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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마지막으로, 연방준비위원회의 공식적인 대표로서 저의 지위에 약간 손상이 갈만한 말을 하면서 이 연설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밀턴과 안나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공황과 관련해서, 당신들이 옳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덕분에,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용문| 마지막으로, 연방준비위원회의 공식적인 대표로서 저의 지위에 약간 손상이 갈만한 말을 하면서 이 연설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밀턴과 안나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공황과 관련해서, 당신들이 옳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덕분에,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프리드먼은 정부의 환율 시장 개입의 중단을 주장하면서, 자유 변동 환율 제도를 지지하는 한편 이 주제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그와 가까웠던 조지 스티글러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계에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연구가 역시 시카고대학교에 근무하던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가 개발한 새로운 접근법인 '이성적 기대 이론'에 의해 다양한 라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에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 프리드먼과 루카스, 즉 신 고전주의 거시경제학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프리드먼의 필립스 곡선이 루카스에게 흥미로운 출발점이 되었지만, 그는 이 해결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루카스는 프리드먼의 적응적 기대(adaptive expectations) 대신에 이성적 기대(rational expectations)을 가정한 새로운 접근법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재설정 과정을 통해, 신 고전적 필립스 곡선 이론이 적용됨으로써 그 내용이 급격히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이 프리드먼의 접근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서, 프리드먼의 필립스 곡선 이론도 바뀌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더 나아가서, 1960~1963년에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신 고전파 닐 월리스(Neil Wallace)는 프리드먼의 이론적 과정을 무질서하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평가는 프리드만의 화폐주의와 신 고전 거시경제학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2019년 2월 6일 (수) 16:1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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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년 7월 31일 - 2006년 11월 16일)은 소비 분석, 화폐의 역사와 분석,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에 관한 연구 성과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경제학자이다.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 등과 함께 1940년대 이후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과, 법률 대학원, 경영 대학원에서 진행된 방법론 운동인 시카고 가격 이론의 2세대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프리드먼이 채용했거나 지도한 학생들과 젊은 교수들 중 대표적인 경제학자가 된 사람들로는 게리 베커(Gary Becker), 로버트 포겔(Robert Fogel), 토머스 소웰(Thomas Sowell), (로버트 루카스 주니어)Robert Lucas Jr 등이 있다.

"순진한 케인즈주의" 이론에 대한 프리드먼의 도전은 1950년대에 소비 기능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는, '케인즈주의적인 정부 정책에는 반대하는' '주요한 케인즈주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케인즈주의 언어와 도구를 이용하지만 그것의 최초의 결론은 거부한다"고 자신의 접근법을 설명했다. 그는 "자연적인" 실업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론화하였고, 실업률이 이 비율보다 낮은 경우에는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필립스 곡선'이 자연적인 비율에서는 결국 수직의 기울기가 된다고 주장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예측했다. 프리드먼은 "화폐주의(monetarism)"라는 대안적 거시경제 관점을 지지하면서, 화폐 공급의 지속적인 소규모 확대가 좋은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화폐 정책, 조세, 민영화, 규제 철폐에 관한 그의 사상은 특히 1980년대에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화폐 이론은 2007~2008년 세계적인 금융 위기에 대한 연방준비은행의 대응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리드만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 수상에게 자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최소화된 개입 환경 속에서의 자유시장 경제 제도의 장점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는 미국의 징병제를 폐지하는 데 역할을 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62년에 출판된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에서, 프리드먼은 지원병제, 변동환율제, 의료 면허증 폐지, 마이너스 소득세, 학교 바우처 등의 정책을 지지했다. 또, 학교 선택의 자유에 대한 지지는 '교육 선택을 위한 프리드먼 재단'(Friedman Foundation for Educational Choice; 나중에 EdChoice로 개명)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의 저작 및 활동에는 monograph(단행본 형태의 단일 주제의 논문), 책, scholarly articles(저널에 실리는 논문), papers(일반 논문), 잡지 칼럼, TV 프로그램, 강연 등이 포함되고, 그 주제도 경제적 주제와 공공 정책 이슈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그의 책과 논문은 이전의 공산주의 국가를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프리드먼은 두 번째로 인기있는 20세기 경제학자로 뽑혔으며 - 첫 번째는 케인즈이다 - The Economist 지는 그를 "20세기 후반... 어쩌면 20세기 전 기간 동안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경제학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초기

프리드먼은 1912년 7월 31일 뉴욕주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부모(Sára Ethel와 Jenő Saul Friedman)은 헝거리 왕국 Carpathian Ruthenia의 Beregszász(지금은 우크라이나의 Berehove)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였다. 그들은 둘 다 dry goods(섬유, 의류, 위생용품, 화장품 등) 상인이었다. 그가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뉴저지주의 Rahway로 이주했다. 10대 초반에는 윗 입술이 찢어지는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재능이 많았던 프리드먼은 1928년 16세가 되기 직전에 Rahway High School을 졸업하였다. 그는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에 상당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프리드먼은 1932년에 럿거스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그곳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처음에는 보험계리사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영향을 준 Arthur F. Burns 교수와 Homer Jones 교수는 경제학 연구를 통해 대공황 종식에 기여해보자고 설득하였다.

럿거스대학교를 졸업한 후, 프리드먼은 두 곳으로부터 장학금을 제안받는다 - 하나는 브라운대학교의 수학과였고, 다른 하나는 시카고대학교의 경제학과였다. 시카고대학교를 선택한 프리드먼은 1933년에 석사 학위를 획득한다. 시카고대학교에서는 제이콥 바이너(Jacob Viner),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 헨리 사이몬스(Henry Simons)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프리드먼이 그의 아내가 될 경제학자 로즈 디렉터(Rose Director)를 만난 곳도 바로 시카고대학교였다. 1933~1934년 한 학년 동안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저명한 통계학자이자 경제학자인 Harold Hotelling과 통계학을 연구했다. 1934~1935년 한 학년 동안은, 시카고대학교로 돌아와서 당시 '수요의 이론과 측정'(Theory and Measurement of Demand)을 집필하고 있던 헨리 슐츠(Henry Schultz)의 연구 조교 역할을 했다. 그 해에 평생 가까이 지내게 될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와 앨런 월리스(W. Allen Wallis)와의 관계도 시작된다.

공직

프리드먼은 처음에는 대학교에서 직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35년에 친구인 앨런 월리스를 따라 워싱턴 D.C.로 간다. 이곳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덕분에 많은 경제학자들이 생계비를 벌 수 있는 곳이었다. 이때 프리드먼은 그와 그의 아내가 WPA, CCC, PWA와 같은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을 이 위급한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판단했지만, "국가 회복청(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과 농업 조정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의 가격 동결 및 임금 동결 정책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격 통제가 자원이 적재적소에 이용될 수 있도록 해주는 근본적인 신호 메커니즘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앞으로 그가 갖게 될 사상을 암시했다. 실제로, 프리드먼은 나중에 화폐 공급이 축소되는 대신 확대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하며, 뉴딜 정책과 관련된 정부의 모든 간섭이 "잘못된 질병에 대한 잘못된 치료법"이었다고 결론맺었다. 나중에 프리드먼는 동료 학자인 안나 슈워츠(Anna Schwartz)와 함께 '미국의 화폐 역사, 1886~1960년'(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867–1960)를 집필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들은 대공황이 은행의 위기와 연방준비은행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심각한 화폐 축소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리드먼은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경제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지만, 경제학과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로 인해 다시 정부 공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941~1943년에는 미 재무부 고위 관료의 자문위원으로서 연방 정부의 전시 세금 정책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1942년에는 재무부 대변인으로서, 케인즈주의 조세 정책을 옹호했다. 당시 전쟁 수행을 위한 자금이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원천징수 제도를 만드는 것을 도왔다. 프리드먼은 나중에 이렇게 말하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필요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도 원천징수 제도를 폐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학교에서의 경력

초기

1940년, 프리드먼은 위스콘신-매디슨대학교의 자리를 받아들였지만, 2차 세계대전 참전에 대한 다른 교직원들과의 이견으로 그 대학을 떠났다. 프리드먼은 미국이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3년에는 앨런 월리스와 해럴드 호텔링이 이끌던 컬럼비아대학교 전쟁연구소에 합류하여,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수학 통계학자로서 무기 설계, 군사 전술, 금속 실험의 문제에 집중했다.

1945년에는 컬럼비아대학교에 박사 학위 논문으로 'Incomes from Independent Professional Practice'(쿠즈네츠(Kuznets)와 공저)를 제출하여 그 이듬해에 박사 학위를 받는다. 1945~1946년 한 학년 동안은 친구인 스티글러가 근무하던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시카고대학교

1946년, 프리드먼은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 이론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자리는 그를 가르쳤던 제이콥 바이너 교수가 프린스턴대학교로 떠나면서 생긴 자리였다. 프리드먼은 이후 30년 동안 시카고대학교에 머물었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지적 공동체인 시카고 경제 학파가 형성되는 데 기여하였다.

한편 국립 경제 연구소(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소장이었던 아서 F. 번스는 그에게 연구소에 재합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경기 변동에 있어서 화폐의 역할을 연구하는 책임을 맡는다. 이에 따라, 그는 "화폐와 은행에 관한 워크숍"("시카고 워크숍")을 시작하게 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연구소의 경제 역사학자인 안나 슈와츠와 협력하여, 1963년에 그녀와 함께 '미국의 화폐 역사, 1867~1960'을 발표했다.

1954~1955년 학년 동안은 방문 교수로 캠브리지의 곤빌 앤드 케이어스 칼리지(Gonville and Caius College)에 있었다. 당시 캠브리지대학교의 경제학과는 다수파인 케인즈주의자(조안 로빈슨(Joan Robinson), 리차드 칸(Richard Kahn)) 그룹과 소수파인 반케이즈주의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프리드먼은 양쪽 파벌 모두 자신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 캠브리지에 초대된 이유라고 생각했다. 1966~1984년에 뉴스위크지(Newsweek)에 실린 주간 칼럼이 널리 읽히면서 정치계와 경제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영향력이 커져갔다. 1968~1978년에는, 폴 사무엘슨(Paul Samuelson)과 함께 격주로 나오는 경제학 카세트 시리즈(Economics Cassette Series)의 제작에 참여했다. 이 시리즈물은 한 경제학자가 한번에 30분 동안 그때의 이슈에 대해 논의하는 형식이었다.

1964년에는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공화당 대선 후보의 경제 보좌관을 했다.

자본주의와 자유

'자본주의와 자유'는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학계 외부의 관심을 불어일으켰다. 이 책은 1962년에 시카고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되었으며, 공공 정책 문제를 비수학적인 경제 모델을 이용하여 탐구하는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판 후 18년 동안 40만 권이 넘게 판매되었고, 지금까지 총판매량은 50만 권이 넘는다. 이 책은 18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프리드먼은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로 이동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자유 시장이 궁극적으로 국가와 개인에게 도움이 되며,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과 기타 주요 국가들이 직면한 효율성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부의 역할과 화폐의 공급부터 사회 복지 프로그램까지 구체적인 이슈를 각각 별도의 장으로 분류하여 다루었고, 스페셜 챕터에서는 직업 면허 제도를 다루었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 더 정확하게는 libertarian) 입장을 밝히며 '자본주의와 자유'를 마무리한다: 정부는 정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고, 국민과 국가의 생존을 위핸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만 개입할 수 있다. 그는 최선의 국가 능력이 자유 시장으로부터 나오는 과정과, 실패가 정부의 개입으로부터 나오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사생활

은퇴

1977년 65세의 나이에, 프리드먼은 30년 동안 근무한 시카고대학에서 은퇴하였다. 프리드먼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의 방문 학자가 되었다. 1977년 이후에는 스탠포드대학교의 후버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었다. 같은 해에, Free To Choose Network(선택할 자유를 위한 네트워크)로부터 그의 경제 사회 철학을 설명하는 TV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는다.

3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1980년에는 Free to Choose(선택할 자유)라는 10부작 시리즈가 PBS에서 방영되었다. 이와 함께 발표된 아내와 함께 쓴 같은 제목(Free To Choose)의 책은 1980년도에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그후 14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1980년 대선 기간 동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비공식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그후 레이건 행정부의 통치 기간 동안 대통령 경제 정책 자문 위원회에서 활약했다. 에벤스타인(Ebenstein)은 프리드먼이 레이건 행정부의 '정신적 지주'라고 말한다.

밀턴 프리드먼은 지금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경제학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프리드먼은 신문 사설 집필과 TV에 출연을 계속하였다. 동유럽과 중국을 몇 차례 방문하여 그 나라의 정부에게 조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필라델리아 협회(Philadelphia Society)의 이사를 지냈다.

노년

Commentary 매거진의 2007년 기사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는 온건한 유대교인 부모 밑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설명했다. 1998년에는 아내와 함께 Two Lucky People이라는 회고록을 썼는데, 여기에서 자신의 인생과 경험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죽음

프리드먼은 2006년 11월 16일 9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여전히 독창적인 경제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현역 경제학자였다. 그의 마지막 칼럼은 별세 다음날에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다. 아내는 2009년 8월 18일에 별세하였다.

학문적 업적

프리드먼은 생산의 명목 가치로서의 화폐 공급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화폐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 화폐주의(monetarism)는 현대 화폐수량설과 연관된 견해의 집합체이다. 이 사상의 기원은 16세기 살라망카 학파 또는 그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이 사상이 현대에 다시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프리드먼의 공이 컸다. 그는 안나 슈와츠와 함께 쓴 '미국의 화폐 역사, 1867~1960'(1963년)에서미국 역사에서 화폐 공급의 역할과 경제 활동을 탐구하였다. 이 연구의 파격적인 결론은 화폐 공급의 변동이 경제적 변동을 초래하는 방식에 방점을 둔다. 1960년대에 데이비드 마이셀먼(David Meiselman)과 함께 진행한 몇 가지 회귀 분석 연구(regression studies)에서 소비와 생산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투자와 정부 지출보타 화폐 공급이 더 우선적인 요소임을 밝힌다. 이것은 널리 유행하고 있지만 증명 과정이 거의 없었던 그 요소들 간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견해에 대한 도전이었다. 프리드먼의 경험론적인 연구와 이론은 화폐 공급의 변화가 단기적으로는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장기적으로는 가격 수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지지했다.

프리드먼은 화폐주의 학파의 주요한 지지자였다. 그는 인플레이션과 화폐의 공급 사이에 밀접하고 지속적인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본원 통화의 증가율을 적절히 규제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다고 주쟝했다. 그는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린다"는 유명한 비유를 들었는데, 이는 다양한 화폐 공급 메커니즘과 그밖의 요소로 인해 자신의 모델이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주장은 특정 시점의 전반적인 물가 수준의 증가가 석유 가격의 증가나 급여의 증가에서 온다는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라는 대중적인 개념에 대응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인 현상이다.
- 밀턴 프리드먼, 1963.

프리드먼은 수요 관리의 도구로써 재정 정책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서 정부의 역할은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대공황에 대해 아주 많은 글을 썼는데, 그는 1929~1933년을 '대수축'(Great Contraction)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평범한 금융 쇼크에 의해 촉발된 대공황이 점점 더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한 것은 연방준비은행 이사들의 잘못된 정책에 의한 화폐 공급의 수축에 주된 원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꽤 심각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불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을 대재앙으로 만든 데에는 연방준비은행의 책임이 컸다. 권한을 이용하여 침체를 상쇄하는 대신, 그들은 1929~1933년에 화폐량의 1/3을 감소시켰다 ... 대공황은 자유 기업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정부의 실패였다.
-밀턴 프리드먼, Two Lucky People

이 이론은 '미국의 화폐 역사'에서 제시되었고, 이 책의 '대공황'을 다룬 챕터는 'The Great Contraction, 1929-1933'(대수축, 1929-1933)이라는 별도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두 책 모두 아직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인쇄되고 있으며, 몇 가지 판에는 프리드만을 기리는 시카고대학교의 행사에 참석한 버냉키(전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의 연설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연방준비위원회의 공식적인 대표로서 저의 지위에 약간 손상이 갈만한 말을 하면서 이 연설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밀턴과 안나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공황과 관련해서, 당신들이 옳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덕분에,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프리드먼은 정부의 환율 시장 개입의 중단을 주장하면서, 자유 변동 환율 제도를 지지하는 한편 이 주제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그와 가까웠던 조지 스티글러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계에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연구가 역시 시카고대학교에 근무하던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가 개발한 새로운 접근법인 '이성적 기대 이론'에 의해 다양한 라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에 부분적인 이유가 있다." 프리드먼과 루카스, 즉 신 고전주의 거시경제학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프리드먼의 필립스 곡선이 루카스에게 흥미로운 출발점이 되었지만, 그는 이 해결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루카스는 프리드먼의 적응적 기대(adaptive expectations) 대신에 이성적 기대(rational expectations)을 가정한 새로운 접근법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재설정 과정을 통해, 신 고전적 필립스 곡선 이론이 적용됨으로써 그 내용이 급격히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정이 프리드먼의 접근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서, 프리드먼의 필립스 곡선 이론도 바뀌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더 나아가서, 1960~1963년에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생이었던 신 고전파 닐 월리스(Neil Wallace)는 프리드먼의 이론적 과정을 무질서하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평가는 프리드만의 화폐주의와 신 고전 거시경제학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