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가짜설은 해방 후 소련군과 함께 평양에 온 북한 김일성(金日成)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 대중앞에 나선 당시 나이가 33세로 너무 젊어서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 사이에 가짜라는 소동이 벌어지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이후 김일성 가짜설은 수많은 월남민들에 의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져 당연한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 일찌기 김일성 장군 소문을 듣고 자라 직관적으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알았던 월남민 1세대 대다수가 작고하거나 퇴장할 무렵부터 김일성은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주장이 나와 점점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금도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함경북도 도민회장을 지낸 김허남(金許男, 1920~ )은 해방 직후 김일성이 처음 대중앞에 나서는 평양의 집회에 참석했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이 소학교때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나이가 맞지 않아 북한 김일성 측에서 일하던 친척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가 살고싶으면 그런 말을 꺼내지 말라는 협박을 당했다고 하였다.[1] 이런 식으로 언론자유가 없는 김일성 치하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지만, 단편적으로 이를 거론한 사례는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3][4][5]

개요

김일성 가짜설의 기원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서던 날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5][6][7][8] 군중들의 태반은 김일성보다 나이가 연상이었을텐데, 당시 33세이던 북한 김일성은 나이로 보아 그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집회 참석자들이 쉽게 간파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은 오랜 외국 생활로 연설하면서 한국말을 심하게 더듬거렸고[9][10], 그의 본명이 김일성 아닌 김성주라는 것이 알려진 것도 그가 가짜라는 확신을 더하게 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 대위(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ен)"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그가 너무 젊었기 때문에 가짜 소동이 일어났다.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 쪽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그는 당시 무명의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민족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했다고 1991년에 증언했다.[11] 김일성 왼편은 강미하일 소련군 소좌.

북한 김일성은 어려서 만주로 가 거기서 성장하여 국내에는 연고가 거의 없는 낯선 사람이었으니 대중들은 해방 전 그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실제 이름이 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1920년 무렵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도 만나본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두 사람의 나이가 맞지 않아 동일인이 될 수 없다는 것만은 자명했다. 이후 많은 월남민들에 의해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남한 사회에 널리 퍼져 사실로 인식되었다.

북한 김일성에 대해 가짜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생소한 인물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행적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된 오늘날에도 베일에 가려진 부분도 많고, 진위 논쟁조차 선명히 가려지지 않고 있는데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귀국한 이승만, 김구 같은 분들을 두고는 진위논란이 벌어질 여지가 없었지만, 김성주가 사칭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명성과 달리 실체가 애매한 이름이었던 것도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실체가 분명한 사람을 함부로 사칭할 수는 없으므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애매했기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었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해방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하던 북한 김일성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어릴 때부터 아는 익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북한이 수십년간 지속적으로 선전해온 조작된 김일성 경력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간 반면에, 일제시대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 이름을 듣고 자랐던 월남민 1세대들은 점차 세상을 떠나고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새로운 세대들이 주축이 되니 김일성 가짜설은 힘을 잃고 진짜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는 북한 김일성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으므로, 해방전에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일 조차 없고,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닐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것이 점차 밝혀져 마치 독립운동을 한 영웅이 맞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그의 본명은 김성주이지만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진짜가 맞다고 주장할 빌미가 마련된 것도 진짜설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월남민 1세대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오늘날 학계와 일반에는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어, 월남민들이 남긴 가짜 증언은 깡그리 무시되고, 그들은 항일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로 몬 멍청이 쯤으로 치부된다. 선배세대들에 대한 모독이다.

그냥 잊혀졌으면 그뿐인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인물이 스탈린과 소련군 덕분에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50년가까이 절대 권력을 유지하다 일족이 세습하는 체제로 만들어 놓다보니 그의 진위는 물론이고 세세한 행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연구

초기의 김일성 가짜설은 북한 김일성이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정도의 의미로 확산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도 북한 김일성의 실제 전력이나, 진짜 김일성 장군이 어떤 사람인가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단편적인 주장만 몇가지 나왔을 뿐이다. 당시는 전후 복구에 바쁜데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가난하던 시절이라 김일성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도 거의 엄두를 못낼 상황이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김일성에 대해 본격적인 심층적 연구를 한 사람은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허동찬(許東粲, 1932~ ) 등이다.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일제시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에 대한 많은 월남민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는데,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김일성 장군의 풍문이 있었으며, 1920년대 초에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12] 사람마다 증언하는 내용이 다양하여 김일성 장군을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김일성 장군 전설의 원형이 되는 인물로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 의병장 김일성 (金一成, 1888 ~ 1926)과, 일본 육사 나오고 백마타고 다녔다는 김일성 장군에 해당하는 인물로 김광서(金光瑞, 1888 ~ 1942) 장군을 들었다. 또 북한 김일성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1937년 6월 보천보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의 2군 6사장 김일성은 그 해 11월 13일 전사했다고 밝히고, 그 후에 나오는 제2방면 군장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북한 김일성이 유격대에 투신하기 전의 행적도 그의 창덕학교 동창이나 만주에서 그를 알았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상당 부분 밝혔다. 다만 김일성이 1932년 유격대 투신한 후부터 북한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의 실제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히지 못했는데, 그 시기의 일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자료 입수가 어려웠던 탓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는 일제시대 문헌에 대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무슨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어려웠고, 국교도 없던 중공이나 소련의 문헌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김창순, 허동찬 등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연구 논문이나 저서를 다수 남겼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이명영과 다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김일성 진짜설의 대두와 논리

1980년대에 들어 미국 하와이대 교수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과 일본 동경대 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의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연구에 힘입어 국내에서도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20년 무렵부터 알려진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 6월의 보천보사건 때부터 이며, 동아일보 등이 호외를 발행하며 크게 보도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으므로 그가 진짜가 맞다는 논리를 편다. 또한 보천보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데, 사람들이 유명한 인물이니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가짜라했다고 주장한다. 또는 만주는 기후가 혹독해서 나이 든 사람들이 활동하기 힘든 곳이므로 나이든 김일성 장군은 있을 수 없다고도 한다. 이것은 북한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 나설 당시에 사람들이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당사자가 아니라서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가짜라고 한 사안의 본질을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고, 만주는 나이든 사람들은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은 망발이다.

그들은 해방 당시 보천보사건이 과연 그렇게 유명한 것이었는지,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정말 유명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입증한 바가 없다. 오히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보천보사건도, 그 사건을 6사장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것도 몰랐고, 그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고 대다수 언론이 보도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는 많다.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고 나서 자신의 항일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집권한 때문에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진 것이다.

또 그들은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수많은 기록과,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6사장 김일성의 신원 기록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반박을 내놓지 못한 채 잘못된 기록이라고만 주장하는 형편이다. 나아가 보천보사건보다 2년 전인 1935년 2월에 그보다 더 큰 이홍광이 주도한 동흥습격사건이 있었지만 잊혀져 있다는 것은 무시하고, 유독 북한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보천보사건에만 지나치게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역으로 해방 후 김일성 아닌 이홍광이 집권했더라면 보천보사건은 잊혀지고, 동흥사건이 유명해졌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공산권 붕괴와 문헌 전산화 이후 발굴된 새로운 자료와 증언

1990년 무렵 구소련 붕괴와 중국의 개방으로 전에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산권 자료와 증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일제시대 문헌의 전산화로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어, 지금은 김일성의 진위 논란에 대해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놓은 잡다한 주장들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이 발굴 제시했던 근거 자료들과 새로 발굴된 증언과 원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북한 김일성의 진위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1990대 초 한소 수교와 구소련 붕괴 직후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해방 당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 공작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한 평양 소련군정의 핵심 인사들인 니콜라이 레베데프(1901~1992) 소장,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 ~ 2006) 중좌, 레오니드 바신(1915 ~ 2006) 소좌 등이 한결같이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도록 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들은 김일성 정권 탄생의 공로자일 뿐, 그에게 박해를 당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니 일부러 거짓 증언을 지어내서 할 이유도 없으므로, 이 사안에 대해 이들보다 더 정확히 알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국내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들의 증언이 나온지 3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내놓지 않고 있어, 불리한 증거들을 고의로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사고 있다.

새로 발굴된 대다수 일제시대 및 해방 직후 자료들도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의 양상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기록은 그가 대중 앞에 나선 직후인 1945년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록이나 증언의 구체적 내용은 연대순으로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이 중에는 드물지만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하는 것도 있다. 물론 아직 발견되지 않아 누락된 것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들 기록이나 증언에 나오는 김일성 장군은 일찍부터 알려진 거의 전설화된 인물이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의미이고, 보천보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서 가짜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44년 11월 18일 일본 귀족원 사상조사위원회(貴族院 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에 당시 조선에 "김일성이 영웅(金日成 英雄)"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다고 했다.[13]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1974)』에도 여러 월남민으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증언을 듣고 채록한 것이 나온다.[12]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특이한 것은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 ~ 1943)이 운영하던 창덕학교(彰德學校) 교사를 지낸 월남민 현응수(玄應洙, 1892 ~ ?)의 증언이다.[14] 그는 3.1운동 발발 보름 전인 1919년 2월 15일 창덕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당시 교장인 강돈욱의 집도 자주 방문하였는데, 그와 만주에서 활약하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강돈욱의 어린 외손자 김성주도 옆에 앉아 듣곤 했다고 하였다.[15][16] 김성주가 코흘리개일 때도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는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이고, 어린 김성주도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같이 들은 것이다.

또 사실 확인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해방 직후 김일성 장군 행세하던 김성주가 외조모인 위돈신을 찾았을 때, 외조모는 그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다고 못마땅해 했다고 하는데,[17] 일찍부터 남편 강돈욱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던 때문일 것이다. 김일성의 외가 쪽 10촌 동생인 탈북자 강명도(康明道, 1958 ~ )도 TV에 출연하여 김일성은 가짜라고 하면서, 자신들 집안에서도 그가 김일성인 줄 몰랐다고 하였다.[4]

일제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일제의 기록에 나오지 않으니 믿을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제의 기록도 전혀 없지는 않다. 1944년 11월 18일 일본 귀족원 사상조사위원회(貴族院 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에 당시 조선에 "김일성이 영웅(金日成 英雄)"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다고 했다.[13] 이 김일성이 바로 유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보이며, 축지법을 쓴다거나 하늘을 난다거나 하는 믿기 어려운 말들이 떠도니 실제 인물로 보기 어려워 유언비어라고 했을 것이다.

북한도 일찌기 1910년대부터 김일성 장군의 전설이 있었다고 인정한 바 있다.[18] 물론 이런 것도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려고 하다 혼선을 빚은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

김일성 가짜설이 나오게 된 정확한 배경

북한 김일성의 진위에 대해 논하려면 우선 가짜설의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만 시비를 정확히 가릴 수 있다. 그가 항일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니 가짜가 아니라거나, 일제시대에 김일성 이름을 쓴 적이 있으니 가짜가 아니라는 주장은 문제를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그가 가짜라는 주장이 처음 나온 것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섰을 때이다. 청중들 태반은 김일성보다 연상이었을텐데 어디서 무얼 하던 누구인지 모르는 33세의 젊은 사람이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명성을 들어왔던 김일성 장군이라고 하니 나이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하므로 가짜라 한 것이다.[19] 청중들은 그가 무슨 항일투쟁을 했는지, 이름은 무얼 썼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이런 것들은 문제가 아니고, 그가 청중들이 일찍부터 이름을 들어 알고 있던 그 김일성 장군이 맞느냐가 문제의 본질이다.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의 보천보사건 때부터라고 주장하면서 북한 김일성이 그 사건의 당사자가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해방 당시 보천보사건 자체나, 그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고 다수 언론에 보도된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20] 1935년 2월에 일어난 이홍광(李紅光, 1910∼1935)동흥습격사건보천보사건보다 일본측 피해도 더 컸고, 파장도 컸지만 오늘날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홍광이 국내에서 항일 영웅으로 부각된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천보사건과 그 주역 김일성에 대해서도 실제로는 마찬가지 였다. 북한 김일성이 집권 후 자신의 항일공적으로 보천보사건을 대대적으로 부풀려 선전한 때문에 그 사건이 유명해졌을 뿐이다.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19년 3.1운동 무렵에도 퍼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고, 적어도 1920년대 초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21] 평양의 집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눈앞의 김성주가 보천보사건의 주역 김일성이 아니라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라고 한 것이다. 나아가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사건의 실제 당사자도 아니면서 남의 공적을 자신이 한 일로 조작까지하였다.

북한 김일성은 전설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그 명성을 훔쳤다.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는 것은 근래에 발굴된 해방 직후부터 평양에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 2개월간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에서 밝혀진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부터 서울과 전국 도처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며,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 기타 미정" 등의 내용이 든 출처불명의 벽보와 비라가 나돌았다.[22][23][24][25][26]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55명 명단에도 이승만, 김구와 함께 김일성(金一成)도 들어 있다.[27]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에 발표된 대통령과 각료 적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군무부장 적임자로 김일성이 최다득표(309표 32%)를 하기도 했다.[28]

북한 김일성이 아직 소련군 88여단에 있거나, 평양에 왔더라도 아직 남한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때에 이승만, 김구와 나란히 거명되던 이 김일성은 당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였던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29] 풍문으로 떠돌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인 것을 그 시기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 정관해(鄭觀海, 1873~1949)의 《관란재 일기(觀瀾齋日記)》[30]에는 동진공화국 조각명단과 함께 김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45년 8월 17일 (음력 7월 10일) :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고, 국호는 동진(東振)공화국이며 연호는 영세(永世)라 한다. 대통령은 안모 (안모는 전일의 안중근의 아들)이고, 내무대신은 여운형, 외무대신은 김일성(金日成)이라고 한다. [朝鮮爲獨立國, 國號東振共和國 年號永世, 大統領 安某, 安某 卽前日安重根之子, 內大 呂運亨, 外大 金日成云]"

    1945년 8월 26일 (음력 7월 19일) : "김일성군(金日成軍)은 말타고 하루 500리를 달릴 수 있으며, 그 정예하기가 비할데 없다고 한다. [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23]

    김일성 군대는 말타고 천리마에 준하는 속도인 하루 5백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김일성은 거의 전설화된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이나 소련군 시절 말타고 다니거나 기병부대를 거느린 적이 없다.


    전라북도 진산군(珍山郡,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거주했던 최병채(崔炳彩, 1907~1974)가 쓴 《최병채 일기(崔炳彩日記)》 1945년 8월 18일(음력 7월 11일)자[31]에도 아침 식사 후 친지들과 대전에 나갔다가 들은 바를 적고 있다.

    1945년 8월 18일 (음력 7월 11일) 토요일 : 七月十一日己未(陽八月十八日、土曜日)
    대전시에 나갔다가 들은바로 조선의 독립이 확실하며 나라 명칭은 동진공화국(東辰共和國)이고, 연호도 역시 동진(東辰)이라 한다. [往大田市、依見聞、則朝鮮獨立的確、而名稱乃東辰共和國、年號亦東辰也。]
    .............
    대통령은 김구, 총리대신은 이승만, 외무대신은 여운형, 육군대신은 김일성이다. [大統領 金九、總理大臣 李承晩、外務大臣 呂運亨、陸軍大臣 金日成。]


    이처럼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은 전국적으로 퍼져있었고, 각료 명단도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일성은 거의 빠짐없이 나타난다. 당시 하바로프스크 인근 소련군 부대에서 5년째 복무하고 있던 진지첸 (Цзин Жи Чен, 북한 김일성) 대위는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사로, 이런 명단에 단골로 끼일만한 사람이 못되었다. 조각명단의 김일성은 일찍부터 유명했고, 적어도 함께 거론되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라야 한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소련 군함을 얻어타고 비밀리에 입북하여 한달간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32] 잠행하며 민심을 살피고 돌아다닌 이유도 그가 무명인사였기 때문이다.
  • 일본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東京版)』 1945년 10월 3일자[33]는 해외 각지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 金日成 씨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출신. 만주에서 ‘김일성 軍’을 조직하여 만주사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약 조선 반도민의 인기를 획득하였고 이동휘 (李東輝, 1873-1935) 씨의 세력 실추 후 친소파의 제일인이 되었다. 중공은 그를 이용하여 만주 방면의 지반 획득을 위해 그에게 북만성위원, 東北抗日聯 제3路軍 제10 지대장 및 정치위원의 지위를 주었고 이번 소련의 북조선 진주와 함께 평양에 들어온 모양이다.
    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김일성이 일본 육사를 나오고 만주사변(1931년) 때부터 유명해졌다고 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후대에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김일성과 동일인물로 알고 있는 듯하다.
  • 해방당시 국민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한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이날은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날 평양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기대했던 김일성 장군도 이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김성주는 데뷔 첫날부터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자유신문(自由新聞) 1945년 10월 17일자 기사 : 莫府(모스크바)서 작전을 연구(作戰을 硏究) / 일군 항복(日軍 降服) 전(前)에 대반격전(大反擊戰)을 준비(準備) / 김일성 장군(金日成 將軍)은 건재 활동 중(健在 活動 中)


  •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는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를 소개하는 연재기사에 이승만, 김구에 이어 5번째로 김일성을 소개하면서, 을지문덕, 이순신에 비견되는 유명한 장군이며, 일본군 장교 교육과정(일본 육사)을 이수했으나 독립운동에 나섰고, 그 부하가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을 저격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34]
    명사(名士)의 편영(片影) (其五) : 김일성씨(金日成氏)

    金일성氏는 유명(有名)한 장군(將軍)이다. 그 웅용(雄勇)한 기상(氣像)은 을지문덕(乙支文德) 추억(追憶)하게 되고 그 지모(知謀)의 종횡(縱橫)은 이충무공(李忠武公)을 연상(聯想)하게 된다.

    김장군(金將軍)은 청년(靑年)에 급(笈)을 부(負)하고 병학(兵學)을 수(修)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국주의시대(帝國主義時代)의 장교(將校)되기는 실허하였다. 그는 편신(片身)으로 비주(飛走)하야 두만강(豆滿江)을 건너갔다. 당시(當時)는 한국(韓國)이 일본(日本)에게 합병(合倂)되야 일본인(日本人)의 학염(虐焰)은 三千里 江山을 덮었고 일본군(日本軍)의 견봉(堅鋒)은 두만강북(豆滿江北)까지 진출(進出)하야 당시(當時) 북만(北滿)에 있는 조선(朝鮮)의 독립당(獨立黨)을 초멸(剿滅)하야 그 참혹잔인(慘酷殘忍)이 극(極)하였더니라. 이때이었다. 金일성 장군(將軍)은 의용병(義勇兵)을 모집(募集)하야 일본(日本)과 항전(抗戰)하였다. 그의 과소(寡少)한 병중(兵衆)으로도 일본병(日本兵)의 가슴을 서늘케한 일이 자조 있었다.

    당시(當時) 조선(朝鮮) 와있던 일본인(日本人) 총독 모(總督 某)는 조선(朝鮮)의 국경(國境)을 순시(巡視)키 위(爲)하야 혜산진(惠山鎭) 방면(方面)을 향(向)하였다. 일본인(日本人) 총독(總督)이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 남안(南岸)으로 내려갈 때에 압록강(鴨綠江) 북편(北便)에서 날아오는 탄환(彈丸)은 총독 모(總督 某)의 심담(心膽)을 놀래기 극(極)하였다. 총독 모(總督 某)는 황겁(惶怯)하야 여행(旅行)을 중지(中止)하고 도라왔다. 그런데 그 탄환(彈丸)은 金일성 장군(將軍) 휘하(麾下) 용사(勇士)의 탄환(彈丸)이라 한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이러나고 세계전쟁(世界戰爭)이 열리매 김장군(金將軍)은 소련대군(蘇聯大軍)과 일치행동(一致行動)하야 다수(多數)한 조선병사(朝鮮兵士)를 거느리고 용감(勇敢)히 전투(戰鬪)하였다. 그는 맛침내 승리(勝利)의 월계관(月桂冠)을 취(取)하고 지금 소련(蘇聯) 연해주(沿海州) 방면(方面)에 있어 조만(早晩)에 귀국(歸國)한다는 말이 전(傳)해 온다.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10.14 [34]

    급(笈)을 부(負)하다 : 책 상자를 짊어지다

    이 기사가 나간 날은 공교롭게도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이처럼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실제로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있었는데,[35] 나중에 다른 사람이 한 일로 밝혀지지만[36], 항간에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37] 당시는 1921년의 갑산군 함정포(含井浦) 사건[38] 등 국경 근처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사건은 으례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37]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37년 보천보사건 때부터가 아니라 1920년대 초에도 이미 유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1945년 10월 17일자 『자유신문(自由新聞)』은 유명한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이 독일 패망 후,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대반격전을 준비하기 위해 장교단 100 여명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가서 독·소전(獨·蘇戰)의 작전을 연구중에 해방을 맞았으며, 나이가 금년 50(쉬은)이라고 하였다.[39] 이 김일성장군도 명백히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나타난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쓴 기사이다.


해방후 북한 김일성이 대중앞에 처음 나서기 직전의 위와 같은 기록들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각료 물망에까지 올리던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실존 인물 누구라고 지목하기는 어려운 반전설적 인물로 나이가 적어도 50세 가량은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평양에 온 33세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을 때 사람들이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가짜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평양의 대중들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국내에서 소련군에 그런 인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는 누구도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모르는 낯선 사람에 불과했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지만, 위에서 보다시피 해방 직후 김일성 관련 기록들 어디에도 보천보사건은 거론조차 되지 않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 김일성(金一成)이 어떤 사람인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27] 당시 북한 김일성은 아직 소련군 88여단에 있었고, 북한 지도자로 결정되기도 전이라 국내에는 그런 사람의 존재도 알려지기 전이다. 따라서 이는 동진공화국 조각 명단의 김일성이나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는 이승만, 김구도 귀국하기 전이라 본인 동의없이 임의로 만든 명단이므로 김일성 이름도 그런 식으로 넣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잡지 선구의 여론조사는[28] 1945.10.10 ~ 11.09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당시 지지도라면서 흔히 인용된다. 하지만 조사 기간 중인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북한 김일성에 대해 남한에는 아무 것도 알려지기 전이므로 동진공화국 육군대신 김일성이나 10월 14일자 민중일보 기사에 난 것처럼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지지도로 보아야 한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조차 1945년 11월 5일에야 《조선의 청년영웅 김일성장군을 환영》이라는 기사[40]에서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에 대해 처음 보도했고, 대다수 신문들은 11월 중순 이후부터 북한 김일성에 대한 기사를 싣는다. 조사 당시 평양에서는 북한 김일성에 비해 조만식에 대한 지지도가 압도적이었으므로, 서울에서 김일성의 지지도가 조만식보다 높게 나온 것은 북한 김일성에 대한 지지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든 소련 군정 당사자들의 '김일성 가짜' 증언

해방 후 공개적으로 귀국하여 곧바로 활동을 시작한 이승만, 김구와 달리 김성주는 9월 19일 비밀리에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으로 왔고, 연해주 사령부의 스티코프(Terentii Shtykov, 1907-1964) 중장은 평양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1992) 소장에게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고 지시했다.[11] 김일성은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32] 한 달 가까이 잠행하며 민심을 살피다 10월 14일에야 공개석상에 등장했다. 이런 일은 김일성 본인이나 소련군정이 그가 국내에서 무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무명인사가 대중앞에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서는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군정은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11] [19] 당시 일에 대한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

"김일성이 나의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극동사령부의 스티코프 중장(후에 대장)으로부터 암호 전문이 날아왔다. 김일성을 당분간 인민들에게 노출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은밀히 정치훈련을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감은 적중했다.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드는 작전에 들어갔다. 특수선동부장 코비첸코에게 김일성의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히고 가슴에 달고 다니는 적기 훈장도 떼어 내라고 지시했다. 일부 북조선 인민들의 반소감정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박정애와 김용범은 두 벌의 신사복을 구해 오는 등 붉은 군대 사령부 사업에 적극 협력했다.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일성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우리는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이 아이디어는 핵심지도부를 놀라게 했다. 훗날 북조선 민주기지 건설의 총 지휘자 스티코프 장군도 이 아이디어는 ‘조선의 민주기지 깃발’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
"[11]

이 사안에 대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평양 현지에서 직접 진두 지휘한 레베데프 소장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을 사칭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이에 대해 더 이상 논란할 여지는 없다. 레베데프는 또한 10월 14일의 집회에서 가짜 김일성 소동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증언한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 당일의 사진. 좌로부터 통역을 맡았던 강미하일 소련군 소좌 (고려인), 김일성 및 소련군 그리고리 메클레르(Григорий Меклер, 1909~2006) 중좌.
≪비록(祕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1992년)≫ 에 수록된 레베데프의 증언[6]
『숨김없이 말한다면 김일센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인민들에게 잘 알려진 위대한 반(半)전설의 애국 영웅 김일성장군을 상징하기 위해 김일센과 그의 부하, 그리고 당시 북한 내 공산주의자들과 상의해 「김일성장군」으로 소개했던 거지요.....(중략)..... 마지막으로 김일센의 연설이 끝나자 군중들이 주석단 앞까지 몰려와 「가짜 김일성이다」며 소동을 벌였지요. 조금은 난감했습니다. 주최측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몽둥이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까요. 이같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대회 후 기자들을 만경대 김일센 생가로 데리고 가 그의 조부모·숙부와 숙모 등 친·인척 모두를 소개했지요. 그랬더니 인민들의 여론이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장준익(張浚翼), 북한인민군대사(北韓人民軍隊史)≫ : 1991년 8월 22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레베데프 소장과 저자의 대담 중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환영집회에 대한 증언[7]

『金日成 동지의 발언이 있겠다고 소개하니까 그곳에 모인 군중은 열화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는 金日成장군에 대한 국민들의 대단한 인기를 알 수 있었고, 연설이 끝난 후 金日成(김성주)은 진짜 金日成 장군이 아니다 라는 여론이 비등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군정당국은 우익단체의 사람들을 만경대(김성주의 生家가 있는 곳)로 데려가서 항일투쟁에 참가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려 했습니다.』


소련군정 당시 KGB 장교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공작에 간여했던 레오니트 바신(Leonid Vassin, 1915~2006)도 후일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했다.[41][42]

김(일성)의 이름이 전설적인 공을 세운 연상(年上)의 게릴라와 연관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가 완전한 사기라고 의심했으므로, 다음 단계는 김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조선의 지도자로 일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그를 영웅의 지위로 끌어 올렸다."고 Vassin은 말한다. " 우리는 그가 진짜이며, 백두산의 호랑이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 우리는 만경대 마을에서 그의 친척들을 찾아내야 했고, 또 남한에 퍼져있는 그가 진짜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문도 불신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그가 모국을 해방시킨 맹활약한 전사인 것을 증명해야 했다."[42]
[Jasper Becker,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1.]


소련군정에서 김일성의 정치담당 고문역을 했던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 중좌도 후일 증언에서 자신이 1944년 하바로프스크88여단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소련군에서의 당시 이름은 진지첸) 대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만났으며, 김일성은 유명한 죽은 전임자의 이름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43] 그는 또한 이런 말을 북한 김일성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도 했다.[44] 당시 김일성은 자신이 북한 지도자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할 때라 사실대로 말해도 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1992년 6.25 발발 42주년 KBS 특집방송에서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45]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가 끝난 후 저녁 무렵 만경대를 찾은 김일성.[46][47] 앞줄 왼쪽 끝이 강미하일 소좌, 오른 쪽 끝이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 화살표가 김일성. 세 사람의 복장이 민중대회 행사 당일의 것과 동일하며, 김일성은 여전히 적기훈장을 달고 있다.
메클레르씨 (84세 모스크바 거주 / 소련 25군 정치담당 / 44년 88여단에서 김일성 만나고 해방 직후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운 소련군 실무장교중 유일한 생존자)[48]

44년 88여단에서 처음 김일성을 만났을때 그는 별 특징이 없었고,그를 지도자로 만들 생각도 없었다. 45년 9월 미네스코와 (메레츠코프의 오기) 원수와 군사위원회 스티코프 상장으로부터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33세 김일성 가짜"

그 당시 사람들에게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전설적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33세의 김일성을 본 후 가짜가 왔다고 인민들 사이에 여론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디어를 내어 기자-카메라 기자들에게 연락후 만경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그의 할아버지-할머니-삼촌 등을 만나 그의 위신을 높여 주었다. 기자를 통해 선전한후 가짜 김일성이라는 말이 없어지고 진짜 김일성이라 인민들이 믿게 되었다. 만경대를 찾아갔을 때 동생인 김영주가 있었는데, 신발도 안신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옷을 마련해 그를 모스크바로 유학보냈다.

이처럼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 수령만들기 정치공작을 직접 지휘하고 수행한 소련군정 고위 장교들도 후일 한결같이 북한 김일성이 남의 이름을 빌려 사용한 것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10월 14일의 평양 군중 집회에서 가짜 김일성 소동이 벌어지자, 이런 소문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집회가 끝난 후 저녁 무렵 기자들 및 여러 사람들을 김일성의 고향 만경대 마을로 데려가 그가 조부모와 친척 및 고향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 보여 이런 소문을 잠재우려 했다는 것도 당시 사진과 기록에서 사실로 확인된다. 당시 김일성의 만경대 방문에 기자로 수행했던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김일성장군 개선기(金日成將軍 凱旋記)」라는 제목으로 보도 기사를 썼고,[46]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하여 그때 일에 대한 자세한 글을 남겼다.[47]

해방 직후 북한 문헌 속의 김일성 가짜 증거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나섰다가 가짜 소동이 일자, 이러한 소문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기자들과 여러 사람들을 고향인 만경대 마을로 데려가서 조부모와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 보이던 당시 수행기자였던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은 이 일에 대해 쓴 기사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를 10월 19일부터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연재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49]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3] 8.15 해방(八ㆍ一五 解放)이 되자 이 「혁명가(革命家)의 집」에서 나오는 소리는 「일성(日成)」 두 字뿐이었다. 과연(果然) 얼마 지나서 김일성(金日成)이 평양(平壤)에 나와 있다는 소식(消息)이 들려왔다. 그러나 소문(所聞)에 의(依)하면 그 일성(日成)이는 五十이 넘었다느니 장개석(蔣介石)이 친구(親舊)라느니 이런 말 뿐이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는 「그럼 그것은 우리 일성(日成)이는 아닌 가보다」 이런 말을 하며 궁금해 하였다.

[p.87] 「새로운 개선(凱旋)의 날」

장군(將軍)이 귀국(歸國)한 후(後) 그 제일성(第一聲)과 용자(勇姿)를 맨처음으로 지상(紙上, 平壤民報)에 취급(取扱)하는 영광(榮光)과 장군(將軍)에게 「장군(將軍)」이라는 칭호(稱號)를 지상(紙上)을 통(通)하여 처음으로 받드는 영광(榮光) – 기자생활(記者生活) 최대(最大)의 영광(榮光)을 지닐 수 있은 필자(筆者)는 또한 장군(將軍)의 만경대(萬景台)에의 개선행(凱旋行)에 수행(遂行)을 하여 그 세기적(世紀的) 감격장면(感激場面)을 몸소 가슴깊이 인상(印象)받을 수 있었다.

북한 김일성을 찬양하기 위해 쓴 위 글에서조차 당시에 북한 김일성이 아닌, 나이가 50이 넘었고, 장개석(蔣介石, 1887 ~ 1975)과 친구라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소문만 나돌고 있었다고 의도하지 않은 고백을 하고 있다. 장개석의 친구라는 말은 이북(李北)의 『김일성 위조사(金日成 僞造史)』](1950)에 "장개석씨(蔣介石氏)도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 陸軍士官學校)에서 수업(修業)을 하였는데 氏의 3년 후배(三年 後輩)로서 김일성 장군(金一成將軍)은 제2위(第二位)의 성적(成績)으로 졸업(卒業)하시었다."라 한 것이나[50], 조선일보 1953년 7월 27일자 기사에 "김일성(金日成)과 김석원(金錫源) 및 장개석(蔣介石) 등(等)은 한때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 陸軍士官學校) 학생(學生)이었던 것이며 추후(追後) 그들은 각자(各自)의 행로(行路)를 취택(取擇)하여 모다 유명(有名)하여진 것이다."라 한 것[51] 등과 같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 장개석과 같은 일본 육사 동창이라 친분이 있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필자 한재덕의 의도와 무관하게 역설적으로 해방 당시 북한 지역에 널리 알려진 김일성은 나이 50이 넘고 일본 육사 나왔다고도 하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일 뿐, 소련군 진지첸 대위였던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글 마지막의 「새로운 개선(凱旋)의 날」은 한재덕이 1946년 봄 만경대를 재차 방문한 후 쓴 것으로 『문화전선(文化戰線)』 간행 때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 한재덕은 자신이 처음으로 북한 김일성에게 「장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붙여 활자화 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소련군 대위 출신의 북한 김일성이 그 전에는 「장군」이라 불리지도 않았고, 그는 전설같은 풍문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한재덕은 1959년 귀순 후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에서 그가 김일성에게 처음 「장군」이란 칭호를 붙여주게 된 과정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52]

해방후 평양에서 처음 나온 신문,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기관지 「平壤民報 (평양민보)」창간호는 낡은 윤전기로써는 미처 찍어낼 수가 없으리만큼 날개가 돋혀 뿌려졌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목마른 사람 냉수 마시듯 그것을 읽었다. 그것은 「다브로이드」판의 빈약한 것이었으나 문제의 인물 의문의 인물 金日成 (김일성)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환영군중대회」를 취급한 제一(일)면 「톺」기사에서부터 金日成(김일성)의 말에 의하여 그의 경력, 포부, 그의 고향, 가정일 등을 소개한 「내리다지」기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각면 전부가 金日成(김일성)에 관한 것으로 메워져 있었다. 그 선전효과는 가히 짐작할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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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와 글 끝에서 나는 처음으로 金日成(김일성)을 「장군」으로 부르고 「민족적 영웅」으로 추켜 세웠다. 「凱旋(개선)」이라는 말도 이때 내가 처음 쓴 말이었다. 金日成(김일성)이 처음 공개될 때에 그를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하는 것이 잠시 논의되었다. 공산사회식으로 「동무」나 「동지」라고만 하는 것은 우상화하려는 「영도자」에 대해 너무 위신이 안선다. 「氏(씨)」라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선생」이라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남같이 「박사」라고 하기도 안되었다. 그래서 「소련」 사람들도 처음(「다마야」에서의 환영간담회 때만 해도) 그를 우리에게 소개할제 어제까지 자기 군대의 「소좌」로 있던 사람을 갑자기 「장군」 이라고 하는 것이 차마 쑥스러웠든지 아직 그저 「다와리시치· 김일쎈」(김일성 동무)라고 했었다.
그것을 李周淵(이주연)등이 金日成(김일성)의 본심을 받들어 궁리를 한끝에 「장군」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소련」장군들도 이 땅 공산주의자들의 아첨 기술에 새삼 감탄하고 만족하였다. 「마이용(少佐(소좌))·김일쎈」은 일약 「게네랄 (將軍(장군))·김일쎈」으로 수계급 특진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장군」칭호를 처음으로 활자(活字)화하고 지상으로 처음 「임명」한 것이 내가 된 셈이었다. 이래로 북한에서는 金日成(김일성) 밑에는 반드시 「장군」이란 「렛텔」이 달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金日成(김일성)을 「장군」 으로 「임명」하고 영웅화한 것이 韓載德(한재덕)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부 터 유래한 것이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들도 그를 장군이라 부르지 않았다고 황장엽이 증언했다.[53]

한때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투쟁에 참가한 임춘추는 사람들이 '김일성 장군님' 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무슨 장군님이라는 말을 쓰겠소? 그저 김일성 동무라고 불렀지" 라고 말하였으며, 최현이나 최용진 같은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은 '김일성 동무'라고도 하지 않고, “내가 김일성에게 전화했소" 또는 “김일성이 오늘 나를 수산상으로 임명하였소" 라고 대중들 앞에서도 공공연히 말하곤 하였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김일성과 김정일뿐만 아니라, 임춘추가 제 이름자 도 쓸 줄 몰랐다고 말한 김정숙까지 우상화하여 항일의 여장군' 이라고 하면서 김일성·김정일과 함께 '3대장군 기념비'를 세우는 소동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소련군 대위 진지첸(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대중들에게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지만, 만주나 소련에서 그가 장군으로 불리웠던 적도 없고, 평양에 온 소련군 장성들도 처음에는 그를 「다와리시치 김일센 (товарищ Ким Ир Сен [Comrade Kim Ir Sen])」 즉 '김일성 동무'라고 불렀다는 것도 그가 일찍부터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졌던 반전설적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김형직도 아들들에게 김일성 장군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해방 직후 1945년 9월 15일부터 1946년 5월 6일까지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縣)의 중국군 부대에서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 )와 침식을 같이하며 붙어 살다시피 한 이용상(李容相,1924.7.1∼2005.4.11)[54]은 1991년 중앙일보에 『나의 친구 김영주』라는 제목으로 당시 일에 대한 회고의 글을 5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 연재글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용상 자신도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지만, 김형직(金亨稷, 1894~1926)도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해주며,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김영주가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므로, 이 때문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선호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아닌 가짜가 맞다고 그의 친동생 김영주가 이미 해방 직후에 증언했던 것이다. 중국군에 있을 당시 김영주는 평양방송을 듣고 북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김일성이 자신의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백발장군이 어떻게 33세인가" 꼬리문 의문 : 노장군이 물려준 이름이라는 김영주의 변명[55]

김일성의 친동생인 그가 자기 큰 형 이름이 원래는 김성주였는데 지금은 김일성, 즉 오늘(1945년10월14일) 모란봉 공설운동장에서 시민환영을 받은 김일성이라고 분명히 필자에게 말했다. 김성주가 지금은 김일성으로 됐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필자가 10세 전후일 때 우리 아버님은 약주를 드시면 언제나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이 피면」하는 『봄 노래』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노래가 끝나면 반드시 『이제 곧 김일성 장군이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김일성 장군은 백발노인으로 축지법을 쓰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 백발장군이 지금은 몇살쯤 되셨을까. 나는 김영주에게 물었다.
『김 동지, 형님의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길래 김일성 장군이란 말씀입니까.』
그는 서슴지 않고 33세라고 대답했다. 33세라면 내 계산과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따져봐도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챈 김영주는
『네, 알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해야 할 김일성 장군 나이가 왜 33세냐는 말씀이지요. 나 역시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얘기하셨으니까요.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요.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은 내가 6세때 돌아가시고 모친도 내가 12세때인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성주형을 따라다니며 유격대 노릇을 했습니다. 그 위험한 나날로 보아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참 용한 거지요. 철주라는 작은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19세때 남만주 동령현 노흑산에서 전사했지요(노흑산은 산명이 아니라 간도성에 있는 지명이라고 했다).
성주형님은 만주에 있는 우리독립군 사단장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전투를 잘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름을 물려준 겁니다. 형님에게 이름을 물려준 김일성 장군도 역시 그 전대의 진짜 장군으로부터 이름을 물려받았답니다.』

『네, 그것을 양명이라고 하지요. 이름을 물러 받은 김 동지의 형님은 승명한 것이고. 김 동지, 그런 연유로 형님이 젊은 나이에 김일성 장군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김 동지의 「김일선(金日鮮)」이란 이름은 누구에게서 승명한 겁니까.』
『이것은 내가 적당히 지은 겁네다. 왜「일선」 인지 아십니까.』
『…….』
『아주 간단합네다. 일본 놈들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속임수로 떠들던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한 몸과 같다고 기만하기 위해 만든 조선총독부 표어)를 본떠 나는 일선(일본과 조선)이라고 했습니다. 내 속셈은 급할 때 일본군경에게 「자 보시오. 나는 내 이름까지도 일선 일체라는 뜻에서 일선이라고 지었지 않느냐」고 둘러대기 좋게 만든 이름입니다. 실제로 일선이라는 이름의 효과도 봤디요.

그러나 일선의 참뜻은 김일성형의 「일」과 조선의 「선」을 딴겁네다.』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은 국내에서 무명인사

북한 김일성은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거기서 성장하였고, 오랜 외국 생활로 해방 당시 조선 국내에는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완전한 무명인사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 본인은 물론이고 소련군 고위관계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무명인사를 여러 가지 정치 공작을 통해 대중들이 지도자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소련군정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은 김일성이 활동한 만주의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이란 조직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소련에 조선인들을 수용한 88여단이란 부대가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전무했다. 일본 군경의 강력한 정보망도 소련으로 도피한 동북항일연군을 수용한 남야영(南野營, B캠프), 북야영(北野營, A캠프)이나 88여단의 존재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니 일반 조선인들이 거기에 진지첸 (Цзин Жи Чен, 김일성) 대위 같은 사람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김일성의 해방 전 행적에 대해서는 중국의 개방과 구 소련 붕괴 후 관련 문서들이 공개되고, 관련자들 증언이 나오면서 비로소 대강의 줄거리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정확한 내용을 거의 알 수 없었던 것도 김일성이 해방 당시 무명인사였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 결과가 나온 오늘날에도 그의 행적 일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논란이 되고 있다. 일각의 주장대로 해방 당시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당시 김일성이 국내에서 무명인사였다는 증거는 많지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증언을 소개한다.

해방 후 북한으로 오기 직전 메클레르 중좌는 김일성과 함께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이 소속된 제1 극동전선군의 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를 만났는데, 후일 그때의 일에 대해 회상하면서, 김일성을 포상한 후에 메레츠코프 원수가 메클레르를 불러서 "이 사람을 잘 도와주게. 오랫동안 타국에 머물다 처음으로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북한에는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네. 그를 데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그를 알리게."라고 당부했다고 하였다.[43][44] 메클레르는 실제로 메레츠코프가 지시한대로 김일성과 함께 북한 각지를 다니며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그를 알리고, 지방 조직을 점검하였다.[56]


또 해방 직후 평양에서 살았던 김병기 (金秉騏, 1916~ ) 화백은 당시 김일성이 화가들을 소집하기에 가서 만났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장군’의 곁에 경호책임자 임춘추가 서 있었다. 젊은 김일성이 다소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짧은 상고머리에, 호탕한 성품임을 보여주면서, 지식인 풍모까지 연상시켰다. 그는 만주에서 펼친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평양 사람들은 김일성의 실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예술인들에게 요구했다. “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예술인 여러분께서 나를 선전해 주시오.” 《한겨레 2017. 02. 02》[57]

―김일성도 만나보셨나요?

“김일성이 미술에서 셋, 문학에서 셋, 음악에서 셋, 이렇게 부르더라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자기 그림(초상화)도 좀 그려주고 ‘드라마(이미지)’를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때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가짜다’, ‘일정 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항일 투쟁하던 그 김일성이 아니다’ 그런 소문이 있었거든.” 《조선일보 2005. 08. 23》[58]

이처럼 김일성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 예술인들까지 동원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안우생(安偶生, 1907~1991)도 1945년 12월 5일의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씨는 상당한 고령이며, 평양에 와 있는 33세의 청년 김일성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였다.[59]

문(問): 김일성씨(金日成氏)와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관계(關係)는 어떠하며 최근(最近) 평양(平壤)에 와잇는 삼십이세(三十二歲)의 청년(靑年)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어떤 분인지?
답(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만주(滿洲)서 활동(活動)하엿슴으로 임시정부(臨時政府)와는 아무 연락(連絡)도 업섯다. 그리고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지금(至今) 상당(相當)한 고령(高齡)인데 평양(平壤)에 와 잇는 김일성씨(金日成氏)는 엇던 분인지 모른다.[59]

다른 사례로 1946년 8.15 때 북한서 간행된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에는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조앗다.」라는 제목의 박석정(朴石丁, 1911~?)의 시가 나와 있다.[60]

...(전략)...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좋았다 / 우리는 우리 옆에 그를 찾어 내었고 ...(중략)...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물어서 무었하랴 / 그대가 가는 곳에 인민(人民)이 있고 / 인민(人民)이 가는 곳에 장군(將軍)이 있다.

이런 것도 당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해방 전 전력을 거의 알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시가 김일성에게 누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듬해 간행된 박석정의 개인 시집 《개가(凱歌)》에는 이 시가 대폭 개작되어 제목도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으로 바뀌고,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몰라도 좋았다"는 말은 삭제되고, 끝 부분의 "김장군(金將軍)의 과거(過去)는 물어서 무었하랴"는 "장군(將軍)의 과거(過去)는 우리의 영예(榮譽)"로 바뀌었다.[61]


이처럼 전력을 잘 알 수 없는 김일성에 대해 가장 직설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한 사람은 남로당 중앙위원회 간부 부장인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이다. 그는 1947년 여름 소련 유학을 간다면서 평양에 들렀다가, 북로당 중앙 간부 부장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김창만(金昌滿 1907~1966) 등과의 술자리에서 김일성박헌영 중 누가 더 지도자로 적합한가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이현상이 했다는 발언을 박갑동(朴甲東, 1919~ )이 증언했다.[62]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람(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그들의 지시로 외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것밖에 더 있느냐. 그러나 박헌영은 국내에서 투쟁했다. 그것도 그 사람보다 15년이나 일찌기 말이다. 박헌영은 25년에 조선 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 탄압에도 국내에서 투쟁해 왔다. 그의 경력이야말로 한점의 흐린데도 없는 사람이다.
김일성은 내가 듣기로는 본명이 김성주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왜 김일성이 됐는가 명백하지도 않고 그의 투쟁 경력도 확실한 것을 알리지 않아 불투명한데가 많다. 어떻게 박헌영을 제쳐놓고, 해방 후 외국에서 갑자기 나타난 경력 불명의 자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겠는가.』

이현상의 발언은 박헌영을 추종하던 남로당 계열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북한 지도자 자리를 굳혀가던 김일성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남로당 간부가 북한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면 남북한의 일반 국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박헌영 본인도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 사이의 논쟁을 박헌영과 김일성이 알게 되자 박헌영은 재빨리 이현상을 견책하여 소련유학을 취소시키고 서울로 보냈다. 김일성은 이상조를 간부 부장직에서 해임, 상업관리국장으로 강등시켰다고 한다.[62] 이상조는 1989년 방한하여 자신과 김창만이 이현상과 사이가 껄끄러워 한직으로 좌천되었으며, 6.25 당시 자신은 상업성 상업관리국장의 한직에 있었기 때문에 남침 계획을 사전에 잘 알지 못했다고 하였는데[63], 이는 박갑동의 위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북한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에 맞서 결사항전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하여 해방 때까지 5년간 아무 항일투쟁을 하지도 않고 지냈다는 것도 그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이현상과의 논쟁에서 김일성을 강력히 옹호했던 이상조는 1989년 방한 때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도주한 일과, 가장 중요한 항일투쟁 시기인 1940년에서 해방 때까지 하바로프스크의 88여단에 도피해 있은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64] 북한 전문가 이현웅도 "항일무장투쟁은 1940년에서 1945년 해방되기 전 5년 간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김일성은 이 기간에 소련으로 도망쳐 극동군사령부 소속 ‘88여단’에서 만주 등 국경지역 침투 및 정보수집을 위한 간첩교육을 받았을 뿐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이런 약점들을 덮기 위해 ‘보천보전투’를 신화적 수준으로 날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평가한다.[65]

이런 일들에서 보듯이 해방당시 김일성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고, 해방전 그가 어디서 무얼하다 온 사람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므로 33세에 불과한 그가 일찍(적어도 1920년대초)부터 명성이 드높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가짜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에서 그가 가짜라는 말이 널리 퍼진 것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를 폄하하기 위해 지어낸 탓이 아니라 수많은 월남민들의 말을 통해서 였다. 미군정이나 한국정부, 또는 남한의 여러 사람들이 북한 김일성에 대해 남긴 기록을 보아도 그가 막연히 만주에서 게릴라 활동을 한 전력이 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측 주장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력이 조금씩 드러나기는 하지만 정확한 그의 행적은 수많은 문헌과 증언들이 나온 지금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고 논란이 지속된다. 소련군이 그를 훈련시켜 지도자로 발탁해서 데려온 과정도 1990년대 소련 붕괴 후에나 제대로 밝혀졌다. 이런 실정이니 해방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나?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도 그를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 보천보사건의 주역으로 보기 어렵다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 6월의 보천보사건 때부터라면서, 그가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고 내세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컸던 동흥습격사건이 잊혀져 있는 사례에 비추어 보면 보천보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증명되어야 할 사안인데,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아무 증명없이 그냥 기정사실로 인정한다. 보천보 사건은 당시에 일본 측에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신문에 며칠 보도되었다고 해서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유명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의 이 호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는 문맹률이 80~90% 에 달해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도 소수에 불과하고, 열악한 도로나 교통수단으로 전국적으로 신속히 배달할 수도 없었다. 김일성 이름이 중간 정도 활자로 크지도 않게 나왔는데, 이 때문에 하루 아침에 김일성이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고 사람들이 그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했겠는가?

8.15 해방과 같은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을 때도 당일날은 서울 시내조차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고 한다. 이튿날부터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 나왔고, 심지어 해방이 뭐냐고 묻는 사람도 많을 정도로 민도도 낮았다.[66] 그런데도 그보다 8년전의 보천보사건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했다고 그렇게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겠는가? 일제시대에는 오늘날과 달리 문맹률도 80~90%를 넘나들고, 교통이나 운송 사정도 열악해 신문 보급이 어려워 구독자도 얼마되지 않았으므로, 신문에 난 일도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언론의 대중 전달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신문에 이름이 몇 번 난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던 때가 아니다. 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했다고 해도 서울시내 정도에서나 속보 역할을 할 수 있었을 뿐이고 당시 운송 체계로는 신속히 전국적으로 배포할 방법이 없어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을 리도 없다. 호외를 보아도 문맹인 절대다수의 국민들은 국한문 혼용의 기사를 읽을 수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1930년에 있었던 혈성결사대(血成决死隊) 김선학(金善學) 사건[67]은 동아일보가 호외를 3차례나 간행하며 보도했지만[68] 이 때문에 김선학이 전국적인 유명 인물로 부상한 적도 없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호외 간행은 자주 있었지만 대중 전달력은 미약했고, 보천보 사건의 호외 간행으로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것이다.

해방 당시 사람들이 보천보사건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근거는 많다.

경찰 47명이 상주하는 경찰서가 있는 소읍(小邑)을 습격한 1935년 2월의 이홍광이 이끈 동흥습격사건은 경관 5명이 상주하는 주재소가 있는 면단위 마을을 습격한 보천보사건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큰 사건이었지만, 해방 당시나 지금이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홍광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부상한 적도 없다. 이홍광이 19세의 남장 미인이라는 대중의 시선을 끌만한 언론보도까지 있었지만 그는 잊혀졌다.[69][70] 두 사건 모두 당시 신문들은 비교적 크게 보도했는데도 동흥사건이홍광은 잊혀지고, 2년 뒤의 보천보사건과 김일성만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일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었다. 해방 당시 동흥습격사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보천보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보천보 사건을 신문들이 크게 보도한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면, 대다수 신문이 그 유명한 김일성이 1937년 11월 18일 전사했다고 보도했는데도 해방 당시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리도 없다.

해방 직후의 기록을 보아도 김일성과 관련하여 보천보사건이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일성이 집권한 북한에서조차 해방 직후 1946년까지는 보천보사건이 거의 거론되지 않다가 1947년부터 김일성 우상화 문건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가장 중요한 항일 업적으로 보천보사건을 크게 선전하기 시작한다. 실례로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실린 《김일성장군 부대(金日成將軍 部隊)와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중견간부(中堅幹部) 좌담회(座談會)》 기사[71],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1946.7.25)에 실린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의 《김일성장군(金日成將軍) 개선기(凱旋記)》나[72], 해방 1주년 기념으로 간행된 『우리의 太陽 : 김일성장군 찬양특집(金日成 將軍 讚揚特輯)』[73]에 실린 필자 미상의 《김일성 장군의 약력》(p.1), 한재덕의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 유격대 전사(遊擊隊 戰史)》(p.3), 한설야(韓雪野)의 《혈로(血路)》(p.40) 등에도 보천보사건은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김일성이 항일연군 6사장, 제2방면군장 등을 지냈다고는 나오는데도 그렇다. 심지어는 김일성 본인이 1942년에 직접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나[74], 소련군 시절 작성한 이력서들에도[75][76] 보천보사건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으므로 그 자신도 이 사건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1947년에 들어서야 조기천(趙基天)의 서사시 『백두산』(로동신문사, 1947.04.30)이나,[77] 한재덕의 《김일성 장군 유격대의 투쟁과 생활(1947년 8월 15일 민주조선 게재)》[78] 등에서부터 보천보사건을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한다. 특히 조기천의 ≪백두산≫은 이후 북한 김일성을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떠받들게하는 세뇌교육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한국에서 출판된 '반디'라는 필명의 북한 반체제 작가가 쓴 소설 《고발》을 읽고[79] '도진(刀盡)'이라는 필명의 북한 사람이 남한으로 보내온 독후감에는 조기천의 백두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80]

어릴 때의 기억이 한 가지 나는 것이 있는데 국어시간에 배웠던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 이다.

북쪽 땅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이 시를 배우고 항일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에 대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던가? 나 역시 김일성의 위대함에 완전히 넋을 빼앗겼댔다. 그 시를 지금도 기억한다. 조기천은 시에서 김일성을 우리 민족을 구원한 빨찌산 대장,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였다. 우리 민족을 이끌 위인으로 노래하였다. 거짓과 위선으로 이루어진 이 詩가 2000만의 넋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조기천은 이 시를 1946년에 썼다. 그 전까지는 우리 인민들이 김일성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김일성은 항일전의 공로가 아니라 이 시로 인하여 민족의 영웅으로 되었다.

내가 시인 작가들을 혐오하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권리와 자유를 빼앗은 장본인이 김일성이라는 데 대해 생각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나라의 시인 작가들은 독재자의 賣文(매문) 문필가로써 민족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반디 선생의 분노의 작품 앞에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북한이 보천보사건을 본격적으로 미화 선전하기 시작하는 것은 6.25 전쟁 휴전 후부터로, 1955년 6월에 양강도 보천군을 ‘보천보혁명전적지’로 명명하고 보천보전투승리기념비와 동상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으로 보천보전투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전개했다.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중심으로 전투진행과정을 보여주는 보천경찰관주재소, 포대, 전투지휘장소, 곤장덕 등 보천보전투 관련 장소들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1962년에 보천보전투 25주년을 맞아 김일성 동상을 완공했다. 또 보천보전투 30주년인 1967년 6월 4일에 양강도 도 소재지인 혜산시의 도심 중앙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을 건립하고 중앙과 도급 간부들과 군인, 청년, 근로자 등 5만여 명의 군중들을 제막식에 참가시켰다.[81] 김일성 집권 후 벌인 이러한 대대적 선전의 결과로 잊혀졌던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는 해방 직후는 물론이고, 김창순 (金昌順, 1920 ~ 2007)『북한 15년사(北韓 15年史)』 (지문각(知文閣, 1961)에까지도 보천보사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는 남한에서 월남민들에 의해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자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가 1946년 4월 8일, 9일 이틀에 걸쳐 실은 가짜설을 반박하고 김일성을 옹호한 권용호(權勇浩)의 기고문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에도 김일성이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했다고 신문에 난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82][83] 1945년 11월 5일자 해방일보, 1946년 4월 12일자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에도 북한 김일성에 대한 글을 실었으나, 그가 청년영웅이라며 찬양만 늘어놓았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밝히지 못하고 있다.[84] 북한에 나타난 김일성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는 기사를 쓴 사람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북한서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이 196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에서 북한 김일성이 한 일로 보천보 사건이 나오며,[85] 이후 다른 문헌에서도 북한 김일성의 경력으로 보천보사건을 자주 기록하기 시작한다.[86] 이는 북한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일각에서 말하는 친일파(?) 박정희가 항일투쟁한 김일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그를 가짜라고 선전했다는 식의 주장이 근거 없는 마타도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들어 처음으로 보천보사건을 김일성의 구체적 항일투쟁 경력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런 사례만 보아도 보천보사건에 대해 해방 당시 사람들이 거의 몰랐고,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여 자신의 항일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더라면 보천보사건동흥사건처럼 잊혀졌을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히는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집권했기 때문에 보천보사건이 유명해진 것이다. 해방 후 김일성 아닌 이홍광이 집권했더라면 보천보 사건은 잊혀지고, 대신 동흥사건이 유명해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 큰 문제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남의 전공까지 자신의 것인 양 조작했다.

동북항일연군 김일성에 대한 신문 보도의 영향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에 대한 소문은 1920년경부터 나돌았다고 1920년대 소학교를 다닌 사람들이 증언하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金日成)의 활동에 대한 신문 보도가 다수 있었다. 당시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1936년 가을 ~ 1937년말 기간에는 보천보 사건 주역인 6사장 김일성에 대한 보도인데, 1937년 11월 그가 전사했다는 보도 이후 1938년에는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다. 1939년 초부터 1940년 여름까지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다시 나타나는데 이는 북한 김일성으로 보인다 [아래 참고]. 그러나 대부분 양민에 대한 약탈 기사로 후면에 조그마하게 난 것이라 챙겨본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는 문맹률이 80~90%에 이르고, 대부분 국민들이 신문이 배달되기 어려운 농어촌에 살면서 사는 마을 밖으로 나가는 일도 거의 없을 때라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거의 모르고 살 때였다. 바깥 세상 일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고 해도 주로 학교나 시장터에서 얻어듣는 것이 주였으므로 신문에 난 항일연군 김일성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어쩌다 그런 기사를 본 사람들도 일찍부터 소문이 돌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과 항일연군 김일성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방법도 없었다. 함경북도 도민회장을 지낸 김허남(金許男, 1920~ )은 자신이 소학교 다닐 때인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들은 김일성 장군은 항일 영웅으로 소문이 났는데, 나중에는 양민을 괴롭히는 비적으로 바뀌어 알려지더라고 했다.[1] 항일연군의 김일성 기사를 본 사람이라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나 김구 같은 분들이 유명했던 것도 신문에 이름이 자주 나서가 아니라, 오랜 기간 구전으로 이름이 많이 전해진 탓이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경우도 같은 식으로 오랜 기간 입으로 소문이 퍼져 유명해진 것이지, 1930년대 후반에 일시적으로 동북항일연군 김일성의 이름이 신문에 수차례 보도된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해방 직후 사람들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도 이승만, 김구처럼 상당히 나이든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북한 김일성이 실제 썼던 이름은?

북한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라고 주장하고, 남한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은 김일성의 창덕학교 동창이나 만주에서 그를 직접 알았던 사람들의 후일 증언을 토대로 그의 실제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아닌 김성주(金聖柱)이며,[87] 전사한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본명이 金成柱인 것을 따라, 자신이 그 사건의 주역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본명까지 金成柱로 고쳤다고 주장한다.[88] 일제시대 기록에는 그의 본명이 金成柱/金聖柱 두 가지가 다 나와서 어느 쪽이 맞는지 명확히 가리기가 쉽지 않다. 그의 본명을 金誠柱로 적은 문헌도 있다.[89][90]

그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김일성 회고록에는 1920년대말 김혁이 김성주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를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나중에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별"이라는 이름은 김성주 아닌 김인묵이라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91] 이명영은 1930년 말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五家子) 시절 김일성의 지인이었던 최형우(崔衡宇, 1905~1950)[92]가 그에게 일성(一星)이란 별호를 지어주었다는 증언을 소개했고,[16][88] 최형우 본인도 저서에서 유사한 말을 했다.[93] 동아일보는 1931년 3월과 5월에 이종락(李鍾洛) 부하(部下) 김일성(金一成)이 체포되었다고 두 차례 보도했다.[94] 이런 것들로 보아 김성주는 1931년 전후에 김일성(金一星) 또는 김일성(金一成)이란 이름을 별호 비슷하게 쓰기도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 후 1930년대 중반까지 그가 어떤 이름을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본명의 한자 표기 "成柱 / 聖柱 / 誠柱"나 별명의 한자 표기 "一星 / 一成 / 日成"은 한국어 발음은 서로 같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당시 김일성이 주로 쓰던 말 중국어로는 글자 뿐만 아니라 발음까지 모두 달라서 같은 이름들이 아니다.


김성주가 1930년대 중후반에 소속되었던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이 신문에 자주 나오게 되는 것은 1936년 8월 ~ 1937년 말의 기간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金日成)과 1939년 초 ~1940년 7월 기간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의 활동 보도에서이다. 이 중 1937년 6월의 보천보사건 주역이었던 6사장 김일성은 그해 11월 전사하므로 북한 김일성이 아니며, 후에 나오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과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자세히 설명한다.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 시절 1938년 이후와 소련군에서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확인되나,[95][96][97] 러시아어로는 김일성 아닌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29] 해방 전 88여단 시절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이었고, 6.25 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낸 유성철(兪成哲, 1917-1995)보천보사건을 일으킨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말 전사하자 그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으로 활동하며 공을 가로챘다고 하였다.[98][99]

해방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당시에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100], 또 평양에 온 초기에는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 행세했으므로[32],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본명 대신 김일성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도 동진공화국 소문과 함께 김일성 장군이 곧 귀국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101] 평양으로 온 김성주가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을 쓰며[32] 잠행할 때 이런 것을 놓쳤을 리 없다. 또 만주와 소련에서 오래 생활한 그는 돌아올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은 전사했으니 만주에는 그렇게 불릴만한 사람이 없고, 연해주에도 김광서(金光瑞, 1888-1942, 金擎天)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 외에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소련의 탄압을 받아 1937년 무렵 처형되거나 중앙아시아로 끌려가고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으니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라고 자칭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그의 이름을 이전의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에서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102]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많은 월남민들이 증언한대로 북한 김일성은 누구인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인 것이 재확인된다.


참고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3권을 지은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에 의하면 양좌청(楊佐青, 楊君武, 1911~1970)의 회억록(回憶錄)이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 중 하나에 동북항일연군 내의 몇몇 사람들에게 일본측에 보다 많이 알려진 사람들의 이름을 따라 개명하도록 중공당 만주성위 차원에서 결정, 권고했다고 나온다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는 본명이 마상덕(馬尙德)이고 장관일(張貫一)이란 변명(變名)을 썼는데, 양군무(楊君武)나 양림(楊林, 1898~1936)의 이름을 따라 개명하도록 권했으나 양(楊)씨 성만 따르고, 이름은 다르게 지었다 한다.[103] 일본 패망후 흑룡강 성장을 지낸 이범오(李範五, 1912-1986)는 오평(吳平, 1907-1942)[104]의 변명인 양송(楊松)을 따라 비슷한 장송(張松)이라는 변명을 쓰게되었다고 하며, 당의 결정에 따라 꼭같은 이름을 쓰게된 사례로 김일성(金日成)을 들고 있다고 한다. 중공당 만주성위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일본측에 혼란을 주기 위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북한 김일성도 남의 이름을 따라 같은 이름을 쓰게 되었다는 부분이다. 전사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썼다는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증언이다. 또한 그 이름을 따라 쓴 것이 개인이 임의로 한 것이 아니라 중공당의 권고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이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전사한 상급자의 이름을 개인이 임의로 그대로 따라쓰는 것은 항련내에서도 허용되지 않을만한 사안이나, 일본측에 혼란을 주기위해 당차원에서 그렇게 하도록 결정을 했다면 상당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양좌청의 회억록 원문은 구해보기 쉽지 않으나, 양정우(楊靖宇)나 이범오(李範五)의 사례가 확인이 되므로 김일성에 대한 말도 사실로 보인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모델인 김경천(金擎天, 1888~1942) 장군.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에 김경천은 김일성(金日成)씨의 초명(初名)이라 하였고,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시가 나온다.[105]

전설의 김일성 장군은 누구인가?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풍문의 내용이 구구하여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21][23][34]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 1888-1942, 金擎天)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에도 김경천(金擎天)은 김일성(金日成)의 초명(初名)이라 하였고,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나온다.[105] 1945년 12월에 간행된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진상(朝鮮眞相)』에도 북한 김일성은 김광서(金光瑞, 金擎天) 장군의 명의를 상속 중이라 한다고 했다.[106]

김광서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인 김준원(金埈元, 1888~1969)은 1918~1922년간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 때 일본군 중위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김광서가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107]

윤치영(尹致暎, 1898~1996)도 북한 김일성은 가짜이고, 진짜 김일성은 일본 육사 나온 김광서(金光瑞, 1888-1942)라고 하였다.[108] 김광서는 일본 육사 선배로 친하게 지내던 그의 형 윤치성(尹致晟, 1875~1936)을 자주 찾아왔기 때문에 윤치영도 어릴 때 그를 자주 보았다. 윤치성은 김광서가 독립운동하러 조선을 탈출할 때 재정 지원도 하였다고 한다. 김광서의 부친 김정우(金鼎禹, 1857~1908)는 육군 공병 참령(工兵 參領)으로, 윤치영의 백부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부관(副官)을 지냈으므로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윤치영의 증언은 믿을만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만주 시절 말타고 활동한 적이 없는데도, 그의 기마상을 그린 그림이나 동상이 많은 것도 백마탄 김일성 장군으로 통하던 김광서 장군의 이미지를 도용한 것으로 보인다.[109][110][111]


일제시대 김일성 장군 전설의 시발점은 함경남도 단천(端川) 출신의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1888 ~ 1926, 본명 金昌希) 장군으로 보기도 한다.[112][113] 이 김일성 장군은 함경남도 및 백두산 일대에서 상당히 유명했다고 하며, 보훈처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였다.[114] 그의 외4촌형(外從兄) 설린(薛麟, 본명 寬建)은 「모스크바」공산대학 출신으로서 해방 후 정치대학(건국대학 전신) 사무장으로 있었는데, 평양에 왔다는 소위 「김일성 장군」이 김창희, 즉 자신의 고종 동생인줄 알고 평양까지 가서 면회를 신청했다가 붙잡혀서 곤욕을 당했다 한다. 간신히 석방되어 월남했다가 6·25 때 납북되었다.[113][115][116]


위 두 사람 외에도 일제시대 문헌들을 검색해보면 김일성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나오지만, 대다수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로 전설의 주인공으로 보기 어렵다. 김용삼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11명의 동명이인 김일성을 들고 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다.[117][118] 비슷한 시기에 김일성이란 이름의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 김일성 장군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는 소문의 원인일 가능성은 있다.

김일성 진짜설이 득세하게 된 배경

월남민들의 증언으로 남한에 널리 인식되어 있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뒤집고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득세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사람은 서대숙(徐大肅)이다. 그는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이 유명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런 유명한 인물은 실존하지 않고, 북한 김일성이 만주서 실제로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항일 투쟁을 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될 수 없다고 했다.[119][120]

서대숙: 김일성이란 이름은 유명했다. 김일성이 공식석상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모두 “가짜다” 라고 했다. 가짜가 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 김일성. 전설에 나오는 그런 김일성은 없다. 우리가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란 전설적인 사람은 없다.[119]

해방 당시 김일성 전설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그 내용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편차가 심하여 실존 인물 한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일성 장군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바로 그 점을 북한 김일성이 악용한 것이다. 그의 실체가 분명했다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다. 김일성은 바로 그 실체가 불분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 완전 무명인사였으므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치명적인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였다. 자신의 항일투쟁 성과로 얻은 명성이 아닌 국내에 널리 퍼져 있던 실체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쳤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어릴 때 고국을 떠나 만주서 빨치산 투쟁한다며 산야를 숨어 다니다, 해방직전 5년간 소련 극동의 시골마을에 숨어 있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의 존재를 국내 사람들은 알래야 알 수도 없었다. 보천보 사건 때문에 만주 빨치산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유명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최고 권력을 잡고 자신의 항일 업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이전에는 보천보 사건은 전혀 유명한 사건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는 그 사건의 주역도 아니고 전사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써서 남의 전공을 훔쳤을 뿐이다. 사람들이 북한 김일성이 아닌 진짜 김일성 장군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름을 들은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인데도,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사람들은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지니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알았다는 식으로 호도한다.

동경대 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의 주역이며 자신의 항일투쟁 공로로 유명해졌으니 진짜가 맞다고 주장한다.[121] 또 만주는 겨울철 기후가 혹독해서 나이많은 노장군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122]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되는 게릴라전의 지휘관은 젊은 체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주의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보다 훨씬 이전에 1920년 경부터 유명한 김일성 장군에 대한 풍문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하여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고 있다. 만주에서 유격전을 하면 긴 세월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이상한 논리처럼 보인다.

서대숙과 와다 하루키는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고, 보천보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하여 국내의 김일성 연구가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수준에서 길을 잃고 오히려 퇴보하게 만든 주역이다. 그 이후로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던 월남민 1세대 대다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국내의 김일성 연구는 그가 진짜가 맞다고 하는 신진학자들의 경연장이 되어, 앞서 김일성이 가짜라고 밝히는 연구를 한 선배 학자들을 어용으로 몰았다.

이들은 가짜 김일성 소문이 북한에서 그를 직접 본 월남민들에 의해 퍼졌다는 사실은 감추고, 남한 정부가 조작해서 퍼뜨렸다고 하면서 친일파가 득세한 남한이 김일성이 항일영웅인 것을 부담스러워 가짜로 만든 것처럼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해방 당시 소련군이 데려온 북한 김일성의 전력은 아무 것도 알려진 게 없었고, 북한의 선전은 예나 지금이나 믿을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이 만주에서 활동한 빨치산들은 남한으로 온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적성국가였던 소련과 중공 등으로부터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어 미군정이나 남한 정부도 그가 해방 전 어디서 뭐 하던 자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6.25 전쟁복구와 기아 문제 해결에 진력하느라 김일성 연구 같은데에는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제대로된 연구는 1970년대부터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상당한 연구가 진행된 지금에도 그의 행적의 전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은데 과거 한국 정부가 무슨 수로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있었겠는가? 김일성이 해방 직전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극동의 소련군에 복무했다는 사실도 공산권이 붕괴한 1990년 이후에야 제대로 밝혀졌지만 북한은 해방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이를 감추고 있다. 그가 무슨 항일 공적이 있는지를 미군정이나 한국 정부가 알 수 없었다면 남북한의 일반 국민들은 더 모를 수 밖에 없었다. 북한 김일성은 국내 누구도 어디서 무얼하던 사람인지 몰랐던 항일 영웅이라는 말은 넌센스이다.

대다수 과거 자료들이 전산화되어 인터넷 검색이 가능해진 근래에 발굴된 수많은 새로운 자료들과 공산권 붕괴 이후 나온 여러 증언들은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일 뿐만 아니라,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의 전과도 훔쳤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고, 이명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김일성은 비록 만주서 항일투쟁을 했다고 하지만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다[99]. 소련으로 넘어간 후인 1942년에 그가 직접 지은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를 보면 그들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만주 실지 회복을 위해 한 것으로 중국공산당사의 일부일 뿐이고, 조선독립과는 무관하다고 자인하고 있다. 뿐더러 그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패배로 귀결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74] 그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보급투쟁이라는 미명하에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해를 자행하는 비적(匪賊) 수준의 저급한 것이었다.[123] 그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여 그 명성을 훔쳤고, 다른 김일성의 보천보 전과를 훔친 것이 명백히 밝혀진 것으로 해서 그의 항일투쟁이란 것은 더 이상 거론할 것도 없다. 해방 당시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지지세력도 전무했던 인사가 소련군 등에 업혀 들어와 그들의 무력과 정치공작의 도움으로 억지로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여 인민들의 주권을 강탈해간 것이 정확히 그가 한 일이다.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여 절대권력을 확보한 후 전무후무한 세습 전제 왕조를 만든 것이 그의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위에서 본대로 그가 적어도 1920년 무렵부터 알려졌던 반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1937년 6월의 보천보사건 당사자가 맞는가, 아닌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후대에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보천보사건 때부터라고 하면서, 그가 사건의 당사자가 맞으므로 진짜라고 사안을 왜곡해 놓았다. 하지만 해방 당시 보천보사건도, 그 사건의 주역이 6사장 김일성이라는 것도, 그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고 대다수 언론이 보도한 것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비로소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평생을 김일성과 북한 연구에 바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전 북한연구소 이사장도 이런 점을 일찍부터 지적하였다.

근래 '김일성 연구가‘로 자처하는 정치역사학자들 가운데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普天堡) 습격사건의 주인공이다 아니다‘로써 진짜 김일성(金日成)이다 아니다를 가리려고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 金日成은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124]

그러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러한 지적을 애써 무시하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당사자이므로 진짜가 맞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MBC가 2002년 2월 3일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 48 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125] 불리한 자료는 무시하고,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만 방영하였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원천적으로 틀린 것이다. 설사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사건 당사자가 맞다고 해도 틀린 것이지만, 그는 이 사건의 당사자조차 아니다.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 기사. 전사한 김일성은 함남 출신, 36세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여 신원도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같은 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주요 신문들이 모두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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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

북한 김일성은 해방 후 평양에 와서도 전설의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였지만, 만주 빨치산 시절에도 전사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였다.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국군 제7단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당시 기록과[126][127][128] 신문 기사로[20] 확인할 수 있고, 신원도 당시 나이 36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태생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등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이전에도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는데, 1936년 11월 27일자 매일신보는 김일성의 나이가 37~8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혜산진 출신으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만주로 왔다고 했고[129], 만주국군 기관지 월간 『철심(鐵心)』 1937년 5월호에는 김일성이 30세 가량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 하였다.[130]


보천보사건 당시 북한 김일성의 나이는 25세에 불과한데, 10년 이상의 나이차는 외모로도 확연히 구분되므로 나이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경성일보는 6사장 김일성이 녹림(綠林) 유일의 인텔리라고 하였는데, 구체적 학력을 모르더라도 지식 정도는 평소 언행에서 드러나므로 중학 중퇴 학력의 북한 김일성을 두고 이런 말을 할 수는 없고,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6사장 김일성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근래의 옛문헌 전산화 덕택에 6사장 김일성의 신원(身元)과 전사(戰死)에 관한 1937년 전후 기록들이 20여건 이상 발굴되었으며, 이런 기록들로 부터 6사장 김일성은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신원도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고, 북한 김일성으로 볼만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

현재까지 발굴된 보천보사건 주역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에 대한 1938년 이전의 신원 기록이나 피살 기록은 아래와 같다. 수록처를 클릭하면 자료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나, 만주국군(滿洲國軍) 기관지 월간 『철심(鉄心)』의 기사 2 건만은 국내 소장처가 없어, 원본 소장처인 일본국회도서관의 서지(書誌)로 연결된다.

수록처 기사 제목 김일성(金日成)에 대한 기록 내용
1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 1932년 7月 18日 中国共産党延吉縣委及所屬機關ノ組織狀況ニ關スル件 연길현 의란구(依蘭溝) 유격대원 김일선(金一善), 30세, 주소 왕청현(汪淸縣); 노두구(老頭溝) 유격대원 왕덕태(王德泰).
2 경성일보 1936년 9월 11일 조간 5면 同胞六名を拉致 巨額の身代金その他要求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으로 나이 28세라고 함. [石陽里는 석우리(石隅里)의 착오로 보임.]
3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 (11월 26일 석간) 3면 공비 김일성파 내막(共匪金日成派內幕) 김일성은 함남 혜산진(惠山鎭) 출신. 키 5척 8촌(176 cm). 카이젤 수염. 37~8세.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 지령을 받아 북만주로 옴.
4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 1936년 12월 12일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동북항일연군 2군 군장 왕덕태(王德泰) - 노두구 유격대원.
2군 제3사장(師長) 金日成(金一善) - 의란구 유격대원 김일선(金一善).
5 월간 『철심(鉄心)』 1937年 5月 15日號 pp.98~114 동변도토비행(東邊道討匪行) 김일성은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며, 나이는 30세 미만이라 함.
6 오카모토 고이치(岡本吾市), 「満洲に於ける中国共産党と共産匪」, 1937년 5월 "現在 活動中の 主要匪首及 其身元" 김일성은 농부 출신으로 “농업을 경영하다가 공비의 선전에 의해 비화(匪化)된 인물"로 가족관계는 “불상(不詳)"이고 나이는 30세라 함.
7 경성일보 1937年 6月 6日 (6月 5日 夕刊) 2面 김일성은 27세의 청년(金は廿七歲の靑年) 김일성은 평양 출신, 27세 청년. 15세에 모스크바 군사훈련 전문학교 수학. 22세(1932년)에 동변도(東邊道)로 돌아옴. 부친이 한일병합 후 만주로 가서 마적 두목이 됨.
8 조선일보 1937년 6월 6일 석간2의 2면 김일성의 내력(金日成 來歷) 평양 출신, 나이 27세. 부친 때부터 만주로 가서 그 방면(共産系 兵匪)에 참여하고 있는 자. [경성일보 기사에서 일부 누락]
9 나가오카 토모타로(永丘智太郞), 『極東の計劃と民族』, 1937년 10월 초순 만주(滿洲)의 비적적화공작(匪賊赤化工作)과 조선인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金日成)은 함남 갑산군 회린면(咸南 甲山郡 會麟面) 출신(出身)이며, 그 지방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고 하였다.
10 월간 『철심(鉄心)』 1937年 11月 15日號 pp.70~75 「김일성비 토벌 상보(金日成匪討伐詳報)」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 측의 토벌상보
11 경성일보 1937年 11月 18日 (17日 夕刊) 2面 金日成殺さる 김일성비(金日成匪)가 13일 만주군의 토벌에 격전 5시간 끝에 섬멸됨. 수급(首級)을 취해 옴.
12 동아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 김일성피살(金日成被殺)? 김일성이 피살되었다는 보도.
13 조선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2면 김일성 피착 참수(金日成被捉斬首) 김일성이 사살되어 참수(斬首)되었다는 보도
14 매일신보 1937년 11월 18일 3면 共匪 金日成 被殺 - 十三日 滿洲國 討伐軍에 김일성 피살보도. 19세에 모스크바로 가서 10년 체류. 공산대학 졸업 후 적위군(赤衛軍) 입대. 만주사변 때 돌아옴. 부자(父子) 2대가 비적이됨 (아버지는 수령, 아들은 부하).
15 경성일보 1937년 11월 18일 조간 7면 鮮滿國境住民の 苦惱 今ゃ 解消 / 共産匪 金日成の 死 김일성 피살보도. 함남 출신. 19세에 모스크바로 가서 10년 체류. 공산대학 졸업. 만주사변 때 돌아옴. 녹림 유일의 인텔리. 부자(父子) 2대가 비적이됨 (아버지는 수령, 아들은 부하).
16 治安狀況(昭和 12年) 제38보 1937년 11월 19일 鮮外情報 - 共匪 金日成 射殺의 件 김일성을 사살하고 목을 베어와 신원 확인중.
17 일본 외무성 동아국 업무보고서 1937년 12월 1일 第七章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 p.49 김일성을 사살.
18 매일신보 1937년 12월 19일 2면 국경 경비진을 강화(國境警備陣을 强化) 왕봉각(王鳳閣, 1897-1937)에 이어 김일성(金日成)도 사망(死亡)
19 경성일보 1937年 12月 19日 조간(朝刊) 7面 國境 冬の陣 强化 왕봉각(王鳳閣), 김일성(金日成)이 차례로 죽음(斃).
20 매일신보 1938年 2月 23日 (22日 夕刊) 2면 공비 최현 일당 궤멸(共匪 崔賢一黨 潰滅) 최현이 사살 되었다는 기사[131][132]. 김일성도 작년 가을 총살됨.
21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 1938.2.25 匪賊九千に激減 / 満洲国治安完成へ 일만군(日満軍)이 작년 전투에서 비수를 죽인 것은 김일성 등 59명(匪首を仆すこと金日成以下五十九), 체포한 비수는 왕봉각 등 28명.
22 일본 외무성 동아국 업무보고서 1938년 6월 支那及満州ニ於ケル共産運動 김일성을 사살. (1937년 12월 1일자 동아국 업무보고서와 같은 내용)
23 국민신보(國民新報) 1939년 11월 12일 7면 アリナレ河畔, 世紀の轉換 : 警備彌增す平安北道. 김일성(金日成)은 효수(梟首)되었음.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되었다는 1937년 11월 18일자 조선일보 기사.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5일자로 호외를 간행하여 보천보 사건을 보도하였지만[133],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피살되었다는 보도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36세로 함남출신이며,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1937년 11월 13일 전사하였다.[20]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매일신보의 11월 18일자 기사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은 37~8세 가량으로 함남 혜산진 출신이라는 1936년 11월 27일자 매일신보 기사. 북한 김일성은 당시 24세로 평남 대동군 출신이므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위의 1번 자료는 1932년 7월 18일 재간도(在間島) 일본 총영사(日本 総領事) 오카다 겐이치(岡田兼一, 1882~1960)가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内田康哉, 1865~1936)에게 올린 보고서인데, 연길현 의란구구 유격대(延吉縣 依蘭溝區 遊擊隊)의 대원으로 30세인 왕청(汪淸)현의 김일선(金一善)이 나오고, 노두구 구유격대(老頭溝 區遊擊隊) 대원으로 왕덕태(王德泰,1907~1936)가 나온다.[134][135]

이 유격대들이 통합해서 연길현 유격대로 되었다가 항일연군 2군으로 발전하는데, 왕덕태는 2군 군장이 된다. 4번 자료에는 2군 3사장(후에 6사장으로 개칭) 김일성도 김일선(金一善)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했으므로[136] 이 사람은 의란구구 유격대 김일선이 분명하며, 나이가 1932년에 30세이면 1937년에 35세가 되므로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천보 김일성의 나이와 거의 같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에 나오는 혜산사건(惠山事件) 수사 책임자나,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당사자의 후일 증언도 위의 기록들이 명백한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당시 함남도경의 경부(警部)로 혜산사건 수사 책임자였던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는 1971년 2월의 증언에서 여자 대원으로 잡혔던 박록금(朴祿金, 1915-1940)이 김일성(金日成)의 나이가 36세,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고 만주사변 후에 소련에서 만주로 온 사람이란 것을 처음으로 진술했고, 이어서 권영벽(權永壁, 1909∼1945) 등 다른 사람들도 이를 확인해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당시 함남도경의 순사부장이었던 미나기 요시오(皆木善男)도 전화통화에서 이치하라와 같은 증언을 하였다.[137]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경부는 혜산사건 수사의 공로로 총독부 경무국장의 표창을 받은 것이 당시 신문에서 확인되므로 그의 증언은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138]

당시 함남도경이 작성한 수사기록인 신문조서(訊問調書)는 함흥법원에 남아 있었는데, 해방후 북한 소유가 되었다. 이것은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맞는지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이나 공개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가 6사장이 아니기 때문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 만주군 장교로 6사장 김일성 사살 작전에 직접 참가했던 야기 하루오(八木春雄, 1910-2002)는[139] 1973년 여름의 증언에서 당시 일만군(日滿軍) 부대가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김일성 부대와 교전을 벌여 그를 사살하고, 시신의 목을 베어와 마을 사람들에게 신원을 확인한 결과 김일성이 틀림없었다고 증언하였다.[140][127] 김일성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벌인 일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당시 신문기사에도 김일성이 많은 마을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므로 그의 신원은 정확히 확인된 것으로 판단된다.[141][142] 별다른 경력도 없는 중학 중퇴의 북한 김일성은 당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할만한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

위에 열거한 자료에서 보듯이 6사장 김일성의 출신지는 드물게 평양 또는 평안도라고 한 것도 있기는 하지만, 함경남도라고 한 것이 대다수이다. 그중에서도 2번 자료 (경성일보 1936년 9월 11일자)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甲山郡 會隣面 石陽里) 출신이라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3번 자료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자)에서는 그가 함남 혜산진(惠山鎭) 출신이라 하였고, 9번 자료는 나가오카 토모타로(永丘智太郞)가 1937년 10월 초순 북조선 지방을 시찰하고 와서 쓴 글인데, 김일성이 역시 함남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 출신이라고 기록했다. 혜산진도 당시는 갑산군에 속했으며[143], 회린면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북청∼혜산간의 도로가 허천강(虛川江)을 따라 회린면을 지나간다.[144] 회린면 출신자도 인접한 지명도가 높은 혜산진 출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성일보 기사의 회린면 석양리(會隣面 石陽里)는 회린면 석우리(會麟面 石隅里)를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석우리(石隅里)는 회린면의 중심 리(里)로, 면사무소, 주재소, 소방서가 있었다.[145][144] 회린면은 그 부근 지역 거주자가 아닌 외부 사람들은 알기 어려운 지명이므로 6사장 김일성의 신상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일 것이다. 또 나가오카는 김일성이 그 지역에서 무척 인기가 있다고 했으므로 회린면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 지역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 망국 직전인 1910년 1월 20일자 관보에 갑산군(甲山郡)의 회면(會面), 허린면(虛麟面) 및 신복면(新福面)을 폐하고 회린면(會麟面)을 설치한다고 나와 있다.[146]

오늘날 북한에서는 면단위 행정구역은 폐지되었으나, 양강도 갑산군 회린리(甲山郡 會麟里)와 그 북서쪽 혜산방향 일대가 회린면 지역이다. 석우리(石隅里)의 일부가 회린리(會麟里)로 편입되었다 한다.[147]

갑산군의 혜산진이나 회린면은 역시 갑산군에 속했던 문제의 보천보와 가까이 있는 지역이다. 6사장 김일성이 이 지역 출신이라면 일대의 지리도 잘 알 것이고, 근처에 아는 사람도 많아서 포섭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이것이 보천보를 습격 목표지역으로 정한 이유도 될 수 있다. 보천보사건의 후속인 혜산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된 사람이 수백명에 이른다는 것도 6사장 김일성이 이 지역 출신이라 포섭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연루자들 중에는 북한 김일성보다 연장자들도 많았다. 평남 대동군 출신의 북한 김일성은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성장하여 중국말은 능하나,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고 하므로, 조선말도 서툴고 나이도 젊은 그가 무연고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의 소련 연고

위의 표에 제시된 자료들 중 다수에는 6사장 김일성이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거나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는 말이 나온다. 6사장 김일성이 활동할 당시의 아래와 같은 신문보도에도 그가 소련과 연고가 있고, 소련식 전법(戰法)을 배운 인물이라는 증거들이 더러 보인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 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기 이전에는 소련과 아무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들은 6사장이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1번 자료 매일신보 기사에는 김일성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북한이나 중국측에서 말하는 1936년 9월 1일, 2일에 있었다는 6사장 김일성의 대덕수(大德水), 소덕수(小德水) 전투에 대한 보도이다.[148][149] 북한은 이 전투에서 김일성군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주장하나, 이 기사에 의하면 2시간의 교전 끝에 일본군 혜산진 부대는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상대방에 큰 손해를 주었다고 했다.

수록처 기사 제목 김일성(金日成)의 소련 관련 기록 내용
1 매일신보 1936년 09월 06일 3면 戰法은 蘇聯軍同一 蘇聯將校潜在? 惠山鎭對岸匪賊의 武器精巧 그 전법(戰法)은 소련군(蘇聯軍)의 전법과 동일(同一)하다. 수명의 소군 장교(蘇軍 將校)가 있는 것이 확실한 듯하다. [6사장 김일성의 소덕수(小德水) 전투에 대한 보도]
2 매일신보 1936년 09월 11일 2면 頭目은 金日成: 대부분 조선인, 관헌과 흡사한 복장입어 장백현(長白縣) 십륙도구(十六道溝)의 소덕수리(小德水里), 대덕수리(大德水里)를 약탈한 김일성 부대는 러시아식 장총과 중국식 장총 및 권총으로 무장.
3 매일신보 1936년 10월 03일 02면 함남 국경 대안(咸南國境對岸) 공비의 동정(共匪 動靜) 김일성 부대는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있고, 쏘비에트 러시아인도 가입해 있다고 한다.
4 매일신보 1936년 11월 27일 3면 공비 김일성파 내막(共匪金日成派內幕) 김일성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가지고 북만주에 들어와 다시 중국 공산당과 연락을 취하여....무기는 모다 로서아제의 정예(精銳)한 것으로...
5 동아일보 1937-06-08 조간 2면 장백밀림(長白密林)을 근거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 "그들은 쏘비에트의 전법을 그대로 이용하야 교묘하게 하는 까닭에..." [소련식 군사교육 받음]
6 동아일보 1937-07-29 2면 무송현(撫松縣)서 두목대회(頭目大會) 김일성의 동료 조국안(曹國安)이 쏘비에트 국경에서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와 무송현서 두목대회를 열고 활동 계획을 논의함.

이명영(李命英)에 의하면 제6사장 김일성에게 「이스라므」라고 하는 소련인 군사지도 원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150]

이처럼 6사장 김일성의 활동 기간인 1937년 말까지는 그가 소련과 관계있는 인물이라는 기사가 자주 보이나, 이와는 달리 1939년 ~ 1940년 여름간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의 활동을 보도한 신문기사에는 그가 소련과 관련있는 인물로 볼만한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북한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한 후부터 소련과 처음 관련을 맺는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아니라는 증언들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부터 같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련군 88여단 출신자들의 후일 증언도 다수 있다. 당시는 김성주가 최고 권력자가 되기 전이므로 빨치산 동료들이 그의 신상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을 때라 그들은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말들을 들었을 것이다.

  • 88여단 시절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이었 소련의 고려인 출신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은 6.25 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냈는데, 1991년 카자흐스탄의 고려일보에 실은 회상기 ≪피바다의 비화≫에서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전사하고, 그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98][99]
유성철이 한소수교 직후인 1990년 10월 방한했을 당시에 한국일보에 연재된 그의 회상기에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다고 한 것처럼 나왔는데[151][152], 이 기사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와 인터뷰한 한국일보 기자와 연세대 최평길(崔平吉) 교수가 정리한 것이다. 소련으로 돌아간 유성철은 이 기사가 자신의 뜻을 잘못 전달한 것이라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피바다의 비화≫를 쓴다고 밝혔으므로, ≪피바다의 비화≫의 내용이 정확한 그의 증언이다.
  • 소련의 고려인으로 88여단 1대대장 김일성 아래 부대대장이었던 박성훈 대위(капитан Пак Сен Хун)는 진지첸(북한 김일성)은 1939년 가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만주 빨치산 영웅 김일성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했다고 증언하였다.[153] (1937년 가을에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후 북한에서 내무성 부상까지 지내다 1959년 소련으로 망명한 강상호(姜尙昊, 1910~2000)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153]
박성훈(Пак Сен Хун)은 해방 후 북한으로 오지 않고 소련군에 남았기 때문에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나, 88여단에서 1대대 대대장 김일성 아래 부대대장으로 있었다는 것은 다른 소련문헌에도 나온다.[154][155] 88여단의 부여단장, 부대대장 등 각 단위의 부책임자는 만주 빨치산 출신자 아닌 소련인을 임명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 평양 소련군정 당시 중좌로 김일성의 정치 상담역을 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는 1944년 88여단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여러 조선인들을 만났는데. 김일성의 이름은 전사한 존경받던 전임 게릴라 지도자의 이름에서 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43] 그는 또 이런 말을 북한 김일성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도 했다.[44]
(러시아어를 구글로 영역하여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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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 mid-30s, he began to use the pseudonym Kim Il Sung, taking the name of his deceased commander of the squad, was the great authority of the Koreans.
[С середины 30-х гг. стал пользоваться псевдонимом Ким Ир Сен, взяв фамилию своего погибшего командира отряда, пользовавшегося большим авторитетом у корейце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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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ct that, following the example of his other comrades-in-arms, he took this name in memory of his deceased favorite and respected commander of the partisan detachment, he told me himself.
[То что, он по примеру других своих боевых товарищей взял себе эту фамилию в память о своем погибшем любимом и уважаемом командире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он сам мне говорил.]
  •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18일자 기사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2)』에는 북한 김일성이 만주사변(1931년) 때 죽은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습명(襲名)하였다고 하였다.[95] 1931년에는 빨치산의 활동도 없었고,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도 보이지 않으므로 1937년에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의 이름을 습명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김성주를 죽은 유명한 비수 김일성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였다. 이 기사가 보도된 때 김일성은 아직 만주에 있었고, 이 해 10월 23일에 소련으로 도망갔다. 만선일보는 5회에 걸쳐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를 싣고 있는데, 보천보사건에 대한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 것도 그가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거나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관련자들의 증언도 다수 있다.

  • 박갑동(朴甲東, 1919~ )은 혜산사건으로 투옥되었다 해방 직후 풀려난 박달(朴達, 1910~1960)박금철(朴金喆, 1912~1967 ?)에게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찍어다 보여 주었더니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이 아니라 했다고 증언하였다.[156][157][158] 그는 또 1974년 중앙일보 기고문에서도 "박금철은 현재 평양 김일성의 전대(前代)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 자"라고 하여[159],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 증언했다.
  • 박갑동(朴甲東, 1919~ )은 또 "1951년 평양에서 보천보를 김일성과 같이 습격한 군인과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상관이던 김일성은 전사하고 없어 출세도 못하고 만년 소령으로 있다."고 했다는 증언을 하였다.[160][161]
  • 박갑동(朴甲東, 1919~ )의 또 다른 증언 : 월북하여 문화선전성 구라파 부장으로 있다 남로당 숙청 때 산골로 추방된 그에게 밥을 해 주던 할머니가 자기 아들이 6사장 김일성의 부하로 1937년 전사했는데, 지금의 김일성은 다른 사람이라 자신은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있다고 하였다.[162]
  • 해방 직후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1945년 10월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해방 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되어 역시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朴金喆)과 우연히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현장에서 보게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163]
  • 이진구(李鎭九, 1898~?) 목사(牧師)는 1941년 7월 함흥형무소에서 혜산사건으로 수감된 박달(朴達, 1910~1960)과 같은 감방에 있었는데, 그때 박달이 자기 나이는 31세, 김일성의 나이는 10년 위인 41세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은 1901년생 쯤으로 전사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나이와 거의 같다.[164]
  • 해방 직후 만주 통화성(通化省) 일대의 한인(韓人) 사이에서 전사한 김일성(金日成)의 추도비(追悼碑)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고 당시 모금에 참여했던 이창훈(李昌勳)이 증언하였다. 보천보 김일성이 통화성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전사했다.[165]

일만군(日滿軍)의 집중 토벌로 항일연군 1로군 초기 편제의 주요 지휘관들은 총사령겸 1군 군장 양정우만 살아남고, 부사령겸 2군 군장 왕덕태 및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일본에 투항해 버렸으므로, 수많은 전사 기록과 증언이 있는 6사장 김일성만 혼자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다.

국내 신문의 항일연군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는 1936년 가을부터 나오는데 1937년말 6사장 김일성 전사 보도 이후로는 이듬해 1938년말까지는 거의 보도가 없다. 그러다가 1939년 초부터 1940년 여름까지 기간에 다시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으로 추정됨)이다.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동일인이라면 1938년 1년 동안은 왜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거의 전무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으므로 이것도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주역이 맞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한 김일성은 전사한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을 사칭하여 그의 전과를 훔친 것이 확실하다.

1937년 11월 6사장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한 이후 국내 신문에는 1938년 1년간은 김일성에 대한 보도가 거의 없다가 1939년부터 1940년 여름까지 다시 김일성의 활동에 대한 보도가 나온다. 다시 나타난 김일성은 제2방면군장으로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이름을 사칭한 북한 김일성으로 판단된다.[95][96] 일본군의 토벌로 항일연군 1로군은 수많은 병력과 지휘관을 잃고 1938년 7월 편제를 개편하였는데, 사장(師長)이란 직책은 없어지고 북한 김일성은 제2방면군장이 되었다.[97] 따라서 1939년 이후 다시 나타나 활동하고 있는 김일성, 즉 북한 김일성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있다. 만선일보 1940년 4월 18일자 기사에도 김성주가 김일성(金日成) 이름을 습명(襲名)하여, 그를 죽은 유명한 비수 김일성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는데[95], 이런 기록들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1939년 당시 일제 경찰측은 북한 김일성의 지인들을 동원하여 귀순 공작을 벌이고 있을 때이므로 그의 신원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95][96]

6사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기록을 근거로 내세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의 6사장 김일성 신원 기록 (1939년 9월)

서울의 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思想部)에서 간행한 1939년 9월 1일자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나오는데,[166] 이는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상당히 유사하여,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라는 틀림없다는 증거라고 한다.

함경남도 국경지대 압록강 대안(對岸)에 반거(蟠踞)하는 소위 김일성(金日成) 일파라 칭하는 무장단(武裝團)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第1路軍) 제2군(第2軍) 제6사(第6師)로서 김일성(金日成)을 사장(師長), 위민생(魏民生)을 정치위원(政治委員)으로 하는 한인(韓人) 중국인(中國人) 혼합의 무장단이다. [김일성(金日成)의 신원(身元)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본명(本名) 김성주(金成柱), 당 29세(當 29歲),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平安南道 大同郡 古坪面 南里) 출신(出身)으로 어릴 때 실부모(實父母)를 따라 간도(間島) 방면으로 이주하여 그 지방에서 성인(成人)이 되어 무장단(武裝團)에 투신(投身)한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가장 확실하며, 그의 실모(實母)는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pp.8~9.≫[166]

당시 북한 김일성의 정확한 나이는 27세였고, 모친 강반석은 이미 1932년 7월 사망했지만, 출생지는 정확히 일치하여 이 기록의 김일성은 대체로 북한 김일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만하다.

이 기록을 1977년에 처음 찾아낸 사람은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이다.[167] 김창순은 이를 근거로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보면서도, 그가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도용한 가짜라는 입장은 견지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종석은 같은 기록을 근거로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으므로 진짜가 맞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168]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소문이 일찍부터 퍼져있었다는 것은 부인하고,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6사장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사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939년 9월 사상휘보의 기록은 고등법원 검사국에서 간행했으므로 권위 있는 기록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이는 수사나 재판 기록도 아니고, 필자도 미상인 단순한 보고서에 불과하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밝히고 있으니, 그중에는 1939년 당시 활동하고 있던 같은 이름을 쓰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북한 김일성)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오인한 설이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바로 이런 것을 채택한 경우로 볼 수 있다. 당시는 교통 통신 사정이 열악하여 총독부 검사국과 혜산사건을 수사한 함흥 경찰, 6사장 김일성을 사살한 만주군 보병7단 간에 원활한 정보 공유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 상당히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이미 죽은 사람의 신원을 새로 면밀히 조사했을 리도 없으니, 위와 같은 기록들은 당시 활동하고 있던 북한 김일성을 죽은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착각한 것에 불과하며, 두 사람이 실제로 동일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다시 면밀히 조사한 끝에 얻은 결론이라면, 국내 대다수 신문이 이미 그가 전사했다고 보도한 것이 오보였다는 언급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위 글의 내용으로 봐서는 필자가 이러한 언론보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것을 정확한 기록으로 보기는 무리이다.

혜산사건을 종합적으로 다룬 1938년 기록이 다수 있는데도[169][170][171], 6사장 김일성과 정치위원 위민생(魏民生) 등의 이름만 나올 뿐, 신원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는데다,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지도 않은 서울의 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이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을 새로 정확히 조사해서 알아내었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1939년 9월의 사상휘보의 보고서는 작성자가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추가해 넣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흥법원의 혜산사건 1심 판결 일자가 1941년 8월 28일이므로[172] 위 사상휘보의 보고서가 작성된 1939년에는 함흥에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라 서울의 총독부 검사국에서는 사건 수사 기록이나 재판 서류들을 열람할 수가 없었을 것이므로 위와같은 기록은 불확실한 첩보에 의존한 탓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있다고 한 것도 이러한 사정의 반영일 것이다. 수사 대상 인원이 700여명이 넘어서 신문조서(訊問調書)가 2톤 트럭에 가득 실릴 정도로 방대하여[173] 기소를 담당한 검사조차 조서 내용을 제대로 검토해 보지도 못하고 경찰의 의견을 따라 기소장을 썼다고 하니,[174] 서울의 총독부 검사국이 그 내용을 자세히 알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질의응답 자료의 김일성 기록
1944년(昭和19年) 11월 18일 일본제국의회 귀족원(貴族院) 사상조사위원회(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의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에도 김일성(金日成)의 본명은 金成桂(주:金成柱의 誤記인듯), 나이 33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생이며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장으로 1937년 혜산사건 당시 조선으로 침입했다고 나온다.[175] 이 기록 역시 위 사상휘보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6사장 김일성 전사 후에 다시 나타난 김일성을 동일인물로 오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1938년 이전의 6사장 김일성의 전사 또는 신원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아 20 여건 이상 되지만, 모두 그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기록이거나, 신원이 모스크바 공산 대학을 나왔다거나, 나이가 36세라거나 한 것들 뿐이고, 북한 김일성으로 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1939년 이후에야 6사장이 북한 김일성으로 볼만한 기록들이 나오는 것은 1939년 당시 활동하던 제2방면 군장 김일성을 전사한 6사장 김일성과 동일인으로 오인했기 때문으로 볼 수 밖에 없다. 1939년 이후의 이런 애매한 기록 한두 건이 1938년 이전의 20 여건이 넘는 기록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며 무시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사상휘보의 기록처럼 1939년 9월에 당시 활동하고 있던 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대체로 파악할 수 있었다면, 그보다 2년 가량 앞서 기록된 수많은 6사장 김일성의 신원기록이나 전사기록도 못 믿을 이유는 없으므로, 대체로 맞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의 김일성(金日成) 4촌형(從兄) 김성보(金成甫) 체포 기사.

혜산사건 판결서의 6사장이 김성주(金成柱)라는 기록 (1941년 8월)

1941년 8월 28일자 함흥지법의 혜산사건(惠山事件) 판결서(判決書)에 6사장의 이름이 김성주(金成柱)로 나오는데[172], 이는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맞으므로 그가 6사장이 맞다고 한다.

그러나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라는 것이 위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의 증언에도 나온다.[137]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원래 김성주(金聖柱)였으나[87] 본명도 보천보 김일성을 따라 김성주(金成柱)로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金聖柱 어느 쪽인지도 논란이 되나[176] 일제시대 기록들에는 두 가지가 다 나오므로[177][178] 어느 쪽이 맞는지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 김일성의 초등학교 학적부가 중국 장백현에 남아 있다고 하니 거기서 확인이 가능할 수 있으나 공개가 금지 되어 있다.[179]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도 흔히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두 사람이 본명이 같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본명이 같거나 유사한 것이 김일성 이름도 따라서 쓰는 빌미가 되었을 수도 있다.

김일성(金日成)의 4촌형(從兄) 김성보(金成甫)를 검거했다는 특고월보(特高月報) 1940년 4월호 기사가 있는데[180], 북한 김일성에게는 4촌형이 없으므로,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인 6사장 김일성의 4촌형으로 추정된다. 북한 김일성의 형제와 4촌은 항렬이 柱자 이나, 6사장 김일성의 경우는 항렬이 成으로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집안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6사장 김일성은 체포되지 않아 혜산사건 재판의 피고인이 아니었으므로, 판결서에는 이름을 김성주(金成柱)로 기록한 것 외에 그의 신원에 대한 말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위증민(魏拯民)은 북한 김일성의 상급자

6사장 김일성을 북한 김일성으로 볼 경우 위의 사상휘보나 혜산사건 판결서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사상휘보에는 6사(師)의 사장(師長)이 김일성(金日成), 정치위원이 위민생(魏民生)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181]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6사 사장이 김성주(金成柱), 정치위원이 위극민(魏極民)이라 했는데, 이는 위증민(魏拯民)의 拯자를 비슷한 모양의 極으로 잘못 쓴 것이다. (일제의 문헌에는 거의 대부분 위증민(魏拯民)을 위극민(魏極民)으로 잘못 적고 있다.) 문제는 위증민은 중공당이나 동북항일연군 1로군에서 북한 김일성보다 서열이 훨씬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6사장이 맞다면 사장보다 아래 직책인 정치위원을 맡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위증민이 6사의 정치위원이라면 사장 김일성은 위증민과 비슷하거나 높은 서열의 사람이어야 하므로 북한 김일성이 될 수 없다. 북한 김일성은 1938년 11월께에 1로군의 제2방면군장이 되는데, 위증민은 1로군 부사령을 맡았다가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 ~ 1940)가 전사한 후 총사령 대행을 맡았다. 따라서 6사의 정치위원이 위증민이라는 것은 사장 김일성이 위증민의 하급자인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6사장이 자신이라는 북한 김일성 자필 기록들의 신빙성에 대해

북한 김일성이 소련군 시절 자필로 작성한 아래 두 문건에 6사장이 자신인 것처럼 기록해 놓아, 이것이 그가 6사장이 맞다는 근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 김일성(金日成) 자필 이력서 : 1941년 1월
최근 주간조선 2551호(2019.04.01)에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넘어간 직후인 1941년 1월 작성한 자필이력서 "영도인원의 이력서(領導人員之歷履表)"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75] 한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인 북한 연구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Fyodor Tertitskiy)가 이 문서의 존재를 알고 부친 콘스탄틴 째르치즈스키와 함께 소련 당국에 공개를 요청하여 이번에 그 내용이 처음 공개된 것이라 한다. 이 문건에 김일성 자신이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 : 1942년[74]
중국 문헌에 나오는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는 북한 김일성이 1942년에 88여단장 주보중의 지시를 받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의 간행본에는 필자 이름도 삭제되어 있고, 내용에 金日成 이름이 있던 곳은 모두 "xxx"로 나오는데, 간행한 할 때 북한을 의식하여 김일성의 이름을 지운 것이라 한다. 여기에는 6사장 이름도 "xxx"로 되어 있으나 金日成을 지운 것이므로, 그 자신이 6사장이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74]

이 문건들에는 김일성 최대의 항일전공이라 주장하는 보천보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학계 다수의 사람들은 이 문건이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되기 훨씬 이전에 작성한 것이므로 믿을만하며, 그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다는 확실한 증거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에 소개한대로 이 무렵 88여단의 김일성 대대(1대대)에 근무하면서 그의 전력에 대한 이야기를 빨치산 동료들로부터 충분히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성철과 1대대 부대대장 박성훈은 북한 김일성이 전사한 보천보 사건 주역 김일성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했다고 증언했다. 또 88여단에 가서 김일성과 조선인 대원들을 만난 적도 있고, 해방후 북한에서 김일성의 정치 담당 고문역할을 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는 그가 전사한 상관의 이름을 이어서 썼다는 말을 김일성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했으니[44], 자신이 6사장이라는 북한 김일성의 자필 기록은 믿기 어렵다. 유성철, 박성훈 및 메클레르 등이 굳이 없는 말을 지어내서 증언할 이유가 없는데다, 서로 별 관계없는 사람들의 증언이 일치한다는 것도 이 증언들이 사실인 것을 뒷받침한다. 뿐만아니라 이들의 증언은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다는 당시 신문보도나 일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소련으로 월경해 조사받으면서 쓴 이력서에 거짓을 쓰면 처벌받으므로 사실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가 소련군88여단에서 쓴 다른 이력서도 많은데 내용이 중구난방이고 서로 일치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면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 가입 연도를 위의 이력서와 달리 1932년이나[182][183] 1935년으로 쓴 것도 있고[184], 중국 공산당이 아니라 당시 있지도 않았던 조선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 것도 있다.[76][185] 이력서 내용을 제대로 검증하는 절차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간행 김일성 전기가 검증의 대상일 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해방 전에 김일성 본인이 쓴 이 기록도 마찬가지로 검증대상이지 사실관계를 입증할 근거로 이용하기는 어렵다. 북한 김일성이 자신의 전력을 날조하기 시작한 것은 집권한 해방 후부터이니, 해방전 기록은 믿을만하다고 할 지도 모르겠으나, 죽은 상관의 이름을 물려받아 쓰는 사람이 그 행적까지 도용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작가들을 동원해 자신의 전기에 수없는 거짓 조작을 하도록 만든 사람이 해방전에는 그러지 않고 정직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 나이브하다. 따라서 북한 김일성의 해방전 자필 문건들은 이미 그 당시부터 자신의 경력을 조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뿐, 그가 6사장이 맞다는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다른 근거들에 대해

이 외에 아래와 같은 사유들도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는 증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