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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소개==

2020년 6월 4일 (목) 17:48 판

Park.jpg
박정희
朴正熙
약력
직책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년 7월 3일 ~ 1963년 12월 17일)
←전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전임후임→

생몰기간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향년 61세)
본관 고령
학력 만주군관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
정당 민주공화당
가족 박성빈(아버지)
백남의(어머니)
김호남(배우자)
육영수(배우자)
박재옥(장녀)
박근령(차녀)
박근혜(3녀)
박지만(막내)
종교 불교

소개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주요 업적으로는 잘 알려진 새마을 운동,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산림녹화등 이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추진한 중화학공업화 등의 경제 개발정책은 후에 대한민국의 중공업, 제철업의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에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이륙을 달성하였고,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는 등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pp. 89~118 : 박정희 대통령 연보 ("파일보기"에서 pdf 파일 원문 보기 가능)

대통령이 되기 전

생애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은 과거에 동학농민봉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경북 문경에서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복무하였다. 평소 군인이 되고 싶었던 박정희는 형인 박상희의 조언을 받아 1940년 만주국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다. 1944년에 만주국 만주군 장교로 부임하였으나, 곧 해방이 되어 귀국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급성장한 진보세력들이 만주국 군관학교 입학부터 만주군 장교 부임 시절 때 박정희가 친일 행위를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니 궁금한 사람들은 박정희/친일파 논란 문서를 참고하자.

광복 직후

귀국한 후, 박정희는 국군 창설에 참가하여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하지만 곧 대구에서 일어난 10.1폭동 때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우익 경찰의 총에 맞아 죽자, 형 박상희를 존경하며 따랐던 박정희는 분노하게 된다. 이를 노린 당시 목사이자 남로당 군사총책이였던 이재복(李在福)은 박정희를 포섭하여 박정희에게 남로당 가입을 권유하였고, 곧 박정희는 남로당의 군 조직에 가입하였다.[1][2] 하지만 곧 남로당의 수 많은 폭동제주 4.3 사건, 여순반란사건 등으로 인해 안보위기가 심해지자 이승만 정부는 남로당 간부를 숙청하기 위해 숙군 작업을 시행한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를 포섭한 이재복이 체포되는데, 이재복이 소지한 남로당 명단에 박정희의 이름이 적혀있어 박정희가 체포되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구형으로 사형을, 선고로 무기징역, 2심에서는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어 감형된 징역을 집행정지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다음해인 1949년에 강제 예편되어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진보세력들이 최근에 박정희를 남로당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가장 큰 이유이다. 박정희가 남로당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사실이나 진보세력이 말하는 것 처럼 박정희가 남로당의 총책이라거나 빨갱이라는 의견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자세한 건 박정희/남로당 논란 문서를 참고하자.

6.25 전쟁 이후

대통령 시절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도로에 막걸리를 뿌리는 박정희 대통령

유신 체제

피살

주요 업적

박정희에 대한 비판

시간 관계상 이 정도만 적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내용은 사실상 국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더불어 이 위키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므로 부족한 부분은 꼭 추가, 수정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정희에 대한 오해와 논란

친일파 논란

박정희/친일파 논란문서 참고

노무현 정권이 만든 친일진상규명위원회의 주목적은 박정희를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단독]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통령직속위원회의 상반된 평가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6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20일경 발간되는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핵심관계자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심의를 보류한 것이지, '박 전 대통령은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건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공개한 자료를 우리는 그동안 입수하지 못했다"며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이 다시 평가해주길 바란다"고 판단을 유보했다.

좌파들은 박정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악질 친일파에 지나지 않으며, 대한민국에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잘못된 것은 모두 그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박정희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남북한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 것에 대한 한풀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월간조선 1991년 5월호에 실린 미국 南일리노이주 대학 김상기(金相基) 교수의 박정희 논란에 대한 평가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3][4]

“박정희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청년시절의 행적, 즉 일본육군의 장교로서의 과거를 거론하여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 日帝치하에서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한국청년의 수가 적지 않았으나, 이런 사람은 국가원수가 될 수 없는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고 박정희는 친일분자일 수밖에 없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망친 자라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다. 對日굴욕 외교, 일본 경제의 종속이 모두 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에 대한 한국의 위상은 굴욕 종속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전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결국 어떤 명분론보다도 민족自尊의 길임이 입증된 것이다. 젊을 때 만군의 장교였던 사람이 만주벌판에서 武力항쟁한 사람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민족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젊었을 때의 행적으로 한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 무모한 일임을 알 수 있다. 크게 될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거짓말이다.


이 시점에서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글은 누구를 위하게 되는가? 아직도 군사문화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를 도우려고 박정희를 칭찬하는가? 이 글에 대하여 분개하고 필자를 욕할 독자가 많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 위하여 내가 보는 대로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3공, 4공 세력에 이 글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도 않으며, 설사 약간의 도움이 된들 나쁠 것이 무엇인가? 과거에 우리는 黑과 白, 善과 惡을 명확히 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黑과 白을 포괄하여 파악하는 정치적 성숙성이 요구되는 더 높은 단계로 왔다.


지난날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던 양심인사들이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보여 온 치졸무쌍한 작태도 볼 만큼 봤고, 독재자들의 큰 업적들이 새삼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독재로의 회귀를 원하는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박정희에 대한 올바른 평가 없이는 우리는 자기기만 속을 한동안 헤매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싶은 것뿐이다.


활자로 된 글은 영원히 남는다. 나는 이 글로 두고두고 욕을 먹겠다.”

위 글의 필자 김상기 교수도 박정희가 일본육군의 장교였던 것처럼 잘못 말하고 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 위탁교육을 받은 적은 있으나 일본군 아닌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만주군 초급 장교를 1년여 지냈을 뿐이다.

만주군관학교 혈서 지원 논란

박정희가 진일파라는 결정적 증거라면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할 당시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보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를 공개했다.

"박정희는 일제 순응하는 척하며 실력 기른 사람중 하나" 뉴데일리 2009-11-09
신빙성 논란 만주신문, 전면 공개한다 뉴데일리 2009-11-10

공개된 문건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으나, 사실이라 해도 당시 전시 상황에서 혈서를 쓰는 일은 자주 있던 일이고, 혈서의 내용도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정도라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겠다는 말로 볼 수도 없다. 만주군관학교 지원 서류에 든 것이니 일본 천황 아닌 만주국에 봉사하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므로 이것이 그가 친일파인 결정적 증거라는 것은 넌센스다.

그가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만주군 초급 장교를 거치면서 배운 선진문명에 대한 식견이 후일 한국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게된 것이다. 그의 이런 경력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한국의 경제적 번영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일성처럼 중학 중퇴학력으로 항일투쟁한답시고 만주산야를 누비며 비적질이나 일삼은 경력으로는 소련군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주권을 강탈해 지금의 북한과 같이 나라를 자기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어 전국민을 노예로 부리게 된다.

박정희가 일본군도 아닌 만주군 초급장교를 1년 남짓 했다고 거물 민족반역자라 한다면 일본 육사 졸업하고 8년간 일본군에 근무한 김경천(金擎天, 1888 ~ 1942)[5]이나 5년간 일본군에 복무한 지청천(池靑天, 1888 ~ 1957)[6]은 친일을 해도 박정희보다 8배 또는 5배나 많이 했는데 독립운동의 영웅이 될 수 있는가? 해방이 되지 않았더라면 박정희도 후에 이들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았으리라는 절대적인 근거라도 있는가? 김경천이나 지청천이 일본군 경험을 독립운동에 활용했다면 박정희는 만주군 경험을 해방 후 조국 근대화에 활용하여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에 오래 복무했어도 해방이 되지 않아 나중에 독립운동을 좀 했으면 민족 영웅이고, 만주군 초급장교 1년여만에 해방이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할 기회가 없어진 사람은 대신 해방 조국에 제아무리 크게 공헌해도 민족반역자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은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더구나 김경천과 지청천은 1888년생으로 조선에서 태어나 장성한 22세에 나라를 잃어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렬할 수 있었겠지만, 박정희는 1917년생으로 이미 일본 땅이 된 곳에서 태어나 일제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선이라는 나라에는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일본인들의 눈치를 보며 고달프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 시절을 살아본 적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후세 사람들이 자신은 편안하게 살면서 자기들 멋대로 세운 기준으로 "너는 목숨걸고 일제와 싸우지 않았으니 친일파요 민족 반역자"라고 단죄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고 야만적 행위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조상도 일제와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기에 자신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해방후 70년이 지나서도 친일파 논쟁이 갈수록 거세지는 것은 그 동기가 정치적인 목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친일파 타령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한다는 핑계로 비적질을 한 기록이 허다하게 나오는 김일성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국가를 사유화해 일족이 세습하며 전국민을 노예로 부릴 권리를 자동적으로 가지는 것도 당연시 되고, 남침전쟁으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조만식 선생등 반공적인 독립운동가나 연안파, 남로당파등 공산주의 계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숙청, 처형하고, 남한의 수많은 항일지사들을 전쟁중에 납북해 중도에 작고하거나 부자유하게 살다 세상을 떠나도록한 것도 문제삼아서는 안되게 된다. 해방후 김일성이 죽인 항일지사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순국한 분들보다 더 많을 것이다.

지도자가 된 사람은 지도자로서 한 일로 평가해야지 해방 전에 얼마나 항일투쟁을 많이 했나로 평가하려들면 백두혈통이라 자칭하는 김일성같은 천하에 둘도 없는 항일팔이 사기꾼 일족의 노예가 된다. 정작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이 실제 독립에는 별로 기여한 바가 없는데도 항일을 지상의 가치로 삼다보니 김일성같은 항일팔이 사기꾼이 득세할 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박정희가 후일 대통령이 되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일제시대에 무엇을 했는지 관심가지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고작 만주군 초급장교 1년 경력자를 거물 친일파로 여기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산 적도 없는 후세 사람들이 그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순전히 그의 대통령 재임 중의 업적을 깎아내려야만 할 필요성이 있는 집단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도자 박정희 덕택에 세계 최빈국 수준의 가난을 탈피하고 오늘날 자신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할 줄 모르고 그의 일제시대 행적만 거론하며 민족반역자로 만들고, 남침전쟁을 일으켜 일제보다 몇 배나 많은 동족을 살상하고 전국을 잿더미로 만든 김일성에게는 전쟁 책임은 묻지도 않고, 항일팔이 사기꾼을 민족의 태양이라며 받들어 모시는 정신병자들과 다름없다. 항일지상주의는 일제시대에 항일투쟁을 하기만 했으면 해방 후 권력을 잡고 무슨 짓을 했든 문제삼지 말아야 하고, 만주군 출신이면 지도자로서 무슨 훌륭한 업적이 있어도 민족반역자라는 황당한 결론으로 귀결된다.

한국인들 자력이 아닌 남의 나라 힘으로 해방을 맞았으면, 해방 후 지도자는 해방 전에 무얼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국민들이 자유롭게 잘 사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독립운동사의 진정한 교훈

독립운동사의 진정한 교훈이 있다면 한번 나라를 잃고 나면 무수한 희생을 치러가며 독립운동을 해 봐야 자력으로 나라를 되찾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일단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라도 나라를 되찾았으면 누가 독립운동을 더 많이 했느냐, 누가 친일파냐 아니냐로 다투는 것보다 몇백배 더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절대로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력이 일본을 어느 정도라도 따라잡는 일에 누구보다 더 크게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이다. 이런 그를 일제시대 만주군 소위 경력 1년을 들어 꼭 거물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가? 그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받은 교육과 만주군에서의 경험이 한국의 경제를 일으키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일제시대를 산 모든 사람들의 과거사를 하나하나 다 뒤져내어 친일 시비를 가리고자 하면 김구신익희가 말한대로 "당시 국내에 있은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는 결론 밖에 더 나오겠는가? 그게 과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길이겠는가? 수십년에 걸쳐 수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일제시대를 산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행적을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친일로 보이는 행적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감옥으로 보내거나 처형하고 나면 민족정기가 벌떡 일어서고 저절로 모든 사람이 잘 사는 부강한 나라가 만들어지기라도 하는가? 뒷조사를 담당할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친일 행적과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과거 반민특위의 조사관, 재판관들 중에는 과연 친일에 연루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겠는가? 그렇게 모든 사람의 뒷조사를 하는 노력을 나라를 일으키는데 쏟으면 안 되는가?

남로당 논란

박정희/남로당 논란문서 참고

김지태와 정수장학회 논란

김지태(金智泰, 1908~1982)는 5.16이후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1차 고초를 당하고, 곧이어 농지개혁법 위반, 탈세, 외환관리법 위반 등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한홍구 著 『장물 바구니』(2012)에 따르면, 이 같은 죄목들은 군사정부에 협력하지 않은 죄(거사자금 모금 거절 등)로 중앙정보부가 뒤집어씌운 날조로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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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지태는 군사정부가 들어서기 이전 1958년부터 부정축재 혐의로 여러차례 사정당국의 조사를 받은 바 있고, 벌금을 납부한 바 있다는 사실을 한홍구는 무시하고 있다. .

그가 정수장학회에 강탈당한 것으로 알려진 땅 10만여평은 사실 경작 농민들에게 쌀 2말씩 주고 헐값에 사들여 여럿의 명의로 허위 자작농지증명서를 발급받아 소유한 불법토지인데다,이미 두달전에 국방부에 자진 헌납한 것이라, 국방부 소유로 넘어간 것이고, 부산일보는 자본잠식이 무려 980%나 되는 깡통기업이었다. 사실상 김지태가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재산은 실체가 없는 셈이다. .

한홍구는 앞의 저서에서 당시 김지태가 강탈당한 재산이 수백억대, 지금으로 치자면 10조원에 달하는 재산이었다고 주장하나, 현재 MBC(서울) 자산이 2조원대에 불과한데, 무슨 개솔이를 하는지 모르겠다. .

박근혜가 실각하고, 박정희 신드롬이 다시 재현될 가능성이 상당기간 희박한 와중에, 정수장학회 떡밥이 다시 세간에 논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늘 그렇듯이 그들에게 역사는 선동의 수단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

정수장학회가 박정희 사후에 전두환이 박정희의 正과 육영수의 修를 따와 개칭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당시 1974년 이후 7년간 민정비서관을 역임한 이기창에 따르면, 정수(正修)는 중국 고전인 대학(大學)의 7장에 나오는 정심수기(正心修己)편의 약칭이다. 정수장학회를 박정희 개인재산이나 사적 소유의 측면을 의도적으로 부풀리기 위한 소설을 쓴 셈이다.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비서실장 재직 시절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된 김지태씨를 명단에서 빼줘
“문재인-노무현, 1987년 친일파 변론 맡아 승소했다" 뉴데일리 2019.03.15
곽상도 의원, 동양척식회사 관련 소송 공개 "서류위조까지 드러나… 누가 친일파인가?”

세계 석학, 지도자들의 평가

키신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러시아가 동시에 하려다 붕괴되지 않았나.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다. 19-20세기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나라를 구한 혁명이 5개다. 일본의 명치유신, 터키의 게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한국의 박정희다. 이중 경제기적을 이룩한 혁명은 오직 5.16이다.

엘빈 토플러(제3의 물결):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는 그 나라 수준에 맞게 제한돼야 한다. 이를 놓고 독재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 모델은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다.

폴 케네디(강대국의 흥망): 박정희는 세계 최빈국의 나라를 불과 20년만에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키웠다.

푸틴: 박정희에 관한 책은 다 구해 달라. 그는 나의 롤 모델이다.

아이젠하워: 박정희가 있었기에 한국은 공산주의 의 마지노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리콴유: 박대통령이 눈앞의 이익만 좇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말레지아의 마하티르 전 총리와 캄보디아 훈센총리도 박대통령 추종자로 유명하다.

덩샤오핑: 박정희는 나의 멘토다.

후진타오: 나는 새마을 운동을 공부한 사람이다.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

김정일: 옛날에는 유신이다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새마을운동 덕에 경제가 성장한 건 사실 아니냐. 서울은 도쿄보다 더 훌륭한 도시로 조선의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조작된 일본군 박정희 사진

일본군복을 입은 박정희 사진이라면서 인터넷에 올라있는 사진들은 대부분 악의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그가 친일파로 보이게 하려는 시각적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일본군이었던 적이 없었으므로 일본 군복을 입은 사진도 있을 수 없다. 그는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일본육사에서 위탁교육을 받은 적은 있으나, 1944년초 일본군 아닌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진급 1개월만에 해방이 되었다.

저서

박정희 시대 자료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연구 논문 및 저서

“중화학공업 육성과 유신은 양날의 칼(double-edged sword)” 조선일보 2005. 10. 28

전기 및 관련 서적

선우연(鮮于煉) 역, 『박정희의 시대: 한국 위로부터의 혁명 18년』 서울 : 월드콤푸그래픽, 1995.

참고 자료

이른바 '친일문제'를 둘러싼 쟁점과 분석
만주국과 이승만-박정희-김일성
그가 이룩한 대한민국을 누가 저주하는가?

외부 링크

영남대학교 새마을국제개발학과

함께 보기

각주

  1. 참고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2992#dvOpinion 물론 이 링크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참고만 하자.
  2. 단,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이유는 이데올로기 때문보다는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김점곤 평화연구원장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남로당에서 지명한 요인물이였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또한 남로당에서의 활동도 미약했다고 한다.
  3. <金相基의 美國통신>나는 왜 朴正熙를 존경하게 되었는가? (월간조선, 1991.05.01) pp. 98-103.
  4. 류석춘, “만주 경험과 남·북한의 발전 경로” : 자유경제포럼 주최 토론회 발제문 리버티 코리아 포스트 2019.06.01
  5. 김경천 (1888년) 위키백과
  6. 지청천 위키백과
  7. 조시철 목사, 박정희 일본군 사진 조작 증거 (3분경부터 설명이 나옴.)
  8. 조시철 목사, 박정희 일본군 사진 조작 증거 (6분 44초부터 설명 나옴.)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대수 성명 재임
제1공화국
1 이승만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2 이승만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3 이승만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7일
제2공화국
4 윤보선 1960년 8월 12일 ~ 1961년 5월 16일
제3공화국
4 윤보선 1961년 5월 16일 ~ 1962년 3월 23일
5 박정희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6 박정희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7 박정희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제4공화국
8 박정희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9 박정희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10 최규하 1979년 12월 6일 ~ 1980년 8월 16일
11 전두환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제5공화국
12 전두환 1981년 2월 25일 ~ 1988년 2월 24일
제6공화국
13 노태우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14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15 김대중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16 노무현 2003년 2월 25일 ~ 2004년 3월 12일
2004년 5월 14일 ~ 2008년 2월 24일
17 이명박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18 박근혜 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
19 문재인 2017년 5월 10일 ~ 2022년 5월 9일
20 윤석열 2022년 5월 10일 ~ 2027년 5월 9일 [1]
  1.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