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마 싯다르타를 교조로 삼는 종교이다.

불교의 목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불교에서는 일체개고 인생의 모든 것은 고통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물며 우리가 즐거워 하는 무언가 그것조차 일종의 고통으로 본다.

인생은 곧 고통이기에 계속 태어나야 하는 윤회도 고통이고 저주이다.

이 윤회의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 이것을 열반 해탈 등등이라고 말한다.

고집멸도라고도 하는데

인생이 고통스러운 이유를 불교에서는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편하게 있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고, 예쁜 여자랑 있고 싶고 등등 따위이다.

이런 집착 때문에 인생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다. 그래서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윤회의 굴레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을 상좌부불교에서 8가지 바른 길 팔정도라고 하고 대승에서는 6바라밀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냥 절에 가서 복을 빌고 소원성취를 바라는 신도들의 풍토가 많아 흔히들 기복불교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일본에서는 단가제도로 인해 불교가 장례를 도맡아하게 되고, 불교=장례처럼 인식이 되서 장례불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살아 있을 때 지금처럼 동영상이나 녹음기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그가 직접 한 말이고 아닌 지는 추측만 할 뿐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이건 사실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등등 마찬가지다.

인도는 기록문화도 아니었고 구전문화 였기에 싯다르타가 언제 죽었는지 즉 입멸시기도 학자에 따라 학설에 따라 몇 백년씩 차이가 난다.

서양 일부 학자는 싯다르타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학설을 펴기도 했는데 아쇼카왕의 사리탑(이 지역은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기에 세금혜택을 주겠다고 하는 탑)이 발견 되면서 어느정도는 실존여부에 대한 논란이 불식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다 아쇼카왕 시기도 싯다르타 살아생전 완전한 당대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입멸후 최소 몇백년 후에 뿅하고 기존 상좌부 불교에 반해서 나온 대승경전은 싸그리 싯다르타가 한 이야기가 아는 라는 대승비불설이라는 학설은 사실 불교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초창기 불경인 아함경이나 팔리어 경전 등도 어디까지가 싯다르타의 친설인지도 추측만 할 뿐 현재로서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와 불법을 의지하라 " 뭐 이런 유언을 하고 죽었다.

제자들이 슬퍼하고 있는데 제자인 누군가가 " 슬퍼 할 게 아니다 이제 우리한테 뭐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나"

이런 소리를 하는 걸 싯다르타의 제자 중 하나인 마하가섭이 듣고 이러다가는 부처님이 설하기 법이 사라지고 무엇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지 알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1차 결집이 이루어진다.

부처님 제자 중 아난이 부처님의 비서 였기에 항상 부처님 옆에 붙어 다녔고, 기억력 짱이었기에

아난이 먼저 제가 들은 바로는 부처님께서 어디에 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썰을 풀고 거기에 모인 부처님 제자 중에 이의가 없을 때 아 그건 부처님께서 하신 가르침 계율이 맞다 하고

서로 각자 부분 마다 암기 암송하게 했다.

이게 1차 결집이다.

거의 모든 불경에서 여시야문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부처님이 어디 계실 때 이렇게 시작하는 건 이런 연유에 의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