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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김일성 가짜설의 기원과 배경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후 귀국한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 연설하던 그 장소에서 처음 터져나왔으며, 이러한 말은 월남민들에 의해 짧은 시간에 전국으로 퍼지게 된다.

이로부터 불과 한달 뒤인 11월 중순의 미군정 기록에 벌써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는 그가 장차 북한의 지도자가 될지도 불분명할 때이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문헌에 그가 가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폄하하기 위해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

해방 직후 소련군이 평양에 데려온 진지첸 대위(자칭 김일성 장군)에 대해 대중들은 그가 어디서 무얼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전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실제로 썼는지 아닌지도 당연히 알 수 없었고, 그가 속했던 만주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도 오래 전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 진 것은 나중에 김일성이 집권하고 난 후 자신의 항일 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보천보 사건보다 조금 먼저 비슷한 규모의 동흥사건, 토성사건, 독산사건 등이 있었고, 이때도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며 보도했지만 해방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이들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천보 사건도 해방 당시에는 마찬가지였지만 김일성이 집권하여 선전하는 바람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보천보 사건 때 동아일보 등이 호외를 간행하여 항일연군의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는 문맹율이 80%를 상회하고,[1] 인구 대다수가 사는 농어촌 지역은 교통이 불편해 신문 배달도 쉽지 않아 호외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남한에서 동북항일연군보천보 사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며 대중들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소련군 88여단에 대해 알게되는 것은 1990년 한소수교 이후 소련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명확하지 않아 논쟁 중이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이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북한에서는 북한정권 공식 출범 후부터 김일성의 항일투쟁이나 보천보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소속부대는 동북항일연군이 아닌 조작된 이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르고,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해방 직후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록

이런 기록들에 나오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북한 김일성과는 거리가 멀고, 실존 인물 누구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름이 1920년 전후부터 알려졌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지만, 왜 유명해졌는지도 불분명하다.

* 참고 : 만주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만주에 살아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어떻게 알려져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항일연군의 김일성이 자신들 지역 인근에서 활동했다면 그의 이름을 자주 들었을 수 있으므로 진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국내에서 유명했던 김일성은 달랐다는 것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같은 김일성이 아니다. 조선족들은 중국인들에게 내세우기 위해서라도 항일연군 내의 조선인 항일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같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북한 김일성이므로 그에게 굉장히 우호적으로 보인다.

김일성 동생 김영주의 증언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해방 직후 중국의 국민당 군대에서 이형상 시인과 9개월 가량 숙식을 함께하며 지냈는데, 어릴 때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이 자기 형제들에게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는 증언을 했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이유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유명하나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평양에 온 진지첸 대위가 무명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 그 이름을 사칭한 것이다. 김일성 장군이 홍범도김좌진처럼 누구인지 분명했다면 이름을 사칭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련 군정 지휘자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

김일성 진짜론은 허수아비 논법

북한 김일성이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그 김일성이 맞으니 진짜라는 주장은 일종의 "허수아비 논법(straw man argument)"이다.[2]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아서 나온 것으로, 그가 항일연군에서 무슨 투쟁을 했든 관계없는 일이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항일연군이 생겨나기도 전부터 이미 유명했다. 더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거기서 활동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진짜가 될 수는 없다.

이명영이나 허동찬의 연구에 대한 반박이 김일성이 진짜라는 증명이 될 수 없다.

김일성 진짜론의 사례

이정식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기 때문에 그가 이름을 비꾼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선 아주 흔한 일로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한두 개의 가명을 사용했다. 또 다른 김일성에 관한 전설은 아직도 일부 한인들 사이에 서 믿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하여 두각을 나타낸 인물에 대한 기록에 접하지 못했다........ 김일성을 조작해내기 위해서는 그 당시 이래 김일성과 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모두 조작해내야 하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 스칼라피노 · 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 (서울 : 돌베개 1986) p.300

임은(林隱)

임은(林隱)은 허진(許眞, 1928~1997)의 필명이며,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4~1908)의 3남 허준(許埈, 1895 ~ 1956)의 아들로 본명은 허웅배(許雄培)이다. 부친 허준(許埈)은 연안파로 북한에서 1956년 숙청 당했다. 허진은 소련 유학 당시인 1958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에서 거주했다.

  • 林隱, 『北朝鮮王朝成立秘史』 (東京, 自由社, 1982), pp.29~57.
임은(林隱),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옥촌문화사, 1989년)

서대숙

남한에서는 현재의 북한주석과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인혁명가가 같은 이름으로 가진 둘 또는 셋의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이는 부질없는 추측이다........ 1974년까지도 북한주석 김일성이 가짜라고 주장한 남한연구가가 있었으나 이는 학문적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저작이었다. 그 저자(즉 이명영 - 인용지주)는 만주에서 김일성과 싸웠던 전일본군 장교 몇 명을 포함하여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등 상당한 연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점에서 그 연구는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저자 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결론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만을 수집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 청계연구소, 1989) p.296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그의 전체 입론은.... 관헌자료에 나타나는 어떤 내용의 기술들을 도외시 내지 무시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인데 이 점은 이미 한국에서도 가장 권의 있는 전문연구서(즉 김창순 · 김준엽의 책 - 인용자주)에 의해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 이 책은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말단 일본인들이 김일성 부대가 흘린 거짓 정보에 얼마나 현혹되었던가를 전해주는 자료로서 읽혀져야 한다.
― 和田春樹,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 『사회와 사상』 1988년 11월호 (서울, 한길사, 1998), p.166.

각주

  1. 노영택,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國史館論叢 第5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4-06-20)
  2. [분수대] 허수아비 논법 중앙일보 2007.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