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만주국에서 간행되던 한국어 신문 만선일보(滿鮮日報)[1]에 1940년 4월 5회에 걸쳐 연재된 북한 김일성의 성장기이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 중일 때이며, 그 해 10월 23일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했다.

이 가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국립중앙도서관의 고신문 DB에서 검색해서 열람할 수 있다. 아래에 연재 5회 전문을 소개한다.

1회 : 1940년 4월 16일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一)

중학시대(中學時代)부터 적화(赤化)
○○운동(運動)의 父를 따라 백두산록(白頭山麓)을 전전(轉々)

만주사변이 발발된 이래로 통화성(通化省) 방면에 근거를 두고 다년간 각지 부락을 습격하야 주민의 금품과 식량을 략탈하야 통화성 오지 방면 주민을 괴롭게 하던 양정우(楊靖宇) 김일성(金日成) 최현(崔賢) 등 비적은 통화성 방면에서 일만군경(日滿軍警)의 철저한 토벌을 피하야 무송현(撫松縣) 방면으로부터 작년 四月 七일 밤에 길림성 화전현 대포시하(吉林省 樺甸縣 大蒲柴河) 조선인 집단 부락을 습격하고 다수한 금품을 략탈한 다음 동八일에 남하하야 간도성내안도현(間島省內安圖縣)으로 들어서 이래 금품 식량 의복 등을 약탈하야 오지 방면의 농민들을 괴롭게 하고 잇던 중 지난달에 이 여러 부대를 총지휘하고 잇던 총사령 양정우는 통화성 관하에 잠복중 정신대(挺身隊)인 최주봉부대(崔周奉部隊) ○○○명의 급격한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함은 기보한 바와 갓거니와 목하 백두산(白頭山) 후록에 근거를 두고 간도성내 각현 오지에 흩어져 있는 비적부대를 총지휘하고 잇는 김일성(金日成)(二九)의 가정과 그의 과거에 대하야 여러가지 풍설도 만헛스나 아직까지 여기에 대하야 자세한 것을 아지 못하야 누구나 궁금하여하는 문제이니만큼 기자도 수년동안 게속하야 각방면으로 조사중이던바 근일에야 비로소 자세한 것을 알게 되엿는데 대략 다음과 갓다.

김일성의 조부(祖父) 김봉현(金鳳賢)(七○)과 조모(祖母) 리반석(李盤石)(六七)의 사이에는 장남 형직(亨稷) 차남 형권(亨權) 三남 형록(亨祿)외 一녀를 두엇는데 김일성의 조부모는 지금도 생존중으로 三남 형록을 다리고 평남 대동군 고평면 금남리(平南 大同郡 古平面 今南里)에서 농업을 하야 근근이 호구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김일성의 부친인 형직은 十三세 때에 평양(平壤)서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숭실중학(崇實中學)에서 공부하다가 대정 八년 만세사건에 가담하야 중도 퇴학하고 랴(당?)국의 검거망을 피하야 만주로 건너와서 통화성림강현(通化省臨江縣)에 거주하며 약종상(藥種商)을 경영하야 생업을 계속하여가며 一방으로는 동지를 규합하야 ○○단을 조직하야 맹렬한 활동을 계속하엿섯다.

그러는 동안은 형직의 아우인 형권(亨權)도 형을 따라 림강현에 들어와서 형과 협력활동하엿고 모친 리반석도 아들을 따라 드러왔다. 그들의 운동이 표면화됨에따라서 중화민국 관헌들은 검거하랴하므로 이곳을 떠나서 장백현팔도구(長白縣八道溝)로 옴기여 약종상을 경영하며 또 그와가튼 운동을 계속하엿든 것입니다. 얼마되지 한어 이곳 관헌의 주목이 심하여지며 또다시 무송현왈랑진(撫松縣曰朗鎭)에 옴기여 역시운동을 게속하다가 몸이 극도로 쇠약하야 병그대로 사망하엿다.

김일성의 본명은 성주(誠柱)이엇는데 十三세 때에 무송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엿다. 그 학교는 선만인(조선인과 만주인) 공학하는 학교이엇슴으로 만주인 부호 가정의 학생을 친하여 가지고 돈을 어더서는 학용품 가튼 것을 사서 학생들에게 난호어(나누어) 주는 것을 일삼아 왔고 공부에 그리 열심하는 편은 아니엇스나 두뇌가 명석하고 총명하야 한 번 스처본 교과서라거나 책은 그 후에 력력히 기억하얏슴으로 졸업 당시의 성적도 우수하엿다 한다.
그 소학교를 졸업하고는 길림(吉林)으로 와서 여러 중학교에 전교하다가 나중에는 영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통학하엿는데 四학년 때에 담임교원이 중국공산당의 책임자이엇슴으로 그의 선전으로 말미아마 적화하기 시작하였다. ◇

그동안 일성이 삼촌 형권은 자기의 어머니인 리반석과 가티 안도현소사하(安圖縣小沙河)로 이주하야 동지인 박단석(朴旦石) 최효일(崔孝日) 성근학(成槿學)외 一명과 가티 권총을 휴대하고 함북지방에 나갓다가 검거되어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서 성근학 외一명은 도주하고 김형권은 병사하엿스며 최효일은 사형을 밧고 박단석은 만기 출옥하야 현재 모지에서 공작대에 종사하는 중이다. (間島支社 S記者)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