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해방 후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한 반면에 남한은 친일파가 득세하여 북한이 더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북한은 오늘날에도 최고 권력자의 말 한마디로 민초는 말할 것도 없고 최고위층 누구라도 고사총 세례를 받고 사라질 수 있는 나라이다. 최고 권력자의 고모부나 형도 이를 피해갈 수 없다. 이런 곳에서 해방 직후 혼란기에 친일파 청산이 정해진 법절차를 지켜가며 제대로 수행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지주 등 적대 계층과 정치적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는 명분으로 친일파 몰이를 했을 뿐이다. 소련군이 1946년 1월 초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할 때도 명분은 친일파라는 것이었다. 정권에 충성하는 자들은 친일파라도 다수 등용하고, 심지어는 일본인 기술자들까지 김일성 본인보다 더 많은 월급을 주며 고용하고 우대했다.

반면에 남한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야 친일청산 문제를 다룰 수 있었지만, 행위 자체가 국가가 생기기도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소급입법으로 처벌한다는 것이 법적으로도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반민특위 법안이 국회에 통과되자 법무장관이 대통령에게 소급입법과 단심 재판의 위헌성을 문제삼아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여 미흡하나마 정상적인 입법과 수사 및 재판을 거쳐 다소간의 청산이 이루어 졌다.[1][2]


북한의 친일청산 법령 :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북한의 친일청산에 대한 유일한 법령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3월 7일 가결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이다.[3][4]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해당하는 사람의 정의만 내려 놓고, 구체성도 없다. 해방 후 정권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반민족행위자에 포함시켰다. 권력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아무나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낙인 찍어 제거할 수단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친일파라도 정권에 협조하면 구제해 준다는 부칙까지 달았으니 자의적으로 적용되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이런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 법령을 만들어 놓고 권력자 자의로 집행했으니,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말만 있을 뿐, 누구를 어떻게 조사하고 재판을 해서 무슨 죄목으로 어떻게 처벌했다는 기록이 전무한 것은 당연하다.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1946. 3. 7,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다음에 해당되는 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이다.]

  1. 일제의 침략당시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먹은 매국노와 그 관계자.
  2. 귀족칭호를 받은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 일본 국회 귀족원과 중의원의 의원.
  3. 악질고관 (조선총독부 국장 및 사무관, 도지사, 도사무관, 도참여관).
  4. 일제경찰 및 헌병 고급관리 (경찰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 사상범 담임판사와 검사.
  5. 고등경찰 중 악질분자 (인민의 원한의 대상이 된 자).
  6. 고등경찰의 밀정책임자와 밀정.
  7. 해내외 민족운동자와 혁명투사들을 학살 또는 박해한 자와 방조한 자.
  8. 도회의원 및 친일단체 파쇼단체 (일진회, 일심회, 녹기연맹, 대의당, 반공단체 등) 간부와 악질분자.
  9. 군수산업의 책임경영자 및 군수품조달 책임자로 악질분자.
  10.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기관과 관계를 가지고 만행을 감행하여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으로 된 민간악질분자.
  11.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의 관공리로서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악질분자.
  12. 황국신민화운동을 전개하여 지원병, 학도병, 징용을 실시하는데서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한 악질분자.
  13. 8.15 해방 후 민주주의적 단체를 파괴하며 또는 그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거나 테러단을 조직하고 그것을 직접 지도한 자와 그와 같은 단체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 혹은 테러행위를 직접 감행한 자.
  14. 8.15 해방 후 민족반역자들이 조직한 반동단체에 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15. 8.15 해방 후 민족통일전선을 방해하는 반동단체의 밀정 혹은 선전원으로서 의식적으로 밀정행위를 감행한자와 사실을 왜곡하여 허위선전을 한 자.
  16. 부칙: 이상의 조항에 해당한 자로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


  • 출처: 김일성,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김일성저작집』2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113-114쪽.


김일성 교시 : 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데 대하여

김일성전집4 에는 김일성이 1946년 7월 31일 남조선에 파견되는 일군들과 한 담화 "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데 대하여"가 나온다.[5] 일제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라면 지주나 부유한 집안 출신이 대다수이고, 친일파로 몰리기 십상인 사람들이 대부분인데도 자신들이 필요하니 남한서 데려오라고 남파하는 공작원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조만식을 친일파로 몰아 고려호텔에 연금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 권력자의 자의로 진행되고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단적인 예가 일제하 독립운동 지도자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을 친일파로 몰아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한 것이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1891~1979) 중장을 숙소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모습. 현장에 조선인 대표로 일제하 독립운동 지도자이며 대중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던 조만식(曺晩植)이 입회하였다.

해방 직후 평양에 진주했던 소련군 25군의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1909~2006) 중좌는 당시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증언했다.[6][7][8] 이러한 조만식을 무시할 수 없어 소련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해서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1891~1979) 중장을 불러 항복을 받는 자리에 조선인 대표로 조만식도 입회하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에 협력을 거부하는 조만식을 결국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당시 소련군 소좌로 제25군 특별정치선전공작대인 '제7부'의 부책임자로 있었던 레오니드 바신(Leonid Vasin, 1915~2006)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북한주재 내무인민위원회(NKVD) 총책 아노힌 (Nikolai Anokhin, 1898~1974) 소장이 협력을 거부하는 조만식에게 '일제가 항복 직전 그를 석방한 것은 일본 첩자였기 때문'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신문과 방송이 이를 보도하게 한 후에 연금했다고 하였다.[9][10][11] 미군이 기록한 1948년 5월 남북협상차 방북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12]에도 "두 사람 모두 조만식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를 친일 반역자로 낙인찍어 재판에 회부할 서류들을 마련중으로 보였다 (Both reported that they did not see Cho Man Sick, against whom dossier is apparently being compiled, for possible trial, as died in wool pro-Japanese traitor.)"고 하였다.

이때 연금된 조만식은 다시는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하고, 6.25 때 국군과 UN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갈 시기에 도망 직전의 김일성 일당에게 다른 민족진영 지도자들 다수와 함께 총살 당했다.

북한의 역사서 「조선전사」의 현대편(23권) 「민주건설사 1」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조만식(曺晩植)과 그 일당을 비롯하여 지방정권기관의 일부 책임적 지위에 기어들었던 불순분자들은 사업을 고의적으로 태공(사보타주)하면서 인민정권 기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파괴하기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날뛰었다』고 기록했다.[13]

북조선 소련민정국장 대리 이그나티예프 대좌가 1947년 7월 스티코프 상장에게 올린 "정당 및 사회단체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총회 결과에 관한 조회보고"에도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온다.

민주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부당수 홍기주는 민주당의 전(前)지도자인 반동분자 조만식의 정체를 폭로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조만식이 미국 사절단장 브라운과 대화한 내용 및 조만식이 남녘, 특히 여운형과 연락관계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다음 홍기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만식 – 이 자는 친일파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9시 일본이 항복한 후에 일본 [도]지사는 평양에서 조만식을 자신에게 불러서 그에게 평양에 남아 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일본의 노선을 실행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조만식은 기꺼이 동의했으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선발하여 배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 서울에서는 아베 일본총독이 자신의 인장을 여운형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여운형과 조만식은 비밀리에 자기들끼리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지금 여운형은 어중간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입장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것 역시 반동적 정책입니다. 우리 당원들 중에서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입장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자들과는 단호하게 투쟁해야 하며 경각심을 높여야 합니다.”

민주당은 조만식이 1945년 11월 창당한 조선민주당을 말한다. 소련과 김일성은 조만식에 제동을 걸기 위해 소련군 88여단 빨치산 출신 최용건(崔庸健, 1900~1976)을 조만식의 제자라는 핑계로 민주당에 들여보내 부당수로 만든 후,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을 연금하고, 최용건이 당수가 되어 당을 완전히 접수하게 했다. 조만식을 친일파라 공격한 부당수 홍기주(洪箕疇)는 기독교 목사로 해방 직후 조만식이 위원장이던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의 교육부장이었으나[14],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 공식 출범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15]

탈북 작가 최진이의 북한 친일청산에 관한 증언

류석춘․김광동, 북한 친일(親日)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시대정신 2013년 봄호

북한을 대표하는 작가 양성기관인 김형직사범대 출신으로 1999년 월남한 탈북 작가 최진이는 북한의 친일청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해방이후 전 국민의 숙원인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 내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가로서의 승패가 달린 관건적 안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떠오르던 많은 정치인사들 중 누구보다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 김일성은 이를 자기 권력기반 형성에 완벽하게 이용하였다. 그 대표적 방법이 인구 70 %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에서 일제시기 땅마지기나 가지고 있던 자들을 우선 처벌하는 일이었다. 3천 평 이상 소유한 자는 지주, 천오백 평부터는 부농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땅을 무상 몰수하는 것과 동시에 본인들은 전부 타고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의 개인적 사정을 알 바 없는 낯선 고장 사람들은 국가가 ‘친일주구’ ‘역적’이란 딱지를 붙여놓은 추방자들을 심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맡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군중 히스테리의 제물로 고스란히 바쳐졌다. 군중의 열기가 고조되면 될수록 김일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급상승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인들을 ‘적대계급’ 증오사상으로 자극시킬 때 그것이 가져올 반사작용의 효과를 알았다.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분배해 준 자신에 대한 숭배열이었다. 김일성이 무상 분배한 땅은 ‘국가’의 이름하에 곧 압수될 정치 미끼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얼마안가 나라에 땅을 몰수당하고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지주의 머슴에서 수령의 노예로 신분이동을 하였다.”

북한의 철저한 친일청산이란 소비에트(soviet)화를 합리화시키고 나아가서 북한을 공산주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가혹한 전체주의 공산혁명에 다름 아니었다.[3]


브라이언 마이어스 동서대 교수의 견해

브라이언 마이어스 (Brian Reynolds Myers, 1963 ~ )는 북한 전문가로 부산 동서대 교수이다.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서 북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김일성 치하의 문화에 대한 개척적인 연구라 할 만한 『한설야와 북한문학(Han Sorya and North Korean Literature)』을 출간했다.

북한에 친일파가 없었다고 남한 좌파와 미국의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해방 후 평양으로 이주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일제와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소설가 김사량(金史良, 1914~1950)처럼 특히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몇몇 인물들은 사실상 서울에서 쫓겨났고,[16] 북쪽은 그런 협력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1981년에 북한에서 발행된 한 역사책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 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오랜 인테리들의 혁명성과 애국적 열의를 굳게 믿으시고 그들을 새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라는 부분이 나온다.[17] (김일성 형제도 중국에서 일본군의 통역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8]
“북한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중국이나 동유럽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에 더 가깝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은 친일정권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김일성 치하의 북한문화를 연구하면서 확인했다. 김일성은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보다 친일 인텔리를 환영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김일성은 친일 인텔리에게 정부의 고위직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우상화작업을 하게 했다. 일제가 해왔던 것처럼 히로히토와 같은 우상화 작업을 해나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상화에 동원한 수사(修辭)를 그대로 빌려왔다.”[19]


"김일성 장군의 노래" 작사한 이찬(李燦)은 친일 시인

이찬(李燦)이 1944-01-19 매일신보에 실은 친일시 〈송출진학도(送∙出陣學徒)〉

북한에도 애국가가 있지만 거의 불리지 않고, 남한의 애국가 역할을 하는 노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이다. 이 노래의 작사가 이찬(李燦, 1910 ~ 1974)은 친일 시인으로 일제 말에 〈송출진학도(送∙出陣學徒)〉등의 친일 시를 썼다.

북한에서 고위직인 문화성 부상, 민족예술극장 총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극작가 겸 작가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은 일제시대에 조영출(趙靈出)이란 이름으로 대중가요 작사를 많이 하였는데, 친일 가요가 많고, 친일 작품도 많이 썼다.

북한은 일제 통치의 수혜자

일제는 중국침략의 후방 기지인 북한 지역에 수많은 중화학 공업 시설과 발전 시설 등을 건립한 반면에 남한 지역은 농업과 경공업을 위주로 하도록 했다. 해방이 되자 북한은 조선말에는 없던 일제가 지은 수많은 공장, 발전 시설들을 확보하여 큰 혜택을 누리게 되지만, 남한은 그런 것이 없어 북한보다 훨씬 낙후한 상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남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일제 통치의 혜택을 누렸다.

북한의 일본인 기술자 특별 대우

북한은 일제가 지은 공업시설들을 가동하기 위해 다수의 일본인 기술자를 잔류시키고, 특별 대우를 했으며, 이들을 위해 일본어로 강의하는 학교, 일본어 신문 발간 등을 허용하였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친일파’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본인 기술자들도 활용하였다. 해방 후 북한은 거대한 공장을 자체적으로 가동하기에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일본인 기술자들의 귀국마저 중지시키고 강제로 일을 하게 했다. 그리고 북한 기술자들로 하여금 기술 이전을 받도록 조치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868명이나 되었고 1947년에는 405명이 되었다. …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김일성)이 4,000원, 동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 일반 사무원이 800~1,00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좋은 대우를 해 주었는가. … 흥남공장에서는 일본인 기술자 콘키치(昆吉朗)를 ‘노력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20]


북한 정권에 참여한 친일파

엄연한 사실은, 초기 김일성 정권에는,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부주석, 일본군 통역), 장헌근(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일본 중추원 참의), 강양욱(김일성의 외종조, 목사, 일제 도의회 의원). 이승엽(사법상, 일제 시 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정국은(문화선전성 부상, 아사히신문 기자), 김정제(민족보위성 부상, 일제 양주군수). 조일명(문화선전성 부상, 일제 시 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홍명희(부수상, 일제 시 ‘임전대책회의’ 가입), 이활(초대 공군사령관,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 허민국(인민군 9사단장,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 등 허다한 친일 경력자들이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 사법국장 최용달(崔容達) 아래에서 검사총장을 지낸 한낙규(韓洛奎)는 1939년 만주 고등문관 채용고시에 합격하고 봉천(奉天) 지방법원에서 판사를 했다.[21]

일본군 출신 조종사들이 북한공군 창설에 대거 참여

"6·25 때 한국 공습한 야크기 조종사들은 거의가 일군 조종사 출신들"
일제 시대 때 전투기 조종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북한 공군(空軍) 창설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북한 공군(空軍) 창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李活(이활).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자비(自費)를 들여 조종술을 배운 뒤 일본 해군에 촉탁신분으로 들어가 전투기를 몰았다. 소년항공병학교 출신으로는 이흥부, 박경옥씨 등이 참여하였다. 나중에 인민군 9사단장으로 가는 허민국은 일본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공군사단장까지 오른 서주필은 윤흥렬씨의 항공병학교 동기생인데, 6.25 전쟁 때 미군(美軍) B-29기도 격추시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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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북한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영주는 김일성의 동생인데, 일제 시대에 일본군의 보조원(통역)으로 근무했던 이다. 한국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강양욱(康良煜, 1902~1983)은 일제하(日帝下) 도의원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외삼촌[정확히는 외조부 강돈욱의 6촌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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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 시절 금강산에서 남북간의 접촉이 있었을 때 북한의 한 고위간부가 사석(私席)에서 한국측 모 인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요사이 남한에서 친일파를 새삼 거론하던데 이해를 할 수 없어요. 김일성 주석님은 친일파였던 사람도 뉘우치면 다 받아들여 조국 건설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김일성 일족의 일본 사랑

해방 직후 김일성은 집에 고바야시 카즈코(小林和子)라는 일본인 여성을 식모로 두었다. 고바야시는 일본으로 돌아와 1970년에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글을 썼다.[22][23]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일본군에 입대하여 통역 일을 했다.

아들 김정일은 일식을 좋아하여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 1947~ )를 장기간 데리고 있었다. 또 친일파 재일교포였던 고경택(高京澤)의 딸 고용희(高容姬, 1953~2004, 고영희로 알려짐.)와 오랜 기간 동거하면서 김정은, 김여정 등을 낳았다.[24]

김정일의 장남으로 동생 김정은에 의해 독극물로 살해 당한 김정남은 일본에 몰래 출입하다 신원이 드러나 공항에서 잡혀 망신을 산 적도 있고, 이 때문에 후계 다툼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약과에 지나지 않고, 무엇보다도 북한의 김일성 일족을 신격화한 통치체제 자체가 일제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북한이 친일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일각의 주장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북한의 통치 방식과 사회 제도는 오히려 억압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일본식 통치 방식보다 더하다는 지적이 많다.[25]

북한과 소련의 남한에 대한 친일파 공격과 미군정청의 반박 기록

아래 미군정 문서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적반하장식 언사에 대해 비판하는데, 그 중에는 남한에 대한 친일파 공격도 있고, 이에 대한 미군정청의 반론도 나온다. 공산주의자들의 남한에 대한 친일파 공격은 역사가 오래된 것이며, 적반하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월북한 친일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Choi Sung Hi, 1911~1969)를 중용한 것, 소련 군정 핵심인사 G. M. Balasanov(1903~1976)가 일본인 하인을 고용한 것 등에 대한 비판도 있다.

Characteristic of the Communist-dominated Parties of Korea RG 332, USAFIK,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Box No. 69, U.S.-U.S.S.R. 2nd Year: Efforts to Reopen Commission, 1947 Moscow thru U.S.-U.S.S.R.: Transcripts AG Radio, May 1947 (4 of 4)

[p.3] Again, although the communists in both zones have sniped continually at alleged pro-Japanese Koreans employed by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the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has not hesitated to include in its membership Choi Sung Hi, Korean dancer notorious for her collaboration with the Japanese. Furthermore, although the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has labored to remove all vestiges of Japanese influence in the schools of South Korea, North Korea has continued to maintain instruction in the Japanese language for the children of Japanese technicians remaining in the zone. Moreover, while the colleagues of the Soviet Delegation have thundered against Japanese collaboration, Counsellor G. M. Balasanov has employed Japanese servants in his home at Pyongyang. (Parenthetically one might wonder at the uproar if Dr. Arthur Bunce of the American Delegation hired a Japanese servant.) The truth is that all the Communist agitation about pro-Japanese is so much eye-wash. Under the Soviet system both Japanese and pro-Japanese Koreans can be used if they benefit to party. Thus many Japanese technicians have been retained and evidently treated well in North Korea for a dual purpose : (1) to profit from their skill until satisfactory Korean replacements can be obtained; and (2) to be indoctrinated with Communism for possible employment as Soviet agents upon repatriation to Japan.


북한의 항일운동가 청산

북한이 실제로 철저히 청산한 것은 친일파가 아니라 항일운동가들이다. 처음부터 북으로 간 사람들은 대부분 좌파들이지만 엄혹한 일제시대에도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김일성 치하에서는 김일성 직계 만주 빨치산 출신만 제외하고 거의 모두 숙청 당했다. 박헌영 등 남로당파와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모두 다 숙청으로 처형 당하거나 아니면 투옥 또는 오지 추방을 당했다. 최근 남한에서 미화에 열 올리고 있는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 1898~1958)도 숙청의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다.

조만식 등 북한의 민족 진영 독립운동가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김규식, 정인보 등 6.25 때 남한에서 납치해간 독립운동가들도 많은데, 납치되어 가던 도중에 작고한 분들도 많고, 대부분 비참한 만년을 보냈다.

친일파 논란 유감

친일파 후손은 떵떵거리며 사는 반면에 독립운동가 후손은 가난에 찌들리고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좌파들이 흔히 하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떵떵거리며 잘 사는 친일파 후손이 없지는 않지만 밤낮 친일파 타령하는 좌파들 중에 더 많다는 것도 밝혀져 있다. 친일파 타령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조상은 일제시대에 무슨 독립운동을 했는지 먼저 밝히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북한으로 간 이름있는 항일운동가 대부분은 숙청 당하고, 후손들도 비참해진 반면에, 남한에서는 독립운동가를 발굴 서훈하고 직계 자손들을 지원하는 일을 건국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물론 전국민이 가난하던 시절 전쟁까지 겪는 통에 처음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당한 수준이 될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인 탄압의 주범은 일본인 들이고, 그에 비하면 조선인 친일파들에 의한 피해는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주범인 일본인들은 고히 본국으로 보내주고, 남은 조선인들끼리 소모적인 친일파 논쟁을 끝없이 벌인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나라의 기틀도 제대로 잡히지 않고 해야 할 일은 많은 건국 초기에 조금이라도 친일 의심이 가는 사람은 다 잡아들여 조사하고 재판하다 보면 부족한 검찰, 경찰, 법조 인력들이 수년간 거기에만 매달릴 수 밖에 없어 다른 치안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김구신익희 같은 분들은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는데 전국민을 모두 조사하고 처벌했으면 만족했을 것인가?[26][27]

Mark Gayn (1909~1981),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

[November 7, 1946 SEOUL] With characteristic bluntness, Kim Koo said: "Practically everyone in Korea is a collaborator. They all ought to be in jail."

[1946년 11월 7일, 서울] 김구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어조로 "한국 내에 있은 사람은 사실상 모두 일제 협력자다. 그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이 해(1945년) 12월 중순의 일이다.... 술기운 탓도 있겠지만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28]
  • Mark Gayn은 Chicago Sun 지의 일본 동경 지국장으로 1946년 가을 취재차 한국에 와서 김구, 이승만 등도 만났었다. 당시 일들이 나오는 《Japan Diary》는 김구 생전에 출판되었다.


광기어린 친일파 마녀 사냥의 피해자

국가보훈처는 문창극 전(前) 국무총리 후보자가 "독립유공자 문남규(文南奎) 선생의 손자"가 맞는 것으로 확인하였다.[29][30]
독립운동하다 순국(殉國)한 분의 손자를 친일파로 몰아 총리 임명을 막은 사람들은 평소에 "친일파 후손은 떵떵거리고 살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은 배곯는다"는 지론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해방 직후 조만식을 친일파로 몰아 연금했다 총살한 북한보다 지금의 남한이 별로 나을 바가 없다.

참고 자료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숙청 북한에서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북한(北韓)》 2002년 4월호(통권 제364호) , 24~30쪽, 전체 7쪽 (북한연구소)

함께 보기

각주

  1. 反民族行爲處罰法 / 反民族行爲特別調査機關組織法 / 反民族行爲特別裁判部附屬機關組織法 국사편찬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2. 반민특위 조사 기록 국사편찬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3. 3.0 3.1 류석춘․김광동, 북한 친일(親日)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시대정신 2013년 봄호
  4. 김창순(金昌順, 1920~2007), 북연칼럼 : 친일파 청산,북한에서는 어떻게 되었나 《북한(北韓)》 1995년 5월호(통권 제281호) , 40~46쪽, 전체 7쪽 (북한연구소)
  5. <북한관련자료1>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때 대하여(김일성전집4)
  6. 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49
  7.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 위클리 조선 2011년 11월 21일
  8.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9.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
  10. 「날조된 英雄(영웅)」金日成(김일성) / 바신, 레오니드 新東亞(신동아) 398호 (1992.11) pp.486-501
  11.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1) 연합뉴스 1992-10-01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2) 연합뉴스 1992-10-01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3) <完(완)> 연합뉴스 1992-10-01
  12. 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김구와 김규식의 공동성명) 문서번호 501.BB-Korea/5-648, 발신 JACOBS, 수신 국무장관, 날짜 1948-05-06.
  13. 청소년을 위한 현대사 강좌 (3) 북한의 親日派 청산 : 金日成, 공산당 협력자는 과거 묻지 않고 수용…親日派 인텔리의 국가건설 기여 높이 평가 월간조선 2006년 2월호
  14. 신편 한국사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 해방 후 북한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수립과 소련군 주둔 / (2)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성립과 개편 우리역사넷
  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홍기주 평정서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16. '김사량은 ... 친일작가이기도 했다'-가와무라 미나토, 문학평론가
  17. 『조선전사』 현대편(23편) '민주건설사 1'
  18. B. R. 마이어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Part 1 북한의 문화사 : 소련 점령, 1945~1948년
  19. (저자 인터뷰) “북한은 인종론에 기초한 극우정권 친일파 우대,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했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저자 B.R. 마이어스 [주간조선 2186호] 2011.12.19
    <김관후의 4·3칼럼> (51) 계엄선포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역임한 이범석 제주의 소리 2015년 08월 31일
  20. 오원철, 1999. ‘한국형 경제건설 제7권’Pp. 303-4
  21. 김두식저, "법률가들 -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 / 북한지역의 초창기 법원과 검찰 (창비 2018-11-20)
  22. 小林和子(旧姓:萩尾) 著,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 : 奥村芳太郎編, 在外邦人引揚の記録 ― この祖国への切なる慕情, (毎日新聞社, 1970)에 수록되어 있다.
  23. 박갑동(朴甲東, 1919~ ),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160) 중앙일보 1990.11.12 종합 9면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p.397
  24. 김정은 外家는 탐라 혈통… 고영희(김정은 생모) 사촌 지금도 제주 살아 프리미엄조선 2014.01.28
  25. 김부자실체: 김일성 부자의 일제 계승 자유아시아방송 (RFA) 2008-02-01
  26. Mark Gayn, 《Japa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1948) p.433
  27. 이경남(李敬南),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 (서울, 東亞日報社, 1981) p.329
  28. 《독립을 향한 집념(執念) : 고하 송진우 전기(古下宋鎭禹 傳記)》 (東亞日報 社, 1990년 5월) p.238 에는 당시 이런 발언이 오간 상황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29. 보훈처 "문창극 前 총리후보자, 독립유공자 후손 맞다" 조선닷컴 2015.10.22
  30. 문남규(文南奎, 1890~1920)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