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글 (→강동 단군릉 관련 역사 기록) |
잔글편집 요약 없음 |
||
15번째 줄: | 15번째 줄: | ||
[[파일:제왕운기 단군신화.jpg|800픽셀|섬네일|가운데|제왕운기의 단군신화 기록 번역문]] | [[파일:제왕운기 단군신화.jpg|800픽셀|섬네일|가운데|제왕운기의 단군신화 기록 번역문]] | ||
==여러 주장들== | |||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ref name="sung"/>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 |||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기록하지도 않았다. | |||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 |||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353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B%82%A8%EC%84%A0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ref name="min">민태원(閔泰瑗),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108210020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1-08-21&officeId=00020&pageNo=1&printNo=358&publishType=00020 白頭山行(백두산행) : 1회] 동아일보 1921-08-21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108220020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1-08-22&officeId=00020&pageNo=1&printNo=359&publishType=00020 白頭山行(백두산행) : 2회] 1921.08.22 동아일보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1090800209201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1-09-08&officeId=00020&pageNo=1&printNo=376&publishType=00020 白頭山行(백두산행) : 최종(17회)] 1921.09.08 동아일보 1면</ref> 최남선이<ref name="choi">최남선(崔南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72800209201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7-28&officeId=00020&pageNo=1&printNo=2115&publishType=00020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一(일))] 1926.07.28 동아일보 1면<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1220020920402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1-22&officeId=00020&pageNo=4&printNo=2293&publishType=00020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十八(팔십팔))] 1927.01.22 동아일보 4면<br>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12300209204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1-23&officeId=00020&pageNo=4&printNo=2294&publishType=00020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九(팔구)) : 최종] 동아일보 1927-01-23 4면</ref>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ref name="dan1">[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0040100209101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0-04-01&officeId=00020&pageNo=1&printNo=21077&publishType=00010 횡설수설] 1990.04.01 동아일보 1면</ref><ref name="dan2">[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B%82%A8%EC%84%A0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의 [단군론] 77회 연재 | |||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30400209201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3-04&officeId=00020&pageNo=1&printNo=2014&publishType=00020 壇君論(단군론) (一(일))] 1926.03.03 동아일보 1면 | |||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30400209201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3-04&officeId=00020&pageNo=1&printNo=2014&publishType=00020 壇君論(단군론) (二(이))] 1926.03.04 동아일보 1면 | |||
<br>[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725002092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7-25&officeId=00020&pageNo=1&printNo=2112&publishType=00020 壇君論(단군론) (七十七(칠십칠))] 동아일보 1926-07-25 1면</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B%8B%A8%EA%B5%B0%EB%A1%A0 단군론] 위키백과</ref> | |||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 ||
48번째 줄: | 62번째 줄: | ||
* [http://sillok.history.go.kr/id/kka_13404005_002 중종실록 90권, 중종 34년 4월 5일 임인 2번째기사 1539년 명 가정(嘉靖) 18년 : 원접사의 서장을 내리며, 실화에 힘쓴 것을 치하하고 물품을 보내라 전교하다] | * [http://sillok.history.go.kr/id/kka_13404005_002 중종실록 90권, 중종 34년 4월 5일 임인 2번째기사 1539년 명 가정(嘉靖) 18년 : 원접사의 서장을 내리며, 실화에 힘쓴 것을 치하하고 물품을 보내라 전교하다] | ||
{{인용문|문묘(文廟)를 배알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기자묘(箕子廟)를 배알하고 네 번 절하였으며, 또 단군묘(檀君廟)로 가서 읍(揖)을 한 다음 연광정(練光亭)에 가서 무예(武藝)를 관람했는데, ....}} | {{인용문|문묘(文廟)를 배알하여 네 번 절하고, 또 기자묘(箕子廟)를 배알하고 네 번 절하였으며, 또 단군묘(檀君廟)로 가서 읍(揖)을 한 다음 연광정(練光亭)에 가서 무예(武藝)를 관람했는데, ....}} | ||
==참고 자료== | ==참고 자료== |
2019년 10월 7일 (월) 07:33 판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기록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의 무대 태백산(太伯山)이 묘향산(妙香山)이라 하고, 단군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다 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백두산(白頭山)과 어떤 관련도 찾아보기 어렵다.[1]
- 三國遺事 卷 第一 > 제1 기이(紀異第一) >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단군 기록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태백산(太白山)이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여러 주장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1]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기록하지도 않았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2] 최남선이[3]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4][5][6]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북한은 1993년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고 1994년에 이를 개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무덤이 단군의 것으로 전해온 기록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믿을만한 근거는 박약하다.
- 단군 신화에 빠진 김일성, 개천절 모르는 북한 주민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9-10-04
- 단군릉(檀君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단군릉(檀君陵) - 위키백과
- 단군릉 - 북한지식사전 - 위키독
강동 단군릉 관련 역사 기록
-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志)》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도 강동의 단군릉을 수축하였다.
- 朝鮮(조선)의 始祖(시조) 壇君墓修築(단군묘수축) ◇┉守護閣(수호각)을 建筑(건축)하야 永久(영구)히 保存(보존)코저 發起(발기) 동아일보 1932-04-26 03면 04단
- 江東壇君墓(강동단군묘)와 荒廢(황폐)한 담 (周圍四百十尺(주위사백십척)) [寫] 동아일보 1932-04-26 03면 01단
- 江東大朴山(강동대박산)에 잇는 壇君陵奉審記(단군릉봉심기) (上(상)) (吳箕永) 동아일보 1932-05-06 07면 01단
- 江東大朴山(강동대박산)에 잇는 壇君陵奉審記(단군릉봉심기) (中(중)) (吳箕永) 동아일보 1932-05-11 07면 01단
- 江東大朴山(강동대박산)에 잇는 壇君陵奉審記(단군릉봉심기) (下(하)) (吳箕永) 동아일보 1932-05-12 07면 01단
- 修築中床石安置(수축중상석안치)코 檀君陵(단군릉)에 첫 祭饗(제향) 十月三日(십월삼일), 有志(유지)들이 동아일보 1935-10-31 석간 02면 07단
- 修築工事中(수축공사중)의 檀君陵(단군릉) [寫] 동아일보 1935-10-31 석간 02면 05단
평양의 단군묘(檀君廟)
조선왕조실록에 평양의 기자묘(箕子廟)와 함께 단군묘(檀君廟)가 자주 나오나 이것은 무덤(墓)이 아닌 사당(廟)이다.
참고 자료
- 사료로 본 한국사 > 시대별 > 삼국 이전 > 정치 >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사료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 단군 이야기와 고조선 / 단군에 대한 인식 사료로 본 한국사 - 우리역사넷
- D-Story 73 : 민족의 뿌리 찾아(1) 단군 영정 공모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 2월 - 28 - 2011)
- D-Story 74 : 민족의 뿌리 찾아(2) 단군 유적 보존운동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3월 - 10 - 2011)
- D-Story 75 : 민족의 뿌리 찾아(3) 백두산을 가다 – 민태원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4월 - 1 - 2011)
- D-Story 76 : 민족의 뿌리 찾아(4) 백두산을 가다 – 최남선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블로그 (4월 - 4 - 2011)
- 백두산근참기 문화컨텐츠닷컴 (단군신화 무대를 백두산으로 추정)
- 단군론 위키백과
- 백두산천지와 단군신화 - 문화콘텐츠닷컴
- 백두산 신화
각주
- ↑ 1.0 1.1 백두산에 얽힌 전설·신화 중앙일보 1985.03.04
- ↑ 민태원(閔泰瑗), 白頭山行(백두산행) : 1회 동아일보 1921-08-21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2회 1921.08.22 동아일보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최종(17회) 1921.09.08 동아일보 1면 - ↑ 최남선(崔南善),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一(일)) 1926.07.28 동아일보 1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十八(팔십팔)) 1927.01.22 동아일보 4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九(팔구)) : 최종 동아일보 1927-01-23 4면 - ↑ 횡설수설 1990.04.01 동아일보 1면
- ↑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의 [단군론] 77회 연재
壇君論(단군론) (一(일)) 1926.03.03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二(이)) 1926.03.04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七十七(칠십칠)) 동아일보 1926-07-25 1면 - ↑ 단군론 위키백과
- ↑ 단군 신화에 빠진 김일성, 개천절 모르는 북한 주민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9-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