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이 발표되고, 한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에는 좌우 공히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해가 바뀐 1946년 1월 초부터 좌익은 돌연 찬탁으로 선회하고, 이후 정국은 반탁과 찬탁 세력간의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개요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미국·영국·중국·소련 4개국의 신탁통치가 발표되고, 그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남한에서는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이 일어났다. 좌파들도 처음에는 반탁 대열에 합류했으나, 이듬해 1월 2일부터 일제히 찬탁으로 돌변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소련의 지시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좌우가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정국은 혼미 속으로 빠져든다. 신탁통치로 가기 위한 선결 단계로 남북한 단일의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몇 차례 열리게 되나, 미소간의 의견차가 커서 결국은 결렬된다.

소련은 처음부터 북한에 따로 정부를 세운다는 계획을 가지고 1946년 2월에 사실상의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이듬해에 이를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바꾼다. 이것이 1948년 9월 공식적인 북한 정부로 탈바꿈한다. 미국은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최종 결렬된 후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나 소련이 이 안을 거부하여 남한에서만 1948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하게 된다. 서울에서 찬탁을 주장하던 좌파 인물들 대다수는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평양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근래에 다수의 연구자들이 신탁통치 찬반운동과 남북분단의 전체적 과정은 살피지 않고, 모스크바 3상회의 당시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동아일보의 오보가 반소, 반탁운동을 촉발시키고, 이것이 남북분단의 원인이 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1][2][3] 그러나 당시 이런 보도는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다수의 다른 언론도 했으며, 이는 고의적인 오보가 아니라 워싱턴에 특파원을 둘 형편이 되지 못하여 UP 등 외신의 기사를 받아 쓴 것에 불과하다.[4] 또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오보 때문에 반탁운동이 벌어졌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이 주도한 초기 반탁운동은 반소(反蘇)가 아닌 미군정과 대립하는 양상으로 벌어졌고[5], 또 반탁은 하되 미군정과 대립해서는 안된다는 온건론을 펼친 송진우(宋鎭禹, 1890 ~ 1945.12.30)가 암살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신탁통치와 관련한 발언들은 일찍부터 미국 쪽에서 간헐적으로 나왔고, 그때마다 국내에서는 반대 목소리가 계속 있어왔다. 소련이 주장해서 반대한 것이 아니라 누가 주장했던 관계없이 신탁통치 자체를 반대한 것이다. 소련의 지시에 맹종하던 좌익들도 처음에는 한결같이 반탁 대열에 동참했다가, 소련의 의사가 신탁통치 찬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1946년 벽두부터 일제히 찬탁으로 돌아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군정은 찬탁이나 반탁 운동을 모두 허용한 반면 북한의 소련군정은 관제 찬탁운동 외에는 일체의 반탁운동을 불허한 것을 보면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 전날인 1945년 12월 27일 외신기사 하나가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소련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제의한 반면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난 이 보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각에서 이 보도가 반탁운동을 격발시켜 남북분단의 한 원인이 된 것처럼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3국 외무장관회의가 진행될 무렵 소련은 이미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흥미를 잃고 북한에 단독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닦고 있었다. 또한 반탁에 대한 민족적 공감대는 3국 외무장관회의 두 달 전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만큼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이 발표된 뒤 거족적인 반탁운동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한국인들의 찬탁, 반탁 운동이나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과 상관없이 소련은 북한 지역에 단독의 정권을 수립할 계획을 가지고 이를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먼(Averell Harriman)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전인 1945년 11월 12일자로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련은 내심으로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4표 중 1표로 약화되는 4개국 신탁통치안을 원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다.[6][7] 매클로이 미 전쟁부 차관이나[8] 하지 주한미군 사령관 고문 랭든도[9]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올렸다.[7] 일본 동경의 맥아더도 합참에 한국에 폭동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며 신탁통치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의견을 올렸다.[10] 그러나 이러한 보고에도 불구하고 국무장관 번즈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을 관철시켜 결과적으로 이를 이용하여 남한에 혼란을 조성하려는 소련의 전략에 말려들었다.

소련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1/4로 줄어드는 신탁통치보다는 그 전단계로 자신들이 비토권을 가지는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우파를 배제하고 좌파들이 주도하는 남북한 단일 정부를 수립을 추진하려 했다. 또한 북한에는 소련에 비협조적인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는 등 일체의 반탁운동도 불허하고, 남한에는 좌파들이 찬탁으로 돌아서게 하여 찬탁, 반탁 양진영의 대립으로 혼란이 발생하도록 유도했다.

반탁운동 때문에 남북 분단이 현실화되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해방 정국에서 잘못된 일은 모두 남한의 우파와 미군정의 책임으로 돌리고, 소련과 북한 및 남한 좌파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려는 책략이다.

한반도 신탁통치안의 결정 과정

한국의 독립 후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한다는 방안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2년말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11][12], 1943년에도 영국, 중국 수뇌들과 협의하고 있었으며, 1943년 11월~12월 카이로 회담, 테헤란 회담들에서도 거론되었고 관련국들도 대체로 동의하고 있었다.[7]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자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얄타 회담(영어: Yalta Conference, 러시아어: Ялтинская конференция)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영어: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 ~ 1945년 4월 12일)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거론하고, 스탈린도 이에 동의하여 구두 합의가 되어 있었다.[13]

루즈벨트는 일본 패전 후 한반도가 구한말처럼 중국과 소련 등 열강들의 영향력 경쟁으로 혼란에 빠지는 것을 우려하여 4대국의 신탁통치안을 고려하였던 것같다. 임시 정부도 일본 패전 후 중국이 한국을 속국화할 것이라는 우려와[14][15] 소련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앞세워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우려를[16] 미국에 전달하고 있었고, 또 미국은 소련이 일본에 가까운 부산항을 탐낸다고 보고 있었다.[17] 루즈벨트 생존시에는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는 계획은 없었으므로 한반도에서 열강들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신탁통치의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도 대일본전이 어떻게 종결될지 모르던 시기에는 전후 한반도에 대한 뚜렷한 정책을 세우고 있지 않았으므로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안에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즈벨트가 1945년 4월 12일에 갑자기 작고하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 분할 점령이 완료된 후에도 그런 방안이 유효할지는 의문이었다. 한반도가 이미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독점적 영향하에 들어간 상태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은 영국과 중국까지 끌어들여 4대국이 신탁통치를 한다는 방안은 처음부터 실현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 3개국 외상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이 최종 결정된다.

United States Delegation Minutes, First Formal Session,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Spiridonovka, Moscow, December 16, 1945, 5:00–7:10 p.m.
United States Delegation Minutes of the Seventh Formal Session of the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Spiridonovka, Moscow, December 26, 1945, 11 p.m.
The Ambassador in the Soviet Union (Harriman) to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Moscow, December 27, 1945 : COMMUNIQUÉ ON THE MOSCOW CONFERENCE OF THE THREE FOREIGN MINISTERS
신탁통치가 처음 거론된 시기부터 이후의 진행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음.
신탁통치에 관한 미군정청 의견도 나옴.
p.41 (Nov. 09, 1945 Vincent의 말)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한국의 4개국 신탁통치를 꺼내고 스탈린의 동의를 얻음. 1945.05.28에 Harry Hopkins가 스탈린과 이 문제를 협의하고 동의를 얻음.
p.43 Harry Hopkins (1890~1946)의 5/28일자 탁치 논의에 대한 의견 : 기간 미정, 스탈린도 탁치에 동의
p.44 얄타 회담부터 탁치 논의 과정
p.64 정치 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Russell Langdon, 1891-1963)의 탁치 반대 의견 보고(11/20) 국무부 수신 pp.69~74
p.159 TFGBI 99 거의 모든 한국인이 탁치 반대. 국무성, 국방성 수신분
p.163 12/30 거의 모든 한국인이 탁치에 굴욕감 느낌.

신탁통치는 번즈(Byrnes) 미 국무장관의 독단적 결정

루즈벨트 사람이었던 번즈(James F. Byrnes) 미 국무장관이 모스크바 회의에서 독단적으로 신탁통치안을 밀어부쳤다고 한다. 삼상회의 이전에 주소 미국대사 해리먼도 소련의 내심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고, 한국의 미군정청,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서도 신탁통치에 강력히 반대하는 의견을 올렸지만 무시되었다.

김학준은 번즈 국무장관이 루즈벨트를 승계한 트루먼 대통령을 우습게 보고 신탁통치에 대한 사항을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에서 이러한 독단적인 결정을 했다고 말한다.[18]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에 미국을 대표해 참석했던 외무부장관이 제임스 번즈였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상당히 우습게 알았습니다. 트루먼을 경시해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 회담에 미국 대표단 실무진으로 참석했던 조지 케난(George F. Kennan, 1904~2005)이라는 유명한 국제정치학자가 쓴 회고록[19]을 보면 제임스 번즈는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당시 회담에서 성과를 내려는 일념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소련의 전략에 말려들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동의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은 말 그대로 소련 의도가 반영된 것에 불과합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보면 모든 것을 미국과 소련이 결정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 아닙니까. 즉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통해 비토권을 확보한 겁니다. 모든 것을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결정하게 돼 있었으므로 누구도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가 2차례나 열리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 우리는 신탁통치라고 얘기하지만 러시아어로는 후견이라고 돼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용어문제도 합의를 못한 겁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에 영어로는 ‘Trusteeship’ 신탁통치, 러시아어로는 ‘오뾰까(опека)’, 후견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핵심적인 용어에도 합의하지 못한 문서가 어떻게 제대로 운영될 수 있었겠습니까? 실제 제임스 번즈가 귀국했을 때 트루먼이 제임스 번즈를 불러 대통령이 신문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이게 말이 되느냐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 탄생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 2011년 9월 20일)

3상회의 참석 후 귀국한 번즈 국무장관은 한국에서 강한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1월 초에 신탁통치가 필요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동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가지고 일하여 나가도록 될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신탁통치를 避免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조선이 하루 바삐 독립국가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信託(신탁) 統治(통치)의 不必要(불필… (동아일보 1946-01-04 1면) - 위 기사의 연속 (잘못 분리됨)
[신탁통치 실시여부 결정. 미국 국무장관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 성격표명] 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1면
소련 주재 미국대사 Averell Harriman이 1946년 2월 2일 서울에 와서 신탁통치안을 모스크바로 가져간 것은 미국이 맞다고 하면서 신탁통치는 작고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baby라고 함.
U.S. Ambassador Harriman Arrives for Seoul Visit; XXIV Corps University to Open Second Term 1946.02.04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미군정의 입장

미군정은 국무성에서 10월부터 신탁통치안이 거론되는 것을 알고, 한국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감안하여 하지 주한미군 사령관 고문 랭든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올렸다.[9][7] 일본 동경의 맥아더도 합참에 한국에 폭동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며 신탁통치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의견을 올렸으나[10]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정은 12월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발표될 때도 사전에 이를 알지 못했으므로, 한국에서 벌어지는 반탁운동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혼선을 빚었다.

p.17부터 신탁통치에 관한 사항 나옴 : (k)해방 직후부터 인공이 정권을 차지하려 하다 45/10/10 공식해체. 김구 및 임정 귀국 후 12/31~ 1/1 쿠데타 시도. (l)항부터 신탁통치 정국에 대한 이야기. 미군정은 국무성에서 10월부터 신탁통치안이 거론되는 것을 알고, 반대입장 전달. 신탁안이 발표될 때 사전에 알지 못함. 좌우모두 반탁하다 좌익은 1/02 부터 찬탁으로 일제히 변함.....

모스크바 3상 회의 이전의 미국의 신탁통치 거론과 국내의 반대 동향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은 1945년 12월 27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미국 쪽에서 신탁통치를 거론하는 것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고, 좌우진영을 막론하고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도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있다. 신탁통치안 반대에는 좌우 구분이 없었다.
Syngman Rhee, Chairman, United Central Council, Seoul , November 4, 1945.
신탁통치를 강력히 반대.
Addressed to the Four Allied Powers and, through the press, to the American public. Copy transmitted to the Department on December 4 by Ben C. Limb, Acting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who inquired whether the resolution had been received and whether it had been sent to the British, Soviet, French, and Chinese Governments.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 발표 직후의 반탁운동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나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21] 이 기사는 워싱턴발 외신을 받아 쓴 것이며[4], 결과적으로 오보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동아일보의 오보 때문에 소련에 대한 반감으로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남북분단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있는데[1][2][3] 지나친 억지이다.[22][23]
1945-12-27일자 동아일보 외에도 같은 날 조선일보[24], 서울신문[25], 신조선보[26], 중앙신문[27] 등 다수의 다른 신문들도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28] 왜 유독 동아일보 기사만 문제삼아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몰아가는지 모를 일이다.[1][2][3]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 공히 반탁을 표명하고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최초 보도

미국의 UP 나 AP 등 통신사들은 12월 25일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하나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추측성 보도를 내고[4], 국내신문들이 이를 받아 보도하여 국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탁통치는 소련의 주장이라는 보도를 두고 나중에 오보 논란이 벌어졌다. 실제 신탁통치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2년 말부터 구상하여, 장개석과 스탈린의 동의도 이미 얻었던 상태였으므로[7]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처음 거론되어 결정된 사안은 아니다.

근래에 다수의 국내 연구자들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UP 등 미국 통신사들의 추측성 기사와[4] 이를 받아 쓴 동아일보의 오보가[21] 강한 반탁운동을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1][2][3] 그러나 이는 전후 과정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으로 유도하기 위해 무리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다수의 국내신문들이 같은 날 동일한 보도를 했는데도[26][27][28] 유독 동아일보만 문제삼는 것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蘇聯(소련)의 朝鮮信託主張(조선신탁주장)과 各方面(각방면)의 反對烽火(반대봉화) 1945.12.28 동아일보 1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주장한 쪽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 측이라는 미국 통신사들의 추측 보도는 오보가 맞으나, 모스크바나 워싱턴에 특파원을 둘만한 사정이 못되었던 국내신문들이 이를 받아 쓴 것을 고의적인 오보라고 할 수는 없다.[22][23]

당시 국내신문들의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오보는 UP나 AP 통신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들 통신사들은 당시 미국 정가에 나도는 소식들을 기사화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관측과 달리 회의에 참석한 번즈(James F. Byrnes) 국무장관이 독단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런 오보가 나오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미국의 고의적인 정보공작이 아니라 정치권의 갈등 때문에 나온 오보일 것이다. 번즈 국무장관은 1944년 미국 대선 때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해리 트루먼을 최종 선택했고, 루스벨트는 4차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직후 별세하는 바람에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대통령이 될 번하다 국무장관에 임명된 번즈는 이 때문에 불만이 많아 자신이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하고 트루먼 대통령은 나중에나 알게되어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12월 27일

12월 28일

12월 29일

12월 30일

  • 12월 30일 고하 송진우(宋鎭禹, 1890 ~ 1945.12.30) 피살 : 오전 6시 15분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유근배(劉根培) 등 6명의 저격을 받고 사망. 송진우는 신탁통치에 반대는 하되 미군정과 대립해서는 곤란하다고 한 발언으로 찬탁론자로 몰려 암살 당했다.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등 포함

12월 31일

김구를 주축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은 12월 31일 미군정에 대한 불복을 선언하는 국자 제1호(國字 第1號)와 제2호를 발표하였다. 미군정은 이를 사실상의 쿠데타 기도로 보고, 임정세력을 중국으로 추방하겠다고 하자 임정세력은 타협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이를 보아도 반탁운동은 좌파들이 주장하는대로 미국 아닌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오보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탁통치 자체에 대한 반대운동인 것을 알 수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전에도 신탁통치를 거론하던 쪽은 소련 아닌 미국인 것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3상회의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보도가 오보라고 해도, 반탁운동은 신탁통치 자체에 대한 반대이지 반소운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임정, 행정권이양 등을 선언하는 포고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2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46년 새해를 맞이하여 1월 1일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를 잇따라 발표하여 임시정부가 권력행사의 주체임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미군정에 대한 정면 대결의 선언이었다.

국자 제1호(國字 第1號)

1) 현재 전국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지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5) 불량상인의 폭리매점 등은 엄중취체함.

국자 제2호(國字 第2號) 요지

차(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주석 2)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洪命憙, 朴憲永 있음.
상무위원 22명 결정(常務委員 廿二名 决定) 조선일보 1946-01-01 1면
이날 총회는 金台俊의 개회사에 이어 朝共黨 李鉉相으로부터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

좌익세력,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

신탁통치의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조선공산당 내에서도 반탁 기류가 상당했으나, 다른 정파와는 달리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없었고,[29] 정태식(鄭泰植)이 개인적으로 반탁입장을 밝혔다.[30]

한편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하여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에 박헌영홍명희(洪命憙)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고[31], 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常務委員)에 선정되었다.[32] 이를 위한 준비모임인 12월 28일 밤의 경교장 모임에 박헌영도 참석했다는 강원룡 목사의 증언이 있다.[33] 중앙위원에는 북한에 있는 조만식(曺晩植), 김두봉(金枓奉), 김무정(金武亭)도 들어 있는데 이들이 실제로 참여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박헌영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만으로 그의 참여가 사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튿날 상무위원에까지 선정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임의로 집어넣은 것으로 보기는 무리이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의 이름이 본인 동의없이 임의로 들어간 것이라면 공산당 측의 거센 항의가 있었을 것이나 그런 흔적은 없다.

조선공산당 서울시 위원회에서는 12월 31일 탁치반대 전단을 살포하였다.[34] 같은 날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에 역시 공산당 서울시 위원회가 참여하였고, 박헌영의 심복인 이현상(李鉉相)이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를 했다.[35][36][37][38]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1946년 1월 1일 오후 2시부터 기자단과 회견하고 탁치안을 절대 배격할 투쟁방침을 천명한 담화를 발표했다.[39][40]

미군정의 기록에 의하면 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하였다.[41][42].

1월 2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하고,[43][44] 1월 3일에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는데,[45]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이다. 공산당은 하루만에 전날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180도 선회하였다.

이날을 기준으로 모든 좌파들이 연말의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표변하였다[46].

1월 3일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집회는[47][48][49]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변경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50][51][42][52] 좌파들은 입으로만 민주주의니, 인민의 뜻을 받드느니 하며 떠들 뿐, 실제로는 인민들은 자신들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졸로 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좌파들이 1월 1일까지 반탁입장을 견지하다 1월 2일부터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선 배경에는 소련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시 미군정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53]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김일성 등 이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 명의의 1946년 1월 2일자 성명서를 보도한 1월 14일자 민성일보(民聲日報) 1면 기사. 이 성명서는 1월 2일 특별 라디오방송으로 내보냈으며 조만식은 이 공동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직도 사임하고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54] 소련의 지시를 따른 이 성명이 남한 좌익들이 이튿날부터 찬탁으로 돌변하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헌영이 이 무렵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소련의 지령을 받아왔다고 증언한 사람이 많이 있으나, 사람마다 방북했다는 날자가 제각각이고, 명백한 문헌근거는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기 어렵다.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은 박헌영이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뜻을 파악하려고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지침을 받고, 신년 행사에 참석한 후 1월 1일 밤 3.8선을 넘어 1월 2일 서울로 귀환했다고 증언했다.[55][56] 하지만 이 기간에 박헌영이 서울에 있었다는 기록도 많아 그의 증언과는 상충한다. 박헌영의 방북에 관해서는 당시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샤브신의 부인이자 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샤브시나(쿨리코바)의 증언도 있고[57],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朴吉用, 1920 ~1997)과 소련 군정 핵심 인사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메클레르 중좌의 증언도 있지만, 박헌영이 방북했다는 시기는 제각각이다.[58]

남한의 좌익들이 1월 3일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변한 이유는 전날인 1월 2일 김일성등 북한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발표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에[59] 영향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남한의 좌익들은 소련의 명시적인 지시가 아니라도 이 성명이 소련의 뜻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시없이 정당, 사회단체들이 임의로 이런 성명서를 발표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때이다.

박헌영 본인이 공개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면서 찬탁 입장을 밝힌 것은 1월 5일 11시에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이다. 국내 기자와의 회견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반탁 진영을 맹비난한 것이 이튿날 국내 신문에 보도 되었으나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외신 회견에서는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를 원하며, 10 ~ 20년 내에 조선이 소련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뒤늦게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면서 큰 논란이 벌어지고, 공산당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상도 큰 타격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박헌영같은 노회한 정치인이 이런 무모한 발언을 했을리는 없으므로, 이 사건은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와 미군정의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본인도 이런 발언의 파장을 모를리 없었으니 국내기자 회견에서는 당연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외신회견에서만 한 것이다. 당시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벌이고 있던 그가 소련에 잘 보일 목적으로 국내용 아닌 대소용(對蘇用) 발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기대와 달리 외신 회견 발언 내용이 뒤늦게 국내에도 전해져 문제가 된 것이다.


여운형은 신탁통치안이 처음 알려진 1945년 말에는 반탁을 주장하였으나[60] 소련의 지시를 받았는지 1946년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61][62] 1946년 1월 14일에는 탁치문제로 대중이 분열한 죄과는 자신에게 많다며 지도자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63]

의열단 단장이며 좌파 단체인 민족주의 민주전선에서 활동한 김원봉은 반탁운동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하여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반탁운동에 대해서 이것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에 비기고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8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정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64]"는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 자신도 1945년 말에는 적극적으로 반탁을 주장하다[65] 이듬해 1월 초 다른 좌익들과 함께 찬탁으로 태도를 표변한 사람이므로, 그의 주장도 자신의 변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다지 관계도 없는 사례를 끌어와 꾸며낸 말에 불과한 것이다.


좌파들도 1945년말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를 결성하며 발표한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에는[35][36][37]

그러므로 일찍 미국 극동부 책임자 빈센트같은 사람은 공공연하게 조선을 신탁관리할 것이라 말하였고 국내의 소수 매국매족적 반동분자들은 여기에 영합하여 혹은 당분간 군정기가 필요하다고 하고 혹은 3년후가 아니면 독립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반동분자들의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국 실현되고야 말았다. 국내에 있어서 진보적인 인사와 정당정파들은 열렬하게 민족통일전선의 旗를 내걸고 노력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존세력인 친일파 반역분자, 독재정치주의자의 민족분열 선동으로 인하여 통일은 저해되고 따라서 신탁통치를 받는 결과에까지 빠지게 된 것이다.

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 태도를 정반대로 돌변하여 스스로 신탁통치를 갈망하는 반동분자, 친일파 반역분자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타스통신의 보도

소련의 타스 통신은 뒤늦게 1946년 1월 22일에 신탁통치는 소련아닌 미국의 주장으로 결정된 것이라면서 한국의 반탁세력과 미군정을 비난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 참석차 1월 15일 서울에 온 평양 소련군정 최고책임자 Shtikov가 1월 26일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한 내용의 번역. 타스통신 기사의 전문 영역이 나온다.


소련 관영언론의 보도는 3상회의 직후가 아니라 한국의 반탁시위가 격렬해진 후에야 나온 것으로 책임을 미국에 돌리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임. 반탁의 배후가 미국이라고 주장 - 3상회의에서 미국이 신탁통치를 고집했다면서 미국이 반탁의 배후라는 건 자기 모순임. 소련 공산당의 통제하에 놓인 관제언론은 믿을만하고 미국의 자유언론은 믿을 수 없다는 근거는?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

이후 남한에서 반탁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비상국민회의 찬탁을 주장하던 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여 반탁, 찬탁 운동을 이어간다.

우파 반탁 세력들이 연합하여 2월 1일에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한다.


좌파 찬탁 세력들이 연합하여 1946년 2월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민전)을 결성한다. 의장에 여운형(呂運亨)·허헌(許憲)·박헌영(朴憲永)·김원봉(金元鳳, 김약산)·백남운(白南雲), 부의장에 백용희(白庸熙)·홍남표(洪南杓)·이여성(李如星)·김성숙(金星淑)·장건상(張建相)·윤기섭(尹琦燮)·성주식(成周寔)·정노식(鄭魯湜)·유영준(劉永俊)·한빈(韓斌)이 선출되었고, 상임위원으로는 의장단을 포함하여 73명, 중앙위원은 전국에서 305명이 선출되었다.

북한의 동향

소련은 북한 지역을 점령할 당시부터 북한에 단독의 공산정권을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만들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66][67][68][69]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먼(Averell Harriman)은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1945년 11월 12일자 편지에서 소련의 내심은 한반도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하며 3표 또는 4표 중 한 표만 행사하게 되는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6][7]

해리먼의 말이 정확한 진단으로 보이며, 실제로 소련은 겉으로는 신탁통치를 주장하면서도, 내막적으는 북한지역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삼상회의가 진행되던 기간인 1945년 12월 25일자로 이오시프 쉬킨 (Iosif Shikin, 1906-1973)이 작성한 쉬킨 보고서[67][68][70]에는 스탈린의 지령이 잘 이행되고 있지 않다고 평가하고, ‘북한의 반동(反動) 지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토지개혁과 북조선 내 정권을 중앙집권화할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보아 삼상회의에서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소련이 동의한 것은 남한과 미군정에 혼란을 줄 목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친탁, 반탁 운동 모두를 허용한 미군정과 달리 북한의 소련군정은 신탁통치는 소련이 아닌 미국의 제안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여기에 대한 일체의 반대 움직임을 탄압하고 봉쇄하였다.

소련군정은 1946년 1월 2일에 김일성, 김두봉 등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한 후, 이를 기점으로 신탁통치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은 조만식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민족세력의 신탁통치 반대 움직임을 일체 금지한다. 이후 2월 8일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고 3월에는 토지개혁까지 단행하는 등 북한 지역에 단독정권 수립을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남북분단이 기정 사실화된다.

이런 일을 총치휘하는 책임자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 출범을 위한 논의차 1월 15일에 서울에 와서[71] 20여일 이상 머물다 2월 7일에 평양으로 돌아갔다.[72][73] 따라서 이튿날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발족은 그가 북한으로 돌아가서 준비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서울로 출발하는 1월 15일 이전에 이미 세부 계획까지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합의한 남북단일의 임시정부 수립 논의를 시작도 하기 전에 소련은 북한 단독의 임시정부 수립계획을 세워놓고 이를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소련이 처음부터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착실히 진행해 가고 있었으며, 신탁통치안이나 이후의 미소공동위원회는 남한과 미군정에 혼란을 주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임하는 소련의 입장은 남북한 단일의 좌파(공산)정권을 세우도록 공작을 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북한만의 공산주의 정권을 그대로 밀고간다는 것이었다.

아래 보고서에 조만식 연금 전후의 북한 사정에 대해 나와 있다. 상당한 신탁통치 반대 움직임도 있었다.

3상회의 결정이 공표되자 북조선공산당, 직업동맹위원회, 평안남도 농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그리고 만주의 조선독립연맹에서는 모스크바회의 결정을 찬성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은 평양시에서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시 전체 시위를 조직하였다. 10만 명 가까이 참여한 이 시위는 조직국의 슬로건 아래 진행되었고,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주민 대중의 찬성과 소연방에 대한 북조선 인민대중의 호감 증대를 보여주었다.
이와 더불어 반동분자들의 활동도 첨예해졌는데, 개별적인 반동그룹들이 함흥, 원산, 진남포에서 실패로 끝난 모스크바회의 결정 반대시위를 조직하려 시도한 것이나 평양, 함흥, 진남포에 적의에 찬 선동삐라가 유포된 것은 이를 증명해 준다. 1945년 12월 31일 이른 새벽 평양시에서는 다음의 내용이 담긴 삐라 45장이 발견되었다.

  1. “감독통치를 거부하자. 자유로운 자치를 요구하자. 그것은 5천 년 역사를 가진 3천만 조선 인민에게는 최대의 공격이다.”
  2. “조선은 러시아인과 미국인,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살기 좋은 곳이고, 조선 인민은 살기가 힘들다. 공산주의자 없는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3. “신탁체제 반대. 조선 독립 만세. 그것은 조선 인민에게 지독한 수치이다.”
  4. “3천만 동포들이여. 피와 총탄으로 조선 민족의 깃발 아래 뭉치자.”

1945년 12월 30일부터 1946년 1월 1일까지 그런 삐라 유포로 평양시에서 70명이 체포되었는데, 주로 중학교 학생들이었다. 체포된 사람 중 세 명은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행위 조직 임무를 띠고 서울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민주당 당수이자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조만식과 조소문화협회 위원장 황강연(Хван Га-Нен)은 조선에 대한 모스크바회의 결정 지지 공동선언문 서명을 거부했는데, 황강연은 문화협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다”라는 핑계를 댔다. 조만식은 너무 멀리 나간 탓에 인민위원회 위원장직에서 물러나고 위원회도 탈퇴했다. 위원회 위원인 민주당원 4명이 그를 따랐다. 남은 민주당원들은 모스크바회의 결정을 찬성하는 인민위원회 결정에 동조했다. 평안남도인민위원회 임시위원장으로 홍기주가 선출되었다(민주당원으로, 그때까지 평양시위원회 위원장이었음). 제1부위원장으로는 이주영(공산당원)이 선출되었다.

미국 측이 파악한 소련의 진정한 의도

미국 국무부도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소련 당국이 북한에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중앙정부를 세우는데 필요한 정치적 도구를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만식 제거와 미지의 인물 김일성을 내세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구성 등에 이용함.)

Structure of North Korean Government : July 2, 1948 (Department of State / Division of Research for far East /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The announcement on December 31, 1945 of the Moscow Decision with its provision for Korean trusteeship, provided the Soviet authorities with the political tool needed to create a Communist-dominated central government. Because of his refusal to support the trusteeship clause of the Moscow Decision, CHO Man Sik was ousted from his position as adviser to the Soviet Commander in Pyongyang and a vigorous press, radio, and pamphlet campaign denounced him as a "reactionary." On February 8, 1946, a young, formerly unknown expatriate who, with great publicity had returned to Korea bearing the name of a legendary Korean guerilla, KIM Il Sung, called a meeting of representatives of popular organizations and local people's committees in Pyongyang. On February 9, 1946, this body announced the formation of the Interim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This committee became the executive agency, and, with the power of decree immediately launched a program of sweeping economic and social reform aimed at capturing public support and solidifying its own position. By November 1946 the Communists in the central government were sufficiently strong to call for an election to provincial, county, and city people’s committees. This election, combined with an intense propaganda campaign against reactionaries, in effect purged dissident elements from those levels of local government. Three months later the process was repeated in township and village poople's communities, thus securing Communist control throughout all echelons of the regime.

아래 보고서에 조만식 연금 전후의 북한 사정에 대해 나와 있다. 상당한 신탁통치 반대 움직임도 있었다.

김일성 중심의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소식; 조만식의 구금;
미소위원회가 평양서 열리는 줄로 잘못알고 북한 다녀온 기자의 현지 사정 증언: 1월 3일 학생, 근로자 4,000여명 동원한 평양의 관제 찬탁 데모.- 처음에는 독립시위로 속임. 북한 공산당 지지율 20% 미만.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문은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로 넘어가는 준비단계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에서 필요한 사항을 모두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소련은 애초에 자신들의 영향력이 1/4로 줄어드는 4개국 신탁통치에는 흥미가 없었고, 자신들이 비토권을 가지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중요사항들을 결정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두 차례 예정대로 열리기는 했으나, 파행 끝에 결렬되었다.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에 단독의 임시정권을 수립해 놓고,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한반도 전체에 친소 좌파 정권 수립을 기도하고 있었으므로 결렬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미 국무성 자료 및 기타 참고 자료

소련의 의도는 처음부터 북한 분할 통치. 신탁통치안은 속임수에 불과.
CHAPTER II The House Divided : The Americans Occupy South Korea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General wartime relation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with emphasis on China’s military position and United States efforts to give military assistance to China
[158] Draft of Letter From Mr. Owen Lattimore to Generalissimo Chiang Kai-shek(蔣介石) undated (1942.12.24?)
이미지 [185] / [186] / [187]
  1. [I told the President that broadly speaking the following is the way my mind is running.] Southern Pacific and Southeast Asia.
    In certain colonial areas it will hardly be desirable to restore the previous regimes in full, even if that were possible. It may be possible in many instances to find a solution through a new legal application of the concept of trusteeship. Some such trusteeship might be entrusted to a single nation, others to boards of trustees composed of nationals of several nations. These boards of trustees would represent an advance over the mandate of the League of Nations because they could be used to define more clearly the importance of time and the principle of “coming of age.” This would be analogous to the principle of successive stages of self-government embodied in the American schedule for Philippine independence. The President finds [tells me] that Mr. Churchill heartily welcomes [is interested in] the principle of trusteeship.

  2. Southern Pacific. Like you, the President is convinced [I suggested to the President] that for the western Pacific from about the latitude of French Indo-China to about the latitudes of Japan, the principal major powers concerned will be China and America.59 After this war we shall have to think of China, America, Britain and Russia as the four “big policemen” of the world. Only if they work together can they have uniformity of practice in working out a method for the periodic inspection of the armaments of all countries in order to prevent surreptitious re-armament for purposes of aggression. China and America have obvious qualifications as the most responsible powers in a large area of the western Pacific. In the northern part of the Pacific, however, where American territory approaches closely to Siberia, Korea, and Japan, it would be undesirable to attempt to exclude Russia from such problems as the independence of Korea. To isolate Soviet Russia in this area of the world would run the danger of creating tension instead of relieving tension. South of Korea the question of actual bases from which China and America might protect the peace of the western Pacific is one of those details which may well be left for later consideration. The President is much impressed by your clear view that only bases in the two key areas of Liaotung and Formosa can effectively coordinate land, sea and air power for the long term prevention of renewed aggression.
Memorandum of Conversation, by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March 27, 1943.
Another question had to do with our joint or respective post-war policies relating to Manchuria, Korea, Formosa and Indochina. The President suggested that a trusteeship be set up for Indochina; that Manchuria and Formosa should be returned to China and that Korea might be placed under an international trusteeship, with China, the United States and one or two other countries participating.
[767] Memorandum of Conversation, by the Under Secretary of State (Welles) [Washington,] March 29, 1943. [p.845 이미지]
I said, furthermore, that, with regard to the steps to be taken in the Far East and in the Pacific after the war was won, I again felt that the views of the Chinese, the British and the United States Governments were very much in accord. I said we were all in agreement that Korea must be set up as an independent country under a temporary international trusteeship, that the Japanese people must be restricted to their own main islands, that Formosa must be returned to China, and that the former mandated islands in the Pacific should be placed under some form of international trusteeship for the purpose of insuring international security.


Memorandum of Conversation, by the Adviser on Political Relations (Hornbeck) [Washington,] September 28, 1943. [p.135 : 이미지]
I said that I wondered what is the popular concept, from point of view geographically, historically and politically, regarding Korea. Dr. Soong replied that the Chinese in no sense think of Korea as a part, or a lost part, of an existing or a once having existed Chinese Empire. Nor, he added, do they so think of Indo-China. In their current thinking regarding postwar settlements, the prevalent Chinese opinion runs, he said, to the idea that Korea should be put under an international trusteeship. Indo-China also, he said, the Chinese today regard as an area the disposal of which would best be made in terms of a trusteeship.
Minutes of the Presidents Meeting With the Joint Chiefs of Staff, November 19, 1943, 2 P.M., Admiral’s Cabin, U. S. S. “Iowa” Moscow, November 19, 1943
5. Proposed Agenda for President’s Conferences With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Prime Minister Churchill and Marshal Stalin [p.257 이미지]
The President said the Chinese desire equal rights with Russia in Outer Mongolia. Chiang Kai-shek wants Manchuria back. Unquestionably a discussion of this subject will cause trouble. The matter might be worked out, however, on the basis of “free zones”. The Generalissimo desires a trusteeship over Korea, administered by Russia, China and the United States as trustees.
General Marshall said the Soviets want Kuzan [Pusan?] in that it is close to Japan.
General Marshall : George Catlett Marshall Jr. (1880 – 1959)
[288] United States Delegation Memorandum Cairo, November 23, 1943. (Hopkins Papers) [p.376 이미지]
5. Does not have ambitions in respect to Chinese territory in general. This view is supported by their recent withdrawal from the Province of Sinkiang. The recognition of Outer Mongolia’s independence was for military protection against the Japanese advance. There is no indication yet as to the Soviet Government’s attitude regarding the question of a warm water port, although it would be consistent for them to agree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under some type of trusteeship in which the four great powers would participate.


카이로 회담 직후의 테헤란 회담에 참석한 스탈린도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해 동의하였다.
President Roosevelt informed the Council that his discussions with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with Marshal Stalin were highly satisfactory—in that both had agreed that Japan should be stripped of her island possessions and that the civil control of the islands north of the equator should be taken over by the United Nations, while the policing of the Western Pacific and, therefore, the necessary air and naval bases should be taken over by those powers [Page 869]capable of exercising effective military control. Marshal Stalin had specifically agreed to the idea that Manchuria, Formosa and the Pescadores should be returned to China; that the Koreans are not yet capable of exercising and maintaining independent government and that they should be placed under a 40-year tutelage; that Russia, having no ice-free port in Siberia, is desirous of getting one and that Marshal Stalin looks with favor upon making Dairen a free port for all the world, with the idea that Siberian exports and imports could be sent through the port of Dairen and carried to Siberian territory over the Manchurian Railroad in bond.7 He agrees that the Manchurian Railway should become the property of the Chinese Government.8 He wishes all of Sakhalin to be returned to Russia and to have the Kurile Islands turned over to Russia in order that they may exercise control of the straits leading to Siberia.
p.358 post-war status of korea : Briefing Book Paper: Inter-Allied Consultation Regarding Korea
p.766 Roosevelt-Stalin Meeting, 3:30 p. m. Bohlen Minutes Feb. 8, 1945
Air bases and supply routes in the Far East; use of airfields and survey of bomb damage in Eastern and Southeastern Europe; transfer of ships to the Soviet Union after the war on credit; political conditions under which the Soviet Union would enter the war against Japan; trusteeships for Korea and Indochina; internal conditions in China.
미국 측 Mr. Hopkins, Ambassador Harriman[,] Mr. Bohlen
소련 측 Marshal Stalin, Mr. Molotov, Mr. Pavlov
Hopkins가 얄타회담에서 미영중소의 한국신탁통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기간이 결정되지 않았고, 25년이 될 수도 있지만 5년 또는 10년은 확실히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자 스탈린은 4강의 신탁통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함.
4강의 한국 신탁통치의 구체적 성격에 대한 협의 필요.
No. 250 Memorandum by the Assistant to the President’s Naval Aide (Elsey) : Korea [Undated.]
List of papers - 포츠담 회담 한국관련 문건
No. 250 : Memorandum by the Assistant to the President’s Naval Aide (Elsey) : Korea
카이로 선언, 얄타회담
There was no reference to Korea in Map Room messages or documents until the Yalta Conference. On 8 February 1945, during a discussion on the Far East when Churchill was not present,3 President Roosevelt explained to Marshal Stalin his intentions with regard to Korea.

The President said he had in mind for Korea a trusteeship composed of a Soviet, an American and a Chinese representative. He felt the trusteeship might last from 20 to 30 years. Marshal Stalin said the shorter the trusteeship period the better, and he expressed approval [Page 310]when the President said foreign troops would not be stationed in Korea.

President Roosevelt said he did not feel it was necessary to invite the British to participate in the Korean trusteeship, except that they would probably resent their exclusion. Stalin replied that British resentment would be strong, and his opinion was that the British should be invited.

....

When Mr. Hopkins arrived in Moscow, he found Stalin’s views had not changed and he reported to President Truman on 29 May that Stalin agreed to a trusteeship for Korea under China, Great Britain,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4

On the basis of this report, the President informed Chiang on 15 June that the U. S. S. R., Great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agree to a Four-Power Trusteeship for Korea.5
[732] No. 732 The Secretary of War (Stimson) to the President [Babelsberg,] 16 July 1945.
No. 732 The Secretary of War (Stimson) to the President July 16, 1945 - 이미지
4강 신탁통치에 대한 구체적 협의 필요
소련군이 북한에 2개 사단을 만들었으므로, 이들이 한반도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
한국이 자치능력을 보여줄 때까지 4개국 신탁통치 필요.
44. Korea. The question of trusteeship for Korea was raised by the Soviets but not discussed.
Draft Memorandum to the Joint Chiefs of Staff [SWNCC 176 Series] [Washington, undated.] (08.17~08.24 사이)
The initial clause of the message from the Commander in Chief reading “in as much as the occupation of Korea is to be on a quadri-partite basis”, is not understood to be correct. An oral understanding was reached at the Conference of the Three Major Allies at Yalta that the United States, the Soviet Union, the United Kingdom, and China should establish a temporary international trusteeship over Korea. So far as can be ascertained the understanding referred to above is the only international agreement which relates to Korea, and that agreement would relate to a period and to a condition subsequent to the period of occupation of Korea.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the United Kingdom (Winant) Washington, September 13, 1945

영국에 한국 신탁통치에 관한 각국간 협의 진행 상황을 알림.

Memorandum of Conversation,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Far Eastern Affairs (Vincent) [Washington,] September 26, 1945.
중국도 한반도 신탁통치에 동의함.
The Chief of Staff (Marshall) to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at Tokyo Washington, 1 October, 1945


한국 신탁통치 필요
국무장관의 주소 대사에 대한 신탁통치 관련 훈령 - 군사점령을 끝내고 신탁통치로 이관 계획
전쟁장관 Patterson의 질문에 대한 국무장관 James F. Byrnes의 답변
Far East: Korea
(2) It is hoped that by July 1, 1946 an international trusteeship will be in operation in Korea. If so, only those armed forces requested by the High Commissioner for Korea (provided for in the trusteeship draft) and approved by the proposed Executive Council for Korea for the maintenance of internal law and order will remain in Korea. The same answer applies to occupation forces as of January 1 and July 1, 1947. Since it is hoped that native police and a native constabulary will, to an increasing degree, assume responsibility for the maintenance of law and order in Korea, it should not be necessary for the High Commisioner to request that large numbers of troops be made available to assist him.
Syngman Rhee, Chairman, United Central Council, Seoul , November 4, 1945.
신탁통치를 강력히 반대.
Addressed to the Four Allied Powers and, through the press, to the American public. Copy transmitted to the Department on December 4 by Ben C. Limb, Acting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who inquired whether the resolution had been received and whether it had been sent to the British, Soviet, French, and Chinese Governments.
[820] The Ambassador in the Soviet Union (Harriman) to the Secretary of State Moscow, November 12, 1945 : 이미지 [p.1121] [p.1122]
소련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분석, 평가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Far Eastern Affairs (Vincent) to the Under Secretary of State (Acheson) [Washington,] November 16, 1945.
The Acting Political Adviser in Korea (Langdon) to the Secretary of State Seoul, December 11, 1945
랭던의 요청에 대한 국무장관의 답변
“As to the fourth item, we are prepared to press for the establishment of an independent Korean government. If that is not acceptable, we would favor a trusteeship under the United Nations for a limited period of time similar to that which we suggested for the Italian colonies.
맥아더 사령부도 한국 신탁통치에 단호하게 반대
F. In the minds of all Koreans, “Trusteeship” hangs over them as a sword of Damocles. If it is imposed now or at any future time it is believed possible that the Korean people will actually and physically revolt.

H. In summary, the U.S. occupation of Korea under present condition and policies is surely drifting to the edge of a political-economic abyss from which it can never be retrieved with any credit to United States prestige in the Far East. Positive action on the international level or the seizure of complete initiative in South Korea by the U.S. in the very near future is absolutely essential to stop this drift. Specifically and urgently needed are:
(1) Clarification and removal of 38th degree barrier so as to unify Korea.
(2) Clear-cut statement abandoning “Trusteeship”.
(3) Positive statement of policy regarding status of former Japanese property in Korea and reparations as applied to any such property.
(4) Reiteration of Allied promise of Korean independence accompanying foregoing acts.
(5) Establish complete separation of Korea from Japan in the minds of the press, the public, the State and War Depts and Allied Nations.
Under present conditions with no corrective action forthcoming I would go so far as to recommend we give serious consideration to an agreement with Russia that both the U.S. and Russia withdraw forces [Page 1148]from Korea simultaneously and leave Korea to its own devices and an inevitable internal upheaval for its self purification.

This report is being supplemented by a report from Langdon.”61

[61] Supra. In telegram 2601, December 20, 9 p.m., to the Ambassador in the Soviet Union for the Secretary of State in Moscow,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described the views of the Secretary of War and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after alluding to telegrams CA 56096, December 16, and Tfgcg 189, December 14, recommended the following: “Should communiqué on Korea be contemplated for release in Moscow we suggest that in light of reports on undesirable reaction in Korea to trusteeship, statement might, in order to make it more acceptable to Koreans, stress interim arrangement for administering authority with suggestion that it may be expected to have the backing of UNO.” (740.00119 Control (Korea)/12–2045)
COMMUNIQUÉ ON THE MOSCOW CONFERENCE OF THE THREE FOREIGN MINISTERS
  • [Lieutenant General John R. Hodge to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at Tokyo] [Seoul,] 30 December, 1945.
김구가 4개국 수뇌에게 보낸 신탁통치 반대 메시지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1.3 정용욱, 신탁통치안 왜곡의 출발은 ‘날조 전문’ 미국 기자 한겨레 2019-06-08
  2. 2.0 2.1 2.2 2.3 반탁운동, ‘동아’ 오보가 없었다면 한겨레 21 2010-01-27
  3. 3.0 3.1 3.2 3.3 남북분단 씨앗은 동아일보 기사였다 미디어 오늘 2017.04.21
  4. 4.0 4.1 4.2 4.3 Independence of Korea is being urged United Press Dec. 25, 1945
  5. 臨政(임정)의 佈告(포고)로 不合作(불합작)을 指令(지령) 동아일보 1946-01-02 1면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임정, 행정권이양 등을 선언하는 포고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2일
  6. 6.0 6.1 Policies of the United States toward Korea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DIPLOMATIC PAPERS, 1945,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VOLUME VI : [820] The Ambassador in the Soviet Union (Harriman) to the Secretary of State Moscow, November 12, 1945 : 이미지 [p.1121] [p.1122] :소련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분석, 평가
  7. 7.0 7.1 7.2 7.3 7.4 7.5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6)신탁통치가 분단 막았을까? 동아일보 2004-12-05
  8. The Assistant Secretary of War (McCloy) to the Under Secretary of State (Acheson) November 13, 1945 : 신탁통치에 의문을 표함.
  9. 9.0 9.1 The Acting Political Adviser in Korea (Langdon) to the Secretary of State [Seoul, 20 November, 1945.]
  10. 10.0 10.1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to the Joint Chiefs of Staff Tokyo, 16 December, 1945.
  11. "미국, 1942년부터 한국신탁통치 계획" 美 현대사 연구가 문헌 발굴 중앙일보 뉴시스 2015.11.26
  12. General wartime relation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with emphasis on China’s military position and United States efforts to give military assistance to China
    [158] Draft of Letter From Mr. Owen Lattimore to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undated (1942.12.24?)
  13. Policies of the United States toward Korea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DIPLOMATIC PAPERS, 1945,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VOLUME VI : Draft Memorandum to the Joint Chiefs of Staff [SWNCC 176 Series] [Washington, undated.] (08.17~08.24 사이)
    The initial clause of the message from the Commander in Chief reading “in as much as the occupation of Korea is to be on a quadri-partite basis”, is not understood to be correct. An oral understanding was reached at the Conference of the Three Major Allies at Yalta that the United States, the Soviet Union, the United Kingdom, and China should establish a temporary international trusteeship over Korea. So far as can be ascertained the understanding referred to above is the only international agreement which relates to Korea, and that agreement would relate to a period and to a condition subsequent to the period of occupation of Korea.
  14. [748]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No. 297 Chungking, February 12, 1942
  15. [769]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December 9, 1942
  16. [974]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No. 1886 Chungking, December 6, 1943
  17. Minutes of the Presidents Meeting With the Joint Chiefs of Staff, November 19, 1943, 2 P.M., Admiral’s Cabin, U. S. S. “Iowa” Moscow, November 19, 1943
  18. D-storyⅡ 7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보도가 조작? (2) 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5월 - 11 - 2012 : 2011년 9월 20일 "인촌 김성수 선생 탄생 1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의 김학군의 강연 내용
  19. Kennan, George F. (1967). Memoirs, 1925-1950. Boston: Little, Brown.
  20. RG 59, Central Files, The Decimal File, 1910-63, 740.00119, Control(Korea) Series, 1945.10-1945.12, Attitudes towards Occupation Forces in Korea pp.69~74
  21. 21.0 21.1 蘇聯(소련)은 信託統治主張(신탁통치주장) 蘇聯(소련)의 口實(구실)은 三八線分割占領(삼팔선분할점령) 米國(미국)은 即時獨立主張(즉시독립주장) 1945.12.27 동아일보 1면
  22. 22.0 22.1 오보 논란에 대한 동아일보의 해명
    D-storyⅡ 6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보도가 조작? (1)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5월 - 7 - 2012
    D-storyⅡ 7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보도가 조작? (2)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5월 - 11 - 2012
  23. 23.0 23.1 D-storyⅡ 19 :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1)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6월 - 26 - 2012
    D-storyⅡ 20 :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2)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6월 - 27 - 2012
    D-storyⅡ 21 :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3)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8월 - 9 - 2012
    D-storyⅡ 22 :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4)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8월 - 27 - 2012
    D-storyⅡ 23 :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5)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8월 - 29 - 2012
  24. 朝鮮(조선)의 自主獨立(자주독립)은 어데로 / 獨立信託論對立(독립신탁론대립)? / 美國(미국)은 即時獨立(즉시독립)을 主張(주장) 1945.12.27 조선일보 1면
  25.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
  26. 26.0 26.1 朝鮮問題表面化, 蘇聯은 信託統治說, 美國은 即時獨立을 主張, 注目되는 三國外相會議 신조선보[新朝鮮報] 1945년 12월 27일 1면 1단
  27. 27.0 27.1 蘇聯은 信託統治, 美國은 卽時獨立主張, 公約바든 朝鮮獨立鐵壁이 가저온 悲哀 중앙신문[中央新聞] 1945년 12월 27일 1면 5단
  28. 28.0 28.1 D-storyⅡ 6 :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보도가 조작? (1) 동네 : 동아미디어그룹 5월 - 7 - 2012
  29.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7일 > 소련의 조선신탁관리주장에 대해 각계에서 반대견해 피력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
  3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조선공산당의 鄭泰植, 개인자격으로 탁치반대를 표명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탁치배격각당 각계층 대표자회, 국민운동 실행방법 결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3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선임 서울신문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印은 常任委員)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등 포함
  32.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파업단행과 상무위원 선정 동아일보 1946년 01월 01일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洪命憙, ...洪南杓 朴憲永 金若水..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洪命憙, 朴憲永 있음.
  33.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 삼상회의 보도 동아일보 2004-12-12 : 강목사는 29일 밤이라고 했으나 28일 밤의 착각이라고 한다.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8일 >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가 설치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
  34.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조선공산당, 탁치반대전단을 살포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元旦의 決意는 託治 排擊!! 共黨서울委員會서 飛檄, 託治는 民族의 恥辱, 戰線 統一하고 走狗輩를 驅逐하자.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35. 35.0 35.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결성총회, 신탁안 철폐요구 성명서 발표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 朝鮮共産黨서울市委員會: 이날 총회는 金台俊의 개회사에 이어 朝共黨 李鉉相으로부터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
  36. 36.0 36.1 팟쇼와 鬪爭决議(투쟁결의) 卅余 革命團體 團合(삽여 혁명단체 단합) 조선일보 1946-01-01 조간 2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팟쇼와 투쟁결의(鬪爭决議) 삽여 혁명단체 단합(卅余 革命團體 團合) 조선일보 1946.01.01 조간 2면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37. 37.0 37.1 전 혁명적 세력 규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하자, 반파쇼투쟁위원회 결의 자유신문 1946년 01월 01일 2면 7단
  38. 「託治」反對를 决議, 反팟쇼共同鬪爭會結成 신조선보[新朝鮮報] 1946년 01월 01일 2면 3단
  39.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1월 1일 > 조선공산당, 탁치문제의 해결방법에 관한 담화발표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0. "먼저 民族統一(민족통일)" 共產黨 託治反對方法 闡明(공산당 탁치반대방법 천명) 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1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먼저민족통일(民族統一)" 공산당탁치반대방법천명(共產黨託治反對方法闡明) 1946.01.02 조간1면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41.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25 Jan. 1946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 25 Jan. 1946
  42. 42.0 42.1 주한미군사 2 > 2부. 4장. 점령 첫 해의 미소관계(American-Soviet Relations, The First Year) > 모스크바 회담과 조선 > 후폭풍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43.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
  44.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45. 조공, 3상회의결정지지 담화문 발표  : 1946년 01월 03일 서울신문 1946년 01월 08일
  46.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47. 서울시인민위원회 주최, 민족통일자주독립시민대회 일정 : 1946년 01월 03일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
  48. 탁치반대시민대회(託治反對市民大會) 내삼일(來三日)서울운동장(運動場)서 조선일보 1946년 1월 1일 조간 2면
  49. 독립전취(獨立戰取)는 통일(統一)로 서울시민대회(市民大會) 탁치문제해결(託治問題解决)을 절규(絕叫) 1946.01.04 조간2면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50. 1946년 01월 03일 : 반탁대회가 친탁대회로 취지변경 동아일보 1946년 01월 04일 2면
    託治反對運動(탁치반대운동)을 反對(반대) 昨日(작일), 市民大會(시민대회)의 態度(태도) 1946.01.04 동아일보 2면
  51. 興奮(흥분)된 大衆(대중)을 欺瞞動員(기만동원) 民族總意(민족총의)에 逆行(역행) 重大罪過(중대죄과)에 審判(심판)을 기대려라 1946.01.05 동아일보 1면
  52.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3. Telegram TFGBI #176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30 하지 장군이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1946년 1월 30일자 전문.
    미군정청 USAFIK G-2 Weekly Summary #32, 23 Apr. 1946, Incl. #2. 조선공산당이 소련 지시를 받는 문헌적 증거 입수
  54.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의 1945년 12월 활동 보고서 발신자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 부과장 추코프 / 발신일: 1946.01.12
  55. 박병엽 구술;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 (선인출판사, 2010.11.10.) pp. 27~34, 제1장 김일성과 박헌영의 비밀회동
  56. 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57. 박헌영의 정치노선: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중앙일보 1992.02.06 종합 11면
    박헌영의 정치노선: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중위세력 손잡고 사회주의로 통일” 중앙일보 1992.02.10 종합 11면
  58.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0> 신탁통치 소용돌이(1) 평양 다녀온 박헌영 돌연 "찬탁" 중앙일보 1991.11.21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1> 신탁통치 소용돌이(2) 소 군정, 반탁 고수 조만식에 온갖회유·협박 중앙일보 1991.11.28 종합 11면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22> 신탁통치 소용돌이(3) 박헌영 웃고간 평양 울며 떠났다 중앙일보 1991.12.05 종합 11면
    증언에 나오는 서용규는 박병엽(朴炳燁, 1922 ~ 1998)이 남한에 와서 쓰던 가명이다.
  59. 김일성 등 북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의 신탁통치 지지 성명 민성일보 1946년 1월 14일 1면
  6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탁치배격담화 발표 서울신문 1945년 12월 29일
  61.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62.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에 대한 인공 중앙 인민 위원회의 결정서 (1946년 01월 04일) 조선일보 1946년 01월 05일
  63. 託治問題로 大衆分裂 罪過는 나 自身에 만타 指導者의 자리를 물러나겟다 呂運亨氏談 동아일보 1946년 01월 16일 석간 1면 5단
  64. 정경모, 찢겨진 산하 - 김구,여운형,장준하:구름 위의 정담 (기획출판 거름, 1986) 36페이지
  65. 해방조선에 再전개되는 결사적 조국부흥운동, 탁치반대 國民總動員委員會 결성 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 : 柳林, 崔東旿, 申翼熙, 趙擎韓, 金奎植, 金九, 趙素昻, 金元鳳(金若山), 金朋濬, 嚴恒燮
  66. 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金聖甫)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3) 스탈린 비밀전문과 서북5도행정국 (국사편찬위원회, 2002-12-30)
  67. 67.0 67.1 <제40회 이승만 포럼> 원문으로 본 그 비밀의 정체 :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New Daily 2014.06.24 : 스탈린 지령문 원문 이미지
    소련이 만든 북한, 아직도 붕괴 안 된 이유는…"돌연변이 공산주의 북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New Daily 2014.06.21
  68. 68.0 68.1 <사설> 한국정치학회의 解放前後史 새로 쓰기 조선일보 2006.04.22 A31 면
  69. 분단·스탈린지령문 놓고 ‘불꽃토론’ 조선일보 2006.04.21 종합 A4 면
  70. 구소 북 장악음모 “결정적 자료”/ 쉬킨중장 비밀보고서 내용·의미 한국일보 1995.08.14
  71. 美(미)·蘇共同委員會(소공동위원회) : 蘇聯代表昨日入京(소련대표작일입경) 軍政廳第一會議室(군정청제일회의실)에서 南北統一問題(남북통일문제)를 먼저審議(심의) 동아일보 1946-01-16, 1면
  72. 國內 諸團體와 協議, 臨時政府 樹立 援助, 一朔 內에 美蘇共同委員會 設置. 중앙신문, 1946.02.08
  73. 어찌될가? 南北兩斷(남북양단)의 三十八度線(삼십팔도선) 全面的撤廢(전면적철폐)는 疑問(의문) 1946.02.08 조선일보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