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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부대에 잠입한 첩자 지순옥의 보고==
==김일성 부대에 잠입한 첩자 지순옥의 보고==
만주국 간도성 경무청(間島省 警務廳)은 1939년 8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에 김일성의 부하 강흥석(姜興錫)의 처 지순옥(池順玉)을 첩자로 들여보냈는데 1940년 6월 말에 돌아나와 보고한 내용에 여자 대원으로 주임(主任) 김희순(金熙順, 29세)과 박정숙(朴貞淑,25세)이 나온다. 나이는 맞지 않지만 주임 김희순(金熙順)은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 김혜순(金惠順)으로 보이고, 박정숙(朴貞淑)은 김혜순과 함께 체포된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만주국 간도성 경무청(間島省 警務廳)은 1939년 8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에 김일성의 부하 강흥석(姜興錫)의 처 지순옥(池順玉)을 첩자로 들여보냈는데 1940년 6월 말에 돌아나와 보고한 내용에 여자 대원으로 주임(主任) 김희순(金熙順, 29세)과 박정숙(朴貞淑,25세)이 나온다. 나이는 맞지 않지만 주임 김희순(金熙順)은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 김혜순(金惠順)으로 보이고, 박정숙(朴貞淑)은 김혜순과 함께 체포된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아래 훈춘 영사(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의 1940년 7월 26일자 보고서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강덕(康德) 7년 = 소화(昭和) 15년 = 1940년. 강덕(康德)은 만주국 연호임.  
강덕(康德) 7년 = 소화(昭和) 15년 = 1940년. 강덕(康德)은 만주국 연호임.  

2020년 12월 15일 (화) 07: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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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1940년 4월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8권에 나오는 사진이다. 4권에는 《꾀꼬리》로 소문난 반일자위대원 김혜순으로만 나온다.[1]

김혜순(金惠順, 1917~ ?)은 만주 빨치산 시절 김정숙 이전 김일성의 처로, 194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되었다[2].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북한에서 살았다.[3][4] 1994년 김일성 사망 때까지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5][6]


개요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김일성의 처로 1940년 가을 소련으로 도주하기 직전 결혼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과, 김정숙 사후에 재혼한 김성애 두 사람만 인정한다. 김일성 생전에는 공개활동을 활발히 하기도 했던 김성애마저 김일성 사후에는 김정일에 의해 그 존재가 지워지고, 지금은 김일성의 처로 김정숙만 있는 것처럼 선전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시절 김정숙 이전에 거쳐간 여자도 많고,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후에도 여자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문란했다. 6.25 전쟁 중에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는 김일성이 매독에 걸려 606호 주사를 맞는 것을 10여 차례 보았다고 증언했다.[7] 이 많은 여자들 중 누구를 처로 보고, 누구를 그냥 잠간 스쳐 지나간 여자로 볼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만주 빨치산 시절 비교적 오래 김일성과 관계를 맺었던 여자로 처음에는 한성희가 있었고, 두번째가 김혜순이다. 한성희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후일 증언만 있을 뿐 당시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없으나, 김혜순의 존재는 기록으로도 확인이 된다. 일본군 문서에 김혜순은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 아래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으로 나온다.[8]

일본군에 체포되어 귀순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는 김일성의 처 김혜순(22세)이 4월 초에 체포되어 귀순, 전향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 그녀를 간호하던 박정숙(朴貞淑, 24세)도 같이 체포되었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이 기사에 당시활동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가 김혜순으로 나오는 것을 들어 이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9] 당시는 북한 김일성의 처로 김정숙과 김성애 외에는 달리 알려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위 기사에 의하면 체포된 김혜순은 자신이 13살 때 1930년 5.30 간도 폭동이 일어나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김일성을 만났고, 그가 자신을 데리고 가서 보살펴 주어 같이 살게 된 것처럼 주장했다. 실제로 간도폭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명으로 김일성(金一星)이 있고, 그에 대한 재판 기록도 남아 있는데,[10][11][12][13] 그는 감옥을 탈출하여 소련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북한 김일성은 간도폭동에 간여한 적이 없으므로 이 또한 이명영이 김혜순의 남편 김일성을 다른 사람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말은 김혜순이 허위로 진술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혜순은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1887~1981) 소장[14]이 지휘하는 노조에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명영이 1971년 2월 일본으로 당시의 공작대장 나가시마 다마지로 (長島玉次郞) 조장(曹長)[15]을 찾아가서 들은 증언에 의하면 김혜순은 귀순 후 한 때 자신을 체포한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살며, 나가시마의 처와도 친해졌다고 한다.[16][17]

나가시마는 귀순한 김혜순을 이용하여 김일성을 귀순시키려는 공작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고 하였다. 아래는 김혜순과 관련한 나가시마의 후일 증언이다.[16]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가 입수한 위 사진 속의 안경 낀 인물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알려졌다.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이지만 북한도 이 사진을 변조하여 김일성이라고 하면서 내놓고 있다.[16][18] 이 사진도 이명영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을 북한 김일성과 다른 인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 한번은 金日成부대의 본거지를 점령한 일이 있었다. 山속 깊은 곳에 밀영(密營)을 만들어 놓고 거기가 본부였는데 우리가 쳐들어가기 조금 전에 그들은 눈치 채고 이미 도주하여 빈집이었다. 그때 거기서 그들의 학습용 서적 몇권과 사진 몇장을 입수했다. 후쿠베(北部)[19]의 사진첩에서 나온 이 金日成의 사진은 내가 상부(上部)에 보낸 그것이다. 체포 또는 투항한 金日成부대의 대원 들을 통해 이 안경 낀 사람이 제2방면군장(二方面軍長) 金日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金日成의 처 김혜순(金惠順)도 내가 체포했는데 아주 얌전하고 온순한 여자였으며 한동안 우리집에서 내 마누라하고 같이 있었다. 내 마누라하고 아주 친해져서 빨래도 같이 하고 일도 같이 하며 살았다. 한번은 이 金惠順을 시켜 金日成의 귀순공작을 해 봤는데 연락이 닿지 않아서였는지 성사치를 못했다. 金日成은 간도(間島)의 용정(龍井)에서 중학교(中學校)을 다니다가 간도(間島)폭동 사건(一九三○년 월 五월 三○일)에 뛰어 들어 체포되었는데 유치장(留置場)에서 탈주해 소련(蘇聯)으로 도망쳤던 사람이다. 거기서 적군사관학교(赤軍士官學校)에 다녔다. 그러다가 만주(滿洲)에 파견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제二方面軍長이 되었다. 김혜순(金惠順)을 비롯한 모든 간부들의 증언이 그렇게 일치했었다.』

나가시마는 또 자기들 내외는 가끔 김혜순(金惠順)의 이야기를 한다고도 했다.[20]

나가시마 공작대가 입수한 사진속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란 인물은 북한도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지만 명백히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이것 또한 이명영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판단한 주요 근거였다. 아마도 당시 귀순 또는 체포된 항일연군 인물들이 안경 낀 사람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라고 지목한 것은 고의적으로 속인 것이 아닌가 한다.

많은 자료가 새로 발굴된 지금의 판단으로는 김혜순은 북한 김일성의 처가 맞고, 그 남편이었던 제2방면 군장도 북한 김일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혜순을 동원한 김일성 귀순 공작도 별 효과가 없자 그 후 김혜순은 적당한 때에 풀려나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혜순과 헤어지게 된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며, 소련으로 월경하기 직전에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한다.


김일성 부대에 잠입한 첩자 지순옥의 보고

만주국 간도성 경무청(間島省 警務廳)은 1939년 8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에 김일성의 부하 강흥석(姜興錫)의 처 지순옥(池順玉)을 첩자로 들여보냈는데 1940년 6월 말에 돌아나와 보고한 내용에 여자 대원으로 주임(主任) 김희순(金熙順, 29세)과 박정숙(朴貞淑,25세)이 나온다. 나이는 맞지 않지만 주임 김희순(金熙順)은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 김혜순(金惠順)으로 보이고, 박정숙(朴貞淑)은 김혜순과 함께 체포된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아래 훈춘 영사(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의 1940년 7월 26일자 보고서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강덕(康德) 7년 = 소화(昭和) 15년 = 1940년. 강덕(康德)은 만주국 연호임.

標題:7 昭和15年7月5日から昭和15年7月26日
pp.33~43 : [琿領情機密 第一八六號] 金日成匪團ノ內部狀況ニ關スル件 : 1940-07-26
在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는 당시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대사(関東軍司令官兼駐満洲国大使)였다.

장해성과 문명자의 김혜순 인터뷰 기사

탈북자 장해성은 1980년대 중반 평양에서 김혜순을 인터뷰했던 일을 정리하여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 3층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첫번째가 김혜순(77세), 3번째가 박정숙(朴貞淑, 78세)이다.[6] 박정숙은 부상당한 김혜순을 간호하다 1940년 4월 김혜순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김혜순은 자신이 붙잡히게 된 것이 김일성 부대의 참모장이었던 임수산(林水山)이 변절하여 일본군을 밀영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인 것 같다. 김혜순이 체포된 것이 1940년 4월 초인데, 참모장 임수산이 귀순한 것도 같은 시기인 것이 확인된다.[21]

김혜순은 장해성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일본군에 잡혀 귀순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도망쳐 나와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살게된 것처럼 주장한다. 자신의 과거 치부를 굳이 사실대로 말해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위 증언의 내용은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고,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또 재미 언론인이었던 문명자(1930 ~ 2008)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혜순과 박정숙을 인터뷰한 기사를 쓴 바 있다. 여기에는 당시 찍은 김혜순과 박정숙의 사진도 나온다.

일본 패전 후 북한이나 만주에서는 항일연군 출신자들이 권력 실세가 되어 일제에 체포되거나 투항하여 변절한 항일연군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형했다. 김혜순이 일제에 귀순하고도 처형을 모면한 것은 그녀가 김일성의 전처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체포되는데는 김일성의 책임도 있었다.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김일성의 전처들 중에 한국에 가장 먼저 알려진 사람은 위의 김혜순인데, 그녀와 관련된 조선일보 기사와 증언을 이명영이 발굴해 내었으며, 이것은 그녀의 남편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1854-1908)의 손자로 북한에 거주하다 소련 유학을 가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眞, 본명 허웅배, 1928~1997)[22][23]은 임은(林隱)이라는 필명으로 간행한 책에서 김일성의 처음 처는 한성희(韓聖姫)이며,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혜순이라는 다른 이름을 대었다고 주장했다[24][25].

김(金)의 최초 처(妻)는 한성희(韓聖姫)
김일성(金日成)의 최초의 처(妻)는 한성희(韓聖姫)라는 여성이었다. 빨치산부대의 부녀부장 또는 여자청년부장이었다. 이 여자는 40년 일본(日本) 토벌대에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되어 김혜순(金惠順)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본명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해방후 귀국한 뒤 곧 한성희(韓聖姫)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었는데 47년경 도여맹(道女盟) 부위원장으로 있는 한영숙(韓英淑)이라는 여자가 한성희(韓聖姫)임을 알아냈다. 한(韓)은 체포 뒤 복역중 반일(反日) 활동중지, 개명(改名), 출가의 조건으로 석방됐다. 그녀는 석방 뒤 경찰의 감시가 심해 반일(反日) 투쟁을 계속할 수가 없어 농민에게 개가해 2남 2녀의 어머니로 해방을 맞았다. 개선장군 김일성(金日成)은 지도자가 됐는데 그는 빨치산 당시 그녀의 부하였던 김정숙(金貞淑)과 결혼, 「유라」「슈라」라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한(韓)은 해방 후 로동당원이 되어 도(道) 여맹부위원장이 됐는데 남편이 천도교청우당(天道教青友黨)에 입당하는 바람에 이 가정은 정치폭풍의 와중에 휩싸였다. 바로 이런 때 김일성(金日成)은 한(韓)을 찾았는데 김일성(金日成)은 그녀의 행불행이 자신에게 관계가 있는데에 고민했다. 김일성(金日成)은 평양(平壤)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 한(韓)을 지구대표로 선발,파견하도록 지시하여「전부부」가 재회했고 한(韓)은 군인민위원회(郡人民委員會) 위원장으로 승격됐다. 김일성(金日成)과 한(韓)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김(金)의 처(妻) 김정숙(金貞淑)이 죽고난 뒤 김(金)이 자기의 비서였던 김성애(金聖愛)와 결혼한 때 부터였다. 이들의 결혼이 자신과 김정숙(金貞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김일성의 전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한국에서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물로 혼동하는 계기가 된다. 1990년 10월 한소 수교 직후 방한한 전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俞成哲)도 유사한 증언을 했다.[26][27]

내가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은 한성희란 여인으로, 그녀는 30년대 만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부녀청년부장으로 활약하다 김일성과 진중 결혼을 했다.

그러나 한성희는 1939년 일본 토벌대에 체포돼 그뒤 소식이 끊어졌다. 김일성은 북한에 돌아온 뒤 곧 한성희의 행방부터 수소문했고, 그녀 고향인 강원도에 빨치산 출신 부하를 보내 찾아보도록 했다. 마침내 1947년 김일성은 한영숙(韓英淑)이란 새 이름으로 강원도 여성동맹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성희를 찾아냈다. 한성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났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더 이상 항일투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강권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향에서 개가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귀국을 알고도 찾지 않았던 모양이다.

7년여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후 한동안 계속 만났으나 김일성이 김성애와 가까워지면서 다시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일본군에 체포된 김혜순의 이름은 본명이지 한성희가 둘러댄 가짜 이름이 아니다. 또 2000년 이후 중국 쪽에서 쏟아져 나온 동북항일연군 출신자 또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을 감안하면 한성희와 김혜순은 동일인이 아니라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김혜순과 달리 한성희에 관한 당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직속담당기자로서 온갖 연설문, 담화문을 대필하다 1959년 귀순한 한재덕(韓載德, 1911~1970)[28]은 1962년 《동아일보》에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는 글을 연재했는데, 5월 30일 자에 이름은 거명하지 않고, 김정숙 이전의 김일성의 처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29]

과연 그후 김일성(金日成)은 「소련」으로부터 그 아내와 두 어린애를 데려내다가, 그가 북한의 괴뢰 괴수가 되었을 때는 일제시의 지사관사(知事官舍) 자리에다 호강스러운 살림을 차려놓았던 것이다. 김정숙(金貞淑)이라는 그 부인은 사실은 김일성(金日成)의 둘째번인가 세째번인가의 아내로 첫번째 아내는 일제 때 일본군경에게 체포되어 하필이면 담당 취조경관의 첩이 되었었는데 해방 후 어떤 심정으로서인지 북한 독재자가 된 김일성(金日成)을 면회하려다 혼살이나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소문이었다.

한재덕이 말하는 사람은 김혜순보다는 한성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한성희가 토벌대장의 첩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30]

브루스 커밍스의 김혜순에 대한 엉터리 주장

브루스 커밍스는 김혜순이나 김석원(金錫源, 1893 ~ 1978)과 관련해 말도 안되는 엉터리 주장들을 자주 한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이런 주장을 버젓이 내놓는 사람을 한국의 좌파들이 대학자인 양 떠받드는 꼴이 우습다.

커밍스는 그의 저서 ‘North Korea, Another Country’ 115쪽에서 북한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이 김혜순이며, 일본군에 체포돼 죽었다고 썼다.
Kim’s reputation was inadvertently enhanced by the Japanese, whose newspapers made a splash of the battle between him and the Korean quislings whom the Japanese employed to track down and kill him, all operating under the command of General Nozoe Shotoku, who ran the Imperial Army’s ‘Special Kim Division’. In April 1940 Nozoe’s forces captured Kim Hye-sun, thought to be Kim’s first wife; the Japanese tried in vain to use her to lure Kim out of hiding, and then murdered her. Maeda Takashi headed another Japanese Special Police unit, with many Koreans in it; in March 1940 his forces came under attack from Kim’s guerrillas, with both sides suffering heavy casualties. Maeda pursued Kim for nearly two weeks, before stumbling into a trap. Kim threw 250 guerrillas at 150 soldiers in Maeda’s unit, killing Maeda, 58 Japanese, 17 others attached to the force, and taking 13 prisoners and large quantities of weapons and ammunition.
나는 그런(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는대로 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침공한 첫번째 주동자는 스탈린이 아닌, 김일성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에게 지원을 간청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에게 제한된 지원을 허락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면적 침략을 감행했다. 나의 가장 심한 비평가들, 캐서린 위더스비[31]와 같은 사람도 지금은 (나의 견해를) 인정한다. 캐서린은 늘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건 스탈린의 전쟁이다. 스탈린이 단추를 눌렀다’라고. 나는 그런 주장에 내 귀를 닫았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일 리가 없기에. 그리고 지금 판명됐다. 게릴라 전쟁이 아닌, 국지전이 아닌, 전면적 전쟁을 치르기로 한 결정은 김일성이 내린 것이다. 김일성의 목표 중 하나는 남한을 점령해서 김석원과 같은 사람을 붙잡아 그들의 목을 비틀고 그들이 30년대에 저지른 것을 추궁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에 관한 논란

북한 김일성의 사망 직후 그의 항일투쟁의 실체에 대해 이명영과 서대숙이 제시한 상반되는 의견을 싣고 있다. 이명영은 체포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을 들어 그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김정숙 이전 김일성의 처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김혜순이 북한 김일성의 전처로 확인된다.
「김일성(金日成)의 애처(愛妻)가 귀순(歸順)/선무공작제일선(宣撫工作第一線)에/소설(小說)같은 전향(轉向)의 경위(經緯)」— 40년 7월 5일자 제2석간(夕刊) 제2면에는 「함남지사발(咸南支社發)」 4단 제하의 이런 기사가 보도되었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김일성(金日成)」은 함남북 대안(咸南北 對岸)에 출몰하며 일제(日帝)의 국경(國境) 경비대를 괴롭히는「동북항일인민연합군(東北抗日人民聯合軍)」의 중견간부며 「변방녹림(邊方綠林)의 쾌걸」로 「너무나 유명」했다.

함남(咸南) 혜산(惠山)의 일제(日帝) 경비대는 40년 4월 초순 두만강 대안(對岸) 장백현(長白縣) 십오도구 군정동(軍程洞)과 삼포동(三浦洞)사이의 밀림지대 속의 한 숨겨진 산채를 습격했다. 산채에 있던 남자경비원 2명을 사살하고 끝까지 완강히 대항하는 20세 가량의 여자 2명을 사로잡았다.

신문끝에 그중 한 여자가「김일성이 오매불망하는 애처 김혜순(金惠順)(22)」임을, 또 한 사람은 김혜순(金惠順)의 간호원격인 박정숙(朴貞淑)(25)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무렵 김혜순(金惠順)은 산채에서 다리의 중상을 치료중이었다. 39년 5월 4일 김일성(金日成) 일파가 함남(咸南) 최후의 행동으로서 반절구(半截溝)를 대거 습격하던 때[32] 김혜순(金惠順)은 남편을 따라 무장하고 부하를 지휘하다가 경비대의 총탄을 맞았었다. 그후 김일성(金日成)은 함남(咸南) 대안(對岸)의 본거를 함북(咸北) 대안(對岸)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이동하며,부득이 부상중인 김혜순(金惠順)을 3명의 호위병과 의술을 아는 박정숙(朴貞淑)을 붙여 우선 깊은 숲 산채속에 숨겨두고 갔었다.

김혜순(金惠順)은 13세때, 간도(間島) 폭동사건에 용정(龍井)에서 활동하던 김일성(金日成)에게 「길잃은 어여쁜 아가씨」로 발견되었다. 자라며 김일성(金日成)과 동서하게 되고, 직접 그의 지도를 받아 「무술기개가 남자를 억누를만큼」되어 있었다.

「애처(愛妻)가 본 김일성관(金日成觀)」에 의하면 그는『제일 남녀관계에 절대 엄밀하여서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엄벌에 처하며, 용의주도한 인간으로서 항상 5~6명의 호위를 데리고서 움직이는데 같은 부하로도 그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의 김일성(金日成)이 실재한 어떤 인물인지, 또 당시 일제(日帝) 당국이 발표한 「김일성애처설(金日成愛妻說)」이 어느 정도의신빙성이 있는지는 고증할만한 충분한 자료가 없다. <이흥우기(李興雨記)>[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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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p.183 : 제12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 (1936.3-1936.5) - 1. 새 사단의 탄생
  2.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
  3.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 Archived 2018.11.06
  4. [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5. 김일성 가짜설#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의 후일담
  6. 6.0 6.1 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7.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金日星(김일성)의 看護婦(간호부) 合同搜査本部(합동수사본부)서 逮捕(체포) 부산일보 1951-03-01
  8. 8.0 8.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20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件名標題:第5 討伐成果 (C13071220200) : 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에 제2방면군 여자청년부장 김혜순이 있음.
  9.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302~303.
  10. 32. 간도농민폭동 - 연변일보 Oct 23, 2007
  11. 오늘의 역사: 간도와 간도 5-30 폭동 편 - 심재호 기자 - Radio Free Asia Apr 6, 2000
  12. "間島五卅事件予審終結す"에 나오는 김일성(金一星) 기록 『사상월보(思想月報)』제1권 제4호 (1931.07.15) p.205 (pdf p.24)
  13. 第四次間島共産黨事件判決(間島五卅事件) 사상월보 제2권 제4호 소화7년(1932) 7월 15일 p.100 (pdf p.43)
  14. 14.0 14.1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1887~1981) ja.wikipedia
    노조에 쇼토쿠(野副昌德, 1887~1981) World War 2 备忘录(비망록)
  15. 조장(曹長)은 상사에 해당하는 하사관 계급이다. 나가시마는 많은 공을 세워 후일 장교로 진급했다.
  16. 16.0 16.1 16.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9~320
  17. (진위 김일성 열전 43) 2대 김일성의 정체(상)|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3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44) 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5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45)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 종합 3면
    "'안경 낀 김일성'…보천보 업적 가로채려 사진 조작" 연합뉴스 2015/10/15
  18. 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第4篇/第9章 匪賊及住民(3) pp.1~2의 사진 맨 뒷줄 중앙의 모자 쓰고 안경낀 인물.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C13010013700、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 昭和27年(1952년)11月(防衛省防衛研究所)」
    파일:제2방면군장 김일성.jpg : 사진 앞줄 중앙의 같은 인물.
  19. 후쿠베 구니오(北部邦雄)는 노조에 토벌대의 간부로 계급은 중좌(중령)이었으며, 나가시마(長島) 조장(曹長)의 상관이었다.
  20.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322
  21. 21.0 21.1 비수(匪首) 김일성 부대(金日成部隊)의 임참모장(林參謀長) 수귀순(遂歸順) -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5/07 3면 1단 : 참모장 임수산이 4월 초 귀순했다고 하였다.
  22. 북한체제 환멸 망명한 의병 후손 - 중앙일보 1989. 9. 26.
  23. 첫 북한유학생 망명자들 RFA 2016-12-27
  24. 金日成(김일성)의 正体(정체) 蘇(소)망명 北韓幹部(북한간부)가 폭로한 內幕(내막) 1982.03.26 동아일보 4면
  25. 임은(林隱) 著,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옥천문화사> 1989년 p.53
  26. 증언(證言)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9~70
  27.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
  28. 한재덕(韓載德, 1911~1970) 위키백과
  29.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6) 〈金日成直屬(김일성직속)〉 〈記者(기자)의手記(수기)〉 1962.05.30 동아일보 2면
  30. [청설TV]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1) 청설TV 2020. 1. 29.
    [청설TV] 김일성의 첫 사랑, 만주의 슬픈 빨치산 한성희의 이야기 (2) 청설TV 2020. 1. 31.
    체포된 후 어쩔 수 없이 귀순하고 토벌대장의 첩이 된 슬픈 여자
  31. Kathryn Weathersby ICAS (Institute for Corean-American Studies)
  32. 함남대안(咸南對岸) "반절구(半截溝)"를 김일성비 대습격(金日成匪 大襲擊) 조선일보 1939.05.05 석간 2면
  33. 변장(變裝)한 여기자(女記者) 암야행로(暗夜行路) 조선일보 1975.03.05 조간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