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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김종필은 유신을 거부하였다.  김대중 김영삼 등이 최규하 정부를 극한으로 몰고가지만 않았다면 최규하는 1년 과도기 정부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기에 1년만 참으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셋 중 한명이 거의 무조건 대통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김대중 김영삼이 조급함 나라보다는 집권욕심에 사로잡혀서 최규하를 극한으로 몰고 소요사태를 부추기는 바람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게 된 것이다.
 
공화당의 김종필은 유신을 부정하였다.  김대중 김영삼 등이 최규하 정부를 극한으로 몰고가지만 않았다면 최규하는 1년 과도기 정부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기에 1년만 참으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셋 중 한명이 거의 무조건 대통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김대중 김영삼이 조급함 나라보다는 집권욕심에 사로잡혀서 최규하를 극한으로 몰고 소요사태를 부추기는 바람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게 된 것이다.


참고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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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7일 (월) 02:31 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1979년 10.26이후 1980년 5월 17일 전국계엄까지의 시기를 좌익들은 서울의 봄이라고 말한다.


과도정부였던 최규하가 박정희 때 시국사범들이나 긴급조치로 구속된 정치인들이 죄다 사면복권 해 주면서, 좌익들이 마치 자기들 세상인냥 활개치던 시기를 말한다.


좌익 입장에서는 재세상 맞난듯 서울의 봄이었겠지만, 당시 정부 입장에서는 봄이 아니었다. 도리어 국가위기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권력은 무주공산 사태였고 김대중 김영삼이 배후로 학생소요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고, 북한의 남침위협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김대중 김영삼 등이 최규하를 완전히 핫바지로 보고 밀면 밀리는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유신잔당으로 규정 즉각 물러나라고 극한으로 몰아갔다. 최규하는 유신헌법에 의해 취임한 정부였기에 합법정부였다. 도리어 유신잔당 물러나라 라는 김대중 김영삼 등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이었다.


공화당의 김종필은 유신을 부정하였다. 김대중 김영삼 등이 최규하 정부를 극한으로 몰고가지만 않았다면 최규하는 1년 과도기 정부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기에 1년만 참으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셋 중 한명이 거의 무조건 대통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김대중 김영삼이 조급함 나라보다는 집권욕심에 사로잡혀서 최규하를 극한으로 몰고 소요사태를 부추기는 바람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게 된 것이다.

참고영상

https://www.youtube.com/live/RmA-Mbi0fsw?si=qx1jnvoniRlj_Dt2

https://www.youtube.com/live/1lKEJM8p1Ro?si=BqVCcTlQXpJBuDZ4