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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동화'''(1901~1980년 2월 16일<ref name="lee">[https://www.loc.gov/rr/asian/SovietKorean/75.pdf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 미 의회도서관 [https://www.loc.gov/rr/asian/SovietKorean.html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고려인 81명 手記]</ref>)는 소련의 고려인으로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소련군 [[88여단]]의 군의관이었다. 당시 계급은 소좌로 대위였던 1대대 대대장 [[김일성]]보다 높았다. 해방 후 김일성과 같이 평양에 와서 김일성 주치의, 군의 총국장 등을 지내다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 때 숙청 당해 1960년 10월 소련으로 돌아갔다.<ref name="lee"/>
'''리동화'''(李東華, 1901년 12월 25일<ref>[https://ru.wikipedia.org/wiki/%D0%9B%D0%B8,_%D0%92%D0%B0%D1%81%D0%B8%D0%BB%D0%B8%D0%B9_%D0%A4%D1%91%D0%B4%D0%BE%D1%80%D0%BE%D0%B2%D0%B8%D1%87 Ли,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ru.wikipedia</ref>~1980년 2월 16일<ref name="lee">[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75/2005551562v75.pdf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 미 의회도서관 / [https://www.loc.gov/item/2005551562/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nowiki>[i.e. 쓰여진]</nowiki>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 의회도서관</ref>, 본명 Ли,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Lee, Vasily Fyodorovich)는 소련의 고려인으로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소련군 [[88여단]]의 군의관이었다. 당시 계급은 소좌로 대위였던 1대대 대대장 [[김일성]]보다 높았다. 해방 후 김일성과 같이 평양에 와서 김일성 주치의, 군의 총국장 등을 지내다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 때 숙청 당해 1960년 10월 소련으로 돌아갔다.<ref name="lee"/>


==생애==
==생애==
그의 본명은 "리 와실리 페도로위치(Ли Васили Федорвич, Lee Vasili Fedorvich)"이다. [[88여단]] 출신자들 중 만주 빨치산 경력자들과 달리 리동화 등 소련의 고려인 출신들은 소련파로 분류된다. 이들은 해방 후 초기에는 상당한 대접을 받다가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공고해지면서 숙청대상이 된다. 이동화도 북한에 온 지 10여년이 되어도 조선말이 늘지 않고, 문서도 잘 작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1960년 10월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의 본명은 "리 와실리 페도로위치(Ли,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Lee, Vasily Fyodorovich)"이다. 그는 김일성 등 다른 88여단 대원들과 같이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로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하였다.<ref name="lee"/><ref>[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78/2005551562v78.pdf 유성철(兪成哲, 1917-1995) 전 조선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겸 부참모장] pp.18~19 / [https://www.loc.gov/item/2005551562/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nowiki>[i.e. 쓰여진]</nowiki>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 의회도서관</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8300020920400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08-30&officeId=00020&pageNo=4&printNo=21928&publishType=00020 "「蘇軍(소군)대위 金日成(김일성)」元山(원산)까지 수송" 45년 당시 蘇(소)해군중위 니주니코프 證言(증언)] 1992.08.30 동아일보 4면 : 기사에 나오는 일행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소령이 바로 리동화이다.</ref>


* [https://www.loc.gov/rr/asian/SovietKorean/75.pdf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 미 의회도서관 [https://www.loc.gov/rr/asian/SovietKorean.html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고려인 81명 手記]
북한으로 온 [[88여단]] 출신자들 중 만주 빨치산 경력자들과 달리 리동화, [[유성철]] 등 소련의 고려인 출신들은 소련파로 분류된다. 이들은 해방 후 초기에는 상당한 대접을 받다가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공고해지면서 숙청대상이 된다. 리동화도 북한에 온 지 10여년이 되어도 조선말이 늘지 않고, 문서도 잘 작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1960년 10월 소련으로 돌아갔다.
 
* [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75/2005551562v75.pdf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 미 의회도서관 / [https://www.loc.gov/item/2005551562/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nowiki>[i.e. 쓰여진]</nowiki>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 의회도서관


*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 [https://ru.wikipedia.org/wiki/%D0%9B%D0%B8,_%D0%92%D0%B0%D1%81%D0%B8%D0%BB%D0%B8%D0%B9_%D0%A4%D1%91%D0%B4%D0%BE%D1%80%D0%BE%D0%B2%D0%B8%D1%87 Ли,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ru.wikipedia (Lee, Vasily Fyodorovich)
* [http://podvignaroda.ru/?#id=46172058&tab=navDetailManAward Ли Василий Федорович 1901г.р.(Lee Vasily Fedorovich born in 1901)] 적성훈장(Орден Красной Звезды, Order of the Red Star)<ref>[https://ko.wikipedia.org/wiki/%EC%A0%81%EC%84%B1%ED%9B%88%EC%9E%A5 적성훈장] - 위키백과</ref> 수여 기록
==[[김일성]]의 채홍사(採紅使)==
[[유성철]]에 의하면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소련군 덕에 최고 권력자가 된 김일성은 난잡한 여성편력에 탐닉하는데, 채홍사(採紅使)격의 여자 조달책은 [[88여단]]에서 김일성보다 높은 소좌 계급의 군의관으로 있었던 [[이동화]]가 맡았다고 한다.
*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2~63, pp.67~70
: [https://hankookilbo.com/News/Read/199011070056900672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6] (연세대 최평길 교수와 공동집필) 한국일보 1990.11.07
: [https://hankookilbo.com/News/Read/199011080057393135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


==아들 세르게이 리==
==아들 세르게이 리==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는 [[88여단]]이 있었던 뱌츠코예 마을과 평양에서 [[김정일]], [[김슈라]], [[김경희]] 등 [[김일성]]의 자녀들과 어울리며 같이 자랐다. 카자흐스탄 철도대학(교통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96년과 2012년 두 차례 방한하여 김일성의 자녀들에 대해 증언하였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5398_19466.html 이세르게이 교수, "김정일 출생지 소련 극동군 정보 부대안"] MBC : 앵커 엄기영, 1996-07-25</ref><ref name="sergey"/>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Ли, Sergey Vasilievich Lee)는 [[88여단]]이 있었던 뱌츠코예 마을과 평양에서 [[김정일]], [[김슈라]], [[김경희]] 등 [[김일성]]의 자녀들과 어울리며 같이 자랐다. 카자흐스탄 철도대학(교통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96년과 2012년 두 차례 방한하여 김일성의 자녀들에 대해 증언하였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5398_19466.html 이세르게이 교수, "김정일 출생지 소련 극동군 정보 부대안"] MBC : 앵커 엄기영, 1996-07-25</ref><ref name="sergey"/>


김일성 - 김정숙 부부와 자녀 3남매 모두가 나오는 유일한 가족 사진은 그가 1996년 방한 때 제공한 것이다.<ref>[[:파일:Kim-children.jpg|김일성 - 김정숙 부부와 자녀 3남매 모두가 나오는 유일한 가족 사진]]</ref>
김일성 - 김정숙 부부와 자녀 3남매 모두가 나오는 유일한 가족 사진은 그가 1996년 방한 때 제공한 것이다.<ref>[[:파일:Kim-children.jpg|김일성 - 김정숙 부부와 자녀 3남매 모두가 나오는 유일한 가족 사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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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참고 자료==
* [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service/asian/asianscd/2005551562v75/2005551562v75.pdf 리동화(Yi, Tong-hwa) 전 군의 총국장] : 미 의회도서관
: [https://www.loc.gov/item/2005551562/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nowiki>[i.e. 쓰여진]</nowiki>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 의회도서관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5398_19466.html 이세르게이 교수, "김정일 출생지 소련 극동군 정보 부대안"] MBC 뉴스데스크 : 앵커 엄기영, 1996-07-25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5398_19466.html 이세르게이 교수, "김정일 출생지 소련 극동군 정보 부대안"] MBC 뉴스데스크 : 앵커 엄기영, 199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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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철]]
* [[유성철]]
* [[박성훈]]
* [[박성훈]]
 
* [[최원]]


==각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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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일성]]
[[분류:김일성]]
[[분류:김정일]]
[[분류:김정일]]
[[분류:소련파]]
[[분류:소련 고려인]]
[[분류:망명 북한관료]]
[[분류:숙청]]

2023년 5월 15일 (월) 19:50 기준 최신판

리동화(李東華, 1901년 12월 25일[1]~1980년 2월 16일[2], 본명 Ли,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Lee, Vasily Fyodorovich)는 소련의 고려인으로 만주 빨치산들을 수용한 소련군 88여단의 군의관이었다. 당시 계급은 소좌로 대위였던 1대대 대대장 김일성보다 높았다. 해방 후 김일성과 같이 평양에 와서 김일성 주치의, 군의 총국장 등을 지내다 김일성의 소련파 숙청 때 숙청 당해 1960년 10월 소련으로 돌아갔다.[2]

생애

그의 본명은 "리 와실리 페도로위치(Ли, Василий Фёдорович, Lee, Vasily Fyodorovich)"이다. 그는 김일성 등 다른 88여단 대원들과 같이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로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하였다.[2][3][4]

북한으로 온 88여단 출신자들 중 만주 빨치산 경력자들과 달리 리동화, 유성철 등 소련의 고려인 출신들은 소련파로 분류된다. 이들은 해방 후 초기에는 상당한 대접을 받다가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공고해지면서 숙청대상이 된다. 리동화도 북한에 온 지 10여년이 되어도 조선말이 늘지 않고, 문서도 잘 작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1960년 10월 소련으로 돌아갔다.

  •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서울: 경인문화사, 2006.

김일성의 채홍사(採紅使)

유성철에 의하면 해방 후 평양에 와서 소련군 덕에 최고 권력자가 된 김일성은 난잡한 여성편력에 탐닉하는데, 채홍사(採紅使)격의 여자 조달책은 88여단에서 김일성보다 높은 소좌 계급의 군의관으로 있었던 이동화가 맡았다고 한다.

  •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俞成哲)·이상조(李相朝)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한국일보 편, 한국일보사, 1991) pp.62~63, pp.67~70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6 (연세대 최평길 교수와 공동집필) 한국일보 1990.11.07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7 한국일보 1990.11.08

아들 세르게이 리

리동화의 아들 세르게이 리(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Ли, Sergey Vasilievich Lee)는 88여단이 있었던 뱌츠코예 마을과 평양에서 김정일, 김슈라, 김경희김일성의 자녀들과 어울리며 같이 자랐다. 카자흐스탄 철도대학(교통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96년과 2012년 두 차례 방한하여 김일성의 자녀들에 대해 증언하였다.[6][7]

김일성 - 김정숙 부부와 자녀 3남매 모두가 나오는 유일한 가족 사진은 그가 1996년 방한 때 제공한 것이다.[8]

김정일 단짝친구 "김정일은 과묵, 남동생은 똑똑했다" TV조선 2012.07.09
[녹취] 세르게이 리 /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내가 (김)정일보단 좀 크고 좀 힘도 세고, 싸움할 땐 나한테 맞았죠. (그러면 김정숙이 우리 어머니에) 내 아들 네 아들과 싸움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김정일은 소련(바스코예)에서 태어났어요. 조선말도 모르고 소련말만 했어요."

김일성의 주치의였던 리 교수 아버지는 1945년 북한에 들어가 보건성 부상까지 지냈고, 두 집안은 휴가를 같이 갈 정도였습니다.

리 교수는 김정일은 말수가 적었고, 김정일의 남동생은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다섯살 무렵, 집안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녹취] 세르게이 리/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슈라(김정일 남동생)가 (연못에) 빠진뒤 (김)정일이가 무서워서 다른데 나갔어요. 말도 안 하고. (경비가) 보니까 꺼냈죠. 1시간 뒤에. (슈라는) 우리 노는 데 따라다녔어요. 누나(김경희) 닮았어요."

1949년 어머니 김정숙이 죽자, 김정일은 여동생 김경희에 애착을 갖고 이후 이복동생 김평일을 배척했습니다.

[녹취] 세르게이 리/ 카자흐스탄교통대학 석좌교수

"둘째부인 아이(김평일)는 정일이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다찌아나(김경희) 일할 때 자꾸만 돌봐 줬어요. (김경희는) 노동당 둘째사람(넘버2)이 됐어요. 똑똑해요."
세르게이 리는 채널A 인터뷰에서는 슈라가 평양 아닌 뱌츠코예에서 익사한 것처럼 말했다.[7] 김경희가 슈라의 누나라는 그의 말은 착오이다.

참고 자료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i.e. 쓰여진] 우리들의 력사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미 의회도서관
김정일 단짝친구 "김정일은 과묵, 남동생은 똑똑했다" TV조선 2012.07.09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