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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사건'''은 [[6.25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보고받고 처리한 사건이다.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은 대부분 북한 인민군 요원들로 판단하고, 이에 따라 사격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소꿉장난으로 여기는 사고 방식으로 '천국이 아니니까 다 지옥이다'라는 생각과 같다. 즉 [[6.25 전쟁]] 중 옆에 전우가 쓰러지고 북한 탱크에 응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기병사단에서 충분히 의심할 법한 일에 대비한 것이 결과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건 하나만 조명하여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모두를 잘못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노근리사건'''은 [[6.25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보고받고 처리한 사건이다.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은 대부분 북한 인민군 요원들로 판단하고, 이에 따라 사격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소꿉장난으로 여기는 사고 방식으로 '천국이 아니니까 다 지옥이다'라는 생각과 같다. 즉 [[6.25 전쟁]] 중 옆에 전우가 쓰러지고 북한 탱크에 응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기병사단에서 충분히 의심할 법한 일에 대비한 것이 결과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건 하나만 조명하여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모두를 잘못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2019년 8월 1일 (목) 10:43 판

노근리 사건

노근리사건6.25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 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보고받고 처리한 사건이다.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은 대부분 북한 인민군 요원들로 판단하고, 이에 따라 사격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소꿉장난으로 여기는 사고 방식으로 '천국이 아니니까 다 지옥이다'라는 생각과 같다. 즉 6.25 전쟁 중 옆에 전우가 쓰러지고 북한 탱크에 응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기병사단에서 충분히 의심할 법한 일에 대비한 것이 결과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건 하나만 조명하여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모두를 잘못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저들의 주장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라고 하며 1998년 4월 AP통신의 최상훈 기자, 마샤 멘도샤 기자 등이 "노근리 학살사건은 진상규명이 되지 않으면 진실이 알려질 수 없는 사건이므로 반드시 진상규명을 해야한다"고 하여 현장취재, 인터뷰 등을 하였다. 그 결과 1999년 9월, 미 제 1기병사단이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긴다"라는 지시에 의해 노근리 피난민들을 살상한 전쟁범죄라고 결론내린다.

한미 합동 조사 결과

AP 통신의 1999년 9월 29일 보도로 촉발되어 한미 양국 대통령의 지사에 의해 노근리사건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과정 전반에 걸쳐 양국 조사반은 현장 상황과 증언, 그리고 문서 등을 충분히 공유하면서 사건의 주변상황과 관련 사실을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규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한되었으며 전상 후유증, 연령, 대중매체 등 여러 요소들에 의해 한미 증언자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사건 배경

  • 한국전쟁 초기 한국에 투입되었던 미군들은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상태였다. 당시 노근리 주변지역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부대들은 대부분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는 인원들로 편성되었으며 부대를 지휘, 통제하는 지휘자들은 전투 경험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그들은 북한군의 무기 체계나 전술, 그리고 북한군의 진격 속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만한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 실제로 낙동강 전선으로 급격하게 밀리고 있을 당시 북한군의 탱크에 맞설수 있는 무기는 기병사단에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 이런 상황에 미군은 북한군이 피란민 대열의 민간인 그룹으로 가장하여 방어선을 통과한 후 후방에서 미군진지를 공격하는 침투 가능성에 대해 두려워 하였다.
  • 영동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북한군이 진입한 후 미 제 1 기병사단은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하는 동안 영동 동쪽지역에서 북한군의 간헐적인 정찰활동과 간접 사격을 받는 등 북한군과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였다.
  • 미 제 7기병연대 제 2대대는 영동에 도착한 직후 7월 25, 26일 야간에 와해된 상태에서 노근리 주변 지역으로 무질서한 후퇴를 하였다. 이러한 후퇴는 적 출현으로 인하여 적군의 돌파가 임박했다는 잘못된 판단, 적 전차의 출현 가능성, 그리고 북한군의 침투전술이 있을 것이라는 인식 등 여러가지 요소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무질서하고 혼란한 상태에 있던 부대들은 26일 낮에 노근리 부근에 재집결 하였고 7월 27일 오전까지 부대통합 및 재편성을 완료하여 부대위치를 보고하였다.

피란민 통제

  • 전쟁 초기, 한국 정부는 피란민 통제정책을 효과적으로 수립하지 못하였으며, 그로 인해 미군은 피란민 이동을 통제하는 데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 이후 피란민 이동통제 문제는 한국군과 미군 작전의 주요한 고려요소가 되었다. 1950년 7월 하순경에 한국정부와 미8군은 긴밀한 협조를 통해 피란민과 한국군 및 미군을 보호하고 도로로 이동하는 피란민들이 군 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화기 위하여 피란민 통제지침을 하달하기 시작하였다.

임계리·주곡리 주민들의 집결 및 이동

  • 예외의 경우가 있긴 하지만 피란민의 이동을 제한하는 한·미 양국의 피란민 통제정책이 7월 하순경에 시행되었다. 일부 미 참전장병들은 몇몇 지역에서 미군이 민간인들을 위험한 지역이나 미 지상군 진지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이들을 마을에서부터 호송하였다고 증언하였다.
  •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7월 25일 야간에 미군이 산 속의 안전한 마을인 임계리에 있던 수 미상의 피란민들을 주곡리를 경유하여 4번 도로를 따라 노근리 방향으로 인솔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미 참전장병들은 마을에서 주민들을 호송했던 것은 기억하지만 지명과 날짜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7월 25일 주곡리로부터 1.5㎞ 떨어진 하가리 근처 개활지에서 미군의 명령에 의해 노숙할 때 피란민이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여러 한국측 증언자들은 당시 피란민 대열에서 낙오되거나, 집단을 이탈 또는 대열로부터 뒤로 처졌던 한 명 내지 네 명 정도가 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연루된 미군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당시 시행되고 있던 피란민 통제정책을 위반한 것에 대한 대응조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 일부 한국측 피해자 및 미국 참전장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피란민과 미군은 모두 동쪽으로 후퇴하던 중 노근리 부근에서 서로 접촉하게 되었으며, 영동에서 황간으로 이동하는 동안 피란민들은 도로에서 철로쪽으로 이동하였다. 일부 미 참전장병과 한국측 증언자들은 미군이 피란민들을 철로쪽으로 인솔하여 게릴라 침투여부와 무기 및 기타 금지품목 소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짐 검색을 실시하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미 참전장병과 한국측 증언자들은 이러한 검색이 실시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공중공격

  • 다수의 한국측 증언자들은 7월 26일 정오 경 미군 항공기가 피란민들에게 기총공격 또는 폭격을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7월 말에 공중공격을 목격한 일부 미측 증언자들은 자신들의 부대가 노근리 지역에 배치된 시기에 미군 항공기가 공중공격을 한 것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그 공격이 언제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공격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미 참전장병들은 1950년 7월 중 피란민들과 함께 있는 전차에 항공기가 공중공격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미 참전자 한 명은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피란민들이 비포장도로와 철길에서 공중공격을 받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 조사기간 중 검토한 공식적인 미 공군 기록이나 미 조종사들의 증언을 통해서는 7월 26일 미 공군이 노근리 주변지역에 출격하여 공격임무를 수행했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미 제5공군 항공작전 일일요약보고서에 따르면, 7월 26일 영동지역에 3회의 출격기록이 확인되고 있는데, 출격임무 결과보고서는 찾을 수 없었다.
  • 추가적으로 8월 6일자 항공사진을 분석한 결과, 기총공격이 언제 발생했는지 정확한 날짜를 확정할 수는 없으나, 한국측 피해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지역에서 철로상의 기총공격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 7월 27일 아침 일찍 노근리 주변의 미 제7기병연대 제1대대 지역에 실제로 공중공격이 있었다.
  • 따라서 노근리 주변지역에서 1950년 7월 26일 공중공격의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 미 공군 기록에 따르면, 당시 미 공군 제트항공기는 폭탄을 장착하지 않았으나 프로펠러 항공기는 폭탄을 장착하였다.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항공기가 피란민들을 직접 공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는 반면, 일부 증언자들은 단지 폭발음과 기관총 사격 및 파편과 화염, 열기를 포함한 포탄의 효과만을 기억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 공식 기록에 의하면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노근리 지역에서 미군과 북한군 상호간에 야포 및 박격포 사격이 있었다. 8명의 미 참전장병들은 야포·박격포 또는 전차포 사격이 노근리 부근에서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미 지상군이 당시 보유하고 있던 무전기를 사용해 피란민에 대한 공중공격을 요청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양국 조사반은 7월 26일 당시 통상의 미 지상군 병력이 휴대한 무전기로는 미 지상군과 공군 전술항공통제관이 직접 교신하여 공중공격을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다만 육군이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 공중공격을 요청할 수는 있었지만, 이러한 요청은 일정한 경로를 통해 합동작전통제소로 전달되어야 처리할 수 있었으므로 처리시간상 즉각적인 대응은 불가능했었다.
  • 7월 25일자 미 제5공군 전방 지휘소 터너 로저스(Turnr C. Rogers) 대령의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북한군에 의해 조작되거나 북한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진지로 침투한다는 내용이 보고되었음. 육군은 미군 진지로 접근하고 있는 모든 민간 피란민들을 항공기로 기총공격할 것을 요청하였음. 현재까지 공군은 육군의 이러한 요청에 응해왔음.”

그러나 미 공군 조종사 출신의 증언자들은 그러한 지침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지상사격 및 사격명령 여부

  • 미 지상군은 노근리 사건 발생 기간 동안 노근리 주변에서 피란민을 향해 사격을 하였다.
  • 1950년 7월 26일과 29일 사이에 일부 미군은 쌍굴 내부를 포함하여 여러 지역에 있는 피란민을 향해 사격을 하였다. 미군들은 피란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또는 피란민이 있던 곳으로부터 소화기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사격을 했다. 그 결과 수 미상의 피란민이 죽거나 부상을 입게 되었다.
  • 2000년 7월 한국측 현장기술조사반은 쌍굴 및 수로 벽체에서 다수의 미제 탄자 및 탄흔을 발견하였고, 아울러 쌍굴 주변지역에서 미제 및 소련제 탄피·탄자·파편 등을 발견하였다.
  •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피란민의 대부분이 임계리·주곡리 마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임계리 밖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아울러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당시 도로를 따라 노근리로 이동하던 대열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 일부 한국측 증언자들은 사건현장에 있던 미군들이 부상자를 치료해 주거나 환자를 병원으로 후송해 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국측 조사반은 피란민 중 17명이 미군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했다. 미 참전자 한 명은 그가 한 아이를 데리고 쌍굴을 들어갔을 때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 피란민을 향해 사격한 참전장병 중 미 조사반에 증언한 모든 참전장병들은 사격명령 없이 사격을 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일부 증언자들은 명령이 반드시 하달되었을 것으로 믿는다고 증언하였다. 전반적인 자료조사 및 증언청취 결과로서는 명령하달 여부에 대한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피란민에게 사격을 하지 않은 참전장병들 중 일부는 소화기·기관총·박격포 및 야포 사격이 피란민들에게 가해지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피란민들에 대한 사격명령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증언하였다.
  • 7월 24일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의 전문일지에는 피란민의 전선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사격지침 등 연대 연락장교의 전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연대에 하달된 사격지침은 발견할 수 없었으며, 사격명령에 관한 증언자들의 증언 불일치로 인하여 사격명령 하달여부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사상자 수

  •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전쟁 중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한국측 증언자들과 미 참전장병들의 증언 사이에는 노근리 주변지역에서 발생한 사망자나, 부상 또는 실종된 인원에 대해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 피해자들은 확인된 숫자는 아니지만, 사망·부상 또는 실종된 인원을 248명이라고 영동군청에 신고하였으나 미 참전장병들은 이보다 적은 인원수를 증언하고 있다.

결론

한미 양국 조사반은 피해자들이 간직하고 있는 오랜 기간의 아픔을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상호 이해하였다.

  • 절박한 한국전쟁 초기의 수세적인 전투상황 하에서 강요에 의해 철수 중이던 미군은 1950년 7월 마지막 주 노근리 주변에서 수 미상의 피란민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 이 사건을 조사함에 있어 성실하고 양심적인 양국 상호간의 노력은 장기간 지속되어 온 한미 동맹관계 유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한미 앙국 조사반은 피해자들의 오랜 기간의 아픔과 미 참전장병의 희생을 고려하면서, 한국전쟁 기간 중 발생한 노근리 사건에 대한 조사가 한미 동맹정신을 바탕으로 보다 공고한 공조체제 유지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인권을 중시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양국 공동협력의 표본이 될 것으로 믿는다.


노근리사건을 바라보는 법

좌파들은 노근리사건을 학살로 바라보지만, 이것을 학살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선 공공연하게 개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 특히 군인들이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미군에게 있어서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T.S.Kuhn은 과학사에서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경우, 이해가 될 때까지 여러가지 상황을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이해가 될 때까지 결론을 유보해야 한다. 하지만 좌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래한 결론을 바로 내린다. 이것은 그들이 더 확고한 증거나, 자료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판단능력이 주로 공감과, 혐오에 근거하기 때문일 수 있다.

노근리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 근본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북한의 남침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