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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김일성(金日成) 1912 ~ 1945》 (상, 중, 하 3권, 서울셀렉션, 2020)는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 1962~ )의 저서이다.[1] 《김일성 평전》(상, 중, 하)이란 제목으로 간행했던 것을 증보, 개제(改題)하여 다시 간행한 것이다. 저자는 30여년간 200여명의 만주 동북항일연군 연고자들을 인터뷰하고,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항일연군 관련 문헌을 열람하고, 각국에 흩어져 있는 문헌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해방전 김일성의 행적을 가장 완벽하게 밝혀낸 책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말과는 달리 그가 직접 들었다는 증언들은 당시로 부터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나온 것이라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책 내용에도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해방 당시 국내의 어느 누구도 김일성이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몰랐고, 자력으로는 국내의 정치 무대에 얼굴을 내밀 형편도 안 되던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발탁되어 그들의 일방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이런 점을 지적하지 않으므로서 독자들이 마치 그가 대단한 항일영웅이라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집권하게 된 것으로 잘못 알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 저자는 김일성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을 모두 바로잡는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이 새로운 잘못된 주장을 내놓아 인터넷에 확산되고 있는 것도 있다.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책도 학술서 형식으로 쓰인 것이 아니니, 검증이 제대로 되지않은 내용이 있어도 저자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고의적으로 왜곡할 의도야 없었겠지만 아래 제시한 몇 건의 사례들로 볼 때 저자는 증언자들의 말을 너무 과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저자는 김일성 등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이 해방 후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여 한민족 전체에 끼친 막대한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들의 항일투쟁만 강조하여 마치 대단한 민족의 영웅인양 묘사하는 것도 상당한 거부감을 준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조선의 해방에 아무 실질적 도움이 된 것도 없으면서,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잡은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구실로나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엄혹한 일제시기에도 살아남은 수많은 좌파계열 항일투사들을 숙청 처형하였다. 빨치산 출신들을 제외하고는 이름있는 항일투사 중 김일성 치하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서슴치 않고 행하는 이런 자를 대단한 항일투사인양 미화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항일연군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실제로 한 일들로 평가하지 않고 그들이 내세운 항일의 명분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들의 실체와 동떨어진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도서 간행 관련 보도자료

신화와 편견 양쪽을 모두 넘어 진실로 ... 국내 논픽션 다큐멘터리의 새 지평을 연다
조선족 출신 유순호 작가, 논픽션 다큐멘터리 '김일성' 출간
김학준 교수는 저자의 말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같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과, 명백히 잘못된 주장까지 사실로 여기고 있다.

총평

김일성은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들을 하게되는 북한 지도자 시기의 행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사람이다. 김일성이 어떻게 스탈린의 선택을 받아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는지의 과정을 밝히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링컨을 대통령 아닌 변호사 시절의 일로 평가하고, 히틀러를 총통 아닌 화가 지망생 시절의 일로 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저자는 지도자로서의 김일성 아닌 그 이전의 일만 주로 취급하며 그것으로 김일성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 하고 있다. 이런 시도는 독자들이 김일성은 대단한 항일투쟁을 하여 북한 지도자가 될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그가 지도자로서 무슨 일을 했건 관계없이 높이 평가해야 된다는 인식을 가지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한 기준은 얼마나 소련 지시를 잘 따를 인물인가였지, 얼마나 항일투쟁을 많이 했느냐는 아니었다. 소련이 북한 지도자를 결정했다는 것은 북한의 주권이 일본 천황에서 스탈린에게로 넘어간 것일 뿐 북한은 해방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스탈린 사후 북한의 주권은 북한 주민 아닌 김일성에게로 넘어가 그 일족에게 세습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주권을 소련군의 앞잡이였던 김일성에게 강탈 당한 것이지 해방된 적은 없고, 따라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소련은 1921년의 자유시 참변, 1937년의 20만 연해주 고려인 강제이주에서 보듯이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하게 탄압한 국가이다. 소련이 도주해온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을 88여단에 수용한 것은 이용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지 조선독립운동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결국은 그들이 교육시킨 김일성을 소련의 꼭두각시 앞잡이 지도자로 만들어 북한 주민들의 주권까지 강탈해간 것이다.

동북항일연군과 거기서의 김일성 등 조선인들의 활동은 대한민국 건국과 아무 관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중 북한으로 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 6.25 남침의 전범들이다. 그들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피해는 일제가 끼친 피해보다 몇 배나 더 크다. 그들은 항일전에서도 승리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패배해 소련으로 도주했으며, 거기서 5년간 쉬다가 소련의 대일본전 승리에 무임승차하여 입북해서는 마치 자신들이 일본전 승리의 주역인양 개선군 행세를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항일투쟁을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 자신의 견해를 한국의 독자들에게 주입하려 드는 것도 상당히 거슬린다. 김일성이 회고록대로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항일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니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북한 주민의 주권을 강탈해가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가두며,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국가를 사유화하여 최고권력을 자손들에게 세습한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로 귀결된다. 중국 공산당 정부와 불화 끝에 자유민주국가 미국으로 망명해 사는 저자가 아직도 이런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김일성 때문에 해방이라도 되었다면 그의 해방전 행적도 중요하겠지만, 그는 남들이 목숨걸고 독립운동하던 해방 직전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전쟁 끝난 후에 슬그머니 몰래 귀국해서 조선말도 잘 못해 더듬거리던 자가 소련군의 앞잡이가 되어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나서 자기가 북한을 해방시킨 것처럼 역사를 조작하고, 수많은 항일투사들을 숙청, 처형했다. 그의 해방전 행적도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저자는 남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남북화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한의 국민들과 김일성 일족의 화해는 의미도 없지만 가능하지도 않고, 남한 국민과 북한 주민의 화해는 하시라도 가능하지만 김일성 일족이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은 외면한다. 북한의 주권이 김일성 일족을 떠나 국민에게로 귀속되기 전에는 남북화해는 애초에 불가능하며, 남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는지 아닌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평가는 그것을 팔아 권력 세습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김씨일족에게나 중요할 뿐이다. 왜 북한의 김씨들을 향해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해야 남북화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조선족 출신이라 남한편도 북한편도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썼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항일연군의 편에서 쓴 글이고, 김일성의 치부를 밝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김일성 편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책은 만주나 북한이 아닌, 항일연군 출신자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만 입은 한국에서 간행하고 판매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항일연군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투쟁을 했다면 왜 그들이 주도한 나라에서는 책을 내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가? 책을 마음대로 내지도 팔지도 못하는 나라를 만들었다면 그들의 투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높이 평가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마저 항일연군 출신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이런 책을 출판해줄 곳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한국과 같은 나라를 세우고 항일연군 출신자들의 남침을 막아낸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나, 오히려 비판하고 있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김일성이승만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인식이 이 책의 저변에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중국 침략에 맞서 대규모 전투를 벌인 쪽은 국민당군이지 공산군이 아니었다. 모택동은 국민당군에 스파이를 심어 정보를 빼내어 비싼 값에 일본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패전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패하면서 중국인 누구도 국민당군의 항일전쟁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이 없고, 중공군이 항일전쟁을 주도한 것처럼 말한다.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일본의 침략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토벌되어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졌을 것이므로 일제 침략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모택동은 일본의 침략에 감사한다는 말까지 공개적으로 했다. 이런 판이니 중공당 산하 항일연군 출신자들도 결국 일제 침략의 수혜자들이고, 그들이 항일투쟁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중국인들이나 만주 조선족들의 항일연군에 대한 평가도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중국도 대만 정도로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모택동의 폭정으로 중국인 7천만명이 죽는 인류사 미증유의 대참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만주국 시절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다수 조선인들이나 중국인들이 항일연군이 아닌 만주국편에 섰다는 것이 당시 기록들에도 나온다. 그들의 후손이 오늘날 만주의 조선족과 중국인들이다. 세월이 바뀌고 권력 지형이 뒤집어지니 후손들은 조상과 반대편에 서서 마치 자기네들 조상은 반만항일(反滿抗日) 투쟁을 열심히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저자가 말하지 않는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의 가장 큰 문제점들을 짚어 본다.

  • 과거 신문을 조금만 검색해도 쏟아져 나오는 동북항일연군 산하 부대들이 조선 국경과 만주 도처에서 벌인 무고한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와 마약밀매 등의 행위들도 샅샅이 조사하여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범죄집단이나 다름없는 북한 정권의 행태도 항일연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김일성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는 우선 남침 전쟁과 수많은 대남도발을 겪은 한국인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상 더 큰 피해자는 수천만 북한 주민들이다. 김일성 일당에게 주권은 물론 사유재산과 생활상의 모든 자유를 강탈 당하고 일생을 수령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주권이 일본 천황에게 있을 때보다 더 못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이 했다는 그 잘난 항일투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한 것인가?
  • 북한은 해방된 적이 없고, 압제자가 "일본 제국 -> 소련 군정 -> 김일성 일족"으로 바뀌어 왔을 뿐이다. 해방된 적이 있다면 8.15로부터 평양에 소련군이 진주해오기 직전까지 단 열흘 뿐이었다. 북한이 소련군이나 김일성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 그것이 진실인 줄로 착각하도록 만들어 진정한 해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마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김일성의 그 잘난 항일투쟁이란게 결국은 동족을 일제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잔인하게 탄압하는 명분으로나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정말 객관적인 평가를 하자면 그들에게 당한 피해 사례도 면밀히 조사하고 수많은 피해자들의 증언도 청취했어야 했다. 과거 신문들이 DB화 되어 손끝을 조금만 놀려도 그들이 양민들을 약탈하고 괴롭힌 수많은 사례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 중 상당수는 6사장 김일성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가 한 일이다. 더 이상 미화하며 숨길 수가 없는 단계에 와 있다. 항일연군에 관한 가장 많은 자료는 당시 만주의 신문들에 실려 있을 것이나, 이를 DB화 하여 공개하지 않는 이유도 숨길 것이 많아서가 아닌지 의심된다. 이런 것들까지 다 밝히고 난 후 그들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 마적떼에 불과한지 아니면 진정한 항일투쟁을 한 것인지 독자들이 판단해볼 자료를 마련해 주었어야 했다.

또한 저자는 김일성 등이 상당한 항일무장투쟁을 한 공로가 있으니 북한 지도자가 된 것도 당연시하는 것같다. 그러나 무장투쟁 경력과 국가 통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지도자가 되려면 그에 요구되는 특출한 경력과 능력,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거의 무학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저학력자들로 어릴 때부터 무장단에 들어가 만주 산야를 누비며 거칠게 투쟁한 경력 밖에 없어 국가통치를 위한 자질은 완전히 결여된 사람들이다. 북한 인민군 소장으로 있다 숙청되어 10년간 징역형을 살고 중국으로 탈출한 강수봉(필명 呂政)은 이들 집단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2]

만주항일연군에 소속돼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던 항일 빨치산들은 소련(蘇聯) 땅에 쫓겨갈 때까지 극좌노선의 지배를 받을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어 정치이론을 배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학교 교본조차 보지 못했다. 소련(蘇聯) 땅에 들어가 있는 5년동안 소련(蘇聯) 공산당 역사와 레닌주의 제문제를 배우기는 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보고 접촉한 것은 전쟁에서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사람들 뿐이었다. 그 5년 동안에 항일 빨치산들 속에는 소련(蘇聯) 안전기관[3]의 비밀정보원이 생겨나고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악랄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정치(政治) 몰라 비극심화

항일빨치산들의 그런 공통적인 특징은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적개심만 있을뿐 정치가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실천경험이 없고 극단적 좌경노선을 그대로 갖고있는 이들에게 국가통치의 대권(大權)이 부여됨으로써 북조선의 비극은 심화됐던 것이다.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작가(소설가)이며, 이책은 학술서가 아니라 넌픽션 소설형태로 집필되었다. 너무 잡다하게 많은 인물들과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다 다루고 있어 분량이 지나치게 방대하며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일일이 검증하기도 어렵다. 대다수 사람들이 왜 그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다 알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읽기도 지루하고 재미도 별로인 것같다. 책값도 만만치 않아 김일성의 해방 전 행적 중 논란되는 주요 이슈에만 관심있는 사람은 굳이 책을 사보기도 망설여 진다.

이미 간행된 《김일성 평전 (상)》과 인터넷상에 발표한 글 등에서 파악된 사실관계의 문제점만 우선 몇 가지 지적한다.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는 정말 중요하지 않은가?

아래는 출판사에서 올린 책의 머리말의 뒷부분이다.

민낯이 더 건강하고 아름답다/한 쪽만의 주장을 담지 않았다/북한 독자가 반드시 읽어야

저자는 김일성이 진짜냐, 가짜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김일성 문제의 핵심이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처음으로 평양의 대중 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섰다. 그러나 해방전 5년간 그는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 소련군 진지첸 대위, 즉 까삐딴 진지첸(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эн)이었을 뿐이다. 그가 만주에서 김일성 이름을 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가 1920년 경부터 이미 유명했던 전설적인 이름 김일성 장군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국내의 어느 누구도 어디서 무얼 하다 온 사람인지 모르는 전혀 미지의 인물에 불과했고, 소련군에 진지첸 대위같은 인물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일연군 김일성의 이름은 만주에서는 좀 알려졌는지 모르나, 국내 사람들은 대부분 항일연군도, 거기에 김일성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지도자로 나설 수 없기 때문에 유명한 이름 김일성 장군을 사칭해서 대중들을 기만한 것이다. 지도자감이 되지도 못하는 자가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억지로 지도자로 나서려다 보니 이름으로 장난을 쳐서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소련군이 내세운 사기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왜 가짜이며, 어떻게 대중들을 속이는 사기 행각을 벌였는지는 아래에 잘 나와 있다.

그는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어 막강한 소련군 무력의 일방적 뒷받침을 받지 않았다면 자력으로는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 입으로 "내가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오" 한들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10월 14일의 집회도 소련군이 무대를 마련해주지 않았으면 고향마을 사람 몇명 외에는 국내에 지인도 없는 그가 무슨 수로 나설 수 있었겠는가? 그날의 집회 자체가 소련군이 진지첸 대위를 대중앞에 김일성 장군으로 데뷔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한 것이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일찌기 부친 김형직이 자기 형제들에게 김일성 장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는 증언을 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자라 김일성 장군처럼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다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 즉 까삐딴 진지첸(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эн)의 변신 과정은 눈부시다. 중국공산당에 붙었다 소련군에 붙었다 하다가 스탈린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간택받아 북한의 지도자 자리까지 꿰어찬 『까삐딴 진(капитан Цзин)』의 놀라운 변신술에 비하면 전광용(全光鏞, 1919~1988)의 소설 『꺼삐딴 리』[4][5]의 주인공은 차라리 애교스럽게 보인다. 현실은 항상 소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꺼삐딴은 까삐딴을 다르게 적은 것이다.)

김일성 회고록은 김일성 본인이 집필했는가?

저자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6] 총8권 중 김일성 사후에 나온 계승본 7, 8권 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김일성 본인이 직접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책들이 간행되던 1990년대초에는 김일성은 이미 노쇠하여 이런 방대한 책을 쓸 형편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이미 간행된 각종 김일성 전기와 여러 문헌들을 조사 연구하여 대필한 것이다. 김일성 전기들은 간행될 때마다 수시로 내용이 바뀌어 왔고, 이 회고록의 내용도 대부분 조작된 것이며, 회고록이라기보다 정치선전물에 가깝다.

회고록 편찬에 직접 간여하기도 했던 황장엽은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후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에서 당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7]

혁명전통을 과장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데서 김정일은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항일 무장투쟁을 주제로 하는 많은 소설과 영화를 만들어 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임춘추를 비롯한 항일 빨치산들 참가자들이 쓴 회상기를 회수해버렸다. 그것은 빨치산 참가자들이 아무리 김일성을 우상화하여 회상기를 쓴다하여도 실수하여 때때로 진실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가 아니라 소설가들이 생각해낸 허구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게끔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문학작품들은 그것을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여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김정일 노작’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였으며 당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다 읽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소설이나 영화에 나온 사실들을 모든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기초하여 『세기와 더불어』라는 김일성의 회고록이 나오게 되었다.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은 다 중앙당 선전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선전부는 자기들이 김일성의 회고 록을 쓰겠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역사연구소는 회고록을 쓰는 것은 당역사연구소의 과업이라 하면서 이 사업을 당역사연구소가 주관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일의 결론에 따라 당역사연구소가 김일성 회고록 집필을 주관하게 되고 선전부가 작가들을 동원해 주기로 하였다. 실제로 회고록을 집필한 것은 작가들이었으며 역사연구소의 일꾼들은 1, 2명 참가하여 고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 사업은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혁명전통을 과장하는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같이 우상화 선전의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회고록을 믿지 않았지만 일반대중들은 소설에서 읽고 영화에서 본 사건들이 재미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회고록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역사연구소에서는 이런 성과에 고무되어 만세를 불렀으며 항일 빨치산투쟁시기뿐 아니라 해방 후 시기를 포함하는 대규모의 회고록 출판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게 되자 회고록 출판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나는 단호하게 회고록 출판사업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에도 회고록을 문학전문가들이 너무 재미나게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을 수 있었는데 죽은 다음에도 그런 투로 회고록을 발표하게 되면 이전에 출판한 것까지도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명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고록 속편을 만들어 김정일에게 올렸는데 그는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였다. 회고록 출판사업은 김일성 사망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위조가 과연 효과를 낼 수 있겠는가? 이들은 역사는 결국 사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순호는 저서에서 김일성 회고록의 내용을 검증없이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넬슨 벨 선교사의 김일성 부모 결혼 중매는 사실인가?

저자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2018) 목사의 장인 넬슨 벨(L. Nelson Bell, 1894~1973) 선교사가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김일성 부모 김형직(金亨稷, 1894~1926)강반석(康盤石, 1892~1932)의 중매를 섰다고 주장한다. 또한 벨 선교사가 원래 강신희이던 김일성 모친의 이름을 베드로를 뜻하는 반석으로 개명해주었다고 말한다.[8]

미국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은 장인 넬슨 벨(L Nelson Bell)이 100년 전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갔고, 평양에서 강돈욱, 강진석 부자와 친하게 지냈다고 회고했다. 이때 칠골에서 열심히 봉사했던 강돈욱의 둘째 딸 강신희 이름을 강반석(강베드로)으로 바꿔주었던 사람도 바로 넬슨 벨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1992년과 1994년에 평양을 방문했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장인 이 오늘날 '조선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강반석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던 사람이니 말이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필자에게 직접 들려준 적이 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아버지 김형직이 결혼할 수 있게 주선한 사람도 내 장인이었다. 김형직이 살았던 동네(고평면 남리)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장인은 자주 거기로 가서 설교했다. 김형직은 그 교회를 다녔고, 밑으로 동생이 다섯이나 있었고, 집안 살림은 째지게 가난했지만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숭실중학교에도 들어갔는데, 장인이 강돈욱에게 그를 사위로 삼으면 좋겠다고 소개하여 혼사가 금방 성사되었다."

이 책을 본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이미 많이 퍼뜨리고 있지만[9][10] 사실이 아니다. 저자는 그레이엄 목사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하지만, 그레이엄 목사가 장인의 일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저자가 그레이엄 목사의 말을 잘못 이해했는지 알 수 없으나 명백히 잘못된 말이다.

넬슨 벨 선교사는 김형직과 같은 1894년생 동갑으로 미국서 학교를 마친 후 김일성이 출생한 1912년보다 4년 뒤인 1916년에야 처음 중국으로 와서 상해에서 북쪽으로 500 km 가량 떨어진 청강포(清江浦)에서 선교활동을 했을 뿐 평양에서 선교를 한 적도 없다. 김형직-강반석 부부가 결혼한 때로 보이는 1910년경에 그는 16살의 소년에 불과했으니 머나먼 평양에까지 와서 무슨 중매를 설 수 있었겠는가? 또 자신보다 나이가 두살이나 위인 강반석의 이름을 바꾸어 주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나중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이 된 딸을 평양의 외국인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한 것이 벨 선교사의 북한과 연고의 전부이다. 그레이엄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것도 부인의 평양 연고 때문이며, 장인 벨 선교사는 북한이나 김일성 부모와 아무 관계가 없다.

이런 사실은 인터넷에서 Nelson Bell로 한번만 검색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이 정도 확인도 안 하고 잘못된 주장을 내놓고 이를 퍼뜨리는지 모를 일이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김일성 생전인 1992년과 1994년 평양을 방문했는데, 부인 루스 벨은 병으로 동행하지 못하고, 김일성 사망 후인 1997년에 자녀들과 60년만에 평양을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린튼 목사는 김일성 주석이 그레이엄 목사의 아내인 루스 그레이엄이 평양 외국인학교를 다닌 인연을 들어 그레이엄 목사 부부를 초청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파송 미국 의료선교사의 딸이었던 루스 그레이엄은 10대 시절인 1930년대 동아시아의 기독교 성지-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의 외국인학교에서 몇 년 동안 공부했었습니다.

평양외국인학교는 기독교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1900년에 설립돼 40년간 운영되다 1940년 11월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폐교됐습니다.

이 책이 퍼뜨린 잘못된 주장이 인터넷 사전들에도 버젓이 올라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퍼뜨리고 있다.

손정도 목사 외손녀 문성자 증언의 문제점

저자가 뉴욕에서 소년시절 김일성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외손녀 문성자를 만나서 들은 증언은 어린 시절 김일성을 직접 알았던 모친 손인실의 증언과 전혀 다르다.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은 모녀간에도 그대로 잘 전달이 안 된다는 생생한 사례이다. 당사자의 후일 증언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데, 본인 아닌 유족들의 증언은 더욱 믿기가 어렵다.

  •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 p.101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손인실의 딸 문성자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김성주에 대하여 어머니에게 물어봤는데 어렸을 때 그런 사람을 본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그때 오빠 또래의 학생들이 우리 집에 많이 놀러왔었는데 만약 김성주가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면 아마 김성주 역시 그때의 학생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딸 손인실(孫仁實, 1917-1999)의 증언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4>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3) 1972.01.20 동아일보 4면
▲손인실(孫仁實)씨(五四(오사)·이대부총장(梨大副總長) 문병기(文炳基) 박사 부인)
임정(臨政)에 관계하시던 아버님(손정도(孫貞道)목사,·상해임정임시의정원의장(上海臨政臨時議政院議長))이 만주(滿州) 길림(吉林)에 한인학교(韓人學校)와 교회(教會)를 세우고 우리 가족들이 거기에 살 때였읍니다. 열살도 못됐던 나는 무슨 소년단인가 하는 대원들을 따라서 길림(吉林) 북산(山)에 올라 병정놀이나 숨바꼭질등 게임을 했던것이 지금도 기억(記憶)에 남아있읍니다. 그때 이 소년단에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의 소년이 있었읍니다. 열두살 되던 一九二八(일구이팔)년경 길림(吉林)을 떠났기 때문에 그후 이 소년단의 일은 차차 잊혀졌는데 해방 후 만포진의 병원을 팔고 평양(平壤)에 와서 얼마 안된 때입니다. 아마 四五(사오)년十(십)월 하순쯤 일까요. 아이를 업고 평양(平壤)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무슨 공산당(共産黨) 사무실인가 어디에 김일성(金日成)의 큼직한 사진이 걸려 있는걸 보았읍니다. 그무렵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가 진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개명(改名)을 해서 들어왔으며 만주(滿州) 길림(吉林)에서도 산 일이 있다는걸 들어왔었는데 그 사진을 보니 옛날 길림(吉林)의 「그 소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자세히 보니 어렸을적 모습이 약간은 남아있는 듯 했으나, 그때도 살이 약간 찌기 시작해서 호리호리했던 옛날과는 달라 확실한 판단이 안됐지만 그가 어릴 때 보았던 김성주(金成柱)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동뢰 소대장 피살 사건 증언의 문제점

김일성이 조선혁명군의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을 살해했다는 증언은 이미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의 저서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 나와 있지만, 저자는 이를 모르는지 이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고, 자신이 들은 새로운 증언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사건이 1931년 7월경 일어났다고 하면서 이에 맞추어 당시 주변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으나,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은 1932년 2월 초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기록으로 확인이 된다. 따라서 사건과 당시 상황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대부분 잘못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아래를 참고하라.

사건이 일어난 시기나 주변 상황 설명은 잘못되었지만 고동뢰 소대장을 살해한 범인이 김일성장아청(張亞靑) 등이었다는 것은 두 증언이 일치하므로, 이 새로운 증언은 어느 정도 이명영의 책에 나오는 증언을 뒷받침하는 측면이 있고,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을 상당히 높여준다.

조국광복회 관련 김일성 회고록의 조작을 사실로 인정

저자는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를 김동명(북한 김일성의 가명), 이동백(리동백), 여운형(려운형)이 주도해서 만들었다는 김일성 회고록의 아무 근거없는 조작된 주장을 검증없이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다.[11]


저자는 관련된 1차 문헌인 사상휘보 제14호의 기록의 존재도 모르는 듯하다.

조국광복회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1차문헌이다. 창립선언문, 10대 강령, 발기인 등이 나옴.

항일연군 1로군 6사장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가?

유순호는 보천보사건의 주역으로 알려진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이 바로 북한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동일인 여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으나, 많은 과거 사료들이 전산화된 후 검색으로 발견된 상당수의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하면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나이는 35~36세 가량,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혜산진)으로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거의 확실히 결론이 내려진다. 후일의 증언이 수많은 당시 기록을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검증이 필요하다.

당시의 기록보다는 후일의 증언이 잘못될 소지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둔필승총(鈍筆勝聰), 즉 "우둔한 글솜씨로라도 남긴 기록이 총명한 기억력보다 낫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조부가 만주 경찰관으로 있으면서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김일성과 협력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12] 그러나 자신의 조부가 알던 다른 김일성이 어떤 사람인지는 밝힌 적이 없는 것같다. 항일연군에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 한 사람만 있은 것은 아니라고 저자도 인정한 것이 아닌가?

보천보사건의 지휘자는 누구인가?

보천보사건을 기록한 당시 문헌은 수도없이 많지만, 모두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 등이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유순호는 김일성은 보천보에 오지도 않았고, 실제 지휘한 사람은 6사 참모장 왕작주(王作舟)라고 말한다. 당시의 모든 기록에 반하는 이런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6사의 참모장이 나오는 당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고, 왕작주(王作舟)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941년의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6사 참모장이 허모(許某)로 나온다.[13][14]

잡지 『삼천리(三千里)』 기사의 해석은 타당한가?

저자는 하권의 "제8부 내 조국 제35장 보천보의 총소리 5. 전영림과 반목"에서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실린 김일성 관련 기사를 인용하는데, 해석이 상당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양일천의 기사 “국경의 비적 괴수 김일성 회견기”가 실린 『삼천리』 발행 일자가 1937년 10월 1일이니, 이때쯤이면 보천보전투에 이어 3종점전투와 간삼봉전투에 이르기까지 장백현 경내에서 만주군뿐만 아니라 만주로 출정 나온 조선 주둔 일본군에게까지 김성주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조선인인 것은 이미 세상에 알려졌고, 나이도 서른 미만인 것이 드러났다.
“「마적 대장 김일성(金日成)」이라 하면 국경 일대에선 너머나 알니엇고 신문지(新聞紙)나 본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리라. 총사장(總師長)이란 이름을 가지고 X에 가까운 만인(滿人), 조선인(朝鮮人) 부하를 이리저리 통제해 가며 습격 싸홈, 완강히 군대와 저항해 가며 산중 소굴을 지휘해 가는 그! 그는 과연 어떤 인간인고? 김정부옹(金鼎富翁)은 많은 흥미를 가지고 이 수수꺽기의 인간을 회견하였든 것이다. 후리후리한 키, 우락부락한 말소리 음성을 보아 고향은 평안도(平安道)인 듯. 예상보다 연령은 너머나 젊은 혈기방장(血氣方丈)의 30 미만의 청년. 그는 만주어(滿洲語)에 정통, 어대까지 대장이란 표적(標的)이 없고, 복장, 식음(食飮)에까지 하졸과 한가지로 기거를 같이하며 甘苦(감고)를 같이 하는데 그 감화력과 포용력이 잇는 듯하게 보엇다.”[15]

회고록에서 직접 인용한 『삼천리』 잡지의 기사 내용 가 운데 “총사장이란 이름을 가지고 X에 가까운 만인" 이라는 표현은 무척 흥미롭다. '총사장'이란 바로 항일연군 내 직위였던 사장(師長, 사단장)을 뜻한다. 결코 ‘사령관’, ‘장군님’ 같은 명칭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재차 증명해 준다.

그렇다면 ‘x’와 ‘만인’은 무슨 뜻일까? 필자의 짐작에 이 기사를 썼던 양일천은 나름대로 ‘국경의 비적괴수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x’는 혹시 신(神) 자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양일천이 쓰고자 했던 만인은 한자로 ‘萬仞(아주 높거나 대단함을 이르는 말)’ 일 듯하다. 일제 총독부의 통제를 받았던 당시 조선 언론들이 오로지 살아 있는 일본의 천황과 전몰한 자국의 군인들에게만 가져다 사용 할 수 있는 신 자를 함부로 조선인에게 가져다가 붙일 수 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인도 한자가 아닌 한 글로 쓴 것은 변명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만인은 ‘蠻人(미개한 종족)’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잡지 기사의 "총사장(總師長)이란 이름을 가지고 X에 가까운 만인(滿人), 조선인(朝鮮人) 부하를 이리저리 통제해 가며..."라는 부분의 'X'는 문맥상으로 부하의 숫자를 가리키는 것일테지만 그 수를 몰라서 'X'로 표기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부하들 중에는 만주인과 조선인이 있다는 의미에 불과한데, 만인(滿人)을 이상하게 다르게 추정해 해석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X'를 난데없이 '신(神)' 자로 해석하는 것은 무슨 억지인지 모르겠다. 김일성의 부하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신(神)에 가까운 만인(滿人), 조선인(朝鮮人) 부하"라는 말을 했겠는가? 북한 김일성을 '신(神)'과 같은 존재로 보는 저자 자신의 견해가 무의식 중에 표출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김일성 회고록에 인용된 삼천리 기사는 한자없이 모두 한글로 되어 있으나[16] 삼천리 기사 원문에는 모두 한자 그대로 나와 있어 달리 해석할 여지도 없다.

또 사장(師長)을 사단장이라 했는데, 항일연군의 사장(師長)은 100 ~ 300명 정도의 소부대인 사(師)의 지휘관으로 중대장급이며,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소장(少將) 급의 사단장(師團長)과는 격이 전혀 다르다.

위에서 김일성이 평안도 출신이고 나이가 30미만이라 한 것으로부터 저자는 이를 북한 김일성으로 보고있지만, 《삼천리(三千里)》 1938년 11월호에 이어진 회견기사에는 김일성이 어릴 때 간도로 왔고, 장백현에 온 지 30년이 넘었으며, 간도에 부모와 처자가 있다고 하여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장백현에 온 지 30년이 넘었다는 말이 사실이면 김일성의 나이는 적어도 40에 가까울 것이다.

저자는 지주 김정부가 회견한 위의 김일성을 북한 김일성으로 당연시 하지만, 이 사람은 1936~7년간에 활동한 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기록과 증언이 엄청나게 많다.[17] 저자는 총독부의 검열을 받던 당시 신문 기사는 믿을 수 없고, 일본 관료나 만주국의 기록도 믿을 수 없다는 논리로 이를 부정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기록은 똑같은 유형의 기록이라도 틀림없는 사실처럼 인용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귀순한 여당원과 김일성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운명(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삼천리(三千里) 제10권 제11호》 (1938년 11월 01일)

김일성 부대에 잠입한 첩자 지순옥 관련 기술은 완전한 오류

하권에 나오는 김일성 부대에 잠입한 첩자 지순옥(池順玉) 관련 기술은[18] 저자가 자신이 들은 관련자 증언을 토대로 썼다고 주장하나 내용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지순옥은 김일성의 부하 강흥석(姜興錫)의 아내인데, 1939년 8월 일제가 남편을 찾아온 것으로 꾸며 부대에 잠입시킨 스파이였다. 1940년 6월 김일성부대를 떠나 돌아나온 지순옥이 진술한 김일성 부대 상황에 대한 훈춘 영사의 보고서가 있다.

標題:7 昭和15年7月5日から昭和15年7月26日
pp.33~43 : [琿領情機密 第一八六號] 金日成匪團ノ內部狀況ニ關スル件 : 1940-07-26
在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는 당시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대사(関東軍司令官兼駐満洲国大使)였다.

김일성 회고록에도 지순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19], 얼마나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최소한 위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한 부분은 정확하다. 하지만 저자 유순호는 회고록에 인용된 이 보고서를 찾아보지 못하고, 이 훈춘영사의 보고서라는 것을 회고록의 필자가 조작한 것으로 단정하면서, 자신이 들었다는 관련자들의 후일 증언이 정확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훈춘영사의 보고서와 전혀 다른 엉터리이다.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 영사의 보고서 의하면 이런 공작은 간도성 경무청(間島省 警務廳)이 주도했으며, 함북 삼장(三長) 경찰서가. 1939년 6월 25일 김일성 비단의 이금준(李金俊, 32세)을 검거하여 특무과 계원이 취조한 결과 강흥석의 가족이 연길현 평안촌(延吉縣 平安村)에 거주하는 것을 알게 되어서 시작된 것이다. 지순옥은 특무과 카타다 경좌(片田 警佐)나 미나미 경위(南 警衛)에게 연락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나온다. 그러나 유순호는 이 공작은 간도성 정부 경비과장으로 있었던 다나카 요지(田中要次)가 강흥석에 대한 정보를 듣고 노조에 토벌대(野副昌德 討伐隊)의 후쿠베 구니오(北部邦雄) 중좌에게 알려주어 후쿠베가 주도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 공작은 노조에 토벌대나 후쿠베 구니오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 명백하다. 노조에토벌대가 한 일이라면 결과보고도 자신들이 상부에 직접 하지 영사관이 나서 보고할 이유가 없다. 보고서를 쓴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 영사도 조작된 인물이 아니라, 저자가 당시 훈춘영사라 주장하는 다키야마 야수지로(瀧山靖次郞, Takiyama Yasujiro)의 후임 영사인 것이 확인된다. 이 훈춘 영사의 보고서는 김일성 회고록에도 《현대사 자료》란 책에 나온다고 친절하게 밝혀놓았지만[20], 저자는 왜 찾아보지도 않고 조작이라 단정했는지 알 수 없다.

이 사례는 저자가 들었다는 관련자들의 후일 증언이 거의 신뢰할 수 없다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지순옥의 남편 강흥석(姜興錫)의 이름조차 강홍석으로 잘못 적고 있는데, 저자는 자료도 꼼꼼히 챙겨보지 않은 것같다.

저자의 유튜브 방송에 나오는 지순옥의 이야기도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청설TV] 김일성 독살 임무받고 왔던 부하의 부인, 임무 발각돼 오히려 성폭행당하고 돌아간 사연 (1) 2020. 2. 10
[청설TV] 김일성 독살 임무받고 왔던 부하의 부인, 임무 발각돼 오히려 성폭행당하고 돌아간 사연 (2) 2020. 2. 13.

동북항일연군이 한국독립운동사의 일부가 될 수 있나?

저자는 한국인들이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의 활동을 제대로 평가하여 한국독립운동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가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아도 이미 그것을 포함시킨 독립운동사 책도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이 과연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만주의 조선인들이 다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부대 자체가 중국공산당 산하인데다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감독을 받았다. 본질적으로 중공당과 소련을 위해 활동한 부대이다. 김일성 본인이 1942년 집필했다는 「항련제1로군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나 소련 시절에 쓴 만주서의 활동에 대한 글 어디에도 조선독립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그냥 중국공산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을 뿐이라는 증거이다. 조선 독립에 대한 갈망(渴望)이 절절이 묻어나는 이승만, 김구의 글들과 대비된다.

또한 그는 만주에 있을 때는 일본이 물러가면 중공당이 만주의 안도현장 자리나 하나 시켜주기를 바랬고, 소련으로 넘어가서는 소련군에서 출세하기를 원했을 뿐 조선으로 돌아오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소련군에서의 이름도 진지첸(김일성의 중국어 발음)이었고, 중국말은 능하나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리며 잘 하지도 못했다. 운좋게 스탈린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어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을 뿐이다.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대부분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가서 성장하여 중국에 반쯤 동화된 사람들이고, 자신들 끼리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역사나 국내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조선에 아무 기반도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조선독립에 대한 절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냥 만주의 젊은 사람들 분위기에 휩쓸려 항일연군에 가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중국 조선족(조선 혈통의 중국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이 김일성 등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북한으로 데려와 핵심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해방 후 북한이 아니라 만주로 가서 조선족이 되었을 것이다. 국내로 와도 아무 기반이 없으니 정치무대에 얼굴 내밀 형편도 아니고, 누가 알아줄 사람도 없으니 익숙한 만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북한으로 오지도 않고 만주의 조선족이 된 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도 다수 있다.

그들 중 한국으로 온 사람은 단 1명도 없으니, 그들의 투쟁사가 한국독립운동사에 들어와야 할 이유도 없다. 원래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사라기 보다는 중국 조선족들의 항일투쟁사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되는 바람에 항일연군에서의 그의 활동이 북한 역사책의 핵심을 차지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항일연군이 아니라 날조한 조선인민혁명군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중국공산당은 일본 중국침략의 최대 수혜집단

동북항일연군이 소속되었던 중국공산당은 일본의 중국침략의 최대 수혜집단이다. 일본의 침략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국민당군에 토벌되어 역사무대에 등장해보지도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모택동은 일본 침략군과 싸우는 장개석의 국민당군의 정보를 거액을 받고 일본에 팔아넘기기도 하였다. 국민당군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자신들은 항일투쟁은 뒷전이고 몰래 세력을 키우는 일에 진력하였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에 벌어진 국공 결전에서 최종 승리하여 본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중국 본토를 차지하는데 성공한 모택동은 이후 몇 차례 일본의 중국 침략에 감사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하지만 모택동 집권기에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등의 난동을 부려 7천만에 가까운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의 김일성 왕조가 조작된 김일성의 항일투쟁 역사의 진실이 알려지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개방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중국공산당도 자신들이 집권 후 빚어낸 참극에 대한 응징의 두려움 때문에 절대로 체제개혁을 할 수 없다. 인민을 착취하여 공산당 최고 간부들의 배만 불리는 부패한 독재 권력의 세계 지배에 대한 야욕이 전인류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함께 보기

각주

  1. [새책 출간] 보도자료 (뉴욕조선족통신)
  2.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2> 1990.07.08 동아일보
  3. 소련(蘇聯) 안전기관은 KGB (국가보안위원회, Committee for State Security)를 말하며, 당시의 명칭은 그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4. 껍데기만 남은 인간의 자화상, '꺼삐딴 리'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2017. 11. 2
  5. 《꺼삐딴 리》 위키백과
  6. 세기와 더불어 위키백과
  7.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본문 中 4. 전대미문의 역사 왜곡 (시대정신, 2006.04.15.) pp. 43~46.
  8.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년) pp.30~31
  9. 미 선교사 중매로 태어난 김일성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RFA 2017-02-03
  10. 김일성의 부모 중매인 미국선교사 넬슨 벨 리버티코리아포스트 2019.10.22
  11. 김일성 1912~1945: 중권 희망과 분투 / 27장 항일무장토비 / 1. “나를 아는자, 당신 뿐입니다”
  12. 세상에 폭로된 김일성 항일의 진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 블로그 2017-02-01
  13. (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아시아 투데이 2015-03-16
  14. 「惠山事件 判決書」(金正柱 編,≪朝鮮統治史料≫6, 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0), 543∼841쪽.
    「惠山事件 判決書」 : 日帝暗黑期統治史料集 6권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0) pp.543~840
  15. 국경의 비적 괴수 김일성 회견기(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1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3장 "5. 애국지주 김정부"
  17. 김일성 가짜설#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전공을 훔친 가짜
  18. 《김일성(金日成) 1912 ~ 1945》 하권 / 10부 결전 / 46장 목란산 기슭
  19. 세기와 더불어 7권(계승본 1편, 1996년 출간): 1937년 11월 ~ 1940년 3월 / 제21장 대부대 선회 작전의 총성 (1939년 7월 ~ 1940년 3월) / 1. 밀영에 찾아온 녀인
  20.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 (東京 みすず書房, 1976); 해당 문서는 지금은 일본의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에도 올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