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릉(檀君陵)은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있는 북한이 주장하는 단군의 묘이다.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있는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1] : 1993년 10월 노동신문에 평양 중심에서 약 40km 떨어진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과 그의 부인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됐다. 김일성의 지시로 개축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994년 그의 사망 후에 준공되었다. 아래 1930년대의 단군릉 사진과 비교하면 위치도 다른 것으로 보이고, 형태도 전혀 다르게 개축되었다.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북한은 1993년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고 1994년에 이를 개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무덤이 단군의 것으로 전해온 기록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믿을만한 근거는 박약하다.

실제로는 고구려 고분일 가능성이 크며,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학술적이 아닌 정치적 목적의 발굴이 행해져 고분이 원형을 잃고 극심하게 훼손되었다.

북한이 1993년에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문흥리에 있는 대박산 동남쪽 경사면 기슭에 있던 고구려의 반지하식 封土石室墳을 발굴하여 이듬해에 계단식 적석총 형태의 ‘단군릉’으로 개조한 사실도 고구려 고분의 파괴행위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싶다. 북한의 정치적인 목적 하에 진행된 ‘단군릉’ 복원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기동의 논문(「북한에서의 단군연구와 그 숭앙운동」, 『한국사시민강좌』 27, 일조각 2000, pp.113~119)을 참고하기 바란다.

북한이 개축한 오늘날 단군릉의 모습은 1930년대에 신문에 보도된 사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발굴을 빙자한 유적 파괴행위를 한 것이다.

강동 단군릉 관련 역사 기록

【고적】 대총(大塚)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 하나는 현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도마산(刀亇山)에 있는데 속담에 옛 황제(皇帝)의 무덤이라 전한다.
기자(箕子)의 후손을 거두어다 기용하고 해마다 강동(江東)의 단군묘(檀君墓)와 평양(平壤)의 동명왕묘(東明王墓)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모두 윤허하였다.
단군(檀君)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을 수호(守護)할 호(戶)구를 두었다. 승지 서형수(徐瀅修)가 아뢰기를,
"단군은 우리 동방의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서 역사에 편발 개수(編髮盖首)의 제도를 제정하였다고 일컫고 있습니다. 군신 상하의 분수와 음식과 거처의 예절을 모두 단군이 창시(創始)하였다면 단군은 동방에 있어서 사실 세상이 끝나도록 잊지 못할 은택이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을 극도로 갖추어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강동(江東)에 벼슬할 때에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레가 4백 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志)》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막론하고 어떻게 황폐해지도록 놔두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땔나무를 하거나 소와 말을 먹이도록 놔둘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단군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으므로 묘소가 있을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중국의 황제(黃帝)는 교산(喬山)에 신발이 있는 일169) 도 있었고 공동산(崆峒山)에 무덤이 있는 고사도 있습니다. 더구나 평양에 단군의 사당이 있고 본 고을에서 숭령전(崇靈殿)으로 높였는데 이 묘소만 떳떳한 전장(典章)에서 빠졌다는 것은 정말 하나의 흠결된 일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비록 믿을 만한 증거의 흔적이 없으나, 고을의 옛 노인들이 가리키는 곳이 있다면 병졸을 두어 수호하거나 돌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는 등 근거할 수 있는 사례가 하나뿐만이 아니다. 더구나 이곳의 사적이 읍지(邑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석을 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호하는 사람까지 없으니, 매우 흠결된 일이다. 연대가 멀고 또 믿을 만한 문헌도 없어서 제사는 지내지 못하더라도 땔나무를 하거나 목축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해야겠다. 그 도백으로 하여금 순행할 때에 몸소 살펴보게 하고 무덤 가까이 사는 민호(民戶)를 수호로 정하고 본 고을 수령이 봄·가을로 직접 살피게끔 규식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志)》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다.

1930년대의 단군릉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도 강동의 단군릉을 수축하였다.

江東壇君墓(강동단군묘)와 荒廢(황폐)한 담 (周圍四百十尺(주위사백십척)) [寫] 동아일보 1932-04-26 03면 01단
江東大朴山(강동대박산)에 잇는 壇君陵奉審記(단군릉봉심기) (中(중)) (吳箕永) 동아일보 1932-05-11 07면 01단
江東大朴山(강동대박산)에 잇는 壇君陵奉審記(단군릉봉심기) (下(하)) (吳箕永) 동아일보 1932-05-12 07면 01단
修築工事中(수축공사중)의 檀君陵(단군릉) [寫] 동아일보 1935-10-31 석간 02면 05단

평양의 단군묘(檀君廟)

조선왕조실록에 평양의 기자묘(箕子廟)와 함께 단군묘(檀君廟)가 자주 나오나 이것은 무덤(墓)이 아닌 사당(廟)이다.

문묘(文廟)를 배알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기자묘(箕子廟)를 배알하고 네 번 절하였으며, 또 단군묘(檀君廟)로 가서 읍(揖)을 한 다음 연광정(練光亭)에 가서 무예(武藝)를 관람했는데, ....

함께 보기

각주

  1. 단군 신화에 빠진 김일성, 개천절 모르는 북한 주민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9-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