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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천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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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삼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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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들의 정체성==
동북인민혁명군 또는 동북항일연군에는 다수의 조선인들이 참가하였으나 민생단 사건으로 수백명이 희생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이들 대다수는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조선말보다는 중국말에 더 익숙했고, 조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조선인이라기 보다는 중국에 동화된 오늘날의 조선족과 같은 의식구조를 가졌다.
같은 중국에서 활동했음에도 임시정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우리말로 발음하고 표기했다. 영문으로 작성된 외교문서에 한자 이름의 영어 표기를 우리말 발음으로 적어서 조선인 이라는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예를들면 해방전 중국에 있을 때 영문 외교문서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김구(金九)]]는 Kim Ku, Kim Koo 등으로<ref name="kj">[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2v01/d747 <nowiki>[747]</nowiki>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February 7, 1942</ref>, 외교부장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6%8C%EC%95%99 조소앙(趙素昻)]은 Tjosowang, Tjo So Wang, Joe So-ang 등<ref name="kj"/><ref>[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2v01/d746 <nowiki>[746]</nowiki>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January 3, 1942</ref><ref>[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2v01/d750 <nowiki>[750]</nowiki>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March 20, 1942</ref> 우리말 발음으로 적었다.
반면에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자신들 이름의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했고, 러시아어 문서에 이름이 조선발음 아닌 중국발음으로 적혀 있다. [[김일성|김일성(金日成)]]은 소련군 문서에 이름이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나오며, 다른 조선인들도 러시아어로 표기된 이름이 중국발음이다<ref>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년 06월 21일) p.61 / 기광서,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003043&language=ko_KR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 현실 28』 (한국역사연구회, 1998.06) p.282</ref>. 이들은 자신들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더 익숙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1250020920400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1-25&officeId=00020&pageNo=4&printNo=15478&publishType=00020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ref><ref>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ref>. 따라서 조선인이라는 의식도 박약한 항일연군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기 보다는 중국공산당원으로 중국인들 틈에서 중국을 위해 싸웠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ref name="bh"/>에도 조선독립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그냥 중국인들과 같이 중국을 위해 싸운 것으로 나온다.


==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
==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

2020년 1월 2일 (목) 12:26 판

일제하 독립운동의 실상을 여러 측면에서 알아본다. 어느 증언이든 한 단면이며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닥종이 인형 작가 김영희의 증언

닥종이 인형 작가인 김영희는 그녀의 책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의 pp.307~309 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사람에 대한, 어느 이상주의 단체에서도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증오하던 신문기사를 기억하는데,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동그랗게 신문에 났을 때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는 그 독립운동가 사진에 탁 하고 침을 뱉고는 그 사진을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후벼 팠다.

그 행동은 미루나무 같이 훤칠하고 도량 넓은 아버지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 기사는 독립운동가 아무개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린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늘 잔인하게 그런 기사를 대했다.

 "요즘 세상 총질을 못해서 굶는가!"

아버지는 만주 시절, 그의 정의와 혈기로 독립군에 가담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젊은 청년으로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라가 없는 민족이 제일 먼저 할 일은 다시 내 땅을 찾는 것이었고, 또한 할아버지에 대한 일본인들의 탄압도 중국으로 가게 된 큰 이유였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사를 처녀가 된 나에게 말할 때 눈이 빛나곤 했다.

그 내용은 그때 나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당시 독립군 군사 훈련은 수수밭이나 갈대밭에서 했다.

만주의 갈대나 수수는 키가 커서 그들의 행동을 감출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빌면 독립군도 여러 파가 있어 머리가 아플 정도라고 했다.

아버지가 존경했던 ㅈ 선생의 뛰어난 능력을 믿고 그의 청춘을 대한의 독립에 바치려고 했다.

 "영희야. 글쎄 죽일 놈들이 독립군이랍시고 가을만 되면 재만주 교포 마을에 나타나 짐승보다 못한 짓들을 했어."

아버지는 그 장면들을 설명할 때 몸을 벌벌 떨며 흥분했다.

가난한 교포들이 가을걷이를 끝내고 양식을 재어 놓으면 싸락눈 오기 전에 독립을 표방한 도적떼들이 엽총을 메고 나타났다.

재만 교포들을 마을 마당에 모이게 해놓고 헛총질을 해대며 독립자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부녀자 반지부터 수수, 좁쌀까지 겨울에 먹을 미음 쑬 것도 안 남기고 싹 쓸어가면, 그 다음은 다른 도적떼가 독립군을 빙자해서 나타나고…….

그들의 횡포는 식구 앞에서 부녀자를 겁탈하든지 장정을 인질로 잡아가 귀를 잘라 보내고 돈으로 바꾸자고 협박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독립군이라 칭한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떡칠을 하듯 머릿기름을 바르고 달빛 아래 나타나면 머리통이 철판같이 번들번들 빛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의 꿈에 자신을 잃었다.

 "영희야, 어느 놈이 진짜인지 모르는 판에 도적놈 소리나 면하고자 통분을 하며 독립군에서 나와버렸어."

아버지의 말은 쓸쓸했다.

아버지는 잘 알려진 몇몇 독립운동가도 존경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그림자를 상세히 알고 있어 오히려 실망만 한 것이다.

 "유관순 한 분만 독립운동을 제대로 했지 바지 입은 놈들 제대로 독립운동 한 것 못 봤다. 그저 제 욕심이 많아, 나라 없는 주제에 권력 다툼이나 했지. 그래도 독립이 되니 제일 먼저 설치는 놈들이 그 도적떼라니, 꾹 참고 독립을 기원한 사람들 딛고 올라가서 한 자리씩 맡아보려고……."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진짜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못 살아남고 다 죽었어. 해방 후 꾀 많은 독립군들은 기회를 얻어 한 자리 하고, 총질이나 해대던 무식한 놈들은 세상이 변한 후 총질 못해 가난하게 살고……."

일제시대 신문 기사들을 보면 독립단과 마적단의 행동이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기사들이 모두 조작일 리는 없을 것이므로, 김영희 부친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강탈에 가까운 군자금 모금

독립운동에도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고, 군대를 유지하자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일제시대 국내인들은 물론 해외교민들도 대부분 가난하여 생계유지도 급급한 상황이라 기부금을 낼 형편이 되는 사람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모금도 잘 되지 않아, 강탈에 가까운 군자금 모집이 일상적으로 있었다.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 ~ 1936)도 국내로 잠입하여 강압적 모금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복역중 옥사했다.[1][2]

제법 큰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사업체를 가진 사람들이나 대지주 등 부자들 뿐이었다. 몰래 상당한 기부금을 낸 이들은 사업을 유지하자면 자의든 타의든 일제에도 협력할 수 밖에 없어 해방후에는 친일파로 몰렸다.

어렵게 모집한 자금도 중간에 개인적 용도로 유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1921년 일제의 기록 "광한단원 검거의 건(光韓團員 檢擧의 件, 密 第33號 其71/高警 4465號)"을 보면 박정호(朴正鎬) 등이 강제로 모금한 돈을 유흥비로 썼다고 나온다.[3][4][5] 박정호는 평양 출신으로 해방 후 김일성과 가까이 지냈다고 하며, 1953년 남파되어 간첩활동을 하다 피체, 1959년 사형당했다 (박정호 간첩사건[6][7][8]). 박정호의 아들 박명철(朴明哲, 1941~ )역도산(1924~1963)의 사위로 북한의 체육상, 최고재판소장 등을 지냈다.[9][10]


현순(玄楯, 1880 ~ 1968)의 경우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생애는 임시정부 요인과 기독교 목사로 독립유공자로서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문집에 나온 6.25 사변 무렵에 지은 시들은 김일성을 찬양하고, 이승만을 국적(國賊), 맥아더 원수를 맥흉(麥凶)이라 칭하며, 남침한 인민군의 승리를 원하는 극도의 반한 친북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은 미국에서 편안히 살면서 6.25에 참전한 미군을 비판하고 김일성이나 찬양하던 사람이 1963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거리낌없이 받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한국 정부는 모르고 수여했다지만, 대한민국의 멸망과 북한의 승리를 원하던 사람이 왜 북한에 훈장을 달라고 하지 않고, 망하기를 바라던 한국정부의 훈장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임시정부 요인이었고, 기독교 목사로 미국에 주로 거주했던 그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을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이승만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 때문에 김일성을 찬양하고 6.25 때도 북한이 이겨 한국이 망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p.110 :

訟 金日成(김일성)將軍

扙義擧兵救國豪 風餐露宿着寒袍
鬥山鬥水神非困 攻陣攻營意自高
施政摠爲民主略 啓工都在革新旄
絶倫偉業綿連勢 必合分邦鎭亂濤

p.111 :
誡國賊 李承晩(이승만) 一九五〇年 三月 十五日
人凶嘆心爾猩獌 東敗西喪到末年
國誅當頭如甕鼠 地無容所訴何天

祖國抗戰 一九五〇年 十二月 三十一日
進退抗爭逐殺年 與中合勢造生年
誅凶破帝忘年月 正計平和億萬年

麥牙德(맥아더)之免職 一九五一年 三月中
違法侵鮮殺弱民 搖頭轉腹眼無人
迫來世論誰能拒 打倒麥凶復國春

p.112 :
輓 許憲(허헌)先生 最高人民委員長 一九五一年 九月 二十三日
許翁逝去訃音傳 自北至南弔哭連
內凶未除憐分地 外賊不消恨滿天
千千携手成原力 萬萬合心拒火烟

倍達大魂能蓋世 蠻兵自退挽光年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유공자가 될 수 있나?

김구의 공산주의자 비판

김구는 해방 후 말년에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고집했던 것과는 달리, 독립운동 시기에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백범일지에 그러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백범일지의 한 대목이다.

예를 들면, 이상룡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殺父會)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바꾸어서 아비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附)∙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남군정서(南軍政署)∙북군정서(北軍政署) 등에 스며 들어가서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相剋)을 시켜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해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白狂雲, ?~1924)∙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奎植, 1882~1931) 등 우리 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큰 일꾼들이 이 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자유시 참변

고려인 강제이주

독립운동을 웃음거리로 만든 김일성

북한 김일성의 항일전공이라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친것이 아니면, 터무니 없이 부풀린 것이 거의 모두이다. 그는 최고 권력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항일공적은 모두 말살하고, 자신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조작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은 1963년 8.15 행사 때까지는 소련군이 북한을 해방시켰다고 하여 경축행사 때마다 이를 강조하고 소련에 감사표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부터 소련은 지우고 김일성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역사를 조작해 나갔다고 한다.[11]

2012년에 탈북한 김영운 씨는 70세의 노인이십니다. 그 분은 50년 전(1963년) 양강도 혜산에서 김일성이 참가한 8.15 해방 기념보고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 불렀던 해방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양강도 혜산에서 8.15 해방 기념행사가 크게 열렸다. 평양에서 김일성이 내려오고 소련 사람들도 많이 참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임위원회 내각 부수상인 이주현이 내려와 행사를 지도하였다. 혜산이 생긴 후 처음 으로 집단체조를 했고, 김일성도 연설하고 소련 대표도 연설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운 씨는 "그땐 혜산이 온통 꽃 바다로 장식되고, 조소문화회관에서는 소련군대의 업적을 전하는 공연을 진행하였다. 소련이 없으면 오늘의 해방도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있었고 조소친선을 형상한 유화들이 거리마다 내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63년 당시 거리를 행진하며 불렀던 8.15해방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쏘베트 용사들이 찾아준 내 나라 영광 찬 강산을 낙원으로 꽃폈네 항일전통 빚내며 천리마로 달리니 5개년의 큰 계획 앞당겼다네 아 ~ 슬기로운 이 나라 자유의 땅 우리는 언제나 소련과 함께 있네’ 그러던 북한은 1963년 이후 소련에 대한 업적 내용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각 도마다 세워졌던 조소기념탑도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고 문화회관 옆에 위치했던 조소문화회관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63년 후부터는 해방의 은인이 소련이라고 거리마다 가득했던 구호 판들도 더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해방 절만 다가오면 기업 소마다 당위원회 조직부서들이 직장별• 작업반별 정치강연을 조직했습니다.

내용인즉 오늘의 해방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승리로 이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민을 일제의 억압 속에서 해방시킨 것은 김일성이라고 주입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 북한 주민들은 해방을 소련군의 업적으로 알고 있었고 또 정권도 그렇게 칭송했었는데 갑자기 해방절 18주년 행사 이후에는 소련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데 대해 의아해했습니다.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들의 정체성

동북인민혁명군 또는 동북항일연군에는 다수의 조선인들이 참가하였으나 민생단 사건으로 수백명이 희생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국인들의 환심을 사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이들 대다수는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 가서 조선말보다는 중국말에 더 익숙했고, 조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조선인이라기 보다는 중국에 동화된 오늘날의 조선족과 같은 의식구조를 가졌다.

같은 중국에서 활동했음에도 임시정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우리말로 발음하고 표기했다. 영문으로 작성된 외교문서에 한자 이름의 영어 표기를 우리말 발음으로 적어서 조선인 이라는 정체성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예를들면 해방전 중국에 있을 때 영문 외교문서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Kim Ku, Kim Koo 등으로[12],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은 Tjosowang, Tjo So Wang, Joe So-ang 등[12][13][14] 우리말 발음으로 적었다.

반면에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자신들 이름의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했고, 러시아어 문서에 이름이 조선발음 아닌 중국발음으로 적혀 있다. 김일성(金日成)은 소련군 문서에 이름이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나오며, 다른 조선인들도 러시아어로 표기된 이름이 중국발음이다[15]. 이들은 자신들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더 익숙했다[16][17]. 따라서 조선인이라는 의식도 박약한 항일연군 조선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기 보다는 중국공산당원으로 중국인들 틈에서 중국을 위해 싸웠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일성이 1942년에 쓴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18]에도 조선독립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그냥 중국인들과 같이 중국을 위해 싸운 것으로 나온다.

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했던 중공당 산하 반만항일(反滿抗日) 무장단체로, 실제로는 소련 코민테른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이들 속에 김일성 등 조선인들이 다수 있기는 했지만 성격상 조선독립운동 조직으로 보기 힘든데도, 해방 후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핵심 권력층이 된 탓에 한국 학계에서조차 정통성 있는 독립군 대접을 하려들고 있다. 이들은 1940년 일제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하기 전 만주에서 활동하는 동안 양민을 괴롭히는 수많은 비적(匪賊) 행위를 하였고, 이에 대한 무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동서고금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혁명의 목적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여느 마적단과 다를바 없는 비적질을 해도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고 방식을 가졌다. 당시는 마적단들도 항일을 표방하고 있었으므로 명분을 무엇으로 내세우든 똑같은 비적떼일 뿐이다.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최현이 소황구(小荒溝)의 각 가장(家長) 앞으로 협박장이 나오는데[19][20][21] 부대에 필요한 식량등을 언제까지 보내주지 않으면 가차없이 징벌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소황구 (강연부터 최십가장 집까지) 각 가장 앞 : 小荒溝 (自江沿 至崔十家長家) 各家長 앞

너희 가장(家長)들은 내일 모레 이틀간에 옥수수, 콩, 팥등 계(計) 3석 5두(三石五斗)와 소금 10 (一○)근을 한 알도 덜하지 말고 완전 징수하여 소유천(小楡川)으로 송부하라. 이틀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징벌 당할 것이다.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第二軍 第一師 第一團 軍需處長)

최현(崔賢) (印)


보천보사건의 주역 김일성 (6사장)의 부대도 둘째가면 서러워할 정도로 수많은 양민에 대한 약탈 행위를 한 것이 당시 신문에 나와 있다.[22]

중공당(中共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부대(部隊)의 일원(一員)이었던 오늘의 북한(北韓) 김일성(金日成)에 대한 당시의 국내 신문 보도는 그를 이주동포(移住同胞)의 생명재산(生命財産)을 위협한 난폭한 약탈자로 한결같이 나타내고 있다. 두 세 가지 사건(事件)만 예증(例證)하면 다음과 같다.

『[함흥(咸興)] 28일 오전 한시경 함남대안(咸南對岸) 13도구 신창동 삼포리(13道溝 新昌洞 三浦里) 이주동포(移住同胞) 촌락(村落)에 공산군(共産軍) 김일성(金日成)의 일대(一隊), 제4연대장(第4聯隊長) 김주견(金周堅)의 일대(一隊) 50여명(50餘名)이 습래하여 동 촌락민(同 村落民) 전부를 한집에 감금하고서 대맥(大麥) 10石, 축동(畜豚) 등을 모조리 빼앗은 후 동리주민(洞里住民) 김영수(金永洙)와 8명을 납치하여 그들에게 운반시켜 가지고 두메로 돌아갔다... 공산군들은 추석(秋夕)과 닥쳐올 동절(冬節)의 준비로서 배전(倍前) 맹렬히 이주동포촌락(移住同胞村落)을 윤습(輪襲)하여 이주동포(移住同胞)들의 생명재산(生命財産)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한다.』[23]

『[함흥(咸興)].... 4일 오전 16도구 신창동 동포촌(16道溝 新昌洞 同胞村)에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김일성(金日成)의 일대(一隊) 40여명이 나타나서 동리(洞里) 박흥룡(朴興龍) 등 15호에서 축우(畜牛), 대맥(大麥) 등 있는 대로 모조리 빼앗아 갔다. 이렇게 장백현내(長白縣內) 이주동포촌락(移住同胞村落)은 한낮에도 몇번씩 공산군 사병(共産軍 士兵)들에게 습격을 받아 양식, 의류 전부를 빼앗겨 금후의 생도는 극히 막연한 상태에 있다.』[24]

『[신갈파(新乫坡)] 지난 8일에 공산군 김일성 일파(共産軍 金日成 一派)에게 습격 당하여 동포가옥(同胞家屋) 40여호가 소각되었다 함은 기보(旣報)한 바와 같거니와 집 잃고 먹을 것까지 잃은 2백여 동포(2百餘 同胞)는 노동일을 하려 하나 일할 곳이 없고 들어 앉었자니 앉을 집이 없을뿐 아니라 어린 것들이 밥달리는 소리는 부모(父母)로서 차마 듣고만 있을 수 없어 아이들을 업고 노부모(老父母)를 모시고 눈물을 머금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리라 하는 바 이때에 조선인(朝鮮人) 보호기관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의 구제책이 나서기를 일반은 주시하고 있다.』[25]

오늘의 북한 김일성(北韓 金日成)이 공산군(共産軍)으로써 하필하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만주(滿洲)로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간 이주동포(移住同胞)들을 납치(拉致) 방화(放火) 약탈(掠奪) 등으로 생명과 재산을 빼앗은 신문 보도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26]

김창순(金昌順)의 위 글에 나오는 김일성보천보 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으로 실제로는 1937년 7월 13일 전사한 것이 확실시되며, 북한 김일성은 그 후에 나타나 제1로군 제2방면군장을 맡았으나, 1939 ~ 1940년간에 신문에 보도된 그의 비적 행위도 6사장 김일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독립운동사의 과대망상증

잘 알려진 독립운동사의 주요 전투들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것이 대다수이다. 인물에 대한 평가도 이승만은 극도로 폄하되고, 김구김일성, 김원봉 등은 지고지선의 항일 영웅으로 날조되고 있다. 마치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를 되찾기라도 한 듯하다.

김학철의 봉오동 전투 회고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에요.”(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출신 ‘김학철 평전’ 중에서)

김학철의 봉오동 전투 관련 회고 부분이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과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때로는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신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과장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과거사를 미화시키는 작업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중략) 과장하는 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잖아요? 이제는 역사와 전설을 구분해도 좋을 만큼 이 사회가 성숙하지 않았습니까? 독립군의 대일 무장항쟁만 해도 그래요. 1998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어요.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명을 부상시켰으며, 같은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 1개 여단을 사살한 것으로 전하고 있어요.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에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정신의 투쟁이지, ‘대첩’이나 ‘혁혁한 전과’는 불가능한 전력이었어요. 일본군과 맞닥뜨렸을 때 열에 아홉 번은 졌어요. 어쩌다가 한 번 ‘이긴’ 경우도 일본군 서너 명 정도 사살하면 대전과로 여겼어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윶진 아비마냥 자꾸 지면서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입니다. 그 불굴의 정신만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7)
한국인들이 작성한 독립운동사 문헌에 봉오동 전투(鳳梧洞 戰鬪)의 전과를 터무니없이 부풀려 기록한 것을 후대의 역사책이 아무 검증없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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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逮捕(체포)된拳銃犯人(권총범인)은 國民府員(국민부원)으로判明(판명) 1930.09.05 동아일보 2면
  2. 최효일, 김형권, 박차석, 정계빈 등 판결문 1932/04/04 경성복심법원
  3. 光韓團員 檢擧의 件 : 密 第33號 其71/高警 4465號 - 1921년 02월 23일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4. 大韓獨立團幹部 및 同團 江西支團 檢擧 - 1921년 02월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5. 光韓團員 朴正鎬氏 出獄, 군자금모집하다검거 팔개년만에 동아일보 1926년 12월 07일 2면 1단
  6. 박정호간첩사건(朴正鎬間諜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7. 間諜 朴事件(간첩 박사건),政·經界(정·경계)에 飛火(비화) 張建相氏等 拘束(장건상씨등 구속) 1957.11.07 동아일보 3면 : 박정호가 광한단원이었다고 나옴.
  8. 間諜 朴正鎬(간첩 박정호)에 死刑確定(사형확정) 1958.12.17 동아일보 3면
  9. 역도산 사위 박명철, 북한 체육상서 물러나 조선일보 2012.10.17
  10. 김정은, '法'자도 모르는 역도산 사위를 최고재판소장에 임명 프리미엄조선 2014.10.20
  11. 해방절이 없는 북한 - 장진성∙탈북 작가 2013-08-20
  12. 12.0 12.1 [747]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February 7, 1942
  13. [746]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January 3, 1942
  14. [750]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March 20, 1942
  15.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년 06월 21일) p.61 /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 현실 28』 (한국역사연구회, 1998.06) p.282
  16.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17.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p.176"
  1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bh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19.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의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215
  20. 서대숙(徐大肅) 지음; 현대사연구회 옮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대구: 화다출판사, 1985) p.255 : Dae-Sook Suh,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의 번역.
  21. 『만주 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滿洲國軍事顧問部 編, 1937) p.213
  22. 김창순(金昌順),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만주(滿洲) 게릴라 조직(組織)과 한인대원(韓人隊員)에 관(關)한 연구(硏究)』 北韓學報 第1輯 (북한연구소, 1977년) p.79
  23. 《조선일보》, 1936年 10月 1日.
  24. 《조선일보》, 1936年 10月 7日.
  25. 《조선일보》, 1936年 12月 22日.
  26. 《조선일보》, 1936年 10月 7日, 29日, 11月 22日, 12月 5日, 15日, 22日, 1937年 2月 7日; 《동아일보》 1937年 7月 11日, 7月 16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