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삼국유사(三國遺事)이승휴(李承休, 1224~1300)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기록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의 무대 태백산(太伯山)이 묘향산(妙香山)이라 하고, 단군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했다 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백두산(白頭山)과 어떤 관련도 찾아보기 어렵다.[1]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기록 번역문

제왕운기(帝王韻紀)의 단군 기록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태백산(太白山)이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다.


제왕운기의 단군신화 기록 번역문

고려사 지리지의 단군 기록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는 본래 3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戊辰)년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국인(國人)이 그를 임금으로 옹립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아 단군(檀君)이라 부르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 되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하고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했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 되었다. 41대 후손 준(準)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무리 1,000여명을 모아 망명해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으로도 쓰고, 곧 평양이다.】을 도읍으로 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右渠)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자,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왕험을 낙랑군(樂浪郡)으로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 기록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靈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東扶餘) 왕(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부루가 아들이 없어서 금색 와형아(金色蛙形兒)를 얻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세워서 태자(太子)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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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주몽까지 이어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단군 기록

【건치연혁】 본래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伯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檀君)이라 일컬었으니, 이것이 전조선이요,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기자(箕子)를 여기에 봉하니, 이것이 후조선이요, 전하여 41대 손 준(準)에 이르러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 [험(險)은 검(儉)이라고도 쓰니, 바로 평양이다.] 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漢) 나라의 조명(詔命)을 받들려 하지 않으니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왕험성으로 낙랑군(樂浪郡)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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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명】 왕검성(王儉城) 옛 기록에, 단군(檀君)은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사묘】단군사(檀君祠) 『신증』 당고의 시에, “아득한 옛날에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에 이 분이 비조(鼻祖)라네. 가시덩굴을 베지 않았던들, 뉘라서 동국을 낙토(樂土)로 만들었으리.” 하였다. ○ 사도의 시에, “단군이 언제 비롯했던고, 말 들으니 요(堯) 때에 비롯했다고. 지금부터 4천년 전이나, 유묘(遺廟)가 산마루에 있네.” 하였다. 동명왕사(東明王祠) 기자사(箕子祠) 곁에 있다. 두 사(祠)가 같은 집에 있는데 단군이 서쪽에 있고 동명이 동쪽에 있으며 모두 남향(南向)이다. 해마다 봄ㆍ가을에 향(香)과 축문을 내려 중사(中祀)로 제사 지낸다. 본조(本朝) 세종(世宗) 11년(1429)에 처음 설치했다. ○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말 들으니 옛날 태고 적에, 단군이 나무 가에 내려왔다고. 동국 땅에 군림하니, 때는 제요(帝堯)의 시절. 세대를 전함이 몇인지 모르고, 세월을 지남이 천 년을 넘었네. 그 뒤에 기자(箕子)의 대에도, 마찬가지로 조선이라 이름했네.” 하였다. 『신증』 당고의 시에, “동명이 삼한(三韓)의 웅주(雄主)로, 선서(仙逝)한 지 세대가 오래되었건만, 사당이 서경(西京)에 있어, 사람들이 닭과 술로 제사 드리네.” 하였다. ○ 사도의 시에, “고구려가 처음 나라를 이룩했을 때, 왕의 호는 동명이었네. 그의 덕이 두터웠던 줄 알리니, 전사(專祠)가 서경에 있도다.” 하였다. 기자사(箕子祠) 성안에 있다. ○ 고려 숙종(肅宗) 10년(1105)에 왕이 서경에 행행하였을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이 사(祠)를 세우기를 건의하여 중사로 제사 지내 왔고, 본조 세종 12년 경술에 비(碑)를 세웠다. 변계량(卞季良)이 그 비문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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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妙香山)이 곧 단군과 관련된 태백산(太伯山)이라 함.
【산천】묘향산(妙香山) 부의 동쪽 1백 30리에 있다.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하며, 옛 기록에, “그 산에 3백 60채의 암자가 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향산(香山)은 압록강 남쪽 기슭 평양부(平壤府)의 북쪽에 있어 요양(遼陽)과 경계하고 있으니 산의 크기가 비길 것이 없으며 장백산에서 갈라진 것이다. 그곳에 향나무와 사철나무가 많으며, 선불(仙佛)의 옛 자취가 남아 있다.” 하였다. ○ 고려 고종 3년에 금산(金山)의 군사가 이 산에 뛰어들어 보현사(普賢寺)를 불질렀는데 관군이 추격하여 2천 4백여 급의 목을 베었고, 적장 지노(只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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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 태백산(太伯山) 옛 기록에, “옛날 천신(天神)의 환인(桓因)이 있었는데, 서자(庶子) 웅(雄)에게 명하여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밑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하였으며, 인간의 3백 60여 가지의 일들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때에 한 곰이 있어 늘 사람의 몸이 되기를 신에게 축원하거늘, 신이 영약을 주어 먹게 하였더니, 곰이 그것을 먹고 여자로 변하였다. 신이 임시 사람으로 변하여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것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며,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부루(夫婁)하고 한다. 우(禹) 임금이 도산(塗山)에서 제후(諸侯)를 모을 제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공을 드리게 하였다. 뒤에 부루가 북부여(北扶餘) 왕이 되었으나, 늙도록 아들이 없어 곤연(鯤淵)에 가서 아들을 빌어, 어린아이를 얻어서 기르니 이것이 금와(金蛙)다. 금와의 후손이 전해 오다가 대소(帶素)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신무왕(大神武王)에게 멸망되었다.” 하였다. 우발수(憂渤水) 못의 이름인데, 태백산 남쪽에 있다. ○ 《삼국사(三國史)》에, “북부여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가엽원(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기었는데, 그 옛 도읍에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을 하였다. 부루가 죽고 금와가 뒤를 이었는데, 우발수에서 여자를 만나 물었더니, ‘나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하고 하는데, 해모수라고 자칭하는 사나이가 나를 꾀어 웅심산(熊心山) 밑 압록강가 어떤 집 안에서 나를 욕보이고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부모는 중매도 없이 남자를 따랐다고 나를 꾸짖어 마침내 여기에 귀양와서 살게 되었다.’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안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그를 비추는데, 몸을 옮기어 햇빛을 피하니 햇빛이 따라가서 비추었다. 그로 말미암아 임신을 하여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가 그것을 내다 버렸으나 개와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그것을 품었다. 이에 그 어미에게 돌려 주어 따뜻한 곳에 싸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골격과 얼굴이 영특하게 생겼었다. 나이가 일곱 살이 되니, 제 손으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아 백발백중하였는데, 부여 사람들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하였다.
【산천】 구월산(九月山) 고을 서쪽 10리에 있으니 바로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다른 이름은 궁홀(弓忽)이요, 또 다른 이름은 증산(甑山), 삼위(三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또 백악(白岳)으로 옮겼다’하는데 곧 이 산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단군이 이내 당장경(唐藏京)으로 옮겼으며, 후에 다시 이 산으로 와서 숨어,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한다. 또 장련현 및 은율현 편에 보인다. 전산(錢山)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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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묘】 삼성사(三聖祠) 구월산 성당리(聖堂里)에 있으니 바로 환인(桓因)ㆍ환웅(桓雄) 단군의 사당이다. 나라에서 봄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 제사드리며, 또 비가 심한 때와 가물 때 기도하면 문득 감응한다.

【고적】 장장평(莊莊坪) 고을 동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장장평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당장경(唐藏京)의 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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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大東地志)》

【묘전】 환인(桓因)ㆍ환웅(桓雄) 환인의 서자(庶子)로서 속호(俗號)는 곤시씨(坤市氏)이다. 단군(檀君) 책 머리에 자세하고 후손은 갈라져서 동북쪽으로 부여(扶餘)가 되고, 그 연대(年代)는 반고씨세기(盤古氏世紀)에 있는 듯하다.
【고적】대총(大塚) 하나는 현의 서쪽으로 3리에 있으며 둘레 4백 10척으로 속담에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 하나는 현의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도마산(刀亇山)에 있는데 속담에 옛 황제(皇帝)의 무덤이라 전한다.

여러 주장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1]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이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기록하지도 않았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2] 최남선이[3]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4][5][6]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

북한은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단군의 묘인 단군릉(檀君陵)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군릉은 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등에 단군묘(檀君墓)로 나온다.[7]

안정복(安鼎福, 1712 ~ 1791)의 《동사강목 (東史綱目)》 부록 하권 "태백산고(太伯山考)"의 주석에는 아래와 같이 나온다.[8]

《여지승람》에는, 강동현(江東縣)에 대박산(大朴山)이 있고 그 아래에 큰 고총(古塚)이 있는데 세속에는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고 기록되고, 지금 그 지방 사람들이 대박(大朴)산을 태백(太伯)산이라고 하나, 또한 믿을 수 없다.

고종실록(1900년)에도 대박산은 태백산(太白山)으로 나온다.[9]

단군릉으로 전해오는 무덤이 실제로 단군의 릉일 가능성은 희박하며, 고구려 시대 고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

참고 자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