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

개요

최하영은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 당시 총독부는 건국준비위원회에 450만 달러 정도의 자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중 250만 달러만이 쓰이고 나머지 돈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당국이 그 내막을 조사하려 하자 박석윤이 월북(越北)해 버렸다는 설(說)이 있다”는 것이다.
 박석윤의 월북에 대한 최남선의 손자 최학주의 해석은 다르다. 박석윤이 1946년 3월 38선을 넘은 것은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서였으며 그동안 함께 활동한 여운형과 의논한 후 김일성을 만나러 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만일 그렇다면 총독부 정치자금 중 200만 달러는 북한에서의 정치공작을 위해서 박석윤이 챙겨둔 것일 수도 있다. 박석윤 임의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여운형의 동의 아래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박석윤을 체포해 1947년 재판에 회부했다. 그가 재판에 회부된 것은 ‘민생단(民生團) 사건’ 때문이었다. ‘민생단 사건’은 민생단이라는 친일단체가 심은 밀정들을 색출,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1932년 11월~1936년 2월 만주 지역 내 중국공산당 계열 유격대에서 벌어졌던 소동을 말한다. ‘역(逆)매카시즘’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인 셈이다.

 1983년 중국공산당 연변주위원회 조직부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모두 497명이 체포되어 367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됐다는 추정도 있다. 이 사건으로 만주의 공산주의운동도, 조선인 사회도 큰 타격을 입었다. 민생단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인이 대부분이었던 옌지·왕칭·훈춘 등 3개 현의 공산당원 숫자가 1299명에서 181명으로 86.1%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박석윤은 만주국 건국 후인 1931년 9월 민생단을 결성한 장본인이었다. 박석윤은 자신이 만든 민생단은 ‘40만명의 만주 거주 조선인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조직한 단체라고 주장했다. 박석윤은 민생단은 이듬해 7월 만주국과 조선총독부의 비협조로 해체되었고, 민생단 사건을 일으킨 친일단체 간도협조회(1934년 김동한이 설립)와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박석윤은 1948년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10월 19일 처형됐다. 이날은 국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

어쩌면 박석윤은 총독부의 정치자금 450만 달러 중 200만 달러를 김일성에게 전달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북한에 억류된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총독부의 공작이 아니었을까? 북한 당국이 민생단 사건으로 박석윤을 얽어 처형한 것은 총독부의 구린 돈이 ‘김일성 장군’에게 전달됐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