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스피에르.jpg


Maximilien de Robespierre
1758년 5월 6일 ~ 1794년 7월 28일

개요

프랑스 혁명 시기의 정치인이다.

생애

혁명 이전

프랑스의 작은 도시인 아라스에서 법조계에 종사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부모가 일찍 사망하여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 11세에 콜레주 루이르그랑(Collège[1] Louis-le-Grand)이라는 이름의 학교에 진하여 라틴어, 철학, 법학, 역사 등을 공부했으며, 이 시기에 루소 등의 저작을 접하며 공화주의적인 자신의 사상체계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학교에 진학할 정도면 완전한 극빈층은 절대 아니었으나, 학교 학생들 중에 비교적 가난한 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일화로는 루이 16세가 학교를 방문한 때에 로베스피에르기 학생대표로 환영사를 읽은 것을 꼽을 수 있다.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로베스피에를 비롯한 학생들은 빗속에서 루이 16세를 몇 시간이나 기다렸고 학생 대표인 로베스피에르는 진흙탕에 무릎을 꿇고 환영사를 했으나, 그 후 루이 16세는 답례도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2] 이 일이 로베스피에르의 당시 사회와 왕정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으리라 예상되는 대목이다.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고향에서 별 볼일 없는 변호사로 지내던 도중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하는데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혁명 초기

1789년 5월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6세는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모든 신분의 의견을 듣고 합의하는 기구인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 로베스피에르는 제3신분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 제3신분의 대표들이 테니스 코트에 모여 국민의회를 구성할 때, 또한 로베스피에르도 참여하였다. 국민의회에서 시작된 헌법제정의회가 해산하고, 1792년 9월 20일 '국민공회'라는 명칭의 새로운 의회를 선출될때도 로베스피에르는 이곳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루이 16세 처형

로베스피에르가 국민공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에 로베스피에르가 한 일 중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루이 16세의 처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우선 바렌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기존 왕정 체제에서의 권한과 지위를 잃어버린 루이 16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여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791년 6월 21일 왕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와 자신의 아들 루이 샤를 등 가족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파리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 도달하기 전에 프랑스의 국경지방인 바렌에서 시민군에 발각되어 파리로 압송되었다. 이를 바렌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 직후 당시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이 루이 16세내외의 국외 탈출 미수사건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국민공회 의원의 대다수는 그래도 지금까지 모시던 왕인데다 루이 16세는 특별한 이적행위를 하거나 폭정을 휘두르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형으로 처리할 만한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때 로베스피에르가 국민공회 의사당에 나타나 루이 16세를 사형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만약 루이 16세가 용서되거나, 만약 무죄라면 혁명은 어찌 되는 겁니까?

만약 루이 16세가 무죄라면 모든 자유의 수호자들은 중상모략꾼들이 되고 맙니다.

국가가 살기 위해선 왕(루이 16세)이 죽어야 합니다.

요약하면 루이 16세가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가 되기에 무조건 사형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로베스피에르의 왕정 자체에 대한 거부감 이외에도 학교 재학 중 겪었던 수모 등과 같은 개인적 원한 또한 작용했을 것이라 보인다. 어쨌든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로 분위기가 반전되었으나, 그럼에도 사형반대표와 사형찬성표가 엇비슷한 가운데, 결국 사형찬성표가 근소하게 많게 나와 루이 16세의 사형이 가결되었다.

루이16세의 처형, 1794년 작

이리하여 루이 16세는 추운 겨울 파리 한복판의 콩도르셰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1793년 1월 21일의 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6일에는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고,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샤를은 평민 가정에 강제 입양되었다가 각종 학대를 받아 사망했다.

경제정책

로베스피에르가 속한 당은 자코뱅당이었다. 이 자코뱅당과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각종 정책을 시행했는데,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이 많았다. 특히 경제정책면에서 아주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우유가격제한정책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일반 국민이 우유를 싸게 먹게 해주겠다는 명목 아래 우유 가격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지정한 우유 가격으로는 사료 값도 건질 수 없게 되자, 낙농업자들이 젖소 사육을 포기하고 젖소를 도축하여 고기로 내다팔았고, 그에 따라 우유 생산량이 감소하며 우유 가격이 더 높아져 버렸다. [3] 자신이 의도했던대로 우유 가격이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올라버리자 로베스피에르는 낙농업자들을 불러 사태의 이유를 물었고, 낙농업자들은 사료 값 너무 비싸기에 우유 생산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답했다. 이야기를 들은 로베스피에르는 당시 젖소 사료로 쓰이던 건초 가격 또한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건초를 생산하던 사람들 역시 이윤이 남지 않는 건초생산을 포기하고 건초를 불태웠다. [4] 그러자 건초 값 또한 로베스피에르의 의도와는 달리 폭등하였으며, 결국에 우유 가격은 처음보다 10배 비싸졌으며[5], 서민들이 우유를 마시기 힘들어졌다. 아이들 먹일 우유마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식의 경제정책이 계속되어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에 대한 지지는 계속해서 하락하였다.

공포정치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반대파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하고 '공안위원회'를 조직하여 시민들을 억압했다. 억압으로부터 국민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혁명의 결과로 생긴 정부가 이전보다 더 국민을 억압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포 정치에도 민심 이반을 막을 수는 없었고, 이런 추세가 지속되며 로베스피에르 정권의 핵심 인물중의 하나인 마라가 암살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단두대로 흥하고 단두대로 망하다

로베스피에르 정권의 실정으로 인해 점차 악화되는 여론을 지켜볼 수 없었던 국민공회 의원들은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여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로베스피에르 정권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여러 인사들도 함께 처형하였다. 이를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한다.

이 테르미도르 반동의 결과 5명의 총재가 국가를 운영하는 총재정부가 구성되었다. 나폴레옹, 시에예스 등등의 명망있는 사람들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평가

로베스피에르는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져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학살자이다. 기존 체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이성만으로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고자했던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다. 어떻게 숭고한 이상주의자가 학살자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적절한 대답은 바로 관용의 정신이 부족했기에 이 사람이 역사에 학살자로 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상이 다를 수 있음을, 자신만의 사상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님을, 사상이 다르다고 하여 반동으로 몰아 죽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로베스피에르가 알았더라면 프랑스의 역사는 수많은 희생과 좌절을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로 이러한 관용정신이야말로 대한민국북한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헌법재판소통합진보당의 해산 심판에서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민주적 기본질서'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민주적 기본질서란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모든 폭력적․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과 자유․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정치적 질서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국민주권의 원리,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제도, 복수정당제도 등이 현행 헌법상 주요한 요소이다.

이것은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독재체제의 차이는 바로 남과 다름을 인정하고 사상적 차이를 존중하는 다원적 세계관 달리 말하면 관용정신이라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관용 정신이 없었다. 혁명 때는 자유를 부르짖었으나 그가 집권하는 동안 프랑스에 자유라고는 없었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사람들만이 가득했다. 세계사에서 자신의 사상만이 숭고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남들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훗날의 아돌프 히틀러다. 로베스피에르의 개인적인 면모에는 훌륭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도 검소함 등의 훌륭한점이 있었다. 따라서 개인적인 면모의 훌륭함은 그가 벌인 학살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최초의 전체주의자다.

각주

  1. 영어로는 college가 대학이라는 뜻이나 프랑스어로는 중학교를 뜻한다.
  2. 미디어펜, 2016년 12월 15일, http://www.mediapen.com/news/view/215256
  3. 정성우, 로베스피에르의 우유 가격 통제가 불러온 비극, 자유기업원, 2020년 4월 10일 https://www.cfe.org/20200410_22548
  4. 정성우, 로베스피에르의 우유 가격 통제가 불러온 비극, 자유기업원, 2020년 4월 10일 https://www.cfe.org/20200410_22548
  5. 정성우, 로베스피에르의 우유 가격 통제가 불러온 비극, 자유기업원, 2020년 4월 10일 https://www.cfe.org/20200410_22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