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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게되는 것은 [[브루스 커밍스|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후부터이다.<ref>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Vol.1 pp.224~225.<br>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1986)  하권 pp.34~35. (원저 Vol.1을 상, 하 2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간)</ref>
* 이 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게되는 것은 [[브루스 커밍스|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후부터이다.<ref>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Vol.1 pp.224~225.<br>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1986)  하권 pp.34~35. (원저 Vol.1을 상, 하 2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간)</ref>
{{인용문|“우익이 좌익을 매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또 다른 사건은 1월 5일 박헌영이 외신기자들과의 면담에서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인 존스톤에게 신탁통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었다. 존스톤은 박헌영이 “조선에 대한 소련의 일개국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5년 후 조선은 소련의 일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기사화했다. 이러한 내용이 보도되자 한민당은 즉시 존스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박헌영을 타도하자”라는 팸플릿을 배포하였다. <br>이 사건으로 인해 박헌영의 명성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는 좌익들 가운데서도 그는 고질적인 친소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월초부터 우익집단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을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나라를 팔아먹는 소련의 꼭두각시들’로 매도했다는 점이다.”}}
{{인용문|“우익이 좌익을 매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또 다른 사건은 1월 5일 박헌영이 외신기자들과의 면담에서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인 죤스톤에게 신탁통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었다. 죤스톤은 박헌영이 “조선에 대한 소련의 일개국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5년 후 조선은 소련의 일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기사화했다. 이러한 내용이 보도되자 한민당은 즉시 죤스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박헌영을 타도하자”라는 팸플릿을 배포하였다.<br>
그런데 이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다른 미국인 기자들은, 박헌영은 단지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 a Korea run by Koreans for Koreans 을 원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한국의 신문들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했다. 당시의 미군정 보고서 (G-2 Report)에도 박헌영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으며 그의 말은 “완전히 왜곡되어 보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죤스톤의 보도내용이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그에게 보도내용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br>
이 사건으로 인해 박헌영의 명성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는 좌익들 가운데서도 그는 고질적인 친소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월초부터 우익집단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을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나라를 팔아먹는 소련의 꼭두각시들’로 매도했다는 점이다.”}}


* [https://ko.wikipedia.org/wiki/%EB%B0%A9%EC%84%A0%EC%A3%BC 방선주(方善柱, 1933~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1086284 「美國 第24軍 G-2 軍史室 資料 解題」] 『아시아文化』 3호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중 pp. 184~188 의 『A. Johnston 記者의 朴憲永 發言 ‘誤引’ 事件』 : G-2 는 한국에 진주한 미 24군의 정보참모부를 말함.
* [https://ko.wikipedia.org/wiki/%EB%B0%A9%EC%84%A0%EC%A3%BC 방선주(方善柱, 1933~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1086284 「美國 第24軍 G-2 軍史室 資料 解題」] 『아시아文化』 3호 (翰林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중 pp. 184~188 의 『A. Johnston 記者의 朴憲永 發言 ‘誤引’ 事件』 : G-2 는 한국에 진주한 미 24군의 정보참모부를 말함.

2020년 7월 1일 (수) 17:29 판

박헌영 외신 인터뷰 사건이란 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이 1946년 1월 5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합의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국내 언론 보도와는 달리 뒤늦게 전해진 외신보도는 그가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하여 이 때문에 벌어진 논란을 말한다.

사건의 개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永, 1900 ~ 1956)은 1946년 1월 5일 내외신 기자 회견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 국내 신문에 실린 기사에는 박헌영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며 반탁진영을 비난했다는 발언 요지가 실렸다.[1][2][3][4][5] 좌파 진영은 연말의 반탁 입장에서[6] 새해 벽두에 찬탁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큰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7][8]. 그런데, 1월 15일 청취된 샌프란시스코(桑港) 방송[9]에서 뉴욕타임즈(NYT)에 보도된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 1910~1986)[10] 기자의 서울발 기사를 인용하여 "박헌영이 인터뷰에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나아가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는 보도를 하여, 이에 격분한 사람들과 정당, 단체들이 박헌영 측에 거세게 항의하고 비난하는 파문이 일어났다.[11][12]

이에 1월 17일 박헌영조선공산당은 기자회견에서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며, 명백한 오보이고 사실무근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13][14][15],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기자들도 박헌영이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16] 그래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항의와 비난은 그치지 않았으므로, 조선공산당은 1월 26일에 책임비서 박헌영의 명의로 미군정청에 문제의 기사를 쓴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를 추방해달라는 공문서를 접수시킨다.

사태를 주시하면서도 민간의 일이라 직접 개입하지는 않고 있던 군정청은 불가피하게 진상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그 결과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2월 18일 발표한다. 공식적으로는 사건은 이로서 종결되었지만, 조선공산당은 한 차례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17], 한민당 등은 박헌영의 매국적 발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며 공격하는 등[18] 한동안 여진이 계속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일들에 묻히게 된다. 이 사건은 남한에서 박헌영의 입지를 좁히고,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그런데 근래의 대다수 연구자들은 찾아낸 일부의 당시 신문 기사와 미군정청 문서를 토대로 존스턴의 기사는 오보이며, 미군정이 오보인 줄 알면서도 은폐하고 조작된 조사 결과를 발표하여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또 뉴욕 타임즈의 문제의 기사를 찾는데 실패하고는 그 기사가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고 단정하고,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를 조작해서 있는 것처럼 인용하여 보도했으므로 여기에는 미군정청과 존스턴 기자의 음모가 개입되었다고 우긴다. 학계와 일반에는 이것이 널리 사실로 인정되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에 "박헌영 존스턴"으로 검색해 보면 온통 이런 식의 주장만 나오고, 이에 대한 반박 글은 거의 전무하다.

그러나 새로 발굴된 당시의 주요 문헌들을 보면 이런 주장은 성급한 판단으로 잘못된 것이고, 당시 미군정청의 최종 조사 발표가 맞다는 것이 재차 확인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대로 미군정청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하여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새로운 자료로 밝혀진 사건의 진상

새로 발굴된 자료들까지 검토하여 사건의 진상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거론된 모든 자료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의 원문 이미지임.)
  • 1946년 1월 5일의 박헌영 내외신 기자 회견은 내신과 외신 구분하여 따로 열렸으며, 11시에 시작한 외신 회견이 끝나고 나서 내신 회견은 따로 진행하였다.[1][2][19] 외신회견에서는 박헌영 본인도 영어로 문답하였다. 따라서 국내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성명 및 이를 근거로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판단한 미군정청 일부 인사들의 기록이 외신 보도가 실제 오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들도 내외신 회견이 동시에 열린 줄로 잘못 알고 대다수 국내 신문 기사와 다른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고 오판한 것이지, 조사 이전에 실제의 진상을 알 방법은 없었다. 2월 18일 미군정청의 공식적인 조사 발표 후에는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기록을 남긴 군정청 인사는 아무도 없다.
후대의 연구자들도 박헌영의 내신과 외신 기자회견이 같이 열린 줄로 잘못 알고 국내 신문 보도와 다른 존스턴의 뉴욕타임즈 기사가 오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국내 신문기사는 존스턴의 기사가 오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UP 통신도 뉴욕타임즈와 같은 내용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동아일보 1946-01-17 1면 "유·피가 傳(전)한 問題 (문제)의 電文 (전문) 朴憲永氏談 要旨(박헌영씨담 요지)"
『朝鮮共産黨秘書 朴憲永 (조선공산당비서 박헌영)은 新聞記者 會談(신문기자 회담)에서 알·하-지 (중장)은 眞實(진실)한 民主主義 原則(민주주의 원칙)에 依(의)한 團體(단체)는 彈壓(탄압)하고, 反動團體(반동단체)에 對(대)하야는 寬大(관대)한 態度(태도)를 取(취)하고 있다고 말하는 同時(동시)에 民主主義的 獨立朝鮮(민주주의적 독립조선)은 二十年內(이십년내)에 소聯(소련)에 包含(포함)될 것을 主張(주장)하얏다. 그는 또 朝鮮(조선)의 소聯單獨信託統治(소련단독신탁통치)를 贊成(찬성) 하나 朝鮮(조선) 사람 一般(일반)이 卽時(즉시) 소聯聯邦(연연방)이 되는 것을 願(원)치 안는다고 말하였다.』 조선일보, 공업신문도 동일한 보도를 함.[20][21]
  • 모든 연구자들이 존스턴 기자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는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946년 1월 10일자 기사로 실렸다.[22][23] 존스턴이 최초에 송고한 기사는 전송에 문제가 발생하여 실리지 못했으나, 인터뷰 이튿날 박헌영이 미군정청 정치고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로부터 존스턴 기자가 문제의 기사를 송고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19][24],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1월 8일 존스턴을 찾아가 기사를 정정해 달라고 요구한다. 존스턴이 거절하자 박헌영은 재인터뷰 형식으로 지난 발언을 수정하는 발언을 하고, 존스턴이 이를 받아들여 다시 송고한 기사가 1월 10일 뉴욕타임즈에 실렸는데, 여기에는 수정 발언과 함께 박헌영이 최초에 한 문제의 발언도 같이 나와 있다.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NYT 기사를 조작하여 있는 것처럼 방송했다는 음모론의 근간이 무너짐.)
  • 뉴욕타임즈 기사를 인용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단파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VOA)" 한국어 방송이며, 국내에서는 단파 라디오가 있어야 직접 수신이 가능하나, 서울중앙방송국이 이를 국내에 중계하여 많은 사람들이 청취한 것이다.[25] 이는 당시 매일 해 오던 프로그램 진행 방식이었으므로[26] 여기에 미군정의 음모가 개입되었을 여지는 없다. 미군정청이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직접 청취하고 국내에 널리 알리려고 보도자료를 만들어 돌렸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27] 미군정청 사람들이 한국어를 한국인들보다 더 잘 알아서 서울중앙방송이 중계한 한국어 방송을 못 알아들었을까봐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배포했다는 말인가?
  •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9], UP 통신이 타전한 기사[28][20][21], 군정청 홍보장교(PRO) Tucker 대위가 당시에 기록한 메모[29] 등에 나오는 박헌영의 외신회견 발언은 서로 부합하며, 미군정청의 최종 조사 발표문[30][31]에 나오는 것과도 일치한다. 특히 UP 통신이 존스턴의 뉴욕타임즈 기사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고, 당시 국내 신문에 실렸음에도 불구하고, 존스턴의 기사만 문제가 되고 아무도 UP 기사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연구자들도 같은 내용의 UP 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면서, 존스턴과 미군정의 음모론만 펼치고 있다.
  • 박헌영측은 그가 외신회견에서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외신 기자들의 기사나 증언이 아니라 관계없는 국내 신문 기사와 기자들의 성명을 제시하여 사람들을 속이려 하였다.[32][13][14][33][34]
Johnston 기자가 쓴 1946.01.10일자 New York Times 박헌영 인터뷰 기사.
(참고 : 존스턴의 1946.01.10일자 뉴욕타임즈 기사. Korean Open Letter 1945-1947)
  • 2월 18일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가 있은지 불과 19일 후인 3월 9일 오전 11시에 박헌영이 공동 의장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의장단 7명 (의장 3명, 부의장 4명)이 New York Times의 Johnston, UP 의 호이트(Palmer Hoyt, 1923 ~ 2005) 등 외신 기자와 회견을 한다. 박헌영은 자신이 추방을 요구했던 존스턴 기자와 다시 회견을 한 것으로 보아 군정청 발표에 승복한 것으로 보인다.[35][36] 또 그는 3월 26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UP의 호이트 기자가 3월 22일 서면으로 제출한 질문에 대해 응답하였다.[37][38] 박헌영이 문제의 기자들과 계속 회견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이 썼던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작 기사를 쓰는 사람들과 계속 인터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존스턴의 1946년 1월 10일자 뉴욕타임즈 기사

지금까지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찾는데 실패하여 뉴욕타임즈에 실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존스턴의 박헌영 인터뷰 기사는 실제로는 실렸다. 다만 최초에 송고한 기사는 전송에 문제가 있어 실리지 못했고, 1월 8일 박헌영이 존스턴을 찾아가서 기사 취소를 요구하다 거절 당하고, 지난 인터뷰 발언을 수정하여 다시 한 발언이 1월 10일자 기사로 실렸다. 기사에는 수정 발언 이전 최초 기자회견 당시의 실제 발언 내용도 함께 나온다. 문제의 1월 15일자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이 기사를 인용한 것이며, 없는 뉴욕타임즈 기사를 조작해서 방송한 것이 아니다.

  •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 원문 이미지 보기
USAMGIK: Miscellaneous Letters on US Policy; Indexed: Press Clippings of Korea p.216 : (미군정청의 미국 신문기사 스크랩. 전체273개 스크랩중 216번째임)
Richard J. H. Johnston, "U.S. Chief in Korea Receives Note From Russian Zone's Commander", January 10, 1946, Page 1

이 기사는 뉴욕타임즈 Archives 에서도 검색된다.

오른쪽의 기사 이미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 있는 것이고, 원문은 아래와 같다.

존스턴의 1946.01.10일자 뉴욕타임즈 기사

U.S. Chief in Korea Receives Note From Russian Zone's Commander

By Richard J. H. Johnston

 By Wireless to The New York Times.
 Seoul, Korea, Jan. 8 (Delayed)--Carrying a communication from Lieut. Gen. Chritiakoff commander of the Soviet forces of occupation in Korea, to Lieut. Gen.Hodge, commander of United States forces here,........

Communist Revises Views

 Expressing fear that views voiced two days ago in a press conference might be misunderstood in the United States, Pak Heun Yung,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here, issued this morning a "restatement of his attitute" on the questions of a trusteeship for Korea and possibility of the inclusion of Korea in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In a conversation with me this morning Mr.Pak demanded that I "correct the impression." When I refused to do other than stand by the story written two days ago, Mr. Pak agreed that he had not been misquoted, as he originally contended, but that "language difficulties may have been responsible for the misinterpretation."  (The story referred to was incomplete because of transmission difficulties and hence was not published.)
 Two days ago Mr.Pak said he had "no objections to a single-nation Soviet trusteeship for his country" and that "the inclusion, after ten or twenty years of democratic development, of Korea into the Soviet Union" was a possibility.

New Version of Opinions

 Mr. Pak, whose command of English is unusually good and who previously had never failed to get his ideas across clearly to the press, said he wanted to reword his opinions as follows :
 "I cannot speak about the question of a one-nation trusteeship. It is not decided upon by the United Nations."  
 "About the incorporation of Korea into the USSR, at no time can I speak about this present or future."
 "The question of socialism or sovietism in Korea cannot be discussed now."
 Through mysterious and devious sources, Mr. Pak learned parts of my story of two days ago, shortly after it was filed here. Mr.Pak was unable to explain satisfactorily how he obtained the information.
New York Times JANUARY 10, 1946


아래는 역시 Johnston 기자가 쓴 1946년 1월 18일자 뉴욕타임즈 기사의 박헌영 관련 부분이다.[39] “박헌영은 ‘어제’ 미국 언론과 회견했고, 소련 일국의 조선 신탁 통치에 대하여 아무런 반대가 없다고 말했다. 박헌영은 이 발언을 좌익 언론에 해명하면서 그의 발언이 와전되었고, 그는 언어 장벽(language difficulties)의 희생자라고 말하였다.”는 내용이다.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Red Leader Called Traitor on Trusteeship--U.S.-Soviet Talks Deeply Secret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January 18, 1946, Page 8)

.......

In the latest break the parties on the Right have refused to attend further parleys and the Rightists continue to hurl the accusation of "traitor” at Pak Huenyung, Secretary General of the Communist party. Yesterday in a conference with the American press, Mr. Pak expressed himself as “having no objection to a single nation Soviet trusteeship" for Korea. In his defense Mr. Pak is quoted in the Leftist press as saying that he was misunderstood and that he was the victim of "language difficulties."


결론

존스턴의 기사는 뉴욕타임즈에 실제로 보도되었으며 조작하지도 않았고, UP 통신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으며,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없는 기사를 있다고 조작 보도한 것이 아니다. 미군정청이 이를 공산당 탄압에 악용할 음모를 꾸민 적도 없고, 하지 장군이 진상조사 발표문[31]을 조작하라고 지시한 적도 없다. 박헌영은 외신회견에서 실제로 "소련 1개국만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20년 후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는 문제의 발언을 하였다.

코멘트

  • 박헌영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좌익들도 1945년말까지는 반탁을 주장하다가 새해 초에는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섰다. 박헌영은 1월 1일과 1월 3일 두 차례 연달아 미군정사령관 하지(Hodge) 중장을 만났는데, 1월 1일에는 반탁을 주장하다 1월 3일에는 찬탁으로 돌변해 있었다고 한다.[40] 하지는 좌익들이 새해 벽두에 일제히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데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런 일로 해서 공산당과 박헌영은 상대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듯하다.
  • 박헌영이 기자회견을 열었던 1월 5일 오전 11시에 서울 광화문에서는 12월 30일 암살 당한 송진우(宋鎭禹, 1890~1945)의 영결식이 있어[41] 우파 언론 기자들은 그쪽으로 가고, 박헌영의 회견에는 좌파 언론 기자만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회견 기사도 좌파 언론들이 주로 실었다. 이때문에 내신 회견에 참석했던 국내 기자들이 자신들은 참석하지도 않은 외신 회견 발언을 두고 모두 박헌영을 옹호하는 성명을 낸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평양에서는 소련군이 반탁 의사를 굽히지 않던 조만식을 친일파로 몰아 고려호텔에 연금하였다.
  • UP 통신이 타전한 박헌영 외신회견 기사는 국내에 좀 늦게 보도되었는데, 당시 UP와 계약한 국내통신사는 조선통신사로[42], 좌파 계열이라 좌파에 불리한 기사는 보류시키고 내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므로[43]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외신회견 참석자 중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기자 콘월(Robert Cornwall) 중사가 박헌영은 존스턴의 기사와 같은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면서 영자신문 Seoul Times 가 보도하였는데[44], 그는 미군정청 조사에서는 존스턴의 기사가 맞는 것으로 확인했다고 하여 엇갈리는 진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엇갈리는 그의 말은 무시하더라도 다른 UP 기사나 Tucker 대위의 메모, Massock 의 진술 등만으로도 NYT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오보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된다.
  • 버취(Leonard Bertsch) 중위가 공보국장 Newman 대령에게 1월 20일자 "Political Trend #17"에 존스턴의 기사가 정확한 것처럼 썼는데, 다음 호에서 이 기사가 잘못된 것이라고 고쳐써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뉴먼 대령이 그럴 필요없이 그냥 두라고 한 것을 들어[45] 미군정청이 기사가 조작이라고 밝히는 것을 거부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버취 중위는 기자회견 현장 참석자도 아니라서 정확한 진상을 아는 사람도 아닌데다, 존스턴의 기사가 국내 신문기사와 다른 것을 근거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기록이 작성된 날인 1월 26일에는 박헌영이 미군정청에 정식 공문으로 존스턴 기자를 추방해 달라고 요구하여[30][31]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가 불가피해졌다. 따라서 조사 후 결과를 발표하면 되므로 조사도 하기 전에 버취 중위가 과거 기사를 고쳐 쓰는 것이 무의미하게 되어 뉴먼 대령이 그대로 두라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논란이 일 것이 뻔한 문제의 발언을 박헌영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도 당시에 그것을 알았기에 국내 기자회견에서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고, 국내에 보도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외신회견에서만 문제의 발언을 하였다. 그는 당시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하는 상황에 있었으므로 지도자 결정권을 가진 소련에 대한 아부성 발언이 외신을 통해 소련에 알려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뉴욕타임즈 기사를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인용 보도하지 않았더라면 국내에는 문제의 발언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기자회견 며칠 후인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되어 공식적으로 지도자로 나선다. 이에 반발한 박헌영이 소련측에 집요하게 이의를 제기하여 1946년 7월 초 스탈린은 박헌영과 김일성 둘 다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지만, 김일성을 그대로 지도자로 선택하고, 박헌영에게는 격려의 말만 해 주었다.[46]
  • 박헌영은 문제의 외신회견 하루 전날인 1월 4일 두 미국인 기자와 회견하였는데, 오후 3~5시 사이에는 미국 공산당원과, 6시부터 한국을 방문 중인 Edgar Snow(1905~1972) 와 만났다.[47][48] 회견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Snow가 1월 6일 미군정 사람들과 만나 Johnston 기자의 기사에 대해 이야기한 기록을 보면 Snow와의 회견에서는 특별히 논란이 될만한 발언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49]
  • 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박헌영 폭탄이 터지던 날 공교롭게도 북한 소련군정 총지휘자인 스티코프와 수행원 13명이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 사항 이행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을 위해 0시 45분에 평양으로부터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하였다.[50] 스티코프가 도착한 불과 몇 시간 후인 7시 5분부터 문제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시작되었다. 1월 16일에 개막되었던 미소공동회담은 2월 5일 오후 5시 종료되고, 스티코프 등 소련대표 일행은 2월 7일 오전 2시 15분 특별열차로 서울을 출발,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서울에 23일간 체류함.)[51] 당시 박헌영도 스티코프를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박헌영은 수시로 각종 사안에 대해 스티코프에게 지침을 구하곤했다는 것이 스티코프 일기에 나온다.[52]
  • 박헌영이 발언할 때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미군정청 기록들도 꼬집고 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는데 박헌영은 입만열면 다른 사람들은 반동으로 몰고, 공산주의자들만 민주주의자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얄팍한 사탕발림이라고 하고 있다.[53][28] 해방 당시에도 공산주의식 용어혼란 전술이 만연해 있었고, 박헌영은 그런 방식을 가장 애용하는 선동가였다. 박헌영식의 논리라면 그가 추종하는 스탈린이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가 되고, 미국은 파시스트 반동국가가 되는 듯하다.

NYT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청의 음모로 몰아간 연구 사례

오늘날의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존스턴 기자의 뉴욕타임즈 기사를 찾아는데 실패하고는 뉴욕 타임즈에 그런 기사가 실린 적이 없다고 단정하고,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를 인용보도했으므로 미군정청과 존스턴 기자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한다.

박헌영의 외신 인터뷰 사건은 엉터리 학자들의 엉터리 연구의 백미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내놓는데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이자 노련한 정치인 박헌영이 그런 무모한 발언을 했을 리가 없으므로 극우 파쇼(?) 미군이 그를 탄압하기 위해 당연히 음모를 꾸몄을 것"이라는 그들 특유의 선입견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익이 좌익을 매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또 다른 사건은 1월 5일 박헌영이 외신기자들과의 면담에서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인 죤스톤에게 신탁통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었다. 죤스톤은 박헌영이 “조선에 대한 소련의 일개국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5년 후 조선은 소련의 일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기사화했다. 이러한 내용이 보도되자 한민당은 즉시 죤스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박헌영을 타도하자”라는 팸플릿을 배포하였다.

그런데 이 기자 회견에 참석했던 다른 미국인 기자들은, 박헌영은 단지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 a Korea run by Koreans for Koreans 을 원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한국의 신문들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했다. 당시의 미군정 보고서 (G-2 Report)에도 박헌영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으며 그의 말은 “완전히 왜곡되어 보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죤스톤의 보도내용이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그에게 보도내용을 취소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헌영의 명성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는 좌익들 가운데서도 그는 고질적인 친소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월초부터 우익집단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을 소련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나라를 팔아먹는 소련의 꼭두각시들’로 매도했다는 점이다.”
방선주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이 소장한 미군정청 문서들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에 이를 가장 많이 열람한 사람으로, 당시 미군정청 사람들이 존스턴 기자의 기사가 의심스럽다고 한 기록을 다수 찾아내고, 이를 토대로 음모론을 처음 제기하였다. 문제의 뉴욕타임즈 기사는 찾는데 실패하여 실린 적이 없다고 단정하고,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없는 기사를 인용한 것은 미군정의 음모가 개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속의 연구자들은 모두 이런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NARA의 미군정청 문서를 처음 발굴하고 국내에 소개한 공로는 있지만, 그의 역사 해석은 잘못된 경우가 다수 있다.


존스턴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없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고, 음모론으로 몰아감.
현대사 사료의 문제(서중석) > Ⅱ. 해방시기 사료의 문제①-국내자료(남한) 國史館論叢 第73輯 (국사편찬위원회, 1997) : 하지는 진상을 알고 있었는데도 박헌영이 말했다는 부분에 대한 존스턴의 보도가 정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성명서가 나오자 우익 신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 이는 아무 근거 없는 주장임.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그 정체가 매우 의심스럽다. 1945년 10월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신탁 통치 발언이 국내에 전달될 때에도, 통신 기사는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외신 기사는 대부분 샌프란시스코 발이었다.
서울대 교수라는 사람이 당시 한국에서 청취 가능한 "샌프란시스코 방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단파로 송출하는 VOA(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서울중앙방송이 수신하여 중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기초적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 (중심, 2003년 08월 05일) pp. 72~73에 정리해 놓은 이 사건의 경과
정용욱,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171~176.
정용욱, 1945년 말 19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미군정의 여론공작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2003년 봄호(통권 62호, 2003.2) pp. 287-322.


참고 자료


아래 주한미군사의 자료는 위 사건의 경과를 최종 정리한 기록이고, 당시 찬탁 반탁 운동이 진행되어가는 과정도 요약되어 나온다.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국제적 민주조선 수립, 통일전선은 4정당 교섭으로 : 공산당 朴憲永씨 내외기자단과 회견 자유신문 1946년 01월 0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2.0 2.1 國際路線順應해야 朝鮮獨立은 可能, , 朝共朴憲永氏, 外人記者團과 會見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06일 2면1단
  3. 朴憲永氏와 記者團 會見, 統一 急速 實現 可能, 莫府會議 決定 承認을 原則으로 共産黨에서 各黨과 交涉中 중앙신문[中央新聞] 1946년 01월 06일
  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5일 > 조공(朝共) 朴憲永, 당면문제에 대해 내외기자단회견 서울신문 1946년 01월 06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朴憲永氏 外國記者團과 會見 民主衆報 1946.01.07
  6.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조선공산당의 鄭泰植, 개인자격으로 탁치반대를 표명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7.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8.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9. 9.0 9.1 朝鮮(조선)을 蘇聯屬國(소련속국)으로, 桑港放送(상항방송)이 傳(전)하는 朝共 朴憲永氏 希望(조공 박헌영씨 희망) 동아일보 1946-01-16 1면
  10. 존스톤씨 25일 離韓 자유신문 1949년 10월 19일
  11. 朝共의 蘇聯託治希望說, 韓民黨에서 排擊决議 / 朝共사實否定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16일 1면 6단
  1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16일 > 우익계각단체긴급협의회, 조선공산당 배격 결의 전단 1946년 01월 16일
  13. 13.0 13.1 "유욕(뉴욕)紙 所報는 誤傳" 共産黨에서 記者團에 言明 : 조선일보 1946-01-18
  14. 14.0 14.1 민족적 지도자를 誣言하는 음모배 韓民黨幹部는 공개적으로 사과하라 - 필자가 취소하는 괴기사 사건의 진상에 대하야 성명함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朝鮮共産黨 中央委員會 宣傳部) 1946.01.18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5. Korean Nationalist Party spreads ill propaganda for Communist Party, even after writer spikes misunderstanding. : 박헌영 발언 논란에 대한 朝共의 반박 성명 (조선인민보 1946-01-18 기사 영역)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6.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81 (The Seoul Times), p.238 (조선인민보 기사 영역) :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17. 군정청 발표(軍政廳 發表)에 조공(朝共)서도 성명(聲明) : 조선일보 1946년 2월 20일 1면
  18. 朝共도 中共을 본 밧드라, 韓民黨 咸宣傳部長談 중앙신문 [中央新聞] 1946년 02월 20일
  19. 19.0 19.1 UN의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미국무부문서 5(대한민국사자료집) > 박헌영 발언관련 정보 (Information about Pak Hun Yung statement) 1948년 12월 2일 무초(Muccio) 초대 주한 미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 외신 회견은 한국 기자들과 분리해서 이루어짐.
  20. 20.0 20.1 UP 記者의 報道 조선일보 1946년 1월 17일자 1면 최하단 우측
  21. 21.0 21.1 蘇聯 一箇國의 托治 反對치 안는다, UP가 報導한 朴憲永氏談 / UP 記者의 報道 공업신문(工業新聞) 1946년 1월 18일
  22. Richard J. H. Johnston, "U.S. Chief in Korea Receives Note From Russian Zone's Commander", January 10, 1946, Page 1
  23. Communist leader favors Russian control over Korea Robert T. Oliver Papers / The Korean Open Letter: 1945-1947
  2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하지고문으로 베닝호프가 着任하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27일
  25. 朴憲永氏의 談話 問題化 중앙신문, 1946.01.17 1면 :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국내에 중계되는 과정이 나옴.
  26. 상항(桑港)으로부터 국어방송(國語放送) 중계(中繼) 1945-12-02 영남일보 2면
  27.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딱지는 달라도 수법은 의구하네 한겨레 21, 2002.01.30
  28. 28.0 28.1 유·피가 傳(전)한 問題(문제)의 電文(전문) 동아일보 1946-01-17 1면
  29. 朴憲永 失言 事件 絶對로 辯明 못할 實事 : 臨席하엿든 美將校談 대동신문 1946-01-23
  30. 30.0 30.1 Military Government Press Relaese, 18 February 1946 : Incl #1 to USAFIK G-2 Periodic Report #156 (19 February 1946).
  31. 31.0 31.1 31.2 美國記者(미국기자)와 朴憲永氏(박헌영씨)의 問答(문답) 正確 동아일보 1946-02-19 1면
  32. Korean Nationalist Party spreads ill propaganda for Communist Party, even after writer spikes misunderstanding. : 박헌영 발언 논란에 대한 朝共의 반박 성명 (조선인민보 1946-01-18 기사 영역)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33. 1946-02-20 조선인민보 (영역) :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항변. (국립중앙도서관 미군정청 문서)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235, p.239
  34. 군정청 발표(軍政廳 發表)에 조공(朝共)서도 성명(聲明) : 조선일보 1946년 2월 20일 1면
  35.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 1946년 03월 09일 > 민전 의장단, 외국인 기자단과 회견 조선일보 1946년 03월 09일
  36.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 民戰의장 제씨 외국기자와 문답 : 3월 9일 오전 11시 자유신문 1946년 03월 10일
  37. 南朝鮮에 黨員三萬餘, 共産黨 朴憲永氏 UP記者에 應酬 중앙신문 1946년 3월 28일
  38. UP記者 設問에 朴憲永氏의 答辯, 金日成氏大統領은 總意라면 支持한다 嶺南日報 1946.03.29
  39. Richard J. H. Johnston,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Red Leader Called Traitor on Trusteeship--U.S.-Soviet Talks Deeply Secret New York Times January 18, 1946, Page 8.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Robert T. Oliver Papers / The Korean Open Letter: 1945-1947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The Murphy Collection on International Communism, 1917-58, Entry Murphy Papers, Box 69 (1)
  40.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 25 Jan. 1946 CG : Commanding General / USAFIK : United States Armed(Army) Forces in Korea / CINCAFPAC : Commander-in-Chief, Army Forces of Pacific (미육군 태평양방면군 사령부)
  41. 最後(최후)로 靈柩(영구)에 一哭(일곡) 昨日 故宋先生 永訣式(작일 고송선생 영결식) 1946.01.06 동아일보 2면
  42. 조선통신사, 미 UP사와 통신계약 체결 중앙신문 1945년 12월 03일
  43. 우승규, 「나절로 만필」 (탐구당, 1978년) 212, 216, 220쪽 : 적색화한 「조선통신」
  44. American Correspondent Endorse Park's Statement of Deny 1946-01-18 「The Seoul Times」
  45. 존스턴 기자 기사의 진위와 관련하여 Bertsch 중위와 Newman 대령이 나눈 대화의 기록 : 1946-01-26
  46. 박헌영 / 김일성과 함께 스탈린 앞에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다 : 우남위키
  47.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85 : 1946년 1월 4일 박헌영이 두 미국기자와 인터뷰. 한명은 공산당원. 에드가 스노우는 저녁 6시부터
  48. “國際潮流를 把握하라”, 『亞細亞의 鬪爭』著者로 有名한 美人記者 에드가-스노-氏 “朝鮮現在” 視察次入京 신조선보 [新朝鮮報] 1946년 01월 06일 2면 1단
  49. 1946년 1월 6일자 「사관기장(史官記帳, Historical Journal)」의 뉴욕타임즈 박헌영 외신 인터뷰 기사 논란 관련 기록 Edgar Snow가 박헌영은 문제의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함.
  50. 美(미)·蘇共同委員會(소공동위원회) : 蘇聯代表昨日入京(소련대표작일입경) 軍政廳第一會議室(군정청제일회의실)에서 南北統一問題(남북통일문제)를 먼저審議(심의) 동아일보 1946-01-16, 1면]
  51. 國內 諸團體와 協議, 臨時政府 樹立 援助, 一朔 內에 美蘇共同委員會 設置. 중앙신문, 1946.02.08
  52. 해외사료총서 10권 : 쉬띄꼬프일기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30일
  53.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102 박헌영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코멘트, WS #6 (1945.10.30, p.6) ; p.182 박헌영이 말하는 공산당의 민주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옴, WS #12 (1945.12.11, p.6)
  54.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vo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1990) Vol.1 pp.224~225.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청사, 1986) 하권 pp.34~35. (원저 Vol.1을 상, 하 2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