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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의 여러 부대에는 여자 대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입대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납치되어 왔다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사상적으로 동화되어가서 나중에는 열성 대원이 되기도 한 사람들이다. 여자들을 납치해온 동기는 부대의 취사, 재봉, 빨래 등 허드렛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주요한 동기 중 하나로 성문제 해소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남녀가 같은 부대에서 장기간 같이 숙식하다 보면 서로 눈이 맞는 경우도 생기고, 상호간에 여자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관이 부하의 여자를 빼앗기도 했다.
각지의 여러 부대에는 여자 대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입대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납치되어 왔다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사상적으로 동화되어가서 나중에는 열성 대원이 되기도 한 사람들이다. 여자들을 납치해온 동기는 부대의 취사, 재봉, 빨래 등 허드렛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주요한 동기 중 하나로 성문제 해소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남녀가 같은 부대에서 장기간 같이 숙식하다 보면 서로 눈이 맞는 경우도 생기고, 상호간에 여자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관이 부하의 여자를 빼앗기도 했다.


이 시절 [[김일성]]에게도 한성희, [[김혜순]] 등 여러 명의 여자가 거쳐갔고, 그의 아내가 된 [[김정숙 (1917년)|김정숙]]도 처음에는 다른 부대원의 아내였다.
이 시절 [[김일성]]에게도 [[한성희]], [[김혜순]] 등 여러 명의 여자가 거쳐갔고, 그의 아내가 된 [[김정숙 (1917년)|김정숙]]도 처음에는 다른 부대원의 아내였다.


이들이 일본군에 쫓겨 1940년 말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복무할 때는 지휘관들은 대부분 여자 대원들과 결혼해 있었다.  
이들이 일본군에 쫓겨 1940년 말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복무할 때는 지휘관들은 대부분 여자 대원들과 결혼해 있었다.  

2023년 5월 26일 (금) 12:17 기준 최신판

위안부 문제는 어느 군대에나 따라 다닌 것으로 북한 인민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해방 전 만주 빨치산 시기

김일성 등 해방 후 북한 인민군의 최고 지휘부 중 다수는 만주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출신들이다. 만주 빨치산들의 여자 문제는 어떠했던가?

동북항일연군은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 부대로 만주 각지에 소부대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들은 부대 유지에 필요한 보급품과 인력을 자체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를 무수히 자행했다. 그러다 가끔씩은 일본군이나 만주군과 교전을 하기도 했다.

각지의 여러 부대에는 여자 대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입대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납치되어 왔다가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거주하며 사상적으로 동화되어가서 나중에는 열성 대원이 되기도 한 사람들이다. 여자들을 납치해온 동기는 부대의 취사, 재봉, 빨래 등 허드렛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주요한 동기 중 하나로 성문제 해소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남녀가 같은 부대에서 장기간 같이 숙식하다 보면 서로 눈이 맞는 경우도 생기고, 상호간에 여자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관이 부하의 여자를 빼앗기도 했다.

이 시절 김일성에게도 한성희, 김혜순 등 여러 명의 여자가 거쳐갔고, 그의 아내가 된 김정숙도 처음에는 다른 부대원의 아내였다.

이들이 일본군에 쫓겨 1940년 말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복무할 때는 지휘관들은 대부분 여자 대원들과 결혼해 있었다.

빨치산들의 여성 납치 기사

시인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 ~ 1958)이 간행하던 잡지 《삼천리(三千里)》에는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이 납치해간 여자들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1.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2. 귀순한 여당원과 김일성 (歸順한 女黨員과 金日成), 그의 운명(運命)은 장차 엇더케 될가 《삼천리(三千里) 제10권 제11호》 (1938년 11월 01일)
  3. 김일성 비중에 무장 여군(金日成 匪中에 武裝 女群), 납치(拉致)된 二十五名 무사(無事)히 돌아오다 《삼천리(三千里) 제12권 제4호》 (1940년 04월 01일)

소련 군정 시기 소련군의 만행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수의 병력을 잃었다. 유럽전선의 대독전 종료 후 극동에서 대일본전을 벌일 때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병사들의 교육 수준은 말할 수 없이 낮았고, 죄수 출신도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북한에서 온갖 행패를 부렸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해방된 지 이틀 후인 17일 평양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중학교 3년 이상 남학생들은 학생 治安(치안)대원이 되어 평양의 주요거리들에 배치되었는데 22일부터 소련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USA 표시가 분명한 미국제 지프와 트럭을 탄 소련 군인들이 평양거리에 밀려들어오자 거리 곳곳에서는 ‘다와이(약탈)’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전차길이 있는 평양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지프를 타고 접근해 온 소련군 장교가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다와이’를 연발하기에 그 시계를 벗어 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아버지가 사준 ‘스위스 12석’ 손목시계였다.

자기들이 해방시켜 주었다는 식민지의 중학생 손목시계를 ‘다와이’하는 이 장교를 보면서 ‘공산주의는 사람 못살 주의로구나’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손목시계를 ‘다와이’ 당한 지 이틀 후, 나는 평양에서 가장 번화한 조선은행 앞 네거리에서 대낮에 소련군 병사들이 집단 강간을 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개가 交尾(교미)를 해도 구경꾼이 몰려드는 데, 번잡한 네거리에서 한 여자를 뉘어놓고 5~6명의 병사가 집단 강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소련 군인 하나가 다발총을 하늘에 대고 드르륵 드르륵… 쏘면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카레스케 노- 야폰스키’(조선 사람 아니다. 일본 사람이다) 참으로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이었다.

소련 군인들의 집단 强姦(강간)소동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조선인 거주지역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큰 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골목길 입구에는 나무판자와 철조망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작은 출입구를 만들어 놓고 보초를 서게 되었는가 하면 한옥집 조선인 거주지역들에서는 소련 군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고 나와 두들겼다.

그러면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부지깽이로 두드리게 되고 여자들은 숨고 남자들은 골목 밖으로 나와서 침입해온 소련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었다. 이래서 해방이 된 평양에서는 편하게 잠잘 날이 드물었다.

내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의 경우는 수업시간에도 소련 군인들의 ‘다와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평양 비행장 옆에 있었던 탓으로 소련군이 점유한 까닭에 평양역 부근 일본인 소학교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2층인 이 학교의 아래층에는 만주에서 철수해 온 일본인 피난민들이 있었고 우리는 2층에서 공부를 했다.

소련 군인들은 우리가 수업중인 대낮에도 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마담 다와이‘(여자를 내놔라)를 연발하며 소련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옥상(부인) 야라렛다요(당했다)’ 등 비명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도망치는 피난민들로 온 학교 건물이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일본인 피난민 속의 젊은 여자들은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소련군인들의 행패는 일본 피난민만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음악실에 있던 온갖 악기들을 한밤중에 몽땅 털어간 사건도 있었다. 이러니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위대한 소비에트를 향하여 배우자’는 소련 앞잡이 공산주의자들의 말이 학생들의 귀에 담아질 수가 없었다.

6.25 전쟁 시기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김일성 등 소련군 88여단의 조선인들을 데려와 앞잡이로 내세워 북한의 최고 권력을 쥐어준다. 이들이 북한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6.25 남침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중 북한군의 성문제는 어떠했는가?

여정(呂政, 1925~ ?)은 본명이 강수봉이며[1], 일제의 징병을 피해 1945년 5월 만주로 도피했다가 중국 공산당원이 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했다. 1950년 북한으로 돌아와 6.25에 참전하고, 훈장도 받으며 인민군 소장까지 승진했다. 1959년 연안파 숙청 때 투옥되어 10년간 징역을 살고 만기 출소하여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1990년 동아일보에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前) 북한군(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 수기(呂政 手記)』를 연재하여 한국에 알려졌다.[2]


그의 동아일보 연재 수기 중 4회에 6.25 전쟁 중 인민군들의 성문제는 어떠했는지 폭로하고 있다. 탈북자들은 오늘날 인민군에서 여군들의 처지도 6.25 당시와 별반 다를 것없이 유사하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여학생들도 징집됐다. 야전병원과 통신부대들에는 채 학생티가 가시지 않은 여군들로 가득찼다. 이들 중에 金聖愛(김성애)라는 처녀가 있었다. 그의 부친은 내각 사무국에서 참사로 근무하는 사람이다. 가정 바탕이 좋아서였는지 본인에게 뛰어난 재질이 있어서였는지 어쨌든 金聖愛(김성애)는 행운이 따라 최고사령관 시종비서로 배치를 받았다. 시종비서라는 기묘한 직함이 말해주듯 그가 하는 일이란 아침저녁으로金日成(김일성)에게 세숫물이나 발씻를 물을 떠다바치고 침대를 정리하거나 식사를 나르는 따위였다. 사람들이 金聖愛(김성애)가 金日成(김일성)의 숙소에 배치된 것을 처음으로 안 것은 金日成(김일성)이 평양을 버리고 남보다 먼저 후퇴하여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고산진 산골짜기에 파묻혀 있을 때부터였다. 중국군이 조선 땅에 파병돼 북상하는 남쪽군대에 반격을 가해 1950년 12월 6일 평양이 해방되고 기세를 몰아 서울과 원주까지 재진격할 정도로 전선 형세가 호전되자 최고사령부는 평양 북동쪽에 있는 대성산으로 이동해 왔다.

이때부터 최고사령관 근처에 해말쑥한 처녀 군인이 있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됐다. 1951년이 저물어갈 무렵 자꾸만 불어나는 배를 동여매는 것만으로는 감출수 없다고 생각한 金聖愛(김성애)는 최고사령관 거처에 자주 드나드는 黨(당) 중앙비서 (그 당시는 金日成(김일성)이 위원장, 朴憲永(박헌영)이 부위원장, 李承燁(이승엽), 許哥而(허가이), 朴正愛(박정애)는 비서였다) 朴正愛(박정애)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과 상대가 수령임을 알렸다. 朴(박)은 金日成(김일성)에게 金聖愛(김성애)가 곧 해산을 할 것같은데 어차피 성혼을 해야하지 않겠는가고 권했다. 이렇게 해서 누구도 모르게 한 쌍의 새부부가 탄생했다.

7년 지난뒤에야 공표

金日成(김일성)에게 金聖愛(김성애)라는 부인이 있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8년이다. 평안남도 대동군 조촌역에서 가까운 칠골에 金日成(김일성)의 생가가 있는데 여기에 14세 때 金成柱(김성주) 사진과 그의 선조들의 사진이 진열돼 있다. 여기에 1958년에 처음으로 金日成(김일성)과 金聖愛(김성애)가 어린 아이를 하나씩 안고 찍은 가족사진을 공개 진열했다. 그 사진에는 金正日(김정일)이 들어있지 않다. 金日成(김일성)의 전처 金貞淑(김정숙)은 正日(정일)과 受羅(수라) (1947년 세살 때 평양에서 익사), 경희 3남매를 낳고 1949년 9월 22일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그때까지만해도 金日成(김일성)을 절대적으로 존경해왔던 나는 이 사건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운한 생각마저 들었다. 2년전에 상처한 홀아비가 처녀와 사랑을 했다는 것은 시빗거리가 못될 수도 있다. 40세 중년남자가 19세의 딸자식 같은 처녀와 사통하는 경우가 전혀 없는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때인가? 전선에서는 매일 매시각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전사와 군관들이 金日成(김일성) 만세를 부르며 아까운 목숨을 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허탈감이 엄습했다.

최고사령관 金日成(김일성)을 본받아서인지는 몰라도 그 무렵 인민군의 기강은 문란할대로 문란했다. 인민군 정치안전국장 石山(석산) 중장은 군관 장령들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보고를 수없이 받았다. 그들의 타락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반발심을 야기했다. 병사들은 고급지휘관의 신변안전을 위해 배치한 간호장들을 「야전부인」이라고 부르며 야유했다. 어떤 지휘관들은 이런 「야전부인」을 자꾸만 새것으로 갈아치웠다. 병사들은 여군들이 훈장이나 메달을 달고 있는 것을 보기만하면 드러내놓고 「XX 훈장」하고 놀려댔다. 뿐만아니라 黨(당) 회의에 참석하러가는 여군들을 보고도 「xx 당원」이라고 비아냥댔다. 인민군 내부에는 여군들을 전선에 배치된 위안부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인정한 石山(석산) 중장은 51년가을 金日成(김일성)을 만나 사태를 보고하고 여군을 농락한 군관 장령들을 엄벌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기했다. 石山(석산)의 보고를 듣고난 金日成(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石山(석산) 동무를 똑똑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좁쌀이구만."

金日成(김일성)의 이 말은 타락한 고급군관들을 더욱 性(성)의 유희에 탐닉하게 만들었다. 보병 37사단 참모장은 자기 사단번호와 똑같은 37명의 여군을 유린했다. 25 기포여단은 해안방어부대로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어 간혹 물개를 잡을 수 있었다. 고급군관과 장성들 사이에서는 물개가 정력제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25여단장은 물개를 달라고 하루건너 걸려오는 장령들의 전화 때문에 제대로 근무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방에서도 당정간부들이 거리낌없이 여성들을 희롱했다. 이들이 유린한 여성 중에는 남편을 전선에 내보낸 군인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특히 중앙당조직부장 金烈(김렬)은 황해도에 사업지도 명목으로 내려가서 드러내놓고 여성들을 유린했다. 2군단직속 통신대대의 상위 선동원은 부대 주둔지 근처에 사는 한 여성에게 눈독을 들여 그 여성이 혼자서 산골밭에 김매러 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 갔다. 주변을 살피고난 그는 이 여성을 숲속에 끌고가서 위협했다. 이 여성이 인민군관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야무지게 힐난하자 상위는 유들유들하게 "金日成(김일성) 장군도 하는 일인데 뭘그리 딱딱하게 구오" 하면서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 여성은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위기를 모면한 뒤 상위의 소속부대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은 군단 黨(당) 감찰위원회에 회부 됐는데 위원회에서는 "金(김)장군도 하는 일인데..."라는 「무엄하기 짝이 없는」 말을 黨(당) 문서에 써넣어도 괜찮을지를 두고 한동안 골치를 앓았다.

수류탄 던지고 도망가

性(성) 문제는 당사자인 남녀간의 문제이다. 그러나 전쟁중에 사람들의 윤리도덕의식이 해이해진 것을 기화로 입당을 시켜준다느니 훈장을 신청해준다느니 하며 여성을 농락하는 것은 인간 이하의 행실이다. 이같은 야만적 행위가 위대한 수령의 언행과 결부돼 그대로 묵과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위의 강수봉의 증언은 대개 인민군 지휘관급이나 장교들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고, 일반 병사들은 전쟁 중에 점령 지역의 여성들을 괴롭히게 되는 것은 공식이다.


만주 빨치산들이 북한이라는 국가 권력을 장악한 뒤로는 국가 군대인 인민군을 창설하고, 군수품 조달은 약탈 대신 국가가 몰수한 재산이나 세금, 국영기업, 국영농장 생산품 등으로, 인력 조달은 납치 대신 징집으로 하게 된다. 징집되어온 여군들은 빨치산 시절 납치되어온 여성 대원들과 유사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오늘날 북한 여군들의 사정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늘날 북한의 여자 군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대표적인 계층으로, 상시적으로 성폭력이나 성희롱에에 시달리고, 그 중에는 진급이나 보다 좋은 보직을 위해 자발적으로 성상납을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한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북한 여군들은 전시 위안부나 다름없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참고 자료

함께 보기

* (일본군) 위안부
* (한국과 미군의) 위안부
* 공창제 (일본군 위안부 이전까지)
* 위안부
* 위안부 (사죄와 배상 문제)
* 일본의 사죄
* 제국의위안부
* 제국의위안부 사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