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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대한민국은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라 공사가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부기관과 연구소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얼마의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조차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박정희가 각 기관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을 예측할 것을 주문했는데 [[국토교통부|건설부]]는 650억원, [[서울특별시]]는 180억원, 재무부는 280억원, [[육군본부]] 공병감실은 490억원, 현대건설은 289억원<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101100067&ctcd=N</ref> 등으로 각기 예측한 비용이 달랐다. 게다가 가장 많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측한 건설부 안과 가장 적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측한 서울 특별시 안의 예상비용 차이는 3배가 넘었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얼마가 드는지도 모르고 시작한 공사였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태국]]에서 막대한 적자를 내긴 했지만 고속도로를 완성한 경험이 있던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대한민국은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라 공사가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부기관과 연구소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얼마의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조차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박정희가 각 기관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을 예측할 것을 주문했는데 [[국토교통부|건설부]]는 650억원, [[서울특별시]]는 180억원, 재무부는 280억원, [[육군본부]] 공병감실은 490억원, 현대건설은 289억원<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101100067&ctcd=N</ref> 등으로 각기 예측한 비용이 달랐다. 게다가 가장 많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측한 건설부 안과 가장 적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측한 서울 특별시 안의 예상비용 차이는 3배가 넘었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얼마가 드는지도 모르고 시작한 공사였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태국]]에서 막대한 적자를 내긴 했지만 고속도로를 완성한 경험이 있던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는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고속도로 구상도를 직접 스케치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으며 이후 공사가 시작된 후에도 자주 현장을 찾았던 덕분도 있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양 옆 50m는 공터로 남겨두고 건물 신축을 금지했다. 나중에는 차가 많아져 확장해야 할 것을 예상한 조치였다. 이는 박정희에게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성공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고속도로 구상도를 직접 스케치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으며 이후 공사가 시작된 후에도 자주 현장을 찾았던 덕분도 있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양 옆 50m는 공터로 남겨두고 건물 신축을 금지했다. 나중에는 차가 많아져 확장해야 할 것을 예상한 조치였다. 이는 박정희에게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포항제철 건설===
===포항제철 건설===

2020년 6월 30일 (화) 20:36 판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주요 업적으로는 잘 알려진 새마을 운동,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산림녹화등 이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추진한 중화학공업화 등의 경제 개발정책은 후에 대한민국의 중공업, 제철업의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기에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이륙을 달성하였고,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는 등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Park.jpg
박정희
朴正熙
약력
직책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년 7월 3일 ~ 1963년 12월 17일)
←전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전임후임→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전임후임→

생몰기간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향년 61세)
본관 고령
학력 만주군관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
정당 민주공화당
부모 박성빈(아버지) 백남의(어머니)
배우자 김호남(배우자)
육영수(배우자)
자녀 박재옥(장녀)
박근혜(차녀)
박근령(3녀)
박지만(막내)
종교 불교

개요

pp. 89~118 : 박정희 대통령 연보 ("파일보기"에서 pdf 파일 원문 보기 가능)

출생과 가계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善山郡 龜尾面 上毛洞)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성빈(朴成彬)은 과거에 동학농민봉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형으로 박동희(朴東熙)와 박상희(朴相熙)가 있었다.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朴榮玉, 1929~2015)은 둘째 형 박상희의 장녀로 박정희의 소개로 결혼했다.[1]

대구사범학교 수학과 교사 생활

구미공립보통학교(龜尾公立普通學校)[2] 6학년[3]을 마친 박정희는 1932년 봄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에 입학하여 5년간 재학 후 1937년 3월 제4회로 졸업한다.[4] 입학성적은 전체 100명 (조선인 학생 80명) 중 51등으로 중간정도의 석차이나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학교라 과히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재학중 등록금 납입에 애로가 많아 결석하고 구미의 집에 가 있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공부도 적성에 맞지 않아 열심히 하지 않았는지 최하위권 성적에 머물렀다. 만주군관학교에서는 최우등이었던 것과 대비 된다.

    아래 조갑제의 글에 박정희가 위 동요 포함 대구 사범 시절 지은 짧은 시들 몇 편의 번역이 나온다.

대구사범을 1937년 3월에 졸업하고 4월부터 문경보통학교(聞慶普通學校)에 근무했다. 문경보통학교가 1938년 4월 1일 문경서부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6]로 개칭하였으며, 지금의 문경초등학교이다.[7] 사범학교 졸업자는 의무적으로 3년간 교사로 일해야 했으므로 1940년 3월말까지 만 3년간 재직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군관학교 입교는 1940년 4월이다.

박정희의 교사 경력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8]

만주 육군군관학교 및 초급장교 시기

평소 군인이 되고 싶었던 박정희는 형인 박상희의 조언을 받아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게 된다.

봉천(奉天)에 있던 만주군관학교는 만주국이 출범하는 1932년에 설치되었으며 6개월 ~ 2년제 단기 과정이었다.[9] 후에 정규 사관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생기자 이 과정을 없애고 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4년제 육군군관학교를 설치하게 되며, 1939년에 1기생, 1940년에 2기생이 입학한다. 7기생까지 입학했으나 1945년 만주국 패망으로 3기생까지만 졸업했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牡丹江, 목단강)시에서 신경 군관학교 입시에 응시하였고, 1940년 1월 4일에 합격이 발표되었다. 1940년 4월 신경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 예과 생도로 입학하였다.

신경의 군관학교는 예과 2년, 부대근무 6개월, 본과 2년의 4년 6개월 수업을 마치고도 약간의 사관견습생활을 지나야 소위로 임관하도록 되어 있었다.[9] 박정희는 예과 2년을 마치고 성적 우수자에게 주는 특전으로 일본 육사 (57기)에 편입하여 본과 2년을 마쳤다.

임관에 앞서 3개월간의 현지 부대 근무를 마치고 1944년 7월 1일자로 만주군 소위에 임관되었고,[10] 1945년 7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11]

소위로 임관해 첫 부임한 곳은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보병8단이었다. 단장은 탕지룽(唐際榮)이란 중국인 상교(上校, 대령)였고, 박정희 소위의 첫 직책은 단장 부관이었다.[10] 그는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벌이는 소대나 중대 지휘관이 아니었고, 당연히 독립군을 토벌할 일도 없었다.

만주군 시절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나?

박정희가 만주군에 있으면서 100여 차례나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다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만주에 있는 기간에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무장세력은 이미 소멸되고 남아있지 않았다.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공당 산하 부대로 실제로는 소련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았고, 일상적으로 양민에 대한 약탈행위를 일삼던 마적과 다름없는 조직이었으며 조선독립운동과는 무관했다. 그나마 김일성은 일본군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은 1941년초까지 완전히 궤멸되며, 잔존세력은 모두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군 88여단에 배속되어 해방될 때까지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냈다.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88여단에서 5년간 교육과 훈련을 시킨 김일성 등의 조선인들을 데려와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워 북한의 핵심 권력을 쥐어준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토벌당한 독립군 이름이나 부대 이름이라도 대어야할 것이다. 물론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근거도 제시되어야 한다.

광복 직후

귀국한 후, 박정희는 국군 창설에 참가하여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하지만 곧 대구에서 일어난 10.1폭동 때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우익 경찰의 총에 맞아 죽자, 형 박상희를 존경하며 따랐던 박정희는 분노하게 된다. 이를 노린 당시 목사이자 남로당 군사총책이였던 이재복(李在福)은 박정희를 포섭하여 박정희에게 남로당 가입을 권유하였고, 곧 박정희는 남로당의 군 조직에 가입하였다.[15][16] 하지만 곧 남로당의 수 많은 폭동제주 4.3 사건, 여순반란사건 등으로 인해 안보위기가 심해지자 이승만 정부는 남로당 간부를 숙청하기 위해 숙군 작업을 시행한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를 포섭한 이재복이 체포되는데, 이재복이 소지한 남로당 명단에 박정희의 이름이 적혀있어 박정희가 체포되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구형으로 사형을, 선고로 무기징역, 2심에서는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어 감형된 징역을 집행정지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다음해인 1949년에 강제 예편되어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진보세력들이 최근에 박정희를 남로당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가장 큰 이유이다. 박정희가 남로당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사실이나 진보세력이 말하는 것 처럼 박정희가 남로당의 총책이라거나 빨갱이라는 의견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박정희가 남로당 사건으로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는 과정은 아래 조갑제의 글 중 "問5: 朴正熙 소령은 누가 살렸나?"에 잘 나와 있다.

問5: 朴正熙 소령은 누가 살렸나.
답: 백선엽 정보국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6.25 전쟁

6.25 발발 직전에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이때 정보국 전투정보과는 수차례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상부에 보고했으나 보고가 묵살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박정희의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우리는 남침 징후를 6개월 전에 예측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적의 남침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군 수뇌부에 누차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군 수뇌, 정부당국, 미국고문단 모두가 설마 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17]

6.25가 발발하였을 때 박정희는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구미에 있었다. 이날 낮 12시경 구미경찰서에서 정보국장 장도영(1949년 11월 정보국장으로 취임) 대령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전보를 받고 육군본부(이하 육본)에 복귀했다. 3일 후에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박정희는 육본 정보국 장병 몇명과 보트를 구해 한강을 건넜다. 이후 수원국민학교에 육군본부 수뇌부 이하 직원들이 모여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수원으로 갔으며 이때 육군 수뇌부는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좌익이었다면 전쟁 발발 소식에 상경하지도, 급박한 상황에 한강을 건너 부대에 복귀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18] 이후 장도영 국장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박정희의 복직을 건의하였고 정일권 참모총장이 즉석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의 허락을 얻어 박정희는 소령 계급으로 복직했다[19]. 전시의 급박한 상황이라 부대 내 계급장조차 없어 김종필이 파이버에 소령 계급장을 그려 주었다고 한다[20]. 휴전 후인 1960년에는 군수기지사령관을 역임했다.

5.16 군사혁명 및 군정기

5.16 군사혁명

1961년 5월 16일에 궐기하여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장악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헌정을 일시 중단시키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최고기구를 이용해 각종 정책을 진행했다.

제3공화국 대통령 시절

대통령 당선

1962년 12월 26일 제정된 새로운 헌법은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의 복귀를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1963년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선거 과정이 박정희에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는데, 선거 기간인 1963년 9월 23일 윤보선 후보는 전주 유세에서 박정희가 여순반란 관련자라고 박정희를 공격[21]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6.25가 끝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박정희와 여순사건의 관계에 대한 윤보선의 주장은 사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의 발언 후인 10월 11일 여순사건 당시 조사반장이었던 빈철현이 박정희가 여순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발표[22]했던 것 등을 고려해보면 그러하다. 어쨌든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차로 간신히 누르고 제3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외자도입

경제성장에 핵심적인 공장설비 및 인프라 등의 자본은 국민의 저축과 외국으로부터의 자본도입으로부터 비롯된다(S-NX=I). 당시 한국은 당장 먹고 살 것이 없는데 저축이 있을 리 없었다. '저소득-저저축-저투자-저소득'의 악의 순환고리는 한국 국민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런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외자를 도입해 대규모의 투자로 자본을 축적해 소득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외자도입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한국은 신용도 기술도 없었기에 어느 나라도 선뜻 자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일본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정상화하고 그 대가로 3억 달러의 무상차관,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유상차관, 3억 달러의 상업차관 등 총 8억 달러를 받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대학생들의 6.3시위가 있기도 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이러한 외자도입에 대해 일각에서는 종속이론을 근거로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이 일본미국에 종속되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종속이론은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경제학계에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론일 뿐더러 신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또한 종속이론에 근거하여 박정희 정권의 외자도입을 비판했기에 상당한 논란에 휩싸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도로에 막걸리를 뿌리는 박정희 대통령

경제성장에 있어 인프라는 필수적이다. 도로와 항만이 잘 갖추어져 있으면 기업이 공장을 짓는 등의 투자를 하지만 도로나 항만 등의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다면 공장을 지어 물건을 생산해도 멀리 팔수도 없고 운송비가 높아지며 수출도 불가능하기에 자연히 투자가 줄어든다. 따라서 인프라는 경제발전에 필수적인데 당시 대한민국은 도로사정이 매우 열악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15시간이나 걸릴 정도였다. [23]

박정희는 서독을 방문하여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시찰하고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절감한 후 국토를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구상하였다.

문제는 대한민국은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라 공사가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부기관과 연구소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얼마의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조차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박정희가 각 기관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을 예측할 것을 주문했는데 건설부는 650억원, 서울특별시는 180억원, 재무부는 280억원, 육군본부 공병감실은 490억원, 현대건설은 289억원[24] 등으로 각기 예측한 비용이 달랐다. 게다가 가장 많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측한 건설부 안과 가장 적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측한 서울 특별시 안의 예상비용 차이는 3배가 넘었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얼마가 드는지도 모르고 시작한 공사였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태국에서 막대한 적자를 내긴 했지만 고속도로를 완성한 경험이 있던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고속도로 구상도를 직접 스케치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으며 이후 공사가 시작된 후에도 자주 현장을 찾았던 덕분도 있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양 옆 50m는 공터로 남겨두고 건물 신축을 금지했다. 나중에는 차가 많아져 확장해야 할 것을 예상한 조치였다. 이는 박정희에게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포항제철 건설

철강은 산업의 쌀이라 불린다. 최근에서야 각종 신소재의 개발로 철강의 중요성이 약간 감소했지만 이 당시에는 대체 불가한 소재였을 뿐만 아니라 만성적인 공급부족으로 인해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다. 자동차, 조선, 공장설비, 건설 등등 수많은 산업이 철강없이 진행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철소 건설은 수많은 비용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라 민간기업이 하기는 어려웠기에 박정희는 군에 있을 때 눈여겨보았던 박태준을 시켜 경상북도 포항에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기술도 노하우도 없던 제철소 건설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박태준 및 이하 직원들의 노고와 함께 제철소 건설의 불가피성을 간파한 박정희의 안목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8.3 사채동결 조치

대규모의 투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다보니 이자율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고 당시에 미진했던 금융발달 때문에 기업들은 사채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이 고리의 자금을 이용해 기업들을 좌지우지하는 바람에 기업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8월 3일 정부가 사채시장에 개입하여 사채이자율을 제한하고 기업의 채무를 조정해주는데 이를 8.3사채동결 조치라 한다. 이는 훗날 사인(私人) 간의 계약에 국가가 개입하였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고도성장기의 필요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4공화국 대통령 시절

1972년 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는데 이때 개정된 헌법을 유신헌법이라한다. 또한 이때 이후부터 제5공화국 이전까지의 대한민국 정치체제를 유신체제라 한다.

수도이전 추진

안보상의 이유로 현 세종시 일대로 수도이전을 추진하였는데 훗날 노무현 대통령의 행정수도 계획과 위치는 비슷하나 세부계획면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

197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동맹국들의 인권문제를 문제삼으며 동맹국들을 압박했는데 박정희 집권기의 대한민국도 그 대상이었다. 문제는 카터는 동맹국들에는 한없이 엄격했지만 독재로 악명높은 루마니아나 중국에는 별다른 압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지미 카터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는데 이는 1979년에 열렸던 정상회담에서도 나타난다. 박정희는 끊임없이 인권문제를 언급하는 지미 카터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얼마 전 미국 의원들 몇 명이 나를 방문했다.

나는 그들에게 만약 소련군 수십 개 사단이 볼티모어(수도 워싱턴 근교에 위치)에 배치됐다면 미국 정부도 국민이 지금과 똑같은 자유를 누리도록 허용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소련군이 땅굴을 파고 특공대를 워싱턴DC로 투입한다면 미국의 자유는 더 제한될 것이다.

나는 우리 국민에게 가능한 최대한 자유를 누리게 하고 싶다.

그러나 3천700만명의 생존이 걸려있고 어느 정도는 통제가 필요하다.[25]

또 인권문제와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고려하는 카터는 한국이 방위비 지출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박정희는 노력하고 있지만 북한처럼 국민소득의 상당부분을 국방비로만 쓰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며 완곡히 거절했다.

만약 우리(대한민국)가 (북한처럼) GNP의 20%를 방위비로 쓴다면 바로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26]

피살

1979년 10월 26일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다. 이를 10.26 사태라 하며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이 저격에 의해 서거한 사태이다.

박정희에 대한 오해와 논란

박정희에 대한 논란은 집권 후의 일에 대한 것도 많기는 하지만, 가장 많이 논란되는 것은 만주군에 있은 전력 때문에 불거진 친일 시비이고, 그 다음으로는 남로당 연루 전력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박정희를 알게 되고 공과에 대해 따지게 된 것은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가 누군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을 것이고, 그의 일제시대나 남로당 연루 전력에 대해 어느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만주군 소위 정도 경력으로 거물 친일파라며 친일파 인명사전에 등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갑자기 일제시대 행적이 대통령으로서 한 일보다 더 중요해지고 끝없는 시비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그가 중요한 인물인 것은 집권자로서의 행적 때문이지 그 이전의 행적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평가의 주안점은 어디까지나 집권자로서 한 일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하고, 그 이전의 전력은 단지 참고사항일 뿐이다.

그의 전력을 온갖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따지며 시비하는 사람들은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에 대해 어떻게든 흠집을 내어 정치적 이득을 얻겠다는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박정희는 거물 친일파에 골수 남로당 빨갱이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박정희의 전력이 이렇게 나쁜 사람이었으니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며, 따라서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한 일도 다 무효이고, 높이 평가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싶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 재임 중에 가족들이 뇌물받은 것이 드러나 수사받다 자살한 사람도 칭송해 마지 않으며, 재임중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한 명백한 증거가 드러나도 수사도 하지 못하게 하고, 언론들도 이들에 동조하여 보도도 하지 않는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업적이 많은 박정희에 대해서만은 청소년 때의 뒷조사까지 해서라도 반드시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것은 그냥 그가 밉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는 것같다.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그 사람이 당신은 일제시대 학생시절 신사참배에다 천황만세도 부르고 창씨개명까지 한 악질 친일파이니 자기를 구할 자격이 없으므로 칭찬도 감사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를게 없다. 선생이 시켜서 마지못해 그런 일을 했다고 해도 그때문에 누구한테 피해를 준 일도 없고, 그 정도를 하지 않은 학생도 찾기 어려운데도 자신을 구해준 공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해방될 때 박정희의 나이는 불과 28세로 요즘 같으면 제대로 성인 취급도 못받을 나이이다. 그런 그가 고작 만주군 소위 정도 된 것이 엄청난 출세이기라도 하며, 고작 소위 되려고 수많은 동족을 괴롭히기라도 했는가? 박정희가 만주군 소위가 된 때문에 누가 무슨 피해를 입었기에 거물 민족반역자가 되어야 하는가?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순위에 밀려 만주군관학교 입시에 낙방한 사람 정도일텐데, 입시제도가 존재하는한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시험 대신 제비뽑기를 한다해도 붙은 사람은 낙방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이런게 박정희의 죄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합격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친일파로 욕먹을 것을 자신이 대신 먹는 훌륭한 사람일 수도 있다.

박정희를 악마로 만들기 위해 전세계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그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과거 기록을 낱낱이 다 찾아내려는 노력을 국가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돌릴 수는 없는가? 왜 그는 반드시 악마가 되어야만 하는가?

박정희의 전력에 대한 여러 논란에 대해서는 아래 조갑제의 글에 비교적 잘 해명되어 있다.

친일파 논란

노무현 정권이 만든 친일진상규명위원회의 주목적은 박정희를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단독]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통령직속위원회의 상반된 평가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6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20일경 발간되는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핵심관계자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심의를 보류한 것이지, '박 전 대통령은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건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공개한 자료를 우리는 그동안 입수하지 못했다"며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이 다시 평가해주길 바란다"고 판단을 유보했다.

좌파들은 박정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악질 친일파에 지나지 않으며, 대한민국에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잘못된 것은 모두 그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박정희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남북한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 것에 대한 한풀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월간조선 1991년 5월호에 실린 미국 南일리노이주 대학 김상기(金相基) 교수의 박정희 논란에 대한 평가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27][28]

“박정희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청년시절의 행적, 즉 일본육군의 장교로서의 과거를 거론하여 비판하는 입장이 있다. 日帝치하에서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한국청년의 수가 적지 않았으나, 이런 사람은 국가원수가 될 수 없는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고 박정희는 친일분자일 수밖에 없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망친 자라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다. 對日굴욕 외교, 일본 경제의 종속이 모두 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에 대한 한국의 위상은 굴욕 종속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전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결국 어떤 명분론보다도 민족自尊의 길임이 입증된 것이다. 젊을 때 만군의 장교였던 사람이 만주벌판에서 武力항쟁한 사람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민족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젊었을 때의 행적으로 한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 무모한 일임을 알 수 있다. 크게 될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거짓말이다.


이 시점에서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글은 누구를 위하게 되는가? 아직도 군사문화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구를 도우려고 박정희를 칭찬하는가? 이 글에 대하여 분개하고 필자를 욕할 독자가 많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 위하여 내가 보는 대로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3공, 4공 세력에 이 글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도 않으며, 설사 약간의 도움이 된들 나쁠 것이 무엇인가? 과거에 우리는 黑과 白, 善과 惡을 명확히 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黑과 白을 포괄하여 파악하는 정치적 성숙성이 요구되는 더 높은 단계로 왔다.


지난날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던 양심인사들이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보여 온 치졸무쌍한 작태도 볼 만큼 봤고, 독재자들의 큰 업적들이 새삼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독재로의 회귀를 원하는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박정희에 대한 올바른 평가 없이는 우리는 자기기만 속을 한동안 헤매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싶은 것뿐이다.


활자로 된 글은 영원히 남는다. 나는 이 글로 두고두고 욕을 먹겠다.”

위 글의 필자 김상기 교수도 박정희가 일본육군의 장교였던 것처럼 잘못 말하고 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 위탁교육을 받은 적은 있으나 일본군 아닌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만주군 초급 장교를 1년여 지냈을 뿐이다.

창씨개명 논란

박정희의 이름은 1939년 직원록이나, 1940년 1월 4일 만주군관학교 합격자명단에까지는 "朴正熙"라고 나온다. 박정희 일가가 창씨개명 신고를 한 것은 1940년 2월 17일이며[12], 그의 개명한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다. 高木은 그의 실제 성씨인 고령 박씨(高靈 朴氏)에서 따온 것으로 원래 성씨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는 김대중이 1938년에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로 창씨개명하여 완전한 일본 성씨 도요타(豊田)로 바꾼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제 말기에 조선인들 90% 이상이 창씨개명을 했다고 하며, 특히 학교에 다니거나 공직에 있는 사람은 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그가 친일파라는 무슨 특별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라는 다른 일본식 이름도 썼다고 주장하나, 이는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일본인 교사였던 오카모토 히로시(岡本寬)의 이름이 와전된 것임이 밝혀졌다. 實과 寬은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혼동하여 적히기도 했다.[4]

만주군관학교 혈서 지원 논란

박정희가 진일파라는 결정적 증거라면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할 당시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보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를 공개했다.

"박정희는 일제 순응하는 척하며 실력 기른 사람중 하나" 뉴데일리 2009-11-09
신빙성 논란 만주신문, 전면 공개한다 뉴데일리 2009-11-10
한총련의 김정일 충성 혈서 2009-11-08

공개된 문건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그가 만주군관학교 제2기 시험에 응시한 것은 1939년 10월이며, 이듬해 1월 4일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으므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그 전 기수 전형에 지원한 서류로 보기에는 날짜가 너무 늦다. 혈서를 보낸 것이 사실이라 해도 당시 전시 상황에서 혈서를 쓰는 일은 자주 있던 일이고, 혈서의 내용도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정도라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겠다는 말로 볼 수도 없다. 만주군관학교 지원 서류에 든 것이니 일본 천황 아닌 만주국에 봉사하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므로 이것이 그가 친일파인 결정적 증거라는 것은 넌센스다.

아래 글에 참고할만한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박정희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 때 혈서를 쓴 게 친일의 증거라고 문제라고 세상에 알려졌다.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한 1940년의 1년 전인 1939년 일본육사나 사병에 지원한 조선인 중 39명이 혈서를 썼고, 1940년에는 혈서제출 지원자가 무려 168명에 이르렀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의 입학자격 연령은 19세세 이하로 제한돼있었다. 입학지원서를 제출할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23세였다. 입학대상자의 자격을 넘은 나이였다. 입학원서와 함께 혈서를 제출한 것은 그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중략)

조선총독부도 당시 일본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조선 청년들이 제출하는 혈서는 일종의 유행이었지 반드시 일본에 대한 충성심의 표시는 아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일본육사는 야망을 가진 조선 청년들의 마음을 끌었던 대상이었다. 19세기 세계 최강을 자랑했던 프러시아육군을 모델로 삼아 1885년에 개교된 일본육사는 당시 조선 청년들이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진 군사교육기관이었다. (중략)

일본 육군당국은 조선 청년들의 일본육사 지원은 일본에 충성하기 보다는 일본의 선진 무력을 배워 장래 조선독립을 위한 혁명봉기 때 기여하려는 성향이 높았던 것으로 분석했다. 이같은 판단은 중국인에 대해서는 일본육사입학이 1기생(1890년 7월 졸업)부터 문호가 개방됐지만 조선인에 대해서는 11기부터 입학이 허용된 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일본내무성이 주요 정부시책을 밝히는 특고월보는 "조선인 입학허용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을 붙였다. 우선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평범한 가정출신에 민족주의나 공산주의운동에 관여하지 않으며 사상이 건전한 우수 인재에 촛점을 맞추었다. 이 기준에 적합한 대상자를 선발하여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졸업 후 가능한 한 사단사령부 등 상급부대의 작전이나 인사 등 주요부서에 배치하는 특혜를 주어 이들을 친일 세력으로 이용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의 이러한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몇 명을 제외하면 조선인 장교는 모두 종전 후 바로 귀국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만주군 초급 장교를 거치면서 배운 선진문명에 대한 식견이 후일 한국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게된 것이다. 그의 이런 경력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한국의 경제적 번영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일성처럼 중학 중퇴학력으로 항일투쟁한답시고 만주산야를 누비며 비적질이나 일삼은 경력으로는 소련군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주권을 강탈해 지금의 북한과 같이 나라를 자기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어 전국민을 노예로 부리게 된다.

박정희가 일본군도 아닌 만주군 초급장교를 1년 남짓 했다고 거물 민족반역자라 한다면 일본 육사 졸업하고 8년간 일본군에 근무한 김경천(金擎天, 1888 ~ 1942)[29]이나 5년간 일본군에 복무한 지청천(池靑天, 1888 ~ 1957)[30]은 친일을 해도 박정희보다 8배 또는 5배나 많이 했는데 독립운동의 영웅이 될 수 있는가? 해방이 되지 않았더라면 박정희도 후에 이들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았으리라는 절대적인 근거라도 있는가? 김경천이나 지청천이 일본군 경험을 독립운동에 활용했다면 박정희는 만주군 경험을 해방 후 조국 근대화에 활용하여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에 오래 복무했어도 해방이 되지 않아 나중에 독립운동을 좀 했으면 민족 영웅이고, 만주군 초급장교 1년여만에 해방이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할 기회가 없어진 사람은 대신 해방 조국에 제아무리 크게 공헌해도 민족반역자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은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더구나 김경천과 지청천은 1888년생으로 조선에서 태어나 장성한 22세에 나라를 잃어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렬할 수 있었겠지만, 박정희는 1917년생으로 이미 일본 땅이 된 곳에서 태어나 일제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선이라는 나라에는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일본인들의 눈치를 보며 고달프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 시절을 살아본 적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후세 사람들이 자신은 편안하게 살면서 자기들 멋대로 세운 기준으로 "너는 목숨걸고 일제와 싸우지 않았으니 친일파요 민족 반역자"라고 단죄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고 야만적 행위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조상도 일제와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기에 자신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해방후 70년이 지나서도 친일파 논쟁이 갈수록 거세지는 것은 그 동기가 정치적인 목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친일파 타령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한다는 핑계로 비적질을 한 기록이 허다하게 나오는 김일성은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국가를 사유화해 일족이 세습하며 전국민을 노예로 부릴 권리를 자동적으로 가지는 것도 당연시 되고, 남침전쟁으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조만식 선생등 반공적인 독립운동가나 연안파, 남로당파등 공산주의 계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숙청, 처형하고, 남한의 수많은 항일지사들을 전쟁중에 납북해 중도에 작고하거나 부자유하게 살다 세상을 떠나도록한 것도 문제삼아서는 안되게 된다. 해방후 김일성이 죽인 항일지사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순국한 분들보다 더 많을 것이다.

지도자가 된 사람은 지도자로서 한 일로 평가해야지 해방 전에 얼마나 항일투쟁을 많이 했나로 평가하려들면 백두혈통이라 자칭하는 김일성같은 천하에 둘도 없는 항일팔이 사기꾼 일족의 노예가 된다. 정작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이 실제 독립에는 별로 기여한 바가 없는데도 항일을 지상의 가치로 삼다보니 김일성같은 항일팔이 사기꾼이 득세할 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박정희가 후일 대통령이 되어 한국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일제시대에 무엇을 했는지 관심가지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고작 만주군 초급장교 1년 경력자를 거물 친일파로 여기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산 적도 없는 후세 사람들이 그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순전히 그의 대통령 재임 중의 업적을 깎아내려야만 할 필요성이 있는 집단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도자 박정희 덕택에 세계 최빈국 수준의 가난을 탈피하고 오늘날 자신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할 줄 모르고 그의 일제시대 행적만 거론하며 민족반역자로 만들고, 남침전쟁을 일으켜 일제보다 몇 배나 많은 동족을 살상하고 전국을 잿더미로 만든 김일성에게는 전쟁 책임은 묻지도 않고, 항일팔이 사기꾼을 민족의 태양이라며 받들어 모시는 정신병자들과 다름없다. 항일지상주의는 일제시대에 항일투쟁을 하기만 했으면 해방 후 권력을 잡고 무슨 짓을 했든 문제삼지 말아야 하고, 만주군 출신이면 지도자로서 무슨 훌륭한 업적이 있어도 민족반역자라는 황당한 결론으로 귀결된다.

한국인들 자력이 아닌 남의 나라 힘으로 해방을 맞았으면, 해방 후 지도자는 해방 전에 무얼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국민들이 자유롭게 잘 사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가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면?

일제시대 사람들은 무조건 목숨걸고 독립운동을 했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박정희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질 친일파이다. 그러나 설사 그가 만주군관학교에 가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 들어 운좋게 몇 사람의 일본 군경을 죽일 수 있었다고해도 그 때문에 해방을 단 1초도 앞당기지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대신 선진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실력을 쌓을 기회도 없어져 해방 후에는 그냥 평범한 인생을 보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의 전국민이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풍요를 누릴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도 자명하다. 그가 만주군관학교를 간 것과 독립운동을 한 것 중 어느 쪽이 국가와 민족에 더 도움이 되었는지는 논란할 필요조차 없다.

항일투쟁, 독립운동 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친일파 타령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사의 다각적인 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준들 이해할 능력은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사의 진정한 교훈

독립운동사의 진정한 교훈이 있다면 한번 나라를 잃고 나면 무수한 희생을 치러가며 독립운동을 해 봐야 자력으로 나라를 되찾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일단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라도 나라를 되찾았으면 누가 독립운동을 더 많이 했느냐, 누가 친일파냐 아니냐로 다투는 것보다 몇백배 더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절대로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력이 일본을 어느 정도라도 따라잡는 일에 누구보다 더 크게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이다. 이런 그를 일제시대 만주군 소위 경력 1년을 들어 꼭 거물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가? 그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받은 교육과 만주군에서의 경험이 한국의 경제를 일으키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일제시대를 산 모든 사람들의 과거사를 하나하나 다 뒤져내어 친일 시비를 가리고자 하면 김구신익희가 말한대로 "당시 국내에 있은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는 결론 밖에 더 나오겠는가? 그게 과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길이겠는가? 수십년에 걸쳐 수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일제시대를 산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행적을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친일로 보이는 행적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감옥으로 보내거나 처형하고 나면 민족정기가 벌떡 일어서고 저절로 모든 사람이 잘 사는 부강한 나라가 만들어지기라도 하는가? 뒷조사를 담당할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친일 행적과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과거 반민특위의 조사관, 재판관들 중에는 과연 친일에 연루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겠는가? 그렇게 모든 사람의 뒷조사를 하는 노력을 나라를 일으키는데 쏟으면 안 되는가?

유신헌법 공부해서 사법고시 합격한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 앞잡이

노무현은 1975년, 문재인, 박원순은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유신헌법은 1980년 말에 5공 헌법으로 개정되었으므로 세 사람 다 출세를 위해 친일파 민족반역자(?)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제정한 유신헌법을 달달 외우며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유신 앞잡이가 맞다. 노무현은 유신 판사였기도 하다. 누구를 친일파라 탓하는가?

司法試驗(사법시험) 百(백)41명 합격 최고득점 趙載淵(조재연)씨┄女子(여자)도 3명 1980.06.05 경향신문 7면
司法試験(사법시험) 2次(차) 합격 최고得点 柳聖秀(득점 유성수)군 1975.03.27 매일경제 7면

남로당 논란

박정희/남로당 논란문서 참고

김지태와 정수장학회 논란

김지태(金智泰, 1908~1982)는 5.16이후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려 1차 고초를 당하고, 곧이어 농지개혁법 위반, 탈세, 외환관리법 위반 등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한홍구 著 『장물 바구니』(2012)에 따르면, 이 같은 죄목들은 군사정부에 협력하지 않은 죄(거사자금 모금 거절 등)로 중앙정보부가 뒤집어씌운 날조로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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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지태는 군사정부가 들어서기 이전 1958년부터 부정축재 혐의로 여러차례 사정당국의 조사를 받은 바 있고, 벌금을 납부한 바 있다는 사실을 한홍구는 무시하고 있다. .

그가 정수장학회에 강탈당한 것으로 알려진 땅 10만여평은 사실 경작 농민들에게 쌀 2말씩 주고 헐값에 사들여 여럿의 명의로 허위 자작농지증명서를 발급받아 소유한 불법토지인데다,이미 두달전에 국방부에 자진 헌납한 것이라, 국방부 소유로 넘어간 것이고, 부산일보는 자본잠식이 무려 980%나 되는 깡통기업이었다. 사실상 김지태가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는 재산은 실체가 없는 셈이다. .

한홍구는 앞의 저서에서 당시 김지태가 강탈당한 재산이 수백억대, 지금으로 치자면 10조원에 달하는 재산이었다고 주장하나, 현재 MBC(서울) 자산이 2조원대에 불과한데, 무슨 개솔이를 하는지 모르겠다. .

박근혜가 실각하고, 박정희 신드롬이 다시 재현될 가능성이 상당기간 희박한 와중에, 정수장학회 떡밥이 다시 세간에 논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늘 그렇듯이 그들에게 역사는 선동의 수단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

정수장학회가 박정희 사후에 전두환이 박정희의 正과 육영수의 修를 따와 개칭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당시 1974년 이후 7년간 민정비서관을 역임한 이기창에 따르면, 정수(正修)는 중국 고전인 대학(大學)의 7장에 나오는 정심수기(正心修己)편의 약칭이다. 정수장학회를 박정희 개인재산이나 사적 소유의 측면을 의도적으로 부풀리기 위한 소설을 쓴 셈이다.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비서실장 재직 시절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등록된 김지태씨를 명단에서 빼줘
“문재인-노무현, 1987년 친일파 변론 맡아 승소했다" 뉴데일리 2019.03.15
곽상도 의원, 동양척식회사 관련 소송 공개 "서류위조까지 드러나… 누가 친일파인가?”

조작된 일본군 박정희 사진

일본군복을 입은 박정희 사진이라면서 인터넷에 올라있는 사진들은 악의적으로 조작된 것이 많고, 그가 친일파로 보이게 하려는 시각적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평가

경제성장

195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재임하던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빈국에서 벗어나 중진국으로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의 성장률은 세계 최고였다. 박정희 재임 기간에서야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춘궁기는 자취를 감추었고, 대한민국의 경제가 북한을 뛰어 넘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박정희 집권기에 이룩한 경제성장의 신화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당시 다수의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으로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을 딛고 일어선 서독의 라인강의 기적에 뒤이은 두 번째 기적이었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은 라인강의 기적과도 비교를 불허한다. 세계 최고의 기술과 축적된 인적자본이 그대로 있었던 독일과 달리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일성의 야욕으로 일어난 6.25는 약간의 자본마저도 없애버렸으며 전쟁 직후 대한민국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신화인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

시간 관계상 이 정도만 적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내용은 사실상 국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더불어 이 위키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므로 부족한 부분은 꼭 추가, 수정해주시길 바랍니다.

일본육사 동기 호리구치 도쿠지(堀口篤之)의 평가

나를 보며 노인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박정희 같은 인물을 만난 한국은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당시 박정희 장군이 혁명에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의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가 비명에 쓰러지기 전 이런저런 얘기가 있었지만 난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2년 간의 짧은 교유(交遊)였지만 내 일생에서 그와의 만남이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일본과 맺은 국교정상화는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한국으로선 반일감정의 불길이 뜨겁던 시기였잖아요."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위대한 지도자의 참 모습은 눈 앞의 인기영합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혜안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에 진력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의 미래를 내다본 결단이 오늘의 한국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됐다고 봅니다. 5.16혁명 후 최고회의의장 때였던가 일본에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연락이 닿은 육사동기생 2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그와 만찬을 즐기며 회포를 푼적이 있었습니다. 감개무량했지요. 그 때 모인 옛 친구들에게 박정희는‘한국이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으니 앞으로 여러 분들이 힘을 보태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합디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회담에서 일본의 대 한국 보상액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였다. 이 금액은 그해 일본 외환보유액 18억달러의 28퍼센트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세계 석학, 지도자들의 평가

키신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러시아가 동시에 하려다 붕괴되지 않았나.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다. 19-20세기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나라를 구한 혁명이 5개다. 일본의 명치유신, 터키의 게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한국의 박정희다. 이중 경제기적을 이룩한 혁명은 오직 5.16이다.

엘빈 토플러(제3의 물결):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는 그 나라 수준에 맞게 제한돼야 한다. 이를 놓고 독재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 모델은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다.

폴 케네디(강대국의 흥망): 박정희는 세계 최빈국의 나라를 불과 20년만에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키웠다.

푸틴: 박정희에 관한 책은 다 구해 달라. 그는 나의 롤 모델이다.

아이젠하워: 박정희가 있었기에 한국은 공산주의 의 마지노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리콴유: 박대통령이 눈앞의 이익만 좇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말레지아의 마하티르 전 총리와 캄보디아 훈센총리도 박대통령 추종자로 유명하다.

덩샤오핑: 박정희는 나의 멘토다.

후진타오: 나는 새마을 운동을 공부한 사람이다.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

김정일: 옛날에는 유신이다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새마을운동 덕에 경제가 성장한 건 사실 아니냐. 서울은 도쿄보다 더 훌륭한 도시로 조선의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저서

참모들

박정희 시대 자료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연구 논문 및 저서

“중화학공업 육성과 유신은 양날의 칼(double-edged sword)” 조선일보 2005. 10. 28

전기 및 관련 서적

선우연(鮮于煉) 역, 『박정희의 시대: 한국 위로부터의 혁명 18년』 서울 : 월드콤푸그래픽, 1995.

참고 자료

이른바 '친일문제'를 둘러싼 쟁점과 분석
만주국과 이승만-박정희-김일성
그가 이룩한 대한민국을 누가 저주하는가?

외부 링크

영남대학교 새마을국제개발학과

함께 보기

각주

  1.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박영옥씨 별세 - 중앙일보 2015. 2. 21
  2. 현재의 구미초등학교 (경북) : 위키백과
  3. 대구사범 입학성적표
  4. 4.0 4.1 4.2 박정희考...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씨 이야기 진명행의 근현대사 인물평론
  5. 5.0 5.1 박정희考...대구사범학교 시절 성적표 진명행의 근현대사 인물평론
  6.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부산역사문화대전
  7. 문경초등학교 위키백과
  8. 직원록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 9.0 9.1 이기건(李奇建), 내가 아는 北傀政權 裏面史 : 金日成歸順 特別工作隊 이야기 時事. 58 (1968.7), pp.92-99, 內外問題硏究所
  10. 10.0 10.1 [실록 박정희시대] 11.만주시절 親日논란 중앙일보 1997.08.18 종합 5면
  11. 국민교재(18) 박정희의 진실 10문10답 : 박정희에 대한 오해와 해명 조갑제닷컴 2005-11-16
  12. 12.0 12.1 박정희考③...간도특설대 마쯔모도는 누구인가? 진명행의 근현대사 인물평론
  13. 강덕 (만주국) 위키백과 / 대동 (만주국) 위키백과
  14. [한장의사진] 만주군 '예비소위' 박정희 중앙일보 1997.08.18 종합 5면
  15. 참고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2992#dvOpinion 물론 이 링크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참고만 하자.
  16. 단,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이유는 이데올로기 때문보다는 형 박상희의 죽음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김점곤 평화연구원장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남로당에서 지명한 요인물이였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또한 남로당에서의 활동도 미약했다고 한다.
  17.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7
  18.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7
  19. 앞의 기사
  20. 앞의 기사
  21.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itemId=tcct&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tcct_1963_09_24_0010
  22.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itemId=tcct&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levelId=tcct_1963_10_11_0020
  23.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62508103451398
  24.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101100067&ctcd=N
  25.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811259425Y
  26.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811259425Y
  27. <金相基의 美國통신>나는 왜 朴正熙를 존경하게 되었는가? (월간조선, 1991.05.01) pp. 98-103.
  28. 류석춘, “만주 경험과 남·북한의 발전 경로” : 자유경제포럼 주최 토론회 발제문 리버티 코리아 포스트 2019.06.01
  29. 김경천 (1888년) 위키백과
  30. 지청천 위키백과
  31. 조시철 목사, 박정희 일본군 사진 조작 증거 (6분 44초부터 설명 나옴.)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대수 성명 재임
제1공화국
1 이승만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2 이승만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3 이승만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7일
제2공화국
4 윤보선 1960년 8월 12일 ~ 1961년 5월 16일
제3공화국
4 윤보선 1961년 5월 16일 ~ 1962년 3월 23일
5 박정희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6 박정희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7 박정희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제4공화국
8 박정희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9 박정희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10 최규하 1979년 12월 6일 ~ 1980년 8월 16일
11 전두환 1980년 8월 27일 ~ 1981년 2월 24일
제5공화국
12 전두환 1981년 2월 25일 ~ 1988년 2월 24일
제6공화국
13 노태우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14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15 김대중 1998년 2월 25일 ~ 2003년 2월 24일
16 노무현 2003년 2월 25일 ~ 2004년 3월 12일
2004년 5월 14일 ~ 2008년 2월 24일
17 이명박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
18 박근혜 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
19 문재인 2017년 5월 10일 ~ 2022년 5월 9일
20 윤석열 2022년 5월 10일 ~ 2027년 5월 9일 [1]
  1.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