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白頭山)을 흔히 민족의 성산(聖山)이나 영산(靈山)으로 부른다.[1] 그러나 이런 관념은 일찍부터 전해오던 것이 아니고, 1920년대부터 생겨난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관념을 이용하여 김일성 일족을 백두산과 연결시켜 신성 불가침의 "백두혈통"으로 우상화 하고 있고, 남한의 일부 세력도 이러한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있다.

개요

흔히들 백두산(白頭山)을 민족의 성산(聖山) 또는 영산(靈山)이라고 한다.[1] 또 북한은 김일성 일족을 백두산과의 연고를 강조하여 "백두 혈통"이라 부르며 신성 불가침의 영역에 두고 있다. 이는 마치 고래로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우러러 받들었던 산인양 착각하게 한다. 백두산(白頭山)이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관념은 옛날부터 전해오던 것이 아니고, 1920년 경부터 생겨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백두산이 조선영토에 편입되어 우리와 실제적 관련을 맺는 것은 조선 세종 때인 1430년대부터이며, 조선 중기까지도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잊혀진 산이었다. 백두산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청나라와의 영토분쟁 때문에 1712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이후 백두산을 등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나오고 기행문도 남겼다. 하지만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1920년대 우리말 신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백두산에 탐사단을 파견하고, 그들이 쓴 기행문을 연재한 후부터로 보인다. 특히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이 1926년 백두산을 등정하고 쓴 기행문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가 이러한 관념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종래에는 백두산까지 도보로 가야 했으나 1920년대에는 기차와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어 접근이 상당히 용이해졌으므로 답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산에 비해 산세가 웅장하고 산정에 큰 호수가 있어 신비감을 더해 사람들이 성스럽다거나 신령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 이런 관념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의 무대가 백두산이라고 주장하며, 김정일도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조작하여 그 일족을 "백두혈통"이라 부르며 신성시한다. 남한의 일부 세력도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믿고 추종한다. 그러나 백두산(白頭山)이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말도 현대에 생겨난 허상이며, 김정일은 백두산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김일성 일족은 백두산과 아무 관계도 없다.


이승만 TV의 이영훈 교수 강연에 백두산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생겼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두산은 단군신화의 무대인가?

백두산은 단군신화의 무대이고 우리 민족이 기원하는 신성한 산이라 믿는 사람들이 꽤 있다.[1][2] 이것은 사실일까?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가장 오랜 문헌은 일연(一然, 1206~1289)삼국유사(三國遺事)이승휴(李承休, 1224~1300)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에 나오는 신화의 무대는 (太伯山)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이들 단군 기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평양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 km 가량 떨어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大朴山)에 있는 북한 주장 단군릉(檀君陵)[3]. 1994년 개조되었다.

북한도 평양 인근 강동군에서 단군릉(檀君陵)을 발굴하고 재단장했다고 주장하므로 백두산을 단군의 연고지로 보지는 않는다.

근래의 학자들은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근대까지도 그랬지만 더더구나 추정되는 단군의 시대에는 백두산 일대는 사람의 접근이 지극히 어려운 무인지경에 속했으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또 국내에는 단군의 전설이 전하는 지역도 많기 때문에 꼭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라고 특정지을만한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뿐만아니라 백두산은 고려의 영토 밖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 사람들은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일연이나 이승휴도 백두산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일연이나 이승휴가 고려의 영토내에 있지도 않는 산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 된 산으로 파악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게 적지도 않았다.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의 출현 시기

동아일보사는 1921년에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등을 백두산 등정팀으로 파견하는데, 동아일보에 연재된 민태원이나[4] 최남선이[5] 당시 쓴 기행문에 단군신화의 무대가 백두산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최남선의 기행문은 상당히 많이 알려졌는데 이로부터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6][7]

백두산의 화산 대폭발 : 946년

백두산은 지난 4천년동안 약 10번 정도 크고 작은 폭발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중일 어느 나라 기록에도 나오지 않으나 근래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946년 백두산 화산의 대폭발이 있었다.

천지(天池)도 이때 처음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 단군시대부터 있던 호수로 보기 어렵다.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발해는 화산 폭발전인 926년에 이미 망했다.[8]

백두산의 분화 기록

939년 이래 백두산은 총 31번 분화했다.

10세기 이래 세기마다 빠짐없이 분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 28년인 1702년 6월 3일 백두산 화산 활동이 상세히 적혀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하늘과 땅이 갑자기 캄캄해졌는데 연기와 불꽃 같은 것이 일어나는 듯하였고, 비릿한 냄새가 방에 꽉 찬 것 같기도 하였다"며 "큰 화로에 들어앉은 듯 몹시 무덥고, 흩날리는 재는 마치 눈과 같이 산지사방에 떨어졌는데 그 높이가 한 치가량 되었다"고 전한다.

백두산이 마지막으로 분화한 것은 1925년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도 백두산의 화산 활동은 꾸준히 관측되고 있다.

백두산 일대에서는 2003년부터 규모 2.0 미만의 작은 지진 발생이 급증했고, 2006년까지 이어졌다.

우남철 기상청 분석관은 "백두산이 활동 중이라는 증거가 관측되고 있다"며 "그 주변에 가면 아직도 뜨거운 증기나 가스가 올라온다"고 전했다.

백두산의 조선 영토 편입 : 세종의 4군 6진 개척

백두산은 고구려나 발해의 영역에 속했지만, 그 후로 고려말까지는 우리 영토 밖에 있었다. 백두산은 세종 때인 1430년대에 일부가 조선으로 편입되었다. - 우리 민족과 실질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이때부터이며, 600년이 채 안되는 기간이므로 민족의 영산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있었을 리도 없다.

조선으로 편입된 후로도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먼 곳에 있어 산의 존재가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삼수(三水), 갑산(甲山)은 험난한 지형으로 해서 조선시대의 악명높은 귀양지였는데, 백두산은 삼수, 갑산 너머에 있어 그보다 접근이 더 어려워 탐방객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산에 대한 기록도 조선중기 이전 것은 거의 없다.

탐방이 어려운 여러 조건들

  • 국토 최북단의 너무 먼 외진 곳에 있어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았다.
  • 산세가 크고 깊어 등반일정이 길어지므로 식량등의 지참에 어려움이 있었다.
  • 기상 변화가 심해 등반 중 큰비를 만나면 고립되거나 급류에 휩쓸려 익사의 위험이 높았다.
  • 진흙이나 늪지대에 잘못들어서 탈출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 맹수의 습격을 받을 위험이 높았다.
  • 사찰이나, 휴식 또는 대피시설이 전무했다.
  • 길 안내할 사람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등반을 하려면 여러 사람이 모여 상당한 준비를 해야만 가능하였다.

백두산 정계비 : 1712년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우리나라의 명산에 대한 평을 하면서

휴정 서산대사의 ‘조선사산평어(朝鮮四山評語)’[9]
‘금강수이부장(金剛秀而不壯), 지리장이불수(智異壯而不秀), 구월불수부장(九月不秀不壯), 묘향역수역장(妙香亦秀亦壯).’
(금강산은 아름답지만 웅장하지는 않고, 지리산은 웅장하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구월산은 아름답지도 웅장하지도 않은데, 묘향산은 아름답고도 웅장하도다)

라고 하였다. 조선 중기까지도 이런 산들의 명성에 눌려 거의 존재감도 없고, 가기가 힘들어 일반에게 알려지지도 않았던 백두산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되는 것은 청나라와 국경분쟁이 발생하여 논란 끝에 숙종 38년(1712년)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게 된 후부터이다.

정계비 수립 당시 관계했던 사람들이 남긴 글이 있다.

白頭山(백두산) 査界(사계)과정 밝힐 「北征錄(북정록)」 1973.04.14 경향신문 5면
홍세태(洪世泰 : 1653~1725)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권9
북정록의 저자 김지남의 아들 김경문(金慶門)의 이야기를 듣고 쓴 글.

조선 후기 백두산 등정 기행문

18세기 중반 이후 백두산 기행문이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서울에 살던 사람이 일부러 백두산까지 유람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대개 백두산 인근의 지방관을 맡아서 간 사람들이나, 삼수(三水), 갑산(甲山) 등 백두산 인근으로 유배간 사람들이 남긴 등정기 또는 유람기이다.

홍중일(洪重一, 1700-?)이 1740년 백두산 등정의 체험을 기록한 "白頭山日記"[10]
서울대 규장각 소장 유일본 <와유록臥遊錄>에 실린 글임.
백두산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다. 그런데 오직 한 곳만 돌산이 솟아 있고 그 꼭대기는 탁 트여서 일곱 개의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다. 가운데 큰 연못이 있으니 이것이 소위 천지다. 상봉에 올라가서 천지를 굽어 살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황흘하고 두렵게 하였다. 알지 못하지만 천지 조화의 기묘함이 여기에서 극치를 이루는 듯하다.
이것이 산정의 호수 천지(天池)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기록이다. 중국에서는 백두산 천지와 16봉의 명칭은 1908년 백두산 일대를 답사한 청조 지방관인 유건봉劉建封이 펴낸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崗志略>에 근거해 유건봉이 처음 명명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11]



보만재집(保晩齋集)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다 갑산甲山으로 유배시 1766년 6월 10일부터 6월 17일까지 백두산에 올랐다.
동행 조엄, 갑산부사 민원閔源과 삼수부사 조한기趙漢紀
산정의 연못이 이름이 없어 태일택(太一澤)이라 작명한다고 했다.
연못의 이름은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연못의 중심이 동북 산수의 한 가운데있어서 동북의 산천이 모두 이 연못에서 근본되기 때문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의 백두산. 천지를 대지(大池)로 부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과 상당히 달랐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 신광하(申光河, 1729~1796)가 1783년에 쓴 遊白頭山記[10]
천지(天池) 명칭이 나옴.
개항기 백두산정계비를 조사한 함경도 출신의 간도 교민.
김우식의 ‘백두산 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일기’ - 북한의 <백두산고전작품선집>에 수록[12]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64)의 청구도(靑邱圖, 1834)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에는 백두산정의 호수가 대지(大池)로 적혀 있다. 이때까지도 천지(天池)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칭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유신들의 백두산관

조선 유신들은 단군이 아니라 기자(箕子)를 떠받들었고, 기자의 후손이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조선 유신들이 남긴 백두산 기행문에는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든가 하는 말은 없고, 백두산이 곤륜산의 적장자라든가 하는 소중화 의식이 묻어난다. 이영훈의 《대한민국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13]

1766년, 조선왕조 영조 연간에 서명응이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고급관료가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그는 이곳은 중국 땅도 아니고 조선 땅도 아닌 아득한 변방으로서 천년에 한두 사람이 올까 말까 한 곳인데, 마침 내가 올라와 보니 이 큰 연못의 이름이 없구나, 하늘이 내게 이름을 지으라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태일택(太一澤)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일이란 삼라만상이 태극에서 발원하였으니 삼라만상은 원래 태극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서명응은 백두산 꼭대기의 뻥 뚫린 화산구와 그에 담긴 큰 연못을 보고 만물의 근원인 태극을 연상하여 그런 뜻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과연 당대의 성리학자다운 발상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서 오늘날 백두산 천지에 올라 여기가 단군 할아버지가 강림한 곳이라고 흥분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백두산을 천하 으뜸인 중국 곤륜산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백두산 위에서 조선 땅을 내려다보며 ‘기자(箕子)의 나라’가 조그마하게 펼쳐 있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백두산은 성리학의 자연관과 역사관을 대변하는 산이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조선의 문명이 중국 고대의 성인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와 세운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고 믿었습니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이 남으로 내려와 마한으로 흡수되었고 그 마한이 신라로 흡수되었으니 조선 역사의 정통이 기자조선에서 마한으로, 신라로, 고려로, 그리고 조선왕조로 이어졌다는 것이지요.

조선왕조의 역사학은 이러한 기자정통설을 신봉하였습니다. 조선왕조가 단군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만, 소홀히 여겨 뒤편으로 제쳐 놓았지요. 18세기가 되면 단군의 고조선이 조선 역사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약간의 변화가 나타납니다만, 그래도 문명의 정통은 기자조선에서 출발한다는 기존의 역사관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앞서 본 대로 백두산을 두고 곤륜산의 적장자라 하거나 조선왕조를 ‘기자의 나라’라고 했던 것도 다 그러한 역사관 때문이지요.

그렇게 조선시대의 역사관이 중국 중심이었다면, 그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백두산 기행문 : 20세기

조선말 백두산을 다녀온 사람들의 기행문이 누적되면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백두산을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좀 늘어나게 된 것 같다. 1920년 무렵 조선인이 간행하는 한글 신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초기에 단군과 백두산을 널리 알리는 사업을 벌이게 된다.[6][7] 이때는 백두산까지 접근이 상당히 용이해져 가는 동안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다. 도보로 가야했던 이전과는 달리 일정 전체가 상당히 짧아지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1921년에 기자로 있던 민태원(閔泰瑗, 1894~1935) 등을 백두산에 파견한 후 「白頭山行(백두산행)」이라는 기행문을 17회에 걸쳐 실었다.[4]

권덕규(權悳奎, 1890~1950)[14][15]도 이어서 같은 해에 백두산에 관한 글을 6회에 걸쳐 연재했다.[16]

조선일보는 1930년 안재홍(安在鴻)의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3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30년 8월 11일부터 9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34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1931년 6월 유성사(流星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동아일보는 1926년에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과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 스님 등의 팀을 파견하여 백두산을 등정하게 하고[17], 최남선의 기행문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를 7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23일까지 총 89회에 걸쳐 연재하였다.[5] 이 기행문은 1927년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18]

이어 노산(蘆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은 최남선의 기행문을 읽은 소감을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19]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는 역대 백두산 기행문 중 가장 많이 읽힌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고,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인상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의 근참(覲參)이라는 말은 "높은 이에게 가서 뵙고 참배함"의 뜻으로 마치 종교적 성지를 참배하는 듯한 경건한 느낌을 주며, 본문도 그러한 방식으로 씌어져 독자들도 무의식중에 백두산에 대해 그런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1926년 7월 26일부터 8월 4일까지 백두산을 등반하고 그 도정과 경개와 소감을 쓴 기행문

민족의 영산으로 여겨지게 되는 배경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여겨지게 되는 배경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산이 아닌데다, 다른 산들에 비해 산세가 높고 웅장하여 그 풍광이 등정한 사람들이 경외감을 느낄만하고, 산정에 큰 호수가 있어 신비감을 주는 것 등일 것이다. 최남선 등이 백두산을 등정하고 감격스럽게 쓴 기행문이 사람들에게 백두산에 대한 경외감을 일으키고 민족의 영산으로 여기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남선은 백두산이 단군신화의 무대인 것처럼 말했으나 이는 근거가 부족한 확대 해석이다.

백두산과 김일성 일족 - 백두혈통 신화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이 백두산에서 항일투쟁을 한 것처럼 선전해 왔다. 북한에서 애국가처럼 불리는 이찬(李燦, 1910 ~ 1974)이 작사한 "김일성 장군의 노래(1946)"도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한다. 1947년에 간행된 조기천(趙基天, 1913 ~ 1951)의 서사시 《백두산》[20]은 김일성의 혁혁한 항일전공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를 다룬 것이다.

이는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일족을 백두혈통이라고까지 칭하는 것은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하고 나서부터이다. 북한은 1984년부터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조작하여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날조된 백두혈통 신화의 시작이다.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시절 만주의 백두산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적은 있으나, 백두산에 밀영을 꾸린적은 없다. 항일투쟁한다는 사람들이 인적도 없는 깊은 산속에 밀영을 마련할 리도 없다. 식량과 보급품 조달에 애로가 클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코끝도 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숨어사는 은자들이나 살 곳이지 항일투사들의 근거지가 될만한 장소는 아니다.

김정일이 실제로 태어난 곳은 김일성이 소련으로 도주한 직후 머물던 남야영이 있던 우수리스크 인근 라즈돌노예 마을이다.

북한은 또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 근처 뿐만 아니라 북한 도처에서 김일성, 김정숙과 김정일의 출생을 찬양하는 문구가 새겨진 구호나무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근거없는 조작이다.

구호나무의 문구에는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이 주로 등장하나, 김일성이 김정숙과 결혼한 것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 국경너머로 도주하기 직전이므로, 이런 것들은 다 후대의 조작이다. 또 김일성 장군이라고 수도없이 나오지만, 김일성이 해방 전에 동료들 사이에서도 장군으로 불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해방 후부터 자칭 장군이 되었을 뿐이다.[21][22]

남한 사람들의 백두산에 대한 인식

남한에서는 1949년 7월 문교부가 제정한 "우리의 맹세"[23]에 "우리는 백두산 영봉(靈峰)에 태극기 휘날리고 남북통일 완수하자."라고 나오는데, 이는 1950년대까지 간행되던 교과서 등의 말미에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또한 국사 시간에는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 지리 시간에 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산정에 칼데라호인 천지(天池)가 있다는 것에 대해 늘 배웠다. 또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는 1970년대부터 여러 차례 재간행되었다.[24] 그러나 실제 접근은 불가능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던 산이었다.

그러다 중국과 수교한 1990년대 들어 남한사람들의 중국을 통한 백두산 탐방도 가능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다. 정상의 천지까지 자동차가 올라간다고 한다. 돈만 있으면 아무나 차타고 올라갈 수 있으니 흔한 관광지로 전락한 셈이다. 그러니 경건한 마음이 들 리도 없고, 민족의 성산(聖山)이나 영산(靈山)이라 부르기도 민망하게 되었다.

고은(髙銀, 1933 ~ )이 1987년 간행한 시집 《백두산》에는 아기 장수 김바우가 나오는데 이는 김일성을 모델로 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25] 김일성을 찬양하는 어용문학의 정점에 있는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20]을 흉내낸 것으로 보인다. 작가 개인의 성향이 반영된 것일테지만 1990년대 이후 남한 사회가 좌경화되어 가면서 김일성을 찬양하거나 미화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지금은 김일성 일족을 북한 주장대로 "백두혈통"이라 부르며 상전 모시듯 하는 사람들이 많다.

참고 자료

2부 종족주의의 상징과 환상 / 12. 백두산 신화의 내막 (이영훈)
백두산 체험 / 소중화의 상징 /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 / 백두 광명성의 출현 / 남북 공명의 정신사 / 백두산 천지의 네 사람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백두산에 얽힌 전설·신화 중앙일보 1985.03.04
  2. 백두산 주변국 건국신화 문화콘텐츠닷컴
  3. 단군 신화에 빠진 김일성, 개천절 모르는 북한 주민들 동아일보 주성하기자 블로그 2019-10-04
  4. 4.0 4.1 민태원(閔泰瑗), 白頭山行(백두산행) : 1회 동아일보 1921-08-21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2회 1921.08.22 동아일보 1면
    白頭山行(백두산행) : 최종(17회) 1921.09.08 동아일보 1면
  5. 5.0 5.1 최남선(崔南善),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一(일)) 1926.07.28 동아일보 1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十八(팔십팔)) 1927.01.22 동아일보 4면
    白頭山覲叅(백두산근참) (八九(팔구)) : 최종 동아일보 1927-01-23 4면
  6. 6.0 6.1 횡설수설 1990.04.01 동아일보 1면
  7. 7.0 7.1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의 [단군론] 77회 연재
    壇君論(단군론) (一(일)) 1926.03.03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二(이)) 1926.03.04 동아일보 1면
    壇君論(단군론) (七十七(칠십칠)) 동아일보 1926-07-25 1면
  8. 발해(渤海, 698년 ~ 926년) - 위키백과
  9. 묘향산, 묘한 향기에 산도 사람도 취하다 한겨레신문 2005-10-26
  10. 10.0 10.1 정우봉(鄭雨峰), 신자료를 통해 본 18세기 白頭山 여행과 그 의미 大東文化硏究 제100집
  11. [최선웅의 고지도이야기 83] 우리나라 최초 '서명응의 백두산등행도'
  12. [간도오딧세이] 1885년 10월 19일 백두산에서는…
  13.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 [2-2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었나?] (기파랑, 2007년 05월 21일)
  14. 한글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이자 민족의식을 일깨운 역사학자, 권덕규(權悳奎) 국립중앙도서관 > 역사 > 한국의위대한인물
  15. 권덕규(權悳奎, 1890~195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6. 권덕규(權悳奎), <白頭山記行(백두산기행)이끗나 고納凉會(납량회)가마추임> (一(일)) 1921.10.03동아일보 1면
    <白頭山記行(백두산기행)이끗나 고納凉會(납량회)가마추임> (三(삼)) 1921.10.05 동아일보 1면
    <白頭山記行(백두산기행)이 끗나고 納凉會(납량회)가 마추임> (六(육)) 1921.10.08 동아일보 1면
  17. 消息(소식) : 최남선, 박한영과 동행, 24일 밤 백두산으로 출발 동아일보 1926-07-25 1면
  18. 六堂崔南善著(육당최남선저) 白頭山覲參記(백두산근참기) 1927.07.21 동아일보 5면 광고 : 漢城圖書株式會社(한성도서주식회사) / 白頭山覲參記(백두산근참기)
  19. 『六堂(육당)의 近業(근업) 白頭山記(백두산기)』를 닑고 (一(일)) 1927.09.08 동아일보 3면: 六堂(육당)의 近業(근업)[白頭山記(백두산기)]를 닑고 (五(오) : 최종) 1927.09.12 동아일보 3면
  20. 20.0 20.1 ≪백두산(白頭山)≫ - 위키문헌 : 조기천의 ≪백두산≫ 전문이 나오나 어떤 판본인지는 불명이다.
  21.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3회)  : 〈金日成直屬(김일성직속) 記者(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 년 05 월 16일 2면)
  22.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 북한민주화 전략집⟩, (시대정신, 2006.04.15) p.40.
  23. 다시 외워보는 '우리의 맹세' 조갑제닷컴 2011-12-09
  24.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 국립중앙도서관
  25. [박정진의청심청담] ‘주인 지식인’ 없는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세계일보 2019-04-09
  26. 진보시인 고은의 민낯 자유일보 2018.02.08
  27. “남북 정상 백두산 방문, 일주일 전 준비” RFA 2018-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