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은 상주 경천대, 괴산 화양동 계곡 등의 바위에 새겨진 글귀로,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현실의 청(淸)나라는 오랑캐라며 배척하고, 망하고 없는 명(明)나라를 흠모하며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라 자부하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개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은 명(明)나라가 지배하는 질서를 의미하는 말로, 이미 망하고 없는 중국 명(明)나라에 대한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한없는 흠모를 요약 표현한 말이며, 바위에 새긴 각자(刻字)로 남아있다.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 1611~1644, 재위 1628~1644)의 연호(年號)이다. 조선 후기의 사대부들은 죽어도 청(淸)나라를 인정하기 싫어 연호도 청나라 것이 아닌 명나라 마지막 연호 숭정(崇禎)을 조선말까지 썼다. 예를들면 숭정기원후재신사(崇禎紀元後再辛巳)는 숭정 연호가 시작된 후 두번째 맞는 신사년(1701년), 숭정기원후사을묘(崇禎紀元後四乙卯)는 네번째 맞는 을묘년(1855년)의 의미이다.

바뀐 현실을 끝내 인정하지 않고 지나간 일에 매달려 현실의 청나라는 오랑캐로 여기고 상상 속의 명나라를 섬기며, 소중화(小中華)라는 자부심에 취해 살았던 조선 선비들의 의식세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더구나 명나라는 사상적으로도 조선 선비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떠받들던 주희(朱憙, 1130~1200)성리학(性理學)이 아니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며 이단시(異端視)하던 왕수인(王守仁, 1472~1528)양명학(陽明學)이 성행하던 나라였는데도 그러했다.

명청(明淸) 교체기에 광해군은 일방적으로 명나라 편을 들지 않고 정세변화를 살펴가며 적절히 대처하려 했으나,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한 유신들의 반감을 샀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국제정세의 변화에는 눈감고 숭명배청(崇明排淸) 정책을 펴다 정묘(丁卯, 1627년), 병자(丙子, 1636년)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당하고 말할 수 없는 피해와 굴욕을 자초했다. 국제정세 변화를 무시한 잘못된 외교로 당한 굴욕에 대한 반성은 전혀없이 조선후기 유생들은 숭명배청 의식을 더욱 강화시켜 현실의 청나라는 배척하고 망하고 없는 명나라를 한없이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현실의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허구적인 명분만 맹목적으로 좇던 이런 정신세계가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일까지 당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나라가 처한 국제 환경은 도외시하고 인접한 전체주의 국가들을 추종하며, 우방에 대해서는 공공연히 반미, 반일을 외치고, 백년이 다 된 일제시대 일로 친일파 몰이와 반일 선동이 아직도 정치판에서 괴력을 발휘하는 오늘날의 한국도 조선 후기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각자

이 각자(刻字)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5)이 화양동 계곡에 새긴 것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채득기(蔡得沂, 1604~1645)가 새긴 것이 시기적으로 그보다 약간 앞서는 것 같다. 여기의 明은 '밝다'는 뜻이 아니라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하늘과 땅(천지)은 명(明)나라의 것이고, 해와 달은 숭정제(崇禎帝)의 것이다." 쯤의 의미로 볼 수 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어느 경우든 명나라에 대한 지독한 사대 의식의 표현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이미 망하고 없는 나라에 대한 사대라는 점에서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힘든 사고방식이다.

채득기(蔡得沂)가 새긴 상주 경천대 각자

송시열(宋時烈)이 새긴 화양동 계곡 각자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는 임진왜란 때 조선 파병을 결정한 황제이고,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줄인 말임.
화양구곡의 제6곡인 첨성대 주변 바위에는 갖가지 각자(刻字)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명나라 의종(毅宗)과 신종(神宗)이 각각 썼다는 ‘비례부동’(非禮不動)과 ‘옥조빙호’(玉藻氷壺), 선조와 숙종의 어필(御筆)인 ‘만절필동’(萬折必東)과 ‘화양서원’(華陽書院)이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엿보이는 필자(筆者) 선정이다.

다른 표현의 각자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각자

항일지사로 알려진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4 ~ 1907)도 같은 취지의, 표현을 약간 달리한 각자를 두 곳에 남겼다.

기봉강산(箕封江山)의 箕는 기자(箕子)를 뜻하며, 홍무(洪武)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연호이다. 소화(小華)는 소중화(小中華)로 조선을 작은 중국이라고 자부하던 용어이다. 이때 중국은 청나라 아닌 망하고 없는 명(明)나라를 가리킨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1]

내 나라, 내 사회의 구조를 내 스스로 만들어 보겠다, 혹은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는 조선시대부터 미약했고,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글줄깨나 읽은 대개의 선비들은 이 나라 이 강토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후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 대표적 예가 20세기 초 1904∼5년 일본에 저항하다 강제로 흑산도에 유배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흑산 바위에 새겨 논 글이다. 조선은 바로 「기봉강산(箕封江山)의 홍무일월((洪武日月)」이라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냐. 중국인(은나라) 기자가 이 땅에서 세운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이 나라 하늘에 빛나는 해와 달은 누구의 것이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해와 달이다. 그러니 얼마나 빛나는 나라며 얼마나 소중한 나라이냐. 그런 나라를 감히 일본 너희 놈들이―. 당시는 그런 사고였다.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

조선 숙종 10년(1684) 당시 경기도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 1626~1687)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취지로 새겼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나 의미가 확대되어 천자를 향한 제후들의 충성을 말한다. 재조번방(再造蕃邦)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내 조선(蕃邦)을 구해냈다(再造)는 의미이다.[2]

화양동 계곡의 만동묘(萬東廟)처럼 조종암에도 대통묘(大統廟)가 있고, 명나라 태조(太祖), 신종(神宗), 의종(毅宗)과 김상헌(金尙憲) 등 조선 문무(文武) 9현 및 왕미승(王美承) 등 명나라 9의사(義士)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3]


조종암에는 이외에도 명나라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의 글씨 '사무사(思無邪)', 효종의 글을 송시열이 쓴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 낭선군 이우(李俁, 1637-1693)가 전서체로 쓴 '조종암(朝宗嵒)'이란 글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가평 조종암의 각자들.jpg

가평 조종암(朝宗巖)의 각종 각자들. 여기의 단을 대보단(大報壇)이라 한다.

면암 최익현의 연보에 이 각자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 연보(年譜) / 경자년(1900, 광무 4) 선생 68세
1월 조종암(朝宗巖) 황단제향(皇壇祭享)에 가서 참석하고, 재실(齋室)에서 강회(講會)를 베풀었다. 종질 최영직(崔永稷)이 따라갔다. 단(壇)은 가평군(加平郡) 조종면(朝宗面) 하곡(荷谷) 큰 냇가에 있다.

지난 숙종(肅宗) 때에 창해처사(滄海處士) 허격(許格)[4] 공이 군수(郡守) 이제두(李齊杜)ㆍ향사(鄕士) 백해명(白海明)과 냇가 바위 위에 의종황제(毅宗皇帝)가 쓴 ‘사무사(思無邪)’라는 3자를 크게 새겼고 우리 선조(宣祖)가 쓴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再造藩邦)’이라는 8자를 새겼다. 또 효종(孝宗)의 ‘날은 저물고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다.[日暮途遠至痛在心]’라는 8자를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시호)에게 글씨를 받아서 아울러 새겼다. 또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의 글씨를 받아서 그 위에 ‘조종암(朝宗巖)’이라고 전서(篆書)로 새겼다. 또 사당을 세워서 신종황제를 제사하기를 의논했는데 우암이 듣고 좋게 여기면서,

“의종황제를 어찌 뺄 수 있느냐?”

하였다. 그 일을 오래도록 완성하지 못했는데, 수암(遂菴) 권 문순공(權文純公 권상하(權尙夏)의 시호)이 우옹(尤翁)의 명(命)으로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현대에 부활한 사대 망령

대소천지 레닌일월(大蘇天地 列寧日月)

해방 직후 남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맹목적으로 소련을 떠받들고, 소련의 지시를 받아 행동했다. 심지어 서울의 일개 소련 부영사가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을 자신의 심복부하(henchman)라고 말하기도 했다.[5] 또 박헌영은 외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 ~ 20년 내에 소련연방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고까지 했다. 소련이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운 꼭두각시 김일성이야 말할 것도 없다. 김일성은 심지어 ‘스탈린의 말은 내게는 곧 법(法)이다’고까지 말했다.[6]

소련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운데 대해 반발한 박헌영은 소련 측에 집요하게 이의를 제기하여 1946년 7월 초 두 사람이 함께 스탈린 앞에 불려가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는데, 스탈린은 김일성을 그대로 지도자로 임명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주었다. 후일 김일성은 자신이 박헌영보다 시험을 잘 봐서 지도자가 됐다고 자랑했다 한다.[7] 이것이 김일성, 박헌영이 입만 열면 주장하던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민주주의라면서 인민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일을 빗대어 뱅모는 "대소천지 레닌일월(大蘇天地 列寧日月)"이라 하였다.[8] "대소천지 스탈린일월(大蘇天地 斯大林日月)"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대김천지 백두일월(大金天地 白頭日月)

주체교 신도들에게는 하늘과 땅은 위대한 김씨 수령의 것이고, 해와 달은 백두혈통의 것이다.

대중천지 진핑일월(大中天地 近平日月)

그는 "파리가 만리를 가는데 날아갈 순 없다. 말 궁뎅이에 딱 붙어서 가면 간다"며 "중국이라는 국가를 우리가 잘 활용하는 방법은 중국이라는 말 궁둥이에 딱 달라붙어 가는 것이다"고 말했다.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같은 나라.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中國夢) 함께 하겠다."
"마오쩌둥 주석이 이끈 대장정에도 (김산) 청년이 함께 했습니다." : 2017. 12. 15 베이징대(北京大) 연설
국빈 방문을 수행한 기자들이 폭행당한 사건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한중 정상회담, 국빈 방문인 데 홀대... 폭행 사건... 외교적 무례 도넘은 중국 한국일보 2017.12.14
베이징 공항 영접부터 차관보급이 나와 관례 어겨
문 대통령 방중 첫날 저녁과 이튿날 아침ㆍ점심 ‘혼밥’ 거듭


  • 대청천지 선통일월(大淸天地 宣統日月)이라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고, 망하고 없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보다는 진일보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중국이 사드 관련하여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부리는 횡포나, 중국발 미세먼지에 대해 말 한마디도 못 꺼내고 쉬쉬하는 것이 조선시대보다 나을 것도 없다.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