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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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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동군 단군릉.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 있는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ref>[http://nambukstory.donga.com/Board?bid=123#!m=view&lid=320640&bid=123 단군 신화에 빠진 김일성, 개천절 모르는 북한 주민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9-10-04</ref> : 1993년 10월 노동신문에 평양 중심에서 약 40km 떨어진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과 그의 부인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됐다. 김일성의 지시로 개축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994년 그의 사망 후에 준공되었다.]]
[[파일:강동군 단군릉.jpg|300픽셀|섬네일|오른쪽|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 있는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ref>[http://nambukstory.donga.com/Board?bid=123#!m=view&lid=320640&bid=123 단군 신화에 빠진 김일성, 개천절 모르는 북한 주민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9-10-04</ref> : 1993년 10월 노동신문에 평양 중심에서 약 40km 떨어진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과 그의 부인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됐다. 김일성의 지시로 개축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994년 그의 사망 후에 준공되었다.]]
북한은 1993년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고 1994년에 이를 개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무덤이 단군의 것으로 단정할만한 근거는 박약하다.
북한은 1993년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고 1994년에 이를 개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무덤이 단군의 것으로 전해온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로 단정할만한 근거는 박약하다.
* [http://nambukstory.donga.com/Board?bid=123#!m=view&lid=320640&bid=123 단군 신화에 빠진 김일성, 개천절 모르는 북한 주민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9-10-04
* [http://nambukstory.donga.com/Board?bid=123#!m=view&lid=320640&bid=123 단군 신화에 빠진 김일성, 개천절 모르는 북한 주민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9-10-04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997 단군릉(檀君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0997 단군릉(檀君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9년 10월 7일 (월) 06:32 판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삼국유사(三國遺事)이승휴(李承休, 1224~1300)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기록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의 무대 태백산(太伯山)이 묘향산(妙香山)이라 하고, 단군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다 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백두산(白頭山)과 어떤 관련도 찾아보기 어렵다.[1]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기록 번역문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단군 기록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태백산(太白山)이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다.


제왕운기의 단군신화 기록 번역문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 있는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2] : 1993년 10월 노동신문에 평양 중심에서 약 40km 떨어진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과 그의 부인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됐다. 김일성의 지시로 개축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994년 그의 사망 후에 준공되었다.

북한은 1993년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고 1994년에 이를 개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무덤이 단군의 것으로 전해온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로 단정할만한 근거는 박약하다.


단군릉 관련 역사 기록

【고적】 대총(大塚)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 하나는 현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도마산(刀亇山)에 있는데 속담에 옛 황제(皇帝)의 무덤이라 전한다.
단군(檀君)의 묘소를 수리하고 무덤을 수호(守護)할 호(戶)구를 두었다. 승지 서형수(徐瀅修)가 아뢰기를,
"단군은 우리 동방의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서 역사에 편발 개수(編髮盖首)의 제도를 제정하였다고 일컫고 있습니다. 군신 상하의 분수와 음식과 거처의 예절을 모두 단군이 창시(創始)하였다면 단군은 동방에 있어서 사실 세상이 끝나도록 잊지 못할 은택이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을 극도로 갖추어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강동(江東)에 벼슬할 때에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레가 4백 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志)》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막론하고 어떻게 황폐해지도록 놔두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땔나무를 하거나 소와 말을 먹이도록 놔둘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단군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으므로 묘소가 있을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중국의 황제(黃帝)는 교산(喬山)에 신발이 있는 일169) 도 있었고 공동산(崆峒山)에 무덤이 있는 고사도 있습니다. 더구나 평양에 단군의 사당이 있고 본 고을에서 숭령전(崇靈殿)으로 높였는데 이 묘소만 떳떳한 전장(典章)에서 빠졌다는 것은 정말 하나의 흠결된 일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비록 믿을 만한 증거의 흔적이 없으나, 고을의 옛 노인들이 가리키는 곳이 있다면 병졸을 두어 수호하거나 돌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는 등 근거할 수 있는 사례가 하나뿐만이 아니다. 더구나 이곳의 사적이 읍지(邑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석을 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호하는 사람까지 없으니, 매우 흠결된 일이다. 연대가 멀고 또 믿을 만한 문헌도 없어서 제사는 지내지 못하더라도 땔나무를 하거나 목축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해야겠다. 그 도백으로 하여금 순행할 때에 몸소 살펴보게 하고 무덤 가까이 사는 민호(民戶)를 수호로 정하고 본 고을 수령이 봄·가을로 직접 살피게끔 규식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양의 단군묘(檀君廟)

조선왕조실록에 평양의 기자묘(箕子廟)와 함께 단군묘(檀君廟)가 자주 나오나 이것은 무덤(墓)이 아닌 사당(廟)이다.[3]

문묘(文廟)를 배알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기자묘(箕子廟)를 배알하고 네 번 절하였으며, 또 단군묘(檀君廟)로 가서 읍(揖)을 한 다음 연광정(練光亭)에 가서 무예(武藝)를 관람했는데, ....

여러 주장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1]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기록하지도 않았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4] 최남선이[5]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6][7][8]

참고 자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