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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7일 (목) 17:43 판

박인진(朴寅鎭, 1886~1939)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에 나오는 사진이다.

박인진(朴寅鎭, 1886.09.02[1]~1939.03.16[2])은 함경남도 풍산 지역에서 천도교 도정(天道敎 道正)[3]으로 활동했다. 호는 문암(文菴)이다. 풍산의 3.1운동 시위를 주도했으며, 혜산사건(惠山事件)에 연루된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에 참여하였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그가 북한 김일성을 적극 도운 것처럼 조작해 놓았으나[4], 실제로 그가 관련되었던 사람은 보천보사건의 주역으로 1937년 11월 전사한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이다.

평양 대성산 혁명렬사릉에 그의 묘와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2][5]

생애

박인진이 천도교에 입교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력이 컸다. 박인진의 아버지는 호남 출신으로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함경도로 은신하였다. 그는 박인진에게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편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박인진은 자연스럽게 동학을 이해하였고, 19세인 1905년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에 입교한 이후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철저히 실천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에 입도한 이후 갑산군교구 교역자를 시작으로 일생을 종교인으로 살았다. 갑산군교구 금융원으로 종교인의 길을 시작한 박인진은 갑산군교구 강도원, 풍산군교구 금융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3ㆍ1운동 이후에도 꾸준히 교역자로서 그 책무를 다하였다. 특히 3ㆍ1운동 이후 천도교 포교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관할이라고 할 수 있는 갑산, 풍산, 삼수 그리고 만주 장백현 일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였던 청년운동의 기반인 청년단체 조직에도 적극적이었다. 자신 또한 천도교청년당 풍산부의 노동위원으로 청년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인진의 종교적 활약으로 ‘영북 도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박인진은 종교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의 최고 영수인 손병희를 비롯하여 주요 교역자들이 3ㆍ1운동에 참여하자 자신도 3ㆍ1운동에 참여 풍산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박인진과 관련된 신문조서나 판결문이 없어 그이 역할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한 맹시정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박인진은 3ㆍ1운동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또한 1930년대 중반 천도교단을 대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자신의 관할 지역에 조국광복회 지회를 결성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천도교단에서는 친일로 경도되어가는 상황에서 조국광복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을 희생한 것은 적지 않은 갈등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로 인해 결국 박인진은 또 한 번 일경에 검거되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볼 때 박인진은 천도교를 통해 종교인으로서의 삶과 민족운동가로서의 삶에 충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약력

독립운동사자료집 5 : 삼일운동 재판기록 - 맹시정(孟始楨) 43세 판결 대정 8년 형공(刑控) 제986호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 제2권 : 삼일운동사(상) 제8절 풍산군(豊山郡) 공훈전자사료관
주진표 등 판결문 : 대정8년형상제957, 958호 고등법원 1919-10-23 : 공훈전자사료관 - 박인진 등의 상고 기각
박인진(朴寅鎭) 상고 기각 판결문 고등법원 1919.10.23 :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
청년(靑年)의 자유정신(自由精神) - 박인진(朴寅鎭), 종교(宗敎)와 정치(政治)의 관계(關係) - 박영섭(朴榮燮)
함남 후치령(咸南 厚峙嶺) 이북 풍산(豐山) 삼수(三水) 갑산(甲山) 헤산(惠山) 장백현(長白縣) 각군 천도교에서는 지난 十六(십육)...
풍산군 읍내에 거주하든 천도교도정(天道敎道正) 박인진(朴寅鎭)씨는 교회용무로 삼수(三水), 갑산(甲山), 풍산(豊山), 삼군(三郡)을 약 一(일)개월간 순회하고 인사차로 지난 26일 헤산 본지국을 내방하였는데 씨의 담에 의하면 삼군중에 조상조냉(早霜早冷)으로 특히 풍산군이 우심하다는 바.......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에 참여

일제의 기록에 그가 1936년말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7][8]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이 조직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사건 이후 적발되어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난 소위 혜산사건으로 와해된다.

p.13 四. 東北抗日聯軍第六師と天道敎との提携抗日人民戰線の結成
...李昌善(天道敎徒), 李銓化(天道敎長白縣宗理院長), 朴寅鎭(道正), 李景雲(天道敎靑年黨豐山郡代表),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 (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257-306 수록.

당시의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박인진이 조국광복회에 연루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이 사건으로 그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옥사했다는 주장이 있을 뿐, 검거되거나 재판을 받은 명확한 기록은 없다.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므로 북한 김일성과는 명백히 다른 사람이나, 북한에서는 그가 김일성에 협력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 회고록의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주장이나[9] 박인진이 자신을 도왔다는 주장은 모두 거짓이다.[4] 박인진은 1894년생인 북한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보다도 8년 가량 연상이므로 그가 북한 김일성을 도왔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참고 자료

  • 김병제(金秉濟), 《통곡(痛哭) 박문암(朴文菴)》, 『신인간(新人間)』 135, 1939년 6월, p.167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항일 혁명 5편, 1994년 출간) 제15 장 지하 전선의 확대 4. 박인진도정

함께 보기

각주

  1. 주진표 등 판결문 : 대정8년형상제957, 958호 고등법원 1919-10-23 (공훈전자사료관) : 咸鏡南道 豊山郡 天南面 東坮里 六十一番地 農 / 被告人 朴寅鎭 / 九月二日生 三十三年
  2. 2.0 2.1 北, 김일성과 천도교 간부 인연 소개 DailyNK -2005.05.24
  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종교·철학/한국의 종교/동학-천도교/천도교의 조직
  4. 4.0 4.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항일 혁명 5편, 1994년 출간) 제15 장 지하 전선의 확대 4. 박인진도정
  5. [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86회) 평양 만수대언덕을 가다③/만수대의사당(萬壽臺議事堂) 하편 통일뉴스 2018.01.29
  6. 문암 박인진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KCI 검색
  7.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8. 조국광복회 - 위키백과
  9.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 제12장 광복의 새 봄을 앞당겨 (1936년 3월 ~ 1936년 5월) / 5. 조국광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