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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4대 영웅}}
{{역사인물
|이름  = 백선엽
|영어명 = 白善燁
|그림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9/9d/Generak_Baek_Seon-yeop.jpg/180px-Generak_Baek_Seon-yeop.jpg
|그림설명  =
|본명  =
|성별  = 남성
|출생  = 1920년 11월 23일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별명  = 호(號)는 우촌(愚村)·운산(雲山)
|사망  =
|사망일 = 2020년 7월 10일 (99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울대학교병원
|묘지  =
|본관  =
|주소지 =
|생존기간 =
|직업  =
|병역  =
|국적 = 대한민국
|직책  = 제19대 교통부 장관
|임기  = 1969년 10월 21일 ~ 1971년 1월 28일
|전임  = [[강서룡]]
|후임  = [[장성환]]
|지도자직책1  = 대통령
  |지도자이름1  = [[박정희]]
|지도자직책2  =  총리
  |지도자이름2  = [[정일권]]
|정당  =
|학력 =  국방대학교
|경력 =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br>캐나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br>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br>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br>한국에타놀 사장
|종교 = [[개신교]]
|가족 =
|부모  = 백윤상(부), 방효열(모)
|형제  = 백복엽(누나), [[백인엽]](아우)
|배우자 =
|자녀  =
|친인척 =
|수상  =
|웹사이트=
}}
'''백선엽'''(白善燁, 1920.11.23 ~ 2020.07.10)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최초의 4성 장군이다.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방어했다.
'''백선엽'''(白善燁, 1920.11.23 ~ 2020.07.10)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최초의 4성 장군이다.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방어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평양으로 이사했다<ref name="bir">[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02/2020010200287.html <nowiki>[2020 신년특집]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1]</nowiki> 이광수, 김일성 그리고 이병철] 조선일보 2020.01.02</ref>. 고향 마을과 [[김일성]]이 태어난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 마을과는 거리가 40리 (16km) 정도라고 한다. 평양사범학교와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있다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냈다. 평양에 온 소련군 [[김일성|진지첸]] 대위가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의 집회에도 참석했다고 하며, 조만식 선생을 찾아온 [[김일성]]을 몇번 보았다고 한다. 1945년 12월말 월남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평양으로 이사했다<ref name="bir">[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02/2020010200287.html <nowiki>[2020 신년특집]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1] 이광수, 김일성 그리고 이병철</nowiki>] 조선일보 2020.01.02</ref>. 고향 마을과 [[김일성]]이 태어난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 마을과는 거리가 40리 (16km) 정도라고 한다. 평양사범학교와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있다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냈다. 평양에 온 소련군 [[김일성|진지첸]] 대위가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의 집회에도 참석했다고 하며, 조만식 선생을 찾아온 [[김일성]]을 몇번 보았다고 한다. 1945년 12월말 월남했다.


==약력<ref name="hoe">[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0100329205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9-01&officeId=00032&pageNo=5&printNo=13209&publishType=00020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JS4H6gh0D5Y 백선엽, 간도특설대 논란 종결자 정안기 박사] 류석춘의틀딱TV 2020. 7. 14.</ref>==
==약력<ref name="hoe">[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0100329205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9-01&officeId=00032&pageNo=5&printNo=13209&publishType=00020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JS4H6gh0D5Y 백선엽, 간도특설대 논란 종결자 정안기 박사] 류석춘의틀딱TV 2020. 7. 1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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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도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도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나?==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나?==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전속된 1943년 2월에는 만주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은 전무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전속된 1943년 2월에는 만주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은 전무했다.  
*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55434 <nowiki>[김용삼 칼럼]</nowiki> 백선엽의 간도특설대가 한국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은 완전 가짜] 펜앤드마이크 2022.07.07
{{인용문|지난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 회고록 『若き將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草思社)에 의하면 그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동부 만주의 파오칭(寶淸)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단(단은 연대를 뜻함)에서 견습 사관 생활을 한 후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 후 자무스(佳木斯)에 위치한 만주군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간도특설대]]로 전임된 것은 1943년 2월. 이때부터 8·15 해방 때까지 1년 8개월간 [[간도특설대]]에 근무하게 된다. 백선엽과 함께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한국인은 [[김백일]](후에 한국군 중장), 김석범(해병대 사령관),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이룡(한국군 소장), 윤춘근(한국군 소장) 등이었다.<br>
:.............
 
할 일이 없어진 [[간도특설대]]는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 현재의 허베이성, 랴오닝성 및 내몽골 자치구 교차 지역)으로 이동 명령을 받았다. 이 무렵 러허성에서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이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간도특설대는 1944년 1월 15일 러허성 링위안(凌源) 역에 도착, 이때부터 그해 가을까지 주로 핑취안(平泉)현 위슈린쯔(楡樹林子) 일대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 후에는 미윈(密雲)현 스샤(石匣)진, 허베이성 롼난(灤南)현 쓰지좡(可集庄)진으로 주둔지를 옮겨가며 팔로군과 곳곳에서 접전을 벌였다. 그들은 롼핑(灤平) 이서(以西)의 만군 담당 토벌지구를 전전하며 팔로군을 중심으로 한 항일부대와 전투를 벌였다고 김효순의 『간도특설대』는 기록하고 있다(김효순, 앞의 책, 277~278쪽).
 
그렇다면 여기서 러허성으로 이동한 간도특설대가 맞서 싸운 대상이 누구였나가 쟁점으로 등장한다. [[간도특설대]]의 적은 팔로군이었다. 팔로군은 신4군과 함께 [[모택동|마오쩌둥(毛澤東)]] 산하의 주력을 형성한 부대다.}}
 
 
백선엽 장군이나 [[김백일]]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기는 1943년부터인데, 이때는 만주에 어떠한 조선독립군도 없었다. 이분들이 간도특설대에서 조선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단은 독립군이 백선엽이 임관 하기도 전 최소 몇십년 전 자유시참변으로 완전히 와해된 상태였다.  만주에 일본 육군 주도에 만주국이 들어섰는데 어떻게 독립군이 있을 수 있는가? 당시 한반도에서도 독립군이나 의병은 다 토벌대상으로 씨가 말라서 만주로 간건데 그 독립군이 다 자유시참변에 와해 된지 오래인데 거기다 일본이 만주까지 진출했는데 만주에 독립군이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산하 조직으로 [[코민테른]]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투쟁 내용도 양민에 대한 약탈, 방화, 납치, 살인을 일삼아 마적단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1939년 10월 ~ 1941년 3월 치안숙정 작전기간의 집중토벌로 항일연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소수의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배속된다.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산하 조직으로 [[코민테른]]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투쟁 내용도 양민에 대한 약탈, 방화, 납치, 살인을 일삼아 마적단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1939년 10월 ~ 1941년 3월 치안숙정 작전기간의 집중토벌로 항일연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소수의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배속된다.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동북항일연군은 조선독립을 위한 부대가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 소속으로 개네 입장에서 빼앗긴 땅 만주를 회복하고 중국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게릴라 부대로 조선독립군이 아니다. 근데 이조차도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 되기 전에 와해되서 생존자들은 죄다 소련으로 피신한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서 토벌 한 것은 마적떼나 비적이었다.
좌파들은 백선엽이 무슨 회고록에서 독립군 토벌한 걸 실토했다라고 하는데 그것도 왜곡이다. 백선엽은 토벌하는 대상 중에 동포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라고 이야기 했다.  동포=독립군이 아니다. 동북항일연군도 조선인 이었지만 독립군이 아니다. 마적떼나 비적도 독립군이 아니다. 조선인이었지만 이들은 조선독립을 목표로 활동하지도 않았다.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 부대는 조선인 양민들을 상대로 무수한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자행했고, 이를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도 엄청나게 많다.<ref>[[동북항일연군#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 우남위키</ref>


* [https://www.youtube.com/watch?v=JS4H6gh0D5Y 백선엽, 간도특설대 논란 종결자 정안기 박사] 류석춘의틀딱TV 2020. 7. 14.
* [https://www.youtube.com/watch?v=JS4H6gh0D5Y 백선엽, 간도특설대 논란 종결자 정안기 박사] 류석춘의틀딱TV 2020.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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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기 박사의 해설중 [[김일성]]과 [[보천보 사건]]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많다. 이 사건의 주역 [[김일성 (6사장)|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또한 그는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가짜설|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가 맞다.
정안기 박사의 해설중 [[김일성]]과 [[보천보 사건]]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많다. 이 사건의 주역 [[김일성 (6사장)|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또한 그는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가짜설|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가 맞다.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
[[박정희]], 백선엽 등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 대개 일본의 패배를 예측하고 있었고,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일본군 또는 만주군에서 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당시 사관학교를 다니던 생도들의 고뇌가 어떠했는지는 아래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을 친일파로 모는 것은 정치적 목적의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 백선엽 등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 대개 일본의 패배를 예측하고 있었고,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도 독립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일본군 또는 만주군에서 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당시 사관학교를 다니던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가 어떠했는지는 아래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을 친일파로 모는 것은 정치적 목적의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는다.
* [https://lkp.news/news/article.html?no=9875 ‘친일파(親日派) 마녀(魔女) 사냥’의 광풍(狂風)에 부쳐]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리버티코리아포스트 2020.07.20
* [https://lkp.news/news/article.html?no=9875 ‘친일파(親日派) 마녀(魔女) 사냥’의 광풍(狂風)에 부쳐]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리버티코리아포스트 2020.07.20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A7%80%EB%9F%89_(1924%EB%85%84) 장지량(張志良, 1924~2015)]이 일본 육사 생도 시절 ‘조선인(朝鮮人)’ 생도로서 겪었던 고뇌와 애환(哀歡)을 기록했던 ≪내정일지(內情日誌)≫라는 제목의 수기(手記) 내용을 발췌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A7%80%EB%9F%89_(1924%EB%85%84) 장지량(張志良, 1924~2015)]이 일본 육사 생도 시절 ‘조선인(朝鮮人)’ 생도로서 겪었던 고뇌와 애환(哀歡)을 기록했던 ≪내정일지(內情日誌)≫라는 제목의 수기(手記) 내용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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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논란==
==친일 논란==
*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724/120384306/2 현충원서 '백선엽 친일' 문구 삭제…보훈부 “법적 근거 없어”] 동아일보 2023.07.24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72413580002930 보훈부 "백선엽 국립묘지 홈페이지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 삭제"] 한국일보 2023.07.24
:"불순한 의도로 명예 훼손…법적·절차적 정당성 없어"
:최근 동상 건립, 뮤지컬 제작 등 재조명 활발
:광복회 "국민적 공감대 없는 일방적 판단 유감"
* [https://www.youtube.com/watch?v=rZXSW6mADL4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면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앞잡이다(feat.간도특설대)] 류석춘의틀딱TV 2020. 6. 9.
* [https://www.youtube.com/watch?v=rZXSW6mADL4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면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앞잡이다(feat.간도특설대)] 류석춘의틀딱TV 2020. 6. 9.
<center><youtube>https://www.youtube.com/watch?v=rZXSW6mADL4</youtube></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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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공부해서 사시합격한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 앞잡이===
===유신헌법 공부해서 사시합격한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 앞잡이===
노무현은 1975년, 문재인은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유신헌법은 1980년 말에 5공 헌법으로 개정되었으므로 두 사람 다 출세를 위해 유신헌법을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유신 앞잡이가 맞다. 노무현은 유신 판사였기도 하다. 누구를 친일파라 탓하는가?
[[노무현]]은 1975년, [[문재인]]은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유신헌법은 1980년 말에 5공 헌법으로 개정되었으므로 두 사람 다 출세를 위해 유신헌법을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유신 앞잡이가 맞다. 노무현은 유신 판사였기도 하다. 누구를 친일파라 탓하는가?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60400209207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6-04&officeId=00020&pageNo=7&printNo=18050&publishType=00020 司法試驗(사법시험) 2차 百(백)41명 合格(합격) 最高得點(최고득점) 趙載淵(조재연)씨 … 여자도 3名(명)] 1980.06.04 동아일보 7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60400209207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6-04&officeId=00020&pageNo=7&printNo=18050&publishType=00020 司法試驗(사법시험) 2차 百(백)41명 合格(합격) 最高得點(최고득점) 趙載淵(조재연)씨 … 여자도 3名(명)] 1980.06.04 동아일보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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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2700209207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27&officeId=00020&pageNo=7&printNo=16457&publishType=00020 司法考試(사법고시) 합격자 60명發表(발표) 最高得㸃(최고득점) 柳聖秀(유성수)씨, 紅一㸃(홍일점)도 끼여] 1975.03.27 동아일보 7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2700209207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27&officeId=00020&pageNo=7&printNo=16457&publishType=00020 司法考試(사법고시) 합격자 60명發表(발표) 最高得㸃(최고득점) 柳聖秀(유성수)씨, 紅一㸃(홍일점)도 끼여] 1975.03.27 동아일보 7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2700099207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5-03-27&officeId=00009&pageNo=7&printNo=2790&publishType=00020 司法試験(사법시험) 2次(차) 합격 최고得点 柳聖秀(득점 유성수)군] 1975.03.27 매일경제 7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2700099207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5-03-27&officeId=00009&pageNo=7&printNo=2790&publishType=00020 司法試験(사법시험) 2次(차) 합격 최고得点 柳聖秀(득점 유성수)군] 1975.03.27 매일경제 7면


===마이클 브린,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
===마이클 브린,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3&aid=0003547953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3&aid=0003547953 <nowiki>[朝鮮칼럼 The Column]</nowiki>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 조선일보 2020.07.21  A34면 1단<ref>https://youtu.be/q90VeK2fcPw 영국인이 말한다. "백선엽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3가지 이유"</ref>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ref>https://youtu.be/q90VeK2fcPw 영국인이 말한다. "백선엽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3가지 이유"</ref>
{{인용문|백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이유는 크게 3가지다.
<ref>백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게 부역의 증거는 아니다. [[만주 제국군]]은 [[대한민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백 장군도 자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들을 뒤쫓았고, 백 장군은 적을 거의 보지도 못했으며 실제 전투를 겪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게 부역의 증거는 아니다. [[만주 제국군]]은 [[대한민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백 장군도 자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들을 뒤쫓았고, 백 장군은 적을 거의 보지도 못했으며 실제 전투를 겪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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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지금 반대파들이 악용하는 부역 기준은 정부 스스로 세운 원칙에도 어긋난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가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전범]](戰犯)으로 분류된 조선인 83명을 사면했다. 그들이 신분이 그랬을 뿐이지 실제 전범으로 볼 수 있는 행위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백 장군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지 [[친일 부역]] 행위를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원래 신분이 어떠냐를 들어 처벌하는 건 북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
둘째, 지금 반대파들이 악용하는 부역 기준은 정부 스스로 세운 원칙에도 어긋난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가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전범]](戰犯)으로 분류된 조선인 83명을 사면했다. 그들이 신분이 그랬을 뿐이지 실제 전범으로 볼 수 있는 행위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백 장군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지 [[친일 부역]] 행위를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원래 신분이 어떠냐를 들어 처벌하는 건 북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


셋째, 백 장군 반대 세력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운동장을 옮겨 놓고 논쟁을 벌인다. 가만 생각해보자. 나라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세우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의 총체다. 백 장군이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25세 때 해방됐지만 바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는 이후 목숨을 걸고 다른 반쪽을 지켰고, 그때 대한민국은 겨우 건국 18개월에 불과했다.
셋째, 백 장군 반대 세력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운동장을 옮겨 놓고 논쟁을 벌인다. 가만 생각해보자. 나라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세우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의 총체다. 백 장군이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25세 때 해방됐지만 바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는 이후 목숨을 걸고 다른 반쪽을 지켰고, 그때 대한민국은 겨우 건국 18개월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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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백선엽, 누가 민족반역자인가?===
북한 [[김일성]]은 일제시대에 만주의 [[중공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비적질인지 항일투쟁인지 구분하기 힘든 투쟁을 좀 하긴 했지만, 이후 소련으로 도주해서 소련군에 복무하는 동안 소련군 상관들에게 잘 보여 [[스탈린]]의 발탁과 소련군 무력의 일방적인 도움을 받아 북한의 핵심 권력을 장악하고, 북한주민들에게 귀속되어야할 국가의 주권을 강탈하여 자신이 차지했다. 이후 그는 북한 동포들을 일제보다 더 혹심하게 탄압하고, [[6.25|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전국을 초토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았던 북으로 간 항일투사들을 자신의 직계만 빼고 거의 모두 처형, 숙청하였다. 종국에는 국가를 김일성 일족 왕조로 변질시키고, 인민들을 김씨일족의 노예화하였다. 이런 자는 항일투쟁을 했다며 그 후의 모든 과오를 무시한 채 영웅으로 떠받들고, 비록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전력은 있지만, 그렇다고 동포들에게 무슨 해를 끼친 일도 없고, 김일성의 남침에 맞서 나라를 구해낸 백선엽 장군은 모든 공은 무시한채 오로지 간도특설대 경력만을 문제삼아 민족반역자로 모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자원해서 김일성 일족의 선전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김일성]]은 북한을 자신이 해방시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앞잡이 노릇으로 권력을 차지한 것에 불과한 자신이 마치 해방시킨 것처럼 역사를 날조했고, 나아가 국가를 자기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을 오로지 김씨 일족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노예로 만들었다. 반면에 백선엽 장군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살아남지 못하고, 국민들은 북한 주민과 마찬가지로 김일성 일족의 노비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누가 영웅이고, 누가 민족 반역자이겠는가? 국민들이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또다시 나라를 외국에 빼앗기거나, [[김일성]]과 같은 희대의 항일팔이 사기꾼 무뢰배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평가===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최고의 전쟁영웅이자 명장이다. 그가 없었다면 낙동강방어선이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을지도 의문일 정도. 죄익들에게 친일파로 매도당하고 [[문재인 정부]] 등 정작 본국에서도 홀대 했지만, 미국에서는 타국의 전쟁영웅을 극진하게 대접했고 예를 다하고 있다. 얼마나 홀대 했으면 말년은 미군시설에서 지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전쟁영웅을 이렇게 홀대하지 않는다. 전쟁영웅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전쟁영웅 보다 데모하던 운동권, 수학여행가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ref>세월호 유가족들</ref>이 국가로부터 훨씬 대우 받는 나라가 한국이다.
 
 
 
애초에 백선엽이 태어 났을 때 대한제국은 망한 상태 태어났을 때부터 자기 나라가 일본인 상태였다.  신분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그나마 출세하려고 기회의 땅 만주로 간 거고 거기서도 끽해야 초급장교였다. 지금 잣대를 들이대서 친일파다 뭐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인생이 무짜르듯 그렇게 간단하게 아니고.
이광수 등이 일본군 지원 유세를 할 때 이야기 한 게 조선을 위해 입대하라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근대적 군대가 없어서 망했다. 일본에 가서 군대를 배우자. 그리고 독립은 현실적으로 힘드냐 군대에 가는 댓가로 참정권이라고 얻자 조선을 위해 입대하라 했다. 실제로 이런 주장에 감동감화된 조선인 청년들이 많았다. 
이승만과 다르게 국제정세를 예측 못해서 독립은 불가능하다 판단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군대를 배워 이런 사람들이 6.25 때 결국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백선엽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참고 자료==
==참고 자료==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0100329205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9-01&officeId=00032&pageNo=5&printNo=13209&publishType=00020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0100329205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9-01&officeId=00032&pageNo=5&printNo=13209&publishType=00020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
==각주==
==각주==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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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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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6.25 전쟁]]
[[분류:6.25 전쟁 참전자]]
[[분류:월남자]]
[[분류:월남자]]
[[분류:만주군관학교 출신]]
{{분류 |1920년 출생|2020년 사망|수원 백씨|국방대학교 출신|육군사관학교 출신|전쟁 유공자|한양대학교 교수|서울대학교 교수|연세대학교 교수|고려대학교 교수|인하대학교 교수|국방대학교 교수}}
{{ㅂ|육군참모총장|월남자|박정희정부 인사|대사 | }}

2023년 8월 30일 (수) 06:45 기준 최신판

6.25 전쟁 4대 영웅[1]
미국 국기.jpg
맥아더
미국 국기.jpg
리지웨이
태극기.jpg
백선엽
태극기.jpg
김동석
백선엽
白善燁
180px-Generak_Baek_Seon-yeop.jpg
제19대 교통부 장관
1969년 10월 21일 ~ 1971년 1월 28일

강서룡

장성환
대통령
총리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성별
남성
출생
1920년 11월 23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사망일
2020년 7월 10일 (99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울대학교병원
경력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캐나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한국에타놀 사장
학력
국방대학교
종교
부모
백윤상(부), 방효열(모)
형제
백복엽(누나), 백인엽(아우)
별명
호(號)는 우촌(愚村)·운산(雲山)

백선엽(白善燁, 1920.11.23 ~ 2020.07.10)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최초의 4성 장군이다.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방어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평양으로 이사했다[2]. 고향 마을과 김일성이 태어난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 마을과는 거리가 40리 (16km) 정도라고 한다. 평양사범학교와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있다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냈다.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의 집회에도 참석했다고 하며, 조만식 선생을 찾아온 김일성을 몇번 보았다고 한다. 1945년 12월말 월남했다.

약력[3][4]

  •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江西郡 江西面 德興里)에서 출생[2][3]
  • 1926년 평양으로 이사
  • 1939년 평양사범학교 졸업
  • 1940년 봉천군관학교 입교 (제9기생)
  • 1941년 12월 견습사관 (보병 제28단)
  • 1942년 6월 만주군 소위 임관 (보병 제26단 신병훈련소 소대장)
  •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속
  • 1944년 11월 제1호 작전 (대륙타통[大陸打通] 작전), 북지(北支) 치안전 참가
  • 1945년 봄 전속, 연길 국경경비대 근무
  • 1945년 8월 만주국 패망으로 만주군 해산. (당시 계급 중위)
  • 1945년 8.15 해방 후 귀국.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관
  • 1945년 12월말 월남. (조만식 선생은 소련군의 탄압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됨.)

부음

  • 백선엽 장군 ‘영면’…“미한 동맹 창시자”
  • 모건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은 14일 성명에서 “미국은 백선엽 장군의 죽음에 대해 한국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그러면서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서 한국 전쟁 중 조국에 대한 그의 봉사는 오늘날까지 미국과 한국 모두 계속 지키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싸움의 상징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백 장군은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나라를 위해 매우 탁월하게 봉사했고,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덧붙였습니다.[5]
  •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주한미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했던 퇴역 4성 장군 4명이 VOA를 통해,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백선엽 장군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백선엽 장군과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전 사령관들은 하나같이 백 장군을 “정신적 지주”로 부르며 그가 한국의 생존과 평화적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6]
백 장군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존재 안 할 수도
전대협-육사구국동지회 등,"비서 성희롱한 파렴치범을 서울시장(葬)으로 모시면서 구국의 영웅의 빈소를 막는다는게 말이 되느냐"
6.25 전투서 백척간두의 조국 구한 영웅
32세에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에 올라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가장 존경한 한국 군인
6·25전쟁의 영웅인 백선엽(100)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 별세했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난 백 장군은 6·25 전쟁 초반인 1950년 8월 대구에 진출하려던 북한군을 다부동 전투에서 물리쳤다. 이 승리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말하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올라갔고 전세를 뒤집었다.

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도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나?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전속된 1943년 2월에는 만주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은 전무했다.

지난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 회고록 『若き將軍の朝鮮戦争(젊은 장군의 한국전쟁)』(草思社)에 의하면 그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동부 만주의 파오칭(寶淸)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단(단은 연대를 뜻함)에서 견습 사관 생활을 한 후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 후 자무스(佳木斯)에 위치한 만주군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간도특설대로 전임된 것은 1943년 2월. 이때부터 8·15 해방 때까지 1년 8개월간 간도특설대에 근무하게 된다. 백선엽과 함께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한국인은 김백일(후에 한국군 중장), 김석범(해병대 사령관), 신현준(초대 해병대 사령관), 이룡(한국군 소장), 윤춘근(한국군 소장) 등이었다.

.............

할 일이 없어진 간도특설대는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 현재의 허베이성, 랴오닝성 및 내몽골 자치구 교차 지역)으로 이동 명령을 받았다. 이 무렵 러허성에서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이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간도특설대는 1944년 1월 15일 러허성 링위안(凌源) 역에 도착, 이때부터 그해 가을까지 주로 핑취안(平泉)현 위슈린쯔(楡樹林子) 일대에서 팔로군을 대상으로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 후에는 미윈(密雲)현 스샤(石匣)진, 허베이성 롼난(灤南)현 쓰지좡(可集庄)진으로 주둔지를 옮겨가며 팔로군과 곳곳에서 접전을 벌였다. 그들은 롼핑(灤平) 이서(以西)의 만군 담당 토벌지구를 전전하며 팔로군을 중심으로 한 항일부대와 전투를 벌였다고 김효순의 『간도특설대』는 기록하고 있다(김효순, 앞의 책, 277~278쪽).

그렇다면 여기서 러허성으로 이동한 간도특설대가 맞서 싸운 대상이 누구였나가 쟁점으로 등장한다. 간도특설대의 적은 팔로군이었다. 팔로군은 신4군과 함께 마오쩌둥(毛澤東) 산하의 주력을 형성한 부대다.


백선엽 장군이나 김백일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기는 1943년부터인데, 이때는 만주에 어떠한 조선독립군도 없었다. 이분들이 간도특설대에서 조선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단은 독립군이 백선엽이 임관 하기도 전 최소 몇십년 전 자유시참변으로 완전히 와해된 상태였다. 만주에 일본 육군 주도에 만주국이 들어섰는데 어떻게 독립군이 있을 수 있는가? 당시 한반도에서도 독립군이나 의병은 다 토벌대상으로 씨가 말라서 만주로 간건데 그 독립군이 다 자유시참변에 와해 된지 오래인데 거기다 일본이 만주까지 진출했는데 만주에 독립군이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산하 조직으로 코민테른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투쟁 내용도 양민에 대한 약탈, 방화, 납치, 살인을 일삼아 마적단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1939년 10월 ~ 1941년 3월 치안숙정 작전기간의 집중토벌로 항일연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소수의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배속된다.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동북항일연군은 조선독립을 위한 부대가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 소속으로 개네 입장에서 빼앗긴 땅 만주를 회복하고 중국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게릴라 부대로 조선독립군이 아니다. 근데 이조차도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 되기 전에 와해되서 생존자들은 죄다 소련으로 피신한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서 토벌 한 것은 마적떼나 비적이었다.

좌파들은 백선엽이 무슨 회고록에서 독립군 토벌한 걸 실토했다라고 하는데 그것도 왜곡이다. 백선엽은 토벌하는 대상 중에 동포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라고 이야기 했다. 동포=독립군이 아니다. 동북항일연군도 조선인 이었지만 독립군이 아니다. 마적떼나 비적도 독립군이 아니다. 조선인이었지만 이들은 조선독립을 목표로 활동하지도 않았다.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 부대는 조선인 양민들을 상대로 무수한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자행했고, 이를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도 엄청나게 많다.[7]

정안기 박사의 해설중 김일성보천보 사건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많다. 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또한 그는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가 맞다.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

박정희, 백선엽 등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 대개 일본의 패배를 예측하고 있었고,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도 독립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일본군 또는 만주군에서 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당시 사관학교를 다니던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가 어떠했는지는 아래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을 친일파로 모는 것은 정치적 목적의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는다.

장지량(張志良, 1924~2015)이 일본 육사 생도 시절 ‘조선인(朝鮮人)’ 생도로서 겪었던 고뇌와 애환(哀歡)을 기록했던 ≪내정일지(內情日誌)≫라는 제목의 수기(手記) 내용을 발췌

백세 기념 대담

조선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창간되던 해에 태어난 100세의 백선엽(白善燁, 1920.11.23 ~ ) 장군과 김형석(金亨錫, 1920.04.23 ~ ) 연세대 명예교수의 대담을 주선했다.

"내 친척 할머니가 김일성 젖물려 키워… 두 아들이 공산당에 죽자 통탄"
金 "어릴 때 옆 동네 살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 놀라"

白 "김일성 평양 환영회 갔는데 군중들이 말도 안된다며 비웃어"

金 "친일파라는 춘원 없인 독립 못했을 것… 그 덕에 민족의식 키워" 白 "당시 최선 다해 실력 키우려 노력, 일본서 배울 건 배워야 했다"

金 "한국만큼 교육에 열정 쏟은 나라 없어… 그게 발전 거름 됐다

이병철, 사람 키우면 삼성 떠나도 한국에 남을 거니 괜찮다고 해"
총살 열흘 앞둔 박정희 "살려달라" 한마디… 백선엽 "그렇게 해봅시다"
白 "이승만, 美사령관들 불평하면 美 헌법정신 거론하며 꾸짖어"

金 "6·25는 시련이었지만 대한민국이 국제화되는 계기로 작용"

白 "사회주의적 개혁? 자유민주주의를 이길수 있는 것은 없어"

金 "이탈리아 前공산당원이 충고하더라, 절대 북한 믿지말라고"
종교 탄압하던 김일성, 뒤에선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아멘"
白 "김일성, 만주군관학교 출신 포섭하려 정일권 등에 접근"

金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 맡아 운영하던 중 北압박에 월남"

白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만나 한미방위조약 필요성 설득"

金 "미국보다 중국에 기우는 文정부, 어리석었다는 평가받을 것"

친일 논란

"불순한 의도로 명예 훼손…법적·절차적 정당성 없어"
최근 동상 건립, 뮤지컬 제작 등 재조명 활발
광복회 "국민적 공감대 없는 일방적 판단 유감"

유신헌법 공부해서 사시합격한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 앞잡이

노무현은 1975년, 문재인은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유신헌법은 1980년 말에 5공 헌법으로 개정되었으므로 두 사람 다 출세를 위해 유신헌법을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유신 앞잡이가 맞다. 노무현은 유신 판사였기도 하다. 누구를 친일파라 탓하는가?

司法試驗(사법시험) 百(백)41명 합격 최고득점 趙載淵(조재연)씨┄女子(여자)도 3명 1980.06.05 경향신문 7면
司法試験(사법시험) 2次(차) 합격 최고得点 柳聖秀(득점 유성수)군 1975.03.27 매일경제 7면

마이클 브린,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

백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게 부역의 증거는 아니다. 만주 제국군대한민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백 장군도 자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들을 뒤쫓았고, 백 장군은 적을 거의 보지도 못했으며 실제 전투를 겪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둘째, 지금 반대파들이 악용하는 부역 기준은 정부 스스로 세운 원칙에도 어긋난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가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전범(戰犯)으로 분류된 조선인 83명을 사면했다. 그들이 신분이 그랬을 뿐이지 실제 전범으로 볼 수 있는 행위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백 장군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지 친일 부역 행위를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원래 신분이 어떠냐를 들어 처벌하는 건 북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

셋째, 백 장군 반대 세력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운동장을 옮겨 놓고 논쟁을 벌인다. 가만 생각해보자. 나라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세우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의 총체다. 백 장군이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25세 때 해방됐지만 바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는 이후 목숨을 걸고 다른 반쪽을 지켰고, 그때 대한민국은 겨우 건국 18개월에 불과했다.

김일성과 백선엽, 누가 민족반역자인가?

북한 김일성은 일제시대에 만주의 중공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비적질인지 항일투쟁인지 구분하기 힘든 투쟁을 좀 하긴 했지만, 이후 소련으로 도주해서 소련군에 복무하는 동안 소련군 상관들에게 잘 보여 스탈린의 발탁과 소련군 무력의 일방적인 도움을 받아 북한의 핵심 권력을 장악하고, 북한주민들에게 귀속되어야할 국가의 주권을 강탈하여 자신이 차지했다. 이후 그는 북한 동포들을 일제보다 더 혹심하게 탄압하고,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전국을 초토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았던 북으로 간 항일투사들을 자신의 직계만 빼고 거의 모두 처형, 숙청하였다. 종국에는 국가를 김일성 일족 왕조로 변질시키고, 인민들을 김씨일족의 노예화하였다. 이런 자는 항일투쟁을 했다며 그 후의 모든 과오를 무시한 채 영웅으로 떠받들고, 비록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전력은 있지만, 그렇다고 동포들에게 무슨 해를 끼친 일도 없고, 김일성의 남침에 맞서 나라를 구해낸 백선엽 장군은 모든 공은 무시한채 오로지 간도특설대 경력만을 문제삼아 민족반역자로 모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자원해서 김일성 일족의 선전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김일성은 북한을 자신이 해방시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앞잡이 노릇으로 권력을 차지한 것에 불과한 자신이 마치 해방시킨 것처럼 역사를 날조했고, 나아가 국가를 자기 일족의 사유물로 만들고, 인민들을 오로지 김씨 일족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노예로 만들었다. 반면에 백선엽 장군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살아남지 못하고, 국민들은 북한 주민과 마찬가지로 김일성 일족의 노비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누가 영웅이고, 누가 민족 반역자이겠는가? 국민들이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또다시 나라를 외국에 빼앗기거나, 김일성과 같은 희대의 항일팔이 사기꾼 무뢰배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평가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 최고의 전쟁영웅이자 명장이다. 그가 없었다면 낙동강방어선이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을지도 의문일 정도. 죄익들에게 친일파로 매도당하고 문재인 정부 등 정작 본국에서도 홀대 했지만, 미국에서는 타국의 전쟁영웅을 극진하게 대접했고 예를 다하고 있다. 얼마나 홀대 했으면 말년은 미군시설에서 지냈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전쟁영웅을 이렇게 홀대하지 않는다. 전쟁영웅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전쟁영웅 보다 데모하던 운동권, 수학여행가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9]이 국가로부터 훨씬 대우 받는 나라가 한국이다.


애초에 백선엽이 태어 났을 때 대한제국은 망한 상태 태어났을 때부터 자기 나라가 일본인 상태였다. 신분이 높았던 것도 아니고. 그나마 출세하려고 기회의 땅 만주로 간 거고 거기서도 끽해야 초급장교였다. 지금 잣대를 들이대서 친일파다 뭐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인생이 무짜르듯 그렇게 간단하게 아니고.

이광수 등이 일본군 지원 유세를 할 때 이야기 한 게 조선을 위해 입대하라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근대적 군대가 없어서 망했다. 일본에 가서 군대를 배우자. 그리고 독립은 현실적으로 힘드냐 군대에 가는 댓가로 참정권이라고 얻자 조선을 위해 입대하라 했다. 실제로 이런 주장에 감동감화된 조선인 청년들이 많았다.

이승만과 다르게 국제정세를 예측 못해서 독립은 불가능하다 판단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군대를 배워 이런 사람들이 6.25 때 결국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백선엽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참고 자료


각주

  1. #
  2. 2.0 2.1 [2020 신년특집]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1] 이광수, 김일성 그리고 이병철 조선일보 2020.01.02
  3. 3.0 3.1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
  4. 백선엽, 간도특설대 논란 종결자 정안기 박사 류석춘의틀딱TV 2020. 7. 14.
  5. https://www.voakorea.com/korea/korea-politics/state-general-paik 국무부, 백선엽 장군 타계 애도 성명…“자유와 민주주의 위한 싸움의 상징”
  6. https://www.voakorea.com/korea/korea-politics/general-paik 전 미 사령관들 “백선엽 장군은 나의 스승...한국 생존과 번영에 막대한 기여”
  7. 동북항일연군의 비적(匪賊) 행위 우남위키
  8. https://youtu.be/q90VeK2fcPw 영국인이 말한다. "백선엽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3가지 이유"
  9. 세월호 유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