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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조총련 문건에는 김유라 아닌 김정일===
===1962년 조총련 문건에는 김유라 아닌 김정일===
1962년에 작성된 조총련 문건에는 김유라 아닌 김정일로 나온다. 이 시기는 김정일이 21세로 대학을 다닐 때이며, 대외적으로는 이름이 거명되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조총련은 교육자료에 이미 김정일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적어도 이때는 김유라에서 김정일로 개명한 것이 확실하다.
1962년에 작성된 조총련 문건에는 김유라 아닌 김정일로 나온다. 이 시기는 김정일이 21세로 대학을 다닐 때이며, 대외적으로는 이름이 거명되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조총련은 교육자료에 이미 김정일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늦어도 이때는 김유라에서 김정일로 개명한 것이 확실하다.


* [http://archive.history.go.kr/id/DSE002_01_00B0030 선전원들에게 주는 담화 자료 제5호]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http://archive.history.go.kr/id/DSE002_01_00B0030 선전원들에게 주는 담화 자료 제5호]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2020년 2월 25일 (화) 12:21 판

김경희(1946.05.30~ )의 백일 기념 사진. 김일성김정숙(金正淑, 1917~1949) 및 3자녀가 모두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김정숙, 유라(김정일), 김경희, 김일성, 김정일의 남동생 슈라[1]. 맨 오른쪽 여자는 유모인 것 같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있었던 일본인 여성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일 가능성이 있다.[2]

김정일은 부친 김일성으로부터 북한 최고 권력을 세습하여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물려준 독재자인데, 권력을 세습하는 과정에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름, 출생 연도, 출생지 등을 모두 조작하여 백두혈통의 가짜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김정일의 이름도 몇 차례 바뀌었다. 1941년 소련서 출생할 때 지은 소련식 이름 유라(Юра, Yura)를 해방 후 평양에 와서도 계속 쓰다가 남산 고급중학교를 졸업할 때인 1960년 7월에야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하고, 이어 후계자로 확정된 1980년부터 다시 김정일(金正日)로 바꾸었다.

입증된 김정일의 출생 관련 조작의 사례

김정일의 출생과 관련한 북한의 주장들이 모두 조작이라는 것은 우남위키의 아래 항목들에 밝혀져 있다.

김정일의 이름 조작 이력

북한은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출생했고, 출생 당시부터 김정일이란 이름을 써 온 것처럼 주장하며, 처음에 소련식의 이름을 가졌던 것을 부인한다. 소련식의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백두산 밀영 아닌 소련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김정일이 1941년 소련서 출생할 때 지은 소련식 이름 유라(Юра, Yura)를 해방 후 평양에 와서도 계속 쓰다가 남산 고급중학교를 졸업할 때인 1960년 7월에야 김유라를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것이 최근에 발굴된 새로운 자료들로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이어 후계자로 확정된 1980년부터 다시 이름의 한자를 김정일(金正日)로 바꾸었다.

출생 당시의 이름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소련 연해주의 라즈돌노예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출생 당시의 이름은 소련식의 유라(Юра, Yura)였고, 한국식 이름은 없었다. 유라는 소련 이름 유리(Юрий, Yuri)의 애칭이다.

흔히 소련에서 김정일의 정식 이름은 소련식 작명법을 따라 유리 일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Yuri Irsenovich Kim)[3]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련에 있을 당시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센(Ким Ир Сен, Kim Irsen)이 아니라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으므로[4][5][6] 김정일의 이름도 유리 지체노비치 진(Юрий Жичэнович Цзин, Yuri Zhichenovich Jing)[7]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북한에 온 뒤인 1945년 10월 2일부터 Ким Ир Сен(Kim Irsen)으로 이름을 바꾸어 쓰기 시작했으므로[6][8] 그때부터 소련군들은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도 유리 일세노비치 킴(Yuri Irsenovich Kim)으로 바꾸어 불렀을 수 있다.

해방 후 평양에 온 뒤로 김정일은 실제로는 김유라의 이름으로 불렸고, 여전히 한국식 이름은 따로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이 아직 어릴 때라서 그의 이름을 기록한 당시 문헌은 발굴된 것이 없고, 당시 일을 아는 관련자들의 후일 증언만 있다. 하지만 증언만으로는 북한의 생떼를 부정하는데 한계가 있다.

김정일의 이름이 나오는 최초의 기록

김정일김경희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CIA의 1951년 문서[9]. 두번째 페이지에 1951년 3월 1일자 부산의 국제신보 기사를 인용했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3월 1일에 부산의 국제신보(지금의 국제신문)는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의 증언을 보도하는데[10], 김일성의 자녀로 11세된 아들 김유나(Kim Yu-na), 5세인 딸 김경자(Kim Kyong-cha)가 있다고 하였다.[9] 아래는 국제신보 기사를 인용한 미국 CIA 문서의 내용이다.[11]

NURSE SAYS KIM IL-SONG SUFFERING FROM HEART AND VENEREAL DISEASE -- Pusan Kukche Sinpo, 1 Mar 51

Cho Ok-hui, a 25-year old former private nurse of Kim Il-song, disclosed in a press interview on 28 February 1951 in the office of Col Kim Ch'ang-yong[12], director of the Joint Investigation Headquarters, that Kim Il-song is suffering from a heart ailment as well as from "various kinds" of venereal diseases. The nurse asserted that Kim Il-song is a feminist in his own way and, vehemently advocating the "equal rights for both sexes" which he incorporated in the constitution of North Korea, takes liberty of "any woman that comes in his sight." The puppet premier is being treated with penicillin and “Sarupalsan” [Salvarsan?][13] injections. He has been a regular patient of the P'yongyang Central Hospital.

Kim Il-song has an 11-year old son, Kim Yu-na, and a 5-year old daughter, Kim Kyong-cha.

그의 이름이 유라(Yura) 아닌 유나(Yu-na)로 적힌 것은 조금 이상하지만 아마 국제신보에 한자 有羅(유라) 정도로 표기된 이름을 유나로 읽고 영어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1944년 소련에서 태어나 1947년 평양에서 익사한 김정일의 동생 슈라의 이름을 受羅(수라)로 적은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볼 때[14] 가능한 일로 보인다.

이것은 김정일의 이름이 명문 기록으로 나오는 알려진 최초의 사례인데, 당시 그의 이름이 "정일" 아닌 "유라"였다는 것을 입증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또 이 기사로 미루어 동생 김경희의 처음 이름은 김경자일 가능성이 있다.

이 기록에서 그의 처음 이름이 소련식인 유라로 명백히 확인되므로 이것은 그가 백두산 밀영 아닌 소련에서 태어났다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1959년 김일성의 소련방문 수행 당시 이름은 유라

김일성은 1959년 1월 27일 ~ 2월 5일 간에 열린 제21차 소련 공산당대회[15]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그때 남산 고급중학교 학생이던 김정일도 따라 갔다. 당시 소련대사관 기록에 김일성을 수행한 사람으로 아들 유라(Юра, Yura)가 나오므로[16], 당시까지도 그는 김정일 아닌 김유라의 이름을 사용했던 것은 확실하다.

대표단은 [1959년] 1월 23일에 IL-14 비행기[17]를 타고 모스크바로 출발할 것입니다. 대표단과 함께 수행원 6명이 가는데, 그중 한 명은 김일성의 아들 유라(Юра, Yura)이고, 9학년 학생입니다.

Делегация вылетит в Москву 23 января на своем самолете ИЛ-14. Делегацию будет сопровождать 6 человек, в том числе сын Ким Ир Сена - Юра /ученик 9 класса/.

영역 : The delegation will fly to Moscow on January 23 on its IL-14 aircraft. The delegation will be accompanied by 6 people, including the son of Kim Il Sung - Yura / a student of grade 9 /.

김정일이 이때 김일성을 따라 소련에 갔다는 것은 당시 동행했던 황장엽(黃長燁)도 후일 한국으로 망명해서 증언한 바 있다.[18][19][20][21]

1962년 한재덕(韓載德)의 『김일성을 고발한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22]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23], 5월 30일 자에 김일성의 두 아들 이름이 형은 「슈우라」, 동생은 「애애라」로 나온다.

한편 나는 이때에 그들의 유치원도 가기전인 두 어린애가 모두 「소련」에서 났으며 그 이름마저 형은 「슈우라」 동생은 「애애라」라는 「로서아」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무리 「소련」에서 난 아이들이라도 다른 二世(이세)들은 그래도 한국식 이름을 가지는게 대부분인데 어째서 金日成(김일성)의 아이들은 이름까지 「로서아」 식으로 짓고 이때까지도 「슈우라」 「애애라」하고 부르는 것일까? 기이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하간 우리는 여기에서 金日成(김일성)이 八·一五(팔·일오) 해방 때까지 「소련」에서 적어도 四(사), 五 (오)년 이상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가정생활까지 해온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재덕은 두 번 김일성의 집에 초대받아 가서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인 두 아들을 본 적이 있다. 「애애라」는 「유라」를 잘못 듣고 기억한 것으로 보이고, 형제간의 이름도 혼동해서 바꾸어 말했지만, 당시 김일성 자녀들의 이름이 소련식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는 슈라가 살아 있을 때 김일성의 집에 갔고, 한국에 귀순해서 이 글을 쓴 때는 유라가 김정일로 개명한 직후이지만 그 사실을 물론 알 수는 없었다.

1962년 조총련 문건에는 김유라 아닌 김정일

1962년에 작성된 조총련 문건에는 김유라 아닌 김정일로 나온다. 이 시기는 김정일이 21세로 대학을 다닐 때이며, 대외적으로는 이름이 거명되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조총련은 교육자료에 이미 김정일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늦어도 이때는 김유라에서 김정일로 개명한 것이 확실하다.

제 목 : 선전원들에게 주는 담화 자료 제5호
발행국 : 일본
발행처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강연파
발행년 : 1962.06
취급인물 : 김일성; 김정일

1970년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의 수기에 나오는 유라

해방 직후 김일성 관저에는 고바야시 가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 여자가 가정부로 있으면서 가사 일과 자녀를 돌보는 일을 도왔다. 그녀는 일본으로 귀환한 후 1970년에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제목의 수기를 썼는데, 여기에 김일성의 아들로 장남 유라(ユーラ)와 차남 슈라(スーラ)의 이름이 나온다.[2]

이것은 그녀가 일하던 해방 직후 당시의 말한 것이다. 이 글이 출판될 당시에는 유라는 김정일로 개명한 뒤인데, 그녀는 개명한 이름 김정일은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 1970년까지도 김정일의 존재와 이름은 한국이나 일본 등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고바야시는 특수한 경력 때문에 자신만 아는 일을 말한 것이다.

1974년부터 김정일(金正一)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

한국 신문에 김정일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하는 것은 그가 후계자로 부상하는 1974년부터이며, 한동안 한자로 金正一로 나온다. 그러나 그가 김유라에서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당초 金日成(김일성)의 두아들은 모두 蘇聯(소련)식 이름으로 長男(장남)은「슈라」次男(차남)은「에라」라고 불렀는데 長男(장남)이 六(육)·二五(이오)전에 대동江(강)에서 수영하다 익사한뒤 ....
1939년 소련태생, 본명 수라, 소련명 유리
김정일 사진은 오보이다.
[사진] 金正一(김정일) 1974.11.21 경향신문 2면
진짜 김정일 사진의 최초 보도

1980년 김정일(金正日)로 개명

1980년 10월의 당대회 직후부터 김정일은 이름의 한자 표기를 金正一에서 金正日로 바꾸었다. 이후 한국, 중국, 일본 언론에서도 金正一로 쓰던 이름을 金正日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이는 모친 김정숙 이름의 正자와 부친 김일성 이름의 日을 딴 것으로, 부모의 빨치산 투쟁 정신을 계승한 유일한 적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1993년에 김유라에서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시기가 1960년으로 밝혀져

1993년 1월 중앙일보는 러시아에 사는 김정일과 남산고급중학 동창생이 그가 이름을 김유라에서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한 것은 고급중학을 졸업할 때인 1960년 7월이라고 증언했다고 보도하였다.[24][25][26]

김정일의 중-고교 학적부 등 출생지 난에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기록돼 있고 김정일도 교내 토론회 등에서 자신의 고향은 하바로프스크라고 소개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김정일은 고등학교 때까지 소련이름「유라」를 사용했던 것도 처음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중앙일보가 최근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김정일의 중·고교 동기 동창생들로부터 입수한 졸업앨범과 동창생들의 증언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이 민족의 영산 백두산 밀 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밀 영 부근의 산봉우리를 구월 봉으로 지정, 선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국내외에서는 김정일이 5세 때인 1947년까지 소련이름「유라」로 쓰다 김정일로 개명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60년 7월 발행한 김정일의 남산고급중학교(우리의 중·고교) 졸업앨범에는 김정일의 이름이 「김유라」로 적혀 있다,

또 김단(金丹, 51)씨 등 러시아에 살고 있는 김정일의 중-고교 동창생들에 따르면 60년 7월 중순 졸업을 앞두고 졸업생들의 장래 진로문제 등을 발표하는 발표회에서 그는 『나의 조선이름이 김정일로 결정돼 이 이름으로 최근 공민증까지 발급됐으니 앞으로는 김정일로 불러 달라』고 개명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었다고 한다.

또 그는 학적부 등에 자신의 출생지를 하바로프스크로 기록했고 자신을 소개할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소련군에 복무할 당시인 l942년 2월 16일 하바로프스크 병영에서 태어났다』고 밝히고 『때문에 나의 고향은 소련 땅 하바로프스크』라고 말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김정일은 남산 고급중학교를 졸업할 당시인 1960년 7월 김유라에서 김정일로 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졸업앨범에 그의 이름이 김유라로 나와 있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라 할 사진이 나와 있지 않아, 그 이름이 김정일이 맞는지 확인되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27]

또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출생했다고 한 동창생의 말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북한이 김정일의 생년을 1941년에서 1942년으로 조작한 것은 1982년부터인 것이 밝혀져 있으므로[28] 남산 고급중학교 시절에는 생년을 1942년으로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1993년 당시는 동창생의 증언이 확실하다고 믿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2019년에 발굴된 위에 소개한 1951년 3월 1일자 국제신보 기사와 1959년 소련 대사관 기록에 의해 김정일은 평양에 온 이후로도 1959년까지 유라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히 확인되었으므로 이제는 1993년 중앙일보에 실린 1960년 7월에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했다는 동창생의 증언은 사실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29]

김정일의 동창생이 김정일의 생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북한의 주장을 따라 1942년 생이라 했을 수 있다. 또 김정일은 남야영 (B 야영)이 있던 연해주의 라즈돌노예 마을에서 1941년 2월 16일에 태어났지만, 1942년 7월에 88여단이 있던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하여 거기서 유년기를 보냈으므로 라즈돌노예에 대한 기억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고향을 하바로프스크로 여기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이 고급중학을 졸업하면서 개명한 것은 그가 공민증을 발급 받고, 대학에 진학하면 성인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해야 할 때이므로 소련식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30]. 이는 김일성이 해방 후 평양에 와서 공개 활동을 시작하는 1945년 10월 14일 집회에 진지첸이란 소련군에서의 이름을 버리고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나타난 것과 유사하다. 김정일은 소련식 이름을 버리는 것 외에는 개명한 새 이름 때문에 얻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수상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프리미엄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김정일이 1960년에 김유라에서 김정일로 개명한 것이 확실해졌으므로 이로 미루어보면 형제들 이름에 '일(一)'을 항렬 글자로 쓴 것은 김정일보다 김성애의 아들인 이복 동생 김평일(金平一, 1954 ~ )이 먼저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

  1. 김만일 - 위키백과
  2. 2.0 2.1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
  3. 김일센(Ким Ир Сен, Kim Irsen)의 아들 유리(Юрий, Yuri)라는 의미의 소련식 작명
  4.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5.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6. 6.0 6.1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179~185
  7.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의 아들 유리(Юрий, Yuri)라는 의미의 소련식 이름
  8.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9. 9.0 9.1 국제신보 기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미국 CIA 문서에 인용되어 전한다 : NORTH KOREAN AGENTS CONFIRM DEATH OF SOVIET MILITARY ADVISOR AND ILLNESS OF KIM IL-SONG REPORT May 11, 1951 : CIA 문서
  10.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金日星(김일성)의 看護婦(간호부) 合同搜査本部(합동수사본부)서 逮捕(체포) 부산일보 1951-03-01
  11. NORTH KOREAN AGENTS CONFIRM DEATH OF SOVIET MILITARY ADVISOR AND ILLNESS OF KIM IL-SONG 미국 CIA 문서 1951년 5월 11일자
  12. 김창룡(金昌龍, 1920~1956) 위키백과
  13. [의과학 칼럼] 최초의 블록버스터 의약품 `살바르산` - 디지털타임스 2014. 11. 25
  14. 비화 김일성과 북한 : 전 북한군 사단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 <4> 김성애는 시종비서 여군 출신 1990.05.13 동아일보 5면
  15. 21st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Wikipedia
  16. 러시아인 북한 연구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박사 발굴 자료.
  17. Ilyushin Il-14 Wikipedia
  18. 황장엽 강좌 - 민주주의 철학 강좌 : 북한의 인권문제(5) (사)북한민주화위원회
  19. 황장엽 회고록
  20. [황장엽-김덕홍 진술내용③]개전시기 김정일이 결정할 것 동아일보 1997-07-10 20 : ○59년1월 황장엽은 김부자를 수행하여 소련 공산당21차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김정일(17세)이 김일성의 일정을 주도해서 짤 정도로 맹랑한 모습을 보였음.
  21. 황장엽씨 또 인터넷에 글 중앙일보 2001.08.04 종합 4면
  22. 한재덕(韓載德, 1911~1970) 위키백과
  23. 단행본 :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치하의 북한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24. (5) 성장과정(상) 중간성적의 평범한 중고시절 [중앙일보] 1993.01.28 종합 11면
  25.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한반도 절반의 상속인 김정일』, (중앙일보사, 1994) pp.52~53
  26. 정창현, 《김정일의 성장과정과 후계체제 확립》 『김정일 연구』 (통일부, 1999.12) p.18
  27. '少年 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신동아 2000년 8월호 : 당시 발행된 졸업앨범에 김정일은 ‘김유라’라고 기록돼 있다고 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앨범에 사진이 실리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28. 김정일 생년 : 우남위키
  29. John H. Cha with K. J. Sohn, Exit Emperor Kim Jong-Il: Notes from His Former Mentor (Abbott Press, 2012년 2월 29일) p.20
  30. [사건으로 보는 북한] 82년 김정일 백두산출생 신화 NK조선 2002-03-09 : 생모 김정일 낳을 때 소련병영에 머물러 / 김정일 본인 40회 생일 앞두고 출생설 조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