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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일리노이주 북부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1932년에 유레카대학교(Eureke College)를 졸업한 후,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에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한 뒤에는, 배우가 되어 몇 개의 대작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는 영화배우 노동조합(Screen Actors Guild) 위원장으로 두 번 선출되었는데,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뿌리뽑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에는 TV로 무대를 옮겼으며, GE(General Electric) 공장에서 '동기 부여를 위한 강사'(motivational speaker)로 활동했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북부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1932년에 유레카대학교(Eureke College)를 졸업한 후,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에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한 뒤에는, 배우가 되어 몇 개의 대작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는 영화배우 노동조합(Screen Actors Guild) 위원장으로 두 번 선출되었는데,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뿌리뽑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에는 TV로 무대를 옮겼으며, GE(General Electric) 공장에서 '동기 부여를 위한 강사'(motivational speaker)로 활동했다.


그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서 공화당으로 이적한 1962년까지는 민주당원이었다. 1964년 대선에서는 그가 지지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가 민주당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이때부터 새로운 보수의 대변자로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지지 세력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여, 1966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주지사로서 적자 재정을 흑자로 전환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1969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시위대에 대항하여 군을 투입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재선에 성공한다. 1968년과 1976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1980년의 세 번째 도전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어,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니 카터(Jimmy Carter)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서 공화당으로 이적한 1962년까지는 민주당원이었다. 1964년 대선에서는 그가 지지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가 민주당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이때부터 새로운 보수의 대변자로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지지 세력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여, 1966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주지사로서 적자 재정을 흑자로 전환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1969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시위대에 대항하여 군을 투입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재선에 성공한다. 1968년과 1976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1980년의 세 번째 도전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어,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니 카터(Jimmy Carter)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취임 시의 나이가 69세로서 당시로서는 역사 상 최고령의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다; 이 기록은 2017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깨졌다. 1984년에는, 재선을 위한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과의 대결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차이로 승리하였다.
 
취임하자 마자, 레이건은 완전히 새로운 정치 경제적인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공급 부분에 방점을 둔 그의 경제 정책,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세율을 인하하였고, 규제를 완화하였으며, 정부 지출을 줄였다.
 
첫 번째 재임 기간 중 암살범의 총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만, 긴급 수술을 통해 구사일생을 회복한다. 또, 마약과의 전쟁을 벌였으며, 공공 부문 노동자들과도 싸운다. 두 번째 재임 기간 중에는 인플레이션이 12.5%에서 4.4%로 낮아졌으며, 평균 실질 GDP 성장률이 3.4%에 이른다. 또, 국내 재량 지출을 삭감하고, 감세를 실천했으며, 군사비를 증가시켰다(이 때문에 전반적인 정부 지출은 증가함). 이 기간 중에는 중대한 외교 문제가 많았는데, 냉전 종식, 리비아 폭격,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콘트라 문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지 4년 뒤인 1987년에는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한 연설에서 소련 총비서인 마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를 향해 "이 벽을 허물라!"고 요구했다. 고르바초프와 대화를 지속하는 가운데 소련과의 무기 경쟁의 강도를 높여감으로써 '데탕트'(détente; 관계 개선)에서 '롤백'(rollback)으로 냉전 정책을 전환하였다. 코르바초프와의 대화를 통해 결국 중거리핵전력조약(INF Teaty)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은 양국 핵무기의 감축에 관한 조약이었다. 그의 임기가 끝난지 불과 10개월 뒤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그 다음 해에 독일이 통일되었으며, 1991년 12월 26일에는 소련이 붕괴하였다.
 
1989년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 그의 지지율은 68%였는데, 이것은 현대 미국 대통령의 퇴임시 지지율로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와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지지율과 함께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 이후 최초의 연임 대통령이었다. 퇴임 후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할 계획이었으나, 1994년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으로 진단되면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2004년 6월 5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2019년 2월 9일 (토) 01:52 판

작성 중

로널드 윌슨 레이건(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 40대, 41대 대통령으로서 1981~1989년에 재임하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헐리우드 배우, 노조위원장, 캘리포니아 주지사(1967~1975년)를 지냈다.

레이건은 일리노이주 북부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1932년에 유레카대학교(Eureke College)를 졸업한 후,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일했다. 1937년에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한 뒤에는, 배우가 되어 몇 개의 대작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는 영화배우 노동조합(Screen Actors Guild) 위원장으로 두 번 선출되었는데,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뿌리뽑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에는 TV로 무대를 옮겼으며, GE(General Electric) 공장에서 '동기 부여를 위한 강사'(motivational speaker)로 활동했다.

그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서 공화당으로 이적한 1962년까지는 민주당원이었다. 1964년 대선에서는 그가 지지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가 민주당의 린든 B. 존슨(Lyndon B. Johnson)에게 크게 패배했지만, 이때부터 새로운 보수의 대변자로 전국적으로 주목받았다.지지 세력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여, 1966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주지사로서 적자 재정을 흑자로 전환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1969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시위대에 대항하여 군을 투입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재선에 성공한다. 1968년과 1976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1980년의 세 번째 도전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어,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니 카터(Jimmy Carter)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취임 시의 나이가 69세로서 당시로서는 역사 상 최고령의 대통령 당선인이 되었다; 이 기록은 2017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깨졌다. 1984년에는, 재선을 위한 월터 먼데일 전 부통령과의 대결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차이로 승리하였다.

취임하자 마자, 레이건은 완전히 새로운 정치 경제적인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공급 부분에 방점을 둔 그의 경제 정책,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세율을 인하하였고, 규제를 완화하였으며, 정부 지출을 줄였다.

첫 번째 재임 기간 중 암살범의 총탄에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만, 긴급 수술을 통해 구사일생을 회복한다. 또, 마약과의 전쟁을 벌였으며, 공공 부문 노동자들과도 싸운다. 두 번째 재임 기간 중에는 인플레이션이 12.5%에서 4.4%로 낮아졌으며, 평균 실질 GDP 성장률이 3.4%에 이른다. 또, 국내 재량 지출을 삭감하고, 감세를 실천했으며, 군사비를 증가시켰다(이 때문에 전반적인 정부 지출은 증가함). 이 기간 중에는 중대한 외교 문제가 많았는데, 냉전 종식, 리비아 폭격,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콘트라 문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한지 4년 뒤인 1987년에는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한 연설에서 소련 총비서인 마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를 향해 "이 벽을 허물라!"고 요구했다. 고르바초프와 대화를 지속하는 가운데 소련과의 무기 경쟁의 강도를 높여감으로써 '데탕트'(détente; 관계 개선)에서 '롤백'(rollback)으로 냉전 정책을 전환하였다. 코르바초프와의 대화를 통해 결국 중거리핵전력조약(INF Teaty)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은 양국 핵무기의 감축에 관한 조약이었다. 그의 임기가 끝난지 불과 10개월 뒤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고, 그 다음 해에 독일이 통일되었으며, 1991년 12월 26일에는 소련이 붕괴하였다.

1989년 그가 백악관을 떠날 때, 그의 지지율은 68%였는데, 이것은 현대 미국 대통령의 퇴임시 지지율로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와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지지율과 함께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 이후 최초의 연임 대통령이었다. 퇴임 후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할 계획이었으나, 1994년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으로 진단되면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2004년 6월 5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