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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search-results/1/%7B%22coverage%22%3A%22130%22%7D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International History Declassified : Soviet Union]
*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search-results/1/%7B%22coverage%22%3A%22147%22%7D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International History Declassified : United States]
* [https://digitalarchive.wilsoncenter.org/search-results/1/%7B%22coverage%22%3A%22147%22%7D 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International History Declassified : United States]
* [https://shindonga.donga.com/3/home/13/2265440/1 <nowiki>[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⑤]</nowiki> ‘권력중앙’ 먼저 형성한 김일성 vs 美견제로 뒤늦게 귀국한 이승만] 2020-12-13 신동아 202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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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4일 (월) 10:02 판


개요

1945년 8월 15일 독립 이후 38도선 이남 지역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미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 군정이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공산주의 세력만을 인정하고 기타 민족주의 세력 등은 철저히 탄압하고 뿌리를 뽑은 것과 달리, 미군정은 한국에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목적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초반부에는 박헌영이 이끄는 극좌파 공산주의자들이 온갖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고, 좌파 지도자 여운형, 중도 우파라 주장하는 안재홍, 우파계열의 이승만, 김구 등의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전개

미군정청은 정부를 자칭하는 단체인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공화국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지는 않고 정당 형태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45년 후반 미국 정부에서 작고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안인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안이 거론되자 미군정청은 한국내의 분위기를 들어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보낸다. 그러나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을 결의하자 국내에서는 좌우파 모두 격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1946년 1월 3일부터 좌파들은 태도를 표변하여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서는데, 배후에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은 북한지역에서 일체의 반탁운동을 금하고 관제 찬탁 데모만 허용하였다. 1946년 1월 5일에 반탁을 고집하며 소련에 협조를 거부하던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실제로는 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4개국 신탁통치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으면서 이를 남한 정국에 갈등과 혼란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활용하였다.

이후 반탁과 찬탁을 두고 좌우 대립이 극심하게 일어난다.

존속기간 : 1946년 2월 14일 ~ 1948년 5월 29일
조선인으로 구성된 미군정 자문기구
1946년 2월 1일과 2일 임시정부측 주최로 과도정부수립을 목적으로 소집된 비상국민회의가 그 의결로써 28명의 최고정무위원을 선출하였던바, 미군정의 종용을 받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Hodge,J.R.)의 자문기관으로서 과도정부수립을 촉진시키는 사명을 띠고 2월 14일 설치되었다.그 구성은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하여 남한 각 정당지도자 중 28명으로 구성하여, 과도정부수립을 촉진시키는 사명을 띠고 군정청에서 창설되었으나, 창설의 목적과는 달리 결의기관이 아닌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에 그침으로써 그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존속 기간 : 1946년 12월 12일 ~ 1948년 5월
1946년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미군정 당국은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 온건한 좌우파의 지도자들에게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알선하는 한편, 이들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고집하였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여 하지 사령관과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47년 7월 3일 하지 중장과의 협조포기를 선언하였고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1]

이승만은 9월 16일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남한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좌우합작의 한 축인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 당하고, 미소공동위원회마저 최종 결렬되자 소련의 진의를 파악하게 된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 동조하기 시작한다.[1]

이에따라 미소공동위원회는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며,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하게 된다. 소련과 북한이 유엔 결의안의 수용을 거부하여 총선거는 38도선 이북 지역을 제외한 남쪽에서만 실시된다.

주요 사건

사건 이후 조선공산당이 사실상 불법화되고, 9월에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그는 잠적했다가 10월에 월북함.

업적

자유시장경제체제 복원

중일전쟁 발발 이후부터 일본제국은 민간소비와 투자를 억제하고 대부분의 물자를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본토를 비롯하여 식민지인 한국, 대만 등지에서 통제경제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당시 독일, 이탈리아 등의 모든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현상이었으나, 일본은 서구 열강에 비해서 경제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상태로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잇따라 수행하다보니 경제체제를 더욱 억압적으로 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미군정이 들어서며 이러한 비정상적인 경제체제를 그나마 시장경제체제로 일부 되돌렸다. 그러나 한번도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이룩하고 운용해본 적이 없었던 한국인들이 미군정의 일시적인 조치만으로는 고도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건국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재의 시장경제 체제가 정착되었다.

미군정에 대한 근거없는 비판들

오늘날 좌파들은 소련 군정과 미군정을 비교하며 소련 군정에 비해 미군정이 훨씬 더 나쁘다고 근거없는 비판을 하는 일이 잦다.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미군정이라고 비판할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제대로된 근거는 제시하며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 후 실제로 남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은 전혀 보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문구만 그대로 믿은 유치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 소련 군정은 조선인을 표면에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지만 미군정은 직접통치를 했으므로 나쁘다고 한다.
소련 군정이 표면에 내세운 조선인들은 모두 소련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공산주의자들이며, 조만식 등 민족계열 또는 기독교 인사들의 정치활동은 철저히 탄압하여 아무 일도 못하게 막았다. 더구나 전면에 내세운 김일성은 소련군이 해방 전 5년간 88여단에서 훈련시켜 데려온 인물로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에 불과했다. 소련은 군정기간에 국내에 아무 기반이 없고 정치적 식견도 없는 자신들의 대리인 김일성을 내세워 지도자 훈련을 시키며 소련이 결정한 사항들을 그대로 실행하도록 하여 마치 조선인들이 통치하는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다. 소련군정 기간은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주민들은 이후 소련이 만들어놓은 지도자 김일성을 바꾸기는 불가능했고, 김일성 일족의 노예가 되어 있다.
반면에 미군정은 특정 조선인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우지 않았고, 미군정에 적대적이고 소련에 우호적인 좌파들의 정치활동도 허용했다.
소련군정은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공산주의 체제와 지도자 김일성을 강제적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미군정은 자유선거를 통해 구성한 국회가 신생 대한민국의 체체와 헌법, 지도자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남한만의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발언한 때는 2월 8일 북한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실상의 임시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진 한참 후이다.
북한 임시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분단의 단초가 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조선인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한 것이니 훌륭한 것이고, 그 후 이승만이 남한도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은 미군정이 반대하여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분단의 원인이 된 것인가?

참고 자료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