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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시절 김형직의 친구였던 이도일(李道日)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를 싫어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병원에 찾아오면 치료도 해주지 않고 박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 아래 "[[#후일 증언 또는 기록|후일 증언 또는 기록]]" 참고.


* 김일성 회고록에 김형직이 만주에서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걸어두고 무면허 의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 김일성 회고록에 김형직이 만주에서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걸어두고 무면허 의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 김형직은 무면허 의사를 하면서 아편밀매를 통해 큰 돈을 벌었다는 증언이 많다.
* 김형직은 무면허 의사를 하면서 아편밀매를 통해 큰 돈을 벌었다는 증언이 많다.
* 김형직은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고 막내 아들 [[김영주]]가 증언했다.
* 만주 시절 김형직의 친구였던 이도일(李道日)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를 싫어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병원에 찾아오면 치료도 해주지 않고 박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 아래 "[[#후일 증언 또는 기록|후일 증언 또는 기록]]" 참고.


김형직은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766 정의부(正義府)]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사후 1930년경 정의부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303 국민부(國民府)]로 개편된다. 아들 김성주(김일성)도 정의부나 국민부와 관련을 맺기는 하지만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B%9D%BD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반국민부 세력에 가담한다.
김형직은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766 정의부(正義府)]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사후 1930년경 정의부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303 국민부(國民府)]로 개편된다. 아들 김성주(김일성)도 정의부나 국민부와 관련을 맺기는 하지만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B%9D%BD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반국민부 세력에 가담한다.

2021년 3월 1일 (월) 10:5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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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생애전반) 김일성 가짜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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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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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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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북한 김일성과 관련된 해방전 또는 해방 직후의 1차 자료들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고, 대부분 인터넷 상에 원본 이미지가 올라있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조작과 날조, 남한 학계의 종북화로 왜곡된 김일성의 정확한 행적과 실체 파악을 위해서는 한국, 일본, 중국, 소련 등에 산재해 있는 조작, 가공되기 이전의 각종 1차 자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발굴하여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친 김형직 및 외가 관련 자료

부친 김형직 관련 자료

김형직(金亨稷, 1894 ~ 1926)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二 >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 (1919년 02월 18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平安南道警務部長報告要旨)
今回在外不平鮮人ト通謀シ國權恢復ヲ企劃セル「朝鮮國民會」ナル秘密結社ヲ發見シ關係者ヲ檢擧シ刑事訴追ニ附シタリ其ノ顚末左ノ如シ
一. 會員氏名
本籍 平安南道平壤府黃金町 / 住所 同 櫻町 / 會長 張日煥 當三十二年
....

本籍 平安南道大同郡古平面南里 / 住所 平安南道江東郡古邑面東三里 / 書堂敎師 金亨稷 當三十四年
  • 1920년 3월에 손위 처남이자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단원인 강진석(康晋錫)이 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에 거주하는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5][6][7] 기록에는 없지만 김형직도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단원이었다는 증언이 있다.[8][9]
  • 1925년 5월 5일자 김형직의 신상 및 재산 기록 :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 거주시
朝鮮人에 대한 施政關係雜件 一般의 部 3 > 陸軍側 調査에 관계된 鴨綠江 沿岸地方 支那地에서의 在住 朝鮮人의 戶口 其他에 관한 件 : p.24
第三 移住朝鮮人中 有力者 調査表 : 일본 외무성(日本 外務省)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기록
  • 김일성 회고록에 김형직이 만주에서 가짜 세브란스 의전 졸업장을 걸어두고 무면허 의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 김형직은 무면허 의사를 하면서 아편밀매를 통해 큰 돈을 벌었다는 증언이 많다.
  • 김형직은 아들들에게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고 막내 아들 김영주가 증언했다.
  • 만주 시절 김형직의 친구였던 이도일(李道日)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를 싫어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병원에 찾아오면 치료도 해주지 않고 박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아래 "후일 증언 또는 기록" 참고.

김형직은 정의부(正義府)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사후 1930년경 정의부는 국민부(國民府)로 개편된다. 아들 김성주(김일성)도 정의부나 국민부와 관련을 맺기는 하지만 이종락(李鐘洛, 1907~1940)을 따라 국민부를 탈퇴하고 반국민부 세력에 가담한다.

외조부 강돈욱 관련 자료

강돈욱(康敦煜, 1871~1943)은 1927년 4월 동아일보사 낙성기념사업에서 교육분야 공로자로 선정되었다.

교원 : 대동 용산면 창덕학교 강돈욱 (康敦煜, 58세) 근무연한 16년

삼촌 김형권 관련 자료

국민부원(國民府員)이었던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1936)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30년 국내로 잠입하여 함경남도 풍산에서 일본 경찰을 쏘아 죽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다 옥사한다. 사건 당시 신문 기사는 많이 있다.

출생과 유년기

  • 1912년 4월 15일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의 외가에서 출생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김일성 관련 최초 기록이나, 열람이 금지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 외가가 있던 칠골의 창덕학교(彰德學校) 재학
1923년 봄부터 칠골 외가에 와서 창덕학교(彰德學校)를 2년간 다니다 1925년 1월 다시 만주로 감.
월남한 당시 급우들의 증언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32, p.94
일제시대 기록 : 일본 귀족원 사상조사위원회(貴族院 思想調査委員会) 질의응답 자료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 (1944년 11월 18일) p.4

만주 시절 청소년기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회원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의 오기임.
1930년 3월 14일 국민부(國民府)는 산하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 등 3개 단체를 통합시켜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한다.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김성주(金成柱)가 선출됨.
1930년 6월 27일에 창립된 국민부 소년단(國民府 少年團) 제3분대장 김성주(金成周)는 북한 김일성으로 보임.
체포된 이종락 : 동아일보 1931년 2월 3일 2면
  • 1931년 2월 12일 (음력 1930년 12월 25일)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 : 아래 참고.
이종락(李鍾洛) 등이 1931년 1월 28일 구속되자 조선혁명군 사령부(朝鮮革命軍 司令部)는 와해된다. 3월말경 고할신(高豁信)도 체포되고, 잔존 세력이 세화군(世火軍)을 조직했다는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의 기사. 1931년 3월 세화군(世火軍)의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으로 김성주(金成柱)가 나온다.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 - 길흑농민동맹사건(吉黑農民同盟事件)

정모(鄭某)씨를 살해한 이 사건은 김일성이 1930년말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에 가서 머물던 시기에 일어났다. 당시 김일성은 최형우가 근무하던 삼성학교(三成學校)를 세운 이만진(李萬鎭)의 집에서 아들 이선일(李善一, 1912~?)과 한 방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선일이 1970년대 초 이명영(李命英, 1928~2000)에게 증언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주범은 김일성이다.[11][12][13]

이선일이 공범이라고 증언한 변달환(邊達煥)·한용서(韓用瑞)·천학진(千學振) 등 3명이 1932년 8월 8일 장춘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이 당시 여러 신문에 보도된 것이 근래 밝혀졌다[14][15][16][17][18][19][20]. 이에 의하면 사건은 음력 1930년 12월 25일 (양력 1931년 2월 12일)에 일어났으며, 피살자는 정원일(鄭元一)이고, 교살 당했다고 하였다. 이 기사들의 내용은 이선일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나 다만 신문 기사에는 김일성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달아난 공범으로 홍종환(洪鍾煥)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선일이 증언할 당시는 이 사건은 현지에서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인데다, 증언내용이 당시 신문 기사와 거의 일치하므로 김일성이 주범이라는 그의 증언도 사실일 것이다. 극히 최근에 조선일보 DB가 공개되어 검색해본 결과 김일성이 이들에게 농민동맹 가입을 권유하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과 살인죄(殺人罪)로 구형(求刑) 신의주 법원(新義州 法院)에서
농민동맹(農民同盟)의 삼명판결(三名判决) 조선일보 1933.02.08 석간2면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 참살 관련 기록

김일성 일당이 1932년 2월 만주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선혁명군 고동뢰(高東雷) 소대 10명을 참살한 사건.

후일 증언 또는 기록

  • 김일성은 어린 시절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동생 김영주가 증언했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김형직도 아들들에게 김일성 장군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 동생 김영주의 증언
  • 1930년말 만주 회덕현 오가자(懷德縣 五家子) 시절 김일성을 알았던 최형우가 해방 직후 서울에서 펴낸 책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도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별 대단한 내용은 없고, 보천보사건도 나오지 않는다. 김일성과 관련된 부분은 북한의 실력자로 막 등장한 그에게 잘 보일 의도에서인지 상당히 미화하여 기술했다. (아래는 김일성 관련 부분 발췌)
p.7 (p.589)에 김일성의 육문중학 시기및 1932년 여름까지의 일에 대한 증언이 나옴.
[원문 텍스트] :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김학규의 백파 자서전 기록
  •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전 성균관대 교수의 저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기록에 나오지 않는 유격대 투신 이전 북한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 평양 또는 만주에서 그를 알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처음으로 밝혔다.
  • 김형직(金亨稷)의 친구 이도일(李道日)의 증언
이도일(李道日)은 안도현 치안대장(安圖縣 治安隊長)이었던 이도선(李道善)의 형으로, 동생이 체포해온 김영주가 친구 김형직의 아들인 것을 알고 한동안 데리고 있으면서 돌봐주었다.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한때 金日成(김일성)과 한마을에서 살았던 李道日(이도일)씨(七八(칠팔) · 釜山市(부산시) 대청洞(동) 四街八六(사가팔육))의 증언.
지금부터 三十(삼십)여년전 내가 滿州(만주) 안도縣(현)에 살때 그때 金成柱(김성주)라고 불렀던 청년과 같은 부락에 산 일이 있었읍니다. 金成柱(김성주)는 그 아버지되는 金亨稷(김형직)이 共産黨(공산당) 측으로부터 암살을 당한 후 안도縣(현)으로 들어와 재산이 있었던 有志(유지)를 양아버지로 삼고 정착했읍니다. 그런데 얼마후 金成柱(김성주)는 조직을 만들어 재산이 있는 노인들을 잡아다 죽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를 죽일까도 마음 먹었지만 그 아버지인 亨稷(형직)이와 나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金成柱(김성주)가 양아버지 창고에서 무기 몇 자루를 훔쳐가지고 나가 안도縣(현)과 통화縣(현) 사이에 있던 日本軍(일본군) 진지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는 바람에 그 세력이 약간 커졌지요. 그후 滿州軍(만주군) 중좌로 있던 내 동생 李道先(이도선)을 金成柱(김성주)가 죽였기 때문에 원수를 갚기 위해 만주군 당국에 銃(총)을 달라고 청했더니, 내가 獨立軍(독립군)한 일이 있다고 무기를 주지 않다가 나중에 三十(삼십) 자루를 주었어요. 그때 關東軍(관동군)의 대토벌 작전이 시작됐는데 나도 그 작전에 참가해서 공비들을 제거했지요. 이리하여 金成柱(김성주) 일당과 그 부하들이 모두 섬멸되고 金(김)등 일곱 사람만이 살아서 연해주로 빠져 나갔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이명영,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96~97] 第二章 金聖柱의 少年時節 / 第一節 家系와 生活環境

當時 撫松에 살았던 李道日씨(79세, 釜山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亨稷이랑 같이 獨立運動團體인 白山武士團에 關係했었다. 團長은 金虎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民族主義者였다. 그런데 그때 共產黨運動이 벌어지면서부터 獨立運動陣營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漢醫였던 金亨稷은 獨立軍한테는 약도 주고 治療도 해주었으나 共產黨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아 공산당한데 원한을 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共產黨들이 와서 분풀이로 亨稷이를 殺害하고 말았다. 金聖柱는 자기 아버지를 누가 죽인지도 모르고 지금 共產黨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딸 손인실(孫仁實, 1917-1999)의 증언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4>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3) 1972.01.20 동아일보 4면
▲손인실(孫仁實)씨(五四(오사)·이대부총장(梨大副總長) 문병기(文炳基) 박사 부인)
임정(臨政)에 관계하시던 아버님(손정도(孫貞道)목사,·상해임정임시의정원의장(上海臨政臨時議政院議長))이 만주(滿州) 길림(吉林)에 한인학교(韓人學校)와 교회(教會)를 세우고 우리 가족들이 거기에 살 때였읍니다. 열살도 못됐던 나는 무슨 소년단인가 하는 대원들을 따라서 길림(吉林) 북산(山)에 올라 병정놀이나 숨바꼭질등 게임을 했던것이 지금도 기억(記憶)에 남아있읍니다. 그때 이 소년단에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의 소년이 있었읍니다. 열두살 되던 一九二八(일구이팔)년경 길림(吉林)을 떠났기 때문에 그후 이 소년단의 일은 차차 잊혀졌는데 해방 후 만포진의 병원을 팔고 평양(平壤)에 와서 얼마 안된 때입니다. 아마 四五(사오)년十(십)월 하순쯤 일까요. 아이를 업고 평양(平壤)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무슨 공산당(共産黨) 사무실인가 어디에 김일성(金日成)의 큼직한 사진이 걸려 있는걸 보았읍니다. 그무렵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가 진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개명(改名)을 해서 들어왔으며 만주(滿州) 길림(吉林)에서도 산 일이 있다는걸 들어왔었는데 그 사진을 보니 옛날 길림(吉林)의「그 소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들더군요. 그래 자세히 보니 어렸을적 모습이 약간은 남아있는듯 했으나, 그때도 살이 약간 찌기 시작해서 호리호리했던 옛날과는 달라 확실한 판단이 안됐지만 그가 어릴 때 보았던 김성주(金成柱)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초기 만주 빨치산 시절 : 1932년 7월 ~ 1936년 2월

이 시기에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의 유사한 이름이 나오는 기록이 많은데 누구인지 정확한 신원 확인이 어렵다.

그의 중공당 가입 연도는 기록에 따라 1931년으로 한 것도 있으나,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동만특위(東滿特委) 서기였던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1935년 20월 20일자 보고서에 1932년 입당으로 나오므로 이것이 정확할 것임.
  • 아래 두 기록에 나오는 김일선(金一善)과 김일선(金日善)은 진만산(陳萬山, 陳滿山)과 함께 나오므로 동일인물로 보인다.
  1. 1934년 3월 31일 왕청현(汪淸縣委) 반일유격대(反日遊擊隊) 참모겸정치위원(參謀兼 政治委員) 김일선(金一善, 金一成이라고도 함.)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51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I-4-5-2-1_22_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 11.東満特委ノ根拠地関係
    [p.4] 汪淸縣委 政治部責任 陳萬山(滿人)

    反日遊擊大隊長 趙芝遠 (滿人 趙永遠이라고도 함.)

    「反日遊擊隊參謀兼 政治委員 金一善(鮮人, 金一成이라고도 함)」
    고이허(高而虛, 1902~1937)파 대표로 김일성(金一成)이 나오는 조선신문(朝鮮新聞) 1934년 08월 17일자 기사. 이청시(李靑矢)는 이청천(李靑天, 1888~1957)의 오기로 보이며, 양서봉(梁瑞鳳)은 양세봉(梁世奉)인데, 이로부터 한 달 뒤인 9월 20일 피살 당했다.
    1935년 12월 20일자 위증민 보고서의 동북인민혁명군 간부 약력에 나오는 김일성의 약력

    이보다 앞서 3월 27일자에는 金一善(鮮人, 金一成이라고도 함)이 全一善(鮮人, 全一成이라고도 함)으로 되어 있었는데,[21] 성을 전(全)으로 했다가 김(金)으로 고쳤다.

    북한 김일성이 1941년 1월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에[22] 왕청반일유격대(汪淸反日游擊隊) 대대정치위원(大隊政治委員)을 지냈다고 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위의 김일선(金一善, 金一成이라고도 함)은 북한 김일성으로 볼 수 있을 것같다. 하지만 허동찬(許東粲, 1932~ )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 6사장 김일성이라 하였다.[23]
  2. 1934년 5월 30일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 제2독립사(第2獨立師) 제2단 단장(團長)은 중국인 진만산(陳滿山), 정치위원은 한인 김일선(金日善)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167.
中共東滿特委書記馮康的報告(之一) -- 關于東滿特委書黨團幹部和人民革命軍幹部簡歷 (一九三五年 十二月二十日) : 中共東滿特委成立 70周年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2000. 09) p.180
풍강(馮康)은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다른 이름이다.

간도(間島) 일본 영사관의 정보 기록

간도 일본 영사관의 정보 기록에는 김일선(金一善), 김일선(金日善), 김일성(金一成), 김일성(金一星), 김일성(金日成) 등의 이름이 나오는 기록이 상당히 많다. 대강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상당수는 허동찬(許東粲, 1932~ )의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에도 나오는 기록들이다.[27]

2명의 김일성의 다른 행적

  • 1935년 가을에 간도(間島) 지역에 있던 동북인민혁명군 2군 소속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이 강화되자 1935년말 북만(北滿)으로 가서 주보중(周保中)의 5군과 연합하여 혼성부대를 편성하며, 김일성(金日成)이 지휘부에 들어있다. [이 사람은 1936년 4월 사장에 임명되며, 북한 김일성이 아님.]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만주국군정부고문부(滿洲國軍政部顧問部, 1937년), pp.173~182.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 : 1936년 3월 ~ 1937년 12월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6사장이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쪽이 다수이다.

하지만 새로 발굴된 많은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1936년 ~ 1937년 기록에 자주나오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당시 전사한 것이 맞으며,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 김일성(金日成)은 1936년 4월 사장(師長)으로 임명됨.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16] : 1936년 4월 3일자 일기중 김일성 관련 부분

同日西南區軍部副官周x, 奉高政委之派遣, 帶交通兵二名 于昨日到東南區。帶來高政委鳳儀的額穆派遣工作經過報告一件; 又, 第二軍第五團團部 負責幹部同志報告二件, 第二軍 軍部 王德泰 同志, 魏民生 同志 工作通知和 討論信三件, 金日成 同志 報告信 一件。 綜上各信內容, 要旨如下:

  1. 魏同志 西去 到達 敦化附近, 已與王德泰 同志等 會合一處。
  2. 第二軍 拟建立三个師, 第一團爲基幹, 合以遊擊大隊六个中隊 編爲第一師, 以安鳳學爲師長, 周樹東爲政委; 以第二團爲基幹, 改編新參加之各山林反日隊, 編成第二師, 以金日成爲師長, 曹亞範爲政委; 東部隊以第四, 五團爲基幹, 合以更部編爲第三師, 更是否參加師長人選及師部負責幹部, 由東方面決定之。
..........
김일성은 원래 2군 2사(師) 소속이었는데, 사충항(史忠恒)의 부대가 2군으로 편입되면서 2사로 되고, 2사는 3사로 개칭된다. 다시 1군과 2군이 동북항일연군의 1로군으로 편성되면서 3사는 6사로 명칭이 바뀌고, 김일성은 6사장(師長)이 된다.
  • 『김일성 1912~1945』의 저자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 1962~ )는 자신의 조부가 만주 경찰관으로 있으면서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김일성과 협력했다고 말한다.[28] 그러나 자신의 할아버지가 알던 다른 김일성이 어떤 사람인지는 밝힌 적이 없는 것같다. 동북항일연군에 북한 김일성과 다른 김일성이 있었다는 증언은 많다.

잡지 《삼천리(三千里)》의 김일성 관련 기사

《삼천리(三千里)》 1937년 10월호 및 1938년 11월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 : 1938년 11월 ~ 1940년 10월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전사 후에 다시 나타나는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많은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보면 1939년 ~ 1940년 기록에 나오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장에 임명된 것은 1938년 11월 25일임.
霍燎原等 編著, 『東北抗日聯軍軍史叢書: 東北抗日聯軍 第二軍』, 黑龍江人民出版社, 2005 pp.174~175[29]
霍燎原, 于文藻, 吕永华 著, 《东北抗日联军第二军》, 黑龙江人民出版社, 1987年
  •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이 1938년(昭和 13年) 발간한 《최근에 있어서의 조선치안상황(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의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에는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이 임강현(臨江縣, 부하 200 명)과, 무송현(撫松縣, 부하 300 명) 두 곳에 나온다.[30] 2명의 김일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1명은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이고 (전사후 남은 잔존 부대), 다른 1명은 이후 그와 같은 이름을 쓰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제2방면군장이 된 것은 1938년 11월의 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 귀순 공작 관련 기록

김일성 귀순공작에는 김일성의 조모 리보익(李寶益, 1876~1959), 왕년의 상관 이종락(李鐘洛, 1907~1940), 삼촌 김형권의 동료였던 박차석(朴且石) 등이 동원되었다. 김창영(金昌永, 1890-1967)은 당시 귀순공작을 주도했던 인물로 1949년 4월 반민특위에서 그 일에 대해 진술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귀순공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세기와 더불어 7권(계승본 1편, 1996년 출간): 1937년 11월 ~ 1940년 3월 / 제19장 시련의 언덕을 넘어 (1937년 11월 ~ 1938년 11월) / 7. 리보익 할머니

김일성 비단 내부상황(金日成匪團內部狀況)

간도성 경무청(間島省 警務廳)이 1939년 8월 초 김일성 부대에 들여보낸 첩자 지순옥(池順玉)이 1940년 6월 말에 돌아나와 보고한 김일성 부대의 내부 상황 : 1940년 7월 26일자 훈춘 영사의 보고서로 별 대단한 내용은 없다.

강덕(康德) 7년 = 소화(昭和) 15년 = 1940년. 강덕(康德)은 만주국 연호임.

標題:7 昭和15年7月5日から昭和15年7月26日
pp.33~43 : [琿領情機密 第一八六號] 金日成匪團ノ內部狀況ニ關スル件 : 1940-07-26
在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는 당시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대사(関東軍司令官兼駐満洲国大使)였다.

지순옥은 위에 나온대로 김일성 부대원 강흥석(姜興錫)의 처였는데, 남편을 찾아 들어간 것으로 꾸몄다. 남편 강흥석은 마에다(前田)부대와 교전 중에 흉부에 중상을 입고 모 산중의 병원에서 치료중이라 했다. 김일성 부대와 마에다 중대의 교전은 1940년 3월 25일에 있었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밀영으로 남편을 찾아온 지순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부대에 들어온 그녀의 행동이 수상해서 금방 첩자인 것이 드러났지만, 사실을 말하고 특별히 나쁜 행위를 하지않은데다 부하의 처였으므로 당분간 머물다 가게했다고 했다. 회고록에는 지순옥의 일을 김일성이 포용력 있고 인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로 포장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위 훈춘 영사의 보고서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지순옥이 1956년 김일성을 찾아왔다고 하므로 단순한 일제 첩자였다기 보다는 이중 스파이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세기와 더불어 7권(계승본 1편, 1996년 출간): 1937년 11월 ~ 1940년 3월 / 제21장 대부대 선회 작전의 총성 (1939년 7월 ~ 1940년 3월) / 1. 밀영에 찾아온 녀인

훈춘 영사의 보고에는 김일성 회고록과 달리 지순옥이 김일성 부대에서 첩자 신원이 탄로났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김일성 회고록의 관련 내용은 작가들이 이 보고서를 참고한 후 쓴 것이므로 실제가 아닌 창작일 가능성도 없지 않고,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궤멸

1941년 3월초까지 1로군 요인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귀순 또는 소련으로 도주하여 항일연군 1로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18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소련군 시절

북한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상관의 허락도 없이 1940년 10월 23일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33][34][35]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소련과 중국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고, 증언도 있다.

제88독립보병여단
《김일성, 안길, 서철이 왕신림에게 올린 보고서 - 항일연군 제1로군 정황과 문제에 관하여 (金日成, 安吉, 徐哲 給王新林的報告 - 關于抗聯第一路軍情況和對問題的答複)》: 《东北地区 革命历史文件 汇集》 甲60 pp.95~105。및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2000. 09.)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제48회,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동향/연구보고서,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p.314 에 수록.
왕신림(王新林)은 소련 극동전선군 정찰국장의 중국식 암호명이다. 나움 소르킨(Naum Sorkin, 1899~1980)은 1941년 3월 부임한 두번째 왕신림이고, 이 보고서를 받은 첫번째 왕신림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류쉔코 장령이라 나온다.
  • 1941년 1월 소련서 작성한 이력서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김일성이 이끌던 조선인 단독 부대는 없었다” : ‘김일성 이력서’ 발굴한 러시아인 학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발굴] 김일성 보증인 이청산 찾았다 주간조선 2558호 2019.05.20
  • 1941년 2월 16일 라즈돌노예의 남야영에서 장남 김정일 출생
김정일 생가
김정일 생년
  • 김일성 인솔 소부대의 만주 파견 : 1941년 4월 10일 출발, 1941년 11월 12일 소련 귀환
  • 김일성이 1941년 9월 30일자로 주보중(周保中)과 김책(金策)에게 올린 만주 정찰활동 결과 보고서
주보중, 김책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서한 (1941년 9월 30일, 번역문) : 동북지역조선인항일력사사료집 /김우종 주필; 원인산, 림영만 부주필; (모단강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5), 제10권 pp.266~274.
정주진, <김일성의 소련군 편입 직후 만주 정찰활동 결과 보고서> 국가관리브리프 16호,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2017년 1월 26일
중국어 원문 : 『金日成給周保中, 金策的信』 (1941.9.30.),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編,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1999, p.819
  • 1942년 김일성 자필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 『東北抗日聯軍 史料(下)』, 東北抗日聯軍 史料 編寫組, 中國共産黨史 資料出版社, 1987, pp.665~679
중국어 원문 보기 : 《抗联第一路军略史》 东北抗日联军史, 哈尔滨市人民政府地方志办公室 (哈爾濱市人民政府地方志辦公室)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403-414 : 중국어 원문의 번역
《金日成의 自筆 빨치산 日誌》 金贊汀 新東亞. 390('92.3) pp.380-393 /東亞日報社
주보중의 지시로 김일성이 직접 쓴 이 기록에는 조선독립이란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으므로 김일성이 당시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했다고 볼 아무 근거가 없다. 김일성의 혁혁한 항일투쟁 전과라는 보천보 사건조차 나오지 않는다.
  • 1945년 8월 29일 적기훈장 수여 관련 문서[36]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 즉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처음 나서던 날 가슴에 달고 나온 적기 훈장의 수여 관련 기록이다.
  •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주보중은 만주에서는 김일성의 직속 상관은 아니었으나, 소련으로 넘어가서는 88여단장으로 직속상관이었다. 소련에 넘어간 후 김일성의 행적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후기(后记)에 적힌 말로 보아 김일성 관련 민감한 부분은 간행시 상당히 손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p.843 후기(后记) "考虑日记是 公开出版、故某些内容 进行了审愼的技术处理。(일기가 공개 간행되는 점을 고려하여 일부 내용은 기술적 처리를 했다.)"
88여단 시절 김일성과 관련한 문서와 해설이 많음.

동료를 감시, 밀고하는 NKVD 비밀 요원

88여단에서 진지첸(김일성) 대위는 표면적으로는 1대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으나, NKVD 비밀요원으로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상관인 극동군 정찰국장 소르킨 소장과 푸르카예프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 이러한 역할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고, 그들의 추천으로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김일성이 조선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들

  1.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족 여영준(呂英俊)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일본이 패망하면 중공당이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라도 시켜주기를 원했다.[37]
    “한번은 김일성(김성주)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 정위,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왜놈들과 싸우느라 산속에서 고생하는데, 왜놈들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은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러자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안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했으니 최소한 안도현장쯤은 시켜주겠지.’ 그래서 우리 몇은 김일성 주변에 모여앉아, ‘그럼 너는 김 정위 밑에서 안도현 공안국장을 하고, 나는 안도현 위수사령관을 하마.’라고 말장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까지는 김일성도 북조선(북한)에 돌아가 이렇게 나라를 세울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66]

    [66] 취재, 여영준(呂英俊) : 조선인, 항일연군 생존자, 취재지 연길, 1986, 1988~1989, 1993, 1996.
    이런 것을 보면 당시 그의 의식 구조는 조선인 아닌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만주의 안도현장 자리 정도나 하나 하고싶어 일본군이나 만주군과 싸운 것이지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다. 해방되면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항일연군 내의 다른 조선인들도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여영준 본인은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
  2. 소련서는 소련군 장교로 출세하는 것이 꿈이었다.
    만주서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간 김일성은 중국보다 앞선 소련의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이었던 이을설(李乙雪, 1921-2015)은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소련 시절의 김일성은 소련서 살고 싶어 했고, 국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강연을 직접 들었던 탈북자의 증언이다.[38]
    김일성이 1941년 일제의 토벌에 쫓겨 소련의 연해주 지방으로 도주해 소련군 혼성부대 88여단에서 대위로 복무했습니다. 소련군에서 곽에 든 담배를 공급받게 되면서부터 김일성은 곰방대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리을설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일성의 전우들이라고 하는 김책이나 최현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곰방대를 이용해 담배를 피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방 후 김일성이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는 리을설의 이야기였습니다.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연안파들을 견제하고 북한을 세력권 안에 넣으려는 소련군의 요구로 조국이 해방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귀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리을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 우리 조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김일성이 귀국하지 않고 소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조국이 분단되는 현실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오늘날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적인 봉건 통치는 없었으리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죄행들을 다시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련 국방성 전사(戰史) 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던 가브릴 코로트코프(Gavril Ivanovich Korotkov)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39]

    진지첸이 자신의 생애 중 15년을 투자했던 ‘빨치산 전(戰)’은 지금 상태에서는 스탈린에게도 모택동에게도 필요치 않았다. 소련 극동전선으로 된 제88국제여단은 그 기본적 기능을 잃어버렸다. 막 군사적기 훈장을 받은 육군대위 앞에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군대의 집단 동원 해제가 시작되면서 매우 많은 장교들이 군사업무를 계속하느냐 ‘시민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육군대위 진치첸은 실망했다. 제88여단은 재편성돼야 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승진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채소밭에서 야채가꾸기를 계속하거나 보잘것없는 공무원이 되고싶지 않았다. 물론 당의 직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으나 그는 이것이 ‘상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같이 소련군에서 출세할만한 자격 요건도 갖추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그에게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북한 전문가 란코프(Andrei Lankov)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40][41]

    많은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김일성은 당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매우 명백히 다음과 같이 내다보고 있었다.
    즉 군대나 군사 아카데미에서 복무 후, 연대 또는 사단 지휘관이 되는 것 등으로, 역사가 조금만 다른데로 흘렀어도 후일 모스크바의 어디선가에 소련군 퇴역 대령 혹은 소장 출신인 김일성이 존재했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 유라(김정일)는 지금쯤 모스크바에 있는 어떤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민주주의 러시아'나 이와 비슷한 형태의 조직이 주도하는 많은 군중이 모인 가두행진에 열성적으로 참가했을지도 모른다.
  3. 김일성 1942년 자필로 쓴 《항련 제1로군 약사 (抗聯第一路軍略史)》에 조선독립이란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중공당원으로 만주 적화 위해 투쟁한 것이다.

8.15 해방과 입북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조선인들은 1945년 9월 중순 육로로 입북을 위해 하바로프스크 88여단을 떠나 만주 무단장(牡丹江) 역에 도착했으나 일제가 기차 터널을 파괴하여 북한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역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이기건(李奇建, 1919~ ?)이 그때의 대화에 대해 증언했다.

이후 진지첸 대위(김일성) 일행은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소련 군용 화물선 푸가초프호(Pugachev 號, 정식명칭 Emelyan Pugachev, Емелья́н Пугачёв)를 타고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하였다.[42][43][44][45]

푸가초프호(Pugachev 號). 해방 직후 소련군 88여단진지첸 대위(김일성) 일행이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북할 때 타고 온 배이다.

한달간 김영환이란 가명 쓰며 숨어다녀

소련군 문서에 1945년 10월 2일부터 진지첸을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어

해방 직후의 김일성 관련 기록

해방 직후의 남북한의 김일성 관련 기록들을 보면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은 보천보 사건이 유명한 사건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북한 김일성은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성장하여 국내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해방 당시 국내에서는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대중앞에 나서기 이전에 주요 각료 후보로 거론되던 김일성은 1920년대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거의 전설화된 김일성 장군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나 한국 정부 또는 민간의 김일성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당시 그의 전력에 대해 제대로 정확히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의 기록을 보아도 그의 해방전 경력은 별 대단한 것이 없고, 소련군 경력은 철저히 감추었다. 이처럼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는 미지의 인물이었고, 한국 정부가 그의 항일투쟁 경력을 폄하하기 위해 가짜로 만들었다는 따위의 주장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인물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뿐이다. 소련군이 어떻게 해서 이런 인물을 북한으로 데려와 지도자로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려지는 것은 공산권이 붕괴하는 1990년 무렵부터이다.

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기록에 나오는 김일성

1945년 9月 6日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명단에 김일성(金一成)이 나온다.
중도파 단체인 선구회(先驅會)가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한 지도자 여론조사에 나오는 김일성(金日成)

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

  • 일본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東京版)』 1945년 10월 3일자[46]는 해외 각지의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 金日成 씨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출신. 만주에서 ‘김일성 軍’을 조직하여 만주사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약 조선 반도민의 인기를 획득하였고 이동휘 (李東輝, 1873-1935) 씨의 세력 실추 후 친소파의 제일인이 되었다. 중공은 그를 이용하여 만주 방면의 지반 획득을 위해 그에게 북만성위원, 東北抗日聯 제3路軍 제10 지대장 및 정치위원의 지위를 주었고 이번 소련의 북조선 진주와 함께 평양에 들어온 모양이다.
라고 하였다. 이 기사는 김일성이 일본 육사를 나오고 만주사변(1931년) 때부터 유명해졌다고 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후대에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김일성과 동일인물로 알고 있는 듯하다.

북한 김일성 출현 직후 남한 언론의 관련 보도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 즉 북한 김일성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는 완전한 무명인사로, 만주나 소련 어디에서도 장군으로 불린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10월 14일 평양 집회에서 대중 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서 대중들이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착각하도록 유도했다. 남한 언론도 그의 실제 행적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익숙한 이름의 "김일성 장군"이 귀국한 것처럼 착각하여 보도하고 있다. 무명인사를 유명인물로 둔갑시킨 소련군정과 진지첸 대위의 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처음으로 평양의 대중 앞에 등장한 직후 10월 중으로 이를 보도한 남한 신문 기사는 아래 3건이 확인되어 있는데 모두 2면에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 신문들이 귀국한 이승만의 최초 기자회견 기사는 같은 날 1면 톱으로 크게 취급한 것과 대조적이다.[47][48] 11월 초순에도 김일성에 관한 기사들이 더러 나오기는 하나 11월 중순 이후부터 자주 나오기 시작한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로 당시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맞다면 당연히 이승만처럼 공개적으로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곧바로 기자회견을 가졌어야 하며, 몰래 귀국하여 한달동안이나 숨어 다니다 대중집회를 조작하여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서는 일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무명인사였기 때문에 한달여 민심을 살피며 고심하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앞에 나서기로 일을 꾸민 것이다. 남한의 신문들도 그의 이름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그의 평양 출현도 며칠 후 단신으로 짤막하게 보도한 것으로 보인다.

《金日成將軍, 歸朝入壤》,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 10. 19. 2면 2단
  • 《金日成將軍 平壤滯在中》,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1945. 10. 18. 2면[47][49]
金日成將軍 平壤滯在中
北鮮 南滿 一帶에 勇名을 덜치든 革命의 鬪士 金日成 將軍은 수일 前 部下小部隊를 거느리고 歸國하야 現在 平壤에 滯在 猛活躍中이며 平壤서는 同將軍歡迎會가 성대히 열리었다 하는데 同將軍은 그間 麾下百俆名울 莫斯科에서 訓練中이였는데 저 영광의 날 八月十五日을 맞이하자 急遽 歸國의 길을 떠났다 하며 同將軍은 名譽스러운 赤軍最高勳章을 받었다한다.
莫斯科 : 모스크바
金日成將軍, 歸朝入壤
確實한 報道에 依하면 쏘베트 異域에서 朝鮮獨立을 爲하야 끈임없시 싸워가는 金日成將軍은 日前 平壤에 歸國하였다하며 이앞 더욱 活躍할 것이라고 注目된다.
歸朝入壤 : 조선에 귀국하여 평양에 들어오다.
  • 《남북만(南北滿)에서 용명(勇名) 떨친 김일성(金日成) 장군이 귀국》, 『민주중보(民主衆報)』 1945년 10월 23일 2면[50]
기사 내용 미확인
  • 해방 직후 김일성 관련 기사 검색
  1. 국립중앙도서관 신문 아카이브 검색
  2.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창간호부터 기사 검색 열람 (무료)
  3. 조선뉴스라이브러리100 조선일보 창간호부터 과거기사 검색
해방 후 조선일보는 1945년 11월 23일[51], 동아일보는 12월 1일[52] 복간하여 북한 김일성이 등장하고 좀 지난 후부터 기사가 있음.

해방 직후 북한의 김일성 약력 기록

김일성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이 넘쳐나며, 구체적인 해방전 행적에 대한 언급은 소략하다. 그가 소련에 의해 북한지도자로 발탁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인 소련군 경력은 철저히 감추었다.

p.83 : 韓載德 著, 金日成將軍 凱旋記 빗나는 革命家의 집
출처 : 우리의 太陽 : 金日成 將軍 讚揚特輯.(김일성장군 찬양특집), (平壤,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 p.1 (p.4)
(2페이지 짜리 약력 중 1페이지는 해방 후의 경력이다.)
조선중앙년감(朝鮮中央年鑑) 1950년판 (1 of 3) : 조선중앙통신사(朝鮮中央通信社), 1950년 2월 15일 - 국립중앙도서관
pp.187~189 : 3. 朝鮮民族의 領導者 金日成 將軍의 歸國 (朝鮮最高人民會議 代議員 選擧를 爲한 立候補者 略歷 紹介文에서)
[초대 最高人民會議 代議員 選擧는 1948년 8월 25일에 있었고, 김일성은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선거구 (제23선거구)에서 100% 득표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
[조소 경제 문화 협회 사진첩] 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의 날, 1948년 8월 25일. (上左) 강동군 입후보자 환영 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김일성 장군 국사편찬위원회
북한 초대 내각#레베데프의 평정서
소련 군정 민정국장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작성한 북한 초대 내각 요인들에 대한 평정서 : 1948년 12월 25일자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연구사업] 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 :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pp.380~401 :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북한 최초의 공식적 김일성 전기
[出席人] 義勇軍側 : 崔鳳綠, 趙容徹, 張振光, 柳新, 河振東 / 金日成將軍部隊 : 林春秋, 金成國, 安吉 / 崔昌益 副主席
안길 (安吉, 1907∼1947) 등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담에는 이미 허풍과 과장이 잔뜩 들어가 있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해방 당시 평양에 김일성이 출현한 직후부터 남한의 각종 기록에는 그가 가짜라는 말이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 특히 그를 가짜라고 기록한 미군정도 문헌도 상당히 많다. 과거 한국 정부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 부담이 돼서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해방 직후 김일성에 대한 남한 기록

해방 직후 남한 문헌에 나타나는 김일성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의 해방전 행적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했다는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은 해방 직후 북한 문헌에도 나오지 않으니 남한 문헌에도 당연히 없다. 그 사건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아래 조선연감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구체적인 김일성의 일제시대 행적에 대해서는 6.25 남침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를 거친 후 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1970년대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政界要人錄 p.362 (366/410)

金日成
平安道 出生 三十六歲
中國共產黨員으로 一九三四年次부터 朝滿國境地帶에서 抗日게리라鬪爭 展開
蘇聯士官學校 卒業 今次 蘇獨戰에 參加
陸軍少佐로 昇格 스타린勳章 授與
八·一五後 平壤에 來到 朝鮮共産黨北朝鮮分局 責任者 被任
北朝鮮共産黨 中央責任秘書 就任

現在 北朝鮮勞働黨 副委員長 北朝鮮臨時人民委員長
政界人名錄 金日成 : p.459 (465/503)

金日成
平安道 出生 三七歲
中國共產黨員으로 一九三四年次부터 朝滿國境地帶에서 抗日게리라鬪爭 展開
蘇聯士官學校 卒業 後 蘇獨戰 參加
陸軍少佐 昇進 스타린勳章 授與
八·一五後 平壤에 來到 朝共北朝鮮分局 責任者 等 歷任

現在 北朝鮮勞働黨 副委員長 北朝鮮人民委員會 委員長

김일성에 대해 우호적인 남한 기록

해방 직후 남한에서 출판된 아래 책에 나오는 김일성에 대한 글들은 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다. 하지만 만주 시절 대단한 항일투쟁을 했다고만 하고, 그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하여 해방직전 5년간 소련군에 있다가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북한에 왔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反滿抗日軍
滿洲建國의 後에 滿洲에 있는 中國側의 不服軍人이 地方으로 分散하야 께릴라的 抗戰을 시작하고 朝鮮在來의 獨立軍이 새로 氣勢를 어더서 反滿抗日戰線에 合流하니 그 衆이 三十萬에 넘고 廣大한 地域에 東閃西忽하야 니른바 治安이 언제나 確立될는지 압히 캄캄하얏다. 특히 朝鮮系의 反滿軍은 多年을 두고 山岳險岨의 地에서 耐乏忍苦의 作戰에 百練한 남아지요 長白山彙의 地理를 燭照的으로 精通하야 그險夷遠近을 自由롭게 利用함으로써 日本軍이 아모리 가서 攻擊올 더하되 百戰百敗를 되풀이하고 다만 擒縱自在하는 그네의 神機妙算을 感歎하고 도라옴이 唯一한 結果라 할 지경이얏다. 그뒤 建國十年의 間에 中國系의 抗日軍은 거의 消散하야 남은 者가 얼마되지 아니하되 東邊道로부터 東部國境에 걸치는 山岳密林地帶에 出沒하는 朝鮮系의 義兵은 오히려 累千名의 勢力을 保持하야서 巧妙하게 蘇聯과밋 中國共產軍으로 더부러 聯絡을 取하면서 滿洲國을 必倒한 뒤에 말것울 豪語하고잇섯다. 滿洲國에서는 이것이 잇슴으로써 百가지 對外宣戰이 죄다 無意味하야짐으로써 討伐, 懷柔의 硬軟兩策을 다쓰고 마조막에는 數千萬圓의 巨費로써 長白山中에 掃蕩大路를 만드러서 徹底한 迫逐으로 自滅에 드라가기를 期하얏스나 이또한 부지럽시 되얏다. 滿洲國이 朝鮮義兵을 爲하야 犧牲한 것이 金錢만 億을 算하되 國은 亡할지언정 朝鮮義兵은 掃滅할날이 업스리라고 닐럿다. 처음 朝鮮義兵의 數ㅣ 만흘적에는 各個의 行動을 取하야 그 두드러진 것만 하야도 金日成, 崔賢, 朴得範, 金先等 名帥를 볼러니 뒤에 차차 求心的으로 集約하야 나종에는 金日成이 統一體의 代表로 들려서 金日成의 名은 드듸여 滿洲政權抗爭史上에 나타나는 許多한 人物中 가장 큰 英雄的 表象이 돠얏다.
최남선은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김일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1941년 1월 김일성의 귀순을 권유하기 위해 살포한 비라에도 대표자로 그와 매제 박석윤(朴錫胤·1899~1950)의 이름이 들어 있다.[53] 물론 김일성은 그 전해 1940년 10월 소련으로 도주했으므로 그 비라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매제 박석윤(朴錫胤)은 민생단 사건(民生團 事件)으로 악명 높은 민생단을 만들었던 사람이기도 하다.[54] 해방 후 그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로 부상하자 최남선은 이러한 과거의 일로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고, 이 때문에 북한 김일성을 높이 평가하는 글도 쓰게된 것이 아닌가 한다.
五 金日成軍의 活躍。
抗日戰에 있어 빼지못할 한 巨大한 存在는 白頭山과 鴨綠江 流域을 中心으로 한 金日成軍의 活躍이다. 滿洲國으로 하여금 一億圓의 經費를 쓰게하고 總督府로 하여금 朝鮮統治의 癌이라 하여 國境江岸이 全部 堡壘化를 하여도 安心할수 없이 頭痛한 것은 抗日戰上 特筆大書할 일이다. 白頭山의 綠林豪傑 靑年將軍 金日成將軍은 平安道出生으로 今年 三十四歲의 靑年이다. 鴨綠江 沿岸一帶의 警察署 駐在所 等 襲擊 放火를 當한 곳이 많아 언제나 그 때마다 憲兵隊 警官隊를 는 多數動員하여 掃蕩이라는 어름으로 報復戰을 開始하였으나 늘 可憐한 慘敗를 當하고 말았다. 이는 金日成部隊가 山林中의 地理에 能熟한 것과 게릴라戰의 奇襲戰法을 取하여 敵으로 하여금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늘 五里霧中에 彷徨케 한 것이다. 古語에 勇將아래에 弱卒이 없다는 말과 같이 그 部下 亦是 모두 勇敢하여 普天堡를 襲擊한 때는 民衆을 모아 놓고 一場의 愛國演說을 하여 一般에게 큰 感激을 주었다. 그 行動이 膽大하고 疾風迅雷같으면서도 또 悠悠한 點은 目睹한 者들이 늘 傳하여 오는 말이다. 日滿軍警과의 交戰은 百餘回가 넘으며 特히 그 中에도 明月溝로부터 日兵 大部隊를 誘引하여 安圖가는 途中에서 擊滅한 것과 三道溝로부터 靑山里로 向하는 日本軍 大部隊를 最後의 一人까지 全滅시킨 것은 가장 큰 勝戰이었다.
저자 강흥수는 어떤 사람인지 잘 확인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해방 직후 남한 문헌 중에 거의 유일하게 김일성과 보천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당시 신문 기사도 참고했다고 하므로 사건당시 보도를 찾아보고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이 일반에 유명했다는 증거로 쓰기는 어렵다.
《지도자 군상(指導者群像)》, (大成出版社, 1946년 9월 15일) pp.29~40.
金南植, 李庭植, 韓洪九 엮음, 《韓國現代史資料叢書 : 1945-1948》 제13권 (제3부 단행본편)에 수록
실체를 잘 모른는 인물에 대해 찬사와 미사여구만으로 얼마나 긴 소설을 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pp.32~35] 二

金日成將軍은 平安道 出生으로 本名을 金成柱라한다. 少年時節부터 事物에 對한 銳利한 判斷과 臨事에 있어의 果斷性과 그리고 남달은 正義感과 多情한 人間味갖고 있었다한다. 十四, 五歲부터 學生運動 靑年運動에 投身하야 항상 리-더의 資格으로서 前面에서 活躍하였다. 남달은 壯志를 품은 그는 日帝의 監視와 彈壓이 酷甚한 國內에서는 到底히 백여날수없어 少年의 몸으로서 國內를 등지고 滿洲를 찾었다. 滿洲서 그는 地下工作으로 靑年運動을 指導하다가 八個月과 그후 三年間 監獄生活을하였다. 그는 그후 滿洲에서 武裝團을 모아 太極旗를 앞에 세우고 自身이 太極旗手로서 抗日戰線을 펴기 시작하였다. 關東軍이라면 日本의 陸軍가운데서도 精銳를 자랑하건만 少年 金日成의 武裝隊에게는 한없는 飜弄을 當하게되었다. 그 超人的인 武勇과, 天才的인 戰略은 殘虐無比한 日兵들의 心膽을 놀내게 하였다. 이리하야 金日成은 二十世紀의 한낱 神秘的 存在가 된 것이다.
一九三一年 日本이 滿洲를 侵犯하자 金日成將軍은 滿洲의 中國人民에게 侵略者 日本을 共同으로 擊退할 것을 强調하여 中國의 愛國靑年들에게 깊은 感銘을 주었다. 將軍은 精銳 三十餘名과함께 赤手空拳으로 火繩銃 槍 몇 자루를 들고 山中으로 드러가서 日本軍隊와의 戰鬪를 始作하였다. 接戰때마다 勝利品으로 武裝을 完備한 金日成部隊는 關東軍 最大恐怖의 的이였다. 그뒤 金將軍 은 「中韓反日游隊」의 勇士들과 協力하게되었고 一九三五年에는 金日成將은 第二 東北人民革命軍 司令官이 되었다. 國內와 滿洲 中國各地에서 모여드는 金日成部隊는 極히 短時日內에 師團을 形成하게되었다. 그리하야 金將軍은 師團을 指揮하야 그 鐵筩같이 森嚴한 警戒를 쳐부시고 日兵을 뭇지르면서 鴨綠江, 豆滿江을 넘어 朝鮮을 掩襲해온 일이 屢次 있었다. 金日成部隊의 根據地는 白頭山 附近이였으니 그 神出鬼沒한 빨치산 戰法는 마치 옛날 洪吉童의 傳說을 聯想케하야 日本關東軍을 餘地없이 蹂躪 弄絡하였다. 日本軍隊는 오랜 戲月에 많은 犧牲을 敢行하면서 數많은 軍隊가 出動하여 그 討伐에 努力하였건만 그들은 金日成을 붙잡을 수도 그 部隊를 討滅할 수도 없었다. 討伐하면 할쑤록 느러가고 커가는 金日成部隊--- 한 사람의 金日成을 죽였다고하면 열 사람의 金日成이 出現하는 實로 二十世紀의 이 수수께끼 앞에서 日本軍隊가 戰慄할 뿐아니라, 世界의 軍略家들이 그얼마나 놀내였든가!

討伐에 成功할 수 없음을 깨다른 日本놈들은 朝鮮民族으로서의 叛逆者들을 通해서 買收와 懷菜의 政策을 썼다. 그리하야 一九三九年代에는 所謂 「東北治安工作」이라 하여가지고 金日成將軍에게 武器를 바치고 歸順하면 朝鮮總司令官을 준다고까지 提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野卑한 政策에 넘어갈 人間이였다면 本來 그는 抗日鬪爭을 始作하지도 않었을 것이다. 將軍은 그들의 提案을 코우슴으로 一蹴하고 더욱 果敢한 戰鬪를 繼續한 것이다. 그 無比의 軍隊的 規律과 訓練은 能히 壓倒的인 日兵을 물니치면서 陣勢를 擴大해온 것이다. 日本帝國主義者들은 金日成將軍의 部隊를 强盜團 혹은 匪賊團이라고 불넜다. 이제 日帝의 後裔들인 南部朝鮮의 親日派, 民族叛逆者, 그리고 그들에게 無意識하게 追從하는 一部 反動輩들은 日帝에게서 배운 慣習으로서 우리의 民族的 英雄을 匪賊頭目이라고 또는 假字 金日成이라고 侮辱的 言辭를 함부로 使用하였다. 그러나 金日成將軍의 部隊는 秋毫도 匪賊行爲를 한 일은 없다. 日帝에게 阿諂하야 蓄積한 者나 勤勞大衆의 搾取로서 蓄財한 者의 財物은 빼앗어다가 貧困에 쪼들니는 사람들에게 分配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지도자 군상(指導者群像)》은 해방 당시의 지도급 좌익 인물들을 평하는 책이다. 여운형, 박헌영에 이어 3번째로 나오는 북한 김일성에 대해서는 무려 12페이지나 되는 장황한 글에서 그에 대한 찬사와 미사여구만 잔뜩 늘어놓았을 뿐, 일제시대 행적은 위와 같이 상상으로 지어낸 것들 뿐이라 실제와도 동떨어진 것이다. 일본군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한 것은 알지도 못한다.
김일성의 실제 전력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가짜라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낙인찍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이렇게 김일성에 아부하던 필자는 월북했다가 남로당 숙청 때 처형 당했다고 한다. 겉멋만 잔뜩 든 사이비 지식인이 자초한 일이다.

김일성에 대해 우호적인 신문 기사

남한의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와 좌익지 조선인민보에 김일성에 대한 글이 자주 실렸으나 대부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미사여구만 늘어놓을 뿐, 그의 전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별로 없다. 해방전 5년간 소련군에 있다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북한에 왔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으므로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진다.

소련 군정 인물들의 기록과 증언

  1. 김일성정권 내가 만들었다;소련군 정치장교 G.메크레르의 증언 <對談> / 메크레르,G·惠谷治 極東問題. 159('92.5) pp.48-58. 極東問題硏究所
  2.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3. Kim Il Sung's Soviet Image-Maker The Moscow Times Jul. 22, 2004
    위 기사를 번역, 요약한 기사: 그리고리 메클레르,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구소(舊蘇) 군정 치밀한 작전” 동아일보 2004-07-23
  4. "Крестный отец" Ким Чен Ира «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 05/12/2002
    "Godfather" Kim Jong Il : «Argumenty i Fakty (Arguments and Facts)» № 11 05/12/2002
  5. Сделан в СССР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 SoftMixer
    Сделан в СССР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 Waback Machine
    Made in the USSR, "Top Secret", No.9 / 268, Published: September 1, 2011
  6. 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 Андрей Почтарев, Независимое военное обозрение. 2005-01-14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 : Andrey Pochtarev, Independent Military Review. 2005-01-14
    여기에는 김일성 본인이 전사한 선배 지휘관의 이름을 따다 썼다고 했다는 메클레르의 증언이 나온다.
(러시아어를 구글로 영역하여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The secret counselor of the "sun of the nation"(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солнца нации")
............
1930년대 중반부터 그(북한 김일성)는 김일성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국인들 사이에 대단한 권위를 가졌던 전사한 대장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Since the mid-30s, he began to use the pseudonym Kim Il Sung, taking the name of his deceased squad leader, who enjoyed great authority among Koreans.
[С середины 30-х гг. стал пользоваться псевдонимом Ким Ир Сен, взяв фамилию своего погибшего командира отряда, пользовавшегося большим авторитетом у корейцев.]
............
다른 동지들의 경우처럼 그(북한 김일성)도 존경받던 전사한 게릴라 부대 지휘관을 기념하여 그 이름을 따라 썼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The fact that, following the example of his other comrades-in-arms, he took this name in memory of his deceased beloved and respected guerrilla unit commander, he himself told me.
[То что, он по примеру других своих боевых товарищей взял себе эту фамилию в память о своем погибшем любимом и уважаемом командире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он сам мне говорил.]
레베데프 비망록.pdf
쉬띄꼬프 일기.pdf
전 제주경찰서장 김영중의 제주 4.3 자료집 - 비망록 번역문 전문을 볼 수 있다.
  1. 레오니트 바신(Леонид Васин), 《대위 동무 (Товарищ Капитан)》, 소련의 잡지 「극비(極秘),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1991년 7월호;
    기사 내용 요약 : 金日成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 46년3월 蘇軍장교 방어로 연합뉴스 1991-08-14
  2. 「날조된 英雄」金日成 / 바신, 레오니트 新東亞 398호 (1992.11) pp.486-501

김일성 관련 우남위키 표제어

가족과 친인척

관련 인물

각주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送付에 관한 건 (1919년 03월 26일) p.60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第二 壹部 參考 送付 (1919년 03월 26일) p.61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2.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25, 조선(朝鮮) 1 (みすず書房, 1967)
  3.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독립기념관에 소장 연합뉴스 2005년 3월 23일
  4. 金日成의 父 金亨稷 조선국민회활동 사실로 확인돼 연합뉴스 1998년 3월 25일
  5. 白山武士團員 逮捕의 件 : 1921년 05월 12일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 康晋錫(變名 金在龍, 韓成龍,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大正 9년 (1920) 음력 2월.....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의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체류하다 같은 해 음력 4월 2일 임강현 천금동에서 목재 벌채 종사...
  6.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 1921년 4월 24일 >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康晋錫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7.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 서울신문 1992-10-27 4면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1992. 12. 08 (화) 서울신문
  8. 이명영,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96~97.
  9.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1. 金亨稷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10. 국민부(國民府)내 공산주의자들의 1930년 8월 19일자 탈퇴 선언문(脫退宣言文) :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 대리(日本 總領事 代理)가 1930년 8월 27일자로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11.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0) | 김성주의 살인벽 | 총을 쓰지 않고 타살·교살을 밥먹듯 중앙일보 1974.04.17
  1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135
  13.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권력(權力)의 역사(歷史)》 제2판 (종로서적 1989) pp.303~305
  14. 長春領事館에 逮捕된 ○○단重要人物 신의주검사국에 인도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08월 11일 7면 4단
  15. 朝農同盟事件 卄一日에 公判 新義州地方法院에서 매일신보[每日申報] 1932년 12월 14일 7면 3단
  16. 治維違反及殺人事件最高七年을 求刑 공범二명은 五년과 三년을 구형 判決言渡는 來六日 매일신보(每日申報) 1933.02.02
  17. ○○團員 三名(단원 삼명) 長春領警(장춘령경)에 被逮(피체) 1932.08.15. 동아일보 2면
  18. 農民同盟事件(농민동맹사건) 廿一日 公判(입일일 공판) 1932.12.14. 동아일보 2면
  19. 19.0 19.1 邊達煥等 最高 七年 求刑(변달환등 최고 칠년 구형) 1933.02.01. 동아일보 3면
  20. 密偵殺害(밀정살해)한 農盟員 判决(농맹원 판결) 1933.02.08. 동아일보 3면
  2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084400、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I-4-5-2-1_22_2)(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各国共産党関係雑件/満州国ノ部/東満特委関係 4.大会、会議及決議関係 (1934년 3월 27일) : p.13 汪淸縣委 「反日遊擊隊參謀兼 政治委員 全一善(鮮人, 全一成이라고도 함.)」
  22.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 중국공산당 입당 보증인 ‘이청산’은 누구… 주간조선 2551호 2019.04.01
  23.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p.415~416.
  24. 間島領事館情報 100-003 (1933-1934) pp.492~494 : 1934년 6월 15일자 간도총영사(間島総領事) 보고서 《관할구역내 조선인의 비적 피해 및 보호에 관한 상황 기타 송부의 건(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의 二. 共匪檢擧狀況 (一○) 明月溝 分署.....共黨遊擊隊員 朱南洙 金日成 兩名...
  25. 공비(共匪) 김일성(金日成) 검거 - 1934년 5월 8일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26.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1930-06-25 일자로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27.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 [속](金日成 評傳 [續])』, (북한연구소, 1988) pp.364~399
  28. 세상에 폭로된 김일성 항일의 진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 블로그 2017-02-01
  29. 김선호, 『조선인민군 :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 (한양대학교출판부, 2020년 03월 25일) p.62.
  30. 1938년 12월말 현재 대안비적현세표(對岸匪賊現勢表) :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 昭和8年·13年》 / 朝鮮總督府警務局 編
  31. 항일연군 인물들의 전사와 귀순 : 우남위키
  32. 비수(匪首) 김일성 부대(金日成部隊)의 임참모장(林參謀長) 수귀순(遂歸順)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5/07 3면 1단
  33. 33.0 33.1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34. 34.0 34.1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35. 35.0 35.1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2012-04-06
  36. 김일성 1942년7월∼45년10월 소련군 특수부대원으로 활동 중앙일보 1992.03.13 종합 1면
  37. 유순호, <김일성 1912~1945> (서울셀렉션, 2020) 상권 pp.262~263.
    해방되면 안도현장(安圖縣長)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38.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39.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75~176]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40. A. N. Lankov, 《From Stalin to Kim Il Sung :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2002.) p.57
  41. <화제> "金日成 집권 우연한 일" 연합뉴스 1995-08-19
  42. 김일성 대일 해방전 참가 못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 중앙일보 1991. 8. 26 종합5면
  43. [Why]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 조선닷컴 2009/06/19
  44.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pp.18~19 :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숙청된 고려인 가족 80인의 육필수기 : 미의회도서관
  45. "「蘇軍(소군)대위 金日成(김일성)」元山(원산)까지 수송" 45년 당시 蘇(소)해군중위 니주니코프 證言(증언) 1992.08.30 동아일보 4면
  4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일본보도기사 / 165. 피로 물들인 조선의 독립운동, 전쟁과 함께 치열화, 앞길에 여전히 수많은 파란 : 『朝日新聞』(東京版), 1945년 10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 2011년 06월
  47. 47.0 47.1 명칭 : 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18일자 특보 / 소장품번호 : 구입5658 대한민국역사박물관
  48. 三千萬同胞는 오직 一致團結하야 建國하라, 歸國李承晩博士의 第一聲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10월 19일 1면 1단
  49. 최강미, 《해방기 좌익 신문 『朝鮮人民報』의 항일투사와 김일성 형상: ‘수령형상’의 기원과 형성 탐색을 위한 시론 (1)》, 국방연구 2020년 3월 제63권 제1호, pp. 27-60 : p.49
  50. 명칭 : 민주중보 1945년 10월 23일자 / 소장품번호 : 구입5658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1. [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22] 1945년 11월 23일, 복간
  52. KBS미디어포커스 동아일보 복간과정 왜곡 동아일보 2003-12-23
  53. 김일성 등 반국가자에게 권고문, 재만동포 백오십만의 총의로(金日成 等 反國家者에게 勸告文, 在滿同胞 百五十萬의 總意로) 《삼천리(三千里) 제13권 제1호》 (1941년 01월 01일)
  54. 숨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 8·15에 찾아보는 건국준비위원회 관련 자취들 월간조선 201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