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918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김일성 관련 표제어}}
{{김일성 관련 표제어}}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그가 평양의 대중들 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 나섰을 당시에 나온 것으로, 당시 33세의 청년이었던 그가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일제시대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 해방 후 평양에 나타난 33세의 북한 김일성을 처음보고 드러낸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반응이며, 누가 그를 가짜라고 교육시켜 퍼진 말이 아니다. 이런 말은 한국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미군정 시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소련군의 탄압을 받아 이러한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던 북한에서도 상당히 퍼져 있었다는 증거도 많다. 해방직후부터 1980년대까지도 한국인들 대다수가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가 가짜인 줄 직관적으로 알았던 일제시대와 해방 정국을 경험한 세대가 퇴장하는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정설로 인식되고 있다. 김일성 진짜론은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으며, 그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허수아비 논법에 해당하는 잘못된 논증이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도 알지 못했고, [[보천보 사건]]도 잊혀져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거나 [[보천보 사건]] 주역이 아니라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나이로 보아 절대로 1920년대부터 유명했던 그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가짜라 한 것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당시 그가 오랜 외국생활로 국내 사정에 어둡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아 자력으로는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못 되었지만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지도자가 된 꼭두각시(괴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직결된다. 오늘날 친북화된 학계에서 그를 항일투쟁의 영웅이 맞다며 진짜로 둔갑시켜놓은 가장 큰 이유도 그에게 가짜라는 멍에를 벗겨줌과 동시에 그가 소련의 괴뢰가 아닌 항일투쟁의 영웅이라 북한주민들이 선택한 지도자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남한에서 과거와 달리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그를 진짜로 둔갑시킨 사람들의 목적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나아가 아무 근거도 없이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교육시켰다며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를 비난하는데까지 이른다. 일제시대 만주군 소위를 1년여 지낸 [[박정희]]를 거물 친일파로 몰아 항일영웅(?) [[김일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고 교육시켰다고 비난하며, 한국보다는 북한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한국인들의 항일투쟁 때문에 해방이 된 것도 아닌데, 해방 후 80년이 다된 오늘날까지도 이런식으로 <u>항일무장투쟁만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최고 가치인 양 떠받들고 다른 가치는 무시한다면 김일성과 같은 "최악의 항일팔이 사기꾼"에게 나라도 주권(主權)도 자유도 다 빼앗기고 노예로 살게 된다.</u>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공개된 소련 문헌들이나 평양 [[소련 군정]] 인사들의 후일 증언은 거꾸로 그가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철저히 소련이 만들어낸 지도자일 뿐, 항일투쟁의 영웅이라서 집권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소련 군정]] 3년간은 자신들이 [[88여단]] 등에서 5년간 교육시켜 데려온 꼭두각시 [[김일성]]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전면에 내세워 지도자 훈련을 시키며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권력기반을 다져주는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집권 직후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이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스스로 소련의 앞잡이임을 숨기지 않았다.<ref>[[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法)이다.]] : 우남위키</ref> 그러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후 중소 이념분쟁을 틈타 등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에서는 벗어났지만, 그의 집권 자체가 소련이 그를 꼭두각시(괴뢰)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변함없다. 사실 김일성의 진위 논란도 소련군이 국내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그를 꼭두각시 지도자로 내세우려다 보니 지도자가 될만한 유명한 이름의 주인공 행세를 하게한 때문에 파생된 부수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소련 붕괴와 중국의 개방 후 나온 자료들과 옛 기록의 인터넷 DB 구축으로 발굴된 여러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 검토하면 북한 김일성은 처음 알려졌던대로 가짜가 맞으며,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아니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맞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수많은 자료들을 검토해야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핵심적인 사항만 요약해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김일성 가짜설]]의 기원과 배경==
==[[김일성 가짜설]]의 기원과 배경==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후 귀국한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 연설하던 그 장소에서 처음 터져나왔으며, 이러한 말은 월남민들에 의해 짧은 시간에 전국으로 퍼지게 된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후 귀국한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들 앞에 나서 연설하던 그 장소에서 처음 터져나왔다. 대중들은 소련군이 데려온 [[진지첸]]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는데다 불과 33세인 그가 국내에서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말도 서투른데다<ref>[[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해방 당시 중국어는 능하나 조선말은 서툴러]] 우남위키</ref> 본명이 김성주로 알려진 것도 그가 가짜라는 의심을 더하게 했다. 그가 가짜라는 말은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이 현장에서 보인 즉각적인 반응이었고, 누군가가 조작해낸 설이 아니다. 이런 말은 월남민들에 의해 짧은 시간에 남한에 퍼지게 된다. 그가 가짜라는 말이 단시일에 널리 확산된 것은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그가 가짜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하에서 은밀하게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ref>[[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북한에 퍼진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기록]] 우남위키</ref>


이로부터 불과 한달 뒤인 11월 중순의 미군정 기록에 벌써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는 그가 장차 북한의 지도자가 될지도 불분명할 때이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문헌에 그가 가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김일성]]이 대중앞에 처음 선보인지 불과 한달 뒤인 11월 중순의 [[미군정]] 기록에 벌써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는 그가 장차 북한의 지도자가 될지도 알 수 없던 때이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미군정]] 시기에 이미 많은 문헌에 그가 가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인용문|
{{인용문|
*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 [[김일성 가짜설]]}}
이처럼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 나타난 그를 처음 본 대중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터져나와 퍼진 것으로, 한국정부가 수립되기도 이전의 일이며,  누군가가 일부러 지어내서 교육하고 퍼뜨려서 나온 말이 아니다. [[레베데프]] 소장이나 다수의 [[소련군정]] 장교들과 [[유성철]] 등 해방 직후 북한 고위직에 있다 쫓겨나 소련 중국 등으로 망명한 인사들도 당시 평양 집회에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럼에도 후세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폄하하기 위해 그를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이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폄하하기 위해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
해방 직후 소련군이 평양에 데려온 [[진지첸]] 대위(자칭 김일성 장군)에 대해 대중들은 그가 어디서 무얼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전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실제로 썼는지 아닌지도 당연히 알 수 없었고, 그가 속했던 만주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지만 해방 당시에는 여러해 전 일이라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 진 것은 나중에 김일성이 집권하고 난 후 자신의 항일 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
[[보천보 사건]]보다 조금 먼저 비슷하거나 더 큰 규모의 [[동흥사건|동흥사건(東興事件)]], [[토성사건|토성사건(土城事件)]], [[독산사건|독산사건(獨山事件)]] 등이 있었고, 이때도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며 크게 보도했지만 해방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이들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천보 사건]]도 해방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잊혀졌으며, 사건 당시 [[동아일보]] 등이 호외를 간행하여 항일연군의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ref name="sds">[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ac70c9d3acfc-c9c4c2e4/bocheonbo_battle-09212010161558.html <nowiki>[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nowiki> 보천보 전투] RFA 2010.09.21{{인용문|'''서대숙:'''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고 김일성은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ref>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는 문맹율이 80%를 상회하고,<ref name="il">노영택,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kn&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kn_051&position=-1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國史館論叢 第5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4-06-20)</ref> 인구 대다수가 사는 농어촌 지역은 교통이 불편해 신문 배달도 쉽지 않아 호외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김일성이 집권하여 그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건도 유사한 다른 사건들처럼 계속 잊혀진 채 오늘날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해방 직후 소련군이 평양에 데려온 [[진지첸]] 대위(자칭 김일성 장군)에 대해 대중들은 그가 어디서 무얼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전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실제로 썼는지 아닌지도 당연히 알 수 없었고, 그가 속했던 만주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도 오래 전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 진 것은 나중에 김일성이 집권하고 난 후 자신의 항일 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인용문|
*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해방 당시 김일성은 국내서는 무명인사|해방 당시 김일성은 국내서는 무명인사]]
* [[김일성#국민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88여단에 대해 거의 몰랐다.|국민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88여단에 대해 거의 몰랐다.]]}}
남한에서 [[동북항일연군]]과 [[보천보 사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며 대중들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소련군 [[88여단]]에 대해 알게되는 것은 1990년 한소수교 이후 소련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명확하지 않아 논쟁 중이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이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투쟁한 그 김일성이 맞으므로 진짜라고 주장하는 후대 연구자들의 가장 큰 병폐는 오랜 기간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나중에 알게된 사실들을 해방 당시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고 주장을 펴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북한정권 공식 출범 후부터 김일성의 항일투쟁이나 [[보천보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소속부대는 [[동북항일연군]]이 아닌 조작된 이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르고,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은 사건 5개월 뒤인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사살 당했으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ref>[[김일성 가짜설#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ref>


[[보천보 사건]]보다 조금 먼저 비슷한 규모의 [[동흥사건]], [[토성사건]], [[독산사건]] 등이 있었고, 이때도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며 보도했지만 해방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이들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천보 사건]]도 해방 당시에는 마찬가지였지만 김일성이 집권하여 선전하는 바람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보천보 사건]] 때 동아일보 등이 호외를 간행하여 항일연군의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는 문맹율이 80%를 상회하고,<ref name="il">노영택,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kn&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kn_051&position=-1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國史館論叢 第5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4-06-20)</ref> 인구 대다수가 사는 농어촌 지역은 교통이 불편해 신문 배달도 쉽지 않아 호외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북한 김일성이 해방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9월 19일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귀국하여 한달여간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 국내 사정을 살피며 잠행한 것도 자신이 국내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무명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동북항일연군]][[보천보 사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며 대중들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소련군 [[88여단]]에 대해 알게되는 것은 1990년 한소수교 이후 소련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명확하지 않아 논쟁 중이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이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평양 [[소련 군정]]에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총지휘한 [[레베데프]] 소장도 후일 당시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대위([[김일성]])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증언했다.<ref>[http://web.archive.org/web/20140809051603/http://www.sovsekretno.ru/articles/id/2889/ Сделан в СССР :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Made in the USSR "Top Secret", No.9 / 268, Published: September 1, 2011) / [https://www.softmixer.com/2011/09/blog-post_04.html Сделан в СССР] softmixer 전재</ref> 그가 국내에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것은 소련군 인사들이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용문|Stalin was offered five groups of candidates for the role of leader of North Korea. There were agents of the Comintern sent to Korea back in 1920-1930, and Korean communists who had received special training in Yan'an, the headquarters of the Chinese communists, and local nationalist leaders, and Koreans - Soviet citizens, well checked by the NKVD, the main like the communists. Kim Il Sung was one of the fifth group - the leaders of the Korean guerrilla movement.<br>


북한에서는 북한정권 공식 출범 후부터 김일성의 항일투쟁이나 [[보천보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소속부대는 [[동북항일연군]]이 아닌 조작된 이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르고,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He was known as a military commander. <u>Of all the candidates, Stalin (namely, he had the last word) chose an officer of the Soviet Army not known to the public - the battalion commander, Captain Jing Zhi Chen (an ethnic Korean who bore a Chinese name) - Kim Il Sung (Korean transcription of the name).</u> The specified battalion was part of the 88th separate rifle brigade, which was then stationed near Khabarovsk.|[http://web.archive.org/web/20140809051603/http://www.sovsekretno.ru/articles/id/2889/ Сделан в СССР :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br>(Made in the USSR "Top Secret", No.9 / 268, Published: September 1, 2011)}}


===해방 직후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록===
===해방 직후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록===
28번째 줄: 51번째 줄:
*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
*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언론에 보도된 김일성]]}}


이런 기록들에 나오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북한 김일성과는 거리가 멀고,  실존 인물 누구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름이 1920년 전후부터 알려졌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지만, 왜 유명해졌는지도 불분명하다.  
이런 기록들에 나오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북한 김일성과는 거리가 멀고,  실존 인물 누구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들었다는 시기는 이르면 1919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며<ref>[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영_(교수)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808444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 창덕학교 교사 출신 현응수의 증언</ref><ref>《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p.27 : 朴璿秉(1898년생. 咸南 甲山郡 甲山面 태생. 서울 시내 城北區 鍾岩洞 거주)씨는 『23세 되던 해인 1919년에 甲山郡廳 에 취직, 숙직을 하던 어느날 밤, 그곳 憲兵補助員 김재현의 집이 獨立軍에 의해 습격당한 일을 겪었는데 이것이 내가 들은 김일성 장군의 처음 거사였다. 그 후 2, 3년이 지나 含井浦 事件이 있었다. 이 사건도 김일성 장군의 거사였다』라고 證言했다.</ref>, 192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들었다는 사람은 많다.<ref>[[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우남위키</ref>
 
해방후 입북한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인용문|
* [[:파일:전설의 김일성 장군.jpg|명사(名士)의 편영(片影) (其五) : 김일성씨(金日成氏)]] 민중일보(民衆日報) 1945년 10월 14일자}}
여기에는 김일성 장군의 부하가 조선 국경을 순시하던 총독이 압록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내려갈 때  강 북편에서 저격한 일이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1924년 5월 조선 국경을 순시하며 압록강을 배를 타고 내려가던 [[사이토 총독 저격사건|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에 대한 저격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거사였지만 항간에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ref  name="leemy">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9~30 : 1924년 당시 북청군청 직원이었던 김흥교(金興敎, 1893~?)는 사이토 총독이 북순(北巡) 당시 북청군(北靑郡)에 들렀다 혜산진 방면으로 떠난 며칠 후 총독 저격 사건이 있었고, 김일성 장군이 한 일이라는 풍문이 돌았다고 증언했다.</ref> 북한 김일성이 알려지기 전에 나온 이 기사는 1924년에도 유명한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가 전파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처럼 일찍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았기 때문에 해방 당시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 것이지,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처럼 그의 이름이 유명해서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다. 1920년에 김일성 장군의 나이가 25세 정도였다고 해도 해방 당시에는 50세는 넘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고 이때문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한 33세의 [[진지첸]] 대위가 가짜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했다.
====[[김일성]] 동생 [[김영주]]의 증언====
====[[김일성]] 동생 [[김영주]]의 증언====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김영주(1920~2021)]]는 해방 직후 중국의 국민당 군대에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24_1_0032537&curSetPos=0&curSPos=1&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이용상(李容相,1924∼2005)] 시인과 9개월 가량 숙식을 함께하며 친하게 지냈는데, 그에게 "어릴 때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이 자기 형제들에게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는 증언을 했다. 즉 어린 김성주도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것이 분명하며, 이 때문에 1930년 말경부터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며 유명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김영주(1920~2021)]]는 해방 직후 중국의 국민당 군대에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924_1_0032537&curSetPos=0&curSPos=1&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이용상(李容相,1924∼2005)] 시인과 9개월 가량 숙식을 함께하며 친하게 지냈는데, 그에게 "어릴 때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이 자기 형제들에게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는 증언을 했다. 즉 어린 김성주도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것이 분명하며, 이 때문에 1930년 말경부터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며 유명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문|
{{인용문|
* [[김영주#이용상(李容相)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이용상(李容相)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
* [[김영주#이용상(李容相)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이용상(李容相)의 김영주에 대한 회고]]
*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김성주가 김일성 장군 이름을 접한 시기|김성주가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들]]}}


* '''참고 :''' <small>만주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만주에 살아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어떻게 알려져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항일연군의 김일성이 자신들 지역 인근에서 활동했다면 그의 이름을 자주 들었을 수 있으므로 진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국내에서 유명했던 김일성은 달랐다는 것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같은 김일성이 아니다. 조선족들은 중국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조선인 항일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같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북한 김일성으로 보인다. 그가 북한 지도자로 유력인물이 되었으므로 그에게 더욱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가 가짜라는 말에는 화를 내는 사람이 많다.</small>
* '''참고 :''' <small>만주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만주에 살아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어떻게 알려져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항일연군의 김일성이 자신들 지역 인근에서 활동했다면 그의 이름을 자주 들었을 수 있으므로 진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해방 당시 국내에서 유명했던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이 생기기도 훨씬 이전인 1920년경부터 이름이 알려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같은 김일성이 아니다. 조선족들은 중국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조선인 항일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같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북한 김일성으로 보인다. 그가 북한 지도자로 유력인물이 되었으므로 그에게 더욱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가 가짜라는 말에는 화를 내는 사람이 많다.</small><ref>[[김일성 가짜설#(보론 1) 중국 조선족들의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에 대해]] : 우남위키</ref>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이유===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이유===
위에서 말한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은 평양에 온 진지첸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므로 당연히 그에 대한 지지세력도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그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듣도보도 못한 온갖 정치공작들이 동원되었으며, 그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게 한 것도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은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므로 당연히 그에 대한 지지세력도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그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듣도보도 못한 온갖 정치공작들이 동원되었으며, 그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게 한 것도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유명하나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진지첸 대위가 무명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었다. 김일성 장군이 [[홍범도|홍범도(洪範圖, 1868~1943)]][[김좌진|김좌진(金佐鎭, 1889~1930)]]처럼 누구인지 분명했다면 이름을 사칭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유명하나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진지첸 대위가 무명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었다. 김일성 장군이 [[김좌진|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이나 [[홍범도|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처럼 누구인지 실체가 분명했다면 이름을 사칭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사 유명한 김일성이 실체가 없는 가상인물이고,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다고 해서 그가 진짜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이 유명해지는데 [[진지첸]]이 기여한 바가 없고, 그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이 그 유명한 가상인물인 것처럼 행세하여 지명도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므로 여전히 가짜일 수 밖에 없다.
<u>설사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실체가 없는 가상인물이고,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적이 있다고 해서 그가 진짜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일찍부터 유명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국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이 유명해지는데 [[진지첸]]이 기여한 바는 없다. 해방 당시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는 그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이 그 유명한 인물인 것처럼 행세하며 지명도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는 여전히 가짜일 수 밖에 없다. 해방 후 평양에 오기 전에는 그가 어디에서도 장군이라 불린 적도 없고, 대위를 장군이라 칭하는 경우도 없다.</u>


====[[소련 군정]] 지휘자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
====[[소련 군정]] 지휘자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
[[파일:1945-10-14 Kim Il-sung.jpg|400픽셀|섬네일|오른쪽|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뒷줄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이며, 그는 1991년 찾아간 한국 기자들에게 당시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총지휘했던 [[레베데프|레베데프(1901~1992)]] 소장은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에 모스크바 자택으로 찾아간 한국의 중앙일보 기자들에게 김성주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내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안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총지휘했던 [[레베데프|레베데프(1901~1992)]] 소장은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에 모스크바 자택으로 찾아간 한국의 중앙일보 기자들에게 김성주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내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안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레베데프]] 소장보다 하급자로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 수령 만들기 정치공작의 실무를 담당했던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A6%AC%EA%B3%A0%EB%A6%AC_%EB%A9%94%ED%81%B4%EB%A0%88%EB%A5%B4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 중좌나 [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C%98%A4%EB%8B%88%ED%8A%B8_%EB%B0%94%EC%8B%A0 레오니트 바신 (Leonid Vassin, 1915~2006)] 소좌도 후일 북한 김일성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했다고 증언했다.<ref name="vas"/>
{{인용문|
{{인용문|
* [[니콜라이 레베데프#레베데프의 김일성 가짜 증언|레베데프의 김일성 가짜 증언]]}}
* [[니콜라이 레베데프#레베데프의 김일성 가짜 증언|레베데프의 김일성 가짜 증언]]
* [[니콜라이 레베데프#김일성 수령 만들기 공작에 대한 증언|레베데프의 김일성 수령 만들기 공작에 대한 증언]]
* [[김일성 가짜설#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든 소련 군정 당사자들의 '김일성 가짜' 증언|김일성을 수령으로 만든 소련 군정 당사자들의 '김일성 가짜' 증언]]}}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김일성 연구자들은 30년 전에 나온 이런 증언은 절대로 언급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괜히 언급했다가 이런 증언이 있다는 사실이 더 널리 알려질 수도 있으니 철저히 숨기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공들여서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뒤집어 놓았는데 다시 가짜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증언에서도 보듯이 [[소련 군정]] 핵심 간부들과 [[진지첸]] 대위가 합작하여 가짜 김일성 장군을 만들어내었고, 그가 가짜라는 말도 1945년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 데뷔 무대에서부터 퍼져나왔다는 것에 대해 논란할 여지도 없다. 하지만 엉터리 학자들이 그가 가짜라는 말이 퍼진 책임을 한국의 과거 정부에 뒤집어 씌우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학계 현실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북한 [[김일성]] 해방 당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말하다가도 그의 진위문제를 논할 때만은 [[보천보 사건]] 때문에 그의 이름이 유명해졌다고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도 아닌 것으로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려들지도 않는다.


[[레베데프]] 소장보다 하급자로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 수령 만들기 정치공작의 실무를 담당했던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A6%AC%EA%B3%A0%EB%A6%AC_%EB%A9%94%ED%81%B4%EB%A0%88%EB%A5%B4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 중좌나 [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C%98%A4%EB%8B%88%ED%8A%B8_%EB%B0%94%EC%8B%A0 레오니트 바신 (Leonid Vassin, 1915~2006)] 소좌도 후일 북한 김일성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연구자들은 김일성 진짜론에 빠져 이런 증언이 나온지 30년이 넘었지만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소련군이 [[진지첸]] 대위와 [[88여단]]의 조선인들을 국내로 데려오지 않고 자유롭게 가고싶은 데로 가라고 했으면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아무 지지기반도 없는 그들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로 가서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소련군 배경이 없었다면 국내 사람들이 어디서 뭘 하다 온 누구인지도 모르는 진지첸 대위가 평양에 와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앞에 데뷔하는 10월 14일의 무대도 소련군이 자신들의 앞잡이로 선택한 그를 위해 연출해낸 것이고, 북한 지역에 그가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강압을 동원해 막아준 것도 소련군이다.


==김일성 진짜론의 사례==
====10월 13일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대회까지도 김영환이란 가명으로 행세====
1945년 10월 13일에 《서북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西北五道黨 責任者熱誠者大會)》가 평양에서 열려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北部朝鮮分局) 설치(設置)를 결의한다. 김일성은 이 대회에서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를 한다.<ref name="jungr">[[:파일:1945-11-01 정로 김영환.png|《朝鮮共産黨 北部朝鮮分局 設置 : 劃期! 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창간호 1945년 11월 1일자 1면 기사</ref> 이 대회에서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로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49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선출되었다.
 
이때까지도 김일성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별로 존재감이 없어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국 책임자로 선출되지도 못했다. 그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도 아닐 뿐더러 처음에는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도 받지 못한 것이다.
 
김일성은 같은 해 말 12월 17일에야 김용범을 사퇴시키고 분국 책임비서로 되었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52_0050_0020_0020_0010 신편 한국사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2) 정당들의 조직과 활동 (1)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우리역사넷</ref>
 
===김일성 등장 과정에 대한 하기와라 료(萩原遼)의 설명===
해방 직후 김일성 등장 과정에 대해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히타(赤旗)』의 평양 특파원(平壌特派員)을 지낸 [https://ja.wikipedia.org/wiki/%E8%90%A9%E5%8E%9F%E9%81%BC 하기와라 료(萩原遼, 1937~2017)]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는데 상당히 적절한 것 같다. 하기와라 료는 일본인이지만 평양에 거주해본 탓인지 김일성의 실체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합당한 평가를 내린 사람 중의 하나다.
* 萩原遼, 『朝鮮戦争 金日成とマッカーサーの陰謀』(文藝春秋, 1993/12)
: 하기와라 료 지음; 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한국논단, 1995) pp.25~27.
{{인용문|소련군은 조선 점령을 원만히 하기 위해 그 손발이 되어 일하는 조선인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36년간이나 일본 식민지로 있으면서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조선인민의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항일투사라야 했었다.<br>
김성주는 1912년 북부조선 평안남도 대동군의 비교적 부유한 소 부르주아 집안에 태어나 7세때 한방의사인 부친의 사업 형편으로 고향을 떠나 만주로 건너가 중국인 속에서 자라면서 중국인 학교에 다녀. 한국말 보다는 중국어를 더 잘했다.<br>
1931년 19세 때에 중국공산당에 입당, 동당의 만주성 위원회의 지도 아래서 항일 유격투쟁을 했었다. 유격대 시절 전성기에는 200명 가량의 게릴라 대원을 거느리고 싸운 경험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중대장 정도의 실적밖에 안된다. 신생 조선의 지도자로 내세우기에도 경력이 너무나 빈약하다.<br>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꿔치기 극이다. <u>이 김성주 청년을. 시베리아에서 북만주, 동만주의 광야를 백마에 올라타고 달리며 일본군을 쳐부신 전설적 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내놓아 신생 조선의 수반으로서 점령행정을 추진하려고 생각한 꾀보가 평양의 소련군 사령부에 있었을 것이다.</u><br>
[[88여단]]에는 그 밖에도 조선인 대원은 여러명 있었는데 왜 김성주가 그 역을 맡게 되었을까.<br>
그가 만주시대부터 써온 가명이 김일성이었다. 이것은 1920년대 부터 조선민중 사이에 전설적으로 전해온 항일의 영웅 김일성 장군과 공교롭게도 음이 같다. 한자로 쓰면 동음인 金一星도 金日星도 金一成도 金日成도 된다. 거기에 착안한 모종의 모략적 사기가 꾸며진 것이 아닐까.<br>
이 사술(詐術)의 배경설명으로 조선에서의 「김일성 장군 전설」에 관하여 말해 둘 필요가 있다.<br>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그 5년전인 1905년 제2차 일한협약을 강제로 맺은 일본은 모든 한국군을 무장해제 하고 해산시켰다. 애국적 군인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조국을 뒤로하고 북만주, 동만주, 나아가서는 시베리아까지 근거지를 옮기면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했다.<br>
그중에서 1920년대 부터 한사람의 용감한 항일투사의 이름이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 같이 국내에 까지 들려왔다. 김일성 장군이다. 고난에 시달린 식민지 하의 민중에게는 그 이름은 희망이며 광명이었다. 언젠가는 김일성 장군이 일본군을 쳐부수고 개선한다는 기도와도 같은 마음으로 기다렸었다.<br>
이렇게 하여 하나의 전설이 생기고 사람들 마음속에 새겨져 갔다.<br>
<u>김일성 장군이란 일찍이 실존한 항일투사의 한사람이기도 하고, 또한 복수의 투사의 집합명사 이기도 했다. 사실과 전설이 뒤섞여 만들어진 하나의 상(像)이었다. 그처럼 되어보려고 자기 이름을 김일성이라고 칭하는 자도 생겨났다. 김성주 청년도 그중의 하나였다.</u><br>
김성주 청년이 신생 조선의 수반으로 뽑힌 또하나의 이유는 1945년까지의 수년간을 [[88여단]]에서 소련군인으로서 복무한 경험때문이다. 소련군 당국자는 그간 그를 충분히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었다.<br>
그는 [[88여단]]의 제7대대장을 지냈으며,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에 대한 충성도도 이미 인정받았었다. 나이도 1945년에는 33세가 됐으며 일 처리도 잘하는 젊음과 체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요령도 좋고 이해도 빨랐다. 소련 점령군으로서는 부려먹기 쉬운 존재였다. 다른 동료와 선배를 제쳐놓고 그가 발탁 되었다.|하기와라 료(萩原遼, 1937~2017) 지음; 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한국논단, 1995) pp.25~27}}
김일성이 비교적 부유한 소 부르주아 집안에 태어났다거나 [[88여단]]의 제7대대장을 지냈다는 등 약간의 사소한 오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제 사실에 부합하는 기술이다. (김일성의 외가는 비교적 부유한 소 부르주아 집안이라할 수 있겠지만 친가는 아니다. 88여단에서는 제1대대장을 지냈다.)
 
하기와라는 김성주가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도록 한 것은 소련군이 낸 꾀로 추정했는데,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로 볼 수 있다. 또 그는 김일성 등장 과정을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A0%EB%A5%B4%ED%86%A0_%EB%A1%9C%EC%85%80%EB%A6%AC%EB%8B%88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로베레 장군」 (1959년 작)을 연상케 하는 바꿔치기 극이라 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A0%EB%A0%88%EC%9D%98_%EC%9E%A5%EA%B5%B0 《로베레의 장군》(이탈리아어: Il generale Della Rovere)] 1959년 개봉</ref>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 독일 레지스탕스 투쟁에서 전사한 이탈리아의 저항투쟁 지도자 로베레 장군의 대역으로 거리의 하찮은 사기꾼을 둔갑시키는 것이다.
 
==김일성 진짜론은 허수아비 논법==
*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직후 그가 평양에 처음 나타났을 당시 어디서 무얼 하다 왔는지 전력을 전혀 알 수 없는 33세의 청년이 1920년경부터 국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일찍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그의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며, 그가 실제로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는지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는지 아닌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동북항일연군]]이나 거기서의 [[김일성]]의 활동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는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로 그가 가짜라는 말과는 무관하다.
 
*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1로군 제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맞는지는 1974년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영_(교수)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이 출간 된 후에 나온 새로운 쟁점이며, 해방 직후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부터 불거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논란과는 무관하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도 거기에 김일성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보천보 사건]]도 잊혀져 잘 몰랐다.


===김일성 진짜론은 허수아비 논법===
* 후대의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쟁점들을 뒤섞어서 혼란스럽게 한 후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김일성이 맞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주장한다. 이는 "허수아비 논법(straw man argument)"<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2697188 <nowiki>[분수대]</nowiki> 허수아비 논법] 중앙일보 2007. 4. 16</ref>으로 논리적 오류이다.
*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직후 그가 평양에 나타났을 당시 33세에 불과하여 1920년경부터 이름이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아 나온 것이다.


*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1로군 제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맞는지는 1974년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A%85%EC%98%81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이 출간 된 후에 나온 새로운 쟁점이며, 김일성의 진위 논란과는 무관하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도 거기에 김일성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보천보 사건]]도 잊혀져 몰랐다.
일제시대에 전설적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의 출현을 직접 봤던 세대들은 직관적으로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영_(교수) 이명영(李命英, 1928~2000)][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B0%BD%EC%88%9C 김창순(金昌順, 1920~2007)] 등의 1세대 북한 연구자들도 이 세대에 속하며, 자신들의 체험에 근거하여 김일성이 가짜라는 연구를 한 것이다. 더구나 김창순은 해방 후 북한에서 살다 [[6.25]] 때 월남하여 그가 김일성이 가짜라 한 것은 북한체험이 반영된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5%EC%8B%9D_(%EC%A0%95%EC%B9%98%ED%95%99%EC%9E%90) 이정식(李庭植)]과 [[서대숙]] 등은 일제시대에 중국에서 살았고, 해방 후 한국에 잠간 머물다 미국으로 갔으므로 이러한 내막은 모르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 문헌만 보고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한 것이 맞으므로 진짜라는 주장을 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와다 하루키도 비슷한 사례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B%8F%99%EC%B0%AC 허동찬(許東粲, 1932 ~ )]은 원래 일본의 조총련 소속으로 북한에 가서 김일성도 직접 만나본 적이 있지만 그들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일본에서 수많은 문헌을 뒤져 그가 가짜인 것을 밝히려 했다.  


* 후대의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쟁점들을 뒤섞어서 혼란스럽게 한 후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김일성이 맞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했다. 이는 "허수아비 논법(straw man argument)"<ref>[https://www.joongang.co.kr/article/2697188 <nowiki>[분수대]</nowiki> 허수아비 논법] 중앙일보 2007. 4. 16</ref>으로 논리적 오류이다.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의 일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없는 이종석, [[한홍구]], 신주백 등 한국의 2세대 신진학자들은 1980년대말부터 [[서대숙]], [[와다 하루키]] 등 외국에서 연구한 학자들의 주장을 이어받아 이명영, 허동찬 등의 김일성 가짜론을 비판하며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을 확산시켰다.  


일제시대에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의 출현을 직접 봤던 세대들은 직관적으로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A%85%EC%98%81 이명영(李命英, 1928~2000)]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B0%BD%EC%88%9C 김창순(金昌順, 1920~2007)] 등의 1세대 북한 연구자들도 이 세대에 속하며, 자신들의 체험에 근거하여 김일성이 가짜라는 연구를 한 것이다. 이정식과 서대숙 등은 일제시대에 중국에 살았고, 해방 후 한국에 잠간 머물다 미국으로 갔으므로 이러한 내막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 문헌만 보고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을 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와다 하루키도 비슷한 사례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B%8F%99%EC%B0%AC 허동찬(許東粲, 1932 ~ )]은 원래 일본의 조총련 소속으로 북한에 가서 김일성도 직접 만나본 적이 있지만 그들의 주장이 허구하는 것을 알고 일본에서 수많은 문헌을 뒤져 그가 가짜인 것을 밝히려 했다.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의 일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없는 이종석, 한홍구, 신주백 등 한국의 2세대 신진학자들은 1980년대 들어 노골적으로 친북 좌경화 되어가는 학계 분위기에 편승하여 서대숙, 와다 하루키 등 외국에서 연구한 학자들의 권위를 빌려 이명영, 허동찬 등의 김일성 가짜론을 맹렬히 공격하며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을 확산시켰다. 체험적으로 김일성이 가짜라고 알았던 세대들이 퇴장하면서 후속세대들에는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이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체험적으로 김일성이 가짜라고 알았던 세대들이 퇴장하면서 후속세대들에는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이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되는 해방전후의 국내상황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있는 사람들의 연구는 배척당하고, 그런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피상적인 연구가 오늘날 대세로 자리잡은 것은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서울에 대해 언쟁을 벌이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이 그대로 들어맞는 꼴이다.


대다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북한 김일성이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그 김일성이 맞으니 진짜가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대표적 오류 논리인 일종의 "허수아비 논법"이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 평양에 처음 나타난 33세의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아서 나온 것으로, 그가 항일연군에서 무슨 투쟁을 했든 관계없는 일이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항일연군]]이 생겨나기도 전부터 이미 유명했다. 더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거기서 활동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진짜가 될 수는 없다.
대다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북한 김일성이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그 김일성이 맞으니 진짜가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대표적 오류 논리인 일종의 "허수아비 논법"이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 평양에 처음 나타난 33세의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아서 나온 것으로, 그가 항일연군에서 무슨 투쟁을 했든 관계없는 일이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항일연군]]이 생겨나기도 전부터 이미 유명했다. 더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거기서 활동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진짜가 될 수는 없다.


대표적 김일성 가짜론자인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A%85%EC%98%81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이나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B%8F%99%EC%B0%AC 허동찬(許東粲, 1932 ~ )]의 [[동북항일연군]] 김일성에 관한 연구에 대한 반박이 김일성이 진짜라는 증명이 될 수 없다.<ref name="leem"/><ref>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7 /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속] (金日成 評傳 [續])』,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8년 4월 1일.</ref> 더 큰 문제는 최근 발굴된 많은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검토하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한 것이 맞으므로,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6사장도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한 것은 오류이고, 이명영이나 허동찬의 연구가 오히려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명영의 연구 중 제2방면군장까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한 것은 자료가 부족하던 시절에 잘못내린 판단으로 오류로 보인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김성보(金聖甫, 1962~ )의 주장을 보자.
{{인용문|오늘날 수많은 관련 문헌 자료가 공개되어 더 이상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가짜설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북한의 주장대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었다는 것도 이미 20여 년 전에 밝혀졌다. 김일성 가짜설이나 김일성의 독자적 항일무장투쟁설 모두 남북대립의 조건 속에서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거나 신화화된 주장임이 객관적 사실 확인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일단 드러난 객관적 사실은 북한의 역사서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히 공개된 뒤에 작성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김일성 스스로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계의 논의는 김일성의 항일운동 여부 자체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소속 한인들이 펼친 활동을 한국의 민족운동사 전체의 흐름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35~36}}
이는 북한 김일성이 해방직후부터 왜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외면하고,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투쟁을 한 것이 맞으니 진짜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 연구자들 대다수의 믿음이다.<ref>김성보(金聖甫), 기광서(奇光舒), 이신철(李信澈) 저,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92966857#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닷컴 2004</ref> 1990년 9월 한소 수교 직후 나온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등 [[소련 군정]] 인사들의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증언도 자신들의 믿음과 맞지 않으니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학계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표적 김일성 가짜론자인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영_(교수)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이나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B%8F%99%EC%B0%AC 허동찬(許東粲, 1932 ~ )]의 [[동북항일연군]] 김일성에 관한 연구에 대한 반박이 김일성이 진짜라는 증명이 될 수 없다.<ref name="leem"/><ref>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7 /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속] (金日成 評傳 [續])』,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8년 4월 1일.</ref>  
 
더 큰 문제는 최근 발굴된 많은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검토하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한 것이 맞으므로,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6사장도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한 것은 오류이고, 이명영이나 허동찬의 연구가 오히려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명영의 연구 중 제2방면군장까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한 것은 자료가 부족하던 시절에 잘못내린 판단으로 오류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의 진위 문제는 해방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 판단해야===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처음 나섰을 때 나온 것이므로 그의 진위 문제는 해방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북한 김일성은 자신들이 일찍부터 이야기 들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으니 가짜라고 판단했다면 그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당시 상황을 직접 알지도 못하는 후세 연구자들이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이니 진짜가 맞으며 가짜라고 한 당시 사람들의 판단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를 자기들 마음에 들게 고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은 33세의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또한 그가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ref name="kima">[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56659619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 김창순]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서울 : 북한연구소, 2004) p.160 : ([[보천보 사건]]에 대한 신문 보도 당시) 대부분의 독자들은 [[동북인민혁명군]]이 어떤 성격의 武力인지조차 알지 못했다.</ref> [[동북항일연군]]은 다수의 소규모 부대가 만주 각지에 흩어져 활동을 했고, 늘 쫓기는 입장에서 기록도 별로 남기지 못했다. 김일성이 속했던 1로군은 주요정보를 가졌던 고위급 지휘관이 대부분 전사했다. 이 때문에 해방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항일연군의 대강의 활동 양상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ref name="sds"/> 근거없는 것으로 확인된다.<ref name="pcp">[[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정말 유명해졌나?]] : 우남위키</ref> [[항일연군]]에 대한 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모르는 부분도 많고, 잘못 알려진 것도 많으니, 해방당시 국내의 일반인들이야 그들의 활동에 대해 알래야 알 수도 없었다.
 
반면에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0년경부터 유명했으며, 김성주 본인도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훈육을 받았다고 동생 [[김영주]]가 증언했다. 또 해방 이틑날부터 전국적으로 유포된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에 [[이승만]], [[김구]], [[여운형]]고 함께 김일성은 군부대신으로 거론될 정도로 해방정국의 유력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해방 직후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국내 사정에도 어두울 뿐만 아니라 국내에는 그의 지지세력도 전무했다.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이 없었다면 자력으로는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아니었다.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내정은 받았지만 이런 상태로 지도자 행세를 하려해도 대중들이 받아들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이름은 유명하나 누구인지는 불분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나서게 된 것이고, 대중들은 그가 1920년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 다는 것은 즉각 알아차리고 가짜라고 한 것이다. [[진지첸]] 대위는 소련군 무력의 일방적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 그가 가짜라는 소문이 확산되는 것은 억제할 수도 있었지만, 남한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북한 김일성을 처음 본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짜라고 한 판단은 정당한 것이고, 이러한 말들이 남한으로도 전해져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이전인 미군정기에 이미 수많은 문헌에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북한 김일성아 가짜라는 말은 북한에서 먼저 나와 남한으로까지 전파된 것이다. 김일성을 직접 본적도 없는 남한 사람들이 그가 가짜인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지어냈겠는가?
 
일제시대나 해방정국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없는 후대의 연구자들은 해방 당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 거론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감추고, 많은 연구를 통해 나중에야 알게된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투쟁 경력만 거론하며 마치 해방 당시 사람들도 이에 대해 잘 알면서 북한 김일성을  가짜로 몬 것처럼 호도한다. 나아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가 북한 [[김일성]]의 항일 투쟁경력이 부담스러워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도 내놓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내놓은 아무 근거없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의 진위는 해방 당시의 김일성 관련 기록들을 조사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수많은 기록이나 증언을 남긴 사람들은 해방 후 반공교육이 아니라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제시대에 자신들이 들었던 김일성 장군과 북한 김일성이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직접적인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가짜라 한 것이다. 반공교육이 실시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많은 문헌에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나오므로 한국정부가 반공교육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 교육해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는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6.25 전쟁]] 이후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은 오히려 반정부 시위를 맹렬히 하던 세대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졌으며, [[서대숙]], [[와다 하루키]] 등이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자 검증없이 그런 주장을 받아들여 오늘날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김일성 진짜론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1970년대 이전에는 한국 정부도 북한 김일성이 어디서 뭘하다 온 사람인지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어 그의 전력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정부 차원에서 그가 가짜라고 교육시킨 적도 없다는 것은 당시 교과서나 정부가 간행한 문건들을 뒤져봐도 확인이 된다. 한국 정부가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대해 잘 알면서도 반공 정책 때문에 또는 그를 폄하하기 위해 일부러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었다는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확인도 거치지 않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의 만주항일투쟁 경력에 대해서도 중요 쟁점들은 수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아직 논란 중이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은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은 당연하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사람들은 그가 가짜라는 말이 언제 어디서 왜 나왔는지, 기록에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조사해서 실증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 그럴듯한 추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며 대중들을 속이고, 아무 근거없이 책임을 과거 한국정부로 돌리며 비난하는 일을 했다. 그들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부실한 연구로 가짜 김일성을 진짜 항일영웅으로 세탁해주면서 대신 한국 정부와 가짜 김일성 연구자들을 비방한 그들은 북한 김일성의 특급 변호사들로 보인다.
 
{{인용문|[[6.25 전쟁]]도 한국인들은 처음부터 북한의 남침이라는 걸 체험적으로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후일 좌파 학자들이 [[이승만]] 정부와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여 [[김일성]]과 소련에 면죄부를 주려는 시도가 한때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후 당시의 소련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전쟁 책임은 원래대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br>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도 같은 종류다. 일제시대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라 해방정국을 직접 겪은 한국인들은 33세의 북한 [[김일성]]이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을 자처하며 나설 때부터 직관적으로 가짜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 대한 체험적 이해가 없는 외국서 연구한 학자들이 그를 진짜로 뒤바꿔놓고, 국내의 신진학자들이 이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김일성을 가짜로 몰았다고 책임을 한국정부에 뒤집어씌웠다. 하지만 이또한 원래 자리를 되찾아가야 할 것이다.<br>
이런 일들은 학문적 연구를 빙자하여 세대가 바뀌어 일제시대 또는 해방 당시 일을 잘 모르는 대중들을 속이는 일이다. 북한이나 [[김일성]]에 불리한 것은 죄다 교묘하게 비틀어 책임을 거꾸로 한국정부에 뒤집어 씌우는 학자들의 고약한 버릇은 고쳐져야 한다.}}
 
===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아래 기사는 평양에 사는 한일우(韓一宇)가 1945년 12월 [[김일성]]을 회견한 후 서울의 월간잡지 『민성(民聲)』<ref name="min">[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143 민성(民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에 기고한 글인데, 남한 사람들에게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도는데 대한 해명과 함께 그를 선전할 목적의 기고로 보인다. 당시 북한 실정을 감안할 때 필자가 독자적으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고 김일성 본인이나 소련군이 지시하고, 기고문 내용까지 검토를 거쳤을 것이다. 소련제25군사령부 특별정치선전공작대 부책임자였던 [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C%98%A4%EB%8B%88%ED%8A%B8_%EB%B0%94%EC%8B%A0 레오니트 바신(1915~2006)]은 후일 남한에 퍼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공작을 했다고 증언했는데<ref name="vas">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1 레오니트 바신의 증언: {{인용문|As Kim's nom de guerre was widely associated with an older guerilla who had performed legendary feats, many suspected him of being a complete fraud, so the next step was to build up Kim's image. "We elevated him into the status of a hero to bolster his work as a leader of Korea," Vassin said. "We had to prove he was a real person, the tiger of Mt. Paektu. We had to find his relations at the village of Mangyoungdae. We also had to discredit the information put out in South Korea that he wasn't the real Kim Il Sung. We had to prove he was an active fighter who had liberated the motherland."}}</ref>, 남한 잡지에 이런 회견문을 싣게 한 것도 그러한 공작의 일환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도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과거 경력은 전혀 이야기 하지 않고, 현재와 장래의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낭설이 나왔다고 변명하였다. 또 항일투쟁을 한 김일성이 맞다는 근거를 댈 필요를 느껴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1935년 2월의 [[동흥사건|동흥사건(東興事件)]]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며, [[동흥사건]]의 주역은 사건 당시부터 [[이홍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이 맞다면 불과 8년전 자신이 주도한 사건은 제쳐두고 10년전 남이 주도한 사건을 자신이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6사장 김일성]]이 아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을 몰라서 [[동흥사건]]을 끌어와 자신이 주도했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모르고 있는 북한 김일성은 6사장이 아니고, 본인도 모르는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ref name="sds"/> 사실이 아니다.<ref name="pcp"/>
 
* [[:파일:1946-01-20 민성-김일성장군회견기.jpg|《개선(凱旋)한 우리 팔티산 명장(名將) 김일성장군회견기(金日成將軍會見記)》 / 평양(平壤) 한일우(韓一宇)]] (1945년 12월 작성한 기고문)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viewKey=CNTS-00090563508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6.01.20 (국립중앙도서관) p.4
[[파일:1946-01-20 민성-김일성장군회견기.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서울에서 간행되던 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1946.01.20)에 실린 평양 거주 한일우(韓一宇)의 기고문 《개선(凱旋)한 우리 팔티산 명장(名將) 김일성장군회견기(金日成將軍會見記)》]]
{{인용문|(전략)...<br>
그러면서도 自己의 過去, 또는 體驗談은 極히 避하고, 다만 現在와 將來의 「일」에만 關心을 가지었기 때문에, 한때 「가짜 金日成」이라는 流說까지 낳았었다。<br>
이것은 最近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하여 確實히 「같은」 金日成將軍임이 分明하여졌다。
<center>◇</center>
一九三x年 겨울 어떤날 새벽, 平北 鴨綠江 上流 東興에는 突然 對岸 滿洲로부터 反滿軍 一隊가 警察署를 襲擊하여 警察官 多數를 죽이고 武器多數를 빼앗아가지고 凱旋의 나팔을 불며 悠悠히 돌아갔다。 日本軍警은 이 反滿軍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을 때에、 돌아온 人質이 다음같은 事實을 말하였다----<br>
어떤 깊은 山中 密林地帶로 끌려갔는데、 거기에는 큰 共産村落이 있어 男女老若이 모두 즐기며 살고 있다는 것、 모두 每日같이 工夫를 하고 軍隊訓鍊을 한다는 것、 人質에게 씩錢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 그밖에 軍人中에는 十八九歲의 美少女가 있어서 白馬를 타고 部下를  指揮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 等。<br>
그리고 頭目은 中國人이 아니라 實로 朝鮮人이요、 그 나이도 二十臺의 靑年 「金日成」이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이란 이름을 筆者가 알기는 바로 이때부터이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아닌 [[동흥사건]]을 주도했다는 말은 월간잡지 『이북통신(以北通信)』(1948.07.01)에도 나오는데 위 기사의 인용으로 보인다.<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109929564 월간 『以北通信』 제3권 제5호] (三八社, 1948.07.01) : p.10 《北朝鮮暗黑王 金日成夫人 金靜淑自殺未遂事件》</ref>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나, 소련 시절에 쓴 각종 보고서나 이력서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당시 그 자신이 사건 자체를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이 또한 그가 6사장이 아닌 증거가 될 수 있다.
 
필자 한일우는 자신이 [[동흥사건]] 때부터 김일성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거짓말이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이 대부분 [[보천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매우 많지만, 북한 [[김일성]]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이것이 유일한 것같다. 그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것이다. 보천보 사건도 유사한 여타 사건처럼 곧 잊혀지고 북한 김일성 본인조차 알지도 못했지만 나중에 재발견하여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날조 조작한 것이다. 이후의 수많은 역사 날조도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으로 집권하여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데 대한 컴플렉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small>"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한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의 어느 김일성 전기에도 그가 원주(元柱)라는 이름도 썼다고 한 것은 없는 것 같고, 이런 내용의 평양법원 판결문도 알려진 것이 없다. 어차피 남한 사람들이 확인할 수도 없는 평양법원 판결문을 핑계대어 남한에서도 확산되는 그가 가짜라는 소문에 급히 대응하느라 지어낸 말로 보인다.</small>
 
==김일성 진위 논란에 대한 국토통일원의 입장 (1973년)==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이승만]] 또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해서 퍼뜨린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는 터무니 없는 모함이며, 그런 말은 해방 직후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당일부터 나와 퍼지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가 수립도 되기 이전인 미군정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은 당시 문헌으로도 입증된다.
 
국토통일원(지금의 통일부)이 1976년 펴낸 『김일성연구논총(金日成硏究論叢)』에 실린 아래 글에는 당시까지 발표된 여러 사람들의 김일성 관련 연구 저서들의 주요 내용을 비교 검토하며, 장단점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집중비판 대상인 이명영의 연구들도 검토하며 일부 미흡한 점들도 지적하고 있다. 이명영의 연구가 정부 지원을 받은 어용연구라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 국토통일원 조사연구실 (1973), [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bsid=200041057276&gubun=search 《金日成 (金聖柱)의 正體》 : 『김일성연구논총』] (국토통일원, 1976년) pp.1~108 [PDF 파일로 선택하여 보는 것이 편리.]
: 1973년 당시까지 간행된 아래와 같은 연구서들의 내용을 비교 검토함.
# 백봉(白峰),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1권 (평양: 인문과학사, 1968년); [2권 1969년, 3권 1971년 : 해방 후의 행적]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E%AC%EB%8D%95_(1911%EB%85%84) 한재덕(韓載德, 1911~1970)],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KMO200134208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 다마키 모토이(玉城素, 1926~2008)<ref>[https://enpedia.rxy.jp/wiki/%E7%8E%89%E5%9F%8E%E7%B4%A0 玉城 素(1926~2008)] エンペディア(Enpedia)</ref>, [https://www.kosho.or.jp/products/detail.php?product_id=372424374 『金日成の思想と行動』] (コリア評論社, 1968)
# [[서대숙|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br>[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967207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대구: 화다출판사, 1985) : 김일성 관련 내용은 pp.235~239.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951700 박재간(朴在侃), 『김일성(金日成)과 김성주(金成柱)』], (서울 : 共産圈問題硏究所, 1970)
#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영_(교수)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논문과 강의 (김일성 가짜론) : 1973년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간행 이전임.
# 이 외에도 단천(端川) 출신 의병장 [[김일성 (1888년)|김일성(金一成, 1888 ~ 1926)]]과 관련하여 [[:파일:단천군지 김일성장군.pdf|단천군지(端川郡誌, 1971)]]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ref>[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55349793 『단천군지(端川郡誌) (단천군지 증보편찬위원회, 1971)』]  《단천 출신 김일성설(金一成說)》 : pp.152~162.</ref> 단천군지에 나오는 『민족의 별들 (柳麟 著) 중』이라는 글은 제목과 필자 및 출처가 잘못 밝혀져 있다.<ref>[[김일성 (1888년)#유석인(劉錫仁)의 《김일성의 정체에 대한 고증》]] (우남위키) 참고</ref>
 
국토통일원은 김일성 경력을 과대 포장한 북한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으나, 김일성에 대한 비판이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는 당시까지 나온 여러 연구들이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고 그대로 전적으로 믿기는 어려우므로, 명확한 근거 자료들의 추가 발굴과 보다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김일성 진위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터무니없이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 진짜론의 사례==


===이정식(李庭植)===
===이정식(李庭植)===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5%EC%8B%9D_(%EC%A0%95%EC%B9%98%ED%95%99%EC%9E%90) 이정식(李庭植, Chong-Sik Lee, 1931~2021)]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0%95%EC%8B%9D_(%EC%A0%95%EC%B9%98%ED%95%99%EC%9E%90) 이정식(李庭植, Chong-Sik Lee, 1931~2021)]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다.<ref>[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210818/108611237/1 한국 공산주의 기원 파헤친 이정식 교수 별세] 동아일보 2021-08-19</ref><ref>[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10830/108818726/1 역사에 새겨진 진실은 감춘다고 감춰지지 않는다 <nowiki>[광화문에서/김상운 문화부 차장]</nowiki>] 동아일보 2021-08-30</ref>
* Scalapino, Robert A. and Lee, Chong-Sik, 『Communism in Kore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lifornia, 1972.
* Chong-Sik Lee, [https://www.jstor.org/stable/2642612 『Kim Il-Song of North Korea』], Asian Survey Vol. 7, No. 6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Jun., 1967), pp.374-382(9 pages)
:북한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kwd=CNTS-00085606551 Scalapino, Robert A. and Lee, Chong-Sik, 『Communism in Korea. Part I-Part II』]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lifornia, 1972.
: 스칼라피노 · 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  (서울 : 돌베개 1986)
: 스칼라피노 · 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  (서울 : 돌베개 1986)
{{인용문|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기 때문에 그가 이름을 비꾼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선 아주 흔한 일로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한두 개의 가명을 사용했다. 또 다른 김일성에 관한 전설은 아직도 일부 한인들 사이에 서 믿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하여 두각을 나타낸 인물에 대한 기록에 접하지 못했다........ 김일성을 조작해내기 위해서는 그 당시 이래 김일성과 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모두 조작해내야 하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스칼라피노 · 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   (서울 : 돌베개 1986) p.300}}
{{인용문|'''[p.293]'''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소수의 유격대를 이끌고... 보전(保田, 普天堡)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br><br>'''[p.300]''' 오늘날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일 성은 1932~1941년 만주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이끌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기 때문에 그가 이름을 비꾼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선 아주 흔한 일로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한두 개의 가명을 사용했다. 또 다른 김일성에 관한 전설은 아직도 일부 한인들 사이에 서 믿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하여 두각을 나타낸 인물에 대한 기록에 접하지 못했다........ 김일성을 조작해내기 위해서는 그 당시 이래 김일성과 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모두 조작해내야 하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스칼라피노 · 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 (서울 : 돌베개 1986)}}
이정식 교수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온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이 연구해보니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잘못된 허수아비 논증(straw man fallacy)"을 했다. 더구나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은 사건 5개월 뒤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도 아니다.
 
* Chong-Sik Lee, [https://www.cambridge.org/core/journals/china-quarterly/article/abs/revolutionary-struggle-in-manchuria-chinese-communism-and-soviet-interest-19221945-by-chongsik-lee-berkeley-los-angeles-and-london-university-of-california-press-1983-366-pp/216405C91B2C13AFBD95252B97E9E21B 『Revolutionary Struggle in Manchuria: Chinese Communism and Soviet Interest, 1922–1945』] [Berkeley, Los Angeles and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366 pp.] ([https://dl.nanet.go.kr/search/searchInnerDetail.do?controlNo=MONO2199104359 국회도서관])
: 이정식 지음; 허원 옮김,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854945# 『만주혁명운동과 통일전선』] (서울: 사계절, 1989)
 
* [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210818/108611237/1 한국 공산주의 기원 파헤친 이정식 교수 별세] 동아일보 2021-08-19
::북한연구 1세대… 美우드로 윌슨상
::김일성 중국공산당 입당 누락 밝혀
<ul>{{인용문|그는 김일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선 엄정함을 유지했다. 한때 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가짜 김일성’ 논란과 관련해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음을 적시했다.}}</ul>
: 김일성이 만주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으니 가짜 아닌 진짜가 맞다고 한 것은 학문적 엄정성이 아니라 사안에 대한 이해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은(林隱)===
===임은(林隱)===
임은(林隱)은 허진(許眞, 1928~1997)의 필명이며,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4~1908)의 3남 허준(許埈, 1895 ~ 1956)의 아들로 본명은 허웅배(許雄培)이다. 부친 허준(許埈)은 [[연안파]]로 북한에서 1956년 숙청 당했다. 허진은 소련 유학 당시인 1958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에서 거주했다.
임은(林隱)은 허진(許眞, 1928~1997)의 필명이며, 구한말의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4~1908)의 3남 허준(許埈, 1895 ~ 1956)의 아들로 본명은 허웅배(許雄培)이다. 부친 허준(許埈)은 [[연안파]]로 북한에서 1956년 숙청 당했다. 허진은 소련 유학 당시인 1958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에서 거주했다. 필명 임은은 허진의 선조들이 살았고, 선영이 있는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따왔으며, 허진도 사후에 임은동 선산에 묻혔다.


* 林隱, 『北朝鮮王朝成立秘史』  (東京, 自由社, 1982),  pp.29~57.  
* 林隱,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JMO000014777 『北朝鮮王朝成立秘史 : 金日成正傳』] (東京, 自由社, 1982),  pp.29~57.  
: 임은(林隱),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옥촌문화사, 1989년) : 위 책의 한국어판
: 임은(林隱)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858575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서울 : 옥촌문화사, 1989년) : 위 책의 한국어 번역.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허진(임은)과 달리 그와 함께 소련으로 망명한 김종훈은 김일성이 가짜라고 했다. 이는 해방 후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비밀리에 어느 정도 퍼져 있었다는 증거이다.
허진은 북한 김일성의 해방 전 전력이나, 진위를 직접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말과 자신의 연구를 통해 북한 김일성이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사람이 맞으므로 진짜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허진과 달리 그와 함께 소련으로 망명한 친구 김종훈은 김일성이 가짜라고 했다. 이는 해방 후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비밀리에 어느 정도 퍼져 있었다는 증거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원래 북한에서 먼저 퍼져서 남한으로까지 전파된 것이다.  
* 소련의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김종훈 증언 : 1958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김일성이 가짜라는 편지 써 보내
* 소련의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김종훈 증언 : 1958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김일성이 가짜라는 편지 써 보내
{{인용문|[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12272016092043.html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br>
{{인용문|[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12272016092043.html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br>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조선유학생대회가 열렸는데 유학생 허웅배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소련으로의 망명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다른 유학생들도 1958년 1월 겨울방학을 맞으며 러시아인 친구의 집에 모여 ‘8월 종파’사건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숙청에 대한 비판 등 논쟁을 치열하게 벌리던 끝에 집단적인 망명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인숭배는 헌법과 당내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다. 진짜 김일성은 전설적인 독립활동가이며 1930년대 사망하였으나 해방 후 소련이 김성주를 가짜 김일성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삶은 노예의 삶이다. 지금 북한은 종파처형 바람이 불고 있고 먼저 망명한 허웅배를 동조한 우리도 북한에 돌아가면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망명 입장을 밝혔습니다. <br><br>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조선유학생대회가 열렸는데 유학생 허웅배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소련으로의 망명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다른 유학생들도 1958년 1월 겨울방학을 맞으며 러시아인 친구의 집에 모여 ‘8월 종파’사건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숙청에 대한 비판 등 논쟁을 치열하게 벌리던 끝에 집단적인 망명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인숭배는 헌법과 당내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다. <u>진짜 김일성은 전설적인 독립활동가이며 1930년대 사망하였으나 해방 후 소련이 김성주를 가짜 김일성으로 만들었다.</u> 북한의 삶은 노예의 삶이다. 지금 북한은 종파처형 바람이 불고 있고 먼저 망명한 허웅배를 동조한 우리도 북한에 돌아가면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망명 입장을 밝혔습니다. <br><br>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12272016092043.html (심층취재) 소련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6.25전쟁 진실 안 뒤 반감 싹터” ] VOA 2017.8.4<br>
[https://www.voakorea.com/a/3969175.html <nowiki>[심층취재]</nowiki> 소련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6.25전쟁 진실 안 뒤 반감 싹터”] VOA 2017.8.4<br>[https://www.voakorea.com/a/3971077.html <nowiki>[심층취재 오디오]</nowiki> 소련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6.25전쟁 진실 안 뒤 반감 싹터”] VOA 2017.8.3<br>
[녹취: 김종훈 씨] “나는 거기(북한) 가면 제일 먼저 잡혀서 죽어요. ‘아직도’ 가 아니라 영원하죠. 김일성을 건드린 놈인데. 김일성을 살인방조자, 전쟁을 일으켰다고. 가짜 김일성이란 것을 중앙당에 편지를 쓴 게 다 남아 있는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공개서한’ 이라고 해서 김일성이 왜 그런 놈인가 하는 것을 다 적어서 거기 보냈어요.”}}
[녹취: 김종훈 씨] “나는 거기(북한) 가면 제일 먼저 잡혀서 죽어요. ‘아직도’ 가 아니라 영원하죠. 김일성을 건드린 놈인데. <u>김일성을 살인방조자, 전쟁을 일으켰다고. 가짜 김일성이란 것을 중앙당에 편지를 쓴 게 다 남아 있는데.</u>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공개서한’ 이라고 해서 김일성이 왜 그런 놈인가 하는 것을 다 적어서 거기 보냈어요.”}}
 
===[[서대숙|서대숙(徐大肅)]]===
[[서대숙|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2022)]]은 정치학자로, 미국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과 북한의 현대사 및 정치와 관련한 많은 논문과 저서가 있다.
 
*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
: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967207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대구: 화다출판사, 1985) : 김일성 관련 내용은 pp.235~239.


===서대숙(徐大肅)===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B%8C%80%EC%88%99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은 정치학자로, 미국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과 북한의 현대사 및 정치와 관련한 많은 논문과 저서가 있다.
*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Y: Columbia Univ. Press, 1988
*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Y: Columbia Univ. Press, 1988
: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 )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 [[서대숙|서대숙(徐大肅)]]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인용문|남한에서는 현재의 북한주석과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인혁명가가 같은 이름으로 가진 둘 또는 셋의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이는 부질없는 추측이다........ 1974년까지도 북한주석 김일성이 가짜라고 주장한 남한연구가가 있었으나 이는 학문적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저작이었다. 그 저자(즉 이명영 - 인용지주)는 만주에서 김일성과 싸웠던 전일본군 장교 몇 명을 포함하여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등 상당한 연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점에서 그 연구는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저자 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결론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만을 수집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 청계연구소, 1989) p.296}}
:{{인용문|남한에서는 현재의 북한주석과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인 혁명가가 같은 이름으로 가진 둘 또는 셋의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이는 부질없는 추측이다........ <u>1974년까지도 북한주석 김일성이 가짜라고 주장한 남한연구가가 있었으나 이는 학문적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저작이었다.</u> 그 저자(즉 이명영 - 인용자주)는 만주에서 김일성과 싸웠던 전일본군 장교 몇 명을 포함하여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등 상당한 연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점에서 그 연구는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저자 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결론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만을 수집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서대숙]]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 청계연구소, 1989) p.296}}
:그러나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서대숙 본인의 연구보다는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고 비난하는 이명영의 연구가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 새로 발굴된 수많은 자료들에 의해서 확실히 밝혀지고 있다. 이명영이 아니라 서대숙 본인이 정치적 의도를 가진 연구를 한 것이다. 김일성을 직접 만나서 무슨 밀약이 있었던 것인가?<ref>[https://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220918/115510473/1 北 공산주의 운동 연구 1세대 서대숙 박사 별세] 동아일보 2022-09-19
{{인용문|여러 차례 방북한 그는 북한 고위층과도 친분이 있는데, 특히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 기록은 “처음 만났을 때 비공개하기로 약속했으니 지키고 싶다”며 비공개를 고수했다.}}</ref> 김일성은 자신의 치부를 깊숙히 파헤친 이명영의 연구를 비방하며 자신이 진짜가 맞다고 옹호해준 [[서대숙]]에게 고마움을 느껴 만나준 것이 아니겠는가? 서대숙의 연구가 그의 치부를 제대로 밝힌 것이라면 만나주고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이명영의 연구는 북한 김일성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것이나, 서대숙의 엉터리 김일성 방어논리가 멍청한 한국 학계에 먹혀들어 결과적으로 이명영이 욕을 먹고 김일성은 위기 탈출에 성공하였다. 서대숙은 김일성에게 가짜 멍에를 벗겨주며 욕은 [[이승만]]이나 이명영이 대신 먹게 만들어주고, 잃을 뻔한 보천보의 영웅 타이틀도 계속 유지하게 해준 구세주나 다름없다.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907050032920500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7-05&officeId=00032&pageNo=5&printNo=13469&publishType=00020 美(미)하와이大(대) 徐大肅(서대숙)교수 日紙(일지) 인터뷰 "交流(교류) 아닌 「일방 北行(북행)」엔 반대"] 1989.07.05 경향신문 5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907050032920500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7-05&officeId=00032&pageNo=5&printNo=13469&publishType=00020 美(미)하와이大(대) 徐大肅(서대숙)교수 日紙(일지) 인터뷰 "交流(교류) 아닌 「일방 北行(북행)」엔 반대"] 1989.07.05 경향신문 5면
{{인용문|'''서울大(대)에서 처음으로 북한학을 가르친 감상은?'''<br>
:{{인용문|'''서울大(대)에서 처음으로 북한학을 가르친 감상은?'''<br>"한국은 지금 對(대)북한인식을 둘러싸고 혼란상태에 있다. <u>지금까지 金日成 (김일성)은 가짜라는 등 잘못된 것을 유포시켜왔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도 학생들은 신용하지 않는다.</u> 한국의 대학생들은 매우 정치화 돼있어 바른 인식을 얻기위한 공부에는 커다란 지장이 있다. 미국의 대학생과 비교해도 공부량이 적다. 매우 유감이다"}}
"한국은 지금 對(대)북한인식을 둘러싸고 혼란상태에 있다. <u>지금까지 金日成 (김일성)은 가짜라는 등 잘못된 것을 유포시켜왔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도 학생들은 신용하지 않는다.</u> 한국의 대학생들은 매우 정치화 돼있어 바른 인식을 얻기위한 공부에는 커다란 지장이 있다. 미국의 대학생과 비교해도 공부량이 적다. 매우 유감이다"}}
:한국 학생들의 공부량도 문제일 수는 있겠으나 서대숙 본인의 공부량부터 걱정했어야 했다. 자료를 제대로 충분히 많이 찾아봤더라면 엉터리 주장을 내놓아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구세주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68517 <nowiki>[조우석칼럼]</nowiki> 북한학 1세대 故 서대숙 교수, 그는 반면교사다] Sky Daily 2022-09-27
::국내 언론 “김일성 가짜論 부정했다”며 일제히 환호성
::실제론 김정일 세습을 “경사”로 평가한 학문적 바보
<ul>{{인용문|“김일성의 항일운동은 악전고투였으나 신출귀몰하듯 잘 싸웠다”(45쪽)는 것이고, “한마디로 평가받을 만한 것”(39쪽)이란 견해도 애써 피력했다. 그런 활동을 “허리에 일본도를 차고 독립운동을 방해했던” 사람들에 비하면 과소평가할 수 없다(52쪽)는 말까지 했는데 그게 한계다. [[박정희]]·[[백선엽]] 등이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간도특설대]]와 연루됐다는 좌파의 말도 안 되는 공격을 서대숙도 그대로 믿었던 걸까. 결정적으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고, 때문에 가짜가 명백한데 그걸 외면하는 학문적 실수도 범했다.
그러니 집권 이후 현대북한 서술은 말할 것도 없다. “김일성은 북 주민들에게 정치적 안정감과 계속성을 보장해 줬다. 북 주민들의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조작해 낸 것이 아니다”(161쪽)는 식이다. 당혹스럽다. 정말 결정적인 것은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 세습을 한 걸 “커다란 경사”(217쪽)라고 평가한 대목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황당한 서대숙 북한학의 학문적 파산을 증명해 준다는 게 나의 움직일 수 없는 판단이다. 중립적 서술은커녕 평양 관변 역사서를 그대로 옮긴 듯한 서술은 정나미가 다 떨어진다. 서대숙 찬양을 앵무새처럼 되되는 언론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얘기다.|쪽수는 서대숙, 『현대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을유문화사, 2000)의 것을 가리킴.}}</ul>
:서대숙은 국가를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했다는 사람들의 전리품쯤으로 취급하는 것같다. 그러니 만주서 비적질이나 하던 김일성이 [[스탈린]]의 꼭두각시로 간택을 받아 지도자가 되어 일족이 북한이란 국가를 사유화하고,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며 주민을 노예로 부려도 커다란 경사이며, 친일파(?)가 득세한 한국보다 낫게 보이는 모양이다. 북한은 해방 후 소련군함 얻어타고 들어온 만주 비적 출신들에게 점령당해 주민들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가?
 
*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ac70c9d3acfc-c9c4c2e4/bocheonbo_battle-09212010161558.html <nowiki>[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nowiki> 보천보 전투] RFA 2010.09.21
:{{인용문|서대숙: 어찌 됐던 보천보전투를 통해 김일성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보천보 전투가 군사적으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는 단순한 소동에 불과했지만 이 사건은 일본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고 당시 땅에 떨어졌던 조선인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br>또한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고 김일성은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br>이렇게 김일성이 승승장구하자 일본군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나섰습니다.}}
:동아일보가 [[보천보 사건]]을 크게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고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보천보 사건]]도 앞서의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 [[독산사건]]처럼 금방 잊혀져서 해방 당시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김일성 본인도 1945년 12월 기자회견에서 [[보천보 사건]]을 몰라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는 그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실토한 것이다.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집권한 뒤 [[보천보 사건]]을 어마어마한 자신의 항일전공으로 조작해 선전했기 때문에 다른 사건은 잊혀지고 이 사건만 나중에 유명해지게 되었을 뿐이다.
 
*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ac70c9d3acfc-c9c4c2e4/fake_kimilsung-09282010112741.html <nowiki>[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nowiki> 가짜 김일성] RFA 2010.09.28
:{{인용문|서대숙: 김일성이란 이름은 유명했다. 김일성이 공식석상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모두 “가짜다” 라고 했다. 가짜가 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 김일성. 전설에 나오는 그런 김일성은 없다. 우리가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란 전설적인 사람은 없다.}}
:서대숙은 일제시대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모양이나 그에 해당하는 실존인물이 없으므로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소련군에서는 진지첸 대위였으며, 어디서도 장군이라 불린적이 없는데도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며 자신이 그 유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 행세를 했기 때문에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 것이다. 유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 애매했기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그 사람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누구인지 분명했다면 그러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 [[서대숙]]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이승만]] 정부가 만들어낸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67473.html 서대숙, “통일되면 북쪽 학자들도 찾아와 연구할만한 자료들이죠” ] 한겨레신문 2018.10.25</ref>
:{{인용문|“모든 학문이 그렇듯 시작은 호기심이었어요. <u>[[이승만]] 정권의 ‘김일성 가짜설’</u>을 비롯해 ‘북한’이란 단어조차 금기가 되는 것을 보면서 객관적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컸어요. 학문의 목적은 진실 추구이고, 학자는 목을 내놓더라도 진실과 소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북한 김일성이 평양에 나타난 직후인 1945년말부터 이미 그가 가짜라고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승만]] 집권 이전에 그러한 말을 기록한 문헌도 셀 수 없이 많다. 서대숙은 실증적인 연구를 하지않고 지레짐작으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온 책임을 김일성 본인 아닌 이승만 정권에 돌리고 있다.
 
서대숙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처음에 언제 어디서 왜 나오게 되었는지, 기록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조사해보지 않고, 일본과 중국 문헌만 좀 조사해보고는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에서 상당한 항일투쟁을 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는 곧장 이승만 정부가 그를 가짜라고 교육시켰다며 근거없는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늘 북한 [[김일성]]이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 괴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이며, 그를 가짜라고 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명성 때문에 이런 잘못된 주장이 한국에 수입되어 신진학자들이 길을 잃고 김일성이 진짜이고 항일투쟁의 영웅이라며 김일성을 미화하고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짜 김일성 장군 행세는 북한 김일성이 했는데,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며 욕은 [[이승만]], [[박정희]]가 얻어먹는 오늘날의 기막힌 현실은 김일성이 진짜이고 그의 항일투쟁은 칭찬받을 만하다며 면죄부를 준 서대숙의 잘못된 연구의 영향이 크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 김일성 장군일 뿐만 아니라, 소련의 꼭두각시로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지도자가 된 점을 외면하고 그의 항일투쟁 경력만 부각시킨 것은 큰 잘못일 뿐만 아니라, 항일투쟁 경력에서도 [[6사장 김일성]]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밝히지 못하고 북한의 허위 주장을 따라갔다.
 
서대숙의 잘못된 김일성 연구가 후대에 끼친 폐해는 [[브루스 커밍스]]의 잘못된 [[한국전쟁]] 연구가 끼친 해악에 비견할만하다. 서대숙은 국군의 [[김석원]] 장군이 일제시대에 일본군으로 북한 김일성의 부대와 맞서 싸웠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내놓았는데, [[브루스 커밍스]]는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김일성]]이 남침한 것은 이승만이 중용한 [[김석원]] 같은 친일파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며, 한국전의 원인은 이미 일제시대 [[김석원]]과 [[김일성]]의 대결에서 잉태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했다.
 
===[[와다 하루키|와다 하루키(和田 春樹)]]===
[[와다 하루키|와다 하루키(和田 春樹, 1938 ~ )]]는 일본의 역사 학자이자 도쿄 대학의 명예 교수이다. 원래 전공은 소련사이나 후에 북한과 김일성 연구를 많이 했다. 그는 조총련과 연계된 반한(反韓) 활동을 한 전력도 있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80627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6-27&officeId=00020&pageNo=1&printNo=17454&publishType=00020 日韓連帶(일한연대)회의 해체 在日(재일) 反韓(반한) 중심세력] 1978.06.27 동아일보 1면</ref><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0121500209201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12-15&officeId=00020&pageNo=1&printNo=18215&publishType=00020 金大中 釋放(김대중 석방)요구 朝總聯(조총련) 또 街頭(가두) 데모] 1980.12.15 동아일보1면</ref>
 
아래는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https://ko.wikipedia.org/wiki/이명영_(교수)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연구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ref name="leem">이명영(李命英),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ref>에 대한 비판이다.
{{인용문|그의 전체 입론은.... 관헌자료에 나타나는 어떤 내용의 기술들을 도외시 내지 무시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인데 이 점은 이미 한국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전문연구서<ref>김창순 · 김준엽의 책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말하는 듯함.</ref>에 의해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 이 책은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말단 일본인들이 김일성 부대가 흘린 거짓 정보에 얼마나 현혹되었던가를 전해주는 자료로서 읽혀져야 한다.|和田春樹,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  『사회와 사상』 1988년 11월호 (서울, 한길사, 1988), p.166.}}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와다 하루키|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 김성주가 1931년부터 전설상의 영웅인 김일성의 이름을 차용했다고 말하기는 하나,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한 것이 맞으므로 가짜 아닌 진짜라고 주장한다. (아래 저서 참고.) 이는 상호 모순되는 주장이다. 해방 직후 국내 사람들이 기대하던 김일성은 일찍부터 유명했던 전설상의 영웅인 김일성이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수도 없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가 아니므로 그는 가짜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9%80%EB%8B%A4_%ED%95%98%EB%A3%A8%ED%82%A4 와다 하루키(和田 春樹, 1938 ~ )]는 일본의 역사 학자이자 도쿄 대학의 명예 교수이다. 전공은 소련사와 한국 현대사이다. 아래는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A%85%EC%98%81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연구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ref name="leem">이명영(李命英),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ref>에 대한 비판이다.
* 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 1992年 3月 1日)
{{인용문|그의 전체 입론은.... 관헌자료에 나타나는 어떤 내용의 기술들을 도외시 내지 무시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인데 이 점은 이미 한국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전문연구서<ref>김창순 · 김준엽의 책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말하는 듯함.</ref>에 의해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 이 책은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말단 일본인들이 김일성 부대가 흘린 거짓 정보에 얼마나 현혹되었던가를 전해주는 자료로서 읽혀져야 한다.|和田春樹,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  『사회와 사상』 1988년 11월호 (서울, 한길사, 1998), p.166.}}
: 와다 하루끼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인용문|'''[번역본 p.86]''' '만주사변'개시와 함께 무장투쟁을 하기로 한 그가 이를 위해 본명 김성주를 숨기고 간도지방에 떠도는 전설상의 영웅인 김일성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용문|'''[번역본 p.180]'''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되는 게릴라전의 지휘관은 젊은 체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주의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
:와다는 북한 김일성이 나이가 젊어서 가짜 소리를 듣는 것에 대해 위와 같이 변명한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보다 훨씬 이전에 1920년 경부터 유명한 김일성 장군에 대한 풍문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하여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고 있다. 만주에서 유격전을 하면 긴 세월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이상한 논리처럼 보인다. 이런 주장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1920년 [[봉오동 전투]] 당시 [[홍범도|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의 나이가 52세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6615.html <nowiki>[와다하루키회고록]</nowiki> '김일성 가짜설'은 가짜였다] - 한겨레 2007. 1. 25.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6615.html <nowiki>[와다하루키회고록]</nowiki> '김일성 가짜설'은 가짜였다] - 한겨레 2007. 1. 25.
{{인용문|나는 두 번에 걸친 연변 방문을 통해 그 곳 학자들로부터 배운 것과 입수한 자료들을 토대로 65년 논문을 다시 쓴 원고에 가필수정을 해서 91년 말까지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을 완성했다. 이 책은 일본에선 헤이봉(평범)사에서 92년 3월에 출간했다. 한국어판은 90년 서울 첫 방문 때 친해진 이종석씨가 맡아서 그의 번역으로 92년 8월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했다. <u>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조선인으로는 가장 유명했다는 게 객관적인 자료로 논증됐다고 생각한다.</u>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조선족, 특히 연변 역사가의 협력 덕분인 만큼 깊이 감사하고 있다.}}
{{인용문|나는 두 번에 걸친 연변 방문을 통해 그 곳 학자들로부터 배운 것과 입수한 자료들을 토대로 65년 논문을 다시 쓴 원고에 가필수정을 해서 91년 말까지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을 완성했다. 이 책은 일본에선 헤이봉(평범)사에서 92년 3월에 출간했다. 한국어판은 90년 서울 첫 방문 때 친해진 이종석씨가 맡아서 그의 번역으로 92년 8월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했다. <u>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조선인으로는 가장 유명했다는 게 객관적인 자료로 논증됐다고 생각한다.</u>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조선족, 특히 연변 역사가의 협력 덕분인 만큼 깊이 감사하고 있다.}}
:설사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을 한 것이 사실이라해도 그런 일은 해방 당시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나중에야 많은 연구를 통해 알려진 것이고, 그때문에 진짜가 될 수는 없다.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가짜인 것은 변함없다.


===이종석(李鍾奭)===
===이종석(李鍾奭)===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C%84%9D_(%EC%A0%95%EC%B9%98%EC%9D%B8) 이종석(李鍾奭, 1958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C%84%9D_(%EC%A0%95%EC%B9%98%EC%9D%B8) 이종석(李鍾奭, 1958 ~ )]은 세종연구소 연구원으로 [[노무현]] 정권때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 이종석, 「김일성연구의 쟁점(상)(『사회와 사상』 1989년 12월  pp.348~375)
* 이종석, 《김일성연구의 쟁점(상)(『사회와 사상』 1989년 12월  pp.348~375)
*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 1995년판 『현대북한의 이해』의 증보판,
*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 1995년판 『현대북한의 이해』의 증보판,
: p.440부터 이명영과 허동찬의 김일성 가짜론에 대한 비판이 나옴.
: p.440부터 이명영과 허동찬의 김일성 가짜론에 대한 비판이 나옴.
::이종석은 두 사람의 김일성 가짜론을 일제관헌 자료를 맹신한 결과라고 비판하면서도 같은 일제 관헌 자료인 1939년 9월 사상휘보 제20호에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북한 김일성과 유사하게 적힌 것은 맹신한다. 같은 일제 관헌의 자료라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잘못된 자료라는 편리한 생각을 가진 듯 하다.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연구를 한 사람들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졌다고 비판하지만 정치적 의도는 이종석 본인이 더 많이 가지고 북한 김일성을 미화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자신의 주장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자부한다.
* 이종석, [http://db.history.go.kr/id/hb_099_02_000412 《김일성의 소위 '항일유격투쟁'의 虛와 實》], 『한국사시민강좌 제21집』 (일조각, 1997) pp.125~146


===[[한홍구|한홍구(韓洪九)]]===
===[[한홍구|한홍구(韓洪九)]]===
[[한홍구|한홍구(韓洪九, 1959 ~ )]]
[[한홍구|한홍구(韓洪九, 1959 ~ )]]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이다.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부터라고 주장하며, 북한 김일성이 이 사건의 주역이 맞으므로 진짜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김일성의 이름이 유명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은 거의 잊혀져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없었고,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0년경부터 유명했기 때문에 해방 당시라면 나이가 많을 수 밖에 없다.
 
*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1/10/021075000200110240381057.html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 한겨레 21 2001년10월24일 제381호
::학문적으로 황당한 그 논리가 어떻게 그토록 오랜 기간 이남사회를 지배해왔을까?
 
* [http://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4/07/021075000200407080517059.html 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한겨레 21 제517호  2004년 07월 08일
* [http://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4/07/021075000200407080517059.html 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한겨레 21 제517호  2004년 07월 08일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 영웅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 영웅


*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1/10/021075000200110240381057.html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학문적으로 황당한 그 논리가 어떻게 그토록 오랜 기간 이남사회를 지배해왔을까? : 한겨레 21 2001년10월24일 제381호
* [http://smallnews.blog.me/22558748 한홍구, 이승환 (필명 이재화), 『'김일성 가짜설'의 생산구조와 그 의미』]
* [http://smallnews.blog.me/22558748 한홍구, 이승환 (필명 이재화), 『'김일성 가짜설'의 생산구조와 그 의미』]
* 한홍구,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a4354bad23f2d42cffe0bdc3ef48d419&outLink=N#redirect 「가짜 김일성설과 한국현대사」] 民族發展硏究 Vol.- No.6 pp.71-85, (中央大學校 民族發展硏究院, 2002)
* 한홍구,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a4354bad23f2d42cffe0bdc3ef48d419&outLink=N#redirect 「가짜 김일성설과 한국현대사」] 民族發展硏究 Vol.- No.6 pp.71-85, (中央大學校 民族發展硏究院, 2002)
121번째 줄: 331번째 줄:
===신주백(辛珠柏)===
===신주백(辛珠柏)===
신주백(辛珠柏, 1963 ~ )은 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이며,<ref>[https://www.yna.co.kr/view/AKR2019041616510006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에 신주백 한림대 교수] 연합뉴스 2019. 4. 16</ref> 성균관대학교를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주백(辛珠柏, 1963 ~ )은 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이며,<ref>[https://www.yna.co.kr/view/AKR2019041616510006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에 신주백 한림대 교수] 연합뉴스 2019. 4. 16</ref> 성균관대학교를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신주백(辛珠柏),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009610 「우리역사 바로알자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역사비평 1991년 겨울호(통권 17호), 1991.11, pp.212-216.
* 신주백(辛珠柏),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009610 「우리역사 바로알자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역사비평』 1991년 겨울호(통권 17호), 1991.11, pp.212-216.
* 신주백(辛珠柏), 「항일무장투쟁 김일성 장군은 진짜였다.」 (월간 , 1994년 8월호) p.60~
* 신주백(辛珠柏),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02857&language=ko_KR&hasTopBanner=true 「김일성의 만주항일유격운동에 대한 연구」], 『역사와 현실』 제12권 , (한국역사연구회, 1994.06) pp.144 - 190
* 신주백(辛珠柏),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98887 「항일무장투쟁 김일성 장군은 진짜였다.」] (월간 『말』, 1994년 8월호) pp.60~63
* 신주백(辛珠柏),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56992839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문제연구소 엮음, 역사비평사, 1999) pp.215~222.
* 신주백(辛珠柏),  「김일성 가짜설」,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서울 : 역사비평사, 2000.) pp.353~359.


==주요 연구자들의 주장 요약표==
==주요 연구자들의 주장 요약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그가 진짜냐 가짜냐,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이 맞느냐 3가지로 정리된다.  
북한 김일성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그가 진짜냐 가짜냐,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이 맞느냐 3가지로 정리된다. 이 3가지 사안은 서로 별개의 문제이며, 김일성 진위 문제는 해방직후 그가 평양 대중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 나섰을 때 불거졌고, 그가 제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이 맞느냐의 문제는 이명영이 1974년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을 간행하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소련붕괴와 중국의 개방이후 공개된 문헌들과 2000년대 들어 과거문헌들의 인터넷 DB 구축으로 새로 발굴된 자료들을 이전에 알려진 자료들과 종합해서 검토해 보면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맞다. 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에는 2명의 김일성이 있었는데 그 중 상급자인 2사의 정치위원이었던 사람이 제3사장(제6사장)이 되며, 그는 함남 갑산군 회린면 출신으로 [[보천보 사건]] 직후인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것이 맞다. 그 후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으며,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 제1단(제3단)의 단장 [[방진성]] 아래에서 참모장, 정치위원, 제3연장 등으로 있었고, 당시 그는 제3사장으로 승진하기에는 직급이 너무 낮았다. 하위 직급에 있던 그가 상관인 단장 [[방진성]]을 제치고 3사장으로 승진했을 리도 만무하다. 위계질서를 완전히 깨뜨리는 그런 인사는 있을 수 없다.
소련붕괴와 중국의 개방이후 공개된 문헌들과 2000년대 들어 과거문헌들의 인터넷 DB 구축으로 새로 발굴된 자료들을 이전에 알려진 자료들과 종합해서 검토해 보면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맞다. 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에는 2명의 김일성이 있었는데 그 중 상급자인 2사의 정치위원이었던 사람이 제3사장(나중에 제6사장)이 되며, 그는 함남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 출신으로 [[보천보 사건]] 직후인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것이 맞다. 그 후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 제1단(제1사의 제1, 2단에 이어 제3단으로도 불림)의 단장(團長) [[방진성|방진성(方振聲)]] 아래에서 참모장, 정치위원, 제3연장(連長) 등으로 있었고, 당시 그는 신설되는 제3사의 사장(師長)으로 승진하기에는 직급이 너무 낮았다. 하위 직급에 있던 그가 상관인 단장 [[방진성]]을 제치고 3사장으로 승진했을 리도 만무하다. 위계질서를 완전히 깨뜨리는 그런 인사는 있을 수 없다. 당시 [[안봉학|안봉학(安鳳學)]]은 제1사 제1단장이었기 때문에 제1사장(나중에 제4사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지만 북한 김일성은 단장보다 하위 직급에 있어 사장 승진이 불가능했다.


각 쟁점에 대한 각종 근거자료들의 자세한 검토는 아래 우남위키 문서를 참고하라.
각 쟁점에 대한 각종 근거자료들의 자세한 검토는 아래 우남위키 문서를 참고하라.
{{인용문|
{{인용문|
* [[김일성 가짜설]]
* [[김일성 가짜설]]
*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
* [[김일성 가짜설#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
*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
*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북한 김일성과 관련한 3가지 쟁점에 대한 주요 연구자들의 입장은 아래와 같다.  
북한 김일성과 관련한 3가지 쟁점에 대한 주요 연구자들의 입장은 아래와 같다.  


<center>
{| class="wikitable" style="margin:0 auto;"
{| class="wikitable"
|-
|-
! 연구자 !! 김일성 진위 !! 제6사장 !! 제2방면군장
!style="background-color:LightSkyBlue;"| 연구자 !!style="background-color:LightSkyBlue;"| 김일성 진위 !!style="background-color:LightSkyBlue;"| 제6사장 !!style="background-color:LightSkyBlue;"| 제2방면군장
|-
|-
! 이명영 !! 가짜 !! X !! X
! 이명영 !! 가짜 !! X !! X
149번째 줄: 363번째 줄:
! 이정식 !! 진짜 !! ○ !! ○
! 이정식 !! 진짜 !! ○ !! ○
|-
|-
! 임은 !! 진짜 !! ○ !! ○
! 임은(허진) !! 진짜 !! ○ !! ○
|-
|-
! 서대숙 !! 진짜 !! ○ !! ○
! [[서대숙]] !! 진짜 !! ○ !! ○
|-
|-
! 와다 하루키 !! 진짜 !! ○ !! ○
! [[와다 하루키]] !! 진짜 !! ○ !! ○
|-
|-
! 이종석 !! 진짜 !! ○ !! ○
! 이종석 !! 진짜 !! ○ !! ○
161번째 줄: 375번째 줄:
! 신주백 !! 진짜 !! ○ !! ○
! 신주백 !! 진짜 !! ○ !! ○
|-
|-
! 최종 규명된 사실 !! 가짜 !! X !! ○
!style="background-color:#ffffcc;"| 최종 규명된 사실 !!style="background-color:#ffffcc;"| 가짜 !!style="background-color:#ffffcc;"| X !!style="background-color:#ffffcc;"|
|}
|}
</center>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고 한 국내의 1세대 연구자 이명영과 김창순은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을 국내에서 체험한 사람들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되는 과정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이정식과 서대숙은 해방전 중국에서 살았고, 해방후 서울을 잠간 거쳐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다녀 국내 사람들이 김일성이 가짜라고 하게되는 사정에 대한 직접적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다. 신진학자들은 해방 후 태어나서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 출현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되는 사정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전혀 없는데다 한국의 과거 정부에 대한 반감이 충만한 사람들이다.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대부분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맞기 때문에 진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논리적으로 오류인 허수아비 논증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김창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은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맞기는 하지만, 그가 일제시대나 해방당시 유명했던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짜라는 입장을 견지했다.<ref name="kimcs"/><ref name="kimcs1"/>
 
==가짜 김일성이 진짜로 둔갑해 있는 배경==
[[김일성]]은 동시대의 한국인들로부터는 가짜 취급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그가 진짜가 맞는데도 반공시대에 그를 가짜로 만든 것처럼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반전이 일어난데는 아래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
# 일제시대에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라 북한 [[김일성]]이 가짜인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세대들의 퇴장.
# 후속 세대들은 일제시대에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에 대해서는 모르고, 어릴 때 부터 북한 김일성에 익숙하여 그가 가짜라는데 대한 체험적 이해가 없으므로 누가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김일성이 진짜라고 하면 쉽게 넘어감.
#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 실제 누구인지 불명확하다는 점 :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일찍부터 유명했다는데 대해서는 수많은 증언이 있으나 당시 기록으로는 그에 해당할만한 실존인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김일성 장군에 대한 반전설적 소문들은 단순히 조선인들의 희망의 반영일 수도 있고, 단천출신 의병장 [[김일성 (1888년)|김일성(金一成, 1888~1926)]] 장군이나 또는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2%BD%EC%B2%9C_(1888%EB%85%84) 김경천(金擎天, 1888~1942)] 장군의 이야기가 시발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무명이었던 북한 김일성이 실제 누구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이름이 유명한 그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했으므로 가짜인 것은 변함없다.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지 명확했다면 북한 김일성이 그 사람 행세를 할 수 없었을 것이나, 누구인지 애매하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참고 : [[김일성 (동명이인)]]''']
# 1970년 이후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것이 알려지자 이를 근거로 그가 진짜라 주장하는 논리 왜곡이 일어남. (그가 가짜라는 주장은 1920년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때문에 나온 것이며,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은 알지도 못했고, [[보천보 사건]]도 잊혀졌으며, 이런 일들은 그가 가짜라는 말을 듣는 사정과 무관함. 후대의 연구자들이 해방당시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많은 연구를 통해 나중에야 알게된 사안을 근거로 김일성이 가짜 아닌 진짜라고 하는 것은 넌센스임.)
# 1990년대에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파일:1937-06-05 보천보사건 동아일보 호외.jpg|동아일보 호외]]가 발굴되면서 이 호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일시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 나오고,<ref name="sds"/> 이것이 사실인양  통용됨. (이것은 북한 김일성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고안해낸 거짓 주장이다.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은 물론이고 호외 간행사실조차 잊혀져 이를 거론하는 사람도 없었고,<ref name="pcp"/> 이때문에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며,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도 다른 사람이다. 잊혀졌던 보천보 사건이 나중에 유명해진 건 북한 김일성 집권 후 자신의 항일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임.)
# 외국 명문대에서 연구한 학자들의 잘못된 연구가 그들의 명성과 권위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이명영, 김창순, 허동찬 등의 연구는 배척당함.
# 좌경화 된 사회 분위기, 운동권이 주류로 부상 - 좌경화된 신진 학자들이 등장하여 김일성이 진짜라 주장.
# 좌경화된 언론의 김일성 미화 찬양과 가짜설 배척<ref>[https://www.youtube.com/watch?v=wHbGK7QTeYE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8회 -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MBC 2002-02-03 방영</ref><ref>[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3-0571&program_id=PS-2020011808-01-000&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sub_code=08 <nowiki>[KBS 역사저널 그날 257회]</nowiki>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KBS 2020.03.24 방송</ref>
# 반공을 폄하 - 해방직후부터 가짜로 알려진 [[김일성]]을 반공 시대에 가짜로 만들었다고 왜곡.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후 반공 교육을 받은 세대가 아니라 해방전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북한 김일성과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퍼진 것임.
# 친일파 논란 부활 - 박정희에 대한 친일파 몰이,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미화 - 김일성 가짜론자를 친일파로 몰기.<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66283 "김일성은 가짜"…'친일파 꿀꿀이' 소리는 이젠 그만!] 프레시안 2011.05.08</ref>
# 한국 지식인들이 [[김일성]]보다 [[이승만]], [[박정희]]를 더 불신하는 풍조의 유행 - "독재자이자 친일파(?)" [[이승만]], [[박정희]]라면 "항일영웅(?)"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미신(迷信)을 전파.
 
김일성이 진짜라는 학자들의 핵심 논리가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정확한 사정을 모르거나 무시한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고, 부수되는 주장도 김일성 가짜설 연구에 대한 사실 검증이 아니라 주로 한국의 과거 정권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나 연구자에 대한 인신공격에 지나지 않지만 변화된 세태에서는 검증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이 10월 14일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현장에서부터 나온 것으로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미군정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들로 확인 가능하다. 하지만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그가 가짜로 몰리는 책임을 엉뚱하게 이승만, 박정희와 그가 가짜가 맞다고 한 연구자들에게로 돌리고 그들을 인신공격하는 방식으로 가짜론을 비판해왔고, 불행히도 그것이 잘 먹혀들어 오늘날처럼 가짜를 진짜로 뒤집어 놓는데 성공하고 있다.
 
===동아일보 호외 하나로 북한 김일성의 보천보 신화 날조===
[[보천보 사건]] 이튿날인 1937년 6월 5일에 동아일보는 2차례 호외를 간행하며 보도했고, [[조선일보]]도 호외를 간행했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706060023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7-06-06&officeId=00023&pageNo=2&printNo=5768&publishType=00020 共軍大部隊 越境襲來(공군대부대 월경습래)] 조선일보 1937-06-06 석간(5일 토) 2면 : <font color="red">'''호외재록(號外再錄)'''</font></ref> 그러나 [[보천보 사건]]이 금방 잊혀진 것처럼<ref name="bo1">[[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정말 유명해졌나?|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정말 유명해졌나?]] 우남위키</ref><ref name="bo2">[[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해방후 남북한의 보천보 사건 관련 기록에 대한 검토|해방후 남북한의 보천보 사건 관련 기록에 대한 검토]] 우남위키</ref> 이런 호외 간행 사실도 곧 잊혀졌다.
 
* [[:파일:1937-06-05 보천보사건 동아일보 호외.jpg|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1]] / [[:파일:1937-06-05 보천보사건 동아일보 호외2.jpg|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2]]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득세하게 되자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파일:1937-06-05 보천보사건 동아일보 호외.jpg|동아일보 호외]] 때문에 김일성과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의 호외는 실물이 전하지 않고, 1990년 무렵 동아일보 호외 실물이 공개되자 비로소 일제시대에 북한 김일성이 유명해졌을만한 핑계거리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 [[:파일:보천보 호외 금판.jpg|김병관 동아일보 회장, 보천보 사건 호외 금판 김정일에게 선물]]  : 1998년 10월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8091200209103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9-12&officeId=00020&pageNo=3&printNo=23985&publishType=00010 북한의 보천보 현지에 전시된 보천보 사건 동아일보 호외] 동아일보 1998년 9월 12일 3면
 
동아일보 호외는 실물이 발굴되기 전에는 그 존재도 몰랐으니 그 때문에 보천보 사건이나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다는 말도 있을 수 없었다. 이 호외는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이 붐을 이루면서 웹상에 이미지가 올라와 유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고, 마치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 사람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또 보천보 사건으로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유명해졌다는 눈에 보이는 물적 증거로 이용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에 속아넘어가게 된다. 당시 조선일보 호외도 있었지만 실물이 전하지 않으니 오늘날 이 호외는 거론조차 되지도 않고 있다. 김일성 이름은 [[조선일보]] 아닌 [[동아일보]] 호외에 의해서만 유명해지란 법도 있는가?
 
일제시대에 신문들이 별 대단치 않은 일로도 호외를 간행하는 일은 자주 있었고,<ref>[https://www.donga.com/archive/newslibrary/list?m=extra 호외Zip : 동아일보 동아디지털아카이브]</ref> 호외의 파급력은 그다지 크지도 않았다. 국민 80%가 문맹인데다, 호외를 일시에 전국적으로 배포할 교통운송 수단도 없던 시절이니 서울 시내나 근교 정도에 배포되어 일부 사람들이나 보았을 정도였을 것이다. 또 호외를 봤다 해도 그냥 한번 봤다는 정도이지 수시로 발행되던 호외의 내용을 마음 속에 넣어두고 오랫동안 기억할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유사한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이나 [[독산사건]] 때도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그 사건의 주역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인 유명인물이 되는 일도 없었고, 오늘날 이런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다. 이런 사정이니 누가 그당시 호외가 간행되었다는 것까지 알겠는가?
 
동아일보 호외는 오늘날 이 때문에 김일성의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가장 유력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이 호외라면 대단한 일이 있을 때나 간행되고 파급력도 상당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악용해 대중을 속이는 사기적 주장이다.
 
실제로는 [[보천보 사건]]은 일과성 사건으로 금방 잊혀져 해방 당시에는 이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ref name="bo1"/><ref name="bo2"/> 1970년대에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학자들 사이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남한의 일반 대중들이 [[보천보 사건]]에 대해 알기 시작하는 것은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득세한 1990년대 이후의 일이며, 그들이 북한의 주장을 답습하여 [[보천보 사건]]을 엄청나게 의미있고 중요한 사건으로 과대포장하여 선전하는 바람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일부 남한의 교과서에도 이 사건이 나온다고 한다. 좌파들의 김일성 미화 노력이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더욱 한심한 일은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들이 수없이 발굴되었는데도 남한의 학계는 아직도 이를 철저히 숨기며 외면하고 있고, 대다수 언론도 지속적으로 북한 김일성을 보천보의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미 1974년에 이러한 사실을 처음 밝혔던 이명영에 대한 마녀사냥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한국에서 김일성을 연구한 다수 학자들이 고의성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부실한 연구로 북한 김일성의 진위 문제를 뒤집고 [[보천보 사건]]을 왜곡한 수준도 북한의 무차별 역사 조작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같다.


==김일성 가짜론 연구자에 대한 부당한 비판==
==김일성 가짜론 연구자에 대한 부당한 비판==


* 이명영이나 허동찬은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주범이 아니며, 그들의 항일연군 김일성에 대한 연구는 일부 오류도 있지만 일방적인 비판과 달리 상당한 진실을 밝힌 선구적 업적이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 아닌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은 이명영이 김일성이 가짜로 조작하는 연구를 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일본군(실제로는 만주군) 출신 [[박정희]]가 항일투쟁한 [[김일성]]에게 컴플렉스를 느껴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거나, 이명영이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말까지 한다. 물론 아무 근거 제시는 없다. 이들은 맘에 들지 않는 박정희와 이명영을 동시에 비방하는 방법으로 김일성에게 가짜 멍에를 벗겨 미화하고 있다.
 
이명영의 김일성 연구는 그가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할 때 "재만한인공산주의 운동연구(在滿 韓人共産主義運動 硏究, 1975년 2월)"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진행한 것이다. 당시는 교수들도 박사학위가 없는 사람이 다수였다. 1974년 간행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의 서문에는 연구를 지원해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재용]] 회장의 조부)과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홍석현]] 회장의 부친)에게 감사한다는 말이 나오므로, 그의 연구는 중앙정보부가 지원한 것이 아니다. 중앙정보부가 박사학위 논문 쓰는데까지 지원을 하는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이명영이 소속된 성균관 대학의 재단 이사장이었고,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은 그의 사돈이며, 이명영의 연구는 출판되기 전에 1974년 봄부터 가을까지 [[중앙일보]]에 먼저 연재되었다.[《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 그 전설, 실존, 도명을 밝힌다》, 1974.03.23 ~ 1974.09.03의 기간에 중앙일보에 연재 (총 53회)<ref>[https://joongang.co.kr/article/1372334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 역사로 벗기는 김성주의 가면 (연재 예고)] 중앙일보 1974.03.23 종합 1면<br>
[https://joongang.co.kr/article/1372428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회) 서장 - 5인의 「김일성」] 중앙일보 1974.03.25 종합 3면<br>[https://joongang.co.kr/article/1385313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53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중앙일보 1974.09.03 종합 3면</ref>] 이런 관계를 봐도 이명영의 연구는 삼성그룹이나 중앙일보의 지원을 받은 것이며, 중앙정보부나 박정희 정권이 개입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악의적 비방이다. 1970년대 초에는 정부가 대학에 연구비 지원을 할 여력이 없던 시대이고, 대학의 연구활동도 활성화 되기 전이다. [[김일성]]의 가짜 멍에를 벗겨주기 위해 해당 연구자와 당시 대통령까지 엮어서 음해하는 것은 후배 연구자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대통령이면 국내외에서 닥치는 온갖 어려운 문제를 안고 씨름해야 하는 자리이다. 이명영이 김일성 연구를 진행하던 1970년대 초에는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공방문으로 갑자기 미중 화해무드가 조성되었다. [[6.25]]참전으로 [[김일성]]을 살려내고 통일을 가로막았던 중공은 당시까지 한국과 미국의 주적이었는데 갑작스런 미중화해 무드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을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남북적십자 회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 김일성 면담 등으로 남북 대화도 시도하고, 미군철수에 대비하여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도 추진하고, 월남전 문제도 있고, 국내 경제 문제도 있고....국내외의 온갖 어려운 문제에 대처해야하는 대통령이 한가하게 [[김일성]]에게 컴플렉스를 느낄 시간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박정희]]의 마음속에 들어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런 추정을 하면 사실이 되는가?
 
남북대화를 시도하던 정국에서 정부나 남북문제 담당 핵심부서 중앙정보부가 뜬금없이 갑자기 김일성을 가짜로 만드는 연구를 하라고 지원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발한 발상이긴 하다. 친일파 논란은 [[6.25]] 때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겪은 후로 사라져 1970년대엔 박정희를 독재자라 공격하는 사람은 있어도 친일파라 공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일파 논란은 [[노무현]] 정권 때 좌파들이 이전 정권을 공격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되살려냈으며 실제 목표는 박정희 친일파 낙인찍기였다. 실제로는 그런 공격을 주도하던 좌파 정당에 친일파 후손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드러나 망신을 사기도 했다.
 
===이명영이 중앙정보부 요원?===
지금은 수정되었지만 신복룡은 아래 글의 최초판에서 김일성이 진짜라고 하면서, 가짜라는 연구를 한 이명영을 중앙정보부 요원이라고 하였다.
*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3&nNewsNumb=002367100015 <nowiki>[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nowiki> ⑩ 김일성 신화의 진실①] [주간조선 2367호] 2015.07.27
: 청년 마르크시스트의 탄생 : “김일성은 가짜” vs “가짜가 아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이명영 교수 유족들로부터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던 것같다. 이후 이에 대한 사과의 글을 올렸지만, 그는 김일성이 진짜라는 신념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같다.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374100005&ctcd=C02 <nowiki>[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nowiki> 이념과 사실 사이, 못다한 이야기 : 연재의 반환점을 돌며] [주간조선 2374호] 2015.09.14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인용문|김일성 가짜 논쟁<br>
 
김일성 편(11회)의 글이 나간 다음 나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의 소감에는 “아슬아슬하다”는 글이 많은데 드디어 사고가 났다. 곧 “김일성은 가짜라고 일관되게 주장한 성균관대학교 이명영 교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구절이 필화(筆禍)가 됐다. 정확히 말해서 이명영 교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아니었는데 일부 항간에서 오고 가던 이야기와 인터넷에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확인하지 않고 쓴 것이 나의 실수였다. 유족의 입장에서 볼 때 선대가 한때 억압 구조라는 오명을 썼던 중앙정보부의 요원이었다는 기록에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망자명예훼손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br>
 
인터넷에 오르내리던 기사에 따르면, 이명영 교수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주장의 발설자는 성공회대학교 [[한홍구|한홍구(韓洪九)]] 교수로 알려져 있다.<ref>(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gkaqor&folder=1&list_id=5450847·검색일 2015년 8월 8일)</ref>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한홍구]] 교수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 2편’(한겨레신문사·143쪽)에서 “김일성의 가짜설을 주장한 이명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에서 기획관으로 근무했는데 그때 공보실장이 이후락(李厚洛)이었다”고 기록했을 뿐 이명영 교수가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시절은 이후락이라면 중앙정보부를 연상하던 시절이어서 한홍구 교수의 글이 마치 “이명영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말로 확대되어 와전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 사건은 내가 사려 깊지 못해서 벌어진 실수이니 남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내가 사과와 정정 기사를 싣는 것으로 매듭이 지어졌지만 그때는 많이 힘들었다.}}
이명영은 [[5.16]] 직후 1963년 이후락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李厚洛 最高會議 公報室長) 밑에서 공보실기획관(公報室企劃官)을 한 것은 당시 신문 기사에서 확인이 된다.<ref>[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3041600329202020&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3-04-16&officeId=00032&pageNo=2&printNo=5375&publishType=00020 對政府聲明(대정부성명)에 알쏭 달쏭] 1963.04.16 경향신문 2면</ref> 이후 이명영이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며 1970년대 초 김일성에 대한 연구를 할 때 자료수집을 위해 일본도 왕래하던 시절에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당시 남북대화를 주관하며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도 만나고,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도 여는 등의 바쁜 시기에 뜬금없이 연락도 끊어졌을 왕년의 부하직원 이명영을 찾아서 김일성 가짜 연구를 하라고 돈을 지원했겠는가? 아직 당시 문서가 공개 되지는 않았지만,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 그의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는 말을 했다고 하며,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함께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명영 등의 김일성 연구에 대한 업적===
* 이명영이나 허동찬은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주역이 아니며, 그들의 항일연군 김일성에 대한 연구는 일부 오류도 있지만 일방적인 비판과 달리 상당한 진실을 밝힌 선구적 업적이다.


* 이명영의 연구가 없었더라도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은 해방직후부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므로 정확한 진상을 밝힐 필요는 있었다.
* 이명영의 연구가 없었더라도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은 해방직후부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므로 정확한 진상을 밝힐 필요는 있었다.


* 후대 연구자들이 북한 김일성은 진짜가 맞고, 6사장 김일성은 전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김일성 연구를 오히려 퇴보시켰다.
* 후대 연구자들이 북한 김일성은 진짜가 맞고, 6사장 김일성은 전사하지 않았고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여 김일성 연구를 오히려 퇴보시켰다.


* 이명영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 북한 김일성의 유격대 투신 이전 행적을 당시 생존해 있던 증인들을 통해 상당히 많이 밝혔고, 이는 중요한 업적이다. 일부는 나중에 당시 기록의 발견으로 사실로 입증되기도 했다.
* 이명영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 북한 김일성의 유격대 투신 이전 행적을 당시 생존해 있던 증인들을 통해 상당히 많이 밝혔고, 이는 중요한 업적이다. 일부는 나중에 당시 기록의 발견으로 사실로 입증되기도 했다.
177번째 줄: 458번째 줄:
* 이명영이 아니었으면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6사장의 전사 사실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 되었지만 곧 잊혀져서 후대 사람들은 그런 일을 알지 못했다.
* 이명영이 아니었으면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6사장의 전사 사실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 되었지만 곧 잊혀져서 후대 사람들은 그런 일을 알지 못했다.


*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기 때문에 진짜라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삼는 문제의 [[:파일:1939-09-사상휘보-6사장 김일성 신원.pdf|≪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기록을 1977년에 처음 찾아낸 사람은 김일성 가짜론자의 한 사람인 [https://ko.wikipedia.org/wiki/김창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전 북한연구소 이사장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김창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kwd=#viewKey=CNTS-00056677221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만주(滿洲) 게릴라 조직(組織)과 한인대원(韓人隊員)에 관(關)한 연구(硏究)』], 북한학보 제1집 (북한연구소 1977년) p.79</ref>
*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기 때문에 진짜라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삼는 문제의 [[:파일:1939-09-사상휘보-6사장 김일성 신원.pdf|≪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1939.09.01)]] 기록을 1977년에 처음 찾아낸 사람은 김일성 가짜론자의 한 사람인 [https://ko.wikipedia.org/wiki/김창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전 북한연구소 이사장이다.<ref>[https://ko.wikipedia.org/wiki/김창순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56677221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만주(滿洲) 게릴라 조직(組織)과 한인대원(韓人隊員)에 관(關)한 연구(硏究)』], 북한학보 제1집 (북한연구소 1977년) p.79</ref>


* 김창순은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이 맞다고 하였다. 하지만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으므로 가짜라는 입장은 견지했다.  
* 김창순은 위 기록에 근거해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이 맞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으므로 가짜라는 입장은 견지했다.<ref name="kimcs"/><ref name="kimcs1"/>
{{인용문| 근래 '김일성 연구가‘로 자처하는 정치역사학자들 가운데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普天堡) 습격사건의 주인공이다 아니다‘로써 진짜 김일성(金日成)이다 아니다를 가리려고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 金日成은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ref>韓昇助 外共著,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螢雪出版社, 1990), 제5장 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金日成 / 金昌順 : p.167<br>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kwd=#viewKey=CNTS-00056659619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북한연구소, 2004.06) p.170</ref><br>
{{인용문| 근래 '김일성 연구가‘로 자처하는 정치역사학자들 가운데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普天堡) 습격사건의 주인공이다 아니다‘로써 진짜 김일성(金日成)이다 아니다를 가리려고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 金日成은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ref name="kimcs">韓昇助 外共著,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螢雪出版社, 1990), 제5장 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金日成 / 金昌順 : p.167</ref><ref name="kimcs1">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56659619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북한연구소, 2004.06) p.170</ref><br>
'''[주]''' <small>[[보천보 사건|보천보습격사건]]의 주인공은 [[6사장 김일성]]이다.</small>}}
'''[주]''' <small>[[보천보 사건|보천보습격사건]]의 주인공은 [[6사장 김일성]]이다.</small>}}
:그가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의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맞다고 하고,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데 가장 요긴한 사상휘보 자료를 발굴해낸 때문인지 같은 김일성 가짜론자임에도 비판의 표적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의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맞다고 하고,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데 가장 요긴한 사상휘보 자료를 발굴해낸 때문인지 같은 김일성 가짜론자임에도 비판의 표적이 되지는 않았다.
: <u>김일성 진짜론이 잘못된 논증(허수아비 논증)이라는 것을 지적한 사람은 김창순 뿐인 것같다.</u>
* 김창순의 언명에서 보듯이 김일성 진위문제와 6사장 및 제2방면군장 문제는 서로 별개의 것이지만, 이명영이 1974년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에서 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후로 후대의 연구자들이 이 별개의 사안들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서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며 이명영을 공격하였다. 이 바람에 김일성 진위문제 논란에 혼선이 일어나고,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으므로 가짜 아닌 진짜라는 허수아비 논증의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 불행히도 이런 오류 논증이 오늘날 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북한 김일성은 6사장도 아니고, 따라서 [[보천보 사건]]의 주역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명영의 주장과 달리 제2방면군장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밝혀진다.
위에서 본대로 지금까지 온갖 비난과 인신공격의 촛점이 되었던 이명영의 김일성 연구가 모두 맞는 것은 아닐지라도 실제로는 후대의 [[서대숙]], [[와다 하루키]]는 물론 어느 누구의 연구보다도 더 진실에 근접해 있었다는 것이 이제는 확실히 드러난다.


* 김창순의 입장에서 보듯이 김일성 진위문제와 6사장 및 제2방면군장 문제는 서로 별개의 것이지만, 이명영이 1974년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에서 이 문제들을 모두 다룬 이후로 후대의 연구자들이 이 별개의 사안들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서 이명영을 공격하며 김일성 진위문제를 논하는 바람에 혼란이 일어났다. 그 결과 허수아비 논증의 문제가 생겨난 것이지만 불행히도 이런 오류가 오늘날 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오늘날 학계에는 교묘한 말로 [[김일성]]의 사기행각을 변호해주면서 욕은 [[이승만]], [[박정희]]가 얻어먹게 만드는 교활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고, 이들의 말에 속아넘어가서 이런 허위 주장을 사실로 알고 선전해 주는 사람도 널려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반공 때문에 김일성이 가짜라 교육했다는 것은 사실무근==
==반공 때문에 김일성이 가짜라 교육했다는 것은 사실무근==
많은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과거 남한 정부가 반공 정책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으로 김일성 미화와 남한 과거 정부에 대한 폄하를 동시에 노린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과거 남한 정부가 반공 정책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으로 김일성 미화와 남한 과거 정부에 대한 폄하를 동시에 노린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공교육은 [[6.25]] 전쟁 이후에 강화된 것으로, 참혹한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때라 북한과 김일성,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교육을 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교육의 주된 내용은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거나 남침의 주범이라는 측면에서 비판했고, 그가 가짜라는 말은 당시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울러 북한이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유가 없고, 인민들은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이는 상당한 진실을 반영한 것으로 억지 주장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미군정]]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당시에 그를 가짜로 기록한 문헌도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일제시대에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세대들은 직관적으로 그가 가짜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으며, 후일의 한국정부가 그를 폄하하기 위해 고의로 가짜로 조작한 것이 아니다. 해방 직후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을 보고 가짜라고 한 사람들은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지 해방 후 반공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해방전 세대들이 퇴장하고 일제시대에 전설의 김일성 장군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해방후 세대로 교체되자 오히려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이 힘을 잃어갔다.
 
반공교육은 [[6.25]] 전쟁 이후에 강화된 것으로, 참혹한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때라 북한과 김일성,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교육을 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교육의 주된 내용은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거나 남침의 주범이라는 면에서 비판했고, 아울러 북한이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유가 없고, 인민들은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이는 상당한 진실을 반영한 것으로 근거없는 억지 주장이 아니다.  
 
해마다 6월 25일 무렵에는 학교에서 「상기(想起)하자 [[6.25]]」라는 구호도 내걸고, 반공 포스터 그리기나 반공 웅변대회 같은 것을 개최하기도했지만, 전쟁 직후이고 냉전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판할 일이 못된다.
 
김일성 가짜라는 말은 당시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것은 심지어 북한 [[김일성]]이 항일영웅이라며 미화에 앞장선 [[한홍구]]도 인정한다.<ref>[https://blog.naver.com/smallnews/22558748 한홍구, 이승환, 김일성 가짜설의 생산구조와 그 의미]</ref>
{{인용문|이남의 교과서에 실려 있지는 않으나 실제로 이남의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이 행해졌고 남북관계가 새롭게 변한 지금도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고 믿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학교에서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교육이 행해졌다는 것은 자신이 당시 전국의 교실마다 지켜보지 않았던 이상 알 수 없는 일인데도 [[한홍구]]는 아무 근거 제시도 없이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근본 이유는 [[소련 군정|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국내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진지첸 대위를 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북한의 지도자로 만드는 공작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데에 있다. <u>과거 반공 시대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며 그의 가장 아픈 곳을 비판했지만, 오늘날에는 김일성 미화풍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고, 김일성이 마치 항일투쟁의 영웅이라 북한주민들이 그를 지도자로 선택한 것인양 선전되고 있다.</u>
 
당시의 반공교육보다는 오히려 오늘날의 김일성 미화와 한국의 과거 대통령들에 대한 지나친 폄하가 문제다. [[김일성]]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라는 국가를 자기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어 인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 체제로 건국하고 적화를 막아낸 주역이고, [[박정희]]는 한국의 경제적 발전의 기반을 닦은 주역이므로 일부 잘못이 있었다해도 그들의 공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반공 정책과 반공 교육은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6.25]] 전쟁의 막대한 참화를 겪고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그 이전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오늘날 반공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한국이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도 이러한 강력한 반공정책 덕분이다. 한국과 달리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펼치지 못한 월남(남베트남)은 월맹(북베트남)군의 공격에 의해서보다는 내부에 형성된 월맹의 조종을 받는 지하 조직 [[베트콩]]의 준동에 의해 자멸한 측면이 더 크다. 부패한 관료들이 베트콩과 내통하며 미군이 지원해준 무기들을 베트콩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한국이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치지 않고, 남한내 북한을 추종하는 지하조직이 생성되는 것을 엄격히 막지 않았더라면 베트콩과 유사한 조직들이 생겨나 월남과 동일한 길로 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김일성의 진실을 밝힌다며 객관성을 가장하여 김일성을 찬양하는 사례==
===MBC의 김일성 찬양 프로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2002년===
2002년 2월 3일 방영된 아래 MBC 프로는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을 밝힌다며 겉으로는 객관적인 척 가장하고 있으나, 주요 해설자로 대표적 김일성 찬양론자인 [[한홍구]], 이종석, 동경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를 등장시켜 허수아비 논증에 바탕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김일성 미화 목적의 프로그램인 것을 웅변해 준다.
 
<blockquote>
{| class="wikitable"
|-
|style="padding: 15px"|* [https://www.youtube.com/watch?v=wHbGK7QTeYE <nowiki>[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nowiki>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MBC 2002년 2월 3일 밤 11시 25분 방영 : youtube
|}
</blockquote>
 
이 프로그램 제작자는 이명영의 연구 자체를 놓고 진실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연구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나왔다는 것을 부각시켜 박정희와 이명영을 함께 비방하며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조작된 연구로 몰아가고 있다. 1950~60년대에는 가난하던 시절 전쟁을 겪고 전후복구와 먹고 살기에 빠듯하던 시절이었고,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가던 1970년대에야 비로소 [[김일성]]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고, 이때부터 [[김일성]]의 실체와 [[동북항일연군]]이나 [[보천보 사건]]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이런 일을 두고 정부에서 어용학자를 동원해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교 교육시켰다고 억지를 부린다면 연구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인가? 이제와서야 명백히 밝혀지지만 당시 이명영의 연구가 그 후의 다른 어느 사람의 연구보다 더 진실에 근접해 있었고, 이명영을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정권의 앞잡이"라며 비방한 그 후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김일성 연구를 오히려 퇴보시켰다.
 
*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02013180141 "김일성은 항일투쟁 영웅인가"..MBC, 김일성 항일투쟁 실상 조명] 한국경제 2006.04.02
{{인용문|1945년 10월14일 평양환영대회에 소련군들과 함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오랜 항일투쟁을 해온 전설적 장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어 군중들은 김일성이 가짜라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u>''김일성 가짜설''은 박정희 정권시절 ''이명영''이라는 학자에 의해 본격 제기됐다.</u> 그는 북한의 김일성은 보천보 습격 사건을 이끈 독립운동가 김일성과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u>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복무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의 항일경력을 부담스러워해서 ''김일성 가짜설''이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돌았다.</u> 제작진은 김일성의 항일운동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 현지 취재를 통해 중요 시기별로 김일성의 유격 활동 흔적을 확인했다.}}
 
* [https://www.joongang.co.kr/article/4220303#home '가짜 김일성론' 진짜 따진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중앙일보 2002.02.01
{{인용문|연출을 맡은 곽동국 PD는 "논란이 많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의 실체를 밝혔으며 <u>유신시절에 왜, 어떤 배경에서 가짜 김일성론이 유포됐는지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u>}}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 시청자들은 이런 프로에 의해 은연중에 세뇌되어 김일성을 찬양하며, 박정희와 이명영을 비난하게 된다. 가짜 [[김일성]]을 엉터리 수법으로 진짜로 둔갑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관계없는 [[박정희]] 전대통령까지 끌어들여 욕보이는 고약한 프로그램이다.
 
===KBS의 김일성 찬양 프로그램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 2020년===
KBS도 2020년 3월 24일에 방영된 "[역사저널 그날 257회]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일성에 대한 방송을 했는데, 찬양 정도가 18년전의 MBC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심해졌다. [[보천보 사건]]을 엄청나게 유명하며, 의미있고 중요한 사건으로 미화하는데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그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고, 북한 김일성이 그 주역인 것처럼 주장한다. [[김일성]]이 마치 [[보천보 사건]]으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해방후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것처럼 호도한다.
 
<blockquote>
{| class="wikitable"
|-
|style="padding: 15px"|*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3-0571&program_id=PS-2020011808-01-000&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section_sub_code=08 <nowiki>[KBS 역사저널 그날 257회]</nowiki>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KBS 2020년 3월 24일 (화) 밤 10시, KBS 1TV
|}
</blockquote>
* [https://mylovekbs.kbs.co.kr/index.html?source=mylovekbs&sname=mylovekbs&stype=magazine&contents_id=70000000334251 역사저널 그날 (1TV, 3월 24일)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mylovekbs 2020.02.20 : 방송공지
* [https://voda.donga.com/view/3/all/39/2018996/1 <nowiki>[KBS 역사저널 그날 257회]</nowiki>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KBS 2020.03.24 방송 : 동아일보 VODA
 
==김일성 항일투쟁 미화의 죄악==
 
한국인들의 항일투쟁 때문에 해방이 된 것도 아닌 이상 일제시대 누가 어떤 항일투쟁을 더 많이 했느냐로 권력다툼을 벌이는 것보다는 해방 후 과연 어떤 체제로 나라를 만들어가야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부강한 나라가 되고, 국민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살겠는가 하는 것이 몇 만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주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체제로 집권한 [[김일성]]의 북한은 철저히 실패한 국가로 전락한 반면에 자유민주체제로 건국한 한국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에 자랑할만한 모범사례가 되었다.
 
해방 후 80년이 다된 오늘날까지도 <u>항일투쟁만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최고 가치인 양 떠받들고 다른 가치는 무시한다면 [[김일성]]과 같이 자기능력이 아니라 소련의 괴뢰로 선택되어 집권한 "최악의 항일팔이 사기꾼"에게 나라도 주권(主權)도 자유도 다 빼앗기고 노예로 살게 된다.</u>
 
가난한 집안 출신 [[박정희]]가 돈 없이도 다닐 수 있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선진문물을 배우고 익히지 않고, [[김일성]]처럼 배운 것도 없이 만주산야에서 비적질인지 항일투쟁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일이나 하고 다녔다면 오늘날과 같은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와 [[김일성]]의 차이가 오늘날 남북한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전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도자로서 한 일을 가지고 해야지, 아무 영향력도 없던 지도자가 되기 전 일제시대의 일로 평가하려드는 것은 기준이 전도된 것이다. [[히틀러]]에 대한 평가를 지도자가 되기전 화가 지망생 시절의 일로 하려는 사람은 없다.
 
[[김일성]]은 항일투쟁을 했는데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 친일파니 북한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탈북자들도 많이 보았다. 그 사람들은 왜 더 정통성이 있는 북한에 살지 않고 굳이 힘들여 탈북해서 정통성이 없는 남한으로 와 사는지 모를 일이다. 모르고 왔다면 알게 된 지금은 북한으로 돌아가는 건 탈북보다 훨씬 더 쉬운데 가지도 않는다. 이들은 한국 국민들이 뽑은 지도자는 정통성이 없고, 소련 [[스탈린]]의 임명을 받은 지도자라야 정통성이 있다고 하는 셈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탈북자는 남한의 자유와 경제적 풍요는 누리고싶지만, 내심으로는 자신들 마음의 조국 북한이 남한보다 더 정통성이 있다고 믿고싶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김일성이 가짜라거나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괴뢰)라는 사실은 절대로 인정하기 싫고, 항일투쟁의 영웅(?) 김일성이 친일파(?) 남한의 지도자들보다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문을 외우는 것 아니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김일성]]에 대한 뿌리깊은 노예근성은 못버리는 것같다.
 
비적질과 구분하기도 힘든 김일성의 만주 항일투쟁이 도대체 북한주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된 게 있다고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장악한 최고권력을 대대로 물려가며 주민들을 노예로 잡고 부리는가? 북한은 해방된 적이 없고, 주민들을 속이는 해방되었다는 허위선전만 있다. 북한의 억압자는 일본에서 소련군을 거쳐 소련의 괴뢰로 집권한 김일성 일족으로 바뀌기만 했을 뿐이다. [[김일성]]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소위 항일무장투쟁은 북한 주민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된 것은 전무하고,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부당하게 얻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나 이용될 뿐이다.
 
이런 김일성을 옹호하지 못해 안달인 남한의 학자연(學者然)하는 사람들도 한심하다. [[김일성]] 일족 치하의 북한 주민들의 삶이 일제시대보다 오히려 훨씬 더 못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이라도 하게 될 것이다.
 
==결론==
해방 직후 소련군이 평양에 데려와 김일성 장군이라며 대중앞에 내세운 [[진지첸]]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는 국내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릴 때의 김성주를 기억하는 그의 고향 마을 사람들도 그가 어디서 무얼하다 와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처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가짜 김일성 장군이라는 말이 나돌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김일성과 동시대 사람들 대다수는 그렇게 믿었고, 여기에 아무 잘못도 없다.
 
물론 서울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에서 김일성 가짜론을 반박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지만,<ref>[[:파일:1946-04-08-해방일보-김일성-권용호.jpg|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상)]]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4월 8일</ref><ref>[[:파일:1946-04-09-해방일보-김일성-권용호.jpg|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하)]]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4월 9일</ref> 기사를 보면 김일성이 실제 어디서 무얼하다 왔는지 구체적 내용은 없고 그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맞다면서 무조건적 찬양만 늘어놓아, 글 쓴 사람도 김일성의 실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박헌영]]이나 다른 공산당원들도 소련군이 데려온 [[진지첸]] 대위의 실체를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박헌영]]의 부하 [https://ko.wikipedia.org/wiki/이현상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도 외국에서 돌아온 김일성의 행적이 불분명하여 지도자로 적합하지 않다며 [https://ko.wikipedia.org/wiki/이상조_(1915년)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 등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ref name="parkkd">[[박갑동|박갑동(朴甲東, 1919~ )]],[https://joongang.co.kr/article/1351360 『내가 아는 박헌영』 (108회)] 중앙일보 1973.07.04 종합 5면<br>[[박갑동|박갑동(朴甲東, 1919~ )]],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828057 『박헌영(朴憲永)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서울, 인간사, 1983) p.190 : 위 중앙일보 연재물을 책으로 간행한 것임.</ref>
 
[[레베데프]] 소장 등 당시 [[소련 군정]] 인사들의 후일 증언으로 이제야 내막이 다 밝혀졌지만 국내에서 무명인사에다 지지세력도 없는 그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소련군이 그가 지명도 높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도록 한 것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그와 동시대에 국내에 살았던 한국인들에게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외국서 공부하고 연구한 몇몇 학자들이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의 한국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해 일본이나 중국 문헌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만 확인하고는 그가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주장하게 된다. 외국 명문 대학의 교수였던 그들의 권위 때문에 잘못된 주장이 학문적 엄정성(嚴正性)의 외피(外皮)를 입고 국내에 수입되고, 국내 다수의 신진학자들이 이를 확대 재생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일성]]을 가짜로 알던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 퇴장하자 후속 세대들은 어릴 때부터 북한 [[김일성]]에 익숙하고, 일제시대에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어 가짜 김일성은 오늘날 거의 진짜로 만들어져 있다.
 
이념적으로 친북 좌경화된 것으로 보이는 신진학자들은 [[김일성]]에게 가짜의 멍에를 벗겨주면서 동시에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 한국의 과거정권도 [[김일성 가짜설]]을 지어내고 이를 교육시켰다며 공격하는 묘수를 찾아내었다. 선배 학자들을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어용이라며 인신공격에 가깝게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도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적의을 느끼기 때문으로 보인다. 좌경화된 학계 분위기에서 과거 정부에 대한 공격은 별다른 검증도 거치지 않고 쉽게 사실로 인정받는 인기품목이다.
 
해방 직후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을 속였듯이 오늘날의 신진학자들은 그 김일성에게 엉터리 허수아비 논증으로 가짜의 멍에를 벗겨주어 또 한번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새로 발굴된 많은 자료들에 의해 북한 김일성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도 이를 학계에서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당분간은 그 동안의 잘못이 바로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이 끝까지 진실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을 겪은 당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널리 통용되던 상식이 한 세대 이상 지난 후대에 와서 정반대로 뒤집혀 있으니, 뒤집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이면에 불순한 목적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반드시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 미군정 시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두고 엉뚱하게 [[이승만]]과 [[박정희]] 등 한국 대통령들과 이명영 등 가짜 김일성 연구자들을 탓하며 비방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참고 자료==
* [https://www.hankookilbo.com/paoin?Page=2&SearchDate=19890815 본사 주최 한국독립전쟁사 국제학술회의 폐막] 한국일보 1989년 8월 15일 9면
:: 김일성 진위 싸고 시각차 여전
:: 조선인민해방군 부재(不在)엔 접근
 
* 허동찬(許東粲), [https://dl.nanet.go.kr/search/searchInnerDetail.do?controlNo=KINX1989027289  《서대숙(徐大肅) 교수의 「진짜 김일성론(金日成論)」에 오류있다》], 신동아(新東亞). 363(1989.12) pp.568-585, 동아일보사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9090700329210003&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9-07&officeId=00032&pageNo=10&printNo=13524&publishType=00020 "金日成(김일성)은 가짜""八路軍師長(팔로군사장)" 논란 여전] 1989.09.07 경향신문 10면
::북한 김일성의 일제시대 전력에 대해 이명영과 [[서대숙]], 이정식의 견해를 요약, 소개하고 있다.
 
* 韓昇助 外共著,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47872232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大邱 : 螢雪出版社, 1991),
:: 제5장 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金日成 / 金昌順


해마다 6월 25일 무렵에는 학교에서 반공 포스터 그리기나 반공 웅변대회 같은 것을 개최하기도했지만, 전쟁 직후이고 냉전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판할 일이 못된다.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71000239110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4-07-10&officeId=00023&pageNo=10&printNo=22739&publishType=00010 빨치산서 수령변신 「세계最長(최장) 독재자」  金日成(김일성)의 일대기 : 45년 蘇(소)군정 꼭두각시로 지도권 장악] 1994.07.10 조선일보 10면
::북한 김일성 사망 당시 그의 일제시대 전력에 대해 이명영과 [[서대숙]]의 견해를 요약, 소개하고 있다.


당시의 반공교육보다는 오히려 오늘날의 김일성 미화와 한국의 과거 대통령들에 대한 지나친 폄하가 문제다. [[김일성]]은 북한이라는 국가를 자기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어 인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 체제로 건국하고 적화를 막아낸 주역이고, [[박정희]]는 경제적 발전의 기반을 닦았으므로 일부 잘못이 있었다해도 그들의 공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pageNum=1&pageSize=30&srchTarget=total&kwd=CNTS-00056659619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북한연구소, 2004.06)


{{각주}}
{{각주}}

2023년 11월 6일 (월) 07:43 기준 최신판

김일성에 대해 무엇이 궁금한가요? →
김일성 관련 표제어 보기
김일성 (생애전반) 김일성 가짜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김일성 관련 원천사료 목록 김일성이 사용한 이름 김일성 진짜론 반박
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동명이인)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그가 평양의 대중들 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 나섰을 당시에 나온 것으로, 당시 33세의 청년이었던 그가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일제시대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 해방 후 평양에 나타난 33세의 북한 김일성을 처음보고 드러낸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반응이며, 누가 그를 가짜라고 교육시켜 퍼진 말이 아니다. 이런 말은 한국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미군정 시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소련군의 탄압을 받아 이러한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던 북한에서도 상당히 퍼져 있었다는 증거도 많다. 해방직후부터 1980년대까지도 한국인들 대다수가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가 가짜인 줄 직관적으로 알았던 일제시대와 해방 정국을 경험한 세대가 퇴장하는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정설로 인식되고 있다. 김일성 진짜론은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맞으며, 그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허수아비 논법에 해당하는 잘못된 논증이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도 알지 못했고, 보천보 사건도 잊혀져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거나 보천보 사건 주역이 아니라고 가짜라 한 것이 아니라, 나이로 보아 절대로 1920년대부터 유명했던 그 김일성 장군이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가짜라 한 것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당시 그가 오랜 외국생활로 국내 사정에 어둡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아 자력으로는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못 되었지만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지도자가 된 꼭두각시(괴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직결된다. 오늘날 친북화된 학계에서 그를 항일투쟁의 영웅이 맞다며 진짜로 둔갑시켜놓은 가장 큰 이유도 그에게 가짜라는 멍에를 벗겨줌과 동시에 그가 소련의 괴뢰가 아닌 항일투쟁의 영웅이라 북한주민들이 선택한 지도자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남한에서 과거와 달리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그를 진짜로 둔갑시킨 사람들의 목적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나아가 아무 근거도 없이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교육시켰다며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를 비난하는데까지 이른다. 일제시대 만주군 소위를 1년여 지낸 박정희를 거물 친일파로 몰아 항일영웅(?) 김일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고 교육시켰다고 비난하며, 한국보다는 북한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한국인들의 항일투쟁 때문에 해방이 된 것도 아닌데, 해방 후 80년이 다된 오늘날까지도 이런식으로 항일무장투쟁만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최고 가치인 양 떠받들고 다른 가치는 무시한다면 김일성과 같은 "최악의 항일팔이 사기꾼"에게 나라도 주권(主權)도 자유도 다 빼앗기고 노예로 살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공개된 소련 문헌들이나 평양 소련 군정 인사들의 후일 증언은 거꾸로 그가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철저히 소련이 만들어낸 지도자일 뿐, 항일투쟁의 영웅이라서 집권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소련 군정 3년간은 자신들이 88여단 등에서 5년간 교육시켜 데려온 꼭두각시 김일성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전면에 내세워 지도자 훈련을 시키며 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권력기반을 다져주는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집권 직후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이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스스로 소련의 앞잡이임을 숨기지 않았다.[1] 그러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후 중소 이념분쟁을 틈타 등거리 외교를 펼치면서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에서는 벗어났지만, 그의 집권 자체가 소련이 그를 꼭두각시(괴뢰)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변함없다. 사실 김일성의 진위 논란도 소련군이 국내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지지세력도 전무한 그를 꼭두각시 지도자로 내세우려다 보니 지도자가 될만한 유명한 이름의 주인공 행세를 하게한 때문에 파생된 부수적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소련 붕괴와 중국의 개방 후 나온 자료들과 옛 기록의 인터넷 DB 구축으로 발굴된 여러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 검토하면 북한 김일성은 처음 알려졌던대로 가짜가 맞으며,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아니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맞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수많은 자료들을 검토해야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핵심적인 사항만 요약해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김일성 가짜설의 기원과 배경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후 귀국한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들 앞에 나서 연설하던 그 장소에서 처음 터져나왔다. 대중들은 소련군이 데려온 진지첸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는데다 불과 33세인 그가 국내에서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말도 서투른데다[2] 본명이 김성주로 알려진 것도 그가 가짜라는 의심을 더하게 했다. 그가 가짜라는 말은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이 현장에서 보인 즉각적인 반응이었고, 누군가가 조작해낸 설이 아니다. 이런 말은 월남민들에 의해 짧은 시간에 남한에 퍼지게 된다. 그가 가짜라는 말이 단시일에 널리 확산된 것은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그가 가짜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하에서 은밀하게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3]

김일성이 대중앞에 처음 선보인지 불과 한달 뒤인 11월 중순의 미군정 기록에 벌써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는 그가 장차 북한의 지도자가 될지도 알 수 없던 때이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미군정 시기에 이미 많은 문헌에 그가 가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처럼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 나타난 그를 처음 본 대중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터져나와 퍼진 것으로, 한국정부가 수립되기도 이전의 일이며, 누군가가 일부러 지어내서 교육하고 퍼뜨려서 나온 말이 아니다. 레베데프 소장이나 다수의 소련군정 장교들과 유성철 등 해방 직후 북한 고위직에 있다 쫓겨나 소련 중국 등으로 망명한 인사들도 당시 평양 집회에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럼에도 후세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폄하하기 위해 그를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이는 터무니 없는 것이다.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

해방 직후 소련군이 평양에 데려온 진지첸 대위(자칭 김일성 장군)에 대해 대중들은 그가 어디서 무얼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전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실제로 썼는지 아닌지도 당연히 알 수 없었고, 그가 속했던 만주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지만 해방 당시에는 여러해 전 일이라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 진 것은 나중에 김일성이 집권하고 난 후 자신의 항일 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보천보 사건보다 조금 먼저 비슷하거나 더 큰 규모의 동흥사건(東興事件), 토성사건(土城事件), 독산사건(獨山事件) 등이 있었고, 이때도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며 크게 보도했지만 해방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이들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천보 사건도 해방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잊혀졌으며, 사건 당시 동아일보 등이 호외를 간행하여 항일연군의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4]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는 문맹율이 80%를 상회하고,[5] 인구 대다수가 사는 농어촌 지역은 교통이 불편해 신문 배달도 쉽지 않아 호외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김일성이 집권하여 그 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건도 유사한 다른 사건들처럼 계속 잊혀진 채 오늘날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남한에서 동북항일연군보천보 사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며 대중들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소련군 88여단에 대해 알게되는 것은 1990년 한소수교 이후 소련 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명확하지 않아 논쟁 중이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이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투쟁한 그 김일성이 맞으므로 진짜라고 주장하는 후대 연구자들의 가장 큰 병폐는 오랜 기간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나중에 알게된 사실들을 해방 당시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고 주장을 펴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북한정권 공식 출범 후부터 김일성의 항일투쟁이나 보천보 사건에 대해 본격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소속부대는 동북항일연군이 아닌 조작된 이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르고,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은 사건 5개월 뒤인 1937년 11월 13일 만주군과의 전투에서 사살 당했으며,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6]

북한 김일성이 해방 후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9월 19일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귀국하여 한달여간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 국내 사정을 살피며 잠행한 것도 자신이 국내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무명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평양 소련 군정에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총지휘한 레베데프 소장도 후일 당시 소련군 88여단의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대위(김일성)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증언했다.[7] 그가 국내에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것은 소련군 인사들이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Stalin was offered five groups of candidates for the role of leader of North Korea. There were agents of the Comintern sent to Korea back in 1920-1930, and Korean communists who had received special training in Yan'an, the headquarters of the Chinese communists, and local nationalist leaders, and Koreans - Soviet citizens, well checked by the NKVD, the main like the communists. Kim Il Sung was one of the fifth group - the leaders of the Korean guerrilla movement.
He was known as a military commander. Of all the candidates, Stalin (namely, he had the last word) chose an officer of the Soviet Army not known to the public - the battalion commander, Captain Jing Zhi Chen (an ethnic Korean who bore a Chinese name) - Kim Il Sung (Korean transcription of the name). The specified battalion was part of the 88th separate rifle brigade, which was then stationed near Khabarovsk.

해방 직후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록

1945년 8.15 해방부터 10월 14일 평양에 김일성이 출현하기 이전에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김일성이 어떠한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기록들에 나오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북한 김일성과는 거리가 멀고, 실존 인물 누구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들었다는 시기는 이르면 1919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며[8][9], 192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들었다는 사람은 많다.[10]

해방후 입북한 김일성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는 김일성 장군의 부하가 조선 국경을 순시하던 총독이 압록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내려갈 때 강 북편에서 저격한 일이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1924년 5월 조선 국경을 순시하며 압록강을 배를 타고 내려가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에 대한 저격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거사였지만 항간에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11] 북한 김일성이 알려지기 전에 나온 이 기사는 1924년에도 유명한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가 전파되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처럼 일찍부터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았기 때문에 해방 당시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 것이지,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처럼 그의 이름이 유명해서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다. 1920년에 김일성 장군의 나이가 25세 정도였다고 해도 해방 당시에는 50세는 넘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고 이때문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한 33세의 진지첸 대위가 가짜 소리를 듣는 것은 당연했다.

김일성 동생 김영주의 증언

북한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1920~2021)는 해방 직후 중국의 국민당 군대에서 이용상(李容相,1924∼2005) 시인과 9개월 가량 숙식을 함께하며 친하게 지냈는데, 그에게 "어릴 때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이 자기 형제들에게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는 증언을 했다. 즉 어린 김성주도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란 것이 분명하며, 이 때문에 1930년 말경부터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며 유명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참고 : 만주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만주에 살아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어떻게 알려져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항일연군의 김일성이 자신들 지역 인근에서 활동했다면 그의 이름을 자주 들었을 수 있으므로 진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해방 당시 국내에서 유명했던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이 생기기도 훨씬 이전인 1920년경부터 이름이 알려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같은 김일성이 아니다. 조선족들은 중국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조선인 항일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같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했던 북한 김일성으로 보인다. 그가 북한 지도자로 유력인물이 되었으므로 그에게 더욱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가 가짜라는 말에는 화를 내는 사람이 많다.[12]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이유

위에서 말한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은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므로 당연히 그에 대한 지지세력도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그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듣도보도 못한 온갖 정치공작들이 동원되었으며, 그가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게 한 것도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유명하나 실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진지첸 대위가 무명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그 이름을 사칭할 수 있었다. 김일성 장군이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이나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처럼 누구인지 실체가 분명했다면 이름을 사칭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사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실체가 없는 가상인물이고,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쓴 적이 있다고 해서 그가 진짜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일찍부터 유명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국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이 유명해지는데 진지첸이 기여한 바는 없다. 해방 당시 국내에서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는 그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이 그 유명한 인물인 것처럼 행세하며 지명도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는 여전히 가짜일 수 밖에 없다. 해방 후 평양에 오기 전에는 그가 어디에서도 장군이라 불린 적도 없고, 대위를 장군이라 칭하는 경우도 없다.

소련 군정 지휘자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

1945년 10월 14일 오후 1시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 대위"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뒷줄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이며, 그는 1991년 찾아간 한국 기자들에게 당시 진지첸 대위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정치공작을 총지휘했던 레베데프(1901~1992) 소장은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에 모스크바 자택으로 찾아간 한국의 중앙일보 기자들에게 김성주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내었다고 증언했다. 이 사안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레베데프 소장보다 하급자로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 수령 만들기 정치공작의 실무를 담당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Konovich Mekler, 1909~2006) 중좌나 레오니트 바신 (Leonid Vassin, 1915~2006) 소좌도 후일 북한 김일성이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사칭했다고 증언했다.[13]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김일성 연구자들은 30년 전에 나온 이런 증언은 절대로 언급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괜히 언급했다가 이런 증언이 있다는 사실이 더 널리 알려질 수도 있으니 철저히 숨기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공들여서 가짜 김일성을 진짜로 뒤집어 놓았는데 다시 가짜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증언에서도 보듯이 소련 군정 핵심 간부들과 진지첸 대위가 합작하여 가짜 김일성 장군을 만들어내었고, 그가 가짜라는 말도 1945년 10월 14일의 평양시 민중대회 데뷔 무대에서부터 퍼져나왔다는 것에 대해 논란할 여지도 없다. 하지만 엉터리 학자들이 그가 가짜라는 말이 퍼진 책임을 한국의 과거 정부에 뒤집어 씌우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학계 현실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북한 김일성 해방 당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말하다가도 그의 진위문제를 논할 때만은 보천보 사건 때문에 그의 이름이 유명해졌다고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도 아닌 것으로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려들지도 않는다.

소련군이 진지첸 대위와 88여단의 조선인들을 국내로 데려오지 않고 자유롭게 가고싶은 데로 가라고 했으면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아무 지지기반도 없는 그들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로 가서 조선족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소련군 배경이 없었다면 국내 사람들이 어디서 뭘 하다 온 누구인지도 모르는 진지첸 대위가 평양에 와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앞에 데뷔하는 10월 14일의 무대도 소련군이 자신들의 앞잡이로 선택한 그를 위해 연출해낸 것이고, 북한 지역에 그가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강압을 동원해 막아준 것도 소련군이다.

10월 13일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대회까지도 김영환이란 가명으로 행세

1945년 10월 13일에 《서북5도당 책임자 열성자 대회(西北五道黨 責任者熱誠者大會)》가 평양에서 열려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北部朝鮮分局) 설치(設置)를 결의한다. 김일성은 이 대회에서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으로 당조직문제에 대한 보고를 한다.[14] 이 대회에서 북조선분국 책임비서로는 김용범(金鎔範, 1902~1947)이 선출되었다.

이때까지도 김일성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별로 존재감이 없어 김영환(金永煥)이란 가명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국 책임자로 선출되지도 못했다. 그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도 아닐 뿐더러 처음에는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도 받지 못한 것이다.

김일성은 같은 해 말 12월 17일에야 김용범을 사퇴시키고 분국 책임비서로 되었다.[15]

김일성 등장 과정에 대한 하기와라 료(萩原遼)의 설명

해방 직후 김일성 등장 과정에 대해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히타(赤旗)』의 평양 특파원(平壌特派員)을 지낸 하기와라 료(萩原遼, 1937~2017)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는데 상당히 적절한 것 같다. 하기와라 료는 일본인이지만 평양에 거주해본 탓인지 김일성의 실체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합당한 평가를 내린 사람 중의 하나다.

  • 萩原遼, 『朝鮮戦争 金日成とマッカーサーの陰謀』(文藝春秋, 1993/12)
하기와라 료 지음; 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한국논단, 1995) pp.25~27.
소련군은 조선 점령을 원만히 하기 위해 그 손발이 되어 일하는 조선인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36년간이나 일본 식민지로 있으면서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조선인민의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항일투사라야 했었다.

김성주는 1912년 북부조선 평안남도 대동군의 비교적 부유한 소 부르주아 집안에 태어나 7세때 한방의사인 부친의 사업 형편으로 고향을 떠나 만주로 건너가 중국인 속에서 자라면서 중국인 학교에 다녀. 한국말 보다는 중국어를 더 잘했다.
1931년 19세 때에 중국공산당에 입당, 동당의 만주성 위원회의 지도 아래서 항일 유격투쟁을 했었다. 유격대 시절 전성기에는 200명 가량의 게릴라 대원을 거느리고 싸운 경험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중대장 정도의 실적밖에 안된다. 신생 조선의 지도자로 내세우기에도 경력이 너무나 빈약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꿔치기 극이다. 이 김성주 청년을. 시베리아에서 북만주, 동만주의 광야를 백마에 올라타고 달리며 일본군을 쳐부신 전설적 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내놓아 신생 조선의 수반으로서 점령행정을 추진하려고 생각한 꾀보가 평양의 소련군 사령부에 있었을 것이다.
88여단에는 그 밖에도 조선인 대원은 여러명 있었는데 왜 김성주가 그 역을 맡게 되었을까.
그가 만주시대부터 써온 가명이 김일성이었다. 이것은 1920년대 부터 조선민중 사이에 전설적으로 전해온 항일의 영웅 김일성 장군과 공교롭게도 음이 같다. 한자로 쓰면 동음인 金一星도 金日星도 金一成도 金日成도 된다. 거기에 착안한 모종의 모략적 사기가 꾸며진 것이 아닐까.
이 사술(詐術)의 배경설명으로 조선에서의 「김일성 장군 전설」에 관하여 말해 둘 필요가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그 5년전인 1905년 제2차 일한협약을 강제로 맺은 일본은 모든 한국군을 무장해제 하고 해산시켰다. 애국적 군인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조국을 뒤로하고 북만주, 동만주, 나아가서는 시베리아까지 근거지를 옮기면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했다.
그중에서 1920년대 부터 한사람의 용감한 항일투사의 이름이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 같이 국내에 까지 들려왔다. 김일성 장군이다. 고난에 시달린 식민지 하의 민중에게는 그 이름은 희망이며 광명이었다. 언젠가는 김일성 장군이 일본군을 쳐부수고 개선한다는 기도와도 같은 마음으로 기다렸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전설이 생기고 사람들 마음속에 새겨져 갔다.
김일성 장군이란 일찍이 실존한 항일투사의 한사람이기도 하고, 또한 복수의 투사의 집합명사 이기도 했다. 사실과 전설이 뒤섞여 만들어진 하나의 상(像)이었다. 그처럼 되어보려고 자기 이름을 김일성이라고 칭하는 자도 생겨났다. 김성주 청년도 그중의 하나였다.
김성주 청년이 신생 조선의 수반으로 뽑힌 또하나의 이유는 1945년까지의 수년간을 88여단에서 소련군인으로서 복무한 경험때문이다. 소련군 당국자는 그간 그를 충분히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는 88여단의 제7대대장을 지냈으며,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에 대한 충성도도 이미 인정받았었다. 나이도 1945년에는 33세가 됐으며 일 처리도 잘하는 젊음과 체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요령도 좋고 이해도 빨랐다. 소련 점령군으로서는 부려먹기 쉬운 존재였다. 다른 동료와 선배를 제쳐놓고 그가 발탁 되었다.
― 하기와라 료(萩原遼, 1937~2017) 지음; 최태순 옮김, 『한국전쟁』 (한국논단, 1995) pp.25~27

김일성이 비교적 부유한 소 부르주아 집안에 태어났다거나 88여단의 제7대대장을 지냈다는 등 약간의 사소한 오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제 사실에 부합하는 기술이다. (김일성의 외가는 비교적 부유한 소 부르주아 집안이라할 수 있겠지만 친가는 아니다. 88여단에서는 제1대대장을 지냈다.)

하기와라는 김성주가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도록 한 것은 소련군이 낸 꾀로 추정했는데, 레베데프 소장의 후일 증언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로 볼 수 있다. 또 그는 김일성 등장 과정을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로베레 장군」 (1959년 작)을 연상케 하는 바꿔치기 극이라 했다.[16]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 독일 레지스탕스 투쟁에서 전사한 이탈리아의 저항투쟁 지도자 로베레 장군의 대역으로 거리의 하찮은 사기꾼을 둔갑시키는 것이다.

김일성 진짜론은 허수아비 논법

  •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직후 그가 평양에 처음 나타났을 당시 어디서 무얼 하다 왔는지 전력을 전혀 알 수 없는 33세의 청년이 1920년경부터 국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일찍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그의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며, 그가 실제로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는지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는지 아닌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동북항일연군이나 거기서의 김일성의 활동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는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로 그가 가짜라는 말과는 무관하다.
  •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1로군 제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맞는지는 1974년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이 출간 된 후에 나온 새로운 쟁점이며, 해방 직후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부터 불거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논란과는 무관하다.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도 거기에 김일성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보천보 사건도 잊혀져 잘 몰랐다.
  • 후대의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쟁점들을 뒤섞어서 혼란스럽게 한 후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김일성이 맞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주장한다. 이는 "허수아비 논법(straw man argument)"[17]으로 논리적 오류이다.

일제시대에 전설적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의 출현을 직접 봤던 세대들은 직관적으로 그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김창순(金昌順, 1920~2007) 등의 1세대 북한 연구자들도 이 세대에 속하며, 자신들의 체험에 근거하여 김일성이 가짜라는 연구를 한 것이다. 더구나 김창순은 해방 후 북한에서 살다 6.25 때 월남하여 그가 김일성이 가짜라 한 것은 북한체험이 반영된 것이다. 이정식(李庭植)서대숙 등은 일제시대에 중국에서 살았고, 해방 후 한국에 잠간 머물다 미국으로 갔으므로 이러한 내막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 문헌만 보고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한 것이 맞으므로 진짜라는 주장을 내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와다 하루키도 비슷한 사례이다. 허동찬(許東粲, 1932 ~ )은 원래 일본의 조총련 소속으로 북한에 가서 김일성도 직접 만나본 적이 있지만 그들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일본에서 수많은 문헌을 뒤져 그가 가짜인 것을 밝히려 했다.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의 일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없는 이종석, 한홍구, 신주백 등 한국의 2세대 신진학자들은 1980년대말부터 서대숙, 와다 하루키 등 외국에서 연구한 학자들의 주장을 이어받아 이명영, 허동찬 등의 김일성 가짜론을 비판하며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을 확산시켰다.

체험적으로 김일성이 가짜라고 알았던 세대들이 퇴장하면서 후속세대들에는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이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되는 해방전후의 국내상황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있는 사람들의 연구는 배척당하고, 그런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피상적인 연구가 오늘날 대세로 자리잡은 것은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서울에 대해 언쟁을 벌이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이 그대로 들어맞는 꼴이다.

대다수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북한 김일성이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그 김일성이 맞으니 진짜가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대표적 오류 논리인 일종의 "허수아비 논법"이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 평양에 처음 나타난 33세의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전혀 맞지 않아서 나온 것으로, 그가 항일연군에서 무슨 투쟁을 했든 관계없는 일이다.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항일연군이 생겨나기도 전부터 이미 유명했다. 더구나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했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거기서 활동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진짜가 될 수는 없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김성보(金聖甫, 1962~ )의 주장을 보자.

오늘날 수많은 관련 문헌 자료가 공개되어 더 이상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가짜설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북한의 주장대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었다는 것도 이미 20여 년 전에 밝혀졌다. 김일성 가짜설이나 김일성의 독자적 항일무장투쟁설 모두 남북대립의 조건 속에서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거나 신화화된 주장임이 객관적 사실 확인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일단 드러난 객관적 사실은 북한의 역사서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히 공개된 뒤에 작성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김일성 스스로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계의 논의는 김일성의 항일운동 여부 자체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소속 한인들이 펼친 활동을 한국의 민족운동사 전체의 흐름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 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35~36

이는 북한 김일성이 해방직후부터 왜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외면하고,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무장투쟁을 한 것이 맞으니 진짜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역사학계 연구자들 대다수의 믿음이다.[18] 1990년 9월 한소 수교 직후 나온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등 소련 군정 인사들의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증언도 자신들의 믿음과 맞지 않으니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학계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표적 김일성 가짜론자인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이나 허동찬(許東粲, 1932 ~ )동북항일연군 김일성에 관한 연구에 대한 반박이 김일성이 진짜라는 증명이 될 수 없다.[19][20]

더 큰 문제는 최근 발굴된 많은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해서 검토하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한 것이 맞으므로,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6사장도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한 것은 오류이고, 이명영이나 허동찬의 연구가 오히려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명영의 연구 중 제2방면군장까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한 것은 자료가 부족하던 시절에 잘못내린 판단으로 오류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의 진위 문제는 해방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 판단해야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앞에 처음 나섰을 때 나온 것이므로 그의 진위 문제는 해방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북한 김일성은 자신들이 일찍부터 이야기 들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으니 가짜라고 판단했다면 그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당시 상황을 직접 알지도 못하는 후세 연구자들이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이니 진짜가 맞으며 가짜라고 한 당시 사람들의 판단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를 자기들 마음에 들게 고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은 33세의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또한 그가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21] 동북항일연군은 다수의 소규모 부대가 만주 각지에 흩어져 활동을 했고, 늘 쫓기는 입장에서 기록도 별로 남기지 못했다. 김일성이 속했던 1로군은 주요정보를 가졌던 고위급 지휘관이 대부분 전사했다. 이 때문에 해방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항일연군의 대강의 활동 양상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4] 근거없는 것으로 확인된다.[22] 항일연군에 대한 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모르는 부분도 많고, 잘못 알려진 것도 많으니, 해방당시 국내의 일반인들이야 그들의 활동에 대해 알래야 알 수도 없었다.

반면에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0년경부터 유명했으며, 김성주 본인도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훈육을 받았다고 동생 김영주가 증언했다. 또 해방 이틑날부터 전국적으로 유포된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이승만, 김구, 여운형고 함께 김일성은 군부대신으로 거론될 정도로 해방정국의 유력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해방 직후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국내 사정에도 어두울 뿐만 아니라 국내에는 그의 지지세력도 전무했다.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이 없었다면 자력으로는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아니었다.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내정은 받았지만 이런 상태로 지도자 행세를 하려해도 대중들이 받아들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이름은 유명하나 누구인지는 불분명한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나서게 된 것이고, 대중들은 그가 1920년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이 되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 다는 것은 즉각 알아차리고 가짜라고 한 것이다. 진지첸 대위는 소련군 무력의 일방적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 그가 가짜라는 소문이 확산되는 것은 억제할 수도 있었지만, 남한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북한 김일성을 처음 본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짜라고 한 판단은 정당한 것이고, 이러한 말들이 남한으로도 전해져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이전인 미군정기에 이미 수많은 문헌에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북한 김일성아 가짜라는 말은 북한에서 먼저 나와 남한으로까지 전파된 것이다. 김일성을 직접 본적도 없는 남한 사람들이 그가 가짜인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지어냈겠는가?

일제시대나 해방정국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없는 후대의 연구자들은 해방 당시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 거론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감추고, 많은 연구를 통해 나중에야 알게된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투쟁 경력만 거론하며 마치 해방 당시 사람들도 이에 대해 잘 알면서 북한 김일성을 가짜로 몬 것처럼 호도한다. 나아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부가 북한 김일성의 항일 투쟁경력이 부담스러워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도 내놓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내놓은 아무 근거없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의 진위는 해방 당시의 김일성 관련 기록들을 조사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수많은 기록이나 증언을 남긴 사람들은 해방 후 반공교육이 아니라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제시대에 자신들이 들었던 김일성 장군과 북한 김일성이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직접적인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가짜라 한 것이다. 반공교육이 실시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많은 문헌에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고 나오므로 한국정부가 반공교육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 교육해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는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6.25 전쟁 이후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은 오히려 반정부 시위를 맹렬히 하던 세대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졌으며, 서대숙, 와다 하루키 등이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자 검증없이 그런 주장을 받아들여 오늘날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김일성 진짜론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는 1970년대 이전에는 한국 정부도 북한 김일성이 어디서 뭘하다 온 사람인지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어 그의 전력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정부 차원에서 그가 가짜라고 교육시킨 적도 없다는 것은 당시 교과서나 정부가 간행한 문건들을 뒤져봐도 확인이 된다. 한국 정부가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대해 잘 알면서도 반공 정책 때문에 또는 그를 폄하하기 위해 일부러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었다는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확인도 거치지 않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의 만주항일투쟁 경력에 대해서도 중요 쟁점들은 수많은 연구가 나온 오늘날에도 아직 논란 중이므로 해방 당시 사람들은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은 당연하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사람들은 그가 가짜라는 말이 언제 어디서 왜 나왔는지, 기록에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조사해서 실증적인 연구를 하지 않고, 그럴듯한 추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며 대중들을 속이고, 아무 근거없이 책임을 과거 한국정부로 돌리며 비난하는 일을 했다. 그들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부실한 연구로 가짜 김일성을 진짜 항일영웅으로 세탁해주면서 대신 한국 정부와 가짜 김일성 연구자들을 비방한 그들은 북한 김일성의 특급 변호사들로 보인다.

6.25 전쟁도 한국인들은 처음부터 북한의 남침이라는 걸 체험적으로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후일 좌파 학자들이 이승만 정부와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여 김일성과 소련에 면죄부를 주려는 시도가 한때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후 당시의 소련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전쟁 책임은 원래대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북한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주장도 같은 종류다. 일제시대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라 해방정국을 직접 겪은 한국인들은 33세의 북한 김일성이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을 자처하며 나설 때부터 직관적으로 가짜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에 대한 체험적 이해가 없는 외국서 연구한 학자들이 그를 진짜로 뒤바꿔놓고, 국내의 신진학자들이 이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김일성을 가짜로 몰았다고 책임을 한국정부에 뒤집어씌웠다. 하지만 이또한 원래 자리를 되찾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학문적 연구를 빙자하여 세대가 바뀌어 일제시대 또는 해방 당시 일을 잘 모르는 대중들을 속이는 일이다. 북한이나 김일성에 불리한 것은 죄다 교묘하게 비틀어 책임을 거꾸로 한국정부에 뒤집어 씌우는 학자들의 고약한 버릇은 고쳐져야 한다.

북한 김일성은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알지도 못해

아래 기사는 평양에 사는 한일우(韓一宇)가 1945년 12월 김일성을 회견한 후 서울의 월간잡지 『민성(民聲)』[23]에 기고한 글인데, 남한 사람들에게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도는데 대한 해명과 함께 그를 선전할 목적의 기고로 보인다. 당시 북한 실정을 감안할 때 필자가 독자적으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고 김일성 본인이나 소련군이 지시하고, 기고문 내용까지 검토를 거쳤을 것이다. 소련제25군사령부 특별정치선전공작대 부책임자였던 레오니트 바신(1915~2006)은 후일 남한에 퍼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공작을 했다고 증언했는데[13], 남한 잡지에 이런 회견문을 싣게 한 것도 그러한 공작의 일환으로 보인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도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과거 경력은 전혀 이야기 하지 않고, 현재와 장래의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낭설이 나왔다고 변명하였다. 또 항일투쟁을 한 김일성이 맞다는 근거를 댈 필요를 느껴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1935년 2월의 동흥사건(東興事件)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며, 동흥사건의 주역은 사건 당시부터 이홍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1937년 6월의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이 맞다면 불과 8년전 자신이 주도한 사건은 제쳐두고 10년전 남이 주도한 사건을 자신이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6사장 김일성이 아니기 때문에 보천보 사건을 몰라서 동흥사건을 끌어와 자신이 주도했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1945년 12월에도 보천보 사건을 모르고 있는 북한 김일성은 6사장이 아니고, 본인도 모르는 보천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4] 사실이 아니다.[22]

월간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 서울 : 高麗文化社, 1946.01.20 (국립중앙도서관) p.4
서울에서 간행되던 잡지 『민성(民聲)』 제2권 제2호(1946.01.20)에 실린 평양 거주 한일우(韓一宇)의 기고문 《개선(凱旋)한 우리 팔티산 명장(名將) 김일성장군회견기(金日成將軍會見記)》
(전략)...

그러면서도 自己의 過去, 또는 體驗談은 極히 避하고, 다만 現在와 將來의 「일」에만 關心을 가지었기 때문에, 한때 「가짜 金日成」이라는 流說까지 낳았었다。
이것은 最近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하여 確實히 「같은」 金日成將軍임이 分明하여졌다。

一九三x年 겨울 어떤날 새벽, 平北 鴨綠江 上流 東興에는 突然 對岸 滿洲로부터 反滿軍 一隊가 警察署를 襲擊하여 警察官 多數를 죽이고 武器多數를 빼앗아가지고 凱旋의 나팔을 불며 悠悠히 돌아갔다。 日本軍警은 이 反滿軍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을 때에、 돌아온 人質이 다음같은 事實을 말하였다----
어떤 깊은 山中 密林地帶로 끌려갔는데、 거기에는 큰 共産村落이 있어 男女老若이 모두 즐기며 살고 있다는 것、 모두 每日같이 工夫를 하고 軍隊訓鍊을 한다는 것、 人質에게 씩錢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 그밖에 軍人中에는 十八九歲의 美少女가 있어서 白馬를 타고 部下를 指揮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 等。

그리고 頭目은 中國人이 아니라 實로 朝鮮人이요、 그 나이도 二十臺의 靑年 「金日成」이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이란 이름을 筆者가 알기는 바로 이때부터이다。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 아닌 동흥사건을 주도했다는 말은 월간잡지 『이북통신(以北通信)』(1948.07.01)에도 나오는데 위 기사의 인용으로 보인다.[24]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나, 소련 시절에 쓴 각종 보고서나 이력서에도 보천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도 당시 그 자신이 사건 자체를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이 또한 그가 6사장이 아닌 증거가 될 수 있다.

필자 한일우는 자신이 동흥사건 때부터 김일성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거짓말이다.

해방 당시 국내 사람들이 대부분 보천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매우 많지만, 북한 김일성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는 증거는 이것이 유일한 것같다. 그는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닌 것이다. 보천보 사건도 유사한 여타 사건처럼 곧 잊혀지고 북한 김일성 본인조차 알지도 못했지만 나중에 재발견하여 자신의 엄청난 항일전공으로 날조 조작한 것이다. 이후의 수많은 역사 날조도 무명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도움으로 집권하여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데 대한 컴플렉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平壤裁判所에서 나온 同志의 判決文에 『元柱라는 金日成은 云云』"한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의 어느 김일성 전기에도 그가 원주(元柱)라는 이름도 썼다고 한 것은 없는 것 같고, 이런 내용의 평양법원 판결문도 알려진 것이 없다. 어차피 남한 사람들이 확인할 수도 없는 평양법원 판결문을 핑계대어 남한에서도 확산되는 그가 가짜라는 소문에 급히 대응하느라 지어낸 말로 보인다.

김일성 진위 논란에 대한 국토통일원의 입장 (1973년)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이승만 또는 박정희 정권이 조작해서 퍼뜨린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는 터무니 없는 모함이며, 그런 말은 해방 직후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당일부터 나와 퍼지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가 수립도 되기 이전인 미군정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은 당시 문헌으로도 입증된다.

국토통일원(지금의 통일부)이 1976년 펴낸 『김일성연구논총(金日成硏究論叢)』에 실린 아래 글에는 당시까지 발표된 여러 사람들의 김일성 관련 연구 저서들의 주요 내용을 비교 검토하며, 장단점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 김일성 진짜론자들의 집중비판 대상인 이명영의 연구들도 검토하며 일부 미흡한 점들도 지적하고 있다. 이명영의 연구가 정부 지원을 받은 어용연구라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1973년 당시까지 간행된 아래와 같은 연구서들의 내용을 비교 검토함.
  1. 백봉(白峰),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1권 (평양: 인문과학사, 1968년); [2권 1969년, 3권 1971년 : 해방 후의 행적]
  2. 한재덕(韓載德, 1911~1970),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3. 다마키 모토이(玉城素, 1926~2008)[25], 『金日成の思想と行動』 (コリア評論社, 1968)
  4.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대구: 화다출판사, 1985) : 김일성 관련 내용은 pp.235~239.
  5. 박재간(朴在侃), 『김일성(金日成)과 김성주(金成柱)』, (서울 : 共産圈問題硏究所, 1970)
  6.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논문과 강의 (김일성 가짜론) : 1973년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간행 이전임.
  7. 이 외에도 단천(端川) 출신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1888 ~ 1926)과 관련하여 단천군지(端川郡誌, 1971)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26] 단천군지에 나오는 『민족의 별들 (柳麟 著) 중』이라는 글은 제목과 필자 및 출처가 잘못 밝혀져 있다.[27]

국토통일원은 김일성 경력을 과대 포장한 북한의 선전에 대응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으나, 김일성에 대한 비판이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는 당시까지 나온 여러 연구들이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고 그대로 전적으로 믿기는 어려우므로, 명확한 근거 자료들의 추가 발굴과 보다 진전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김일성 진위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반공정책 때문에 터무니없이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일성 진짜론의 사례

이정식(李庭植)

이정식(李庭植, Chong-Sik Lee, 1931~2021)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다.[28][29]

북한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스칼라피노 · 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 (서울 : 돌베개 1986)
[p.293]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소수의 유격대를 이끌고... 보전(保田, 普天堡)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p.300] 오늘날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김일 성은 1932~1941년 만주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이끌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기 때문에 그가 이름을 비꾼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선 아주 흔한 일로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한두 개의 가명을 사용했다. 또 다른 김일성에 관한 전설은 아직도 일부 한인들 사이에 서 믿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하여 두각을 나타낸 인물에 대한 기록에 접하지 못했다........ 김일성을 조작해내기 위해서는 그 당시 이래 김일성과 관계를 맺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모두 조작해내야 하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 스칼라피노 · 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 (서울 : 돌베개 1986)

이정식 교수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온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이 연구해보니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잘못된 허수아비 논증(straw man fallacy)"을 했다. 더구나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6사장 김일성은 사건 5개월 뒤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도 아니다.

이정식 지음; 허원 옮김, 『만주혁명운동과 통일전선』 (서울: 사계절, 1989)
북한연구 1세대… 美우드로 윌슨상
김일성 중국공산당 입당 누락 밝혀
    그는 김일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선 엄정함을 유지했다. 한때 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가짜 김일성’ 논란과 관련해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음을 적시했다.
김일성이 만주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으니 가짜 아닌 진짜가 맞다고 한 것은 학문적 엄정성이 아니라 사안에 대한 이해 부족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은(林隱)

임은(林隱)은 허진(許眞, 1928~1997)의 필명이며, 구한말의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4~1908)의 3남 허준(許埈, 1895 ~ 1956)의 아들로 본명은 허웅배(許雄培)이다. 부친 허준(許埈)은 연안파로 북한에서 1956년 숙청 당했다. 허진은 소련 유학 당시인 1958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에서 거주했다. 필명 임은은 허진의 선조들이 살았고, 선영이 있는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따왔으며, 허진도 사후에 임은동 선산에 묻혔다.

임은(林隱) 著,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서울 : 옥촌문화사, 1989년) : 위 책의 한국어 번역.

허진은 북한 김일성의 해방 전 전력이나, 진위를 직접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말과 자신의 연구를 통해 북한 김일성이 만주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사람이 맞으므로 진짜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김일성이 진짜가 맞다는 허진과 달리 그와 함께 소련으로 망명한 친구 김종훈은 김일성이 가짜라고 했다. 이는 해방 후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비밀리에 어느 정도 퍼져 있었다는 증거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원래 북한에서 먼저 퍼져서 남한으로까지 전파된 것이다.

  • 소련의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김종훈 증언 : 1958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김일성이 가짜라는 편지 써 보내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조선유학생대회가 열렸는데 유학생 허웅배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소련으로의 망명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다른 유학생들도 1958년 1월 겨울방학을 맞으며 러시아인 친구의 집에 모여 ‘8월 종파’사건과 김일성의 개인숭배, 숙청에 대한 비판 등 논쟁을 치열하게 벌리던 끝에 집단적인 망명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인숭배는 헌법과 당내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이다. 진짜 김일성은 전설적인 독립활동가이며 1930년대 사망하였으나 해방 후 소련이 김성주를 가짜 김일성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삶은 노예의 삶이다. 지금 북한은 종파처형 바람이 불고 있고 먼저 망명한 허웅배를 동조한 우리도 북한에 돌아가면 처형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망명 입장을 밝혔습니다.

[심층취재] 소련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6.25전쟁 진실 안 뒤 반감 싹터” VOA 2017.8.4
[심층취재 오디오] 소련 북한 유학생 집단망명 생존자 “6.25전쟁 진실 안 뒤 반감 싹터” VOA 2017.8.3

[녹취: 김종훈 씨] “나는 거기(북한) 가면 제일 먼저 잡혀서 죽어요. ‘아직도’ 가 아니라 영원하죠. 김일성을 건드린 놈인데. 김일성을 살인방조자, 전쟁을 일으켰다고. 가짜 김일성이란 것을 중앙당에 편지를 쓴 게 다 남아 있는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공개서한’ 이라고 해서 김일성이 왜 그런 놈인가 하는 것을 다 적어서 거기 보냈어요.”

서대숙(徐大肅)

서대숙(徐大肅, Dae-Sook Suh, 1931~2022)은 정치학자로, 미국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과 북한의 현대사 및 정치와 관련한 많은 논문과 저서가 있다.

  •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
서대숙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대구: 화다출판사, 1985) : 김일성 관련 내용은 pp.235~239.
  • Dae-Sook Suh,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Y: Columbia Univ. Press, 1988
서대숙(徐大肅) 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남한에서는 현재의 북한주석과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인 혁명가가 같은 이름으로 가진 둘 또는 셋의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이는 부질없는 추측이다........ 1974년까지도 북한주석 김일성이 가짜라고 주장한 남한연구가가 있었으나 이는 학문적 연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저작이었다. 그 저자(즉 이명영 - 인용자주)는 만주에서 김일성과 싸웠던 전일본군 장교 몇 명을 포함하여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 등 상당한 연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이 점에서 그 연구는 불운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저자 는 김일성이 가짜라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결론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만을 수집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서대숙저,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 청계연구소, 1989) p.296
그러나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서대숙 본인의 연구보다는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고 비난하는 이명영의 연구가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 새로 발굴된 수많은 자료들에 의해서 확실히 밝혀지고 있다. 이명영이 아니라 서대숙 본인이 정치적 의도를 가진 연구를 한 것이다. 김일성을 직접 만나서 무슨 밀약이 있었던 것인가?[30] 김일성은 자신의 치부를 깊숙히 파헤친 이명영의 연구를 비방하며 자신이 진짜가 맞다고 옹호해준 서대숙에게 고마움을 느껴 만나준 것이 아니겠는가? 서대숙의 연구가 그의 치부를 제대로 밝힌 것이라면 만나주고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이명영의 연구는 북한 김일성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을 것이나, 서대숙의 엉터리 김일성 방어논리가 멍청한 한국 학계에 먹혀들어 결과적으로 이명영이 욕을 먹고 김일성은 위기 탈출에 성공하였다. 서대숙은 김일성에게 가짜 멍에를 벗겨주며 욕은 이승만이나 이명영이 대신 먹게 만들어주고, 잃을 뻔한 보천보의 영웅 타이틀도 계속 유지하게 해준 구세주나 다름없다.
서울大(대)에서 처음으로 북한학을 가르친 감상은?
"한국은 지금 對(대)북한인식을 둘러싸고 혼란상태에 있다. 지금까지 金日成 (김일성)은 가짜라는 등 잘못된 것을 유포시켜왔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도 학생들은 신용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매우 정치화 돼있어 바른 인식을 얻기위한 공부에는 커다란 지장이 있다. 미국의 대학생과 비교해도 공부량이 적다. 매우 유감이다"
한국 학생들의 공부량도 문제일 수는 있겠으나 서대숙 본인의 공부량부터 걱정했어야 했다. 자료를 제대로 충분히 많이 찾아봤더라면 엉터리 주장을 내놓아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구세주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내 언론 “김일성 가짜論 부정했다”며 일제히 환호성
실제론 김정일 세습을 “경사”로 평가한 학문적 바보
    “김일성의 항일운동은 악전고투였으나 신출귀몰하듯 잘 싸웠다”(45쪽)는 것이고, “한마디로 평가받을 만한 것”(39쪽)이란 견해도 애써 피력했다. 그런 활동을 “허리에 일본도를 차고 독립운동을 방해했던” 사람들에 비하면 과소평가할 수 없다(52쪽)는 말까지 했는데 그게 한계다. 박정희·백선엽 등이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간도특설대와 연루됐다는 좌파의 말도 안 되는 공격을 서대숙도 그대로 믿었던 걸까. 결정적으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이고, 때문에 가짜가 명백한데 그걸 외면하는 학문적 실수도 범했다.

    그러니 집권 이후 현대북한 서술은 말할 것도 없다. “김일성은 북 주민들에게 정치적 안정감과 계속성을 보장해 줬다. 북 주민들의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은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조작해 낸 것이 아니다”(161쪽)는 식이다. 당혹스럽다. 정말 결정적인 것은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 세습을 한 걸 “커다란 경사”(217쪽)라고 평가한 대목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황당한 서대숙 북한학의 학문적 파산을 증명해 준다는 게 나의 움직일 수 없는 판단이다. 중립적 서술은커녕 평양 관변 역사서를 그대로 옮긴 듯한 서술은 정나미가 다 떨어진다. 서대숙 찬양을 앵무새처럼 되되는 언론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얘기다.
    ― 쪽수는 서대숙, 『현대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을유문화사, 2000)의 것을 가리킴.
서대숙은 국가를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했다는 사람들의 전리품쯤으로 취급하는 것같다. 그러니 만주서 비적질이나 하던 김일성이 스탈린의 꼭두각시로 간택을 받아 지도자가 되어 일족이 북한이란 국가를 사유화하고,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며 주민을 노예로 부려도 커다란 경사이며, 친일파(?)가 득세한 한국보다 낫게 보이는 모양이다. 북한은 해방 후 소련군함 얻어타고 들어온 만주 비적 출신들에게 점령당해 주민들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인질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가?
서대숙: 어찌 됐던 보천보전투를 통해 김일성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보천보 전투가 군사적으로는 별로 큰 의미가 없는 단순한 소동에 불과했지만 이 사건은 일본군이 무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고 당시 땅에 떨어졌던 조선인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또한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고 김일성은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김일성이 승승장구하자 일본군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철저한 탄압에 나섰습니다.
동아일보가 보천보 사건을 크게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고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보천보 사건도 앞서의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 독산사건처럼 금방 잊혀져서 해방 당시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김일성 본인도 1945년 12월 기자회견에서 보천보 사건을 몰라 동흥사건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는 그가 보천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실토한 것이다.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이 집권한 뒤 보천보 사건을 어마어마한 자신의 항일전공으로 조작해 선전했기 때문에 다른 사건은 잊혀지고 이 사건만 나중에 유명해지게 되었을 뿐이다.
서대숙: 김일성이란 이름은 유명했다. 김일성이 공식석상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모두 “가짜다” 라고 했다. 가짜가 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 김일성. 전설에 나오는 그런 김일성은 없다. 우리가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란 전설적인 사람은 없다.
서대숙은 일제시대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모양이나 그에 해당하는 실존인물이 없으므로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소련군에서는 진지첸 대위였으며, 어디서도 장군이라 불린적이 없는데도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며 자신이 그 유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 행세를 했기 때문에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된 것이다. 유명한 이름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 애매했기 때문에 북한 김일성이 그 사람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누구인지 분명했다면 그러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 서대숙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이 이승만 정부가 만들어낸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31]
“모든 학문이 그렇듯 시작은 호기심이었어요. 이승만 정권의 ‘김일성 가짜설’을 비롯해 ‘북한’이란 단어조차 금기가 되는 것을 보면서 객관적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컸어요. 학문의 목적은 진실 추구이고, 학자는 목을 내놓더라도 진실과 소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북한 김일성이 평양에 나타난 직후인 1945년말부터 이미 그가 가짜라고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승만 집권 이전에 그러한 말을 기록한 문헌도 셀 수 없이 많다. 서대숙은 실증적인 연구를 하지않고 지레짐작으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나온 책임을 김일성 본인 아닌 이승만 정권에 돌리고 있다.

서대숙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처음에 언제 어디서 왜 나오게 되었는지, 기록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조사해보지 않고, 일본과 중국 문헌만 좀 조사해보고는 북한 김일성동북항일연군에서 상당한 항일투쟁을 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는 곧장 이승만 정부가 그를 가짜라고 교육시켰다며 근거없는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늘 북한 김일성이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 괴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이며, 그를 가짜라고 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명성 때문에 이런 잘못된 주장이 한국에 수입되어 신진학자들이 길을 잃고 김일성이 진짜이고 항일투쟁의 영웅이라며 김일성을 미화하고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짜 김일성 장군 행세는 북한 김일성이 했는데,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며 욕은 이승만, 박정희가 얻어먹는 오늘날의 기막힌 현실은 김일성이 진짜이고 그의 항일투쟁은 칭찬받을 만하다며 면죄부를 준 서대숙의 잘못된 연구의 영향이 크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 김일성 장군일 뿐만 아니라, 소련의 꼭두각시로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지도자가 된 점을 외면하고 그의 항일투쟁 경력만 부각시킨 것은 큰 잘못일 뿐만 아니라, 항일투쟁 경력에서도 6사장 김일성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밝히지 못하고 북한의 허위 주장을 따라갔다.

서대숙의 잘못된 김일성 연구가 후대에 끼친 폐해는 브루스 커밍스의 잘못된 한국전쟁 연구가 끼친 해악에 비견할만하다. 서대숙은 국군의 김석원 장군이 일제시대에 일본군으로 북한 김일성의 부대와 맞서 싸웠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내놓았는데, 브루스 커밍스는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김일성이 남침한 것은 이승만이 중용한 김석원 같은 친일파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며, 한국전의 원인은 이미 일제시대 김석원김일성의 대결에서 잉태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했다.

와다 하루키(和田 春樹)

와다 하루키(和田 春樹, 1938 ~ )는 일본의 역사 학자이자 도쿄 대학의 명예 교수이다. 원래 전공은 소련사이나 후에 북한과 김일성 연구를 많이 했다. 그는 조총련과 연계된 반한(反韓) 활동을 한 전력도 있다.[32][33]

아래는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연구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19]에 대한 비판이다.

그의 전체 입론은.... 관헌자료에 나타나는 어떤 내용의 기술들을 도외시 내지 무시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인데 이 점은 이미 한국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전문연구서[34]에 의해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 이 책은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말단 일본인들이 김일성 부대가 흘린 거짓 정보에 얼마나 현혹되었던가를 전해주는 자료로서 읽혀져야 한다.
― 和田春樹,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 『사회와 사상』 1988년 11월호 (서울, 한길사, 1988), p.166.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도 김성주가 1931년부터 전설상의 영웅인 김일성의 이름을 차용했다고 말하기는 하나, 북한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투쟁한 것이 맞으므로 가짜 아닌 진짜라고 주장한다. (아래 저서 참고.) 이는 상호 모순되는 주장이다. 해방 직후 국내 사람들이 기대하던 김일성은 일찍부터 유명했던 전설상의 영웅인 김일성이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수도 없던 소련군 진지첸 대위(북한 김일성)가 아니므로 그는 가짜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이다.

  • 和田春樹, 『金日成と満州抗日戦争』(平凡社, 1992年 3月 1日)
와다 하루끼 저 /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 1992년 08월 31일)
[번역본 p.86] '만주사변'의 개시와 함께 무장투쟁을 하기로 한 그가 이를 위해 본명 김성주를 숨기고 간도지방에 떠도는 전설상의 영웅인 김일성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번역본 p.180]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되는 게릴라전의 지휘관은 젊은 체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주의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
와다는 북한 김일성이 나이가 젊어서 가짜 소리를 듣는 것에 대해 위와 같이 변명한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보다 훨씬 이전에 1920년 경부터 유명한 김일성 장군에 대한 풍문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하여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고 있다. 만주에서 유격전을 하면 긴 세월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이상한 논리처럼 보인다. 이런 주장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1920년 봉오동 전투 당시 홍범도(洪範圖, 1868~1943) 장군의 나이가 52세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나는 두 번에 걸친 연변 방문을 통해 그 곳 학자들로부터 배운 것과 입수한 자료들을 토대로 65년 논문을 다시 쓴 원고에 가필수정을 해서 91년 말까지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을 완성했다. 이 책은 일본에선 헤이봉(평범)사에서 92년 3월에 출간했다. 한국어판은 90년 서울 첫 방문 때 친해진 이종석씨가 맡아서 그의 번역으로 92년 8월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했다.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조선인으로는 가장 유명했다는 게 객관적인 자료로 논증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조선족, 특히 연변 역사가의 협력 덕분인 만큼 깊이 감사하고 있다.
설사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을 한 것이 사실이라해도 그런 일은 해방 당시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나중에야 많은 연구를 통해 알려진 것이고, 그때문에 진짜가 될 수는 없다. 그가 1920년경부터 이름이 유명했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가짜인 것은 변함없다.

이종석(李鍾奭)

이종석(李鍾奭, 1958 ~ )은 세종연구소 연구원으로 노무현 정권때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 이종석, 《김일성연구의 쟁점(상)》 (『사회와 사상』 1989년 12월 pp.348~375)
  •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 1995년판 『현대북한의 이해』의 증보판,
p.440부터 이명영과 허동찬의 김일성 가짜론에 대한 비판이 나옴.
이종석은 두 사람의 김일성 가짜론을 일제관헌 자료를 맹신한 결과라고 비판하면서도 같은 일제 관헌 자료인 1939년 9월 사상휘보 제20호에 6사장 김일성의 신원이 북한 김일성과 유사하게 적힌 것은 맹신한다. 같은 일제 관헌의 자료라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잘못된 자료라는 편리한 생각을 가진 듯 하다.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는 연구를 한 사람들이 정치적인 의도를 가졌다고 비판하지만 정치적 의도는 이종석 본인이 더 많이 가지고 북한 김일성을 미화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자신의 주장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자부한다.

한홍구(韓洪九)

한홍구(韓洪九, 1959 ~ )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이다.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부터라고 주장하며, 북한 김일성이 이 사건의 주역이 맞으므로 진짜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김일성의 이름이 유명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은 거의 잊혀져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없었고,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20년경부터 유명했기 때문에 해방 당시라면 나이가 많을 수 밖에 없다.

학문적으로 황당한 그 논리가 어떻게 그토록 오랜 기간 이남사회를 지배해왔을까?
10주기에 되돌아보는 세기의 인간… 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 영웅

신주백(辛珠柏)

신주백(辛珠柏, 1963 ~ )은 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이며,[35] 성균관대학교를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자들의 주장 요약표

북한 김일성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그가 진짜냐 가짜냐,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장이나 제2방면군장이 맞느냐 3가지로 정리된다. 이 3가지 사안은 서로 별개의 문제이며, 김일성 진위 문제는 해방직후 그가 평양 대중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 나섰을 때 불거졌고, 그가 제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이 맞느냐의 문제는 이명영이 1974년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을 간행하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소련붕괴와 중국의 개방이후 공개된 문헌들과 2000년대 들어 과거문헌들의 인터넷 DB 구축으로 새로 발굴된 자료들을 이전에 알려진 자료들과 종합해서 검토해 보면 북한 김일성은 가짜가 맞다. 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에는 2명의 김일성이 있었는데 그 중 상급자인 2사의 정치위원이었던 사람이 제3사장(나중에 제6사장)이 되며, 그는 함남 갑산군 회린면(甲山郡 會麟面) 출신으로 보천보 사건 직후인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것이 맞다. 그 후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 제1단(제1사의 제1, 2단에 이어 제3단으로도 불림)의 단장(團長) 방진성(方振聲) 아래에서 참모장, 정치위원, 제3연장(連長) 등으로 있었고, 당시 그는 신설되는 제3사의 사장(師長)으로 승진하기에는 직급이 너무 낮았다. 하위 직급에 있던 그가 상관인 단장 방진성을 제치고 3사장으로 승진했을 리도 만무하다. 위계질서를 완전히 깨뜨리는 그런 인사는 있을 수 없다. 당시 안봉학(安鳳學)은 제1사 제1단장이었기 때문에 제1사장(나중에 제4사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지만 북한 김일성은 단장보다 하위 직급에 있어 사장 승진이 불가능했다.

각 쟁점에 대한 각종 근거자료들의 자세한 검토는 아래 우남위키 문서를 참고하라.

북한 김일성과 관련한 3가지 쟁점에 대한 주요 연구자들의 입장은 아래와 같다.

연구자 김일성 진위 제6사장 제2방면군장
이명영 가짜 X X
김창순 가짜
허동찬 가짜 X
이정식 진짜
임은(허진) 진짜
서대숙 진짜
와다 하루키 진짜
이종석 진짜
한홍구 진짜
신주백 진짜
최종 규명된 사실 가짜 X

김일성이 가짜가 맞다고 한 국내의 1세대 연구자 이명영과 김창순은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을 국내에서 체험한 사람들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되는 과정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이정식과 서대숙은 해방전 중국에서 살았고, 해방후 서울을 잠간 거쳐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다녀 국내 사람들이 김일성이 가짜라고 하게되는 사정에 대한 직접적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다. 신진학자들은 해방 후 태어나서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 출현한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되는 사정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전혀 없는데다 한국의 과거 정부에 대한 반감이 충만한 사람들이다.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대부분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맞기 때문에 진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논리적으로 오류인 허수아비 논증이다.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은 북한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1로군의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맞기는 하지만, 그가 일제시대나 해방당시 유명했던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짜라는 입장을 견지했다.[36][37]

가짜 김일성이 진짜로 둔갑해 있는 배경

김일성은 동시대의 한국인들로부터는 가짜 취급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그가 진짜가 맞는데도 반공시대에 그를 가짜로 만든 것처럼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반전이 일어난데는 아래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

  1. 일제시대에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라 북한 김일성이 가짜인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세대들의 퇴장.
  2. 후속 세대들은 일제시대에 유명했던 김일성 장군에 대해서는 모르고, 어릴 때 부터 북한 김일성에 익숙하여 그가 가짜라는데 대한 체험적 이해가 없으므로 누가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김일성이 진짜라고 하면 쉽게 넘어감.
  3.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 실제 누구인지 불명확하다는 점 :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일찍부터 유명했다는데 대해서는 수많은 증언이 있으나 당시 기록으로는 그에 해당할만한 실존인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김일성 장군에 대한 반전설적 소문들은 단순히 조선인들의 희망의 반영일 수도 있고, 단천출신 의병장 김일성(金一成, 1888~1926) 장군이나 또는 김경천(金擎天, 1888~1942) 장군의 이야기가 시발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무명이었던 북한 김일성이 실제 누구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이름이 유명한 그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했으므로 가짜인 것은 변함없다.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지 명확했다면 북한 김일성이 그 사람 행세를 할 수 없었을 것이나, 누구인지 애매하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참고 : 김일성 (동명이인)]
  4. 1970년 이후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그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투쟁한 것이 알려지자 이를 근거로 그가 진짜라 주장하는 논리 왜곡이 일어남. (그가 가짜라는 주장은 1920년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때문에 나온 것이며, 해방 당시 사람들은 동북항일연군이나 소련군 88여단은 알지도 못했고, 보천보 사건도 잊혀졌으며, 이런 일들은 그가 가짜라는 말을 듣는 사정과 무관함. 후대의 연구자들이 해방당시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고 많은 연구를 통해 나중에야 알게된 사안을 근거로 김일성이 가짜 아닌 진짜라고 하는 것은 넌센스임.)
  5. 1990년대에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가 발굴되면서 이 호외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일시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 나오고,[4] 이것이 사실인양 통용됨. (이것은 북한 김일성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고안해낸 거짓 주장이다.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은 물론이고 호외 간행사실조차 잊혀져 이를 거론하는 사람도 없었고,[22] 이때문에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며,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도 다른 사람이다. 잊혀졌던 보천보 사건이 나중에 유명해진 건 북한 김일성 집권 후 자신의 항일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임.)
  6. 외국 명문대에서 연구한 학자들의 잘못된 연구가 그들의 명성과 권위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이명영, 김창순, 허동찬 등의 연구는 배척당함.
  7. 좌경화 된 사회 분위기, 운동권이 주류로 부상 - 좌경화된 신진 학자들이 등장하여 김일성이 진짜라 주장.
  8. 좌경화된 언론의 김일성 미화 찬양과 가짜설 배척[38][39]
  9. 반공을 폄하 - 해방직후부터 가짜로 알려진 김일성을 반공 시대에 가짜로 만들었다고 왜곡.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후 반공 교육을 받은 세대가 아니라 해방전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북한 김일성과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퍼진 것임.
  10. 친일파 논란 부활 - 박정희에 대한 친일파 몰이,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미화 - 김일성 가짜론자를 친일파로 몰기.[40]
  11. 한국 지식인들이 김일성보다 이승만, 박정희를 더 불신하는 풍조의 유행 - "독재자이자 친일파(?)" 이승만, 박정희라면 "항일영웅(?)"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미신(迷信)을 전파.

김일성이 진짜라는 학자들의 핵심 논리가 그가 가짜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정확한 사정을 모르거나 무시한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고, 부수되는 주장도 김일성 가짜설 연구에 대한 사실 검증이 아니라 주로 한국의 과거 정권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나 연구자에 대한 인신공격에 지나지 않지만 변화된 세태에서는 검증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이 10월 14일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현장에서부터 나온 것으로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미군정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들로 확인 가능하다. 하지만 김일성 진짜론자들은 그가 가짜로 몰리는 책임을 엉뚱하게 이승만, 박정희와 그가 가짜가 맞다고 한 연구자들에게로 돌리고 그들을 인신공격하는 방식으로 가짜론을 비판해왔고, 불행히도 그것이 잘 먹혀들어 오늘날처럼 가짜를 진짜로 뒤집어 놓는데 성공하고 있다.

동아일보 호외 하나로 북한 김일성의 보천보 신화 날조

보천보 사건 이튿날인 1937년 6월 5일에 동아일보는 2차례 호외를 간행하며 보도했고, 조선일보도 호외를 간행했다.[41] 그러나 보천보 사건이 금방 잊혀진 것처럼[42][43] 이런 호외 간행 사실도 곧 잊혀졌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득세하게 되자 보천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호외 때문에 김일성과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조선일보의 호외는 실물이 전하지 않고, 1990년 무렵 동아일보 호외 실물이 공개되자 비로소 일제시대에 북한 김일성이 유명해졌을만한 핑계거리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호외는 실물이 발굴되기 전에는 그 존재도 몰랐으니 그 때문에 보천보 사건이나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졌다는 말도 있을 수 없었다. 이 호외는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이 붐을 이루면서 웹상에 이미지가 올라와 유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고, 마치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 사람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또 보천보 사건으로 북한 김일성의 이름이 유명해졌다는 눈에 보이는 물적 증거로 이용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에 속아넘어가게 된다. 당시 조선일보 호외도 있었지만 실물이 전하지 않으니 오늘날 이 호외는 거론조차 되지도 않고 있다. 김일성 이름은 조선일보 아닌 동아일보 호외에 의해서만 유명해지란 법도 있는가?

일제시대에 신문들이 별 대단치 않은 일로도 호외를 간행하는 일은 자주 있었고,[44] 호외의 파급력은 그다지 크지도 않았다. 국민 80%가 문맹인데다, 호외를 일시에 전국적으로 배포할 교통운송 수단도 없던 시절이니 서울 시내나 근교 정도에 배포되어 일부 사람들이나 보았을 정도였을 것이다. 또 호외를 봤다 해도 그냥 한번 봤다는 정도이지 수시로 발행되던 호외의 내용을 마음 속에 넣어두고 오랫동안 기억할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유사한 동흥사건, 토성습격사건이나 독산사건 때도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했지만 그 사건의 주역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인 유명인물이 되는 일도 없었고, 오늘날 이런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다. 이런 사정이니 누가 그당시 호외가 간행되었다는 것까지 알겠는가?

동아일보 호외는 오늘날 이 때문에 김일성의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으므로 북한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가장 유력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이 호외라면 대단한 일이 있을 때나 간행되고 파급력도 상당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악용해 대중을 속이는 사기적 주장이다.

실제로는 보천보 사건은 일과성 사건으로 금방 잊혀져 해방 당시에는 이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42][43] 1970년대에 김일성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학자들 사이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남한의 일반 대중들이 보천보 사건에 대해 알기 시작하는 것은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득세한 1990년대 이후의 일이며, 그들이 북한의 주장을 답습하여 보천보 사건을 엄청나게 의미있고 중요한 사건으로 과대포장하여 선전하는 바람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일부 남한의 교과서에도 이 사건이 나온다고 한다. 좌파들의 김일성 미화 노력이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더욱 한심한 일은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들이 수없이 발굴되었는데도 남한의 학계는 아직도 이를 철저히 숨기며 외면하고 있고, 대다수 언론도 지속적으로 북한 김일성을 보천보의 영웅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미 1974년에 이러한 사실을 처음 밝혔던 이명영에 대한 마녀사냥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한국에서 김일성을 연구한 다수 학자들이 고의성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부실한 연구로 북한 김일성의 진위 문제를 뒤집고 보천보 사건을 왜곡한 수준도 북한의 무차별 역사 조작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같다.

김일성 가짜론 연구자에 대한 부당한 비판

북한 김일성이 가짜 아닌 진짜가 맞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은 이명영이 김일성이 가짜로 조작하는 연구를 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일본군(실제로는 만주군) 출신 박정희가 항일투쟁한 김일성에게 컴플렉스를 느껴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거나, 이명영이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말까지 한다. 물론 아무 근거 제시는 없다. 이들은 맘에 들지 않는 박정희와 이명영을 동시에 비방하는 방법으로 김일성에게 가짜 멍에를 벗겨 미화하고 있다.

이명영의 김일성 연구는 그가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할 때 "재만한인공산주의 운동연구(在滿 韓人共産主義運動 硏究, 1975년 2월)"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진행한 것이다. 당시는 교수들도 박사학위가 없는 사람이 다수였다. 1974년 간행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의 서문에는 연구를 지원해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재용 회장의 조부)과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홍석현 회장의 부친)에게 감사한다는 말이 나오므로, 그의 연구는 중앙정보부가 지원한 것이 아니다. 중앙정보부가 박사학위 논문 쓰는데까지 지원을 하는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이명영이 소속된 성균관 대학의 재단 이사장이었고,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은 그의 사돈이며, 이명영의 연구는 출판되기 전에 1974년 봄부터 가을까지 중앙일보에 먼저 연재되었다.[《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 그 전설, 실존, 도명을 밝힌다》, 1974.03.23 ~ 1974.09.03의 기간에 중앙일보에 연재 (총 53회)[45]] 이런 관계를 봐도 이명영의 연구는 삼성그룹이나 중앙일보의 지원을 받은 것이며, 중앙정보부나 박정희 정권이 개입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악의적 비방이다. 1970년대 초에는 정부가 대학에 연구비 지원을 할 여력이 없던 시대이고, 대학의 연구활동도 활성화 되기 전이다. 김일성의 가짜 멍에를 벗겨주기 위해 해당 연구자와 당시 대통령까지 엮어서 음해하는 것은 후배 연구자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대통령이면 국내외에서 닥치는 온갖 어려운 문제를 안고 씨름해야 하는 자리이다. 이명영이 김일성 연구를 진행하던 1970년대 초에는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공방문으로 갑자기 미중 화해무드가 조성되었다. 6.25참전으로 김일성을 살려내고 통일을 가로막았던 중공은 당시까지 한국과 미국의 주적이었는데 갑작스런 미중화해 무드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을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남북적십자 회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 김일성 면담 등으로 남북 대화도 시도하고, 미군철수에 대비하여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도 추진하고, 월남전 문제도 있고, 국내 경제 문제도 있고....국내외의 온갖 어려운 문제에 대처해야하는 대통령이 한가하게 김일성에게 컴플렉스를 느낄 시간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박정희의 마음속에 들어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런 추정을 하면 사실이 되는가?

남북대화를 시도하던 정국에서 정부나 남북문제 담당 핵심부서 중앙정보부가 뜬금없이 갑자기 김일성을 가짜로 만드는 연구를 하라고 지원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발한 발상이긴 하다. 친일파 논란은 6.25 때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겪은 후로 사라져 1970년대엔 박정희를 독재자라 공격하는 사람은 있어도 친일파라 공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일파 논란은 노무현 정권 때 좌파들이 이전 정권을 공격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되살려냈으며 실제 목표는 박정희 친일파 낙인찍기였다. 실제로는 그런 공격을 주도하던 좌파 정당에 친일파 후손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드러나 망신을 사기도 했다.

이명영이 중앙정보부 요원?

지금은 수정되었지만 신복룡은 아래 글의 최초판에서 김일성이 진짜라고 하면서, 가짜라는 연구를 한 이명영을 중앙정보부 요원이라고 하였다.

  •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⑩ 김일성 신화의 진실① [주간조선 2367호] 2015.07.27
청년 마르크시스트의 탄생 : “김일성은 가짜” vs “가짜가 아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이명영 교수 유족들로부터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던 것같다. 이후 이에 대한 사과의 글을 올렸지만, 그는 김일성이 진짜라는 신념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같다.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김일성 가짜 논쟁

김일성 편(11회)의 글이 나간 다음 나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나의 글을 읽는 독자들의 소감에는 “아슬아슬하다”는 글이 많은데 드디어 사고가 났다. 곧 “김일성은 가짜라고 일관되게 주장한 성균관대학교 이명영 교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구절이 필화(筆禍)가 됐다. 정확히 말해서 이명영 교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아니었는데 일부 항간에서 오고 가던 이야기와 인터넷에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확인하지 않고 쓴 것이 나의 실수였다. 유족의 입장에서 볼 때 선대가 한때 억압 구조라는 오명을 썼던 중앙정보부의 요원이었다는 기록에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망자명예훼손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인터넷에 오르내리던 기사에 따르면, 이명영 교수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주장의 발설자는 성공회대학교 한홍구(韓洪九) 교수로 알려져 있다.[46]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한홍구 교수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 2편’(한겨레신문사·143쪽)에서 “김일성의 가짜설을 주장한 이명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에서 기획관으로 근무했는데 그때 공보실장이 이후락(李厚洛)이었다”고 기록했을 뿐 이명영 교수가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시절은 이후락이라면 중앙정보부를 연상하던 시절이어서 한홍구 교수의 글이 마치 “이명영은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는 말로 확대되어 와전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 사건은 내가 사려 깊지 못해서 벌어진 실수이니 남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내가 사과와 정정 기사를 싣는 것으로 매듭이 지어졌지만 그때는 많이 힘들었다.

이명영은 5.16 직후 1963년 이후락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李厚洛 最高會議 公報室長) 밑에서 공보실기획관(公報室企劃官)을 한 것은 당시 신문 기사에서 확인이 된다.[47] 이후 이명영이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며 1970년대 초 김일성에 대한 연구를 할 때 자료수집을 위해 일본도 왕래하던 시절에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당시 남북대화를 주관하며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도 만나고,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도 여는 등의 바쁜 시기에 뜬금없이 연락도 끊어졌을 왕년의 부하직원 이명영을 찾아서 김일성 가짜 연구를 하라고 돈을 지원했겠는가? 아직 당시 문서가 공개 되지는 않았지만,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 그의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는 말을 했다고 하며,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함께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명영 등의 김일성 연구에 대한 업적

  • 이명영이나 허동찬은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주역이 아니며, 그들의 항일연군 김일성에 대한 연구는 일부 오류도 있지만 일방적인 비판과 달리 상당한 진실을 밝힌 선구적 업적이다.
  • 이명영의 연구가 없었더라도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은 해방직후부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므로 정확한 진상을 밝힐 필요는 있었다.
  • 후대 연구자들이 북한 김일성은 진짜가 맞고, 6사장 김일성은 전사하지 않았고 북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여 김일성 연구를 오히려 퇴보시켰다.
  • 이명영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 북한 김일성의 유격대 투신 이전 행적을 당시 생존해 있던 증인들을 통해 상당히 많이 밝혔고, 이는 중요한 업적이다. 일부는 나중에 당시 기록의 발견으로 사실로 입증되기도 했다.
  • 이명영이 아니었으면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6사장의 전사 사실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 되었지만 곧 잊혀져서 후대 사람들은 그런 일을 알지 못했다.
  • 김창순은 위 기록에 근거해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에서 활동한 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이 맞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으므로 가짜라는 입장은 견지했다.[36][37]
근래 '김일성 연구가‘로 자처하는 정치역사학자들 가운데는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普天堡) 습격사건의 주인공이다 아니다‘로써 진짜 김일성(金日成)이다 아니다를 가리려고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 金日成은 구전상(口傳上)의 민족영웅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36][37]
[주] 보천보습격사건의 주인공은 6사장 김일성이다.
그가 북한 김일성이 항일연군의 6사장과 제2방면군장이 맞다고 하고, 김일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데 가장 요긴한 사상휘보 자료를 발굴해낸 때문인지 같은 김일성 가짜론자임에도 비판의 표적이 되지는 않았다.
김일성 진짜론이 잘못된 논증(허수아비 논증)이라는 것을 지적한 사람은 김창순 뿐인 것같다.
  • 김창순의 언명에서 보듯이 김일성 진위문제와 6사장 및 제2방면군장 문제는 서로 별개의 것이지만, 이명영이 1974년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에서 6사장 및 제2방면군장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후로 후대의 연구자들이 이 별개의 사안들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서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며 이명영을 공격하였다. 이 바람에 김일성 진위문제 논란에 혼선이 일어나고,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으므로 가짜 아닌 진짜라는 허수아비 논증의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 불행히도 이런 오류 논증이 오늘날 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북한 김일성은 6사장도 아니고, 따라서 보천보 사건의 주역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명영의 주장과 달리 제2방면군장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 것으로 밝혀진다.

위에서 본대로 지금까지 온갖 비난과 인신공격의 촛점이 되었던 이명영의 김일성 연구가 모두 맞는 것은 아닐지라도 실제로는 후대의 서대숙, 와다 하루키는 물론 어느 누구의 연구보다도 더 진실에 근접해 있었다는 것이 이제는 확실히 드러난다.

오늘날 학계에는 교묘한 말로 김일성의 사기행각을 변호해주면서 욕은 이승만, 박정희가 얻어먹게 만드는 교활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고, 이들의 말에 속아넘어가서 이런 허위 주장을 사실로 알고 선전해 주는 사람도 널려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반공 때문에 김일성이 가짜라 교육했다는 것은 사실무근

많은 김일성 진짜론자들이 과거 남한 정부가 반공 정책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고 교육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으로 김일성 미화와 남한 과거 정부에 대한 폄하를 동시에 노린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미군정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당시에 그를 가짜로 기록한 문헌도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일제시대에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세대들은 직관적으로 그가 가짜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으며, 후일의 한국정부가 그를 폄하하기 위해 고의로 가짜로 조작한 것이 아니다. 해방 직후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을 보고 가짜라고 한 사람들은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지 해방 후 반공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해방전 세대들이 퇴장하고 일제시대에 전설의 김일성 장군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해방후 세대로 교체되자 오히려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이 힘을 잃어갔다.

반공교육은 6.25 전쟁 이후에 강화된 것으로, 참혹한 전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때라 북한과 김일성,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교육을 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교육의 주된 내용은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거나 남침의 주범이라는 면에서 비판했고, 아울러 북한이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유가 없고, 인민들은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이는 상당한 진실을 반영한 것으로 근거없는 억지 주장이 아니다.

해마다 6월 25일 무렵에는 학교에서 「상기(想起)하자 6.25」라는 구호도 내걸고, 반공 포스터 그리기나 반공 웅변대회 같은 것을 개최하기도했지만, 전쟁 직후이고 냉전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판할 일이 못된다.

김일성 가짜라는 말은 당시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것은 심지어 북한 김일성이 항일영웅이라며 미화에 앞장선 한홍구도 인정한다.[49]

이남의 교과서에 실려 있지는 않으나 실제로 이남의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이 행해졌고 남북관계가 새롭게 변한 지금도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고 믿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학교에서 교과서에 실리지도 않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교육이 행해졌다는 것은 자신이 당시 전국의 교실마다 지켜보지 않았던 이상 알 수 없는 일인데도 한홍구는 아무 근거 제시도 없이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근본 이유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국내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진지첸 대위를 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북한의 지도자로 만드는 공작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데에 있다. 과거 반공 시대에는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라며 그의 가장 아픈 곳을 비판했지만, 오늘날에는 김일성 미화풍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 되고, 김일성이 마치 항일투쟁의 영웅이라 북한주민들이 그를 지도자로 선택한 것인양 선전되고 있다.

당시의 반공교육보다는 오히려 오늘날의 김일성 미화와 한국의 과거 대통령들에 대한 지나친 폄하가 문제다. 김일성6.25 남침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라는 국가를 자기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어 인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 체제로 건국하고 적화를 막아낸 주역이고, 박정희는 한국의 경제적 발전의 기반을 닦은 주역이므로 일부 잘못이 있었다해도 그들의 공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반공 정책과 반공 교육은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6.25 전쟁의 막대한 참화를 겪고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그 이전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오늘날 반공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한국이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도 이러한 강력한 반공정책 덕분이다. 한국과 달리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펼치지 못한 월남(남베트남)은 월맹(북베트남)군의 공격에 의해서보다는 내부에 형성된 월맹의 조종을 받는 지하 조직 베트콩의 준동에 의해 자멸한 측면이 더 크다. 부패한 관료들이 베트콩과 내통하며 미군이 지원해준 무기들을 베트콩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한국이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치지 않고, 남한내 북한을 추종하는 지하조직이 생성되는 것을 엄격히 막지 않았더라면 베트콩과 유사한 조직들이 생겨나 월남과 동일한 길로 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김일성의 진실을 밝힌다며 객관성을 가장하여 김일성을 찬양하는 사례

MBC의 김일성 찬양 프로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 2002년

2002년 2월 3일 방영된 아래 MBC 프로는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을 밝힌다며 겉으로는 객관적인 척 가장하고 있으나, 주요 해설자로 대표적 김일성 찬양론자인 한홍구, 이종석, 동경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를 등장시켜 허수아비 논증에 바탕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김일성 미화 목적의 프로그램인 것을 웅변해 준다.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MBC 2002년 2월 3일 밤 11시 25분 방영 : youtube

이 프로그램 제작자는 이명영의 연구 자체를 놓고 진실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연구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나왔다는 것을 부각시켜 박정희와 이명영을 함께 비방하며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조작된 연구로 몰아가고 있다. 1950~60년대에는 가난하던 시절 전쟁을 겪고 전후복구와 먹고 살기에 빠듯하던 시절이었고,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가던 1970년대에야 비로소 김일성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고, 이때부터 김일성의 실체와 동북항일연군이나 보천보 사건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이런 일을 두고 정부에서 어용학자를 동원해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교 교육시켰다고 억지를 부린다면 연구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인가? 이제와서야 명백히 밝혀지지만 당시 이명영의 연구가 그 후의 다른 어느 사람의 연구보다 더 진실에 근접해 있었고, 이명영을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정권의 앞잡이"라며 비방한 그 후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김일성 연구를 오히려 퇴보시켰다.

1945년 10월14일 평양환영대회에 소련군들과 함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오랜 항일투쟁을 해온 전설적 장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어 군중들은 김일성이 가짜라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김일성 가짜설은 박정희 정권시절 이명영이라는 학자에 의해 본격 제기됐다. 그는 북한의 김일성은 보천보 습격 사건을 이끈 독립운동가 김일성과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복무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의 항일경력을 부담스러워해서 김일성 가짜설이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제작진은 김일성의 항일운동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 현지 취재를 통해 중요 시기별로 김일성의 유격 활동 흔적을 확인했다.
연출을 맡은 곽동국 PD는 "논란이 많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의 실체를 밝혔으며 유신시절에 왜, 어떤 배경에서 가짜 김일성론이 유포됐는지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일반 시청자들은 이런 프로에 의해 은연중에 세뇌되어 김일성을 찬양하며, 박정희와 이명영을 비난하게 된다. 가짜 김일성을 엉터리 수법으로 진짜로 둔갑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관계없는 박정희 전대통령까지 끌어들여 욕보이는 고약한 프로그램이다.

KBS의 김일성 찬양 프로그램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 2020년

KBS도 2020년 3월 24일에 방영된 "[역사저널 그날 257회]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일성에 대한 방송을 했는데, 찬양 정도가 18년전의 MBC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심해졌다. 보천보 사건을 엄청나게 유명하며, 의미있고 중요한 사건으로 미화하는데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그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고, 북한 김일성이 그 주역인 것처럼 주장한다. 김일성이 마치 보천보 사건으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에 해방후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것처럼 호도한다.

* [KBS 역사저널 그날 257회]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KBS 2020년 3월 24일 (화) 밤 10시, KBS 1TV

김일성 항일투쟁 미화의 죄악

한국인들의 항일투쟁 때문에 해방이 된 것도 아닌 이상 일제시대 누가 어떤 항일투쟁을 더 많이 했느냐로 권력다툼을 벌이는 것보다는 해방 후 과연 어떤 체제로 나라를 만들어가야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부강한 나라가 되고, 국민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살겠는가 하는 것이 몇 만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주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체제로 집권한 김일성의 북한은 철저히 실패한 국가로 전락한 반면에 자유민주체제로 건국한 한국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에 자랑할만한 모범사례가 되었다.

해방 후 80년이 다된 오늘날까지도 항일투쟁만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최고 가치인 양 떠받들고 다른 가치는 무시한다면 김일성과 같이 자기능력이 아니라 소련의 괴뢰로 선택되어 집권한 "최악의 항일팔이 사기꾼"에게 나라도 주권(主權)도 자유도 다 빼앗기고 노예로 살게 된다.

가난한 집안 출신 박정희가 돈 없이도 다닐 수 있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서 선진문물을 배우고 익히지 않고, 김일성처럼 배운 것도 없이 만주산야에서 비적질인지 항일투쟁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일이나 하고 다녔다면 오늘날과 같은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김일성의 차이가 오늘날 남북한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전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도자로서 한 일을 가지고 해야지, 아무 영향력도 없던 지도자가 되기 전 일제시대의 일로 평가하려드는 것은 기준이 전도된 것이다. 히틀러에 대한 평가를 지도자가 되기전 화가 지망생 시절의 일로 하려는 사람은 없다.

김일성은 항일투쟁을 했는데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 친일파니 북한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탈북자들도 많이 보았다. 그 사람들은 왜 더 정통성이 있는 북한에 살지 않고 굳이 힘들여 탈북해서 정통성이 없는 남한으로 와 사는지 모를 일이다. 모르고 왔다면 알게 된 지금은 북한으로 돌아가는 건 탈북보다 훨씬 더 쉬운데 가지도 않는다. 이들은 한국 국민들이 뽑은 지도자는 정통성이 없고, 소련 스탈린의 임명을 받은 지도자라야 정통성이 있다고 하는 셈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탈북자는 남한의 자유와 경제적 풍요는 누리고싶지만, 내심으로는 자신들 마음의 조국 북한이 남한보다 더 정통성이 있다고 믿고싶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김일성이 가짜라거나 소련이 내세운 꼭두각시(괴뢰)라는 사실은 절대로 인정하기 싫고, 항일투쟁의 영웅(?) 김일성이 친일파(?) 남한의 지도자들보다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문을 외우는 것 아니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김일성에 대한 뿌리깊은 노예근성은 못버리는 것같다.

비적질과 구분하기도 힘든 김일성의 만주 항일투쟁이 도대체 북한주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된 게 있다고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장악한 최고권력을 대대로 물려가며 주민들을 노예로 잡고 부리는가? 북한은 해방된 적이 없고, 주민들을 속이는 해방되었다는 허위선전만 있다. 북한의 억압자는 일본에서 소련군을 거쳐 소련의 괴뢰로 집권한 김일성 일족으로 바뀌기만 했을 뿐이다. 김일성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소위 항일무장투쟁은 북한 주민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된 것은 전무하고,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부당하게 얻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나 이용될 뿐이다.

이런 김일성을 옹호하지 못해 안달인 남한의 학자연(學者然)하는 사람들도 한심하다. 김일성 일족 치하의 북한 주민들의 삶이 일제시대보다 오히려 훨씬 더 못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이라도 하게 될 것이다.

결론

해방 직후 소련군이 평양에 데려와 김일성 장군이라며 대중앞에 내세운 진지첸 대위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는 국내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릴 때의 김성주를 기억하는 그의 고향 마을 사람들도 그가 어디서 무얼하다 와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을 자처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가짜 김일성 장군이라는 말이 나돌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김일성과 동시대 사람들 대다수는 그렇게 믿었고, 여기에 아무 잘못도 없다.

물론 서울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에서 김일성 가짜론을 반박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지만,[50][51] 기사를 보면 김일성이 실제 어디서 무얼하다 왔는지 구체적 내용은 없고 그가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맞다면서 무조건적 찬양만 늘어놓아, 글 쓴 사람도 김일성의 실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박헌영이나 다른 공산당원들도 소련군이 데려온 진지첸 대위의 실체를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박헌영의 부하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도 외국에서 돌아온 김일성의 행적이 불분명하여 지도자로 적합하지 않다며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 등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52]

레베데프 소장 등 당시 소련 군정 인사들의 후일 증언으로 이제야 내막이 다 밝혀졌지만 국내에서 무명인사에다 지지세력도 없는 그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소련군이 그가 지명도 높은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도록 한 것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은 그와 동시대에 국내에 살았던 한국인들에게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외국서 공부하고 연구한 몇몇 학자들이 일제시대나 해방 당시의 한국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해 일본이나 중국 문헌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만 확인하고는 그가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주장하게 된다. 외국 명문 대학의 교수였던 그들의 권위 때문에 잘못된 주장이 학문적 엄정성(嚴正性)의 외피(外皮)를 입고 국내에 수입되고, 국내 다수의 신진학자들이 이를 확대 재생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일성을 가짜로 알던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 퇴장하자 후속 세대들은 어릴 때부터 북한 김일성에 익숙하고, 일제시대에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있었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어 가짜 김일성은 오늘날 거의 진짜로 만들어져 있다.

이념적으로 친북 좌경화된 것으로 보이는 신진학자들은 김일성에게 가짜의 멍에를 벗겨주면서 동시에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 한국의 과거정권도 김일성 가짜설을 지어내고 이를 교육시켰다며 공격하는 묘수를 찾아내었다. 선배 학자들을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어용이라며 인신공격에 가깝게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도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적의을 느끼기 때문으로 보인다. 좌경화된 학계 분위기에서 과거 정부에 대한 공격은 별다른 검증도 거치지 않고 쉽게 사실로 인정받는 인기품목이다.

해방 직후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을 속였듯이 오늘날의 신진학자들은 그 김일성에게 엉터리 허수아비 논증으로 가짜의 멍에를 벗겨주어 또 한번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새로 발굴된 많은 자료들에 의해 북한 김일성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도 이를 학계에서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당분간은 그 동안의 잘못이 바로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이 끝까지 진실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을 겪은 당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널리 통용되던 상식이 한 세대 이상 지난 후대에 와서 정반대로 뒤집혀 있으니, 뒤집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이면에 불순한 목적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반드시 그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 미군정 시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두고 엉뚱하게 이승만박정희 등 한국 대통령들과 이명영 등 가짜 김일성 연구자들을 탓하며 비방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참고 자료

김일성 진위 싸고 시각차 여전
조선인민해방군 부재(不在)엔 접근
북한 김일성의 일제시대 전력에 대해 이명영과 서대숙, 이정식의 견해를 요약, 소개하고 있다.
제5장 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金日成 / 金昌順
북한 김일성 사망 당시 그의 일제시대 전력에 대해 이명영과 서대숙의 견해를 요약, 소개하고 있다.

각주

  1.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法)이다. : 우남위키
  2.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해방 당시 중국어는 능하나 조선말은 서툴러 우남위키
  3.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북한에 퍼진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기록 우남위키
  4. 4.0 4.1 4.2 4.3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보천보 전투 RFA 2010.09.21
    서대숙: 동아일보는 보천보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김일성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고 김일성은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5. 노영택,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國史館論叢 第5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4-06-20)
  6.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
  7. Сделан в СССР :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Made in the USSR "Top Secret", No.9 / 268, Published: September 1, 2011) / Сделан в СССР softmixer 전재
  8.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 창덕학교 교사 출신 현응수의 증언
  9.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p.27 : 朴璿秉(1898년생. 咸南 甲山郡 甲山面 태생. 서울 시내 城北區 鍾岩洞 거주)씨는 『23세 되던 해인 1919년에 甲山郡廳 에 취직, 숙직을 하던 어느날 밤, 그곳 憲兵補助員 김재현의 집이 獨立軍에 의해 습격당한 일을 겪었는데 이것이 내가 들은 김일성 장군의 처음 거사였다. 그 후 2, 3년이 지나 含井浦 事件이 있었다. 이 사건도 김일성 장군의 거사였다』라고 證言했다.
  10.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우남위키
  11.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9~30 : 1924년 당시 북청군청 직원이었던 김흥교(金興敎, 1893~?)는 사이토 총독이 북순(北巡) 당시 북청군(北靑郡)에 들렀다 혜산진 방면으로 떠난 며칠 후 총독 저격 사건이 있었고, 김일성 장군이 한 일이라는 풍문이 돌았다고 증언했다.
  12. 김일성 가짜설#(보론 1) 중국 조선족들의 북한 김일성이 진짜라는 주장에 대해 : 우남위키
  13. 13.0 13.1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1 레오니트 바신의 증언:
    As Kim's nom de guerre was widely associated with an older guerilla who had performed legendary feats, many suspected him of being a complete fraud, so the next step was to build up Kim's image. "We elevated him into the status of a hero to bolster his work as a leader of Korea," Vassin said. "We had to prove he was a real person, the tiger of Mt. Paektu. We had to find his relations at the village of Mangyoungdae. We also had to discredit the information put out in South Korea that he wasn't the real Kim Il Sung. We had to prove he was an active fighter who had liberated the motherland."
  14. 《朝鮮共産黨 北部朝鮮分局 設置 : 劃期! 五道黨 責任者 熱誠者 大會》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 『정로(正路)』 창간호 1945년 11월 1일자 1면 기사
  15. 신편 한국사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2) 정당들의 조직과 활동 (1)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우리역사넷
  16. 《로베레의 장군》(이탈리아어: Il generale Della Rovere) 1959년 개봉
  17. [분수대] 허수아비 논법 중앙일보 2007. 4. 16
  18. 김성보(金聖甫), 기광서(奇光舒), 이신철(李信澈) 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닷컴 2004
  19. 19.0 19.1 이명영(李命英),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20.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7 / 허동찬(許東粲), 『김일성 평전 [속] (金日成 評傳 [續])』, 북한문제연구소(北韓問題硏究所), 1988년 4월 1일.
  21.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 김창순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서울 : 북한연구소, 2004) p.160 : (보천보 사건에 대한 신문 보도 당시) 대부분의 독자들은 동북인민혁명군이 어떤 성격의 武力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22. 22.0 22.1 22.2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정말 유명해졌나? : 우남위키
  23. 민성(民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 월간 『以北通信』 제3권 제5호 (三八社, 1948.07.01) : p.10 《北朝鮮暗黑王 金日成夫人 金靜淑自殺未遂事件》
  25. 玉城 素(1926~2008) エンペディア(Enpedia)
  26. 『단천군지(端川郡誌) (단천군지 증보편찬위원회, 1971)』 《단천 출신 김일성설(金一成說)》 : pp.152~162.
  27. 김일성 (1888년)#유석인(劉錫仁)의 《김일성의 정체에 대한 고증》 (우남위키) 참고
  28. 한국 공산주의 기원 파헤친 이정식 교수 별세 동아일보 2021-08-19
  29. 역사에 새겨진 진실은 감춘다고 감춰지지 않는다 [광화문에서/김상운 문화부 차장] 동아일보 2021-08-30
  30. 北 공산주의 운동 연구 1세대 서대숙 박사 별세 동아일보 2022-09-19
    여러 차례 방북한 그는 북한 고위층과도 친분이 있는데, 특히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 기록은 “처음 만났을 때 비공개하기로 약속했으니 지키고 싶다”며 비공개를 고수했다.
  31. 서대숙, “통일되면 북쪽 학자들도 찾아와 연구할만한 자료들이죠” 한겨레신문 2018.10.25
  32. 日韓連帶(일한연대)회의 해체 在日(재일) 反韓(반한) 중심세력 1978.06.27 동아일보 1면
  33. 金大中 釋放(김대중 석방)요구 朝總聯(조총련) 또 街頭(가두) 데모 1980.12.15 동아일보1면
  34. 김창순 · 김준엽의 책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말하는 듯함.
  3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에 신주백 한림대 교수 연합뉴스 2019. 4. 16
  36. 36.0 36.1 36.2 韓昇助 外共著, 解放前後史의 爭点과 평가. 1 : 獨立 建國運動의 主導勢力은 누구인가? (螢雪出版社, 1990), 제5장 韓國獨立運動史에 있어서의 金日成 / 金昌順 : p.167
  37. 37.0 37.1 37.2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學脈 강연) 口傳上의 민족영웅 金日成 장군은 누구인가? 『북한』 2004년 6월호 통권 제390호 (북한연구소, 2004.06) p.170
  38.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8회 -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MBC 2002-02-03 방영
  39. [KBS 역사저널 그날 257회]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KBS 2020.03.24 방송
  40. "김일성은 가짜"…'친일파 꿀꿀이' 소리는 이젠 그만! 프레시안 2011.05.08
  41. 共軍大部隊 越境襲來(공군대부대 월경습래) 조선일보 1937-06-06 석간(5일 토) 2면 : 호외재록(號外再錄)
  42. 42.0 42.1 보천보 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정말 유명해졌나? 우남위키
  43. 43.0 43.1 해방후 남북한의 보천보 사건 관련 기록에 대한 검토 우남위키
  44. 호외Zip : 동아일보 동아디지털아카이브
  45.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 역사로 벗기는 김성주의 가면 (연재 예고) 중앙일보 1974.03.23 종합 1면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회) 서장 - 5인의 「김일성」 중앙일보 1974.03.25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53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중앙일보 1974.09.03 종합 3면
  46.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gkaqor&folder=1&list_id=5450847·검색일 2015년 8월 8일)
  47. 對政府聲明(대정부성명)에 알쏭 달쏭 1963.04.16 경향신문 2면
  48. 김창순(金昌順, 1920 ~ 2007),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만주(滿洲) 게릴라 조직(組織)과 한인대원(韓人隊員)에 관(關)한 연구(硏究)』, 북한학보 제1집 (북한연구소 1977년) p.79
  49. 한홍구, 이승환, 김일성 가짜설의 생산구조와 그 의미
  50. 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상)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4월 8일
  51. 권용호(權勇浩),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하) - 해방일보(解放日報) 1946년 4월 9일
  52. 박갑동(朴甲東, 1919~ ),『내가 아는 박헌영』 (108회) 중앙일보 1973.07.04 종합 5면
    박갑동(朴甲東, 1919~ ), 『박헌영(朴憲永) : 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 (서울, 인간사, 1983) p.190 : 위 중앙일보 연재물을 책으로 간행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