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J’accuse! / I accuse!)는 신문 《로로르》지 1898년 1월 13일자에 실린 에밀 졸라의 공개서한이다. 이 글의 원 제목은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로로르의 편집장인 클레망소의 권유에 따라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진실과 정의를 중시한 모럴리스트이자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가 당시 대통령이던 펠릭스 포르(1841~1899)에게 만인이 볼 수 있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에밀 졸라는 편지에서 진실과 정의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 것을 강하고 설득적인 문장으로 요구한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편지는 프랑스 전역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에밀 졸라가 고발한 것은 군대의 고위 장교들이었다. 그들이 유태인 참모 장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에게 독일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씌웠다는 내용이었다. 결백한 사람을 유형지인 ‘악마섬’으로 보냈고 고의적으로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했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의 발단과 전개 과정[1]

대통령 각하에게, 저는 진실을 말씀드립니다. 사법부가 진실을 밝히지 않을 경우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하는 게 바로 저의 의무인 거죠. 제 스스로 역사에 공범으로 기록되고 싶지 않습니다.
드레퓌스는 1859년 독일과 가까운 알자스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방직공장을 가진 유태인이었고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은 넉넉했다. 그가 11살 때 프랑스는 프로이센(독일)과의 전쟁(보불전쟁)에서 패전, 살던 알자스는 독일의 영토로 넘어갔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군인이 되어 조국 프랑스를 구하겠다는 신념을 굳혔다. 가족의 동의 아래 실제 군에 입대하였고 프랑스군 참모본부의 수습참모장교로 임관했다. 그리고 31살이 되던 1890년 드레퓌스는 대위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질시와 차별대우도 많이 받았지만 말수 적고 성실한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어엿한 프랑스 육군 대위에 오른 것이다.
1894년 9월에 역사적 사건은 시작된다. 어느 날 프랑스 육군참모본부 정보국이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하게 된다.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 무관인 슈바르츠코펜이고 발신인은 익명이었다. 편지 내용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 명세서였다. 엄청난 정보가 적국 대사관으로 스며들기 직전 이를 적발해낸 것이다.
참모본부는 즉각 스파이가 누군지를 찾아내는 일에 착수했다. 수사팀은 스파이는 적어도 참모본부 내부인사이거나 그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라고 간주했다. 그 무렵 몇몇 상관들이 편지의 필적이 드레퓌스 대위의 것과 유사하다는 증언을 했다. 아니라 해도 눈엣가시의 존재였던 드레퓌스는 아무런 범죄 증거도 없이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스파이로 지목돼 곧바로 체포되었다.
반 유태인적 논조로 무장한 다수의 신문이 유태인의 죄상을 과하게 강조하면서 공개재판을 하라고 재판부를 압력하였다. 극우 보수 신문들은 어서 빨리 유태인 장교의 반역죄를 심판하라고 집중포화를 날린 것이다. 그러면서 터무니없는 이야기와 조작된 범죄 사실이 연일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프랑스 군부는 압력에 굴복해 사건의 조기 종결을 선택하였다. 특히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하지 않으면 육군참모본부조차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1894년 12월 군사법정은 비공개재판을 통해 드레퓌스 대위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게 된다.
반 유태인 정서의 신문들은 프랑스를 배신한 중죄인에게 사형을 언도하라고 압박했다. 군사법정은 범죄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채 서둘러 종신형을 선고했다. 죄상을 공개하라는 압력에는 프랑스 군 당국은 그걸 모두 공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할 정도라는 거짓말을 앞세워 눈과 귀를 가렸다.
종신형 선고 두 달 뒤인 1895년 2월 드레퓌스 대위는 남미 기아나의 적도 해안에 있는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사람 키 두 배나 되는 담장 두 겹에 둘러싸인 공간의 돌로 만들어진 좁은 감방에서 그것도 두 발에 두 겹의 족쇄까지 채워진 채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일었지만 그때마다 사랑하는 아내의 감동적인 응원 편지로 견뎌낼 수 있었다. 나중엔 편지도 받을 수 없게 만든 게 프랑스 군이었다.
그렇게 드레퓌스 간첩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재판이 끝난 뒤 15개월이 흘렀다. 사람들이 드레퓌스의 이름마저 망각한 1896년 3월 반전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그 배경엔 드레퓌스의 군사전술학교 동기인 피카르 중령의 현명한 판단력과 정의감이 있었다. 참모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피카르는 어느 날 다른 스파이 사건 자료를 보다가 우연하게도 드레퓌스 사건 기록을 보게 되었다. 피카르 중령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어떠한 증거도 기록물에 없다는 게 첫 번째 놀라움이었다. 그보다 더 그를 충격에 빠트린 것은 문제의 독일 대사관 무관에게 보내진 편지의 명세서 필적이 어디서 많이 본 듯 눈에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그 글씨의 주인공은 바로 보병대대장인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 엄청난 사실을 상부에 즉각 보고했다. 그러면서 에스테라지를 긴급 체포해 다시 재판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악함이 정의와 진실을 일시적으로는 늘 가리는 법이다.
피카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육군 참모본부 상층부는 이 사건이 재차 부각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피카르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죄 없는 유태인 장교에게 거짓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사건을 조작한 장본인들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게 죽기보다 싫고 또 두려웠다. 피카르는 칭찬 대신 상부의 질책만을 받았다. 자칫하다가는 그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그들 상층부의 손에 의해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카르는 중대결심을 한다. 곧바로 상부에는 휴가를 내고 변호사를 만나 이 사실을 전한다. 변호사에 의해 한 상원의원의 손으로 드레퓌스 간첩 조작 사건의 실체가 전달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건은 드레퓌스 재판 당시 가장 강한 논조로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데 앞장섰던 ‘아침’이란 뜻의 <르 마탱(Le Matin)> 신문이 특종을 터뜨리면서 재부각된다. 신문이 문제의 독일 무관 앞으로 갈 예정이던 ‘비밀명세서 사본’을 입수해 실은 것이다. 그 필적은 에스테라지의 것임을 그와 스파이 협약을 맺은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걸 폭로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에스테라지는 어떤 인물인지 보자. 그는 얼핏 괜찮은 군복무 기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부유한 미망인을 유혹해 방탕한 삶을 살던 장교였다. 돈이 된다면 스파이노릇도 기꺼이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신문에 ‘명세서’ 사본이 보도된 것을 계기로 그간 동생의 구명을 위해 필사적 노력을 기울여온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는 에스테라지를 즉각 고발하였다. 에스테라지의 필적을 잘 아는 증권사 직원이 드레퓌스를 돕기 위해 그의 형 마티외에게 에스테라지의 필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데 힘입은 조치였다. 하지만 기득권을 지키려는 군 당국은 조사를 시작하고도 시간만 질질 끌었다. 에스테라지를 구속하지 않은 것이다. 신문들은 드레퓌스와 에스테라지의 유무죄를 논하는 숱한 논쟁과 허위보도, 심지어 수사에 미온적인 군 당국을 두둔하는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자칫하다가는 프랑스 군과 프랑스라는 국가를 뒤흔들 수 있는 일이라는 위기인식이 사건을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심지어 전체 프랑스 군은 물론 공직사회 내부에서 근무 중인 모든 유태인들을 추방해야한다는 과격한 논평까지 게재될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에 마침내 1898년 1월 13일 급진주의자 클레망소가 발행하는 신문 1면에 실린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가 사건의 물줄기를 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가공할 펜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 문건이 된 셈이다.
이후 프랑스 사회는 양분되었다. 양심과 정의로 진실을 보고 싶다는 지성들과 반 유태인 정서로 무장한 기득권 세력의 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승리하는 법. 에밀 졸라의 편지가 실린지 6년 뒤, 처음으로 체포된 지 10년 만인 1904년 재심을 통해 드레퓌스 대위는 무죄를 선고받고 육군에 복직하였다.
드레퓌스의 무죄와 정의와 진실의 승리가 있었지만 에밀 졸라는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다. 편지를 실은 직후부터 곤경에 빠졌기 때문이다. 1899년 그는 중상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결국 감옥행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도피해야만 했다. 1년여 동안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한 끝에 에스테라지의 범죄혐의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 판결을 보지도 못한 채 1902년 파리의 아파트에서 난로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반유태인 극우주의자들이 졸라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난로 굴뚝을 막았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그 부분 수사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드레퓌스가 복직한 뒤인 1908년 졸라의 유해는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내용(일부)

“대통령 각하에게, 저는 진실을 말씀드립니다. 사법부가 진실을 밝히지 않을 경우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하는 게 바로 저의 의무인 거죠. 제 스스로 역사에 공범으로 기록되고 싶지 않습니다.

(중략)

“펠릭스 포르 대통령 각하, 저는 정직하게 살아온 시민으로서 치솟는 분노를 안고 온몸으로 대통령 당신을 향해 진실을 외칩니다. 저는 명예로운 당신이 진실을 알고도 외면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걸 확신합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