의 美少女가 있어서 白馬를 타고 部下를 指揮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 等。

    그리고 頭目은 中國人이 아니라 實로 朝鮮人이요、 그 나이도 二十臺의 靑年 「金日成」이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이란 이름을 筆者가 알기는 바로 이때부터이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아닌 동흥사건을 주도했다는 말은 월간잡지 『이북통신(以北通信)』(1948.07.01)에도 나오는데 위 기사의 인용으로 보인다.[301]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나, 소련 시절에 쓴 각종 보고서나 이력서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당시 그 자신이 사건 자체를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이 또한 그가 6사장이 아닌 증거가 될 수 있다.

    필자 한일우는 자신이 동흥사건 때부터 김일성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거짓말이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이 대부분 보천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매우 많지만, 북한 김일성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이것이 유일한 것같다. 그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것이다. 보천보 사건도 유사한 여타 사건처럼 곧 잊혀지고 북한 김일성 본인조차 알지도 못했지만 나중에 재발견하여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날조 조작한 것이다. 이후의 수많은 역사 날조도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으로 집권하여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데 대한 컴플렉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한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의 어느 김일성 전기에도 그가 원주(元柱)라는 이름도 썼다고 한 것은 없는 것 같고, 이런 내용의 평양법원 판결문도 알려진 것이 없다. 어차피 남한 사람들이 확인할 수도 없는 평양법원 판결문을 핑계대어 남한에서도 확산되는 그가 가짜라는 소문에 급히 대응하느라 지어낸 말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의 전사한 6사장 김일성 사칭 배경

    위와 같이 여러 기록이나 증언들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면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할 여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에 쫓겨 항일연군 잔존세력이 소련으로 도피한 후에 북한 김일성이 직접 작성한 "항련제1로군 약사"나 이력서 등에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적어 놓은 것이 다수 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을텐데도 이렇게 허위로 적을 수 있었던데는 항일연군 지도부 인사들의 묵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하는 1937년 11월 당시 항일연군 1로군 측은 일본군의 지속적인 토벌로 제2군 군장(軍長) 왕덕태(王德泰)가 전사하고, 휘하 6개사의 사장(師長) 거의 모두가 전사하거나 일본측에 투항해버려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항일연군 지도부에서도 6사장 김일성이 죽지 않은 것처럼 위장할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 대다수 지휘관들이 전사하거나 일본에 투항해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자신들 사기진작을 위해서나 일본측을 속이기 위해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 행세를 하도록 하여 마치 그가 죽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는 것을 원했거나 용인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또한 제2방면군장인 북한 김일성은 우연히도 이전부터 6사장 김일성과 한국어로 발음이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므로, 그에게 굳이 김일성 아닌 다른 이름으로 바꾸라고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6사장과 같은 이름을 썼던 북한 김일성은 만주시절부터나 아니면 적어도 1940년 말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부터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세하며 그렇게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위에서 본대로 6사장 김일성이 활동할 당시의 신원 기록과 전사 기록을 모두 모아서 보면 그가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인 것이 명확히 보이지만, 당시에는 각처에 흩어져 있는 여러 기록들을 모아서 종합적으로 검토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만주국 측도 6사장 김일성 전사 이후 다시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 때문에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혼동하여 6사장이 죽지 않은 것으로 오인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논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이 체포되어 전향했다는 조선일보 1940년 7월 5일자 석간1의 2면 기사.[302]. 이명영은 이 기사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했으나, 김혜순은 북한 김일성의 김정숙 이전의 전처가 맞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김혜순은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귀순 후 한 때 자신을 체포한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살며, 나가시마의 처와도 친해졌다고 한다.[303][304]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은 북한 김일성 연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저서이다. 이 책에서 그는 월남민들로부터 들은 다양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증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시발점으로 함남 단천 출신의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본명 金昌希,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 장군을 들었고[144][145],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은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일제시대 만주에서 빨치산에 투신하기 전 유년기 및 청소년 시절의 김성주를 알던 사람들을 만나 당시의 그의 행적에 관한 증언들을 채록하였는데, 이것은 빨치산 투신 이전의 북한 김일성에 관한 가장 믿을만한 기록이다. 나아가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도 해방 후 처음으로 밝혔다.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입수한 위 사진 속의 안경 낀 인물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알려졌다.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이지만 북한도 이 사진을 변조하여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내놓고 있다.[304][305]

    이때문에 1980년대 이후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일단의 신진학자들로부터 박정희 정권의 사주를 받아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어용학자로 몰려 집중적으로 매도 당했다. 해방 직후부터 월남민들을 통해 널리 알려졌던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부인하고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명영의 연구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일방적으로 매도만 했지 제대로 학문적으로 반박은 하지 못했다. 많은 자료들이 전산화된 후 새로 발굴된 모든 기록들과 공산권 붕괴후 나온 기록과 증언들까지 모아서 비교 검토해보면 이명영의 주장이 대부분 옳다는 것이 다시 확인된다.

    다만 같은 책에서 이명영은 제2방면 군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제3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는데[304], 이점은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명영이 제시한 근거는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토벌 작전 중 노획한 사진 속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안경을 낀 심한 고도 근시로[305] 북한 김일성으로 보기 어렵고,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에 대한 기사에 나오는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302] 등이다.

    북한이나 중국은 사진 속 문제의 인물이 북한 김일성이라 하고 있고, 서대숙도 이런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306] 하지만 이 인물이 북한 김일성이 아닌 것은 비교적 분명해 보이고,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서 1952년 11월 정리한 사료집 속의 이 사진 옆에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현재의 (북한) 김일성과 상당히 다르다[現在の金日成と大分異る]"고 적어 놓았다. 안경 낀 같은 인물이 나오는 다른 사진도 있는데[307][308], 역시 북한 김일성과는 같은 인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라는 일본군측 주장이 정말 잘 확인된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당시 노조에 토벌대가 이러한 판단을 한 근거는 귀순하거나 체포된 동북항일연군 인물들의 증언인데[304], 이들이 정직하게 증언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1940년 4월 체포된 김혜순은 지금은 김정숙 이전의 북한 김일성의 처가 맞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아래에 서술함), 이러한 것은 1990년 이전에는 알기 어려웠다. 조선일보 기사에 체포된 김혜순이 1930년 간도폭동 당시 용정(龍井)에서 김일성을 만났다고 했는데, 간도폭동에 간여한 김일성(金一星)은 북한 김일성과 다른인물이 확실하다. 김혜순 본인의 후일 증언으로는 그녀와 북한 김일성이 만난 것은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일이며 간도폭동 때가 아니다.[309] 아마 체포된 김혜순이 일본측에 혼란을 주기 위해 고의로 속이는 증언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아가 새로 발굴된 많은 문서들에 나오는 1939~1940년간 활동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0년 4월 만선일보(滿鮮日報)에 5회에 걸쳐 연재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와[126] 김일성 귀순 공작을 벌였던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의 1949년 반민특위 증언에는[127]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에 대한 귀순공작 내용이 나온다. 1939년 ~ 1940년 1월간 귀순 공작에 중재인으로 투입된 사람이 북한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과, 왕년의 상관 이종락 및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의 동료 박차석(朴且石, 1909 ~ ?)이므로 공작대상은 북한 김일성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지위도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의 신임을 받는 인물로 1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린 사장(師長)급 정도이므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 정도 지위의 인물로 1로군에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김일성이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이종락과 박차석을 만나본 김일성은 한때 귀순을 결심하기까지 하지만 상관 양정우에게 보고가 들어가서 그의 제지로 성사되지 못하고, 이종락은 양정우에게 사살당했다.

    또 일본의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는 많은 노조에(野副) 토벌대 문서가 올라있는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신원을 명확히 적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항일연군 1로군 조직표들 중 김일성의 나이가 1939년 표에는 28세[310], 1940년 표에는 29세[128] 라고 적힌 것이 있는데, 이는 북한 김일성의 나이와 거의 같고, 당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나이가 30대 중반이라는 이명영의 주장과는 다르다. 또 조직표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 주변 인물들도 다수가 북한 김일성의 측근들이다.[311]


    일본군 측의 기록에 의하면 1940년말 소련으로 도주하여 토벌에 살아남은 1로군 최고위 생존자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다.[311]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1974년)에서 이 김일성이 소련의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 교장을 지내다 1944~45년께 죽었다고 하였다.[304] 그러나 그가 1974년에는 접할 수 없었던 공산권 붕괴후 공개된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소련군 88여단 관련 기록과 증언에는 그런 인물은 흔적도 보이지 않고, 소련으로 도주한 1로군 인물들 중 최고위 생존자는 북한 김일성이다. 그 덕택에 그는 1로군을 을 대표하는 인물로 인정받아 88여단에서 대위 계급으로 제1영(營)의 영장(營長)이 되었고, 1로군 출신으로 북한 김일성보다 상급자는 없다.[312]

    일본군 토벌대가 작성한 최종 토벌성과(討伐成果) 기록에 포함된 1로군 조직표는 최고위 인물들인 1로군 비서처장(祕書處長) 전광(全光, 吳成崙), 경위려장(警衛旅長) 박득범(朴得範), 제2방면군 참모 임수산(林守山) 등이 귀순 또는 투항한 후에 작성된 것이므로 상당히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311]. 여기에는 북한 김일성의 수하인 오백룡(吳白龍), 박덕산(朴德山, 金一), 강위룡(姜胃龍)과 처였던 여자청년부장 김혜순 등도 나오므로 북한 김일성도 어딘가에 이름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만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면 그는 1로군 조직표에 이름도 못 올릴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었어야 하는데, 소련으로 넘어가서 갑자기 1로군을 대표하는 인사가 되어 88여단 제1영 영장(營長)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1로군 최고위 생존자가 일본측 기록과 소련, 중국의 기록에 모두 이름이 같은 김일성으로 나오므로 이는 동일인물이 분명하며 바로 북한 김일성이 되어야 한다.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 기록에서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 이명영이 말한 그런 인물이 되기는 어렵다.


    북한 김일성이 입소 직후인 1941년 1월 ~ 3월 간에 열린 항일연군 병력의 소련군 수용 문제를 다루는 제2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1로군 대표로 참석했다는 사실도[313] 그가 입소한 1로군 인물들 중 최고위급이었다는 증거이므로, 그가 제2방면군장이 맞다는 것은 별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주서 소련으로 월경한 1로군 인원 통계표에도 1940년 10월 23일에 입소한 북한 김일성 한 사람만 나온다.[267][268] 만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면 월경한 1로군 중 최상급자인 그의 이름이 누락될 수 없다는 점도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증거이다.

    사상휘보 1939년 9월호와 같은 기록은[226] 당시 북한 김일성이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 인물로 오인될 정도로 항일연군 내에서 제2방면 군장과 같은 상당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명영이 최초에 제시한 의문점인 사진 속 인물의 정체는 해명되어야 할 필요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제2방면군장은 북한 김일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는 안경 낀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의 사진에 대해 이 인물이 김일성이 아닌, 항일연군 2군 6사의 참모장 왕작주(王作舟)라는 주장을 내놓았지만, 2군 6사에 그러한 참모장이 있었는지, 그가 사진 속 인물이라는 근거는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314]

    일본군의 토벌에 맞서 결사항전하는 상관과 동료 및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은 비겁한 도망자 북한 김일성이 상관과 동료들이 모두 전사한 덕에 소련군 88여단에서 1로군을 대표하게 된 것이 그의 출세의 바탕이 되었다. 지휘관이 전투지구를 무단 이탈하여 도주한 것은 사형을 면할 수 없는 중죄이지만 김일성을 처벌할 권한을 가진 직속 상관들이 모두 전사하여 그는 처벌도 모면하였다. 만주에서 2로군 총사령이었던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은 김일성의 직속 상관이 아닌 관계로 처벌 권한이 없어 1941년 3월 12일자로 1로군 총사령 대행 위증민(魏拯民)에게 김일성을 적절히 처벌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하였으나[315][268][316], 위증민은 며칠 전인 3월 8일에 사망하였으므로 실효성이 없었다. 이런 일들도 북한 김일성이 당시 무명의 하급 전사가 아니라 상당한 위치에 있는 지휘관 즉 제2방면 군장이 맞다는 방증이다.

    공개된 소련 문헌에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 교장 김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명영은 소련으로 도주한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은 보로쉴로프(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에 분산 수용되었고, 1로군계는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에 수용되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교장으로 있다 1944년경 병사했다고 했으나[317][318], 많은 소련과 중국측 기록이 공개된 후로 그러한 김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이명영의 주장은 만주국 첩보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데[319][320], 정확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항일연군 인원은 거의 모두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 (A 야영)과, 보로쉴로프(우수리스크) 근처 라즈돌노예 (당시 이름 하마탄) 마을에 있던 남야영(B 야영) 두 곳에 분산 수용되었다가, 1942년 7월 뱌츠코예의 북야영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모두 거기에 소속된다. 빨치산들을 수용했던 곳은 남, 북야영과 88여단이 있을 뿐이고, 오케안스카야 야영학교라는 곳은 소련이나 중국측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그 학교 교장이라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도 또한 기록에 없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쪽 해안을 따라 조금만 북상하면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オケヤンスカヤ)라는 마을이 나오는데[321], 일본측 첩보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피서지로, 소련으로 넘어온 항일연군 인원들 중 부상자나 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와 요양(療養)을 하는 야영이 있었다고 하며[322], 거기에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교장으로 있다가 1944년경 사망했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로 보인다.

    또 이명영은 오케안스카야에 도착한 제1로군 계를 제1지대로 편성하고,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제1 지대장 겸 제1 중대장을 맡았다고 했으나[317], 실제로는 제1로군계는 처음에 보로쉴로프 인근의 남야영에 수용되며, 북한 김일성이 1로군 잔존세력으로 편성된 지대의 장을 맡았고, 나중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제1대대 대대장을 맡게 된다. 북한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온 1로군계 잔존 인물들 중에는 최상급자였으며, 따라서 그가 제2방면군장이 맞을 수 밖에 없다. 이명영이 「김일성(金日成 列傳)」을 내는 1974년 당시는 국교가 없는 적성국가 소련이나 중공 측 기록을 전혀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한된 일본이나 만주국 정보만을 근거로 오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의 후일담

    1940년 4월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으로 보이는 인물.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8권에 나오는 사진이다. 4권에는 《꾀꼬리》로 소문난 반일자위대원 김혜순으로만 나온다.[323]

    탈북한 장해성 국제펜 망명북한펜센터 이사장이 북한에 있을 때 김정숙 이전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金惠順)을 1980년대 중반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한 글이 있다.

    김정숙 이전의 김일성의 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풍문도 많고, 사실 여부도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글의 내용은 비교적 믿을만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인터뷰에 나오는 김일성의 전처 김혜순은 1940년 7월 조선일보의 김일성 처 제포기사에 난 김혜순(金惠順)과 동일인물로 볼 수 있고,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에 생존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일보 기사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기 어렵고, 장해성의 김혜순 인터뷰 기록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 맞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25일에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첫번째가 김혜순(77세), 3번째가 박정숙(78세)이다.

    재미 언론인이었던 문명자(1930 ~ 2008)가 북한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일성과 같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박정숙(78세)과 김혜순(77세)을 인터뷰 했는데[325] 이 사람들은 바로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난 체포된 김일성 처 김혜순(金惠順, 당시 22세)과 그녀를 간호하던 박정숙(朴貞淑, 당시 24세)과 동일 인물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인터뷰에는 김혜순이 김일성의 처였다거나, 일본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고,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등 북한의 선전을 답습하는 말 뿐이다. 하지만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이름과 나이가 조선일보 기사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므로 조선일보 기사의 김혜순도 북한 김일성과 같이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것, 나아가 체포된 김혜순의 남편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같다. 인터뷰 기사에는 노년의 김혜순과 박정숙의 사진까지 실려있는데, 시차는 크지만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에 나오는 젊은 김혜순의 사진과 얼굴 윤곽이 비슷하여 동일인물로 볼 만하다.

    빨치산 중에는 정숙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3명이 있어서 구분하기 위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은 "까만(깜장) 정숙"이라 불리었다는데, 박정숙이 자신은 "파란 정숙"이었다고 말한다. 이로 보아 이 사람들은 북한 김일성이나 그 후처 김정숙과 같이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는 노조에 토벌대가 김혜순을 이용해 김일성을 유인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그녀를 죽였다고 주장한다.[326][327] 전에는 그녀를 죽인 사람이 김석원(金錫源, 1893 ~ 1978)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했다.[328] 그러나 이런 말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김혜순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까지도 북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325]

    결론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 그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서섰을 때부터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그런 말을 들을만한 충분한 사유가 있었음에도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종전의 통념이 뒤집혀서 진짜로 둔갑해 있다.

    북한 김일성은 처음 출현 당시의 말 그대로 가짜가 맞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해방 후 평양에 온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아무도 모를 뿐만 아니라, 나이도 33세에 불과한데도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기 때문이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으므로 실제로 어떤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더라도 나이가 맞지 않아 동일 인물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했다. 당시 북한 김일성의 정확한 관등 성명은 소련군 진지첸 대위였음에도 이는 끝까지 숨겼고, 지금도 숨기고 있다.

    소련군정 당시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 공작을 총지휘했던 레베데프 소장도 후일 증언에서 진지첸 대위가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칭하게 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일찍부터 유명했다는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고,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이 출현하기 전에 그와 다른 김일성 이름이 이미 유명했다는 당시 기록도 많이 발굴되었다. 위에서 본대로 바로 이 김일성 장군이 이름은 유명하지만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평양에 온 진지첸 대위가 자신이 그 인물 행세를 한 것이 입증되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해방 직후 중국에 있을 때 친구 이용상에게 [부친이 자기 형제들에게 김일성 장군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지첸 대위는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같은 사람이 되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 평양에 와서 자신이 그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한 것이다.

    물론 진지첸 대위가 1938년경부터 한자로 金日成이라 적는 이름을 쓴 것은 확인이 되지만 그는 이를 김일성 아닌 중국식 발음 진지첸으로 읽었고, 장군이라는 칭호를 들은 적도 없다.

    이런 모든 것을 감안하면 처음 알려졌던 대로 북한 김일성은 틀림없는 가짜라고 할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이 득세한 배경

    진짜설이 득세한 배경

    1. 현대사를 직접 체험하고, 일제시대 유명한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세대의 퇴장
    2. 어릴 때부터 북한 김일성에 익숙해진 세대로 교체
    3.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에 해당하는 실존인물을 지목하기가 어려움
    4. 북한 김일성이 일제시대 실제로 金日成이란 이름으로 만주서 활동한 것이 밝혀져 진짜라 주장할 근거가 생김.
    5. 외국서 활동한 서대숙, 와다 하루키 등의 저명한 학자들이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
    6. 소련과 동구 공산권 붕괴 및 중국의 개방으로 반공의식이 약화되고, 공산주의자를 미화하는 풍조가 생김.

    김일성을 진짜로 만들기 위한 사실 왜곡

    1.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다는 많은 증언과 기록들을 무시하거나 외면.
    2.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 때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행하여 김일성 이름이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
    3.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맞고, 이름이 유명하니 사람들이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알았다고 우김.
    4. 만주는 겨울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등 기후가 혹독하여 나이든 장군이 활동할 수 없으니 나이든 김일성 장군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보천보 사건 때 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하여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크거나 비슷한 규모의 사건인 1935년 2월의 동흥습격사건, 1934년 1월의 토성습격사건 때도 여러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오늘날 남북한 모두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는 것처럼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도 잊혀져 있었다는 것은 당시 기록들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이 사건을 자신의 엄청난 항일 공적으로 포장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다시 알려지고 유명하게 된 것이다. 동흥습격사건, 토성습격사건 때도 다수 신문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완전히 잊혀져 있는 것처럼 문맹률도 80%를 상회하고, 신문구독자가 얼마 되지도 않던 당시 호외에 이름이 한번 난다고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일은 없었다.

    북한 김일성은 6사장은 아니고, 제2방면군장은 맞다.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막연히 만주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했다는 정도 외에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해방 직후 북한 기록에도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질만한 일을 한 것이 없고, 보천보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거나 중요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미군정이나 남한 사람들은 그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보천보 사건도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었으니 그 때문에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 후로도 북한의 주장은 믿을 수 없고, 남한에서는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그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의 구체적 행적은 지금도 논란이 무성하고, 객관적 자료가 없어 잘 밝혀지지 않는 베일에 가려진 부분도 많다.

    가장 논란이 되던 쟁점은 그가 과연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과 동일인물이 맞느냐는 것이었다. 이 두 사안에 대해서는 위에서 본대로 지금까지 나온 모든 자료와 증언들을 검토하여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요약하면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1938년 후반부터 활동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6사장 김일성에 대한 기록은 1938년 이전 것도 충분히 많은데, 북한 김일성으로 볼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고, 모두 그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거나, 함경남도 갑산군의 회린면 또는 혜산진 출신이라거나, 나이가 30대 중반,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거나 소련서 군사교육을 받았다는 등의 말만 나온다. 1938년 이전 기록과 후일 관련자들의 증언까지 종합하면 6사장 김일성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근거로 제시되는 기록도 두어건 있기는 하지만 모두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활동할 시기의 것이다. 이는 다시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과 이름이 같으니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 착각하여 나온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이 맞다면 수많은 당시 기록들과 후일 관련자들의 증언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정부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근거없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하는 사람들은 흔히 '한국정부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아무 근거없이 지어낸 말에 지나지 않는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1945년 10월 14일 그가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선날부터 나오기 시작했으며, 월남민들을 통해 남한에도 전해져 정부 수립 이전 미군정 시기에 이미 김일성이 가짜라는 기록이 셀 수도 없이 많다.

    또 '친일파 박정희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미군정이나 그 후의 한국 정부는 북한 김일성이 무슨 항일투쟁을 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북한도 정확한 것을 알리지 않고 숨기는 것이 많았다. 이 때문에 그의 전력은 많은 연구조사가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명확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는데,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한국 정부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을 알면서도 숨겼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박정희 정부 시절에 해방 후 처음으로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라며 1937년의 보천보 사건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밝혀진 바로는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며, 남의 공을 가로챈 것이다.

    또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나오는 이승만, 박정희 정부 시절의 교과서가 없다는 것은 한홍구도 인정하고 있으므로 학교에서의 반공교육 때문에 사람들이 김일성이 가짜라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별로 없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해방 직후부터 수많은 월남민 등을 통해 일반에 퍼진 상식이었지 반공교육의 산물은 아닌 것이다.

    김일성은 비판하자면 비판거리가 무궁무진한 사람이다. 그가 소련군 무력의 일방적 도움을 받아 소련의 꼭두각시(괴뢰)로 집권한 사실이나, 6.25 남침의 전범으로 수백만 동족을 살상했다는 것이나, 북한 주민들의 생활의 자유를 대부분 박탈하고 노예화하고 있다는 것 등등. 실제로 반공교육시간에도 그에 대한 비판은 이런 것에 주안점을 두었으며, 이는 사실 적시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그를 가짜로까지 만들어서 비판할 필요성도 없었다.

    최종 요약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 무명인물인데다 지지세력도 전무하여, 이런 치명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 행세를 했기 때문에 가짜가 맞다. 또한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지만 보천보 사건이 대단한 일도 못될 뿐더러 그는 그 사건의 주역인 6사장 김일성도 아니기 때문에 가짜이기도 하다. 다만 그가 1938년 말부터 기록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말 소련으로 도주한 후 해방될 때까지 5년간 소련군에 복무하며 아무런 항일투쟁을 하지도 않았다. 그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중국을 위해 한 것이며, 이후 소련군인으로 소련의 목적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이다. 어릴 때 조선을 떠나 만주에서 성장하여 조선말도 더듬거릴 정도로 조선인이란 의식도 희박했고, 일제가 패망해도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도 않던 사람이었으므로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소련군에 잘 보여 운좋게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어 북한 주민들에게 귀속되어야할 주권을 강탈해 간 것이다.

    [보론 1] 중국 조선족들의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에 대해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들은 선대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참여하여 항일투쟁한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들 중 일부가 해방 후 북한 집권 세력이 된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연유에서 인지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329] 그러나 국내에서 김일성 가짜설이 대두된 것은 해방후 평양에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의 일이므로 만주의 조선족들이 그 자세한 상황을 알기 어렵다. 그들의 선대 중에는 북한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동료도 있고 하니, 그가 해방 후 국내에서 김일성이라 자칭한 것에 아무 문제도 못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국내 사람들은 항일연군의 김일성은 누군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평양에 나타나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가짜라 한 것이다.

    만주에서 해방 전에도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가 활동한 지역도 주로 남만주나 동만주의 조선 국경 근처 지역에 한정되는데다 당시는 교통 통신 사정도 열악하고, 문맹률도 높아 신문보는 사람도 소수에 지나지 않아 김일성 이름이 알려진다해도 일부 사람들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에서 북한 김일성의 위치도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와 같은 사장(師長)급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수도없이 많았고, 더 중요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도 많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제치고 그의 이름만 유명해질 이유도 없었다. 뿐만아니라 김일성은 세불리하여 위기에 몰리자 결사항전하는 상관과 동료, 부히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한 비겁자였다. 정식으로 군법에 회부되었다면 사형을 면하기 어려운 중범죄자에 속했다. 해방 후 김일성이 북한 집권자가 되고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그가 만주에서 활동한 전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마치 해방 전부터 그가 엄청나게 유명하고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조선족들은 항일연군에서 김일성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며 자신들의 선대가 김일성과 같이 활동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한국 사회에 퍼진 그가 가짜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같다. 김일성이 소련군의 도움으로 북한 집권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름을 아는 만주 조선족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만주에서 조선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공당을 위해 투쟁한 김일성의 이름이 만주 조선족 사이에는 좀 알려졌을지 모르나, 이를 확대해석하여 조선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다. 김일성은 만주에 있을 때는 일본이 패망하면 중공당이 안도현장(安圖縣長) 자리나 하나 주기를 원했고,[330] 소련군에 있을 때는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는 것이 꿈이었던[331] 조선독립운동과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중국말에는 능했으나 조선말은 서툴고 잘 하지도 못했다.[332][333][334]

    조선족들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틀림없다고도 한다. 그들은 북한 김일성과 같이 항일연군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이라면서 인용하거나, 중국측 자료들을 주로 인용한다. 자신들 주장과 상반되는 일본측 자료는 거짓 정보에 속아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항일연군은 부대가 만주 지역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일본군에 쫓겨 근거지도 자주 이동해야 하는데다 상호 연락이 쉽지도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체 상황을 대강이나마 파악하는 사람도 최고위급 지휘관들 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전사했다. 특히 김일성이 속했던 1로군의 지휘관과 주요 참모들은 김일성만 제외하고 거의 모두 전사하거나 일본에 투항해버렸으므로, 1로군의 역사에 대해 전모를 정확히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살아 남지 못했다.

    항일연군 사람들은 간부급 이상을 빼고는 무학자들이 대부분이어서 당시 사정을 문서로 기록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토벌에 쫓겨 다니느라 작성된 문서들도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주요 기밀을 문서로 작성했다가 일본군에 넘어가면 부대 전체가 몰살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기밀 사항을 문서로 작성하는 것도 되도록이면 피했다. 후대에 채록한 항일연군 인사들의 증언은 당대 기록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당시로부터 30~40년 이내라면 그런대로 믿을만하겠으나, 50~60년 후의 증언이라면 당사자의 증언이라도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정확하다고 믿기 어렵다. 고의로 거짓을 말하지 않더라도 처음부터 사안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고, 세월이 지나고 여러 일들을 겪으며 기억이 변형되기도 하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도 불가피하여 증언의 신뢰도는 낮아진다. 주변 인물들에게 전해진 증언은 신뢰도가 더욱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둔필승총(鈍筆勝聰), 즉 "우둔한 글솜씨로라도 남긴 기록이 총명한 기억력보다 낫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일본군이 노획하여 『사상휘보(思想彙報)』제25호(1940년 12월)에 실린 1로군(第一路軍) 부사령(副司令) 위증민(魏拯民, 1909~1941.03.08)이 1940년 4월 작성한 보고서에는 1로군 총사령(總司令) 양정우(楊靖宇, 1905~1940.02.23)가 생사불명이라고 하여[255] 그가 2월 23일에 전사한지 한참이 지나서도 부사령이 총사령의 전사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총사령 양정우가 전사했으면 부사령 위증민은 자신이 1로군을 총지휘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이런 막중한 사실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1로군 최고위 지휘관조차 당시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보다 훨씬 아래 하급자들의 후일 증언이 반드시 정확하다고 믿기는 어렵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1路軍) 부사령(副司令) 위증민(魏拯民)이 1940년 4월 코민테른 주재(駐在) 중공대표단(中共代表團)에 보낸 ‘상황보고(狀況報吿)’

    3. 간부문제(幹部問題)

    과거 사장(師長) 이상의 희생자(1936년 이후)로서는 총사령(總司令) 양정우(楊靖宇) 동지의 생사불명(生死不明) 외에 王德泰(1路軍副司令官 겸 2 軍長 및 中共黨滿洲省委員), 李學中(2軍 정치부 주임 兼 中共黨滿洲省委員), 宋鐵岩(1軍정치부주임). 李東光(中共黨滿洲省委 조직부장), 孫英浩(中共黨滿洲省委 청년부장), 李仁光(1軍 1師長), 韓豪(1軍 1師長), 李參謀長(1軍 1師長), 曹國安(1軍 2師長), 楊俊衡(1軍 2師長), 王仁(1軍 3師長), 固政治委員(1軍 3師), 周樹東(2軍 4師長), 侯國忠(2軍 5師副師長) 등이며 그밖에 團部 및 連部의 幹部 희생자가 다수에 달하고 있다.[255]思想彙報 第25號(1940년 12월) p.65 번역문 - 滿洲 抗日聯軍 硏究(金昌順)

    소련으로 피난한 항일연군의 최고 지휘자가 된 주보중(周保中)은 또한 1로군 총사령대행 위증민이 1941년 3월 8일에 전사하고, 또다른 1로군 최고위 간부 전광(全光) 즉 오성륜(吳成崙)은 같은 해 1월 30일에 일본군에 투항한 사실을 그해 9월말까지도 모르고 있다.[335] 또한 자신이 아끼던 간부 진한장(陳翰章)이 1940년 12월 8일에 전사한 것도 모르고 그에게 1941년 3월 12일에 편지를 발신하고 있기도 하다.[336] 주보중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는 비교적 믿을만한 문헌으로 여겨지지만 맨 뒤의 "후기(后记)"에 책이 공개출판되는 것을 감안하여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기술적 처리를 했다고 자인하고 있다.[337] 중국측이 지극히 신중을 기하여야 할 사안은 북한 김일성이 관련된 기록 밖에 없다.

    만주 항일연군의 소련 피난 당시 소련측 대표로 이들의 수용문제를 다루었던 소련측 인물로 왕신림(王新林)이란 암호명을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두고 1944년 소련군 정찰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왕신림(王新林)이 준 표창을 받았던 여영준(呂英俊)은 왕신림이 주보중(周保中)이라고 증언했다.[338][268] 왕신림이란 암호명을 쓰던 사람은 두 사람이 있었는데, 전임자는 누군지 잘 확인되지 않지만 1941년초에 부임해온 새로운 왕신림은 극동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 이 사람이 88여단의 창설부터 운영 및 폐쇄까지 직접 관장한 당사자이므로, 여영준의 주장은 사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것이다.

    또한 항일연군 여자 대원들의 김정일 출생지에 대한 후일 증언도 서로 엇갈리고, 사실과 어긋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의 출생지나 생년을 확정하는 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런 사례만 보아도 항일연군 출신자들의 후일 증언은 불확실한 것이 많아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다른 문헌들과 비교해서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

    반면에 일본측은 수많은 투항자나 체포한 사람들을 조사하여 기록을 작성하고 이를 부서간에 공유하고 보존하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항일연군측 보다는 훨씬 더 정확한 기록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도 항일연군 토벌을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필수이므로 고의로 왜곡해서 기록했을 리는 없다. 실제로 중국측 자료와 일본측 자료를 비교해보면 원본 그대로가 아닌 후대에 편집한 것이 많은 중국 자료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더 많이 보이고, 고증이 부실한 것도 상당히 자주 보인다. 반면에, 일본측 자료는 당시 기록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어 후대의 인위적 첨삭에 대한 의심은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 믿을만하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양측 자료를 상호 비교해서 검토하고, 상충하는 기록에 대해서는 어느 일방을 매도만 할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더 합당한지에 대해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조선족들이 항일연군 조선인들만 연구하고 평가하는 배경

    조선족들의 항일투쟁사 연구는 대부분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조선계 인물들에 국한되어 있다. 같은 만주에서 항일연군과 비슷한 시기 또는 그 이전에 활동한 민족계열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고,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계열의 연안파나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아마도 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이 북한의 핵심권력층이 되어 중국 공산당 정권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 선대가 중국 공산당 정권으로부터도 인정받는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 북한의 핵심 권력층과도 유대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하다. 조선족들은 중국인들에게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조선계 인물 중에도 영웅적 활동을 한 인물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고, 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북한 김일성이므로 그가 가짜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또한 김일성이 집권 후 남침전쟁을 벌여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일제와의 투쟁에서도 살아남은 수많은 항일투사들을 잔인하게 숙청, 처형한 것에 대해서도 아무 문제 의식도 없고, 오로지 김일성과 항일연군의 항일투쟁만 강조하는 배경도 이런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천보 습격 지휘관은 6사 참모장 왕작주(王作舟)라는 유순호의 주장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 1962~ )는 『김일성 1912~1945 (중)』에서 1937년 6월의 보천보 습격 지휘관은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6사 참모장 왕작주(王作舟)라고 주장했다.[339][340][341] 이는 뚜렷한 기록적 근거는 없이 동북항일연군 생존자들의 후일 회고담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며,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또 이러한 주장은 6사장 김일성이 지휘한 것이라는 수많은 당시 신문보도나 일본측 당대 기록과 어긋나므로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일본측이 검거한 혜산사건 연루자들만도 739명이나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조사해서 밝힌 지휘관이 틀렸다고 믿기는 어렵다. 수많은 인원이 담합해서 사건의 지휘관을 실제와 다르게 진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요인물들은 담합하지 못하게 분리해서 조사하는 것은 수사의 기본이다.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당시 6사 참모장이 왕작주(王作舟) 아닌 허모(許某)라고 되어 있다.[233]

    또 『김일성 1912~1945 (상)』(서울셀렉션, 2020)에는 김일성이 조선혁명군 고동뢰 소대장을 살해한 일에 대한 조선족 김영철의 증언이 나오는데, 증언 내용이 당시 기록들과 상충하여 믿기 어렵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참고)

    이것은 당시 일에 직접 관계했다는 사람들의 후일 증언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반드시 검증을 해야한다는 생생한 실례이다.

    한편 유순호는 자신의 조부가 만주 경찰관으로 있으면서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김일성과 협력했다고 말한다.[342]

    그(유순호)의 할아버지가 1930년에 연변에서 아주 젊은 나이에 만주 경찰 총좌를 지냈다고 합니다. 총좌면 현 경찰서장급인데 1930년에 연변에서 5.30폭동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왔는데, 하루는 김일성이란 인물이 나타나서 체포된 사람 몇 명을 좀 꺼내달라고 부탁하더랍니다.

    처음엔 거절했는데, 퇴근해 집에 가보니 집에다 일본산 과일 박스 몇 상자를 가져다 놓았다는 겁니다.

    당시엔 뇌물을 먹고 일처리를 해주지 않으면 보복을 당하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이 요구한 사람들을 뽑아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코가 꿰어서 이후부터 김일성이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리고 그 김일성은 경찰서장의 두 여동생까지 흡수해 반일투쟁에 나서게 했습니다. 여동생들까지 부탁하니 어쩔 수 없이 유순호의 할아버지는 빨치산 심부름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연변에선 아편이 돈처럼 거래될 때였는데, 하루는 아편을 빨치산에 전달해주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그래서 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두 여동생은 일제와 싸우다 모두 장열하게 전사했습니다. 유순호 작가의 할아버지가 해방이 돼 감옥에서 나오고 보니 그만 자기가 친일파로 돼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십 년 동안 중국 당중앙에 계속 성분 바꿔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나는 항일부대를 돕다가 7년 감옥생활을 했고, 나의 두 여동생은 항일투쟁에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내가 왜 친일파냐” 이런 내용입니다.

    1962년생인 유순호 작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계속 신소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좀 크니까 의문이 생겨서 할아버지에게 물었답니다.“아니, 할아버지. 김일성 도왔다면서요. 북조선에 가서 김일성보고 증명해달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 쉬면서 “저 북조선의 김일성은 내가 도와준 그 김일성이 아니다”고 하더랍니다.

    하지만 유순호는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은 부정하고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알던 다른 김일성이 어떤 사람인지는 밝힌 바가 없다.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의 해방전 김일성 일대기이다. 저자는 항일연군 관련 중국측 기록이나 관련자들 200여명의 후일 증언과 각국의 여러 문헌을 토대로 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무리한 주장이나 명백한 오류도 많이 발견되며,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중국공산당은 일제침략의 최대 수혜자, 모택동은 일본침공에 감사한다고 해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일제침략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국민당군에 토벌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일제침략 덕택에 세력을 보존하여 일본패망 후 벌어진 국공 내전에서 이겨 중국을 장악했으니 이들은 일제침략의 최대 수혜자이다. 이때문에 모택동은 후에 일본침공에 감사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항일투쟁 아닌 중국 적화였기 때문에 그들의 적은 일본 보다는 중국 국민당 정부였다. 이같은 중공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한 김일성같은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더구나 동북항일연군 출신 여영준(呂英俊)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김일성은 만주가 해방되면 중공당이 안도현장(安圖縣長) 자리나 하나 주기를 원했다고 하니[330] 그는 만주의 현장 자리라도 하나 얻기 위해 투쟁한 것이지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것도 아니다.

    중국에서 일본군과 주로 싸운 군대는 장개석의 국민당군이고, 중공군은 일본과의 전투는 되도록 피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군에 스파이를 심어 정보를 빼내어 일본군에 비싼 돈을 받고 팔아넘기기도 했다. 일본 패전 후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패하여 중국 본토가 적화되는 바람에 중공군이 항일전을 벌인 주축이었던 것처럼 역사가 조작되었다.

    「일본군의 침공에 감사한다」(1956 년 9 월 4 일의 모택동 발언) 중국 연구 전문가가 그린 「건국의 아버지」의 진실。: 「日本軍の進攻に感謝する」(1956年9月4日の毛沢東発言)中国研究の第一人者が描いた「建国の父」の真実。[344]
    2015년 엔도 선생은 <<모택동: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毛沢東 : 日本軍と共謀した男)>>란 제목의 역작을 발표했다. 선생의 세밀한 논증에 따르면, 중일전쟁 시기 모택동은 일본 외무성 지부에 반한민(潘漢民, 1906-1977) 등의 중공 스파이를 심어서 장개석 및 국민당 관련 고급 정보를 비싼 가격에 일제에게 넘기고 거액의 뒷돈을 챙겼으며, 일본과의 밀약을 체결해 중국공산당의 세력 확장만을 꾀했다. 한 논평에 따르면, 이 책은 “중국연구의 제1인자가 철저히 조사한 자료로 들려주는 중국공산당의 불편한 진실”이다.
    천하의 모택동이 항일전쟁 시기 “일제와 공모를 했다니?" 엔도 선생의 논증은 그야말로 폭군의 목을 겨눈 날카로운 비수가 아닐 수 없다. 과연 모택동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장춘에서 아사한 수십 만 난민들 틈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가녀린 소녀가 70년이 지난 지금 동경대학 국제관계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자신을 단죄하리란 사실을!

    모택동의 말이 아니라도 중공당은 일제침략의 가장 큰 수혜자이므로 일본의 침략에 대해 감사한다는 표현이 이상할 것도 없다. 일제 침략이 아니었으면 중공군은 일찌감치 토벌되어 중국이 공산화되는 참사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북한도 공산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중공당은 집권 후 중국인들에게 일제보다 몇 백배 이상 큰 피해를 입혔다. 모택동의 폭정으로 7천만명 가량의 중국인이 죽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345], 그들이 마치 항일투쟁의 영웅이라도 되는 듯이 찬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들이 누구를 위해 무슨 투쟁을 했다는 것인가?

    일본 패전 후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으면 동북항일연군은 위대한 항일군이 아니라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방화, 살인 등을 자행하던 공산 비적으로 전락했을 것이고, 조선족들도 항일연군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을 것이다. 만주의 조선족들은 국공 내전 당시 중공군이 장춘을 포위하여 아사 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수십만명이 굶어 죽은 일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뿐만아니라 김일성 등 소련으로 도주했던 조선인 만주 빨치산들이 해방 후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북한의 핵심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김일성 일족의 사유물로 만든 것과,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70년 이상 북한 주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는 사실에도 눈감지 말아야 한다.

    중국공산당과 김일성 일당은 중국인이나 조선인들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제를 대신해 자신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을 했을 뿐이다. 그들이 잡은 무소불위의 권력은 중국의 태자당(太子黨)과 북한의 김일성 일족에게 세습되어 오늘날까지 중국과 북한 인민들의 고혈을 빨고, 한국과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집권 후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일제보다 몇 배 더 큰 피해를 입혔으니 일본의 패전에 기여한 바도 거의 없는 그들의 항일투쟁이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보론 2] 손원태의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에 대해

    손원태(1914~2004)손정도(孫貞道, 1882~1931) 목사의 차남이고,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손원일(孫元一, 1909~1980) 제독의 동생이다. 손정도 목사는 만주 길림 시절 1920년대 중후반 어린 김일성을 많이 후원해주었다고 하며, 손원태는 당시 김일성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손원태는 부친 손정도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김성주(김일성)가 유격대에 들어간 후로는 서로 만난 적이 없으며,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 무려 60여년만인 1991년에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을 다시 만났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때 김정일의 초청으로 다시 평양에 가서 조문했으며, 그의 묘도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다. 부친과 형의 묘가 동작동 현충원에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의 사후 16년 뒤에 아래와 같은 책이 출간되었는데, 내용이 좀 이해하기 어렵다.

    저자 손원태는 이 책을 왜 저술했는가? 그는 아직도 대한민국에 만연한 가짜뉴스, ‘김일성 장군과 김성주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라는 왜곡을 바로잡고 싶어 했다. 김성주라는 인물을 16세 때부터 만나 친형제처럼 지냈고(그때 당시 손원태는 14세였다), 그 어릴 적 됨됨이와 행적을 지켜보아 오다가 당시 「동아일보」에 기사로도 나온 김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을 가까이서 전해 들었고, 61년이 지난 만년에 다시 만났던 그 김성주-김일성 장군이 동일 인물임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울러 정적을 무참히 숙청하는 악마 같은 인물이 아닌 인간미가 있고, 주체성에 입각하여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이민위천(以民爲天)으로 표현한 인민을 정말 받드는 그의 통치철학을 곁에서 보고 듣고 이를 널리 밝히고자 했다.
    재미의사 고 손원태 박사 회고록 출간
    청·노년 시절 교류했던 경험·기억모아
    "김일성 행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 판단"

    북한 김일성은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하도 거짓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일제시대에 무슨 항일투쟁을 했는지는 많은 연구가 나온 지금도 아직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김성주가 만주 빨치산 시절 金日成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 것은 이제 확실히 밝혀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1920년 무렵부터 국내의 한국인들 사이에 유명했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 맞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무려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해방될 때까지 목숨걸고 투쟁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는 항일투사의 말석에도 끼워주기 힘든 사람이다.

    손원태는 1931년 무렵 김일성과 헤어진 후로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직접 알지는 못하고 신문에 난 정도를 본 것같다. 당시 신문기사들은 지금도 남아 있고, 내용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이다. 손원태는 그가 만주에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맞으니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맞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 김일성 장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기가 언제인지 등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그가 1920년경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리고 김성주가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 이름을 김일성 아닌 중국 발음 진지첸으로 읽었고, 소련군 문서에 나오는 그의 이름도 진지첸(Цзин Жи-чэн)이다. 해방당시 그의 정확한 신원은 소련군 진지첸 대위인데도 불구하고,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여 대중을 속였다.

    또 김일성이 정적을 무수히 죽인 것도 사실이고,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한 것도 사실인데 무슨 이민위천(以民爲天)의 통치철학을 실행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해방 후 그가 죽인 좌파계열 항일투사들의 수는 아마도 일제가 죽인 수 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손원태는 김일성이 마적질과 구분이 안되는 항일 투쟁을 좀 했다고 세습전제왕조를 만들어 인민을 노예로 부릴 권리를 자동적으로 가지는 것으로 아는 것같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는 자기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소련이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워 만들어준 것이라는 것도 알았어야 했다.

    손원태는 어린 시절에 알던 김일성과 말년에 만나본 김일성에 대한 자신의 좋은 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김일성을 그런 훌륭한 인물로 알아달라는 취지로 위의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악마도 자기 친구에게는 잘 해주기 마련이니, 이 때문에 친구가 악마를 훌륭한 사람으로 여길 수는 있겠으나, 공개적으로 책까지 내서 악마를 변호하려드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자신은 자유민주 세계에서 편하게 일생을 살았으면서 어떻게 전쟁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항일투쟁을 구실로 세습전제왕조를 만들어 인민을 노예로 부린 자를 옹호하는지 알 수 없다. 손원태는 자기 친구 김일성 때문에 죽은 수백만 동족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가? 조선독립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마적질과 다름없는 김일성의 항일투쟁만 지고지선의 가치인가?

    참고 자료

    김일성 가짜설 옹호 문헌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2-2』 統一論叢 4집 (淑明女子大學校 統一問題硏究所, 1987년), pp. 21-59
    (원문보기를 택하면 볼 수 있음.)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1회] : 林 択三, 《独裁者・金日成の伝説-1-》, 自由 / 「自由」編集委員会 編 25(7) 1983.07 pp.128~136
    [103회] : 林 択三, 《金日成の虚像-103完-日本の敗戦と朝鮮解放》, 自由 / 「自由」編集委員会 編 36(4) 1994.04 pp.67~75
    동북아역사넷을 林擇三으로 검색하면 소장한 「自由」지 일부를 확인 가능.
    일부는 한국어로 「共産圈硏究」에 실리기도 함. : 국회도서관 林擇三으로 검색
    林 択三(林擇三)은 허동찬(許東粲, 1932~ )의 필명이다.[347]

    김일성 진짜설 옹호 문헌

    김일성이 가짜라고 하면 "친일파 꿀꿀이"가 되는 모양이다.
    가짜 김일성론의 대두
    가짜 김일성론의 내용과 폐해
    역사적 사실규명의 어려움

    김일성 미화 TV 방송 프로그램

    2000년 이후 좌파들이 득세하면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과거 정부의 조작이라 매도 당하고, 그가 굉장한 항일투쟁을 했으며, 진짜가 맞다고 하는 미화풍조가 휩쓸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가 아래 방송들에 잘 나타난다. 한국에서 김일성과 관련한 역사조작은 과거 냉전 시대가 아니라 소위 민주화 세력들이 집권한 후부터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 제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근거자료집 : 국회도서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 48 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2002년 2월 3일 (일)
    김일성 가짜설은 박정희 정권 하 <이명영>이라는 학자에 의해 집대성된다.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복무했던 박정희에게는 북한 김일성의 항일경력이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김일성을 연구한 이명영은 <4인의 김일성론>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보천보 습격 사건을 이끈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명영의 저서를 참고한 허동찬 역시 <2인의 김일성론>을 주장하며 북한의 김일성이 자신의 항일투쟁을 과장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부터 나왔으며, 이미 미군정 당시부터 가짜로 기록한 문건이 수두룩한데도, MBC는 엉뚱하게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경력을 끌어와서 김일성과 비교하며 교묘하게 박정희 폄하와 김일성 미화를 동시에 하고 있다. 가짜 김일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처음 이루어진 것은 그 전에는 6.25 전쟁 피해 복구에 매달려야 했고, 가난하던 시절 먹고 살기에 급급해 연구할 여건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인데도, 마치 박정희 정부가 일부러 가짜로 만들라고 지시해서 그런 연구가 나온 것처럼 말한다.

    외부 링크

    -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1.3 1.4 김일성 환영대회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4~90
    2. 2.0 2.1 유성철(兪成哲, 1917-1995)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 pp.22~23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 미의회도서관) : 유성철소련군 88여단의 김일성 대대 통역관으로 있었으며, 해방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내다 소련파 숙청 때 소련으로 돌아 갔다.
    3. 3.0 3.1 장준익(張浚翼),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서문당, 1991년 11월 1일) p.40 : 저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역임함.
    4.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9회) 1962.05.12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0회) 1962.05.13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1회) 1962.05.14 동아일보 2면
    5.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가르친 박일(朴一) 전 김일성대 부총장은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6. 金日成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연합뉴스 1991-08-14 (레오니드 바신이 시사월간지 ‘소베르센노 세크레트노’(極秘)에 기고한 ‘대위동무’라는 글의 내용) : 조선인 출신 소련군장교들은 金의 조선어지식이 매우 부족한 반면 중국어는 꽤 알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이 때문에 상황에 적절한 연설문 작성에 애를 먹었다.
    7. 7.0 7.1 7.2 7.3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룡,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룡 (朴吉龍, 1920~)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8. 8.0 8.1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1990년 ~ 2004년 : 5번 김허남(金許男, 1920~2020)의 증언 참고
    9. 9.0 9.1 김일성의 외가쪽 10촌 동생인 탈북자 강명도(康明道)는 채널A 방송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북한 김일성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가로챈 가짜이며, 자기 집안에서도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137회 2014년 8월 3일 방영
    10. 10.0 10.1 민성(民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6.01.20 (국립중앙도서관)
    12. 잡지 『민성(民聲)』 제3권 제4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7.05.01 (국립중앙도서관): p.14 《北朝鮮踏査期(完)》 / 本社特派記者 朴燦植 (1946년 10월 29일 ~ 12월 6일 기간 북한 방문기)
    13. 1946년 3월 25일 토지개혁사업 시행 및 주민들의 동향에 대한 총결보고 : 북한 소련군정 이그나티예프 대좌가 작성한 보고서
    14. 1946년 8월 황해도 소련군사령부 대표 및 경무사령부 사업보고 황해도 경무사령관이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에게 올린 보고서
    15. 15.0 15.1 (심층취재) 소련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6.25전쟁 진실 안 뒤 반감 싹터” VOA 2017.8.4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
    16. 소련파 입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 중앙일보 1991.11.14 종합 11면
    17. '가짜 김일성' 설은 박헌영이 원조? 프레시안 2012.02.27
    18. 金昌順, 《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金日成》, 韓昇助 外共著,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螢雪出版社, 1990) pp.153~154
    19. 19.0 19.1 김창순, 《역사와 인물 - 「김일성 장군」의 경우》, 『북한』 2002년 5월호(통권 제365호) (북한연구소, 2002) pp.26-31
    20. 20.0 20.1 이명영(李命英),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新文化社, 1974) : 第一章 옛「김일성 장군」의 傳說과 正體
    21.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 위키백과
    22. 1916년 평안남도 사립학교 교원 시험 합격자에 현응수(玄應洙)가 있으므로, 그의 증언은 믿을만 하다 : 지방통신: 평안남도 교원시험 합격자(평양) 매일신보(每日申報) 1916-05-19 : 04면 04단
    23. 이명영(李命英),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新文化社, 1974) p.32; pp.122 ~ 124.
    24. 24.0 24.1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9) 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1974.04.15 종합 3면
    25. 金昌順, 《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金日成》, 韓昇助 外共著,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螢雪出版社, 1990) p.156
    26. 김창순,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서울 : 북한연구소, 2004.) pp.160~161
    27. 27.0 27.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6000、本邦内政関係雑纂/植民地関係 第二巻(A-5-0-0-1_1_002)(外務省外交史料館)」標題:6.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昭和19年(1944年) 11月 18日> p.8
    28. (국방일보 기획/연재) <1> 가짜 김일성의 정체(상) : 김성주(김일성의 본명), 항일 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위장 평양 입성 국방일보 2016. 04. 12 / <2> 가짜 김일성의 정체(하) 김성주, ‘보천보 전투’ 이끈 김성주 이름·업적 도용 국방일보 2016. 04. 20
    29. 김씨 일가의 우상화-만경대혁명사적지 자유아시아방송 2019-04-30
    30. 金日成(김일성) 「傳說的 英雄(전설적 영웅)」 北傀(북괴), 造作(조작)에 混線(혼선) 1974.07.31. 경향신문 1면
    31.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李容相) 오마이뉴스 2005.04.14
    32. 이용상(李容相, 1924-2005),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 (서울 : 한줄기, 1994)
    33. 33.0 33.1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451) | <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 (36) -「김일성」으로 둔갑 중앙일보 1991.05.27 종합 9면
    34. 이용상(李容相, 1924-2005), 《삼색의 군복(三色 軍服)》 (서울 : 한줄기, 1994) pp.251~253
    35. 35.0 35.1 35.2 35.3 共匪 金日成 被殺 - 十三日 滿洲國 討伐軍에 매일신보 1937년 11월 18일 3면 2단;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共産匪 金日成の 死 경성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7면
      反滿 항일의 首魁, 金日成 被捉 참수. 討匪隊와 격전 5시간 조선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
      金日成被殺(김일성피살)? 동아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
      비적(匪賊) 준동기(蠢動期)에 비(備)하야 국경경비진(國境警備陣)을 강화(强化) 매일신보 1937/12/19, 02면 05단 : 대안의 비적 현황은 금하래의 만주국 토벌군으로 말미암아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日成)이 뒤를 이어 너머젓슴으로 ...;
      共匪 崔賢一黨 潰滅, 對岸治安 明朗化 매일신보(每日申報) 1938/02/23, 2면 : 조선 국경 대안에서 공비(共匪)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잇든 김일성이는 작년 가을에 총살되고 이번에는 최현이도 총살되여 ...
    36. 36.0 36.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21 第一章 옛「김일성 장군」의 傳說과 正體
    37. 일인(日人) 모리타(森田)씨가 간추린 「조선종전(朝鮮終戰)의 기록(記錄)」 (上) 1967.08.15 동아일보 4면 ;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東京, 巖南堂書店, 1964) p.81
    38. 38.0 38.1 38.2 정관해(鄭觀海, 1873~1949), 《관란재 일기(觀瀾齋日記)》 한국사료총서 제44집 (국사편찬위원회 , 2001년 12월 30일) : , 1945년 8월 17일(음력 7월 10일)자 "朝鮮爲獨立國, 國號東振共和國 年號永世, 大統領 安某, 安某 卽前日安重根之子, 內大 呂運亨, 外大 金日成云" 및 8월 26일(음력 7월 19일)자 "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
    39. 주한미군사 1 / Ⅲ. 간주곡 : 1945년 8월 /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현대사 사료총서 2
    40. 유수생(流水生, 필명) 수필(隨筆) 《전재민(戰災民) : 만주잔류동포(滿洲殘留同胞)를 생각하며》 1947.01.07 동아일보 4면 : 우리 정부(政府)의 조각명부(組閣名簿)가 "삐라"에 실려 들어온다. 대통령(大統領)에 이승만박사(李承晚博士), 문교부대신(文敎部大臣)에 김성수씨(金性洙氏), 군부대신(軍部大臣)은 김일성씨 (金日成氏) 등々(等々) 그럴법하게 활자(活字)가 배열(配列)되였다.
    41. 아래 책들에도 위와 동일한 동진공화국 조각 명단이 나온다.
      송남헌(宋南憲, 1914-2001), 解放 三年史 1945 – 1948, (서울, 까치, 1985) p.39
      古下宋鎭禹 傳記 독립을 향한 執念 (東亞日報 社, 1990년 5월) p.221
      최영희(崔永禧, 1926-2005), 격동의 해방 3년,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p.6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 (서울, 나남, 1996) 2권 p.227
    42. [[:파일:조선인민공화국 선언문.jpg|조선 인민 대중에게 격함 -조선인민공화국 탄생에 제하여-] : 조선인민공화국 선언문
    43. 43.0 43.1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 해내외 망라 이원 고문 등 선정 매일신보 1945년 09월 07일
      건준,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인공’ 임시조직법안 상정 통과 매일신보 1945년 09월 07일
    44. 44.0 44.1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의 여론조사
      (다시쓰는한국현대사 13) 누가 최고지도자인가 중앙일보 1995-04-03 ;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1권 3호, 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 pp.45~51 ; 김남식(金南植), 이정식(李庭植), 한홍구(韓洪九) 엮음, 한국현대사자료총서(韓國現代史 資料 叢書) 7권 pp.696~699.
    45. 45.0 45.1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제3장 제88정치여단
    46. 《관란재 일기(觀瀾齋日記)》 해제(解題) 국사편찬위원회
    47. 鄭觀海 著, 觀瀾齋日記 : 韓國史料叢書 第44 (과천 : 國史編纂委員會, 2001) pp.1055 ~ 1057. (국회도서관 온라인 원문보기)
    48. 崔炳彩日記 5 (한국사료총서 제59집) > 崔炳彩日記(一九四五年 下) > 七月 > 七月十一日己未(陽八月十八日、土曜日) 국사편찬위원회 2017년 12월 22일
    49. 崔炳彩日記. 3-5 : 韓國史料叢書 ; 第59 (과천 : 국사편찬위원회, 2017) pp.529~531. (국회도서관 온라인 원문보기)
    50. 50.0 50.1 50.2 50.3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p.84 -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는 말이 삭제됨.
      한재덕(韓載德),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27) 1962.06.01 동아일보 2면 [1959년 한국으로 귀순 후 쓴 글]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04.15) p.134.
    5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일본보도기사 / 165. 피로 물들인 조선의 독립운동, 전쟁과 함께 치열화, 앞길에 여전히 수많은 파란 : 『朝日新聞』(東京版), 1945년 10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 06월
    52. 52.0 52.1 52.2 名士의 片影(其五), 金日成氏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아래 "원문보기" 클릭)
    53. 總督狙擊事件ニ関スル件 : 大正十三年五月十九日 警務局 - 日帝暗黑期統治史料集. 1 ~ 10권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0) 9권 pp.596~597
    54. 해외사료총서 15권 일본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Ⅲ > 미즈사와(水沢) 사이토 마코토(斎藤実)기념관 소장 일제시기 사진자료 해제 > Ⅲ. 사이토의 식민통치 특성과 지방 순시 1924년 5월 19일 (월): 오전9시 5분 從流島의 상류 巖崖 위에서 先導船 飛鳥丸에 2-3발의 총화가 쏟아짐. 該船의 경위순사가 응사 7-8발. 산상의 도적은 숨음.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지방 순시 압록강 일대 순시 당시 사진 : 북청 여관 사진, 혜산진 수비대 사진도 있다.
      사이토 총독(齋藤總督) 국경시찰여정(國境視察旅程) 1924.05.08 동아일보 1면
    55. 사이토 총독(齋藤 總督) 저격한 백광운(白狂雲) 사망설 동아일보 1924.09.28 일자 2면
      사이토 총독(齋藤總督) 저격범(狙擊犯) 참의부원(參議府員) 이병준(李秉俊) 피착(被捉) 1926.12.28 동아일보 2면
      활동경로(活動經路)와 범행전말(犯行顚末) 1927.10.17 동아일보 2면
    56. 김승학(金承學),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 (서울: 獨立文化社, 1965) p.351
    57. 57.0 57.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9~30 : 1924년 당시 북청군청 직원이었던 김흥교(金興敎, 1893~?)는 사이토 총독이 북순(北巡) 당시 북청군(北靑郡)에 들렀다 혜산진 방면으로 떠난 며칠 후 총독 저격 사건이 있었고, 김일성 장군이 한 일이라는 풍문이 돌았다고 증언했다.
    58. 甲山含井駐在所(갑산함정주재소)에 爆發彈(폭발탄)을投擲(투척) 독립단이십명이폭탄을던지고영림창출장소와면소까지방화 駐在所下人一名慘死(주재소하인일명참사) 동아일보 1921-09-27 03면
      甲山敵駐在所 襲擊 詳報 독립신문 1921-11-19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7~29 : 1921년 당시 갑산군 동인면장이었던 김상형(金相瀅, 1889~?)은 그 사건이 김일성 장군이 한 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증언했다.
    59. [[:파일: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jpg|함경남도 행정구역 개정안 부도의 갑산군(甲山郡) 지도 : 1913년]] : 갑산(甲山) 바로 북쪽에 회린면(會麟面)이 있고, 그 인근 북동쪽에 함정포(含井浦)가 나온다. 그 북쪽으로 압록강에 면해서 혜산진(惠山鎭)이 있고, 또 그 북쪽으로 보천보(普天堡)가 보인다.
    60. 莫府서 作戰을 硏究 / 日軍 降服 前에 大反擊戰을 準備 / 金日成 將軍은 健在 活動 中 자유신문 1945년 10월17일 2면 1단
    61. 《조선의 청년영웅 김일성장군을 환영》 해방일보(解放日報) 1945년 11월 5일
    62. 박정애(朴正愛, 1907 ~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3. 김용범(金鎔範, 1902 ~ 1947) - 위키백과
    64. 장준익(張浚翼, 1935~ )
    65. 레오니드 바신, "「날조된英雄」金日成", 신동아(新東亞) 1992년 11월호, pp.486-501.
    66. 66.0 66.1 Jasper Becker,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1 : As Kim's nom de guerre was widely associated with an older guerilla who had performed legendary feats, many suspected him of being a complete fraud, so the next step was to build up Kim's image. "We elevated him into the status of a hero to bolster his work as a leader of Korea," Vassin said. "We had to prove he was a real person, the tiger of Mt. Paektu. We had to find his relations at the village of Mangyoungdae. We also had to discredit the information put out in South Korea that he wasn't the real Kim Il Sung. We had to prove he was an active fighter who had liberated the motherland."
    67. 67.0 67.1 67.2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68. 68.0 68.1 68.2 68.3 68.4 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 Независимое военное обозрение (Independent Military Review) 2005-01-14
    69. KBS 1TV 6.25특집「내가 겪은 공화국 : 제1편—88여단의 김일성」 1992.06.22 방영
    70. 70.0 70.1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0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 66
    71. 71.0 71.1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5회) 1962.05.18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6회) 1962.05.19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7회) 1962.05.20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8회) 1962.05.21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9회) 1962.05.22 동아일보 2면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 치하의 북한 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72. 6.25 남침을 말한다 : 전 북한 고위관료 kbs tv 증언 조선일보 1992.06.24 / 4 면
    73.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p.80~87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5~89
    74. 이북(李北),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 (서울: 三八社, 1950.12.20) pp.42~44.
    75. 「정체탄로(正體綻露) 우려(憂慮)? 김일성(金日成)의 판문점(板門店) 여행(旅行) 거부 이유(拒否 理由)」 : 조선일보 1953.07.27 조간 1 면
    76.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3회)  : 〈金日成直屬(김일성직속) 記者(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 년 05 월 16일 2면)
    77.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 북한민주화 전략집⟩, (시대정신, 2006.04.15) p.40.
    78.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The Moscow Times Jul. 22, 2004
      위 기사를 번역, 요약한 기사: 그리고리 메클레르,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구소(舊蘇) 군정 치밀한 작전” 동아일보 2004-07-23
    79. 한세기를 그리다 - 101살 현역 김병기 화백의 증언 : 「길을 찾아서」 (4회) ‘김일성 장군’을 처음 만나다 한겨레 2017. 02. 02
    80. <손주에게 들려주는 광복이야기> 김병기씨의 '해방 전후 미술계' : "김일성이 초상화 그려달라 부탁… 그림 그릴 자유 찾아 월남했지" 조선일보 2005. 08. 23
    81. 81.0 81.1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안우생 기자회견 보도 동아일보 1945.12.06 일자 1면
    82. 《우리의 太陽 : 金日成 將軍 讚揚特輯.(김일성장군 찬양특집)》 (平壤,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pp.22 ~ 23.
    83. 凱歌(시집), 朴石丁 저 (문화전선사, 1947) p.11
    84. 84.0 84.1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도서출판 한울, 2008년) pp.231-232.
    85. 85.0 85.1 박갑동(朴甲東, 1919~ ),『내가 아는 박헌영』 (108회) 중앙일보 1973.07.04 종합 5면
      박갑동(朴甲東, 1919~ ), 『박헌영(朴憲永)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서울, 인간사, 1983) p.190 : 위 중앙일보 연재물을 책으로 간행한 것임.
    86. 李相朝(이상조)씨—申一澈(신일철)교수 對談(대담) : 8月宗派(월종파)사건「反金(반김) 세력」제거 造作劇(조작극) 1989.09.18 동아일보 5면
      申(신) = 6. 25전쟁은 人民軍(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남침 준비상황은 어떠했는지요? ......
      李(이) = 나는 당시 상업성 副相(부상)으로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 .... 나는 당시 알 수 없는 이유로 金昌滿(김창만)과 함께 한직으로 좌천됐는데 許哥而(허가이)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가 벼슬하려고 혁명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이유를 말하지 않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짐작컨대 남로당의 李舟河(이주하)와 李鉉相(이현상)(지리산 빨치산대장)이 북한에 와 있었는데 우리와 그들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것같아 거리를 두도록 떼어놓은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李舟河(이주하)는 괜찮은 인물로 보였으나 李鉉相(이현상)은 용인하기 어려운 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李相朝(이상조)씨「칼칼한 所信(소신)」인상적 1989.09.21 동아일보 8면 :崔昌益(최창익) 金武亭(김무정)등과 함께 북한군 창설의 주역인 李(이)씨는 죽마고우인 金昌滿(김창만)과 더불어 한직으로 밀려나 상업성 상업관리국장으로 6, 25동란을 맞이했다고 한다. ....
    87.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p.296~298.
    88. 김국후, 평양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 (한울 아카데미, 2013) pp.278~279 : 전 내무부상 강상호 등의 증언
    89. 李相朝(이상조)씨—申一澈(신일철)교수 對談(대담) : 8月宗派(월종파)사건「反金(반김) 세력」제거 造作劇(조작극) 1989.09.18 동아일보 5면 : 李(이) = 그 기간중 金日成(김일성)이 소련에가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金日成(김일성)이가 소련 하바로프스크로 도망한 것은 전적으로 그가 혁명가로서의 조직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는 전략상 후퇴한 것이 아니라 도주한것입니다. 滿洲(만주)야말로 항일투쟁의 최요충지인데 어떻게 그곳을버리고 도망갈 수있겠습니까. 도저히 용서못할 일입니다.

      李相朝(이상조)씨「칼칼한 所信(소신)」인상적 1989.09.21 동아일보 8면 : 李(이)씨는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20명 규모의 보잘것없는 부대였다고 증언했으며, 가장 중요한 항일투쟁 시기인 1940년에서 해방때까지 金(김)이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敎導旅團(교도여단)」에 도피해 있었다고 밝혔다.
    90. “보천보전투, 조작된 항일무장투쟁 신화” 자유아시아방송 2017-06-07
    91. 91.0 91.1 노영택,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國史館論叢 第5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4-06-20)
    92. 8.15 광복 특집 : 기억의 재구성 - 1945.8.15 KBS 1TV 2011. 8. 14(일) 밤 8시 방송 / 8.15 광복 특집 : 기억의 재구성 (영상 보기)
      (강준식) 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 스페셜리포트 - 광복절 특집 - 해방 그날의 진상 월간중앙 2009년 8월호 [통권 122호] (2009.08.01)
    93. 長湖院銃劍犯人(장호원총검범인)은 血成决死隊金善學(혈성결사대김선학) 1930.12.16 동아일보 2면
    94. 三次號外發行(삼차호외발행) 1930-12-16 동아일보 2면 2단
    95. 무장단 오십명 출현(武裝團 五十名 出現) 경관 4명(警官 四名)을 살상(殺傷), 혜산진 관내 독산 대안(惠山鎭 管內 獨山 對岸)에서 오일(五日) 아침 격전(激戰) 끗헤 조선일보 1933.06.07 석간 2면 : 호외재록(號外再錄)
    96. 국경방면(國境方面)의 무장단(武裝團), 경관대(警官隊)를 포위사격(包圍射擊), 경관 고전(警官苦戰), 전사 6명(戰死六名), 5일(五日) 함남 혜산진 대안(咸南 惠山鎭 對岸)의 사변(事變) 조선중앙일보 1933년 06월 07일 02면 : 호외재록(號外再錄)
    97. 본지호외발행(本紙號外發行) 조선일보 1934.01.24 석간1면 : 본사(本社)에서는 이십삼일(二十三日) 자성군하(慈城郡下)의 토병습격사건(土兵襲擊事件)으로 호외(號外)를 발행(發行)하엿습니다.
    98. 三百餘의 大匪賊團 昨夜中江鎭에 侵入 放火와 掠奪의 警急을 듯고 警官과 守備隊가 出動擊退 매일신보(每日申報) 1934년 01월 24일 석간 7면 : 호외재록(號外再錄)
    99. 본보 호외 발행(本報號外發行) 조선일보 1935.02.14 조간 1면 : 본사(本社)에서는 십삼일 후창군내(十三日 厚昌郡內)에 공군(共軍)이 출현(出現)한 사건(事件)에 관(關)하야 호외(號外)를 발행(發行)하엿습니다
    100.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 紅軍正體 매일신보 1935-02-19 02면 08단
      "동흥사건 餘聞(여문). 共軍(공군) 두목 李紅光은 18세 남장 미인. 조선 소녀로 부하가 6백여명. 습격 당시도 진두에서 직접 지휘" 조선일보 1935.02.23 / 석간2 : 2 면
      李紅光(이홍광) 戰死說(전사설) 1935.11.01 동아일보 2면
    101. 平安北道, 東興を襲擊した東北人民革命軍第一司令官李紅光とは全く妙齡の女性, 丹下部長歸任談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5년 02월 27일 4면 1단
    102. 金日成將軍 部隊와 朝鮮義勇軍의 中堅幹部 座談會 / 서울新聞社 編 『신천지』 제1권 제2호 (1946년 3월) pp.230-237
    103. 『문화전선(文化戰線)』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104.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 평양(平壤) :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105. 105.0 105.1 105.2 105.3 105.4 105.5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
    106. 106.0 106.1 106.2 106.3 [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16개항 경력 관련 질문에 답변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단독]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107. 107.0 107.1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동아일보사, 1993) pp.163~164
    108. ≪백두산(白頭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 여기에는 보천보라는 말은 나오지 않으나 H시가 보천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109. 한재덕(韓載德), 『김일성장군(金日成 將軍) 개선기(凱旋記)』 평양(平壤) : 민주조선출판사(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 p.41
    110. '1984'와 짝을 이루는 '고발' 讀後記 조갑제닷컴 2014-05-12
    111. 소설 '고발'을 읽은 북한 사람이 보낸 글 조갑제닷컴 2016-03-20 : 북한에 사는 작가가 쓴 反체제 소설을, 한국의 출판계를 매개로 하여 북한 사람이 읽었다는 건 하나의 사건이다.
    112. 건축조형상징물 동상 건립 자유북한방송 (RFA) 2019-05-14
    113. 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상)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4월 8일
      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하)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4월 9일
    114.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p.457~458
    115. 조선의 청년 영웅 김일성 장군을 환영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5년 11월 5일
      지도자 군상 - 김일성론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1946년 4월 12일 1면
    116.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4회) 1962.05.28 동아일보 2면 : 一九三七(일구삼칠)년「보천보」사건 당시의 그의직책은 이른바 항일연군(抗日聯軍)의 제六(육)사 사장(師長)이었다.
    117. 解放(해방)18년 北韓(북한)은 어떻게變(변)했나? : 「平壤 金日成(평양 김일성)」의 正體(정체) 1963.08.15 경향신문 3면 : 金日成(김일성)이가 가장 굉장히 내세우는 所謂(소위) 普天堡事件(보천보사건) 때에도...
      『북한총감(北韓總鑑): 1945-68』 부록(附錄) 《북괴인명록(北傀人名錄)》의 金日成(김일성), (서울 共産圈問題硏究所 1968)pp.1026 ~ 1027
    118. 118.0 118.1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外務省警察史 / 滿洲ノ部 / 在吉林總領事館及敦化分館, 9640面
    119. 119.0 119.1 이명영(李命英),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pp. 94, 103, 109, 152.
    120. 최형우(崔衡宇),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檀紀 4278[1945]년 12월 10일) pp. 25, 28.
    121.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122. 김일성의 이름은 어떻게 신화가 됐을까?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7-02-24
    123. D-Story 60 : 김일성 회고록 속 동아일보 2010년 11월 30일
      최일천 (崔日泉, 1905.10.11 ~ 1950.11.05) (최형우의 본명) 북한지역정보넷
    124. 최형우(崔衡宇),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檀紀 4278[1945]년 12월 10일) p.31
    125. 朝鮮○○軍(조선○○군) 男女 三名 (남녀 삼명) 被捉(피착) 1931-03-26 동아일보 2면
      李鍾洛 部下 (이종락 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1931-05-04 동아일보 2면
    126. 126.0 126.1 126.2 126.3 126.4 126.5 126.6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二) /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4/18,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一) 중학시대(中學時代)부터 적화(赤化) 滿鮮日報 1940/04/16,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三) 일단(一旦)은 귀순(歸順)을 결심(決心) 滿鮮日報 1940/04/21,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四) 양정우(楊靖宇)의 포위협위(包圍脅威)로 귀순공작(歸順工作)은 수포화(水泡化) 滿鮮日報 1940/04/23,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五) 하로 속(速)히 마음을 돌려 귀순(歸順)하기만 고대(苦待)! 滿鮮日報 1940/04/24, 6면
    127. 127.0 127.1 127.2 127.3 127.4 김창영(金昌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반민특위 조사 기록) 1949년 4~5월 / 김창영(金昌永, 1890-1967)
    128. 128.0 128.1 128.2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2043000、満州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昭和15年9月26日から昭和15年11月12日 (1940.09.26~1940.11.12) p.14부터 1940년 10월 23일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가 나온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 나이 29세.
    129. 129.0 129.1 129.2 金日成이 보천보전투 전공 가로채 / 前북한군 작전국장 회고록서 폭로 연합뉴스 1991.06.11 ;
      "金日成(김일성)이 抗日戰功(항일전공) 가로챘다"前(전)북한군 작전국장 蘇(소)서 폭로 경향신문 1991.06.12. 4면 ;
    130. 130.0 130.1 130.2 유성철(兪成哲, 1917-1995) 회고록 피바다의 비화 p.9 : .. 이 조우전에서 김일성은 영웅답게 전사하였고, 10여명의 전사들도 잃었다....그리고 또 성주는 유격활동은 하였으나 큰 공을 세운 일은 없었다. 김일성의 전사후 성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미의회도서관)
    131.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2009년 6월 20일 조선일보
    132.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고당전·평양지간행회(古堂傳·平壤誌刊行會), 평남민보사(平南民報社), 서울, 1966) pp.170~171.
    133.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134. 이에 관해서는 양좌청(양군무)의 아들 양효천(杨晓天)이 쓴 글이 있다 : 杨晓天, 杨靖宇大伯名字的由来 杨家将 2009-03-03
    135. 오평(吳平, 1907-1942) : 본명은 오조일(吳兆鎰), 일명 양송(楊松). 중국 호북성 대오현 출신. 1927년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중공당원에 가입. 블라디보스톡의 태평양 국제직공회비서처 중국부 주임. 코민테른 주재 중공당 대표단 성원. 중공중앙선전부 비서장. 중공중앙 기관지 해방일보 총편집 등 직무를 역임하였다.
    136. 136.0 136.1 박맹진(朴孟鎭) 편,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p.3 金擎天氏(日成氏의 初名) ; p.14 金日成이 지은 만시(輓詩)
    137. 김희곤(1954- ) 朴尙鎭資料集 (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pp.356~369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138.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진상(朝鮮眞相)』, (서울, 朝鮮政經硏究社, 1945. 12. 25) 1, 2권 합집 p.203
    139. 김광서가 즉 김일성 장군이다. 중앙일보 1975.06.20 종합 6면
    140. 윤치영 (尹致暎) : 나의 이력서 (55) 북괴의 김일성은 가짜...진짜 김일성은 일육사 나와 (한국일보 1981年 9月 25日字 6면) 한국언론진흥재단
      《동산회고록(東山回顧錄) : 윤치영(尹致映)의 20세기(世紀)》 (삼성출판사, 1991년 3월)
    141. 北, 김정일 동상 공개…기마 형상 연합뉴스 2012/02/14
      北 김일성ㆍ김정일 기마상 참배하는 평양시민들 연합뉴스 2013-04-14
    142. Equestrian statues in North Korea (북한의 기마상들) Wikimedia Commons
    143. (만물상) 북한의 '백마 신화' 조선일보 2012.04.16
    144. 144.0 144.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년) p.40~ : 第一章 第二節 端川출신 義兵將「金一成」장군
    145. 145.0 145.1 145.2 金日成의 正體에 對한 考證 : 以北의 金日成은 金日成將軍이 아니다 / 劉錫仁 新思潮. 제2권 제7호 통권18호 (1963년 9월) pp.165-169
      단천군지(端川郡誌) (단천군지증보편찬위원회, 1971) pp.152~162 : 단천 출신 김일성설(金一成說)
    146. 김일성(金一成, 1888~1926)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 김일성(金一成)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147.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 (50회) 단천 출신 의병장 김일성 장군 중앙일보 1974.08.14 종합 3면
    148. 이북(李北), 소련(蘇聯)의 괴뢰(傀儡)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 (서울, 三八社, 1950년 11월 20일) pp.42~44
    149. 김창순(金昌順, 1920~2007) 著, 역사의 증인 (歷史의 證人) (서울 : 韓國亞細亞反共聯盟, 檀紀4289 [1956])
    150.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 김창순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서울 : 북한연구소, 2004) pp.163~165.
    151. 양림(楊林, 1901년 ~ 1936년) - 위키백과
    152. 김용삼, 『김일성 신화의 진실 - 김성주, 진지첸, 김일센, 김일성으로 살았던 한 인간의 생애』 (북앤피플, 2016)
    153. 김용삼, 거대한 사기 김일성 : 이승만학당 제4기 제6강의 자료 (2018.2.10)
    154. 서대숙, “통일되면 북쪽 학자들도 찾아와 연구할만한 자료들이죠” 한겨레신문 2018.10.25
    155. 한홍구, 이승환, 김일성 가짜설의 생산구조와 그 의미
    156. 156.0 156.1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가짜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0-09-28
      '김일성 항일투쟁 진위'공개토론 1989.08.15 한겨레신문 7면 : 서 교수는“‘김일성 가짜론’가운데는 4인설·3인설·2인설 등 여럿이 있는데 내 논문과 책들을자세히 읽을수록 결국 1인설에도달하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157.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Y: Columbia Univ. Press, 1988/1995 : 서대숙(徐大肅)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158. 과학적 분석이 결여된 사실규명의 한계 :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청계연구소, 1989) 한국역사연구회보 제3호 (한국역사연구회, 1989.06) pp.25 - 27
    159. 정창현, 『인물로 본 북한 현대사』 (민연, 2002) p.29
    160. 정창현, 『인물로 본 북한 현대사』 (민연, 2002) pp.30~31
    161. <와다하루키(和田春樹)회고록> ‘김일성 가짜설’은 가짜였다 한겨레신문 2007-01-25
    162. 和田春樹(1938~ )、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1992年。 : 와다하루키(和田春樹) 저,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비평사, 1992) p.180
    163.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일성평전’과 김일성의 실체 동아일보 2016-12-29
    164. 金日成 중국에서 약탈, 도둑질 일삼아 :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브레미야'(新時代) 연합뉴스 1993-04-19
    165. 이런 일들에 대한 당시 신문 보도나 일제의 기록은 엄청나게 많다.
      (붉은왕조 증언요약) 소, 김일성에 강제로 북한 떠맡겼다 조선닷컴 1997/06/29 : 김일성은 만주에서 중국인 학교를 8학년 중퇴한 뒤 빨치산 부대에 합류했다가 41년 소련 영토로 도망쳐 온 인물이라는 것. 심지어 믈레친 해설위원은 당치 빨치산 부대를 자처한 부류 가운데에는 사실상 마적이나 비적에 불과한 무리들도 많았다고 말했다.
    166. 韓昇助 外共著,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大邱 : 螢雪出版社, 1991), 제5장 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金日成 / 金昌順 : p.167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북한연구소, 2004.06) p.170
    167.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MBC 2002.02.03 방영분 YouTube 링크
    168. 168.0 168.1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843) <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62) : 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8 종합 5면 : 이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는 최초의 증언으로 보인다.
    169.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 그 전설, 실존, 도명을 밝힌다》 1974.03.23 ~ 1974.09.03의 기간에 중앙일보에 연재 (총 53회)
    170. 「金日成匪 討伐詳報」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 월간(月刊) 『철심(鐵心)』 1937년 11월 15일號 (滿洲國 治安部 參謀司 調査課編) pp.70~75.
    171. 171.0 171.1 鮮外情報 - 共匪 金日成 射殺의 件 治安狀況(昭和 12年) 第38報 (1937년 11월19일).
    172. 東亜局第二課関係/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 昭和 12年(1937년) 12月 1日 p.49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17600、執務報告 昭和十二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3)(外務省外交史料館)」;
      支那及滿洲ニ於ケル共産運動, 外務省 東亞局 第二科, 昭和 13年 (1938년) 6월 : 내용은 앞의 1937년 12월 것과 동일함.
    173. 『하모니카』演奏하며 男女混合舞踊會 一派의 큰 襲擊만 前後十二回 共匪金日成派 內幕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 (11월 26일 석간) 3면 6단 : 1936년 당시 활동하던 빨치산 김일성은 나이가 37~8세 가량으로 카이제르 수염을 길렀고, 함남 혜산진 출신이라 함.
    174. 174.0 174.1 174.2 [[:파일:1937-05 철심(鉄心) 동변도토비행(東邊道討匪行).pdf|東邊道討匪行 / 從軍記者團] 만주국군(満州国軍) 기관지(機関誌) 월간(月刊)『철심(鐵心)』1937년 5월호 (満州国治安部,治安部参謀司第二課 編) pp.98~114 : 기사 묶음 중의 《東邊道の匪情と滿軍の健全なる發達》 (東京日日新聞社 廣瀨 特派員) p.106 하단 : 제6사장 김일성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으로 30세 미만의 청년이란 풍문이었다하며 동변도에서는 제일 큰 세력이라고도 적혀 있다. [金日成といふのは純然 たる共産匪である、三十歳にならぬ 若者だが、モスクワの共產大學の訓練を受けて 臨江, 撫松、濛江、長白等所謂未討伐地區に蟠踞して現在 約五百の部下を持つてのるらしい、 現在では東邊道隨一の集結勢力である。]
    175. 175.0 175.1 175.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의 16장 2절 "소탕하에서의 일행천리"에는 『철심(鐵心)』1937년 5월호 기사를 인용하며 김일성이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한 것을 허위라며 비방하고 있다.
    176. 176.0 176.1 176.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7권(1996년) : "제20장 3. 소금 사건"에서 『철심(鉄心)』과 경성일보의 김일성 전사 기사의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177. 177.0 177.1 共匪 崔賢一黨 潰滅, 對岸治安 明朗化 매일신보(每日申報) 1938/02/23, 2면
      撫松縣(무송현)에 반거 共匪(공비)두목 崔賢 사망설 만주국군에 일파 궤멸 조선일보 1938.02.23 석간 2 면
      匪首崔賢의 末路 경성일보(京城日報) 1938年 2月 23日 (22日 夕刊) 2面
    178. 178.0 178.1 최현(崔賢)도 전사했다는 보도가 다수 있고, 북한의 최현(1907~1982)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 (39) 6사장 김일성의 죽음(하) 중앙일보 1974.07.10 종합 3면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292
    179. 함남(咸南) 보천보(普天堡)를 습격 동아일보 1937.06.05 호외(號外)
    180. 中国共産党 延吉縣委及 所屬機關ノ 組織狀況ニ關スル件 機密 第766號 昭和 7年 7月 18日
    181. 許東粲, 金日成 評傳 (續) (北韓硏究所, 1988년) pp.60~62.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164.
    182. 일반적 치안 정황(一般的治安情況) - 1936년 12월12일: 재간도 총영사관 경찰부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시스템 (M/F 자료번호 : 1-006466-001-0400) : 同軍 第三師長 金日成(金一善) 部隊 約百五十名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 소화 11년(1936) 12월 12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시스템 (M/F 자료번호 : 1-006466-001-0399) : 위 자료의 표지 부분
    183. 183.0 183.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p.276~28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 (37) 6사장 김일성의 성분 중앙일보 1974.07.05 종합 3면
    184. [警察功勞記章과 感狀下付에 對하여-三橋警務局長 談 每日申報 1940-02-11/ 02면 / 08단
    185. 八木春雄氏死去 旧満州国軍元高級参謀 Shikoku News 2002/07/14
    186. 186.0 186.1 Yangmudingzi Mountain 杨木顶子 린장시 바이산시 지린성 구글지도 : 양목정자(杨木顶子)는 당시는 무송현(撫松縣) 소속이었으나, 지금은 인접 임강시(临江市) 소속으로 바뀌었다.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50~60 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187.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p.287~289.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 (38) 6사장 김일성의 죽음 중앙일보 1974.07.08 종합 3면
    188. 共匪金日成一派支援 外廓團體員總打盡 食糧과 物品을 調達供給하든 四百三十名을 檢擧 매일신보 1937년 04월 28일 2면 1단
      金日成 援助혐의로 400 여명을 검거 長白縣이래 21개 촌락에서 공산군 외곽단체 박멸 조선일보 1937년 04월 28일자 2면
    189. 金日成一派가 拉去한 人質七十名 放免 / 격렬한 설교 끄테 전부 석방해 無事히 原住地 歸還 每日申報 1937년 06월 28일 02면 06단
    190.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越智唯七 編 京城 : 中央市場, 大正6[1917] : p.1033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
    191.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후방교란(後方攪亂)을 몽상(夢想) / 수수께끼가튼 김일성(金日成)의 정체(正體) 1939.06.23 조선일보 7면
    192. 함경남도 행정구역 개정안 부도 : 내고향 옛지도 기록 보기 국가기록원 - 대정(大正) 2년 (1913년) 4월 지도
    193. 혜산 지역이 갑산군에서 분리된 것은 1942년이다 : 양강도 혜산시 역사 - 북한지역정보넷
    194. 194.0 194.1 갑산군(甲山郡)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갑산군(甲山郡)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 한국학중앙연구원
    195. 甲山 石隅里 消防組 創立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4년 12월 19일 (18일 석간) 5면 5단 : 甲山郡 會獜面 石隅里
    196. 舊韓國 官報 第四千五百八十一號 隆熙四年(1910년) 一月二十日 (木曜) 三十 同郡會面虛麟面及新福面을廢야會麟面을置홈
    197. 양강도 갑산군(甲山郡) 북한지역정보넷
    198.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4장 장백 사람들 (1936년 9월 ~ 1936년 12월) / 1. 서간도"에 대, 소덕수 전투가 나옴.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전투회상기 2권 : 4. 장백현 대덕수, 소덕수 전투 (1936.9.1~2) / 김정필 (평양: 조선인민군출판사, 1960) p.38
    199. [항일녀걸 8] 6사 녀성련 첫 련장 박록금 길림신문 2015-04-24
      [항일녀걸 11] 김수복 장백현 주경동서 쓰러지다 길림신문 2015-05-26
    200. 이명영(李命英), 진위 김일성 열전 (30)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 항일 연군과 소련 중앙일보 1974.06.17 종합 3면
    201. 標題:満洲国軍月報送付の件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3346700、昭和13年「満受大日記 (密) 其11」(防衛省防衛研究所)」
    202. Xiao Xinancha 小西南岔 구글맵
    203.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 :4 한국일보 1990.11.04
    204.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205. 205.0 205.1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5.
    206. Made in the USSR(Сделан в СССР)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Top Secret)", No.9/268, 2011.09.01
      The former deputy commander of this battalion, Captain Pak Sung Hoon, later said: “... It was clear to us that with all the other positive qualities that were taken into account in Moscow, Kim Il Sung had two more advantages over many of us. He was most infected with a fatal devotion to Stalin, idolized him and in every way demonstrated this love in words. ” (From the book by A. Lankov)
    207. Igor Popov, KOREA IN THE FIRE OF WAR(КОРЕЯ В ОГНЕ ВОЙНЫ) : 2.1 KIM IR SEN, CAPTAIN OF THE SOVIET ARMY (Moscow: Kuchkovo Pole Publishing House, 2005)
    208. фамилию Russian-English Dictionary
    209. 1937년 7월 발발한 전쟁(中日戰爭)을 말한다.
    210. 朝鮮(조선) 인터뷰 前(전) 南勞党(남노당) 총책 朴甲東(박갑동)씨 "北韓(북한)이「선의의 同伴者(동반자)」라니... 1989.07.12 조선일보 9면
    211.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50)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 중앙일보 1989.12.25 종합 5면
    212. 박갑동(朴甲東, 1919~ ),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년) : 137~138쪽
    213. 평양에서의「서열」의 의미 | 박갑동 <북한문제전문가> 중앙일보 1974.03.28 종합 3면
    214.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159 중앙일보 1990.11.10 종합 5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p.395~396
    215. 평양의 '金日成'이 '普天堡 습격'의 주인공일까 / 朴甲東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大邱 : 螢雪出版社, 1991) p.183
    216.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166 중앙일보 1990.11.26 종합 9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411
    217.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7)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6) 동아일보 1972.01.27. 4면 ;
      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pp.154~156 ; (고려원, 1987)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38) 6사장 김일성의 죽음 [중앙일보] 1974.07.08 종합 3면
    218. 이명영(李命英, 1928-2000.06.2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 282-283.
    219. 이명영(李命英, 1928-2000.06.2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 291-292.
    220.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p.364~399
    221. 221.0 221.1 간도(間島) 일본 영사관 정보 기록에 나오는 2명의 김일성 : 우남위키
    222. 222.0 222.1 북한 김일성의 소련군 시절 자필 문건에 나오는 경력 : 우남위키
    223.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p.173~182.
    224. 1935년 9월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조직표 : 우남위키
    225. 1936년 2월의 동북인민혁명군 간부 명부 : 우남위키
    226. 226.0 226.1 226.2 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 第一. 所謂 惠山事件の 槪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39.09.01) pp.8~9.
    227. 혜산사건(惠山事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28.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만주(滿洲) 게릴라 조직(組織)과 한인대원(韓人隊員)에 관(關)한 연구(硏究)』, 북한학보 제1집 (북한연구소 1977년) p.79
    229. 이종석,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1988) /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447
    230. 「昭和十二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の狀況」 五. 滿黨の鮮內抗日戰線統一運動竝支那事變後方撹亂後方攪亂企畫事件 사상휘보(思想彙報) 제14호 1938-03-01
    231. 中國共産黨の朝鮮內抗日人民戰線結成おすび日支事變後方攪亂事件 조선총독부함경남도경찰부 편(朝鮮總督府咸鏡南道警察部 編) (京城 1937 소화 12년) :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257-306 수록.
    232. 《(五) 惠山事件 (中國共產黨指導の抗日人民戰線結成及支那事變後方撹亂)の狀況》,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 昭和8年·13年』 朝鮮總督府 警務局著 (서울: 여강출판사, 1986) pp.404~429
    233. 233.0 233.1 233.2 (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아시아 투데이 2015-03-16
      「惠山事件 判決書」(金正柱 編,≪朝鮮統治史料≫6, 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0), 543∼841쪽.
    234. 이명영(李命英),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281
    235. 이명영(李命英),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276
    236.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2)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4-18
    237.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pp.82~83.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빛나는 革命家의 집》, 『金日成將軍 凱旋記』 (平壤 :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 pp.71~76.
    238. 《내가 아는 北傀政權 裏面史 : 金日成歸順 特別工作隊 이야기》 / 李奇建 『時事』 58 (內外問題硏究所, 1968.7) pp.93~94.
    239.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第六節 金日成의 죽음 [pp.284~291]
    240. 이명영(李命英),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8) - 6사장 김일성의 죽음 중앙일보 1974.07.08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39) - 6사장 김일성의 죽음(하) 중앙일보 1974.07.10 종합 3면
    241. 국경경비진 주파기 (國境警備陣 走破記) ④❹ 후방교란(後方攪亂)을 몽상(夢想) / 수수께끼가튼 김일성(金日成)의 정체(正體) 1939.06.23 조선일보 7면 (이미지)
    242. 標題:6.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p.4.「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1286000、本邦内政関係雑纂/植民地関係 第二巻(A-5-0-0-1_1_002)(外務省外交史料館)」
    243. 「惠山事件 判決書」 : 日帝暗黑期統治史料集 6권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0) pp.543~840
    24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 94 : 창덕학교(彰德學校) 급우(級友)였던 조의준(趙義俊)과 조사준(趙士俊)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본명이 金聖柱라고 증언(證言)했다고 함. 재건파공산당(再建派共産黨)에서 박헌영(朴憲永)과 함께 일했던 김철수(金綴洙)도 평양(平壤)의 김성주(金聖柱)의 푸락치가 들어와 김성주(金聖柱)의 사진과 경력을 소개하는 책자를 당내(黨內)에 돌렸는데 그 속에 평양(平壤)에 와 있는 김일성의 본명(本名)은 「金聖柱」라 했다 한다.
    245.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1929년 5월 14일자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 작성 문서
    246.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247.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248.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 일본 내무성 경보국 특별고등경찰(日本 内務省 警保局 特別高等警察)
    249. 中共抗战英烈:魏拯民 中国共产党新闻>>党史频道 : 原名 關有維,字 伯張,化名 魏民生、魏明勝、魏鋤耕、李新良、張達、馮康 等
    250. 88여단장 주보중이 작성한 김일성에 대한 적기훈장 수여 요청서 : 1945년 8월 30일자
    251. 김일성 항일전 참전못했다 중앙일보 1992년 06월 15일 종합 1면
      88여단 북한 정치지도자 양성 주력/문건으로 밝혀진 김일성의 행적 중앙일보 1992년 06월 15일 종합 3면
    252.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동아일보사, 1993) p.172.
    253.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동아일보사, 1993) p.181.
    254.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동아일보사, 1993) p.65.
    255. 255.0 255.1 255.2 255.3 在滿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の現況に關する文獻 『思想彙報』第25號 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40.12.01) p.4 (65) 하단 좌: (3) 간부문제 - 총사령 양정우 생사불명
      思想彙報 第25號(1940년 12월) p.65 일부 번역문 - 滿洲 抗日聯軍 硏究(金昌順)
    256. 金日成(김일성)의「北韓(북한)해방」은 거짓 1989.09.12 동아일보 3면
    257. 전 북한군 부총참모장 이상조씨 기자회견 MBC 1989-09-12
    258. 리상조(Yi, Sang-jo, 李相朝, 1916~1996) 특명전권(모스크바)대사 -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 미의회도서관
    259. 임은(林隱, 허진의 필명),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옥촌문화사, 1989년) p.53. [허진은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4-1908)의 손자로 본명은 허웅배(許雄培)이며, 소련 망명 후 개명했다.]
    260. 李相朝(이상조)씨 — 申一澈(신일철)교수 對談(대담) 1989.09.18 동아일보
    261. 이용상(李容相)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항일투사 출신의 '마지막 풍류객' 이용상 OhmyNews 2005.04.29
    262. 이용상, 나의 친구 김영주(19) 진짜 김일성은 누구 중앙일보 1991.04.15 종합 9면
      이용상, 나의 친구 김영주(20) | 진짜 김일성 시비 중앙일보, 1991.04.17 종합 9면
    263. 263.0 263.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新文化社, 1974) pp. 293-294
    264. 討匪 安圖縣李道善部隊戰鬪詳報 / 間島地區警備司令部 『철심(鉄心)』 1937年 7月 15日號 pp.140~144
    265. 김창순(金昌順), 만주 항일연군 연구(滿洲 抗日聯軍 硏究) 國史館論叢 第1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0-07-15)
    266. 蘭星會編 『滿洲國軍』 (東京, 滿洲國軍刊行會 1970) p. 350 에는 왕덕태가 1936년 11월 7일 사살되었다고 나옴.
    267. 267.0 267.1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268. 268.0 268.1 268.2 268.3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269. 항일군 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09.13
    270. 満洲国治安粛正計画大綱案 昭和11.4~14.3 (1936.4~1939.3) C140305242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第一、東亜局第二課関係/第六章 満州国治安状況 (1936/12/0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32300、執務報告 昭和十一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21)(外務省外交史料館)」
    271. 吉林、間島、通化 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 (1939.10~1941.3) C130712175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吉林、間島、通化 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 (1939.10~1941.3) C130712185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72. 中共抗戰英烈:曹國安 2014年03月25日:人民網-中國共產黨新聞網
    273. 273.0 273.1 조국안 부대의 활동을 보도한 1937년의 신문 기사와 기록들 Wikimedia Commons
    274. 274.0 274.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4장 "4. 남만의 전우들과 함께"
    275. 275.0 275.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
    276.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帝國議會 說明資料) 1937 (소화12년)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1937 (소화12년), 조선총독부 기록물 : 제목 옆의 아이콘을 눌러 원문 보기 가능
    277. 조국안 부대의 활동을 보도한 1936년의 신문 기사와 기록들 Wikimedia Commons
    278. 金日成一派二百名(김일성일파이백명) 國境線進出企圖(국경선진출기도) / 曹國安派 合流, 對岸을 嚴重 警戒中 1937.06.30 동아일보 2면
      合流匪六百追擊戰 雙方의 死傷多數 토벌대 아즉도 긴장리에 대긔 新乫坡對岸의 討匪 每日申報 1937-07-02 | 03면 01단
      交戰三時間(교전삼시간)만에 雙方死傷六十七(쌍방사상육십칠) 1937.07.02 동아일보 2면
    279. 김일성, 조국안(曹國安) 연합 부대의 활동에 대한 보도는 1937년 가을까지 이어지고 있다.
      金日成一派가 村落을 또 襲擊 매일신보 1937-07-20 03면 08단
      匪賊約三百名과 森林警察隊衝突 雙方의 被害가 不少 매일신보 1937-08-28 04면 02단
      김일성등(金日成等) 연합공비(聯合共匪) 함남(咸南) 침습(侵襲)을 기도(企圖) 동아일보 1937.09.06 2면
    280. 金日成一派等 百餘(김일성일파등 백여) 十八道溝(십팔도구)에 出現(출현), 七名(칠명)을 拉去(납거), 食糧其他(식량기타)를 奪去(탈거), 鴨江一帶 依然嚴戒(압강일대 의연엄계) 1937.07.11 동아일보 석간 2면
      匪賊 金日成一派는 食糧難으로 大困境 附近部落에서 食糧掠奪中 越境할 憂慮도 不無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12일 02면 04단
      極度(극도)의 食糧難(식량난)으로 金日成派 再襲企圖(김일성파 재습기도) 十九道溝(십구도구)에 出現(출현), 十數名 拉去(십수명 납거) 1937.07.16 동아일보 석간 2면
    281. 東亜局第二課関係/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昭和 12年 (1937년) 12月 1日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17600、執務報告 昭和十二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3)(外務省外交史料館)」p.48 : 제3사장 왕인재(王仁齊) 사살(射殺), 제2사장(第二師長) 조국안(曹國安)ノ 진몰(陣沒, 전사)
    282. 國境方面에 있어서의 治安狀況 : 治安狀況(昭和 13年) 제44報∼ 제47報 1938년 06월 10일
    283. 주보중(周保中, 1902-1964),《東北抗日遊擊日記》人民出版社(1991年) p.16
    284. 김인욱(金仁旭, 1892- ?) 한국사 데이타 베이스
    285. 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동아일보 1935-08-02 조간 1면 13단
      金仁旭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 : 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3일 면수:06 단수:15
      今日 卒業한 日本士官學校 第27期 매일신보(每日申報) 1915.6.18
    286.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61~264
    287.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 p.240 (부록 p.40)에 혜산사건 판결서 (惠山事件 判決書)를 번역 소개하면서 6사장 김일성 부대가 함흥 74연대 육군 소좌(少佐) 김인욱(金仁旭) 부대와 교전한 것으로 밝힘.
    288. 오영진(吳泳鎭, 1916-1974),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 서울, 중앙문화사(中央文化社), 1952. 06. 10. (서울, 국토통일원, 1983, 재발간) 재간본 pp.90~91, pp.98~100
    289.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6권 제18장 "6.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290.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著、「アルバム・謎の金日成 -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1977年)」 株式会社成甲書房 / 이명영, 수수께끼의 김일성 : 혜산사건 재판 당시 피고인들의 사진과 형량이 나온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근거자료집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2002 p.154 이후
    291. 혜산진지국(惠山鎭支局) : 지국장(支局長) 양일천(梁一泉) 의원해직(依願解職) 동아일보 1932-02-17 03면
    29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3장 6절 "애국지주 김정부"
    293.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348.
    294. 長白荒しの 不敵な强盜 共匪金日成一味の 廻し者の嫌疑濃厚 경성일보(京城日報) 1936년 11월 27일 (26일 석간) 4면 기사
    295. 一夜兩處(일야양처)를 襲擊(습격)코 民家百餘戶燒却(민가백여호소각) 조선일보 1937.01.31 석간 7면
    296. 長白縣二萬餘同胞(장백현이만여동포) 凶作(흉작),衝火(충화)로離散(이산) 동아일보 1937.06.18 석간 2면
    297. 兵禍(병화)로校舍燒失(교사소실) 數百兒童道中彷徨(수백아동 방황) 동아일보 1937-06-23 조간 5면 / 宗山學校設立者(종산학교설립자) 金鼎富氏(김정부씨) 談(담) 동아일보 1937.06.23 조간 5면
    298.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 :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 昭和8年·13年》 /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299. 1937년 9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 : 조선총독부 기록물 昭和12年 第73回 帝國議會 說明資料(警務)
    300.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1.
      As Kim's nom de guerre was widely associated with an older guerilla who had performed legendary feats, many suspected him of being a complete fraud, so the next step was to build up Kim's image. "We elevated him into the status of a hero to bolster his work as a leader of Korea," Vassin said. "We had to prove he was a real person, the tiger of Mt. Paektu. We had to find his relations at the village of Mangyoungdae. We also had to discredit the information put out in South Korea that he wasn't the real Kim Il Sung. We had to prove he was an active fighter who had liberated the motherland."
    301. 월간 『以北通信』 제3권 제5호 (三八社, 1948.07.01) : p.10 《北朝鮮暗黑王 金日成夫人 金靜淑自殺未遂事件》
    302. 302.0 302.1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1의 2면
    30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320. : 나가시마 본인의 1971년 증언임.
    304. 304.0 304.1 304.2 304.3 304.4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9~320
      (진위 김일성 열전 43) 2대 김일성의 정체(상)|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3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44) 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5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45)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 종합 3면
      "'안경 낀 김일성'…보천보 업적 가로채려 사진 조작" 연합뉴스 2015/10/15
    305. 305.0 305.1 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第4篇/第9章 匪賊及住民(3) pp.1~2의 사진 맨 뒷줄 중앙의 모자 쓰고 안경낀 인물.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C13010013700、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 昭和27年(1952년)11月(防衛省防衛研究所)」
    306. 서대숙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 청계연구소, 1989) p.10
    307. 金日成夫妻东北抗日照 사진 앞줄 중앙의 같은 인물.
    308. 东北抗日联军 图册 바이두 백과
    309. 309.0 309.1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 Archived 2018.11.06
    310. 笠間史料 昭和14年度第一次警備行軍部隊行動詳報 / 3 行軍地方一般の状況 1939년 p.3 東北抗日聯合郡第一路第二方面軍編成表 指揮金日成(二八).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21441100、笠間史料 昭和14年度第一次警備行軍部隊行動詳報(防衛省防衛研究所)」
    311. 311.0 311.1 311.2 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 / 第5 討伐成果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20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 1로군 조직표에 나오는 X 표시가 된 이름은 사살되거나 투항한 사람을 뜻한다.
    312.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658 : (1942년 7월 16일) 제1로군 인원을 기간으로 하여 교도 제1영을 편성하고, 영장은 김일성, 정치위원은 안길로 한다. [以第一路軍人員爲基干, 編成敎導第一營 營長金日成 政治委員安吉] / p.661 : (1942년 7월 22일) 김일성의 계급은 대위 [金日成, 王效明, 許亨植, 柴世榮 軍稱號大尉 分任各敎導營營長]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89
    313. 沈志华, 试论八十八旅与中苏朝三 角关系 - 抗日战争 期间 国际反法西斯联盟 一瞥 近代史硏究 2015年 第4期 p.9
    314. 유순호, 김일성 1912~1945 (하권) (서울셀렉션, 2020)
    315. 《周保中 抗日救国文集》 周保中、金策关于来 X城商讨东北党和游击运动等问题给魏拯民的信(1941 年 3月 12 日)
      《东北地区 革命历史文件 汇集》 甲 61, pp.103~110
    316.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90
    317. 317.0 317.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진위 김일성 열전(45)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46)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 해방과 제3의 김일성 중앙일보 1974-08-02 종합 3면
    318.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324
    319.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著、「アルバム・謎の金日成 -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成甲書房, 1977.09) pp.132~133 : 특무휘보 1943년 5월 15일자 (만주국 경무총국 특무처 특고과 발행)
    320.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근거자료집』, ([서울] :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2002) p.198 : 국회도서관
    321. 오케안스카야(Океанская, Okeanskaya) 구글맵
    322. 「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0624300、各国軍事ニ関スル諜報雑纂(C-8-0-0-X4)(外務省外交史料館) p.15
    323.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4권 p.183 : 제12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 (1936.3-1936.5) - 1. 새 사단의 탄생
    324. [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325. 325.0 325.1 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326.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New York : New Press : 2003) p.115 : 북한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이 김혜순이며, 일본군에 체포돼 죽었다고 썼다.
    327. A Murderous History of Korea Canadian Dimension SEPTEMBER 7, 2017
    328. 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한겨레신문 2009-12-31 :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329. 재외동포의 역사적 경험과 생활-김우종 구술 (2014.06.25 ~ 2014.07.01) 녹취록 p.67 '김일성 가짜설' 반박 기사 집필 ;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중국서 김일성 항일투쟁 동지 가족 100명 인터뷰” 한겨레 2017-01-11 : 유 작가는 남한 내 일부에서 주장하는 가짜 김일성론도 철저하게 부정한다.
    330. 330.0 330.1 유순호, <김일성 1912~1945> (서울셀렉션, 2020) 상권 pp.262~263.
      해방되면 안도현장(安圖縣長)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331.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332.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333.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334.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335.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p.620 1941년 九月十四日 일기
    336. 주보중(周保中),《周保中抗日救国文集》, "周保中、金策关于第一路军部队改编为第一支队的等问题给陈翰章等人的信 (1941年 3 月 12 日)"
    337.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p.843 후기(后记) "考虑日记是 公开出版、故某些内容 进行了审愼的技术处理。(일기가 공개 간행되는 점을 고려하여 일부 내용은 기술적 처리를 했다.)"
    338. 김찬정(金贊汀) 지음; 동아일보출판부 옮김; 《비극의 抗日 빨치산》 (서울: 동아일보사, 1992) p.71
    339. 보천보전투, 누구의 작품인가 동아일보 2019-06-13
    340. 김일성은 보천보에 오지 않았다 NK Login 2019.06.14
    341. 김일성 연구 조선족 작가, '김일성평전' 중·하권 출간 연합뉴스 2018-11-02
    342. 세상에 폭로된 김일성 항일의 진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 블로그 2017-02-01
    343. 엔도 호마레(遠藤誉) 저, 박상후 역,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 모택동은 왜 일본군의 進攻에 감사했나≫ ( 타임라인, 2019년 06월 10일)
      중국의 산업공동화와 인민폐의 미래는 ? 박상후 유튜브 2019.5.26 : 5분 40초경부터
    344. 송재윤, <文革春秋: 현대중국의 슬픈역사> 4회. “1948년 장춘 홀로코스트”(II) pennmike 2018.01.19
    345. 공산주의 잔혹사#모택동 치하 중국 공산당의 만행
    346.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 역사로 벗기는 김성주의 가면 (연재 예고) 중앙일보 1974.03.23 종합 1면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회) 서장 - 5인의 「김일성」 중앙일보 1974.03.25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53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중앙일보 1974.09.03 종합 3면
    347.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7)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