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 사건(民生團 事件)은 1930년대 초중반 만주의 간도 지역 중국공산당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조선인들을 친일단체 민생단(民生團)의 단원으로 몰아 수백명을 숙청 처형한 사건을 말한다. 처형 당한 조선인의 정확한 수는 알기 어려우나 수백명 이상 1,000여명까지 될 수도 있다.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중국인들이 조선인들로부터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벌인 일로, 북한은 김일성이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김일성도 당시 민생단으로 의심받고 있었는데, 중국인들에 협력했기 때문에 처형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개요

최하영(崔夏永·1908~1978)[1]은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 당시 총독부는 건국준비위원회에 450만 달러 정도의 자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중 250만 달러만이 쓰이고 나머지 돈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당국이 그 내막을 조사하려 하자 박석윤(朴錫胤·1899~1950)[2]이 월북(越北)해 버렸다는 설(說)이 있다”는 것이다.
 박석윤의 월북에 대한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손자 최학주의 해석은 다르다. 박석윤이 1946년 3월 38선을 넘은 것은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서였으며 그동안 함께 활동한 여운형과 의논한 후 김일성을 만나러 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만일 그렇다면 총독부 정치자금 중 200만 달러는 북한에서의 정치공작을 위해서 박석윤이 챙겨둔 것일 수도 있다. 박석윤 임의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여운형의 동의 아래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박석윤을 체포해 1947년 재판에 회부했다. 그가 재판에 회부된 것은 ‘민생단(民生團) 사건’ 때문이었다. ‘민생단 사건’은 민생단이라는 친일단체가 심은 밀정들을 색출,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1932년 11월~1936년 2월 만주 지역 내 중국공산당 계열 유격대에서 벌어졌던 소동을 말한다. ‘역(逆)매카시즘’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인 셈이다.

 1983년 중국공산당 연변주위원회 조직부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모두 497명이 체포되어 367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됐다는 추정도 있다. 이 사건으로 만주의 공산주의운동도, 조선인 사회도 큰 타격을 입었다. 민생단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인이 대부분이었던 옌지(延吉)·왕칭(汪淸)·훈춘(琿春) 등 3개 현의 공산당원 숫자가 1299명에서 181명으로 86.1%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박석윤은 만주국 건국 후인 1931년 9월 민생단을 결성한 장본인이었다. 박석윤은 자신이 만든 민생단은 ‘40만명의 만주 거주 조선인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조직한 단체라고 주장했다. 박석윤은 민생단은 이듬해 7월 만주국과 조선총독부의 비협조로 해체되었고, 민생단 사건을 일으킨 친일단체 간도협조회(1934년 김동한이 설립)와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박석윤은 1948년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10월 19일 처형됐다. 이날은 국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

어쩌면 박석윤은 총독부의 정치자금 450만 달러 중 200만 달러를 김일성에게 전달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북한에 억류된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총독부의 공작이 아니었을까? 북한 당국이 민생단 사건으로 박석윤을 얽어 처형한 것은 총독부의 구린 돈이 ‘김일성 장군’에게 전달됐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김일성과 민생단 사건

오른편은 중공당 동만특위(東滿特委) 서기 풍강(馮康)이 코민테른(국제당)에 올린 1935년 12월 20일자 보고서의 동북인민혁명군 간부 약력에 나오는 일부 조선인 간부의 약력이다.[3] 풍강(馮康)은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다른 이름이다.

1935년 12월 20일자 위증민 보고서의 동북인민혁명군 간부 약력에 나오는 일부 조선인 간부의 약력

조선인 4인 중 안봉학(安鳳學, 1909~1937)을 제외한 임수산(林水山), 유난환(柳蘭煥), 김일성(金日成)은 민생단 혐의를 받고 있다. 안봉학은 1936년 9월 30일 귀순하고, 임수산도 1940년 4월 귀순했다.

여기의 김일성은 23세라고 하여 북한 김일성과 나이가 일치하므로 그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고려인, 1932년 입당, 학생, 23세, 용감 적극, 중국어를 할 수 있음. 유격대원에서 승진한 사람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 가운데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대원 사이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구국군(救國軍) 사이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정치문제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金日成, 高麗人, 1932年入黨, 學生, 23歲, 勇敢 積極, 會說中國話, 游擊隊員提升的, 有民生團的口供很多次, 愛在隊員中說話, 在隊員中有信仰, 在救國軍中亦有信仰, 政治問題知道的不多。

提升 [ tíshēng ] [동사] 진급하다. 진급시키다. 발탁〔등용〕하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민생단 문제와 위증민의 이 기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4]

솔직히 말하여 1934년 겨울 위증민이 할빈시당 서기로 있으면서 성위 순시원으로 동만에 파견되여 왔던 초시기 《민생단》 문제와 같은 복잡한 사태에 그가 매우 당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해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 당시 그는 혁명조직과 유격대 안에 《민생단》이 많이 박혀있고 따라서 그것을 철저히 숙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기성의 사고방식에 적지 않게 매달려 있었다. 후에 말하기를 그는 처음에 대부분의 조선사람이 다 《민생단》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고 실토하였다.

위증민이 국제당에 가서 우리에 대하여 보고한 자료를 놓고 보아도 그의 말은 대체로 진실인 것같다.

《김일성, 조선인. 용감하고 적극적이다. 중국어를 잘한다. 빨찌산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과 함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대원들 속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구국군 속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어쨌든 위증민은 초기의 이러저러한 오유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까지 가서 《민생단》문제와 관련한 국제당의 결론을 받아가지고 왔으니 그가 숙반투쟁에서의 극좌적 오유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사실 그는 다홍왜 회의 때에도 《민생단》 문제와 관련한 나의 립장에 리해를 표시하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민생단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나 지어낸 말에 불과하며, 그가 민생단으로 몰렸다가 위기를 벗어난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1934년 10월에 있었던 김일성의 소위 1차 북만원정(北滿遠征)이라는 것이 민생단으로 지목되어 위기에 몰리자 보호를 요청하러 북만(北滿)의 주보중(周保中, 1902~1964)에게로 도망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5]

위증민의 위 보고서는 1935년 말에도 북한 김일성이 민생단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또한 4개월 뒤 1936년 4월 동북항일연군 2군 3사장(뒤에 6사장으로 개칭)이 된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생단 혐의를 받다 갑자기 사장(師長)으로 임명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조선인 피살자 명단 보고
p.88 : 1932년 1월 민생단 창립대회준비 - 경성 매일신보 부사장 박석윤(朴錫胤, 1898 ~ 1950)이 주창
p.161 : 박석윤 민생단

함께 보기

각주

  1. 최하영(崔夏永·1908~1978) 위키백과
  2. 박석윤(朴錫胤·1899~1950) 위키백과
  3. 『中共東滿特委書記馮康的報告(之一) -- 關于東滿特委書黨團幹部和人民革命軍幹部簡歷 (一九三五年 十二月二十日)』, 中共東滿特委成立 70周年 《東滿地區革命歷史文獻滙編 上冊》 (中共延邊州委黨史硏究室 編, 2000. 09) p.180
  4.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제11장 "3. 경박호 기슭에서"
  5. 김일성 1차 북만원정의 진실 RFA 2017-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